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엘리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영혼 없는 작가(최윤영 옮김, 엘리, 2025, 272쪽 분량)는 독일어와 일본어로 글을 쓰는 이중 언어 작가 다와다 요코의 에세이 선집이다. 이번 개역 증보판에는 초판본(2011)에서 아홉 편을 추가하여 모두 스물세 편을 담았는데 유럽이 시작하는 곳(1991), 부적(1996), 해외의 혀들 그리고 번역(2002)에서 정수를 모았다. 일본에서 태어나 러시아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에 정착하여 독문학을 전공한 다와다 요코 문학은 일본어 작품과 독일어 작품이 주제, 형식, 문체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고 역자는 전한다.(p.268) 일본어 작품이 스토리를 갖춘 본격 문학에 가깝다면, 독일어 작품은 에세이적 성격이 강하다고 평가하는데 이번 작품집은 후자에 속하는 작가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작가를 향한 호평은 기대를 높이고, 자유로운 여행자이자 집요한 관찰자, 창조적인 예술가로서의 다와다 요코를 서둘러 만나고 싶게 한다.

 

<유럽이 시작하는 곳>은 화자가 동 시베리아 항구까지 배에서 보낸 시간과 유럽까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탄 백 육십 시간의 기록을 모았다. 기록은 여행 일기, 여행이 끝난 뒤에 지어낸여행 일기, 여행기와 상상, 배의 도서실에서 본 지도, 동화 모음집, 잠에 빠져들며 들었던 옛 이야기, 어머니가 어린 시절에 추천 받았다는 지혜로 가득 찬 소설, 화자가 썼던 소설의 한 부분 등을 포함한다. 이야기와 현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면서 화자는 목적지를 향하여 이동하고 마침내 도착한다. 기록 중 등장하는 시베리아의 숲처럼 지혜로 가득 찬 소설, 모스크바를 도서관이 중심인 도시로 각인케 만든 책은 과연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엄마말에서 말엄마로>는 독일로 이주한 작가가 필기도구와 문구류를 소재로 언어의 독특한 차이, 언어를 선물해준 타자기에 대한 회고를 담았다. 특히, 유년 시절에는 단어가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서술한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표제작 <영혼 없는 작가>는 독일어 단어 에서부터 연상의 실타래를 풀어나간다. 방은 공중전화 부스인 전화 방, 고해 방, 작가의 서재로 이어진다. 인간의 영혼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두 가지 이미지를 기다란 빵과 물고기와 견주고, 영혼이 그 사람으로부터 독립되어 동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내가 겪고 쓰는 모든 것은 영혼의 삶과 부합한다.’(p.52)는 문장이 여운을 남긴다. 작가가 영혼이 없을 수 있을까, 영혼을 정신과 등치시킨다면 오히려 영혼 지킴이, 영혼 수호를 사명으로 하지 않을까. ‘영혼 없는 작가라는 아이러니한 제목에 대해 작가는 근거를 들어 설명한다. 영혼은 비행기처럼 빨리 날 수 없어서 비행기로 여행할 때 영혼을 잃어버리고 영혼이 없는 채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동화적인 이유를 독자는 곱씹으며 페이지를 넘긴다.

 

중세도시 관광여정의 짧은 스케치 <로텐부르크 옵 데어 타우버:독일 수수께끼>는 진짜 독일 인형인 호두까기 인형과 다양한 인형들 이야기를 보여준다. <통조림 속의 낯선 것>은 읽기와 이해, 오해와 불일치 등을 다양한 대상과 소재로 연결시킨다. “가끔 나는 모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구역질이 났다. 그 사람들은 착착 준비해 척척 내뱉는 말 이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거나 느끼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p.83)라는 문장은 독자를 멈추어 생각하게 만든다. 말 뿐인 말, 말을 위한 말, 의식을 거치지 않은 소리에 가까운 말을 비롯해서, 유창함의 허위와 위선을 비판한다. <사실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되지만 유럽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도 감각과 언어가 맺는 타성을 직시한다.(p.88)

 

<부적>은 의심과 회피, 경계와 자기방어의 영역이 서서히 겹치다가 분리되는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전철에서 책 읽기>는 제목 그대로가 주제인 일종의 관찰이자 고찰문이다. 한번쯤은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봤을 법한 이야기를 작가는 멋지게 펼친다. <사전 마을>도 발상의 전환, 상상의 거침없음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일본어 원전과 독일어, 한국어 번역을 함께 실었다. <귀신들의 소리>에서 작가는 어린시절 가면극의 북소리를 회고하며 자신에게 비인간적인 무엇이었던 음악에 대해 말한다. 하나의 소리가 품고 있는 여러 겹의 소리가 낯설고 이질적이라 작가는 계속 자문한다. 연상은 불꽃의 갈라지는 끝자락, 이중의 혀를 지나 부조화의 다성성을 상징하는 인물 악마’(p.182), 바흐의 칸타타에 등장하는 단어에 이른다. 바흐 음악회 감상 후 우리의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p.183)라는 질문에 편을 나누어 받아들이거나 배척하는 함의를 지닌 우리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독자 역시 일상에 배어있는 관습적 사고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각성의 순간은 때때로 등장한다.

 

<번역가의 문 또는 첼란이 일본어를 읽는다>에서는 문학의 번역 가능성’, 번역본 또한 문학일 수 있는지를 숙고한다. 작가는 파울 첼란의 시 원전과 일본어 번역본의 관계를 시를 직접 인용하며 첼란의 시들이 일본어를 들여다본다는 인상은 더욱더 강해’(p.195)진 근거를 밝힌다. 첼란의 단어들이 보관 용기가 아니고 열림이라는(p.200) 발견, ‘단어 하나를 쓴다는 것은 문 하나를 연다는 것이며 글자 읽기는 단어 읽기이지 문장이나 음향 읽기가 아니라는(p.201) 통찰을 차분하게 전달한다. 독자는 작가의 세심함 덕분에 경이로운 세계를 잠시 엿본 듯한 기분에 잠긴다. <해외의 혀들 그리고 번역>에서 작가는 프랑스 시인의 시 원전을 받고 배우지 않은 언어는 투명한 벽’(p.216)이라고 생각한다. 초벌 번역본을 받기 전의 기간을 며칠 동안이지만 읽을 수 없는 원본과 같이 살았다는 것을 기쁘게 여긴다. 짐작하고 추측하는 알지 못하는 문자를 낯설게 동시에 기대하며 기다리는 풍경은 그 자체로 시적이다.

