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테르부르크 이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8
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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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와 <코>를 처음 읽었을 때의 놀라움이 여전히 생생하다. 이렇게 적나라한 이야기가 다 있구나 싶었다. 초등학생이 된 아이들의 잠자리 동화 격으로 읽어주던 작품 중에 루쉰의 <아큐정전>을 비롯해 고골의 <코>도 있었다. 실망스럽게도 아이들은 지루함과 두려움을 내비쳤고 시기상조라는 결론에 완독은 미래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었다. 고골 단편선을 몇 개 출판사로 보유하고 있는데 내가 가진 민음사판 <뻬쩨르부르그 이야기>도 <페테르부르크 이야기>로 표기가 수정되어 나오고 있다. 번역은 즐겁게 읽었던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의 저자 조주관이다. 니콜라이 고골의 『페테르부르크 이야기(조주관 옮김, 민음사, 2002, 372쪽 분량)』는 당시로서는 미래적 도시이며 가공의 도시로 치환할 수 있을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러시아식 ‘작은 인간’의 분투를 기록한다. 작은 인간은 러시아 관등 체계에서 대부분 9등관으로 대표되는, 주로 정서나 펜 깎기를 하는 하급 관리의 대명사로 드러나지 않는 소모적 일에 시간을 쏟는 러시아문학의 한 전형이다. 『페테르부르크 이야기』는 <코>와 <외투>, <광인 일기>, <초상화>, <네프스끼 거리> 등 다섯 편의 대표작을 담는다.


<코>는 이발사 이반 야꼬블레비치가 아침 식사 중에 칼로 자르던 빵에서 코를 발견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코를 발견할 뿐 아니라 이 코의 주인을 한눈에 알아차린다. 코 따위를 집안에 둘 수 없다고 다그치는 아내를 피해 들고나온 코를 처치하고자 애를 쓰나 이 또한 만만치 않다. 1장은 “하지만 여기서 사건은 완전히 안개 속에 묻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p.15)로 이반의 에피소드를 맺는다. 2장의 주인공은 코의 주인인 8등관 꼬발료프다.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충격 그 자체다. 제법 잘생기고, 제법 관등에 만족하던 그는 우연히 5등관 신사가 되어 돌아다니는 자신의 코를 본다. 계급에서도 밀리는 코발료프가 당신은 사실 나의 코요, 라고 어렵사리 지적하는데, 코는 말한다. “당신은 실수하고 있소. 나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오.”(p.22) 코의 변신과 부조리하기 그지없어 마치 꿈꾸는 듯한 상황극과도 같은 현실이라니. 코발료프는 절망하는데 다행히 코는 제자리로 돌아온다. 사라질 때처럼 시치미 뚝 떼고! 1부(장)와 2부의 결말은 ‘전혀 알 길이 없다’와 ‘전혀 알 길이 없었다’로 거의 동일하다. 3부에서 작가는 총평 격인 자신의 의견을 얹는다. 사건의 터무니없음과 그로 인한 궁금증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비현실 안에 내제하는 본질을 환기한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꿈과 일상을 넘나들며 자기 몫의 생을 버티는 사람들, 작은 인간들은 지금도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외투>는 만년 9급 문관 아까기 아까끼예비치가 주인공이다. 이름 짓기 곤란해 아버지의 이름을 따랐던 주인공이 이름 없이 생을 마치고 관리 유령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기까지의 굴곡사가 전개된다. 그는 한 벌의 외투를 원하나 그에게 모든 것이었던 외투는 꿈처럼 사라지고 만다. <광인 일기>는 9등관 포프리신의 일기로 일인칭 서술이다. 국장의 집 서재에서 펜을 깎는 일을 하는 포프리신은 국장을 매우 영리한 ‘국가적 인물’이라고 여기는데 우연히 만난 국장의 딸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는 국장 딸의 강아지 맷쥐가 하는 개들의 대화를 알아듣고 국장의 딸을 원하지만 이루지 못할 것이며, 그녀의 결혼 소식까지 알자 낙담한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이웃 개인 피젤을 만나러 가서는 “실은 댁의 강아지와 할 말이 있는데요.”(p.111)라고 이유를 밝힌다. 고통스러운 처지에 웃음이 끼어드는 장면은 곳곳에 등장한다. 그는 분노한다. “걸핏하면 시종무관 아니면 장군이라니, 이 세상은 더 나을 것이 없다. 시종무관이 아니면 장군이 모든 것을 차지하게 된다.”(p.120), "어쩌면 나는 백작이나 장군인데, 다만 9급 관리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아마 나 자신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고 있을 거다.“(p.121) 사회 비판과 자기 인식, 실존적 질문이 혼재하다가 그의 일기는 서서히 결을 달리한다. 12월 8일 다음에 2000년 4월 43일, ‘며칠도 아니다, 날짜가 없는 날’ 등으로 이어지며 그는 자신을 스페인의 왕이라고 믿는다. 비참하게 갇힌 채 내뱉는 그의 말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초상화>에서 젊고 재능 있는 화가였던 차르뜨꼬프는 우연히 사온 초상화로 인해 삶이 송두리째 바뀐다. 그의 성정을 읽은 지도교수는 조심하라는 경고를 하였으나 ‘초상화’가 열어준 새로운 생활은 그에게 방아쇠 역할을 한다. 다만 그림 액자일 뿐인데 초상화가 쏘아보는 시선은 시트를 덮어씌우게 만든다. 그림과 대면하며 꿈을 꾸고, 꿈속의 꿈으로 거듭 들어가고 깨어나오는 장면은 상당히 생생해서 오싹한 기분이 든다. 쉽게 타협하고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탓에 차르뜨꼬프는 몰락하고 만다. 초상화의 연유를 밝히는 2부만으로도 단독 작품이라 해도 될 만큼 인간의 내면을 밀도 있게 포착한다. <네프스끼 거리>는 화가 삐스까료프와 삐로고프 중위 두 친구의 이야기다. 소설은 “뻬쩨르부르그에는 네프스끼 거리보다 더 나은 곳이 없다.”(p.227)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단락을 “이 네프스끼 거리라는 건 언제나 거짓말을 한다.”로 시작하여 “그리고 악마가 모든 것들을 실제 모습으로 보여주기를 거부하고 램프의 불을 직접 켤 때, 네프스끼 거리는 더욱 심하게 사람들을 속인다.”(p.282)로 종결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자 화가 삐스까료프는 꿈으로 도피하고 꿈에서 욕구를 충족한다. 하지만 꿈은 현실을 속이는 눈가리개에 불과했고 멸망을 부른다.


