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반해 오늘날 독일의 체제는 하나의 시대착오이며 일반적으로 인정된 공리들에 대한 명백한 모순인데, 세계 전람회에 출품된 하찮은 *구체제는 여전히 자기 자신을 신뢰한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도 똑같은 착각을 요구하고 있다. 

오늘날의 독일의 체제가 자신의 *본질을 신뢰하고 있다면, 독일 체제는자신의 본질을 낯선 본질이라는 가상 아래 숨기고 자신의 도피처를 위선과 궤변에서 찾고 있는 것이 아닌가? 

현대의 구체제는 *현실적인 주인공들이 죽어버린 세계 질서를 연기하는 *희극배우일 뿐이다. 역사는 철저하고, 낡은 등장인물들을 무덤으로 보낼 때 많은 국면을 거쳐간다. 

**세계사적 등장인물의 마지막 국면은 *희극이다. 아이스퀼로스의 《결박된 프로메테우스》에서 한 번 비극적으로 죽은바 있는 희랍의 신들은 또 한 번 루키아누스의 《대화》에서 희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역사의 진행은 왜 이러한가? *인류가 즐겁게 그들의 과거와 결별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우리는 독일의 정치 세력들에게도 이 즐거운 역사적 숙명을 청구한다.

 현대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 자체가 비판 아래 놓이자마자, 그에 따라 비판이 진정으로 인간적인 문제들로 올라서게 되자마자, 비판은 독일의 현상태 외부에 있게 되거나 자신의 대상을 그 대상보다.
낮은 수준에서 붙잡게 될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산업, 일반적으로 부의 세계와 정치적 세계의 관계는 현대의 주요한 문제이 다. 독일인은 어떤 형태로 이 문제에 몰두했는가? 관세동맹, 보호무역 제도, 국민경제의 형태로 몰두했다. 

이때 독일주의는 인간에서 물질로 나아갔으며, 그에 따라 어느 날 아침 우리 독일의 면화 기사들과 철의 영웅들은 애국자로 변해 있었다.


14쪽


그러므로 독일에서는 독점에 대한 대외적 주권이 부여됨으로써 비로소 대내적 주권도 인정되기시작한다. 

그러므로 독일은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마무리짓기 시작한 작업을 이제야 추진하기 시작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 사람들이 그것에 **항거하여 이론적으로 소동을 일으키고 속박을 견디고 있는 낡고 부패한 상태가 **독일에서는 아름다운 미래의 떠오르는 아침 노을이라 환영받고 있지만, 이 미래는 간교한  이론에서 과감한 실천으로 감히 넘어가지 못하고 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는 문제가 정치 경제 또는 부에 대한 사회의 지배라고 언급되는 반면, 독일에서는 국민 경제 또는 국민에 대한 사유재산의 지배라고 언급된다.

그러므로 프랑스와 잉글랜드에서는 최후의 결과로까지 나아간 독점을 폐기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독일에서는 독점을 최후의 결과로까지 밀고 가는 것이 중요하다. 

앞의 경우에는 독점의 해소가 문제인데, 뒤의 경우에는 아직도 독점의 충돌이 문제이다. 이는 현대의 문제들이 독일에서 어떤 형식으로 전개되는가에 관한 하나의 풍부한 실례이며, 어떻게 해서 우리의 역사가 미숙한 신병처럼 진부한 역사들을 따라다니면서 연습해 보는 과제만을 아직까지 가지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실례이다.


15쪽

따라서 독일 전체의 발전이 독일의 정치적 발전을 넘
어서지 못한다면, 어느 한 독일인은 기껏해야 현대의 문제를 어느 한 러시아인의 문제에 관여할 수 있을 정도만큼만 관여할 수 있을 깃이다. 그러나 한 개인이 국민의 한계들에 속박되어 있지 않다 해도, 한 개인의 해방만으로 국민 전체가 해방되는 것은 더욱이나 아니다. 

희랍이 어떤 스키타이 인을 자기 나라의 철학자로 인정했다 해서 스키타이 민족 전체가 희랍과 같은 문화로 전진해 들어간 것은 결코 아니다.

