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베트의 만찬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이자크 디네센 지음, 추미옥 옮김, 노에미 비야무사 그림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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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베트의 만찬(노에미 비야무사 그림, 추미옥 옮김, 문학동네,2012)』은 덴마크 작가 이자크 디네센의 단편 소설로 1958년 출간 당시 원제는 “운명의 일화”였다. 작가의 본명은 카렌 블릭센이며 필명 이자크 디네센은 ‘웃음’이라는 뜻을 가진 구약의 인물 이삭에서 가져왔다. 작가는 아프리카 케냐에서 커피 농장을 운영할 때의 개인적 경험을 훗날 회고록 『아웃 오브 아프리카』로 펴내고 이는 시드니 폴락 감독에 의해 영화화된다. 『바베트의 만찬』도 가브리엘 악셀 감독이 1987년 영화화 하면서 아카데미에서 수상한다. 다양한 소설과 산문집을 남긴 이자크 디네센은 1954년과 1957년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지만 헤밍웨이와 카뮈에게 돌아가며 수상은 불발한다. 하지만 그녀의 작가적 입지는 더욱 견고해진다.

“노르웨이, 높은 산 사이로 길고 좁은 바다의 지류가 흐르는 피오르 지역에 비를레보그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p.7) 두 자매 마르티네와 필리파는 이 지역에서 독실한 교파를 일궜던 목사의 딸들로 목사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신도들에게는 소중한 존재다. 시간이 가며 신도들의 수가 줄어들 뿐 아니라 서로간에 반목하고 다투는 일도 잦아져 우려스럽지만 말씀을 중심으로 모임은 계속된다. 두 자매의 집에는 바베트라는 프랑스인 가정부가 함께 지내고 있다. 그녀는 필리파를 아쉽게 떠나야 했던 아실 파팽의 전갈을 지닌채 혁명으로 가족을 잃고 위험을 피해 이곳에 이르렀다. 고인이 된 아버지의 백 번째 생일을 딸들은 의미있게 기념하기 원한다. 남아 있는 신도들 사이의 어두운 그림자, 냉기와 죄, 상처와 깊은 원한들이 자매에게는 마음의 짐도 옅어지기를 바란다.

이때 바베트는 자기가 가진 프랑스 복권이 당첨돼 당첨금 만 프랑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알린다. 또한 바베트는 두 자매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달라고 요청한다. 의심과 불신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지던 외딴 마을 작은 집에 특별한 식탁이 차려진 그날 밤, 아름다운 기적이 피어난다. “위대한 예술가는 결코 가난하지 않아요.”(p.74)라는 바베트의 말처럼 탕진이 아닌 예술, 결코 가난해질 수 없는 예술적 가치의 현현이었다.

베를레보그의 자매에게 유행이 파고들 구석이 없었던 것처럼 금욕적 삶은 고요하게 이어진다. 사랑의 가능성도 오래 전 지나가버렸고 아쉬움은 흔적도 없는듯하다. 단지 아버지의 신앙을 유산으로 받은 노쇠한 신도들간 어긋나는 관계가 안타깝다. 이때 찾아온 바베트는 궁지에 처한 도피자에서 ‘정신적 자극’으로, 마르타에 비할 법한 이방인에서 ‘모퉁이의 머릿돌(p.30)’로, 결국 당면한 문제를 녹인 화합의 가능성으로 변모한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를 넘나드는 12편의 에피소드를 잇대며 바베트의 만찬 저녁, 마법같은 절정을 향해 서서히 고조된다.

간결한 문장은 때론 몽환적이면서 동화같은 온기를 보여주지만 때로는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을 제시한다. 로벤히엘름 장군이 삼십 년이 지난 후 자기 인생의 ‘가시’(p.53)는 무엇이었나 숙고한 끝에 솔로몬의 유명한 고백,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에 이르는 지점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책은 금기와 축복, 육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영혼의 약속 등 화두를 던진 끝에 바베트의 입을 빌린 예술론으로 정점을 찍는다. 세상의 끝과도 같은 외딴 곳에 잊혀진 인간처럼 살았던 인물들은 어느 순간 인간 보편의 삶과 가치를 대변하면서 소설은 더 이상 그들의 이야기가 아닌 모두의 이야기로 확대된다. 서정적인 배경 묘사와 재치 있는 비유, 생생한 심리 서술은 짧은 분량임에도 독자를 오래 머물고 싶게 만든다. 고골의 『외투』에서 깊은 인상을 남겼던 노에미 비야무사의 필선이 아늑한 삽화가 읽는 즐거움을 배가시킨다. “작가의 인생 전체가 담겨 있다”(p.83)는 『바베트의 만찬』을 과연 영화는 어떻게 그려냈을지, 활자를 읽으며 상상했던 장면이 어떻게 구현되었을지 기대된다.

책 속에서>

훗날 이날 저녁을 떠올릴 때, 그들이 그토록 고귀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 자신들이 지닌 가치 때문이라는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신도들은 단지 로벤히엘름 장군이 말한 무한한 은총이 그들에게 허락되었다고 생각했고, 항상 소망하던 것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이 땅의 헛된 환상이 연기처럼 녹아 사라지고 만물이 참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p.67)

"네, 마님, 파팽 씨요. 그분이 제게 말씀하셨죠. ‘예술가로서 최선을 다할 수 없는 상황에 몰리거나, 최선을 다하지 않고도 박수를 받는 것만큼 참을 수 없는 것은 없다’고요. 또 말씀하셨죠. ‘예술가가 세상을 향해 부르짓는 것은,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날 내버려둬달라는 외침뿐이다.’"(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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