 

영혼 없는 작가는 정좌하고 책상에 앉아서 읽고 있어도 내내 흔들리며 어딘가에 기대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작가는 여행 중이고, 그 여행길의 동반자로 독자를 택했다. 독자는 이름 모를 여행지의 예기치 않은 날씨의 변화, 분위기나 낯선 풍경에 반복해서 노출된다. 지도도 정보도 없이 무작정 작가를 따라 나선 채, 길 위에 서서 띄엄띄엄 행하는 독서, 급하게 넘기는 페이지, 여운을 정리하지 못하고 다음 이야기로 서둘러 뛰어들 때의 불안과 조급함, 뜻밖에 발견한 보석을 주어 담을 새 없이 이루어지는 자리이동 등이 그의 작품을 읽으며 부차적으로 얻는 수확, 또는 경험이다. 작가의 아이같은 상상력이 때론 천진하게 다가오고 유머와 위트는 생기를 부여한다.

 

능수능란한 이야기의 세계는 휘리릭 지나가는 듯하나, 상당히 정교한 일침들이 박혀있다. 유년 시절에 단어는 어떤 힘을 갖는지(p.46), 원본 없는 번역이 일어나는 인간의 몸과 태어날 때 주어지는 원본 텍스트 보존 장소인 영혼(p.55), 모어 유창자를 볼 때 경험하는 구역질, 포장과 내용물의 불일치, 단어와 이미지의 괴리, 파울 첼란의 시 탐구에서 원전과 번역의 불가사의한 연결, 번역을 염두한 창작 가능성 등 이야기는 독자를 매혹한다. 단어, 텍스트, 의미, 소통으로 이야기는 무한히 확대된다. 공간을 차지할 때 작가는 이방인으로 때론 정착민으로 존재하며 투명하게 움직임과 쉼을 누린다. 누릴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작가의 관찰자적 시선, 적극적인 기록자 시선, 깨어 있는 의식, 그렇게 무한히 수집하는 순간을 결코 잃어버리는 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롭고 에너지가 가득하며 거침이 없다. 그렇게 고요하고 소란한 즐거움을 책에 저장했다. 영혼 없는 작가는 다와다 요코의 세계로 들어가는 빼어난 입문서 또는 초대장이 되어줄 것이다.

 

 




책 속에서>


유년 시절에는 단어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럼으로써 모든 단어가 각자의 삶을 살게 된다. 이 삶은 단어를 문장 내의 의미에서 해방시켜준다. 심지어 어떤 단어들은 너무나 생명력이 넘쳐 마치 신화속의 인물처럼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펼쳐 나갈 수 있다.(p.46)

 

글을 쓰는 사람은 삶을 온전하게 사는 게 아니라는 주장은, 사람과 삶을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임이 틀림없다. 아마 그들은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는 나도 살고 있고 나의 삶도 살아간다고 말하고 싶다. 나의 글도 삶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글을 쓸 때 그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는 질문은 비뚤어진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질문은 인간을 중심에 세우기 위해서 던지는 것이다.(p.5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의란 무엇인가 - 한국 200만 부 돌파, 37개국에서 출간된 세계적 베스트셀러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의란 무엇인가(김선욱 감수, 김명철 옮김, 와이즈베리, 2014, 2009, 444쪽 분량)는 마이클 샌델의 정치 철학 강의를 통해 우리 사회에도 정의라는 화두를 던졌다. 책은 2010년 처음 출간 당시 큰 반향을 일으키며 정의 바로 세우기의 지침서가 되었다. 저자는 집필의 목적을 정치 역사 또는 사상사를 다루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정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립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도록 만들어, 자신이 무엇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도록 하는 데 있다.’(p.55)고 밝혔다. 책은 총 10개의 장으로 정의에 대해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숙고하고 성찰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여러 관점과 입장에 귀 기울이게 만든다.

 

정의란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문제일까?”라는 제목의 첫 장은 정의에 대한 세 가지 접근 방식을 보여준다. 바로 복지, 자유, 미덕인데 그 중 복지의 극대화에 영향력 있는 견해는 공리주의다. 정의의 원칙을 추론하기 위하여 저자는 폭주하는 전차즉 트롤리 딜레마를 예로 든다. 두 번째 사례 또한 민감한데 저자는 혼동되는 상황을 생각하고 정리해아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것이 바로 철학으로 가는 기폭제’(p.53)이며, 행동의 세계와 이성의 영역이 소통하는 방식이 도덕적 사고의 근간을 형성한다고 전한다. 2장은 제러미 벤담의 공리주의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춘다. 벤담은 도덕의 최고 원칙은 행복의 극대화, 즉 쾌락의 총량이 고통의 총량보다 많게 하는 데 있다고 주장했다.(p.63) 일반적 복지를 증진시키려는 시도는 반박을 부르는데 계약과 희생양이라는 논점을 제시하는 어슐러 르 귄의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을 소환한다.

 

3우리는 우리 자신을 소유하는가?: 자유지상주의편에서도 주장은 갈린다. 경제 불평등은 부당하므로 부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해 가난한 사람들을 돕자는 이들과 자유로운 선택으로 얻은 부는 부당하지 않다는 이들이 있다. 정의를 행복의 극대화라고 보는 시각에서는 부의 재분배 주장을 옹호하지만 반박도 존재한다. 두 가지 반대 주장이 있는데, 그 중 자유지상주의자는 부자의 세금을 가난한 자들에게 재분배하는 행위는 자신의 소유를 원하는 대로 할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이라는 근거를 댄다. ‘자신은 자신이 소유한다는 생각’(p.114)은 선택의 자유를 둘러싼 논쟁에 자주 등장하는데 설득력 있지만 위험한 지점이 존재한다. 저자는 장기 거래와 안락사의 예에서 자기소유의 개념을 좀 더 살펴본다.

 

4장은 자유시장은 공정한지, 돈으로 살 수 없거나 사면 안 되는 재화는 무엇이고 왜 문제가 되는지 논의한다. 5장에서는 이마누엘 칸트의 철학을 살펴본다. 칸트는 정의를 이해하는데 공리주의 접근법과 미덕에 기초한 접근법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하지 않기에 거부하고 대신 정의를 자유와 연관시키는 접근법을 지지한다. 칸트는 모든 인간이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이유를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p.166)이라는 데서 찾는다. 그는 쾌락과 고통이 인간의 통치권자라는 벤담의 주장에 반대하며 그 자리를 이성에 내어준다. 이성과 자유, 두 가지 능력이 합쳐졌을 때 우리는 특별한 존재가 된다고 여긴다. 칸트가 세 가지 주요 개념인 도덕, 자유, 이성을 대조 혹은 이원론적으로 설명한 사항 중에서 가언 명령과 정언 명령의 개념과 다른 어떤 동기도 없이, 그 자체로 절대적인 명령을 내리는 실천 법칙’(p.183)인 정언 명령 소개는 인상 깊다. 칸트의 3대 비판서 정독의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장이다.