“그 웃음의 배후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눈물을 느낀다.”는 푸시킨의 말처럼 고골의 단편에서 맞닥뜨리는 풍자와 아이러니는 애처로움과 슬픔을 품고 있다. 작은 인간이라는 전형이 19세기 러시아에만 존재하였다고 볼 수 없다. 지금도 사람들은 뻬쩨르부르크만큼이나 휘황한 도시의 대로에서 또는 외진 골목에서 힘쓰고 버텨낸다. 일주일 사용 가능한 힘을 하루 단위로 분배하며 ‘오늘도 무사히’를 읊조린다. 의미에 연연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살아가는 소수의 인물을 제외하고, 생래적 조건의 한계를 넘기 어려운 고골의 대다수 인물은 힘에 부치는 대결 끝에 목숨을 잃거나 미치고 만다. 이 연장선상에 작가인 고골 자신도 고통당하고 생을 재촉하였다. “(중략) 한편으로 자신의 재능이 진지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통받았습니다. 고골은 전형적인 속물들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최고 작가입니다. 문제는 그런 재능과 그가 생각한 작가의 소명이 충돌하는 데 있었습니다.”(p.111/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현암사) <죽은 혼> 2부의 원고를 두 번 불사르고 단식하다 죽음을 맞는 작가의 고통이 그의 등장인물들의 그것과 겹쳐지면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고골의 단편선 『페테르부르크 이야기』는 기상천외한 상상력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때론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거나 근거가 부족해 보인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속도감 있는 전개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다고 독자를 설득해 낸다. 시간 경과에 따른 <네프스끼 거리>의 변화를 기록할 때는 도스토옙스키가 『백야(1848년)』에서 “페테르부르크 전체가 나에게는 친구와 마찬가지”라며 감정을 이입하며 말을 걸던 장면을 연상케 한다. 때로 고독한 이들에게 장소는 그저 공간이 아니라 가능성이자 상징으로, 아려한 품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봄의 초입, 3월이다. 겨울이 완전히 떠나기 전에 정곡을 찌르는 시린 고전의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그렇긴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본다면 전체적으로 이 사건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가 비현실적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생각하고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 속에는 분명히 무엇인가 내포되어 있다. 누가 뭐라해도 이와 비슷한 사건들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 드물긴 하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p.51, <코>)


시종무관 따위가 뭐냔 말이다. 사실 이건 관직에 불과할 뿐, 아무것도 아니다. 손으로 잡고 감촉을 느낄 수 있는 어떤 물건도 아니다. 사실 시종무관이라고 해서 이마에 눈알이 하나 더 박힌 것도 아니다. 또 코가 금으로 된 것도 아니고, 내 코도 모든 사람의 코와 같다. 시종무관도 코로 냄새는 맡을 테지만, 먹거나 재채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왜 이 모든 차이와 다양성이 있는지 여러 번 파악하고 싶었다. 나는 9급 관리다. 왜 9급 관리가 되었을까? 어쩌면 나는 백작이나 장군인데, 다만 9급 관리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아마 나 자신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고 있을 거다.(p.121, <광인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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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호수의 에세이 클럽 - 진짜 내 이야기로 에세이 쓰기
임수진(밤호수) 지음 / 엑스북스(xbooks)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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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전성시대다. 때론 모두 다 에세이를 쓰고 있는 듯하다. 나라도 쓰지 말아야겠다고 불필요한 결심을 하였으나, 어느 순간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 무언가를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비집으면 또 틈을 내어주는 이 편한 세상은 소설도 시도 아니다, 일기와 에세이 사이에서 타인의 시선을 모른척했다가 초대했다가 제발 보시게 라고 강권하는 등 그때그때 널을 뛰어왔다. 널뛰기가 꽤 오래다 보니 결국 계속할 거라면 제대로 뛰어보고 싶어진다. 임수진(밤호수)밤호수의 에세이 클럽(엑스북스, 2025, 240쪽 분량)은 당신도 쓸 수 있소 에세이, 그것도 잘 쓸 수 있소 에세이, 라고 용기를 주는 다정한 초대장이다. ‘진짜 내 이야기로 에세이 쓰기라는 부제가 처음에는 헉, 하며 손사래를 치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중반부를 넘어서고 책이 끝나갈 때가 되면 좋아, 진짜 내 이야기로!’라며 마음 한 켠 불씨가 담기고, 손에 힘도 들어간다. 흔쾌히 손을 맞잡아줄 그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책은 온라인 에세이 쓰기 수업 <밤호수의 에세이 클럽>을 진행했던 4년간의 경험과 그 이전 국어 교사로서의 시간, 그 이전부터 한결같이 이어져온 읽고 쓰던 기쁨을 생생하게 전한다. 먼저 왜 에세이인가, 하는 물음이 선행된다. 늘 하던 내 안의 질문이 즐비하다. 대작가가 아닌 바에야 또 하나의 글을 내놓는게 무슨 의미인가(p.21)를 앵무새처럼 반복했던 시간이 스친다. 종이 더미만 더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태라고 자가 진단하던 시간 말이다. 하지만 에세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넘어가면 공감이 나온다. 에세이스트는 건강한 나르시시스트이지만 공감의 코드 때문에 진짜 나르시시스트는 될 수 없다(p.44)는데 동의하게 된다. “에세이라는 게 결국 내 마음과 타인의 마음이 교감하는 지점에서 폭발하는 카타르시스의 문학”(p.45)이라고 분명히 한다.

 

2부는 에세이 쓰기 실전 방법론이다.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 현재, 미래의 나는 모두 글감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시간이라는 장치가 정제의 과정을 거치게 하는 과거의 나, 생생한 표현이 가능한 현재의 나, 소망과 꿈을 설계할 수 있는 미래의 나는 얼마든지 꺼내어 쓸 수 있는 훌륭한 글감이다. 2장은 핀셋 가이드라 모두 밑줄이다. ‘초보 에세이스트들의 흔한 습관들에서 독자는 자신의 글쓰기 습관과 견주어보며 그래서 어려웠던 거다, 그래서 문제였던 거다, 알아차리며 원인과 해법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다. 필자의 경우 불친절한 전개에 색깔을 덧입힌다. 빨간 줄이다. 늘 마음이 급해서 혼자 저만치 가버리는 악순환을 제할 때가 되었다. ‘공감에서 작가가 들이미는 진짜 자기 이야기의 힘은 그 무엇도 이길 수가 없다. 이러한 공감의 힘은 바로 솔직함과 진실함에서 나온다.”(p.81)는 지적은 가장 중요한 지침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떻게?’에서 해법과 안내는 계속된다. 에세이는 하나의 정서나 감정으로 남을 것이고 그것은 곧 형용사라는 저자의 말에 미운털을 박아놓고 홀대해온 형용사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4부 나만의 콘텐츠 만들기에서는 목차를 써서 방향을 잡고 글을 써나가게 된다. 리스트를 작성하고 키워드를 도출하는 일이 어렴풋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작성하는 자와 하지 않는 자는 다른 결과를 받아들게 될 것이다. 특히 눈여겨 본 부분은 3, ‘이미 써 놓은 글을 콘텐츠로 만들기. 당신은 어떤 책을 내고 싶은가 묻는다면 나는 숨도 쉬지 않고 서평집이다. 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 게 어느덧 4년쯤 된다. 목차도 대강 꾸렸다. 그런데 뛰어들지 못하는 이유는 은근히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간절하지 않은 걸까? 내긴 낼 거야, 이것부터 하고! 수백 번 되풀이한 나의 변이다. 책을 읽는 한 서평을 쓰게 된다. 눈앞에 버티고 있는 써야 할 서평이 이 평을 포함해서 지금도 두 편이다. 어떻게 쓸지 고민중인 서평이 계속 목전에 있기에 일단 해결해야 할 서평부터 쓰느라 서평집은 진행하지 못하는 이 아이러니, 바보스러움, 제자리걸음 때문에 오늘도 뒷목을 잡는다. 나는 이 상황을 네 컷 만화로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제목은 <정신차리시 개!>가 적당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희망한다. 어제와는 다른 내일을.

