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와 인간의 탄생>


바다도 대지도 만물을 덮고 있는 하늘도 생각나기 전 자연은 세상 어디서나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것을 카오스라고 불렀는데, 그것은 원래 그대로의 정돈되지 않은 무더기로 생명 없는 무게이자 서로 어울리지 않는 사물들의 수많은 씨앗들이 서로 다투며 한곳에 쌓여 있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대지와 바다와 대기가 그곳에 있기는 했으나
대지 위에 서 있을 수 없었고,
바닷물에서 헤엄칠 수 없었으며,
대기에 빛이 없었다.
**그 어떤 것도 제 모양을 띠지 못했다.

모든 것은 서로에게 방해만 되었으니, 하나의 무더기 안에서
찬 것은 더운 것과,
습한 것은 메마른 것과,
부드러운 것은 딱딱한 것과,
무게가 없는 것은 무게가 있는 것과 싸웠던 것이다.

이러한 분쟁을 **어떤 신 또는 더 나은 자연이 조정했다.

그는 하늘에서 대지를,
대지에서 바닷물을 떼어놓고,
짙은 대기에서 맑은 하늘을 떼어놓았다.

그는 이것들을 가려내고 눈먼 무더기에서
풀어준 다음 서로 다른 공간을 주며 서로 화목하게 지내게 해주었다.


2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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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뤼크 고다르, <사랑과 경멸>>


랑 감독이 ‘오디세우스‘의 필름을 보면서 말한다.

"자, 보십시오. 여기서 우리는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대항하여 투쟁하는 개인을 봅니다. 이것은 고대 그리스 시대의 전형적인 문제이지요.
이것은 결국 *신에 대한 투쟁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프로메테우스의 투쟁이고, *오디세우스의 투쟁입니다."

여기서 랑 감독이 말하는 **개인 indivisual과 **상황 circumstance의 **변증법은 **그리스 신화와 서사시, 비극의 기본 틀이다.

이 고대 이야기들에서 상황은 주로 신에 의해 설정된다. 구체적으로 신탁의 내용이 어절 수 없는 상황으로 드러나고, 각 개인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피하려 하거나 아니면 맞서 싸우기도 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개인은 곧잘 신탁의 노리개가 되고, 신탁의 내용은 개인을 비극으로 몰고 간다.


71-2쪽


ref> 신화라는 말은 영어 myth를 번역한 것인데, 이 말은 그리스어 뮈토스 mythos에서 유래한다. 뮈토스는 ‘이야기‘라는 뜻인데, **신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사실 신화라는 술어는 부적절하다. ‘신들의 이야기‘라는 선입견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관습상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편재하는 신화, 장 뤼크 고다르, 사랑과 경멸 2>



제작자 프로코시와 랑 감독 둘 사이는 냉담한데, 프로코시는 신들이 등장하는 장면이지자 이렇게 빈정댄다. 

"나는 신들을 매우 좋아해. 나는 그들이 뭘 느끼는지 정확히 알고 있지. 아주 정확히." 
이에 랑 감독이 맞받아
"이보게, 이 사실을 잊지 말게. **신들이 인간을 창조한 게 아니라 인간이 신들을 창조했다는 사실 말일세."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후여비서는 기분 전환을 위해 랑 감독에게 시를 한 편 청한다. 랑 감독은 차분히 이렇게 읊는다. 

"그렇지만 인간은, 그래야 하기 때문에, 두려움 없이
/신 앞에 고독하게 머문다. 단순함이 그를 보호하며 
/ 어떤 무기도 속임수도 필요하지 않다
/신의 부재가 도움이 될 때까지, 오랫동안."
(프리드리히 휠덜린의 시 <시인의 사명>)

똑똑한 여비서는 그것이 곧 프리드리히 횔덜린(Friedrich Hölderlin)의 시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랑 감독이 읊은 구절을 따라서 반복한다.

랑 감독은 마지막 행이 미묘하다는 것을 일러주면서 말한다. 횔덜린은 초고에서 이 시의 마지막 행을 이렇게 썼었지. ‘**신이 그렇게 우리에게 가까이 머무는 한 이라고, 그러면 이것과 완성된 시의 마지막 행이 충돌하는 게 되지 않나. *마지막에 신의 부재가 도움이 되고 인간을 구한다고 하니까 말이야……… 참으로 이상하지. 하지만 그게 진리일지도 모르지."

