<조선 근대화와 해방의 두 갈래 길>
독립 세력 사이에는 장차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 국외의 어느 나라로부터 도움을 얻을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조선왕조의 무기력과 부패를 몸으로 체험한 모든 독립운동가들은 아예 입헌군주제를 거론도 하지 않았고, **민주공화제를 채택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것이 **1919년 4월 11일에 공포된 「대한민국임시헌장>이었다.
독립협회운동을 하다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이승만은 미국이 장차 세계문명을 주도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미국으로 간 *김규식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겉으로는 피억압민족의 독립을 지원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조선 같은 식민지의 독립에는 신경 쓰지 않는 강대국의 논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는 국제질서의 엄혹함과 조선의 불쌍한 처지를 절감하고, *미국의 이중성에 환멸을 느끼면서 식민지 독립에 우호적인 *소련에 기대를 걸었다.
공산주의 사상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신학문을 배운 *청년들, 특히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지식청년‘들이었다. 앞서 언급한 김산은 *조선인 유학생의 70퍼센트는 공산주의 동조자였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그들은 도쿄에서 이론을 배우고 중국에서 조직 행동의 전술을 배웠다.
러시아혁명에 성공한 소련이 압제받는 민족의 희망으로 떠오르자 국내의 공산주의 세력도 *마르크스레닌주의로 기울었다. 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가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상황을 목격한 조선의 지식청년들은 소련을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한 국가를 넘어서 **조선 독립의 가장 든든한 원조자로 인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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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지식청년들에게 소련은 계급 착취를 철폐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이었지만, 피압박민족인 조선의 독립운동을 실제로 지원했다는 점에서 든든한 우군으로 여겨졌다.
**지식청년들은 "독립이 되더라도 부자와 지주만이 잘사는 그런 독립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 농민, 그리고 구차한 사람도 함께 살 수 있는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염원으로 세계 공산주의 혁명의 본부인 코민테른의 지도를 따랐다.
1925년 4월 17일, 일제의 물샐틈없는 사찰과 감시를 피해 서울시내 한 식당에서 박헌영 · 김단야 조봉암 등 일단의 청년들이 조선공산당을 결성했다. 조선공신당은 대표를 모스크바에 파견하고, 6·10만세운동(1926)에 조직직으로 참여하는 등 활동을 시작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과 결성을 반복했다.
조선공산당은 노동자와 농민 조직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좌우합작을 추진했지만, 박헌영등 조직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국내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급기야 1928년 12월, 코민테른은 「조선의 혁명적 농민과 노동자의임무에 관한 테제(12월 테제)를 통해 조선공산당의 지부 승인을 취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청년들은 1930년대 말까지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는데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대중적인 영향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결국 3·1운동 이후 조선에는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가치 · 이념 체계가 민족해방의 대안으로 자리 잡았다.
유교 문화의 낙후성과 신분 차별에서 **희망을 찾지 못한 청년들은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서양에서 온 두 사상에 큰 기대를 걸었다.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모두 인간해방과 평등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신 앞에서의 평등, 구원의 평등을 표방한 기독교는 **전근대 신분질서를 비판하는 무기가 되었다. 사회주의, 특히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근대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계급적 모순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인간해방을 지향했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개인의 내적인 초월을, 사회주의는 현실 정치와 사회의 변혁을 해방의 길로 제시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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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소작인들의 고통을 완화할 수 있는 *토지혁명과 일제로부터의 *민족해방을 추진하는 데 주력했다. *1930년대 이후 *전시 총동원 체제가 본격화되면서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어려워지자 공산주의자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중국 혹은 소련 공산당의 일원으로 일제에 맞서 싸웠다.
한편 국내에 남은 공산주의 세력은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는데, 여운형은 자기들만 정통이라고 떠벌리면서 파벌 싸움에 머리 깨지는 줄도 모르던 공산주의자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1945년 8·15 해방 이후 박헌영 등 조선공산당 핵심 인사들과의 갈등은 이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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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은 다가오는데
세계 대공황으로 극심한 경제 위기에 빠졌던 1931년, 일본은 내부의 경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만주를 점령하고 꼭두각시 정권을 세웠다. 1937년에는 중국과 전면전을 시작했고, 대아시아주의를 표방하면서 제국 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식민지에시는 내선일체, 즉 조선인과 일본인의 조상이 같다는 논리로 동화 정책을 주진했다. 조선인의성을 모두 일본 성으로 바꾸도록 강요하는 한편, 조선인을 충실한 황국의 신민臣民으로 기르기 위한 의무교육을 계획했다.
조선 청년은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 나갔고, 여성은 근로정신대로 동원됐다. 징용·징병은 곧 죽음을 의미했으며, 처녀들이 근로 정신대에 동원되면 "식구들은 마치 죽은 사람 상사 지내듯이 통곡과 애통 속에 보냈다."
1930년대 후반, 조선의 지식인들과 개신교, 천주교 교단과 종교 지도자들은 일본의 전시 총동원 정책과 군국주의 침략전쟁을 지지했다. 천주교는 1939년 5월 14일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을 결싱했는데,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협력은 이 조직이 결성되기 전에도 미사 · 기도회 · 황군위문·국방헌금 등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천주교회의 유일한 기관지였던 『경향잡지』는 1941년 ‘국민총력란‘을 신설하면서 "신자들에게 국민의 의무를깨우쳐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종교도 국가의 혜택을 받고 있으므로 국기에 충성할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국민총력란을 신설한다"고밝혔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는 1925년 『교리교수지침서를 통해 신사참배를 이단 행위로 금지했지만, 1936년 5월 18일에 로마 교황정은 전주교 신자들에게 신사를 참배해도 좋다는 훈령을 내린다.
이어서 주일본 교황 사절인 마렐라 대주교는 한국 천주교회에 보내는 소위 「국체명징에 관한 감상을 통해시 교황청의 통첩을 따르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신사참배를 권장했다. 그러자 당시 종현성당 (명동성당) 보좌신부였던 노기남도 "신앙적인 아무런 가책 없그 신사참배를 행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신자들의 신사참배를 허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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