 

밤호수의 에세이 클럽은 연습하기 코너를 적소에 배치하여 배운 내용을 실제 적용하도록 돕는다. 모셔두기보다 닳도록 펴볼 강력한 안내서 역할을 할 것이다. 책의 후반에 나오는 편집회의 이야기는 독자를 들뜨게 한다. 저 회의에만 들어가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 분위기를 상상한다. “글을 쓰는 순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선생이 아니라 독자다.”(p.225)라는 문장이 뭉클하다. 기꺼이 읽어주고 지지하며 함께 시간을 통과하는 동지가 있다는 건 감사하고 귀한 일이다. 명 에세이집을 추천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읽고 있는데 웬일로 이번에는 작은 책을 읽느냐는 남편의 말에 이 책 작은 책이 아니라고 나도 모르게 힘을 준다. 쓰는 마음, 소통하고 공감하며 비로소 내 안의 나를 고스란히 허용하는 기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필자처럼 기록을 신성시하나 동력 부족으로 시도와 매듭을 거듭 지체하는 이들에게, 치장을 떼어낸 채 불굴의 펜을 들고 가장 투명한 자신을 기록하기 원하는 이들에게 정교한 나침반이, 때론 따뜻한 동무가 되어줄 책이다.

 


책 속에서>

모든 이야기는 기록하는 순간 의미가 생기고, 기록되는 순간 영원성을 지닌다. ‘역사가 된다.(p.8)

 

(전략) 말하자면 에세이는 있는 그대로의 내 공간을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공간으로 다듬어 가는 과정이자, 거칠고 투박한 돌덩어리를 각자에게 어울리는 보석으로 세공해 가는 과정이다.(p.24)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한 공감을 줄 수 있는 글과 아닌 글의 차이는 딱 한 가지다. 진짜 내 이야기의 진실함이 들어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좋은 드라마와 기가 막힌 영화 이야기를 예시로 들어 글을 전개하더라도 작가가 들이미는 진짜 자기 이야기의 힘은 그 무엇도 이길 수가 없다. 이러한 공감의 힘은 바로 솔직함과 진실함에서 나온다.(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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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 속의 사나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8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박현섭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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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영어권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 영미 문학계의 천재라 불리는 조지 손더스는 25년간의 강의를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라는 한 권의 책으로 갈무리했다. 그가 엄선한 19세기 러시아 단편 소설은 일곱 편이다. 그중에서 체호프 작품이 세 편으로, 톨스토이(2)를 능가한다. 체호프는 마흔넷에 세상을 떠나기 전, 작가 이반 부닌에게 사람들은 앞으로 칠 년 더 내 작품을 읽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기껏해야 육 년쯤 더 살겠지요.”(p.331, 해설)라고 말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단편 작가로 여전히, 아마도 영원히 건재할 것이다. 손더스는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에서 체호프의 <마차에서>, <사랑스러운 사람>, <구스베리>를 강독한다. 체호프 타계 120주년을 기념해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중단편 선집 <상자 속의 사나이><마차에서>를 제외한 두 작품이 실렸다.

 

상자 속의 사나이(박현섭 옮김, 문학동네, 2024, 348쪽 분량)1884년부터 1903년에 발표된 체호프의 중단편 중에서 작품성이 뛰어난 13편을 발표순으로 담은 선집이다. 작가의 생몰년인 1860~1904년과 견줄 때 초기작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주요 저작을 살펴볼 수 있는 구성이다. 작가는 모스크바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면서부터 잡지 등에 글을 투고하기 시작하였고, 의사로 개업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에 매진하였다. 의사이면서 작가였고, 오랜 시간 병마와 싸운 환자이기도 했던 체호프는 자신을 불태우듯 집필에 전념하였다. 희곡 갈매기」 「벚나무 동산등으로 셰익스피어 이래 가장 많이 공연되는 극작가이자 모든 단편소설 작가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레이먼드 카버가 언급했듯 탁월한 단편소설 작가다.

 

처음 실린 세 편은 안토샤 체혼테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던 작품으로 <>, <아뉴타>, <반카> 모두 가엾은 이들을 등장시킨다. 굶주리고 학대받는 아이와 착취당하면서도 저항하지 못하는 여인을 본다. 특히 신문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난에 개제되었다는 <반카>는 안타까움에 독자를 숨죽이게 만든다. 중편 <6호실>은 동시대 독자들에게 가장 열렬한 호응을 받았던 작품인데 레스코프는 사방 천지가 6호실이며, 6호실은 러시아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소설은 줌 인하듯 병원의 별관을, 현관을, 바닥에 침대를 고정한 커다란 방을 묘사한다. 현관에는 질서를 사랑하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구타를 자행하는 경비원 니키타가 있다. 소설은 방 안에 있는 다섯 명의 정신병자를 소개하는데 그 중 이반 드미트리치 그로모프의 사정과 그를 진료하게 된 의사 안드레이 예피미치 라긴의 만남은 결말에 더욱 비극적 색채를 덧입힌다. “안드레이 예피미치는 모든 걸 알아차렸다.”(p.125) 그는 6호실에서 환자들이 겪었을 고통을 이십여 년 넘게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음을 비로소 자각한다. 너무 늦은 깨우침이다.

 

아름답고 숭고한 감정에 함께 빠져들게 하는 <대학생>을 지나면 또 한 편의 문제작이자 표제작인 <상자 속의 사나이> 차례다. <상자 속의 사나이>,<구스베리>,<사랑에 관하여>삼부작으로 묶인다. 교사 부르킨은 수의사 이반 이바니치에게 동료 교사였던 상자 속의 사나이’, 벨리코프 이야기를 들려준다. 벨리코프는 소라게나 달팽이처럼 외부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겠다는 신념에 사로잡혔던 기인으로도 볼 수 있으나 화자는 상자 속의 사람이 비단 그뿐만은 아니라고 역설한다. 그가 이건 상자 속 삶이 아닐까요?’(p.185)라고 반복할 때 독자를 향하는 작가의 목소리로 들리며 액자식 구조를 활용한 질문은 울림을 던진다.

 

<구스베리>는 부르킨과 이반 이바니치가 비를 피해 알료힌의 집으로 가서 묵으며 나누는 이야기다. 이반 이바니치가 친동생인 니콜라이에 대해 나머지 두 명에게 전하는 이야기는 인간의 행복으로, 최면 상태와 각성의 중요성으로 화제를 옮겨간다. 그의 웅변조는 갸웃하게 만드는 결말에 이르는데 조지 손더스는 이 작품을 근사하게 채에 고르고, 숙고의 지점을 짚어낸다. 화자와 청자를 바꿔가며 이야기 속 이야기로 독자를 끌고 가는 세 편의 연작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사랑에 관하여>는 집주인인 알료힌이 들려주는 지나가버린 사랑 이야기다. 그녀는 지방 재판소 부소장인 루가노비치의 아내다. 말기작은 올렌카라는 불멸의 캐릭터를 탄생시킨 <귀염둥이>와 작가 후기작의 특징인 열린 결말의 전형을 확인할 수 있는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표한 <약혼녀>로 이어진다.

 

내가 체호프에게서 가장 감탄하는 것은 그가 글에서 의제로부터 정말 자유로워 보인다는 점이다.(중략) 그는 의사였고, 그가 소설에 접근하는 방식은 애정어리면서도 진단적으로 느껴진다.”(p.529/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손더스는 자신의 책에서 꼽은 세 편 외에 이번 선집에 실린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사랑에 관하여>와 몇 작품을 더 추천한다. 체호프가 정치적 또는 도덕적 입장이 결여된 것으로 보인다는 비판에 대해서 손더스는 지금은 이런 특질 때문에 우리가 그를 사랑한다.”며 확실성이 종종 권력으로 오인되는 세상에서 불확실함을 유지할(, 계속 호기심을 가질)만큼 자신감을 가진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라고 덧붙인다. 모든 결론을 의심하며 재고하는 체호프를 고상하며 심지어 거룩하다고 쓰면서 나아가 체호프의 이야기를 훌륭하고 간략한 재고 기계라고 부연한다.

