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와 편견을 넘어서>
이러한 소크라테스적 회의주의는 철인 왕이 아닌 사람들도 너무 늦기 전에 진리를 ‘알아차림‘(anagnorsis)으로써 상황을 ‘반전‘ (peripeteia)시킬 수 있으며, 철인 왕이 될 수 없는 인간들의 대화도 진리에 다다를 수 있다는 믿음을 우리에게 심어준다. 아울리 진지한 성찰과 개방된 대화에 기초한 소크라테스적 회의주의는 불확실한 시대에 실현가능한 미래의 폭을 넓혀줄 수있을 것이다.
둘째는 *관계적 가치에 대한 지적 호기심이다. 지금 우리는 **가치가 세상을 바꿀 수 없다는 **맹목적인 현실주의의 밀물 속에 살고 있다. 인식론적 차이에 대한 고민보다 현상에 대한 이념적이고 규범적인 판단부터 하고보는 습관이 결국 **힘이 최고라는 생각으로 전환되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지 말라는 교육보다 기죽지 말라는 훈육으로 자라난 세대의 힘에 대한 열망도 우려할 만한 수준이다.
권력만 잡으면 일정 기간 동안 세상을 뒤집어버릴 수 있다는 트라시마쿠스(Thrasymachus)적 망상이 미시적 삶의 공간 속에서도 자리를 잡고 있다. 여기에 인식론적 차이에서 비롯된 방법상의 차이를 *좌와 우의 잣대로 *판단부터 하고보는 풍토, *경험적이고 역사적인 분석보다 자신들의 *이념적 편견을 앞세워 다른사람들에게 자신의 의견을 *강요하는 일상이 *지적 무관심을 부채질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조차 *대중의 지적 무관심에 대한 고민을 다른 사람의 일로 미루고 있다. 대중에게 얼마만큼의 호소력이 있느냐에 따라 차별되는 지식의 가치 속에서, *가치가 연루된 대화를 *기피하는 것이 곧 상대방에 대한 *배려라는 분위 기 속에서, 지식인들도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희망 없는 현실주의‘(realism without hope)의 잔인함에 길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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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참혹하다. *이견을 가진 상대방에게 일방적으로 *묵인을 요구하거나, *다양성을 앞세워 *의견의 충돌을 시장거래에서 발견되는 *선호의 차이 정도로 간주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공화‘를 이야기하지만 타인의 자의적 의지로부터 자유로운 시민적 조건이 공동체의 안위라는 이름으로 침해당할 수 있다는 고민은 극히 제한된 영역에서만 들려온다. ‘자유‘를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는 크지만, *입장의 차이가 *대화를 통해 극복될 수 있다는 신념, 그리고 이러한 극복은 단순히 *이견을 *무시하거나 *인내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심의를 통해 자신의 *의사를 바꿀 때 가능하다는 *관용의 정신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견을 가진 상대방의 의사에 대한 *관심을 갖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이견이 있더라도 결정이 이루어지면 이에 대한 *정치사회적 책임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해하기위해서라도, *비관계적 무관심을 *관계적 가치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전환시킬 계기가 필요하다.
셋째는 **문화적 변용(cultural appropriation)에 대한 적극적 시인이다. 이것이 문화적 특수성 또는 상이한 문화 사이의 통약불가능성 (incommensurability)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정초적이고 본질주의적인 서구중심주의를 비판해온 노력이 무의미하다는 말은 아니다.
적극적 시인이 의미하는 바는 ‘순수한 혈통‘이나 ‘순수한 문화‘와 같이 어느 사회의 문화를 오직 하나 또는 일련의 불변의 전통으로 단순화하는 특수주의, 모든 전통은 한때 변혁이었다는 문화의 지속과 변화에 대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인정조차 무시하는 *전통주의, 그리고 상이한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정치사회적 상상력이 예술적 창의력을 넘어설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국수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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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자기 문제를 전달하지 못해 보편적인 문제를 오히려 특수한 문제로 축소시키는 *폐쇄적 문화상대주의, 자기 문화의 전달을 통해 자부심을 느끼는 일상은 선전하지만 다른 문화로부터 배우는 데는 인색한 세계 전략적 *민족주의도 극복의 대상이 된다.
대신 문화적 변용에 대한 적극적 시인은 다양한 문화 사이의 교류를 통해 *새로운 상상력이 등장하고, 이러한 *상상력이 *과거에 연계된 *현재를 새로운 *미래의 가능성으로 바꿀 수 있다는 자각에서 출발한다.
서구의 르네상스 문화가 이미 존재했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던 과거의 회복과 여러 문화적 변용이 만들어낸 창의력이 만나 꽃을 피웠듯이, 19세기와 20세기 유럽의 예술이 이질적인 일본 미술을 통해 계발된 심미안과 기술로 안일한 재생산에서 탈피했듯이, 문화적 접촉과 변용이 새로운 생각의 조합을 제공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공화주의 전통이 없다는 이유로 근대 서양의 문화적 산물로채색된 민족주의가 전달하는 가치는 받아들이면서도 우리의 삶속에 숨쉬고 있는 ‘조국에 대한 사랑‘ (amore della patria)의 가치에는 무관심한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고, 자유주의가 최초부터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금 서구 사회에서 들려오는 자유주의자들의 자성을 못들은 체 할 것이다.
만약 이러하다면, 우리의 현재는 *다가올 것들의 잠재적 가능성을 통해 의미를 가질 기회를 상실하고, 우리의 고민은 인류의 보편적 기대를 충족시킬 수 없으며, 지금의 정치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열정을 가진 사람들은 상상역의 나래를 펼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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