다행히 우리 독일인은 스키타이 인이 아니다.

고대 민족들이 그들의 *이전의 역사를 *상상 속에서, 즉 *신화 속에서 체험하였듯이 우리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미래의 역사를 생각속에서, 즉 *철학 속에서 체험하였다. 

따라서 우리들은 역사적으로는 현대와 함께 살아가고 있지 않으면서도 철학적으로는 현대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독일 철학은 독일 역사의 관념적 연장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우리의 실질적인 역사의 미완성작이 아니라 우리의 관념적 역사의 유작, 즉 철학을 비판한다면 우리들의 비판은 현대가 말하고 있는 바로 그 문제의 한가운데 서 있다.; 그것이 문제다. 

선진 국민들의 경우에서는 현대의 국가 상황과 실천적으로 결렬된 것이, 이 상황들 자체가 아직 한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독일에서는 이 상황들의 철학적 반영의 *비판적 결렬이다.

*독일의 법철학과 국가철학은 공식적이고 현대적인 현재와 같은 급으로 서 있는 유일한 독일 역사이다. 따라서 독일 민족은 자신의 이러한 꿈의 역사를 자신의 눈앞의 상황과 결부짓고, 그 후 눈앞의 상황들뿐만 아니라 동시에 그 상황의 추상적인 지속도 비판에 부쳐야 한다.


16쪽

 독일 민족의 미래는 그 자신의 실제적인 국가 및 법의 상황들 에 대한 직접적인 부정에 제한될 수 없고, 그 자신의 관념적 국가와 법의 상황들의 직접적인 완성에 제한될 수도 없다. 

독일 민족은 그 자신의 실질적 상황들에 대한 직접적 부정을 관념적인 상황들 속에 가지고 있으며, 그 자신의 관념적 상황들의 직접적인 완성을 이웃 국민들에 대한 관조 속에서 거의 또 다시 연명시켰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하게도 독일에서 실천적 당파는 철학의 부정을 요구한다.

 이 당파의 부당함은 이러한 요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당파가 진정으로 완성하지 못했고 또 완성할 수도 없었던 요구에 머물러 있는 데에 있다. 이 당파는 철학을 외면하면서 철학에 대해 분노에 가득 찬 상투적인 말들을 중얼거리면 철학의 부정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당파는 시야의 협소함 때문에 철학을 독일의 현실 영역에서 생각하지 못하며, 철학이 심지어 독일적 실천과 그것에 봉사하는 이론들 아래에 있는 것이라 착각하고 있다. 당신들은 사람들이 현실적 삶의 새싹과 관계 맺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당신들은 독일 민족의 현실적 삶의 새싹이 지금까지 독일 민족의 *두개골 속에서만 자라왔다는 것을 잊고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당신들은 철학을 실현하지 않고서는 철학을 폐기할 수 없는 것이다.

철학에서 생겨난 이론적인 정치적 당파는 정반대의 요인들만 가진 채 똑같은 부당함을 저지른다.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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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
우리 두 사람은
해와 달,
바다와 육지처럼
떨어져 있는 거야.

우리의 목표는
상대의 세계로 넘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식하는 거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고
존중해야 한단 말이다.


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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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에 비유하자면,
신화는 태양 아래 어떤 풍토에서건 어떤 장소에서건
잘 자라는 나무이다.

원죄는 어디에나 있는 이상,
구원도 어디에나 있고
신화도 어디에나 있다.

영원한 것보다 세계적인 것은 없다.


- 샤를 보들레르, <리하르트 바그너와 파리의 ‘탄호이저‘>
; 이진성, 그리스 신화의 이해, 뒷표지


 1. 신화란 무엇인가?


모든 민족은 신화를 갖고 있다. **고대인들은 세계와 사물이 생겨나 존재하는 이유를 *초자연적인 존재나 *강력한 신들의 **‘이야기‘를 통해 설명했다.

