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잡이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
니콜라이 레스코프 지음, 이상훈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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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왼손잡이』(문학동네/이상훈옮김)에는 표제작 왼손잡이와 분장예술가, 중편 ‘봉인된 천사’까지 세 편이 묶여있다. 도스토예프스키 보다 10년 후에 태어나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거장들과 거의 동시대를 지나온 작가이지만 그렇기에 부각되지 못한 면도 있고, 작품의 스타일도 차이가 있다. 또한 러시아에서는 “언어의 연금술사”로, 서구에서는 “천재적인 이야기꾼”으로 일컬어져왔다.(280p) 친가와 외가의 종교적 분위기 속에 자라나던 어린시절과 친척의 도움으로 대도시 생활을 하며 예술적 지식을 습득하거나 러시아 전역을 순회하며 글이 아닌 체험으로 민중의 삶을 직접 엿볼 수 있었던 성장기는 그의 작품으로 오롯이 결실을 맺는다. 이 세 편의 작품만 하더라도 현실에서 뚝 떨어져 이야기 속으로 한껏 빠져드는 경험을 하게 된다.

 

세 작품 모두 흥미롭다. “왼손잡이”는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 황제가 빈 회의 후 영국의 특별하고 이국적인 발전상을 살펴볼 수 있도록 초대받는다. 그리고 인조미생물이라는 강철벼룩을 가져온다. 황제의 뒤를 이은 니콜라이 파블로비치 황제는 타민족에게 뒤떨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어 그보다 나은 무언가를 만들어 내기를 원한다. 뛰어난 솜씨로 영국제 강철벼룩을 능가하는 작품을 만드는 왼손잡이. 재능을 알아보고 환대하는 영국인들과는 달리 그리움에 서둘러 돌아온 고국 러시아는 혹독하게 그를 내칠 뿐이다.

 

“많은 위대한 천재들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왼손잡이의 원래 이름은 영원히 후손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78p)” 티끌만한 크기의 강철벼룩이나 왼손잡이가 손을 더한 강철벼룩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나 작가의 상상력이 놀랍다. 상상은 천연덕스러운 환상성을 띠며 확대되 감탄을 자아낸다. “기계문명이 제각기 다른 재능과 소질들을 균일화시킨 데다가, 천재들이 더 이상 근면과 정확성을 위한 싸움에 투신하지 않기 때문이다.(79p)” 근면과 정확성을 위한 싸움에 투신해도 결코 도달하기 어려운 재능을 지녔지만 왼손잡이가 처한 열악한 외적 조건들은 부당한 결말을 맞게 한다. 그럼에도 무엇도 탓하지 않고 선하고 순박했던 그, 수많은 자들을 대변하는 그를 생각하니 안쓰런 마음이 든다.

 

“분장예술가”는 러시아 농노제 사회의 비인간적 상황을 그리는 작품 들 중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작품으로(285p) ?묘지에서 들은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있다. 산책길에 있는 작은 무덤가에서 유모가 해준 이야기가 소설의 내용이다. "이게 바로 그 끔찍한 눈물병이라우. 이 속에는 망각의 독이 들어있지.(124p)" 지배층의 폭력에 무기력하게 휘둘릴 수 밖에 없었던, 결국 어떤 희망적 메시지도 기대하지 못하는 인생들을 가슴아프게 그리고 있다. 여기서도 작가의 상상력은 빛나는데 사람의 얼굴에 섬세하면서도 다양한 표정을 심어줄 수 있는 ‘사상이 담긴 화장술’이라니, 그래서 독자는 단순한 분장사가 아닌 분장예술가의 경지를 그려보게 된다.

 

가장 인상깊었던 작품은 “봉인된 천사”였다. 눈보라 치는 겨울, 추위를 피해 들어온 허름한 여인숙에서 어떤 사람이 들려준 ‘천사가 자신을 인도한 이야기’다. 루카 키릴로프가 이끄는 한 구교도 석수장이 무리의 일화로 이콘(성상화)을 중심으로 사건이 일어난다. 수호천사를 그린 이콘은 이동할 때도 특별히 중요하게 보관하며 푯대이자 영적 기둥으로 여겨진다. 그런 이콘이 관리들에 의해 끓는 수지에 찍히고 봉인된채 정교회의 주교좌성당에 보관되는데 이를 되찾기 위한 여정을 그리고 있다.

 

여러 러시아 작품에서 스치듯 나오곤 했던 이콘을 꽤 자세히 다루는데 고대의 이콘들과 이콘의 다양한 종류는 물론 집착에 가까워 보이는 사람들의 태도도 이유를 듣고 나면 공감하게 된다. 누구나 다 성경을 이해할 수 없지만 ‘단순하고 알기 쉽게 나타나 있는’ 이콘을 통해 하늘의 영광을 직접 볼 수 있고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배움이 적더라도 충만한 은혜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 그들에게 이콘이 중요한 이유다. 빼앗긴 이콘을 되찾는 과정과 특히 이콘 화가의 작업 장면은 속도감 있는 생생한 전개로 숨죽이며 읽어나가게 된다. 영화를 보듯 스릴이 넘치고 그 안에 신뢰와 희생의 주제까지 따스하게 담아낸다.

 

“그리고 그때서야 우리는 우리의 봉인된 천사가 우리 모두를 어디로 이끌었는지, 그리고 무엇을 위해 먼저 고난의 잔을 쏟아부은 다음, 그 공포에 가득 찬 밤에 인간들이 서로 사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봉인을 지웠는지 가까스로 이해하게 되었던 것입니다.(267p)” 액자 형식의 구조안에서 표면에 드러난 사건에 머무르지 않고 점층적으로 본질에 다가가게 하는 레스코프의 작품들은 감추인 비극과 부조리를 미화시키는 일 없이 독자 스스로 느끼고 깨닫도록 해준다. 방언을 비롯한 입말체의 잘 읽히는 문장(러시아 특유의 ‘스카스 장르’라는)은 슬픔과 고통 중에도 때론 위트와 유머를 섞는다. 레스토프의 더 많은 작품들을 찾아 읽어보고 싶다.

 

 

   책속에서>

-정말 무섭더군요! 여러분 한번 상상해보십시오. 그가 그 무지막지한 왕손으로 종이처럼 얇디얇은 그림판을 나무판에서 떼어내려고 톱질을 해대는 모습을 말입니다······깜빡 잘못하면 모든 게 허사로 돌아갈 판이었지요. 톱이 조금만 빗나가도 이콘이 그대로 찢어질 상황이었으니까요!(256p)

-정신 차리십시오, 부인. 남편은 무사할 겁니다. 혹시라도 일이 잘못될 경우 나이 많은 우리 마로이 할아버지가 형리에게 채찍질을 당하고, 그의 선량한 얼굴이 낙인으로 더럽혀질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죽고 나서야 그렇게 될 겁니다!(261p)

-그러고는 갑자기 쇠고리 위로 걸음을 옮기면서 폭풍 사이로 외쳤습니다.

'찬송가를 불러줘!'(262p)

-주님께서 어떤 길을 통해 사람들을 찾으시든 간에, 또 어떤 그릇으로 사람들에게 물을 주시든 간에, 중요한 건 주님께서 사람들을 찾으시고 또 조국과 하나가 되려는 사람들의 갈급한 마음을 해결해주신다는 겁니다.(27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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