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하 3집 - Growing Season [Part B]
윤하 (Younha) 노래 / 지니(genie)뮤직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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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번 앨범인 3집 Part.A를 듣고 많은 실망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 2집을 너무 좋게 듣기도 했었고, 토이 5집의 객원보컬로 참여했던 <오늘서울하늘은하루종일맑음>이란 노래를 윤하가 불렀던 최고의 곡으로도 꼽았던지라 그 이후의 행보가 무척이나 궁금했던 차에 3집 앨범이 나왔기 때문이죠. 

그러나...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곡 스타일 하며 무척이나 성의없는 앨범 구성 (인스트루멘틀 트랙과 기존 2집 앨범의 <My Song And...>의 한국어 번안곡, 그리고 인트로성 트랙들을 빼면 신곡은 8곡도 채 안됐던-_-)은 처음으로 윤하 앨범에 많은 실망을 안겨주었죠..-_- 

그래서 이번 앨범도 그다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어요. 앨범을 구입하기 전 들었던 타이틀곡도 지나치게 주류 음악에 편승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물론 윤하가 대중가요를 부르는 가수이긴 하지만 기존의 타이틀 곡들, <비밀번호486>이나 <텔레파시> <1,2,3>같은 곡들을 보면 결코 같은 나이 또래의 주류 가수의 타이틀곡들과는 차별화된 특유의 느낌이 있었기 때문에요) 뭐, 그래도 의무감 비슷하게 앨범을 구입했었는데요. 

너무 괜찮은 앨범이네요.!! 비록 앨범 트랙이 너무 짧은 게 흠이긴 하지만 첫곡 <Say Something>부터 상큼한 곡 <좋아해>, 유희열의 작품 <편한가봐>는 물론 김범수와의 듀엣곡에서 폭팔하는 포텐 <헤어진 후에야 알 수 있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기존 앨범에 수록되어있던 윤하 자작곡들이 발라드 곡이었던 것에 비해 이번 앨범의 자작곡 <LaLaLa>는 락킹한 곡이라서 윤하의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아직까지도 윤하 최고의 앨범은 2집 <Someday>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너무 좋은 앨범을 만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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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전환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8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 길(도서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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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과학 서적들은 왜 재미가 없을까?
몇몇 예외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그렇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비단 저자의 '불친철함'만을 탓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사회과학 서적의 궁극적 목적이
'읽는 이에게 재미를 주기 위한 것'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소설도 아닌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목적은 자신이 전공한
분야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거나,
혹은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독자들은 '준비된' 독자들이다.
즉, 저자가 아무리 어렵고 전문적인 말들을 나열하며 
자신의 지식을 글로써 과시한다 하더라도
울렁증이나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독자들이란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과학 서적에서 '재미'는 부차적 요소일 뿐 필수적 요소는 아니다.
그래서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은 종말을 맞이했다.

사회과학 분야는 시대를 반영한다.
최소한 한국에서는 말이다.
한국에서 사회과학 분야가 가장 눈부시게 발전했던 시기를
돌이켜보면 5공시절이었다. 정권의 유화정책으로 금서가 어느정도 풀렸기에
그것도 가능한 일이었지만, 궁극적으로 그시절의 젊은이들(386세대)은
폭압정치의 울분을 거리와 책에서 풀었다.

스탈린과 맑스의 기름기 하나 없은 이론서들을 탐독하고
마오쩌둥의 실천론, 모순론도 모자라 주체이론까지 탐독한 그 시대는
분명 사회과학분야의 황금기였지만, 이와 반대로 시대는 암흑기였다.
찰나의 위트조차 존재할 수 없던 시대,
그래서 사회과학의 딱딱한 이론들은 그 시대에 자연스러울 수 있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사회과학 분야는 초토화 상태이다.
이제 시대는 권위주의 정치에 눌린 절망적인 암흑기가 아니었다.
머리아픈 이론서들은 매스미디어의 화려한 비쥬얼에 압도당했다.
온 사회가 가벼움과 경망스러움에 넘쳐흐르는 이 시대에
이론만을 설파하고 있는 사회과학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점차 그들만의 놀이터로 전락한 이 분야는
출판시장의 불황기를 맞이하며 인문 분야와 함께 가장 먼저 무너져내린다. 