 

6장은 원초적으로 평등한 상황에서 어떤 원칙에 동의할 것인가를 질문한 존 롤스의 <정의론>으로 시작한다. 롤스는 무지의 장막뒤에서 선택한다는 가상의 사고 실험을 통해 사회 계약의 개념을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이루어지는 가상적 합의라고 보았다. 7장은 소수 집단 우대 정책에 반발하는 입장과 지지하는 입장을 살펴본다. 지지하는 이유의 세 가지 근거는 표준화된 시험의 격차 또는 편향을 바로잡기 위해서, 과거의 차별을 보상하는 차원에서, 학교와 사회의 공동선을 앞세워 다양성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다. 이 장에서 저자는 영예, 미덕, 선의 의미에 관한 논의와 결부되어, 가망 없는 의견의 차이를 다루는 것처럼 보이는 정의에 관한 논쟁이 논란에서 벗어나 정의와 권리의 기본을 찾기 원한다는데 주목한다. 칸트와 롤스의 철학이 그 기본을 찾으려는 시도였다고 정리한다.

 

8장 정의와 도덕적 자격 편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함께 본다. 근현대의 정의론이 공정성과 권리를 앞에서 언급한 영예, 미덕, 도덕적 가치에 관한 주장으로부터 분리하고자 하는데 반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의와 좋은 삶은 연관될 수밖에 없고 정의는 중립적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추론을 따라가며 재화와 배분, 정치의 목적을 열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정치는 어떻게 하면 좋은 삶을 살 것인가에 관한 것’(p.288)으로 공동선을 고민하고 공동체 전체의 운명을 보살피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언어는 선을 식별하고 고찰하는 매체로 본다. 9장은 충성심의 딜레마를 다루는데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를 묻는다. 사과와 손해 배상, 조상의 죄를 우리가 속죄해야 하느냐는 논쟁은 지금도 첨예하다.

 

저자는 10장 정의와 공동선에서 앞서 언급해온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접근법을 요약한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 철학, 자유지상주의와 평등한 사회를 향한 존 롤스의 주장,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찰하는 것’(p.379)으로 저자는 이 중 세 번째 방식을 선호한다고 밝힌다. 저자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이견을 기꺼이 수용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p.380)며 공동선을 추구하는 새로운 정치의 모습을 전망한다. 도덕적 이견과 차이에 도전하고 때론 경청하며 직접적으로 참여하자고 촉구한다.

 

책은 어쩌면 인류와 함께 태동하고 동반해온 정의에 대해 환기시키고 숙고하도록 돕는다. 최고선으로 여겨지는 원칙은 입장과 관점에 따라 다른 면을 보여주고 혼란과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저자는 정의 개념이 어떻게 변화해왔는지 다양한 사례와 함께 과정을 보여준다. 사고실험과 실제 에피소드를 배치하여 현실과 이론의 충돌, 선택하기 힘든 딜레마 상황을 제시함으로 독자는 생각과 행동, 선택과 주장에 한 번 더 숙고하거나 귀 기울이는 경험을 한다. 주제가 심화되고 장이 바뀔 때마다 매끄러운 정답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결말 부분의 총평으로 다음 장의 질문지를 받아볼 마음의 준비를 시킨다.

 

책을 읽으며 칸트의 철학을 간략하게나마 조망할 수 있어서 더욱 기억에 남는다. ‘정의라는 화두로 주요 철학 사상을 연결하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는 점을 책의 장점으로 꼽을 수 있다. 또한 인간은 이야기하는 존재’(p.326)라며 서사라는 관념을 제시한 매킨타이어의 견해는 특히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나를 사회적, 역사적 역할과 지위와 분리 가능하다라는 추론은 잘못이다”(p.329)라는 주장은 공감이 되었다. 서두에 저자가 밝혔던 책의 목적, 정의에 대한 견해 정립 후 비판적 검토를 통해 깨닫고 통찰한다는 목적은 저서의 구조를 따라 페이지를 넘기는 행위, 훈련의 장을 통해 어느 정도 달성된다. 쏟아지는 사례와 논리에 답하느라 부지불식간에 긴장하고 입장을 생각하게 만드는 저서로 토론할 때 더 빛나는 책이 될 것이다. 공론의 장을 통과해 정의가 추상적 개념이 아닌 매순간 선택함으로 성취하고 실현하는 성장의 고리가 되지 않을까. 유익하고 흥미로운 샌델의 저작을 추천한다.

 

 


책 속에서>


정의로운 사회는 단순히 공리를 극대화하거나 선택의 자유를 확보하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좋은 삶의 의미를 함께 고민하고, 그 과정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이견을 기꺼이 수용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p.38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천병희 옮김, , 2008, 575쪽 분량)은 그리스 비극의 완성자라고 불리는 소포클레스의 현존 작품을 모두 담은 원전 번역본이다. 아테네가 문화적으로 가장 성숙했던 시기에 배우인 동시에 극작가로 활동했던 소포클레스는 일생동안 123편의 작품을 발표했지만 남아있는 작품은 일곱 편뿐이다. 괴테는 소포클레스 이후 그 어떤 사람도 더 호감 가는 사람은 없다며 몇 편의 작품이 남아있지만, 재능있는 사람이라면 이로부터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의 비극론도 소포클레스의 비극을 중심으로 작성하였다고 하며, 특히 <오이디푸스 왕>을 비극의 모범, 비극의 전형이라고 평가하였다. 그리스 비극은 서양 문학의 원천인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오뒷세이아>의 시기를 지나, 호메로스를 재해석하면서도 인간에 대한 성찰과 탐구를 가속였다. 그리스 비극은 디오니소스에게 바쳐진 제의에서 점차 무대에서 공연되는 국가적 행사로 자리 잡는다.

 

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은 테베 3부작이라고 불리는 <오이디푸스 왕>, <안티고네>,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먼저 배치한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테베의 왕 라이오스에게 내려진 신탁은 라이오스의 죄과가 불러일으켰지만 작품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가혹한 예언을 피하기 위해 라이오스와 이오카스테 부부가 행했던 비밀스런 악행, 우연히 예언을 알고 벗어나고자 집을 떠난 오이디푸스의 결정도 운명을 벗어나게 하지 못했다. ‘이중의 혼인을 슬퍼했던 이중의 어머니이오카스테는 이중의 문을 걸어 잠근 채 목숨을 끊는다. 이오카스테는 알려지지 않은 살인자를 찾아내 정화하겠다는 오이디푸스에게 우연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두려워한들 소용이 없다, 그러니 되는 대로 그날그날 살아가는 것이 상책”(p.68)이라고 만류했으나 막을 수는 없었다.