 

체호프의 인물들은 완벽하지 않다. 어리석고 극단적인 사람들, 편파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자들, 현실감각이 떨어지거나 속물근성에 깊이 물들었거나, 무감각자나 망상자도 전면에 나선다. 그러나 작가는 예술가는 등장인물과 그의 말에 대한 재판관이 되어서는 안 되며, 편견 없는 증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견해를 실천한다. <6호실>에서, <로트실트의 바이올린>에서 그들은 너무 늦게 자각한다. <구스베리>, <귀염둥이>처럼 때론 늦게까지 깨닫지 못한다.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처럼 어떡하지 상태에서 이야기 바퀴는 멈추고 마저 굴리는 건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남기도 한다.

 

벨리코프만 상자 속에 살고 있는 게 아니고, 라긴만 6호실에 갇힌 게 아니라는 점을 독자는 금세 간파할 것이다. 체호프는 간결한 문장으로 생의 부조리와 타협하고, 결정을 보류하는 이들에게 노크한다. 그런 중에도 서정적인 풍경 묘사와 생생하게 포착한 분위기는 삶이라는 보편의 희비극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귀염둥이>는 논제를 만들고 시립 도서관에서 토론하였던 작품이다. 올해 상반기에 토론할 체호프를 정하는 일이 즐거우면서도 어렵다. 모든 작품이 마스터피스 아닌가! 페이지터너 급으로 읽히지만 여운을 돌아보는데 훨씬 시간을 들이게 되는 고전 명작이다. 생기와 기쁨을 안고 우리 생의 6호실, 비좁아 지는 상자를 떠날 수 있길 바란다. 동시에 예술은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다. 정확히 정리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던 작가의 말대로 체호프가 선사하는 예술에 힘입어 생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조건을 조명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겠다.

 



 책 속에서>


그 혼돈 속에서도 문득 견디기 힘든 끔찍한 생각이 머릿속으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지금 달빛 속에서 마치 시커먼 망령들처럼 보이는 이 사람들이 바로 이와 똑같은 고통을 날이면 날마다 몇 년이고 겪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어떻게 그는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런 것을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에게는 고통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죄가 없다. 하지만 니키타처럼 완고하고 거친 안드레이 예피미치의 양심은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늘한 냉기로 감쌌다. 그는 박차고 일어나서 온 힘을 다해 소리치고 싶었다.(p.132, 6호실)

 

"우리는 남들이 거짓말하는 걸 보고 듣는 것도 모자라서,“ 반대편으로 자세를 바꿔 누우며 이반 이바니치가 말했다. ”그런 거짓말을 참는다는 이유로 바보라고 놀림을 당하지요. 모욕과 멸시를 참으면서, 자신이 정직하고 자유로운 사람들 편이라는 걸 대놓고 주장하지도 못하고, 그러다가 자기 스스로 거짓말하며 미소를 흘립니다. 이 모든 게 빵 한조각, 따뜻한 방 한 칸, 한푼 값어치도 없는 알량한 지위 때문이죠. 아니,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어요!“(p.186, 상자 속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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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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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 더 나아가 억제함으로 고양하는 글쓰기를 계속 만난다. 클레어 키건, 한 강, 욘 포세의 간결함이 동일한 결은 아니어도 소란함이나 치장은 제하고 의미를 내포한 행간 그대로 남겨둔다는 점에서 연결되어 보이기도 한다.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욘 포세는 기념 연설문에서 내게 글쓰기는 귀를 기울여 듣는 일입니다. 글을 쓸 때 나는 결코 사전에 준비를 하거나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듣기만 할 뿐입니다.”(p.95)라고 말했다. 귀 기울여 들을 때 들리는 것은 침묵이며 나아가 침묵 안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그의 설명은 책을 다 읽고 난 후 다시 한번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든다. 화자가 숲으로 걸어 들어갔던 것처럼 말이다.

 

페이지마다 쌓여가는 눈이 표지판 없는 숲 한가운데에서 생존에 필요한 조건들을 냉각시킨다. 눈이 내리고, 어둠이 들어서고, 기온이 떨어지고, 체온이 내려가고, 허기지고 피로한 상태로 그는 본다, 듣는다, 감각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낯선 현상을 확신할 수 없는 채로 수용한다. 미심쩍소, 당신 누구요, 라고 물을 권리, 잠시만요, 라고 유예시킬 자격은 이미 회수되었다. 기회를 달라고 하소연할 수 있나. 그는 기회를 기회라고 여기지 못했다. 그가 낭비한 시간 목록과 세부 사항이 추수가 끝난 곡식 단처럼 가지런히 묶여 있다. 첫 번째 묶음은 마땅치 않은 일련의 감정들이었다.

 

나는 차를 타고 벗어났다. 기분이 좋았다. 움직이니 기분이 좋았다.”(p.7)는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기쁨을 주지 못하는 자신의 상태를 벗어나고자 그는 무언가를 했을 뿐”(p.7)이다. 운전했고, 갈림길에서 선택했고, 숲길 끝에 처박혔고, 후진하지 못하여 차에서 내렸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머릿속으로 방법을 시뮬레이션한 끝에 숲으로 들어섰다. 그는 지루함에서 공허함으로, 다시 두려움으로 감정의 파고를 탄다. 멍청하다는 자책을 털고 간절하게 용기를 내보려고 한다. ‘두려움을 감정으로 인식하지 않고 단어로 분석한다. ‘차분하고 조용한 두려움’, ‘불안함이 없는 두려움’, 말하자면 말뿐인 두려움’. 그러므로 감정은 허상이고 이성적인 나는 구출되는 게 마땅하다는 합리화다.

 

이 순간 눈앞에 보이는 실체는 몹시 불합리하다. 철저하게 혼자인 그, 누가 봐도 혼자인 그는 의식의 흐름대로 말문을 연다. 머릿속에 작동하는 사고는 언어 회로를 돌린다. 최면을 거는 듯한 문장으로, 이전의 말을 번복하고, 맞서다가 부연하고, 오류를 곁들이다 끝없이 덧댄다. 딱히 할 일이 없는 그는 의식의 흐름을 놓칠 이유가 없다. 자기의식과 침묵만이 유일한 대화 상대다. 그런데 누군가가 끼어들기 시작한다. 천사인지 악마인지 불분명한 순백색의 존재’, 예전 그대로 서로를 대하고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차례로 다가온다. 지력과 이성을 넘어서는 일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감정이 그랬듯이 지력이나 이성도 하나의 단어, 또는 말, 하나의 표현 방식일 뿐이라고 반론한다. 그는 곧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거부하지 않는다. 지루함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는데 결국 삶으로부터 이탈하는 결과를 낳는다. 작은 행동의 총합, 애쓰고 버틴 끝에 예외 없이 맞이할 단 하나의 결말을 빛 속에서 마무리한다. 아무도 예외일 수 없는 길로 들어선다.