여기서 신의 부재는 신의 없음이 아닌 ‘**자리 비움 absence‘을 뜻한다. 그리스 로마처럼 다신교 문명에서는 **신들이 자리를 비울 때 인간은 사황에서 해방된다.

그러나 인간은 신탁을 청함으로써 상황을 불러온다. 이런 점에서 **신은 인간의 조건이지만 인간은 신탁과 신이 현존 present하는 원인이 된다.

영화 속 랑 감독이 애매모호한 대화로 던지는 개인과 상황의 변증법은 고대서사(신화, 서사시, 비극 등)에 비밀처럼 스며 있다.


74-5쪽

<신호, 신, 그리고 철학의 관계>


서양 사상사의 전통에서 신화와 철학의 관계는 뮈토스 mythos와 로고스 logos의 관계로 대변되어 왔다.

독일 철학자 빌헬름 네슬레는 뮈토스와 로고스라는 두 단어를 인간의 정신적 삶의 영역을 움직이는 두 축으로 삼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화적 표상과 논리적 사고를 서로 대립적인 것으로 설정한다.

그에 의하면 뮈토스는 상상적이고 비자발적이며 무의식의 토대 위에서 형성되고 표상되는 반면, 로고스는 개념적이고 의도적이며 의식에 의하여 분석되고 종합된다.


77-8쪽

<신화, 시 그리고 철학의 관계 2>


  그렇다고 고대로부터 이야기(mythos)로 풀어가는 신화와 논리(logos)로 풀어가는 철학이 반드시 **대립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물론 신화는 환상적이고 암시적인 성격을 띠기 때문에 논리적이고 설명적인 철학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이해관계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을 관조(觀照)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며, 무엇보다도 세상 만물에 대한 경이로움에서 출발한다는 점에서는 신화적 지향과 철학적 관심은 동일한 뿌리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소피스트들은 자신들의 대화에서 신화를 곧잘 인용했는데, 자신들의 수사법을 다양한 예시로서 강화하고 대화에서 설득력을 얻는 데 신화가 요긴했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고르기아스》 이후의대화편들에서 볼 수 있듯이 - 소피스트들이 단순히 수사적 설득력을얻기 위해 신화를 이용하는 것을 비판하고, 신화의 *본질적 중요성을 포착하기 시작했다. 

**플라톤이 재발견한 신화의 가치는 *논리적 매개로 얻을 수 없는 것을 *직관적 표현으로 포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리학자 바이츠제커(C, F. von Weizsicker)는 "독자에게 변증법적 수행의 엄밀성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을 때 플라톤은 얼마나 신화를 꾸며냈던가!" 하며 감탄한다. 이어서 그는 "플라톤의 신화들은 결코 경박하지 않다"고 말한다. 즉 이것들은 "**엄밀한 해석을 허용하는 예술 작품"이라고 강조한다


77-8쪽

<시, 신화 그리고 철학의 관계 3>


 이런 의미에서 뮈토스는 더 이상 로고스에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로고스에 대한 훌륭한 **자극제로서의 역할을 인정받는다. 

소크라테스 이전 고대 사상의 해설자이기도 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신화를 이론전개에 사용하지 않았지만, *철학적 탐구의 출발이 *어느 정도 신화의 전통과 연결 고리를 갖고 있음을 인정한다. 

그가 <형이상학》 1권에서 한 말은 이를 잘 보여준다. "**신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든 철학자이다."

 그런데도 **어느 시점에서 어떻게 세계를 대하는 인간의 주된 태도가 *뮈토스에서 로고스로 이전되었을까 하는 질문이 뒤따른다. 이것은 본격적인 철학의 기원을 찾는 작업과 맞물려 있기도 하다.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의 형이상학》에서 밀레토스출신의 탈레스를 만물의 원리를 추론적 사고로 탐구했다는 데서 최초의 철학자라고 한 것을 수용해왔다. 탈레스는 만물의 원리를 물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더 이상 오케아노스나 테티스 등 신의 이름으로, 즉 **뮈토스로 **세상을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관찰의 결과를 **로고스로 풀어가려고 하는 것이다. 