 

오이디푸스는 충분히 오랫동안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한 스스로에게 앞으로는 어둠 속에서 보라며 두 눈을 찔렀다. 그의 비극은 신에 의해 일어났지만, 이 행위는 운명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행했음을 분명히 한다. 딸들에게 이 아비는 그때그때 형편에 따라 살아갈 것이나, 너희는 이 아비보다는 나은 삶을 살게 해달라고’(p.89)기도할 것을 청한다. 그날그날 살아가라는 이오카스테의 말을 오이디푸스는 남은 생을 통해 실천하게 된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명제가 출현한 시기, 이성과 논리로 무장한 오이디푸스는 추리를 시작하고 범인을 찾고자 하나 손쓸 수 없는 비극을 목도하고 만다. 운명에 맞섰으나 실패한 그는 자기 의지로 자신을 벌하고 자신이 말로 내뱉은 판결을 실행한다. 반면 크레온은 나는 마음이 눈멀지 않았’(p.52)다고 주장하는데, <안티고네>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그의 마음은 제대로 보지 못한다. 보고자 애썼으나 제대로 보지 못한 눈을 스스로 벌하는 오디세우스는 독자에게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에 반해 모든 것을 보는 시간은 그대도 모르는 사이에 그대를 찾아내’(p.77)고 대가를 취한다. 인간의 의지와 정해진 운명의 격차는 상당하다. 그럼에도 비극은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자기가 감당할 몫을 수용하는 인간을 숭고하게 그려낸다. 다음 작품 <안티고네>이중의 가격으로 한날한시에 세상을 떠난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의 장례 문제, 이로 촉발되는 주제를 담는다.

 

<안티고네>에서 하마르티아, 즉 결정적 흠결 또는 비극의 직접 원인은 크레온의 편협한 이성주의라고 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 왕>에서 자신은 현명하고 마음이 눈멀지 않았다고 자부했던 크레온이 권력을 가지게 되자 자기의 원칙을 앞세우며 조카인 안티고네, 아들 하이몬, 예언자 테이레시아스, 그리고 아내의 말에도 귀 기울이지 않고 결국 파멸을 부른다. 헤겔은 <안티고네>를 가장 숭고하고 완벽한 최상의 예술작품이라고 평했다. 그는 이 작품을 국가와 이성이라는 인간의 법과 자연과 감성이라는 신의 법의 충돌로 보았는데, 전자는 크레온이, 후자는 안티고네가 대표한다. “세상에 무서운 것이 많다 하여도 사람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다네.”(p.108)로 시작하는 코러스의 인상적인 대사는 인간의 위대성과 그로인한 오만을 경고한다. 자매인 안티고네와 이스메네의 입장 차이는 <엘렉트라>의 두 자매와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오이디푸스 왕의 추방은 즉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고 격동하는 감정도 가라앉았을 때 아마도 크레온의 심정 변화로 추방된 오이디푸스 왕 곁에 안티고네가 따른다. 오이디푸스 왕의 신비로운 죽음까지 담고 있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가 죽기 직전에 쓴 비극으로 작가 사후에 그와 이름이 같은 손자에 의해 공연되었다.(p.152) 내용적으로는 <오이디푸스 왕><안티고네> 사이에 위치하는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는 마치 작가가 반드시 마무리 짓고 싶은 이야기였던 것처럼 보인다. “그 행위들은 내가 행한 것이라기보다 당한 것이란 말이오.”(p.166)라고 적극 자신을 변호하는 오이디푸스가 인상 깊다. 크레온의 속내를 간파하는 오이디푸스, 특히 그의 저주는 <안티고네>의 결말에서 거의 실현된다.

 

<아이아스>는 소포클레스의 현존 비극들 중 맨 먼저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죽은 아킬레우스의 무구들이 투표에 의해 오뒷세우스에게 돌아가자 아이아스는 깊은 상처를 입는다. 그 후 일어나는 일련의 비극적 사건에서 아테나 여신의 개입과 오뒷세우스의 역할이 시선을 끈다. 트로이의 전사 헥토르와 아이아스의 선물 교환은 <일리아스> 7헥토르와 아이아스의 대결에 나오는데, 존중의 의미로 서로 교환했던 헥토르의 칼과 아이아스의 혁대는 훗날 서로의 죽음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아이아스의 결심을 만류하고자 호소하는 테크멧사는 헥토르(트로이의 영웅)를 만류하던 안드로마케를 떠올린다. 헤라클레스의 최후를 그린 희곡 <트라키스 여인들>도 아내 데이아네이라의 하마르티아를 살펴볼 수 있고, 무엇보다 부모를 잃게 된 휠로스의 반항적 대사에 답하는 코러스의 구절, “하지만 그중에 제우스가 아닌 것은 하나도 없어요.”가 의미심장하다.

 

<엘렉트라>는 오레스테스 신화를 다룬 대표작 중 하나다. 10년간의 트로이 전쟁에서 돌아온 그리스군 총사령관이자 미케네의 왕인 아가멤논이 아내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에게 살해당한 후, 엘렉트라와 그녀의 남동생 오레스테스가 완성하는 복수를 다룬다. <필록테테스>는 트로이아 전쟁 때 트로이아로 항해하던 중 독사에 물려 무인도 햄노스 섬에 버려졌던 그리스 명궁이다. 작품은 전쟁 승리를 위해서 그가 가지고 있는 헤라클레스의 활이 필요하다는 예언에 따라 버렸던 자를 고향에 데려다 준다고 속여 트로리아로 데려가려는 과정 중의 갈등을 그린다. 오뒷세우스의 지략과 술수가 동원되고 필록테테스는 저항하지만 헤라클레스의 환상적 개입으로 합의하게 된다. 네옵톨레모스가 처음에는 오뒷세우스의 계획에 동의하였으나 결국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행동한다는 변화에 중점을 둔다.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옵톨레모스의 추후 행보는 트로이아 함락 후 헥토르의 남은 가족에게 상당히 잔인하여 놀라움을 안긴다.