**세계와 사물에 대한 *궁금증을 초자연적인 존재나 신들을 통해 풀어낸 이야기가 곧 신화이다. 

사람의 경우로 말하자면, 신화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에 해당된다. 자신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궁금해하는 아이에게 엄마 는 자신의 배꼽을 가리키며 아이가 태어난 여정을 들려준다. 그 설명은 논리적이지 않지만 감성적이며 피부에 와 닿는 ‘이야기‘로 펼쳐진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는 그 이야기의 진실을 알게 되지만, 진실을 알고 나서도 그 이야기는 평생 기억하게 되고 나중에 자신의 아이에게도 똑같은 이야기를 들려주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계와 사물에 대한 궁금증을 풀기 위해 세계의 모든 민족들으 자신들의 언어로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초자연적인 존재들이 수1적인 존재들이 주인공이 그 이야기들은 오늘날의 논리적이거나 과학적인 설명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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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어머니가 갑자기 무언가에 대한 욕망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배우고 싶어 했다.

그건 그녀가 아이였을 때 무언가를 배우면서
자기 자신에 관해 느꼈기 때문이었다.


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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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근대화와 해방의 두 갈래 길>


독립 세력 사이에는 장차 어떤 나라를 만들 것인지, 국외의 어느 나라로부터 도움을 얻을 것인지를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조선왕조의 무기력과 부패를 몸으로 체험한 모든 독립운동가들은 아예 입헌군주제를 거론도 하지 않았고, **민주공화제를 채택해야 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것이 **1919년 4월 11일에 공포된 「대한민국임시헌장>이었다.

 독립협회운동을 하다가 기독교로 개종하고 미국으로 망명한 *이승만은 미국이 장차 세계문명을 주도할 것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와 함께 미국으로 간 *김규식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가 *겉으로는
피억압민족의 독립을 지원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조선 같은 식민지의 독립에는 신경 쓰지 않는 강대국의 논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그는 국제질서의 엄혹함과 조선의 불쌍한 처지를 절감하고, *미국의 이중성에 환멸을 느끼면서 식민지 독립에 우호적인 *소련에 기대를 걸었다.

공산주의 사상을 가장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신학문을 배운 *청년들, 특히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지식청년‘들이었다. 앞서 언급한 김산은 *조선인 유학생의 70퍼센트는 공산주의 동조자였다고 추정하기도 했다. 그들은 도쿄에서 이론을 배우고 중국에서 조직 행동의 전술을 배웠다.

러시아혁명에 성공한 소련이 압제받는 민족의 희망으로 떠오르자 국내의 공산주의 세력도 *마르크스레닌주의로 기울었다. 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가 제국주의 열강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루어지는 상황을 목격한 조선의 지식청년들은 소련을 공산주의 혁명에 성공한 국가를 넘어서 **조선 독립의 가장 든든한 원조자로 인식했다.


40-1쪽

<조선 근대화와 해방의 두 갈래 길>


조선의 지식청년들에게 소련은 계급 착취를 철폐했다는 점에서도 매력적이었지만, 피압박민족인 조선의 독립운동을 실제로 지원했다는 점에서 든든한 우군으로 여겨졌다. 

**지식청년들은 "독립이 되더라도 부자와 지주만이 잘사는 그런 독립이 아니라 모든 노동자, 농민, 그리고 구차한 사람도 함께 살 수 있는 독립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염원으로 세계 공산주의 혁명의 본부인 코민테른의 지도를 따랐다.

1925년 4월 17일, 일제의 물샐틈없는 사찰과 감시를 피해 서울시내 한 식당에서 박헌영 · 김단야 조봉암 등 일단의 청년들이 조선공산당을 결성했다. 조선공신당은 대표를 모스크바에 파견하고, 6·10만세운동(1926)에 조직직으로 참여하는 등 활동을 시작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과 결성을 반복했다. 

조선공산당은 노동자와 농민 조직화에 심혈을 기울이고 좌우합작을 추진했지만, 박헌영등 조직 지도부가 체포되면서 국내에서 제대로 활동할 수 없었다.
급기야 1928년 12월, 코민테른은 「조선의 혁명적 농민과 노동자의임무에 관한 테제(12월 테제)를 통해 조선공산당의 지부 승인을 취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 청년들은 1930년대 말까지 적극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했는데 일제의 강력한 탄압으로 대중적인 영향력을 확보할 수 없었다.
***결국 3·1운동 이후 조선에는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가치 · 이념 체계가 민족해방의 대안으로 자리 잡았다.