 

작가는 예외일 수 없는 길인 죽음을 <아침 그리고 저녁>에 이어 <샤이닝>에서 다시 한번 형상화한다. 전작에서 친구 페테르가 고깃배를 타고 요한네스를 마중 나왔는데 이번에는 깊은 숲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마중 나온다. 전작에서 페테르는 질문하는 요한네스에게 하나하나 답해준다. ‘궂은일이 생긴 아래를 내려다보다 에 접어들자 인도자는 이제 말들이 사라질 거라고 안내했다. <샤이닝>에서는 화자인 가 다가온 이들을 묘사하다가 말미에는 일인칭 복수형인 우리로 주어를 바꾼다. 설명을 듣고 이해하려 했던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경계를 넘자마자 즉각적으로 통찰하고 의문도 망설임도 없이 빛으로 합류한다. 거의 단일한 공간적 배경인 눈 쌓인 숲에서 하루라는 한정된 시간 내에 죽음의 여정을 그린다. 작가는 죽음을 문학적으로 완성해 낸다. 동의하는가와 별개로 사실과 환상을 치밀하게 직조하여 설득력을 갖춘다. 죽음은 도처에 만연하나 나와는 무관하다고, 아직 무관하다고 여기는 게 보편적이다. 하지만 금기시하는 정서와 달리 이면에는 확고한 분위기로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죽음이라는 담론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는 작품이다.

 

<샤이닝>에서 독자는 열 번 남짓 마침표를 썼던 <아침 그리고 저녁>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양의 마침표를 볼 수 있다. 의식의 흐름이 이어질 때 쉼표를 타고 연속해 나간다. 다만 질문 끝에 물음표는 삽입하지 않는다. 답을 간구하기보다 상태를 수용하고 알아차리고 싶은 마음, 답변이 주어지지 않아도 이의가 없다는 마음을 엿본다. 80여 쪽 분량의 소설은 독자를 한 호흡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상당히 감각적이다. 말끝에 얼어붙는 입김, 속수무책으로 에워싸는 눈발이 느껴진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텅 빈 공간이 자리한,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와 캐릭터들에게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는 기분이 든다. 초현실주의 화가가 회화적으로 구축한 미지와 익명의 세계를 간결한 글로 읽으며 상상의 영역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랄까. 한국어판 표지도 인상적이다. 인간이 육신의 눈에 담는 마지막 풍경이 별이 총총히 박힌 채 진공처럼 영혼을 빨아들이는 또 다른 차원의 문일까. 해석은 다양할 것이다. <샤이닝>은 묵독으로 읽어도 좋지만 낭독할 때 울림은 극대화된다. 분주한 일상을 잠시 멈추고 삶 전체를 조망해 볼 작품이다. 물음표 없는 물음이자 사유의 쉼표로 초청하는 작품의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그런데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가 누구인지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아니, 물어볼 수는 있는 일이었던가. 나는 말한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존재가 말한다: 나는 나일 뿐입니다(p.64)

 

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그곳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고 있다, 반짝인다는 말, 순백색이라는 말, 빛을 발한다는 말의 의미도 사라진 것 같다, 마치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진 것 같다, 의미라는 것, 그렇다, 의미라는 것 자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모든 것은 단지 거기 있을 뿐이고, 그것들은 모두 의미 그 자체다,(p.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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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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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는 지루할 만큼 긴 시간 나의 책장에 꽂혀있던 묵직한 붙박이별이었다. 오다 가다 눈에 비치다보니 어느 순간 무덤덤한 배경이 되어버렸다. 가끔 펄서처럼 깜빡였다. 등대처럼,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기도 했다. 못 본 듯 스쳐지나가기를 상당기간 지속하다 몇 달 전 중고서점에 가서 코스모스를 구입했다. 읽어야 되는 책이잖아, 최소한 코스모스는 읽어야하지 않겠니. 순간 정확히 간파할 수 없는 모호한 기분은 들었다. 기시감이랄까. 그렇게 책은 두 권이 되었고 2025년 새해 벽두, 그러니까 12일부터 함께 읽기를 시작하였고 124일에 마쳤다. 함께 읽기의 힘이다. 읽으면서도 떠나지 않는 한 가지 생각은 어떻게 쓸 것인가였다. 한 인간을 통과한 코스모스는 어떤 출력물로 재현하게 될지 기대와 부담과 염려가 엎치락뒤치락했다. 씨름할 여력은 없는데, 수에 약하고 공간감각 제로이며 다니던 길도 잃어버리는 길치이자 이과적 소양을 상당히 결핍하고 있는 사람이기에 독해에만 집중해도 미덥지 않았다. 약속은 약속이다. 함께 읽기로 했으면 읽어야 한다. 그렇게 첫 날이 밝았다.

 

비문학 명저이자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저작인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6, 1980, 719쪽 분량)는 동명의 텔레비전 다큐 프로그램에서 시작하였다. 당시 시공간을 넘나드는 인간의 탐험 여정은 지구 전체 인구의 3퍼센트에 이르는 사람들이 시청했고 다시 한 권의 책으로 묶여 페이지를 타고 떠나는 우주 여행 티켓이 되었다. 칼 세이건의 서거 10주기를 맞아 기념으로 출간한 보급판은 700여 페이지 분량으로 독자의 접근성과 편의성을 높였다. 또한 칼 세이건의 아내인 앤 드루얀의 한국어판 서문인 칼 세이건의 빈 의자는 저자의 발자취를 의미 있게 간추리면서도 제목처럼 아름다운 여운을 담는다.

 

책은 서문과 머리말, 본문으로 구성하고 있다. “코스모스(COSMOS)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p.36)라는 1장의 첫 문장(인용문을 제외하고)은 서문의 첫 문장으로 재인용 하고 있다. 여정의 입구와도 같은 문장이다. 본문은 총 13장에서 우주와 인류의 여행을 시공간을 넘나들며, 포착하고, 파고들며, 상상한다. 1장은 <코스모스의 바닷가에서>로 저자는 이 탐험에서 필요한 두 날개가 회의의 정신과 상상력’(p.37)이라고 전한다. 두 요소의 균형이 전제해야 하고, 차원이 다른 측정 단위, 광년의 의미 등도 설명한다. 별들의 공간에 가상여행을 다녀오고 행성 지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p.46)로 이어지는 몇 페이지는 서정적인 문장으로 설렘 지수를 높인다. 코스모스의 매력을 단번에 이해시키는 인장들로 이런 방식으로 책이 계속 되겠구나 짐작할 수 있는 지점이다. 특히 고대 도시 알렉산드리아와 최고의 자랑거리였던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과 박물관은 인상 깊다. 소속 학자들이 코스모스 전체를 연구했다는 점도, 세계의 모든 지식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집대성한 장소였다는 점도 새롭다. 거의 집착적인 축적이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연상케 한다. 소설 첫 문장에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우주는이 들어 있기도 하기에.

 

지금부터는 장 별 정리를 이어간다. 비문학 벽돌책 서평을 신박하게 쓸 방법은 무엇일까 내내 궁리하면서 읽었다. 이런 책을 다 읽고 쓰겠다는 건 고문의 날을 열겠다는 것과 진배없다. 그래서 독서와 동시에 장별 요약을 하게 되었다. 기록 자체를 위하여, 추후 쓴 만큼이라도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리한다. 절대적이지 못한 요약, 나름대로의 요약은 늘 떫은맛을 남긴다. 이 부분이 더 중요한데 핵심을 빗겨서 정리했다는 날선 자아비판의 위험은 계속 도사린다. 지적에 단련된 나는 그날, 그 컨디션, 그 정신상태에서 건져 올렸던 발췌와 느낌, 엇나간 핵심을 기꺼이 보듬기로 한다. 이게 최선이었나 하는 질문에 모르오, 또는 그렇소, 라고 우기며. 지루한 분들은 패스하기 바란다. 1장에 이어서.