 

그리스인들은 연극을 보면서 정화와 부활의 기쁨을 느꼈다고 한다. 제의적 합창 트라고디아에 배우가 추가되면서 연극처럼 변화한 그리스 비극을 보는 관객은 어느 사이 무대 위 배우에 자신을 일치시켰을 것이다. 본의 아니게 불행한 상황에 처한 그들에게 공감하고, 감정을 이입하는 일, 선택을 지켜보며 그 자리에 나를 대입하는 일, 배우의 대사에서, 코러스와 주고받는 대화에서 마음을 울리는 문장을 건져 올리고, 간직하는 일은 자체가 성찰이자 정화였을 것이다. 그리스 비극을 읽으며 현대의 독자 또한 배우들의 목소리와 합창을, 몸짓과 발소리, 절규와 침묵을 듣는다. 분투하는 인물들과 치열하게 논쟁하며 논리를 세우는 이들이 등장한다. 어쩌면 논리 세우기는 상대방을 설득하기 보다는 자신을 먼저 이해시키고 확증하기 위한 것처럼 보인다. 여타의 조건에 시선을 빼앗기다 자칫 중심을 잃을세라 부지런히 목소리를 내는 인물들은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끌어 모으고 집중한다.

 

그들이 맞설 대상은 다양하다. 타협할 수 없는 신탁, 이미 정해졌다는 운명, 착오와 착각, 속아 넘어간 어리석음일 수도 있다. 신의 개입은 억울함을 더 부추기나 하소연 할 상대조차 없다. 불의하다, 불공평하다고 외치는 대가를 목숨으로 지불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소포클레스의 현존하는 비극 일곱 편은 일곱 개의 보석처럼 조명에 따라 다른 빛을 낸다. 읽을 때마다 독자의 상황을 반영하여 다르게 읽힐 것이고 다른 문장에 밑줄을 더한다. 아름답거나 확신에 찬, 비유와 상징을 가득 품은, 오래 묵은 명언이나 명제처럼 독자의 마음에 다가오는 구절들이 깊은 울림을 남긴다. 오랜 여운을 안긴다. 저항함으로 극복하고 수용함으로 카타르시스를 전하는 인물들이 퇴색하는 법 없는 질문을 던진다. 숭례문학당에서 함께 읽기를 진행하며 작품별 논제로 한 뼘 깊이 숙고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빛을 잃지 않는 고전, 그리스 비극 읽기를 추천한다.

 



 책 속에서>


코로스:

끔찍한 일을 저지른 분이여, 어찌 감히 스스로 눈을

멀게 하였나이까? 어떤 신이 그대를 부추겼나이까?

 

오이디푸스:

친구들이여, 아폴론, 아폴론, 바로 그분이시오.

내게 이 쓰라리고 쓰라린 일이 일어나게 한 분은.

하지만 내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닌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소이다. 보아도

즐거운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할진대,

무엇 때문에 보고 있어야 한단 말이오!(1327-1335/p.8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팔월의 빛 1 문학의 세계
윌리엄 포크너 지음, 이윤성 옮김 / 책세상 / 2024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팔월의 빛을 반드시 팔월에 읽겠다고 의도하지 않았다. 7월 말에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논제 세미나를 진행하고 곧바로 그동안 아껴두었던 팔월의 빛을 읽기 시작하였다. 수년 전 어느 날 문동 카페 대00님의 두 권짜리 선물이 도착했을 때 포크너라는 이름은 내게 친숙하지 않았다. 아마 한 작품도 읽기 전이었을 당시에는 앞으로 포크너가 나의 독서 여정에 어떤 모퉁이돌, 나아가 디딤돌이 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지금은 포크너를 통해서 아끼는 이름들을 연상하는 일이 소중하다. 까뮈나 가르시아 마르케스, 푸엔테스가 그 자체로 빼어나지만 포크너와 연관할 때 또 다른 즐거움을 안긴다. 뿐만 아니라 도착적인 분위기를 내뿜는 길고 짙은 문장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인물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를테면 과거의 어둠으로 침잠하는 하이타워 또는 조 크리스마스를 생각할 때, 이야기를 만들어내던 이반 카라마조프, 자신이 만든 이야기 속으로 끌려들어가던 이반이, 실체로 모습을 바꾼 이야기 속 인물과 어두운 방에서 대면하던 불안한 이반 카라마조프가 포개진다.

 

윌리엄 포크너의 팔월의 빛 1, 2(이윤성 옮김, 책세상, 2009, 1932, 406쪽 분량(1)/352쪽 분량(2))은 가장 환하고 뜨거운 빛으로 인간의 삶을 조명하고, 그 아래 드러난 생의 어둠과 희망을 깊이 응시하는 소설이다. 소리와 분노(1929), 압살롬, 압살롬!(1936)과 함께 포크너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장편 팔월의 빛 1, 2(1932)은 포크너 문학의 주요 배경인 가상의 공간 요크나파토파 제퍼슨 시에서 금주법이 시행되고 있던 1930년대 초 8월의 약 11일간의 이야기다. 포크너는 1949심오하고 독창적인 예술적 기교를 통해 인간의 영혼을 탐구했다는 평가와 함께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작가는 사랑, 명예, 긍지, 연민, 희생, 인내-그런 것들을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소설은 형식에서 난해하고 실험적이다. <소리와 분노>,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압살롬, 압살롬!>등의 작품에서 경험해온 서사 기법, 예술적 기교는 인간의 영혼 탐구라는 주제를 성취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도구였음이 분명하다.

 

제목 없이 스물 한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의 첫 장은 리나 그로브로 시작한다. 젊은 여성인 리나 그로브는 임신한 몸으로 한 사람을 찾아 앨라배마에서 미시시피 주까지 이동하여 4주만에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가 부를 것이라 믿고 소식을 기다리던 중, 직접 찾아 나서기로 결정하고 실행했다. 제퍼슨에 있는 제재소에 가면 만나게 될 한 사람, 루커스 버치를 생각하며 맨발을 옮기는 리나는 평온하다. 다만 그녀는 루커스 버치 같은 작자들’(p.11)의 대표격인 상대방의 진면목을 뱃속의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야 확인하게 된다.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고, 마차를 얻어 타면서 제퍼슨에 도착하자, 리나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했던 특유의 낙관으로 세상에, 사람은 돌아다니기 마련인가 봐.’(p.43)라며 감탄한다.