유교 문화의 낙후성과 신분 차별에서 **희망을 찾지 못한 청년들은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서양에서 온 두 사상에 큰 기대를 걸었다.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모두 인간해방과 평등 사상에 기초를 두고 있다.

**신 앞에서의 평등, 구원의 평등을 표방한 기독교는 **전근대 신분질서를 비판하는 무기가 되었다. 사회주의, 특히 마르크스레닌주의는 근대 자본주의가 안고 있는 **계급적 모순을 넘어서는 근본적인 인간해방을 지향했다. 다시 말해 기독교는 개인의 내적인 초월을, 사회주의는 현실 정치와 사회의 변혁을 해방의 길로 제시한 것이다.


41-42쪽

<조선 근대화와 해방의 두 갈래 길>


그래서 조선의 공산주의자들은 인구의 대다수를 차지하던 소작인들의 고통을 완화할 수 있는 *토지혁명과 일제로부터의 *민족해방을 추진하는 데 주력했다. *1930년대 이후 *전시 총동원 체제가 본격화되면서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어려워지자 공산주의자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중국 혹은 소련 공산당의 일원으로 일제에 맞서 싸웠다.

한편 국내에 남은 공산주의 세력은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는데, 여운형은 자기들만 정통이라고 떠벌리면서 파벌 싸움에 머리 깨지는 줄도 모르던 공산주의자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1945년 8·15 해방 이후 박헌영 등 조선공산당 핵심 인사들과의 갈등은 이때부터 예견된 일이다.


46쪽

<조선 근대화와 해방의 두 갈래 길>

해방은 다가오는데

세계 대공황으로 극심한 경제 위기에 빠졌던 1931년, 일본은 내부의 경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만주를 점령하고 꼭두각시 정권을 세웠다. 1937년에는 중국과 전면전을 시작했고, 대아시아주의를 표방하면서 제국 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식민지에시는 내선일체, 즉 조선인과 일본인의 조상이 같다는 논리로 동화 정책을 주진했다. 조선인의성을 모두 일본 성으로 바꾸도록 강요하는 한편,
조선인을 충실한 황국의 신민臣民으로 기르기 위한 의무교육을 계획했다. 

조선 청년은 징집되어 전쟁터로 끌려 나갔고, 여성은 근로정신대로 동원됐다. 징용·징병은 곧 죽음을 의미했으며, 처녀들이 근로 정신대에 동원되면 "식구들은 마치 죽은 사람 상사 지내듯이 통곡과 애통 속에 보냈다."

 1930년대 후반, 조선의 지식인들과 개신교, 천주교 교단과 종교 지도자들은 일본의 전시 총동원 정책과 군국주의 침략전쟁을 지지했다. 천주교는 1939년 5월 14일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을 결싱했는데, 일제의 침략전쟁에 대한 협력은 이 조직이 결성되기 전에도 미사 · 기도회 · 황군위문·국방헌금 등의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천주교회의 유일한 기관지였던 『경향잡지』는 1941년 ‘국민총력란‘을 신설하면서 "신자들에게 국민의 의무를깨우쳐주어야 할 필요가 있다. 종교도 국가의 혜택을 받고 있으므로 국기에 충성할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국민총력란을 신설한다"고밝혔다. 또한 한국 천주교회는 1925년 『교리교수지침서를 통해 신사참배를 이단 행위로 금지했지만, 1936년 5월 18일에 로마 교황정은 전주교 신자들에게 신사를 참배해도 좋다는 훈령을 내린다.

이어서 주일본 교황 사절인 마렐라 대주교는 한국 천주교회에 보내는 소위 「국체명징에 관한 감상을 통해시 교황청의 통첩을 따르는데 그치지 않고 적극적으로 신사참배를 권장했다. 그러자 당시 종현성당 (명동성당) 보좌신부였던 노기남도 "신앙적인 아무런 가책 없그 신사참배를 행할 수 있게 되었다"면서 신자들의 신사참배를 허락했다.

4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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