현실이 그랬다.
외국의 유명한 사회과학 서적들도 묻힐진대
하물며 한국의 지식인들은 오죽했을까.
그럼에도 진중권 같은 극소수 지식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위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든 사회과학 서적들이 재미없고 딱딱하기만 한 건 아니다.
슬라보예 지젝과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들이 범접하기 힘든
딱딱함으로 무장한 전형적인 이 분야의 사례라면,
브라이언 그린이나 제레미 리프킨의 저서들은 앞서 말했던 '몇몇 예외'에 속한다.

그리고, 더없이 딱딱해보이는 제목의 책.
만만치않은 두께의 책.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이 책은 2009년 내가 읽었던 사회과학 분야의 서적들 중 '예외 중 으뜸'에 속했던 책이다.

  

 

 

 

이제 신자유주의 담론은 지겨울 법도 하다.
지식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너나 나나 신자유주의를 외치고 있고
되려 진보진영에서는 신자유주의를 빼면 경제 얘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할 정도로
신자유주의 담론에 완전히 잠식되어 있는 상태이다.

진보진영에게 신자유주의는 이제 '악, 그 자체'이다.
결코 좋은 현상이라고 볼 수 없다.
악은 그 자체로 나쁘기 때문에 세부적인 비판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악인데 뭣하러 힘들게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할 필요가 있는가? 그냥 나쁜 것임을.
(이런 태도는 보수파들이 줄기차게 주장하는 빨갱이 담론과 하등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김대중은 그렇게 욕을 먹었고, 노무현은 죽어서도 욕을 먹고 있다.
왜? 신자유주의는 악마인데 그 악마적 정책을 시행한 지도자이기 때문에.
게다가 '진보의 상징'이었던 두 정치인이었기에 그 욕의 강도는 두배가 되었다.
무차별적인 난도질 속에 신자유주의 철학에 숨어있는 합리성과 효율성은 잠식당했고,
실질적 대안 하나 없이 난도질하며 "우리 진보는 자기편도 이렇게 냉철하게 깔 수 있뜸!!"
이라면서 자신들의 비난을, 아니 자신들의 욕을 끊임없이 정당화했다.

노무현이 죽고 김대중이 죽어서야 지난 10년의 정책에 대한 심도깊은 연구와 성찰이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긴 하지만, 지금 말하고 싶은 건 지난날을 반성하며
죽은 이들 앞에서 눈물 질질 흘리는 진보진영의 한심한 참회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비판 담론은 이제 지겨움을 넘어서 식상할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는,
이 책이 신자유주의 비판 담론이 위력과 영향력을 현저히 잃어버린
2009년도에 번역되었음에도 사회과학 분야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신자유주의가 채 등장하기도 전인 1944년에 원서가 발매되었다는 이유 뿐만 아니라,
6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책에서 보여주는 칼 폴라니의
통찰력을 뛰어넘는 시장경제 비판담론이 결코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독보적이다.

 

  

 

 

 

"19세기 문명은 무너졌다. 이 책은 이 사건의 정치적 경제적
여러 기원들 그리고 그것이 불러들인 거대한 전환을 다룬다."

폴라니는 "시장경제란 전혀 도달할 수 없는 적나라한 유토피아"라고 주장한다.
식상하게 들리는가? 그렇다면 이 책이 1944년에 발매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차 세계대전이 채 끝나기 전, 비록 자유방임주의가 대공황의 철퇴를 맞고
히틀러로 인해 그 종말을 맞았을 때, 즉 케인스주의가 등장하며 뉴딜로 대표되는
개입 정책이 세계 경제를 재편하고 있을 무렵 나온 이 책이 주장하는
시장경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그리 색다른 시각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도 시장경제 비판담론은 흔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케인스가 튀어나오면서 경제적 전환을 맞긴 했지만
마르크스라괴물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채 고전파 경제학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수많은 경제학자들은
궁극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경제 형태는 시장주의 경제 체제라고 보았다.
비록 이후 이들의 목소리가 케인스주의의 무시무시한 영향력에 의해 작아지고
20여년이 지난 후에야 커졌다 하더라도 시장경제 비판담론은
결코 '주류 경제학'의 영역이 아니었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 책이 가진 이러한 비판의식보다 더 뛰어난 점은
시장경제를 해석하는 독특한 세계관에 있다.
시장경제를 비판하는 데 있어서 이 책을 관통하는
두 가지 축은 '금본위제'와 '스피넘랜드 법'이다.

자유무역이 전세계적으로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폴라니는 1846년에서 1879년 정도의 짧은 시기로 보고 있다.
그는 이 시기에 자유무역이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를 오트피낭스와
로스차일드 가문같은 초국가적 대형금융자본의 존재에서 찾는다. 