 

두 번째 장은 바이런 번치의 회상으로 등장하는 조 크리스마스다. 독자는 처음 크리스마스가 제재소에 모습을 드러낸 장면을 바이런의 목소리로 목격한다. 그는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조 크리스마스라는 이름과 이름을 발음할 때의 소리가 불러일으키는 징조와 이미지, 경고와 운명을 의미심장하게 기록한다. 3년 전 어느 날의 조 크리스마스에 이어, 6개월 전 제재소에 나타난 또 다른 사람인 조 브라운은 라디오를 켜고 달리는 빈 자동차, 도움 되는 일이라고는 결코 없는 한 마리 말을 연상케 한다. 브라운은 속이려는 자이고, 이름부터 가명이듯 사람의 본질이 베어있기 마련인 음색이나 말하는 방식에서부터 솔직하지 않은 점이 묻어났으며, 이런 사실마저 쉽게 간파 당한다. 도둑질이나 살인조차 잘하려면 보통 이상은 되어야 하고, 목표를 세우고 매진해야 하는데 그럴만한 인물이 결코 못되는 사람, 바로 리나가 찾아 나선 상대다. 크리스마스와 브라운이 버든 양의 농장이 있는 오두막에 함께 살며, 금주법이 시행되던 시기에 밀주를 판매하고 있다는 소문은 공공연하게 퍼졌다.

 

마을에서 바이런 번치에 대해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단 한명은 하이타워 목사다. 25년 전 이 마을의 교회에 부임했던 젊은 목사는 아내와 함께였다. 그러나 추문과 사건으로 아내를 잃고 교회로부터 버림받은 추방자 신세가 된 채, ‘치욕이 서린 집에 혼자 기거하며 가끔은 바이런 번치와 이야기를 나눈다. “한때 사랑이 있었다 하더라도 바이런 번치는 그녀를 잊었을 거라고 사람들은 말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녀가(아니면 사랑이) 그를 잊었다는 말이 더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p.65)라는 감성어린 글이 번치를 소개하는 첫 문장이다. 그런 번치에게 영원히 기억될 순간이 다가온다. 여느 때처럼 토요일 오후 혼자 제재소에 남아서 일을 하고 있던 그에게, 버든 양의 집에 불이나 누런 연기가 피어오르던 오후에, 사람들은 모두 불구경에 몰려있을 시간에, 리나 글로브가 걸어 들어와 루커스 버치, 즉 조 브라운 행세를 하고 있는 버치를 찾는다.

 

이후 소설은 인물과 사건을 추가하고 시간을 변조한다. 에피소드를 적제적소에 배치함으로 주요 인물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직조해간다. 그림자 같았던 아이 조 크리스마스가 고아원에서 겪었던 사건, 그의 곁에 있던 어른들, 그를 입양하는 가정에서 당하는 종교적 억압은 상당히 사실적이다. 버림받아서, 아이여서, 모질고 무례한 양부에게 입양되어서, 흑인의 피가 섞여있어서 그는 고통 받지만, 현명하게 최선의 선택을 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알지 않기로 한다. 크리스마스는 자신의 손으로 버든의 목숨을 거두고, 퍼시 그림이라는 가공의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다. 조이로 태어나서 조 크리스마스로 불리다가 조 매키천이 되었다가 다시 조 크리스마스로 죽음을 맞는다.

 

크리스마스가 몸을 피했던 하이타워 목사의 집을 배경으로 소설은 목사의 유년시절로 이동한다. 처음 제퍼슨에 온 젊은 시절에 그는 저물어가는 구릿빛 햇살이 어떻게 거의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처럼 보였는지를 기억한다(p.679)고 회상한다. 매일 저녁 혼자 앉아서 지켜보는 석양은 그에게 두 번째 감각을 자극하고 귓전에 울리는 이미지는 여덟 살 때 보았던 아버지의 옷, 환영에 시달리게 했던 낡은 옷에까지 데려간다. 남북 전쟁 당시 대치했던 병사들, 어쩌면 누군가의 죽음의 증거였을지 모를 천 조각은 공포에서 자부심의 대상으로 변화한다. 하이타워의 성찰은 무의식 심연까지 내려가 어둠과 고통을 샅샅이 조사하다가 모레 구덩이에서 벗어난 마차바퀴(p.715)처럼 자유로워진다. “밤이 완전히 내려앉으려고 하는 팔월의 부드러운 대기에 걸린 마차 바퀴는 후광과 같은 희미한 광채를 만들어 자신을 감싸려고 한다. 그 후광은 얼굴들로 가득 차 있다.”(p.715)

 

포크너는 소리와 분노를 쓴 이유를 '캐디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단편으로 짧은 생을 살게 할 수 없었다.'(p.430, <소리와 분노>문학동네) 전했다. 마찬가지로 8월의 빛에서 빛은 임신한 젊은 여자 리나를 가리킨다고 밝혔다. '자기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할 줄 아는 인물'(p.757)을 리나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리나를 통해 어쩌면 삶은 태도의 문제, 선택에 따라 다른 문이 열리는 시험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는 비극적이고 고통스럽기도 한 전체 서사의 처음과 마지막을 리나 글로브에게 할애함으로 잔인한 날카로움을 감싼다. 그녀는 고행길을 걸으며 단 한 번도 푸념하지 않았고, 다가오는 정황을 한결같이 긍정의 편에서 해석했으며, 아무리 사소해도 감사를 표하는데 주저한 적이 없고, 루커스 버치를 대면했을 때 알아야 할 진실은 정확하게 통찰했다. 그녀는 하이타워 목사가 새로운 시작을 꿈꿀 수 있도록 의미 있는 시발점을 제공했고, 바이런 번치에게 유일한 가치, 빛의 존재가 되어주었다. 소설의 결말은 리나의 명랑한 어조를 그대로 반영함으로 오래고 비참한 굴곡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운 온기와 새로운 가능성을 선사한다.

 

남북 전쟁 이후 여전히 인종갈등이 첨예한 시기에 일어난 백인 여성 살인 방화사건은 갈등에 불을 지핀다.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는 인물들은 쉽게 공격 대상이 되고, 재수용의 가능성도 기회도 박탈된다. 소설은 미묘한 인간의 속내를 선명한 문장으로 정리함으로 거울 역할을 해낸다. “마을 사람들은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이란 때때로 누군가에게 마침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강제로 시켜놓고 나서는 오히려 그들에게 미안해지는 것이다.”95에서처럼. 소설은 시공간적 배경이 분명하지만 포크너의 다른 작품들에서 보듯 보편성과 확장성을 가지고 독자에게 질문한다. 이 인물, 이 사건, 이 배경과 정황, 또는 선택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포크너 소설의 매력에서 문장을 빼놓을 수 없다. 끝없이 이어졌으면 싶은 장문, 결코 지루한 법 없는 열거, 리듬마저 느껴지는 사유의 나열, 비유와 직유 등 생생한 수사법의 활용, 정의 내리기, 재정리하기를 비롯하여 적확한 문장의 행진이 계속된다. 크리스마스, 하이타워 목사 등 인물의 상황에 따라 결을 달리하며 소리로 심리를 표현하는 장면들, 전작인 소리와 분노에서 그려냈던 소리의 이미지는 더욱 섬세하고 상징적으로 진화한다. 비참한 상태에서도 놓치지 않고 흐르는 서정적인 자연의 묘사, 숲과 나무에서 공간과 시간으로 즉, 구체물에서 사유로 변화해가는 상념 등은 독자를 계속 머물게 만든다. 소설은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인생의 장면들 또한 정확하게 포착한다. 작은 차이는 복선이 되어 깊은 어둠을 드리우거나 누군가의 안녕을 안심하도록 돕는다. 캐릭터 설명이 철두철미해서 그들은 살아있는 인물로 어딘가에서 지금도 움직이고 있을 듯싶다. 2, 3AB를 연상하는 일이 가능하다. 세상에는 제2의 바이런들이 있듯이 제 2의 퍼시 그림도 종종 모습을 드러낸다.