 

2<우주 생명의 푸가>는 외계 생물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한다. 생물학을 음악에 비유할 때 지구 생물학은 단일 주제 형식 음악만을 들려주지만 우주 생물이 들려줄 음악은 푸가일 가능성이 높다. 바로 “10억 개의 성부로 이루어진 은하 생명의 푸가”(p.67)는 화려하고도 장엄할거라 예상한다. 진화론과 자연 선택 이론 대(vs) 위대한 설계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입장은 지금까지도 논쟁적이다. 진화는 환경에 적응하기 유리한 돌연변이들이 축적되기 위한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생명의 출현에서 동물, 다시 최초의 인간이 나타나기까지의 과정을 간추려본다. 복잡한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학문은 한계를 지닌다. 상상력을 보태더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과학과 역사학 등의 학문은 타자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공통의 교훈을 남긴다.

 

3<지상과 천상의 하모니>는 점성술과 천문학, 물리학의 생성과 분화, 발전의 여정을 지적 거인이자 끝없는 헌신의 인물들로 살핀다. 프톨레마이오스 이후 코페르니쿠스를 거쳐 요하네스 케플러와 아이작 뉴턴에게서 인류가 진 빚을 저자는 정성껏 펼쳐 보인다.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상당히 오랜 기간 이름만 올리고 있던 <프린키피아>를 이해는 바라지 않아도 읽어는 봐야 할 것 같다고 백 번째 결심을 한다. 누구에게나 공로와 과실이 있다. 뉴턴이 남긴 마지막 말은 어떤 아쉬움도 상쇄할 만하다.

 

4<천국과 지옥>에서 저자는 관찰 시간 척도를 길게 늘렸을 때 평온과 고요의 지구격동과 소란의 행성이 될 수도 있음을 퉁구스카 사건의 예로 살핀다. 사건의 실체는 지구 자멸을 막기 위한 대비책을 강구의 인식으로 귀결한다. 잘못된 판단이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경각심이다. 그래서 혜성의 실체를 파헤치고, 명명하고, 연구의 궤적을 짚어본다. 언젠가는 행성과 충돌할 혜성을 따라가다가 행성으로 시선을 돌린다. 지구형 행성과 목성형 행성의 엄청난 간극에 숨죽이고, 상상과 실제간 차이에 맞닥뜨린다. 오류를 진실이라고 잘못 세상에 드러낼 때 저자는 반론의 근거를 차례로 댄다. 그러면서 과학은 자기 검증을 생명으로 한다. 과학의 세계에서 새로운 생각이 인정을 받으려면 증거 제시라는 엄격한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P.195)고 주장한다. 동시에 열린 마음을 강조할 때 저자의 겸손하고 개방된 태도는 매우 인상깊다. 지구와 가장 가까운 행성, 수백 년간 자매로 여겨져 온 금성의 진면목은 전 행성 규모에서 대참사가 벌어지는’(p.209) 세계였다. 금성을 지옥으로 명명하면 상대적으로 지구는 천국이다. 그러나 경고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완전히 남의 별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는 무수한 단계들. 저자는 기후 위기를 언급하며 알고 보니 지구는 참으로 작고 참으로 연약한 세계이다. 지구는 좀 더 소중히 다루어져야 할 존재인 것이다.“(p.215)라는 말로 맺는다. 40여 년 전부터 이미 기후 위기를 경고한 과학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5장은 화성에 생명이 존재한다고 믿는 과학자와 화성에 생명이 없다고 하는 과학자의 주장이 반복되어 마치 블루스를 연주하는 듯하다고 <붉은 행성을 위한 블루스>라는 시적인 소제목을 선사했다. 지구와 유사해 보이며 지구에서 표면을 관측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행성인 화성을 주목한 이들이 등장한다. 퍼시벌 로웰, 조반니 스키아파렐리, 러셀 윌리스 등의 연구와 바이킹 착륙선의 화상 탐사 흔적, 그 안에 숨은 노고와 희망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어떤 유기분자도 발견되지 않는 화성에 생명이 있다면, 어쩌면 지구 생명과 동일한 기본 분자로 이루어졌어도 조합의 방식이 낯설 수 있다고 상상의 영역을 넓힌다. 화성에 생명이 있다면, 하는 가정 이후에는 또 다른 질문이 이어진다. 지구화의 개념과 화성의 지구화 실현을 희망적으로 그린다.

 

6<여행자가 들려준 이야기>에서는 보이저 2호의 태양계 외곽 지대 탐험을 엿본다. 저자는 탐험과 발견이 인류사를 특징지은 인간의 가장 뚜렷한 속성이며, 그러한 탐험 중 가장 최근의 사건으로 보이저 계획을 꼽는다. 화성과 금성을 현대판 신대륙으로 가정하며 시선을 17, 18세기 인류의 개척사로 거슬러 올라가며 유럽 지성들의 등장을 헤아리는데 그 중에서 르네상스적 인간을 연상케하는 콘스탄틴 하위헌스의 업적은 두드러진다. 저자가 들려주는 현대판 탐험대의 여행담은 감상적이면서도 생생하고, 무엇보다 보이저 호의 가상 함장들이 기록했다고 가정한 가상 항해 일지는 저자의 끝없는 열정과 진심의 또 다른 증거로 읽힌다.

 

7<밤하늘의 등뼈>에서 저자는 어릴 때 별을 궁금해하던 첫 기억으로 회귀한다. 책은 별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아기의 웃음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류는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반복하면서 살아왔다.”(p.331)며 인류의 조상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한다. 탁월한 상상화는 집요한 관심과 우러나는 진심을 동력삼아 하늘과 달, 별을 그려나간다. 어떤 원시 종족은 은하수를 밤의 등뼈’(p.340)라고 불렀다.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에서 새로운 사조, 새로운 주장이 등장하는데 우주의 정돈된 질서를 코스모스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과학은 이오니아에서 태어났다며 저자는 과학자들을 차례로 호명한다. 탈레스부터 아낙시만드로스, 히포크라테스와 엠페도클레스, ‘원자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데모크리토스의 자취를 따라간다. 데모크리토스의 사고력이 헤라의 젖을 극복하고 밤하늘의 등뼈를 뛰어넘어”(p.359) 하늘 높이 치솟았다고 극찬한다. 이오니아의 과학자들을 지나 피타고라스부터 다시 과학과 철학의 거인들을 만난다. 별은 무엇일까로 시작한 질문은 코스모스와 겨루기 전에 먼저 코스모스를 이해해야 한다는데 이른다.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기와 던져진 질문에 대한 깊이 있는 답변만이 우주에서 지구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밑거름”(p.386)이 된다는 말이다.

