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 자신의 상태만큼 중요한 것도 아무것도 없고
영원만큼 두려운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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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것이란 것 역시 덧없고도 달콤한 것일 뿐..... - P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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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부식의 삼국사기

삼국사기는 우리나라에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서다. 고대사를 다룬 단순한 사료집이 아니라 한국 고대사를 설명한 최초의 역사서다.

이는 단순한 사료집이 아니라 김부식이 뚜렷한 역사관을 가지고 기술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 P19

우리나라 학사, 대부들이 중국의 오경/제자의 책과 중국의 역사서에 대하여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우리나라 역사에 대하여는 망연무지하다. - P20

당시 고려의 지식인들은 이러한 국제질서의 변화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것을 좀처럼 **현실적인 일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금나라의 요구를 받아들일 경우, 대단한 *모욕감을 느껴야 했다. - P22

송나라 사마광이 편찬한 <자치통감>은 <삼국사기>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는 **역사란 단순한 과거 자료의 편찬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정치적 교훈을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역사관을 얻었던 것이다. - P24

김부식은 삼국을 각각 **‘아국‘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어 삼국 모두를 고려의 전신으로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중국은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 역사의 일부로 주장하고 있다. 고구려 강역 태반을 중국이 차지하고 있는 현실에서,

만약 고구려를 본기로 다룬 <삼국사기>가 없었더라면 고구려 역사가 현재 한국사라는 주장을 할 수 있는 근거가 없게 되었을 것이다. - P30

신라에서 성을 사용한 것은 진평왕 때부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비해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초기부터 성을 사용하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성명은 네 글자로 된 것이 많다. - P31

김부식을 사대주의자라고 하는데 그 점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

당시는 유교가 중국만의 학문이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도 실천하여야 할 학문이라고 본 **보편주의 사상이 유행하였고, 불교도 이점에서도 마찬가지다. 사대정책이 국가를 지키는 수단이라고 본 것은 아닐까?

시대사상을 제대로 이해한 후에야 옳게 비판할 수 있을 것이다. - P36

3. 조선왕조실록


사관은 직필을 생명으로 여겼다.

목이 달아나도 사필은 굽힐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이 정착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관이 되는 사람은 젊고, 기개가 높은 사람이면서 재/학/식의 3장지재를 갖춘 사람이어야 했다.

특히 문과에 급제해야 하고, 가문도 훌륭해야 했다. 세파에 찌들지 않은 젊은 사람으로서 기개가 있고 문장력이 뛰어나며 명문자로서의 자존심을 갖추고 있어야 직필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 P62

실록은 1차 자료가 아니고 국가에서 편찬한 것이기 때문에 **집권자들의 주장이 반영된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실록을 읽을 때는 **행간을 읽을 줄 알야야 한다.
- P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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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하는 말을 듣기만 할 때에는 퍽 근사하게 들리지만, 질문을 해 보면 그는 아무것도 아님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그는 *장광설에서는 대가였고 *지성에서는 한심하였으며 *이성에서는 빈껍데기였다. 

**그라는 나무는 멀리서 보면 잎이 무성하여 눈길을 끌지만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열매라고는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 진상을 알게 된 나는 더 이상 그의 학교에서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안셀무스에 대한 아벨라르의 평가)
- P160

아벨라르에게는 *자신의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 그리고 *자기 의지가 중요한 문제였다.

**이 시대 주류의 사고는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다."였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뒤집고 "믿기 위해 이해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해하기 위해서 믿는 것‘은 먼저 믿음부터 가져야 하고 그 근거 위에서 다른 것들을 이해한다.

그러나 아벨라르의 ‘믿기 위해 이해한다‘는 태도는, **먼저 사물을 따져 보아야 하고 그것이 확실하게 이해가 되면 그 다음에 그것을 믿는 것이다. - P164

아벨라르는 ‘자신의 혀를 통한 봉사‘를 소명으로 삼았다. 말하자면 이 시기에 **‘지식인이출현한 것이다. - P165

이를 정리하면, 적어도 **12세기 즈음에는 **개인의 자아가 뚜렷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남긴 자료가 그 시대의 특이한 요구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자서전이 아직 완전한 의미의 자서전이 아니었다) 명백하게 읽히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 P165


그렇다면 왜 꼭 12세기인가? 그 이전 시기에 자아의식이 존재했다고 볼 수는 없단 말인가?

조각가, 건축가, 채식사본(책면을 정교한 그림과 글자로 장식하는 것) 제작자 등 자신의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이 대표적이다. 가장 뚜렷한 증거는 서명을 남긴다든지 작품 속에 자기 모습을 어떤 형태로든남기는 일이다. 

우리는 흔히 **미켈란젤로에 와서야 *작품에 자기 이름을 남긴다고 말해 왔고, 이것을 **르네상스 시대 개인의 자각의 중요한 근거로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8세기에 자기가 만든 성당 제단에다가 Vuolvinus magister phaber(부올비누스가 지휘한 작품)‘
라고 당당하게 서명을 한 사례도 알고 있고,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 작가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넣은 사례도 알고 있다.

**야콥 부르크하르트나 카를 람프레히트 등의 학자들이 정립한 *근대의 면모, 곧 근대에 와서야 인간 개인성‘에 대한 관심이 처음 등장했으며 그 이전에는 전형성‘에만 초점이 모아졌을 뿐 *개인성은 경멸되었다는 주장은*수정되어야 한다.  - P166

개인에 대한 자각은 12세기에는 분명히 존재했고, 비록증거가 그리 풍부하지는 않지만 그 이전 시기에도 존재했으리라고 추론할수 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큰 특징인 **개성과 자아의식 같은 것들이, **비록 다른 형식을 띠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중세라고 부르는 시대에 엄연히 존재했음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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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란 부엌보다 더 아름답지 않으면서도 썩은 냄새는 더 나는 거라네.

인생의 맛있는 음식을 훔쳐 먹으려면 손을 더렵혀야 하네.

다만 손 씻을 줄만 알면 되지.

**우리 세대의 모든 윤리는 거기에 있네. - P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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