 

역시 이번에도 포크너를 읽으며 소설 안으로 심각하게 흡수되어 버리는 경험을 한다. 일상은 창백하고 무감해져서 현실복귀를 위해 일시 정지로 잠시 멈추는 과정, 숨 돌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 한가지, 작품이 주는 감동은 그 모든 여정의 슬픔을 위로할 만큼 빛이 난다. 작가는 친절하게 기대와 설렘을 마련해놓는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부당하게 던져진 존재들은 안간힘을 써서 성장해간다. 그러나 성숙하거나 온전해지지 못한 채 쫓기고 내몰린다. 불시에 삶을 빼앗기기도 하지만 전가할 책임과 감당할 책임은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아직 뜨거움의 절정 팔월이어도 이미 태양은 이미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절정과 퇴락은 겹치고 혼재한다. 책을 읽으며 팔월을 언급하는 문장들을 모아보아도 좋겠다.

 

사람이란 무슨 일이든 견딜 수 있는 것 같군. 하기야 사람은 전혀 해보지 않은 일조차 견딜 수 있지. 사람은 견딜 수 있는 것 이상이라고 생각되는 일도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어. 소리 내어 엉엉 울 수 있는 상황도 능히 참을 수 있지.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견딜 수 있어. 뒤를 돌아다보든 아니든 상황이 나아질 게 없다는 것을 알 때는 특히 그렇지.”(p.618) 바이런다운 말, 독자에게 건네는 작가의 편지 같은 말들이 기쁘게 닿는다. 소설의 부제를 길 위에서라고 붙여본다. 수많은 인물들이 잃어버린 길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자기 앞에 놓인 길을 얕보고 저주했으며, 그 길 위에서 방황하고, 30년을 헤맨 끝에 길을 찾기도 하지만 너무 늦은 경우도 있었다. 방향도 없이 길 위를 무작정 달리던 이, 먼지 날리는 길에서도 기꺼이 미소 짓는 이들 역시 보았다. 치밀하고 치열한 포크너식 글쓰기는 예상했던 대로 놀라움을 자아낸다. 계속해서 질문한다. 부조리한가? 그게 다인가? 이제 끝인가? 라고. 더 이상 집필되지 않지만 여전히 몇 번이고 다시 읽어야 할 작품들이라는 사실을 위안 삼는다. 아직 8, 포크너의 8월의 빛을 읽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이다.

 

 




 책 속에서>


그러나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악이 성공하기가 용이하지도 않고, 또 비밀이 유지되는 것이 드문 일이기도 해서, 사람들은 더 많은 악을 만들어 다른 사람의 이름에 덮어씌우기도 한다. 그런 것이 악이 요구하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 마음에서 저 사람 마음으로 바람에 날리듯 옮겨 다니는 그런 생각, 그런 단 한마디 근거 없는 말이 악이 요구하는 전부인 것이다.(p.97)

 

붉은색의 고운 흙이 덮인 길은 이미 기울기 시작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언덕 쪽으로 이어져 있다. ‘그래, 저 정도 언덕은 문제없어.’ 그는 생각한다. ‘언덕쯤이야. 사람이 견뎌낼 수 있지.’ 지난 7년 동안이나 친숙했던 언덕은 평화롭고 조용하다. ‘사람이란 무슨 일이든 견딜 수 있는 것 같군. 하기야 사람은 전혀 해보지 않은 일조차 견딜 수 있지. 사람은 견딜 수 있는 것 이상이라고 생각되는 일도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어. 소리 내어 엉엉 울 수 있는 상황도 능히 참을 수 있지.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견딜 수 있어. 뒤를 돌아다보든 아니든 상황이 나아질 게 없다는 것을 알 때는 특히 그렇지.’(p.6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1
윌리엄 포크너 지음, 김명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막막하고 참담한 이야기, 무력하고 비통한 이야기 틈에 종종 어처구니없는 실소가 새어 나온다. 한 가족의 희비극은 블랙 유머를 품은채 단지 소설일 뿐일까, 그들만의 삶일까 독자에게 묻는다. 그들은 목적지까지 순조롭게 이동하지 못한다. 대신 함정에 빠지고 난관에 봉착하다가 결국 부조리하게 끝난다. 장례 행진은 도착 지점이 정해졌으나 소설 결말 이후에 펼쳐질 귀로 역시 인물 개별로 보았을 때 동일한 행진의 연장선이다. 뫼비우스 띠처럼 이어지는 길은 끝나지 않는다. 이 길은 소설 밖으로 연결되어 독자 앞에 놓인다. 당신들은 좀 나은지 질문한다.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김명주 옮김, 민음사, 2003, 1930, 316쪽 분량)는 열다섯 명의 화자가 번갈아 등장하며 보고 생각하고 느낀 것, 간파한 것과 감춘 것에 대해 증언한다. 윌리엄 포크너는 1926년 첫 소설을 발표한 이후, 소리와 분노(1929) 다음 해에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1930)를 발표하였다. 압살롬, 압살롬!1936년에 출간한다. 미국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로서 혁신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포크너는 현대 미국 문학에 강력하고 예술적으로 비할 바 없는 기여를 했다는 평과 함께 노벨 문학상(1949)을 수상했다.