 

8<시간과 공간을 가르는 여행>는 별자리 이야기로 문을 연다. 별자리 모양은 공간적으로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바뀐다. “공간과 시간은 서로 얽혀 있다. 시간적으로 과거를 보지 않으면 공간적으로 멀리 볼 수가 없다.”(p.397)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과 시간 지연 현상은 들을 때마다 흥미롭다. “상대 운동의 영향 때문에 길이의 단축과 시간의 지연 같은 일이 벌어”(p.408)지고, 우주선을 타고 여행하는 사람이 보고 있는 시간과 지구에 남아 배웅한 사람들의 시간이 벌이는 어마어마한 격차는 몇몇 영화를 소환하지 않아도 우리의 상상을 광막한 지경으로 이끈다. 역사를 달리하는 두 갈래의 우주들이 나란히 실재할 수 있다는 주장, 과거로 돌아가 역사에 개입한다는 가상과 그로인한 파급도 꼬리를 문다. 저자는 별들의 눈에 비친 인간의 삶도 상상한다. 10억분의 1도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만 반짝 하고 사라지는 매우 하찮은 존재로 여겨질 거라는 견해에는 그럼에도의 희망을 북돋는 선택을 할 것이다. 지금이 미래를 위한 또 한 번의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라고 긍정하듯이 말이다. 카를로 로벨리의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도 상기하게 되는 장이었다.

 

9<별들의 삶과 죽음>은 제목 그대로 별의 시원과 종국을 살펴본다. 수소를 제외한 나머지 원자들이 모두 별의 내부에서 만들어졌으니 별이 우주의 부엌”(p.432)이라고, 인간을 구성하는 원자 알갱이 하나하나가 모조리 별의 내부에서 합성되었으므로 우리는 별의 자녀들”(p.458)이라고 말한다. 적합한 비유는 이해를 돕고 친근한 화법과 저자의 설렘이 배어나는 어투는 독자 역시 그의 파장 안에 머물게 한다. 9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중력이 물질과 빛에 미치는 영향을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예로 들어 설명한 부분이다. 티파티 장면을 단계별로 구성한 삽화(이 삽화좀 크고 선명하게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와 블랙홀을 불가해한 우주적 체셔 고양이”(p.471)라고 언급한 설명도 마찬가지다.

 

10<영원의 벼랑 끝>은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살펴보며 별의 탄생부터 초신성 폭발로 마감하기까지 우주 진화의 대서사시”(p.487)를 다룬다. 은하의 충돌 과정에서 내부의 별들이 서로 충돌하는 일은 거의 없다. 별들 간의 간격이 별 하나의 크기에 비해 너무 멀기 때문이다. 활자를 따라갈 때 광대하고 휘황한 우주의 역동이 그려져 무한한 공간에 떠서 읽는 기분도 든다. 은하를 연구하며 우주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비롯하여 잉태자인 동시에 파괴자로써의 두 가지 속성을 말한다. 현대 우주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주의 팽창과 대폭발 이론에 기여한 휴메이슨과 허블의 발견도 다룬다. 대폭발 이전의 우주, 비어있는 무에서 물질이 생긴 연유를 진화가 아닌 창조로 답할 경우, 소박한 우주관, 순진한 상상(p.513)에 동조한 신화도 짚는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보여주는 세계 창조 신화도 몇 장면이다. ‘납작이나라’(p.524)를 상정하고 차원을 설명하는 부분은 꽤 친절하고 흥미롭다, 마음에 든다. 웜홀과 우주들의 계층 구조도 숙고할만하다.(웜홀을 주제로 한 동화들을 구입했었는데 다 어디로 갔을까) 저자는 우리 우주 외의 또 다른 우주, 그 우주의 사람을 궁금해 한다. 그들의 세계에 진입할 길을 내보자고 독자를 이끈다.

 

11<미래로 띄운 편지>에서 저자는 코스모스 도처에 우리와 전혀 다른 모습의 지적 존재들이 살고 있으리라 예상한다. 현재 지구에 있는 지적 생물들 중에서 가장 우월하고 우아하며 고도의 지능을 소유한 고래를 불러낸다. 마치 노래와도 같은 고래의 소통 방식에 감탄하나 인간 문명의 발전이 소통을 차단할 뿐 아니라 직접적 위해를 가하는 현실에 안타까워한다. 고래나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50억 비트에 이르는 정보를 기술한다면, 정보의 양으로 따지면 세포 하나가 하나의 도서관이 된다. 우리 몸이 100조 개의 세포들로 만들어졌으니 한 사람 안에는 100조개의 도서관이 있는 셈이다. 가늠되지 않으나 즐겁다. 정보의 양이 증가해 유전자에 모두 저장하기 어려워지자 인간은 뇌와 별도의 공용 저장장소를 만들어내는데 바로 기억의 대형 물류 창고인 도서관이다. “책은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러므로 글쓰기를 통해서 우리 모두는 마법사가 된 것이다.”(p.558) 이 장에서는 도서관, , 글쓰기, 기록의 역사, 인쇄술 발전, 진화 과정에서 우연의 개입, 외계에 존재할 지적 생명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간다. 지구가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공동체가 될 때 은하 문명권의 어엿한 구성원”(p.577)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본다.

 

12장은 <은하 대백과사전>으로 인류의 도서관에서 은하의 백과사전까지 영역을 넓힌다.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 고대 이집트 상형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던 열쇠는 로제타석이었다. 그렇다면 고대 문명이 아닌 외계 문명이 보내는 전파 신호를 해독할 성간 로제타석도 있을 테고, 그 역할은 바로 과학과 수학이 담당하리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문명과 문명의 만남은 평화 또는 파괴라는 다른 결과를 남겨왔는데 이에 견주에 우리가 외계 문명과 만날 경우 그들은 우호적일지 파괴적일지 예상해본다. 저자는 우리보다 앞선 기술을 가진 외계 문명인을 우리가 만나게 되어도 염려할 필요가 없겠다는 견해다. “스스로를 다스리고 남과 어울려 살 줄 무른다면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뎌 낼 수 없었을 것”(p.620)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외계 문명과의 만남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우리 자신의 후진성에서 유래하였고 우리의 공포감은 우리 자신의 죄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탠다. 그들이 보낼 정보를 기대하는 저자의 진심은 얼마나 많은 새로운 보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p.621)하는 설렘으로 절정에 이른다.

 

13<누가 우리 지구를 대변해 줄까?>는 우리가 우주의 중심도, 우리 존재가 우주의 목적도 아니라는 현실 인식으로 대장정의 마무리를 시작한다.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에는 국경선이 없으며 쥐면 부서질 것만 같은 창백한 푸른 점일 뿐”(p.632)이다. 타협할 줄 모르는 이기심과 견재는 핵전쟁의 위협에 인류를 노출시킨다. 저자는 군수 산업의 특성과 강대국의 자기 모순적 정당화 논리를 지적하면서 지구상 모든 사람이 핵전쟁의 볼모로 잡혀 있다고 우려한다. 상대를 적대하기 이전에 그들이 지구 어디에 살든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수용하자고 촉구한다. 피부 접촉을 통한 사랑과 폭력 성향의 상관관계는 비교적 최근 시선을 환기했던 브라이언 헤어 등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의 주장을 상기시킨다. 끝에 이르러 책은 2장에서 언급하였던 눈부신 발전시기, 2000년 전의 알렉산드리아를 다시 한 번 소환한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집적한 인류 문화 산물을 영구히 소실하게 된 원인,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터무니없는 낭비는 안타깝다. 책에서 다룬 괄목할 만한 성과나 인물을 시간 함수로 표기한 자료(p.662)는 비어있는 1000년의 암흑기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인류는 우주 한구석에 박힌 미물이었으나 이제 스스로를 인식할 줄 아는 존재로 이만큼 성장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기원을 더둠을 줄도 알게 됐다. 별에서 만들어진 물질이 별에 대해 숙고할 줄 알게 됐다.”(p.682)고 전하며 저자는 인류를 여기 있게 한 코스모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라고 맺는다.