여러 가지 현상을 **하나의 원리에 맞추어 해석하려고 했다는 의미에서 탈레스와 함께 철학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근자에 와서는 오히려 ‘고대의 뮈토스적 태도‘와 ‘추론으로 대상을 원리화하고 그것에서 보편적 법칙을 찾는 로고스적 태도‘ 사이의 유사점을 다양한 관점에서 추적하는 작업이 활발해졌다.


79-8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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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놔주게, 그도 한국이야>


프랑스의 지성 사르트르가 모국의 식민지 정책에 항의해 알제리 독립운동 자금 전달책으로 나서자 그의 반역 행위를 용인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정작 국가의 수반인 드골은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그냥 놔두게. 그도 프랑스야."

271쪽


<이언 매큐언, 악마는 내 안의 악마를 깨우고>


인간을 이해하지 않고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인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 안의 악마와 맞대결하지 않을 수 없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 자신이 악마가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언 매큐언은 악마다.

그는 윤리적 의제를 뇌관으로 묻어놓고 거기에 불을 붙여 소설을 타들어 가게 하는 작가다. 이를 ‘윤리학적 상상력‘이라고 부르려 한다. 필자가 오늘의 한국 소설에서 자주 만게 되길 바라고 있는 바로 그것이다.

그런 상상력이 있어야 소설은 폭탄이 되어 공적 영역에서 터질 수 있다.


294-5쪽

<한 편도 다시 읽고 싶지 않다>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체커는 1930년대 말에 뒤늦게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읽은 뒤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는 한마디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러나 이것이 철학이다."

정지아의 <봄빛>에 대해서라도 내 생각은 이렇다. "나는 한 편도 다시 읽고 싶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소설이다."


299쪽


<영상 19도의 소설들>


문제 하나 내면서 마무리하자. 

음반 매장에서 일하는 아르바이트 직원이 수상한 손님을 붙잡아 추궁한 끝에 그가 CD 세 장을 훔쳤다..
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 직원은 이제 무슨 말을 할까? 

김중혁의 소설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세 장 중에 한 장은 내가 선물로 사줄게.
한 장만 골라봐." 

이런 대목들이 김중혁 소설의 온도(좀 거창하게는
‘윤리‘ 라고 해도 좋다)를 조절한다. 사람이 활동하기 가장 좋은 온도는 섭씨 18~20도 정도라고 한다. 그렇다면 김중혁 소설의 온도는 딱 19도일 것이다. 한번 재어들 보시라.


302쪽


<무신론자에게는 희망이 신이다!>


/ 우리한텐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죠
/ 그래
/ 우리는 불을 운반하니까요.
/ 그래. 우리는 불을 운반하니까.
(96쪽)


파국 이후의 세계에서 그토록 소중하게 지켜야 하는 ‘불‘이란 대체 무엇이겠는가. 희망일밖에. 그러나 **이 희망에는 희망이 없다.

"**남자는 자신이 아무런 근거 없이 희망을 걸고 있음을 알았다." (242쪽)

그래, **희망이 없을 때 희망은 가장 숭고해진다.


304쪽




세 종류의 소설이 있는 것 같다.

희망의 근거를 어설프게 늘어놓는 아마추어의 소설,
어떠한 타협도 없이 절망의 정의로움을 완강하게 고수하는 프로의 소설,
그리고 절망의 끝에서 기어이 희망의 가능성을 설득해내고야 마는 대가의 소설.


"그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미 재가 된 것을 아이의 마음속에서 불로 피워올릴 수는 없다는 것"(174-5쪽)을 알기 때문에 아비는 우선 저 자신부터가 희망이라는 ‘불‘을 끌 수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생각했다.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만약 생존자가 하나가 아니라 적어도 둘이라면, 그리고 그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사랑하게 된다면, 거기에서 희망이라는 것이 생겨나겠구나 하고.

더 짧은 결론. 눈먼 노인을 만난 남자가 자기 아들을 가리키며 말한다. "저 아이가 신이라고 하면 어쩔 겁니까?" (196쪽) 그래, 무신론자에게는 희망이 신이다.


30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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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은 어느 한 개인의 완전한 소유물이 되길 원치 않아요. 한 사람의 소유물이 되면 자연은 사악한 독약이 되어 버립니다.


7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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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봄은 얼마나 놀라운 마녀들인지!
돌과 강철로 된 거대하고 추운 이 도시에 기어코 소식을 전하고야 만다.


3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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