 

허구의 남부 지역인 요크나파토파를 배경으로 문학적 우주를 창조했던 작가는 소리와 분노에 이어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서도 남부 한 가족의 행보를 추적한다. 이번에는 몰락한 귀족이 아닌 가난한 농부의 집이다. 전작 소리와 분노는 콤슨가 4남매 중 세 명이 일인칭 시점의 화자로 작품을 이끌고, 마지막 장은 사남매를 키운 흑인 하녀의 목소리를 빌어 작가의 전지적 시점으로 서술하며 네 개 장으로 이루어졌다. 이와 비교해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앤스 번드런과 그의 아내 애디, 네 명의 아들 (캐시, 주얼, 달과 바더만), 고명딸 듀이 델이 주 화자가 되어 일인칭 시점으로 진술한다. 그밖에 다른 인물들도 등장하기에 교차하여 서술할 때의 회전율이 높다. 독자는 인물별 목소리를 연결하면서 59장으로 나름의 지도를 그려간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아내이자 어머니인 애디 번드런이다. 그리고 의 위치에 등장인물들이 들어가 각자 어머니의 관을 만들 때’(캐시), ‘자기의 말을 돌볼 때’(주얼)처럼 서술어를 교체하며 에피소드를 남기고 전체적인 그림으로 완성해간다.

 

에디 번드런은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 죽어 누워 있기에 캐시의 관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p.9) 첫 번째 화자인 달은 두 페이지를 할애해 주얼과 캐시의 인상, 어머니를 언급한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어머니가 죽어 누워 있기에, 캐시의 관보다, 라니. 태연하게 반복되는 일상은 왜곡되고 일그러져 있지만, 그들에게는 이상할 게 없다. 바로잡을 방법을 알 수 없고 그럴만한 에너지도 의지도 없다. 문제라는 인식 자체가 부재하다. 이와 같은 일상이 누운 채 죽어가는 어머니 눈앞에서 벌어진다. 이웃은 번드런네 가족을 돕고자 하면서 시시콜콜 품평도 빠뜨리지 않는다. 목화를 따고 농사를 돕는 건 정작 다른 사람들이고 주얼은 무심하고, 캐시는 관에 못을 박을 뿐이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시키고 비난하며, 달 역시 일하지 않는다. 고민을 간직한 듀이 델은 달에게 비밀을 들키자 그를 증오하고, 그녀는 달이 방화 사건을 일으키는 소설 후반에 난폭하게 적개심을 드러낸다. 달은 결국 잭슨으로 가게 된다. 잭슨, 소리와 분노에서 벤지를 위협하는 수단이었으나 마지막까지 가지 않았던 그 정신 병원에 달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결박된다. 달에게는 벤지에게 있었던 캐디나 딜지가 없어서였을까.

 

소리와 분노의 콤슨 부부가 기본적인 부모의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처럼 번드런 부부 또한 마찬가지다. 가장인 앤스는 철저히 자기중심적 인물이고 이를 숨기지도 않는다. 그의 우주는 자신을 기준으로 돌아간다. 땀을 흘리면 죽는다는 경고를 지키느라 수고하는 법이 없고 자기 욕구 충족에 철저한 아버지다. 애디의 경우 59장을 통틀어 단 한 번 속내를 밝히지만, 그녀가 간직한 생의 비밀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아내이자 어머니라는 나름의 역할 수행도 나름의 복수를 감추고 있으며 복수의 이론적 근거 또한 명백하다. 소설에서 가장 시선을 집중시키는 장이고 질문을 던지고 사유를 촉발하는 부분이다. 그녀는 말한다. ‘, 모성이나 공포, 자존심이란 단어는 그저 빈 곳을 메우기 위한 형태일 뿐”(p.194)이라고. 쓸모없는 말에 속은 보복으로 보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로 한 애디는 내가 죽으면 제퍼슨에 묻겠다고 약속해 달라고 요구한다. 이웃 코라는 그녀가 번드런 가족과 함께 묻히는 것이 싫어서 40마일이나 떨어진 먼 땅에 묻으라고 주문할 만큼 유난스럽다고 평한다. 장례 행진은 그렇게 시작된다.

 

번드런 가족은 죽은 어머니를 매장하기 위해 무더운 여름날 마차에 관을 싣고 집을 나선다. 요크나파토파에서 제퍼슨까지 40마일 거리는 반나절이나 하루면 도달할 수 있는데도 열흘이 걸린다. 열흘간 가족들은 홍수나 화재를 겪으면서 물과 불에 맞서고, 가축을 잃고, 다친 다리를 또 다치고, 악취에 시달리고, 필요와 욕망을 담금질하며 애도와는 정작 멀어진다. 하루에 도착할 40마일을 열흘 동안 가는 여정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의 결과 40년간 치렀던 광야 생활의 축약으로도 읽힌다. 소설의 결말은 잠시 멈추게 할 만큼 아이러니하고 희극적이다. 이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번드런 일가는 짧게 목소리를 내고 바통을 넘기는 소설의 형식처럼 서로의 마음을 읽을 시간이 부족하다. 눈을 맞추고 경청할 때 가능한 온전한 소통이 결핍되어 있다. 그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할 때 청자는 멀리 있거나 듣지 않는다.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태의 반복은 동일한 목적지를 향해 함께 이동할지라도 서로를 소외시킨다. 작가는 터무니없을 만큼 고된 여정에 위트와 익살을 덧붙이면 독자는 잠시 숨을 돌린다.

 

소설은 볼드체, 도형, 공백 등을 활용해 함의를 추측하게 하고, 인물의 개성을 살려 문체에 변화를 준다. 아름답고 시적인 풍광 묘사, 개념을 파고들며 주장하고, 새롭게 정의 내리는 문장은 독자를 매료시킨다. 전작인 소리과 분노의 흔적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크다. 길과 집, 시간, 언어, 존재에 대한 성찰이 독자를 머물게 한다. 소설가 랠프 엘리슨은 고전의 위대함이 포크너가 인간 본성을 탐색했듯이 도덕적인 목표를 꾸준하게 추구하는데 있다며 그래서 우리는 포크너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포크너가 철저한 기획과 실험 끝에 완성했다는 이 작품은 어느 길 모퉁이나 석양빛 아래, 여전히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보물을 감추고 있을지 모른다.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작가 포크너는 이번에도 독자를 쉽게 떠나보내지 않는다.

 

 

 

 책 속에서>


말과 행위가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 사람들 사이에는 틈이 생긴다. 늘 그렇듯이 무서운 밤, 거친 어둠으로부터 들리는 거위의 울음소리처럼 언어는 떨어져 내린다. 누군가 군중 속의 두 얼굴 가리키며, 너의 엄마다 혹은 아빠다 말할 때, 정신없이 그 얼굴을 찾아 헤매는 고아처럼, 말은 그것이 가리키는 행위를 찾아 헤맨다.(p.197)

 

가끔씩 난 확신할 수가 없다. 누가 미쳤고 누가 정상인지 알게 뭐란 말인가. 어느 누구도 완전히 미치거나 완전히 정상일 수는 없을 거다. 마음의 균형이 제대로 잡히는 것이 쉽진 않으니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다.(p.2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