 

범박한 요약이 비록 과녁을 통과하지 못했더라도 활자를 읽으며 검게 반짝이는 우주를 떠다니던 상상 여행 발자국이기를 바란다. 후기에서 역자는 처음 번역을 할 때 원 저작이 이미 20년 된 시점이었기에 21세기 독자들의 반응을 걱정하였다고 쓴다. 그러나 이 책의 현재적 가치’(p.710)는 뜨거운 호응에서 고스란히 증명되었다고 보탠다. 이 책을 빛나게 하는 첫 번째 요인은 우주를 향해 뻗어나가는 저자의 한결같은 열정이다. 우주적 시각으로 관점을 고양시키고 외계의 생명체를 기대하며 만남을 준비하기 원한다. 새로운 별과 생명을 찾기 이전에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을 공유하는 인간은 물론, 동식물과 환경까지 마음으로 돌봐야 한다고 목소리 낸다.

 

두 번째로 전공지식을 갖추지 않은 일반 대중도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는 과학서이면서도 아우르는 범위는 상당히 넓다는 점이다. 우주에 초점을 두면서도 동서양의 결정적 장면, 세계사의 조류들, 빼어나거나 안타까운 인물 열전, 과학의 발전, 문명의 성쇠를 넘나들 뿐 아니라 한 인간의 심리까지도 찬찬히 살펴본다. 그럼으로 책은 먼저 헌신한 이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기념관이 된다. 저자는 여러 곳에서 분명한 주장을 드러내지만 근거 또한 충분히 제시한다.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을 고루 스케치하는데 그 중에서 꼽자면 또 한명의 르네상스적 인물이라 할만한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다. 이분도 천재시구나 하였다.

 

세 번째는 서술 방식이다. 다루는 내용이 단순하지 않더라도 최대한 독자 편에서 설명한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묘사를 읽을 때, 꼭 들어맞는 비유에, 풍부한 은유에, 솔깃한 인용에 잠시 멈추고 상상하게 만든다. 그가 펼쳐내는 지식의 바다는 현학적이지 않고 배려가 넘친다. 밑줄의 행진, 설렘의 향연, 유쾌하고 두근거리는 생생한 어조, 유머러스한 가정이 끝나지 않을 듯이 계속된다.

 

이 책은 저자의 진심이 먼저 줄달음한다. 그 모습이 순수하고 근사하여 독자를 미소 지으며 따라 뛰게 만든다. ‘~(존재)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말을 종종 건네며 낙관을 전염시킨다. 이해하지 못해도 그저 읽을 수 있어 바랄 것 없다는 협동의 마음이 독자를 뿌듯하고 충만하게 만든다. 독서가 이렇게나 즐겁구나, 유익하구나를 새삼 느끼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 도덕 교과서 스러워 혼자 민망해한다. 숫자에 예민하지 못한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또 체감하기 어려운 지점이 천문학 단위이기도 했다. “빛은 1년이면 10조 킬로미터, 6조 마일을 간다.”(p.38)고 하면 6조마일이 뭔데 하며 갑갑해진다. “탄자니아에서부터 물경 38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도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p.681)는 말에 흠, 물안경 아니고 물경이라...조용히 넘어간다. 이뿐이겠는가. 그래도 집중력 옷이라고 이름붙인 자주색 후드 짚업으로 무장하고 용기를 북돋으며 읽어나갔다.

 

매 장 서두의 인용문은 제목만 보았던 과학 고전 목록을 읽어야 할 목록으로 자리바꿈해준다. 그뿐 아니라 과학서, 문학, 예술서, 경전 등 독서의 폭도 감탄하게 된다. 코스모스를 읽으며 어떤 책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어린 왕자>가 네 번째 별에서 만난 사업가는 계산을 하느라 바빴다. 세고 또 센 별의 개수를 종이에 적어 서랍에 넣고 잠궈두는 그는 오억 개의 별로 부자가 되면 그걸로 다른 별을 살 수 있다고 했던가.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에서 로벨리는 엔트로피가 증가하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라고 했던가. 바다의 우아한 주인이자 고도의 지능을 가진 고래는 <모비 딕>의 에이해브 선장과의 끝장 투쟁 상대역으로 장편의 주인공이 되고도 남았겠고, 앞서 말했던 <바벨의 도서관>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자꾸 겹쳐 보인다.

 

5장에서 화성을 읽으며 이현 작가의 그림책 <나는 화성 탐사 로봇 오퍼튜니티입니다>를 다시 꺼내 보았다. 근대 SF문학의 선구자 하버트 조지 웰스 전작읽기도 욕심이 난다. 화성의 카날리를 연구한 조반니 스키아파렐리는 아끼는 그림책인 <피어나다>에 등장하는 주인공 엘사의 삼촌 아니었던가. 어떤 독자는 계속해서 또 다른 책이, 영화가 떠오르고 기사를 검색하거나 프로젝트를 확인하며 저자에게서 멈춘 시간 이후를 거꾸로 들려주고 싶을 수도 있겠다. 다시 칼 세이건의 빈의자로 돌아온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점점 많아질테다. 그가 목격하지 못했던 지구인의 다음 스텝들을 전해주고 싶다.

 

새벽 1시가 넘었지만 실내이기에 밖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별도 보이지 않는다. 너무 길게 쓰는 서평은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졸음과 죄책감이 나란히 몰려온다. 완독하기로 약속한 날에 책을 마치며 귓전에 맴도는 멜로디가 있었다. <별 별 별 하나 별 둘, 너도 별, 나도 별,> 이 동요 모르니? 나는 딸에게 계속 물었는데 모른다고 한다. 젊은 아이가 기억력이 나쁘냐며 인터넷 검색을 해봤더니 세상에,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교가였다. <별 별 별 하나 별 둘, 너도 별, 나도 별, 언니도 별, 나도 별, 모두 다 관악산 정기탄 서문의 별, 아아 서문의 딸> 00여고 교가다. (별이 가장 많이 들어간 교가로 어딘가에 올라 있다는 소식이다) 그러고 보니 부를 때 약간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어떻게 교가를 잊어버리나. 나라는 별이 늙었다. 다시 한 번 그러고 보니 나의 블로그 네임 책먹는 꿈별3년 내내 지속한 교가제창 덕분에 무의식에 스며든 영향도 있지 않을까.

 

서평은 이렇게 쓰는 게 아니다. 세상 최고의 비문학 서평을 써보겠다고 칼을 갈았건만 사방으로 질주하는 듯한, <별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같은 서평을 쓰고 말았다. 퇴고하려고 스크롤을 올리다가 미쳤구나, 라고 내뱉었다. 비현실적으로 장황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시라는 가능성이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또 한번의 기회를 선택할 수 있다. 물론 마음 먹는다는게 내맘 같지는 않다. 언젠가 간결하고 우아한, <코스모스>에 걸맞는 진정한 서평을 다시 써보리라.(오늘은 이만 자리라.) 함께 읽어나간 <독서본능>팀과 리드문을 올려주신 회장님께도 감사한 마음이다. 밤하늘을 보면 칼 세이건이라는 이름이 또 하나의 북극성처럼 빛을 낼 것이다. 세상 다정한 과학 도서, 온기 가득한 비문학 도서 코스모스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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