오트피낭스는 "최고의 탄력성을 가진 채 상시적으로 적동하는 기관의 기능"을 했으며,
가장 강력한 정부조차도 이것의 독립성을 해칠 수 없었기에
모든 정부와 접촉을 유지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한나라의 정치가들과 투자자들이 함께 신뢰할 수 있는
독립적 기관의 역할"수행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이당시 국지적 차원이 아닌 거시적 차원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 역시 이들의 존재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이들은 "전쟁이 벌어진다 해도 이득이 된다면 지원할 지극히 상업주의적 성향을
지녔지만, 만에 하나 강대국들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고 체제 전체의
화폐적 기초까지 건드리게 된다면 이들의 영리 이익은 큰 손상을 입을 것이었기
때문에 세계 평화는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즉, "19세기 세력균형체제가 세계적 대전란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새로운 경제체제라는 배경에서만 가능했다"

분명 이 시기는 시장경제의 영광의 시기였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에게 있어서, 그리고 현재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에게 있어서
이 시기는 시장경제의 합리성과 효용성을 입증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경제의 중심에 있는 거대 자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각 국가들은 로스차일드 가문을 중심으로 불안한 평화를 외적으로는
'자발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여지지만, 과연 이것이 그들이
그토록 줄기차게 주장하는 "시장경제의 '자발적' 이해관계 조정기능"임을
증명해주는 사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난 이것이 오히려 효율적인 경제체제를 위해서
국가가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입증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시장의 자발적 조정기능이 아니라, 정부라는 통치 체제가
오트피낭스와 로스차일드로 대신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장경제의 황금기가 갑작스레 막을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유무역경제가 종말을 고한 이유를
막연히 '민족적' 문제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각 국가의 민족 의식이 대두되면서 국가간 적대적 의식이 형성되고
이는 자연적으로 자유무역의 단절을 의미했다.'
뭐 이런 추상적인 사실로 말이다.
그러나 칼 폴라니는 자유무역의 종말의 이유를 '금본위제'에서 찾는다.


 

 

 

 

애시당초 금본위제는 자유무역을 더욱 더 강화해주는 기제로 도입된 것이었다.
"금본위제는 자기조정시장의 이론을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제도적 혁신"이었다.
전 국가가 하나의 화폐 단위로 통합된다. 이는 자유주의경제학의 숙원이었다.
그리고 금본위제는 그 꿈을 이루어주는 강력한 마법이었다.

금본위제는 그 어떤 세계 정부나 기관이 없어도 금이라는 절대적 가치 단위
하나로 전 지구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된 것 같은 환상을 불어넣었다.
자본주의 옹호자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들 조차도 금본위제에 대한 비판은
전무할 정도로 금본위제에 대한 믿음은 그 시대의 신앙이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이어진다.

"실로 그 시대의 모든 계급, 모든 나라, 모든 이름의 종교와 사회철학이
함께 받아들인 유일무이의 교리가 있었으니,
이는 국제 경제 체제가 작동하는 데 금본위제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금본위제는 양날의 검이었다.
자유무역을 '완성'하기 위해 도입된 이 제도는
국내 경기 침체에 대해선 속수무책이었다. 

모든 나라의 통화의 가치를 정해진 양의 금에 고정시키고,
국내 화폐 공급을 자국이 보유하고 있는 금의 양에 기초를 두고 조절하다보니
국내의 물가와 국제 가격이 차이가 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국의 금 유출을 막기 위해서
국가가 시행할 수 있는 합법적 수단은 디플레이션 뿐이었다.

다시말해, 대외적 균형이 회복될 만큼 임금 수준이 떨어지고
소비가 감소할 때까지 경제가 수축되도록 내버려둬야한다는 것을 뜻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황폐해졌다.
실업이 증가하고 기업과 은행이 파산하는 상황이 속출해도 국내외의
물가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다면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금본위제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이 너무 막대하기 때문에
각 국가들은 보호관세를 도입한다.
관세를 도입해 무역의 흐름이 가격변화에 민감하지 않게 만들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로써 자유무역에서 '자유'라는 균형이 깨졌다.
금본위제의 폐해는 나아가 식민주의까지 유발시킨다.
각 국가가 보호관세라는 탑을 쌓은 상태에서 경제적으로 유리해지려면
속국을 만드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자유무역은 금본위제로 인해 무너졌다.
그러나 금본위제의 환상은 결코 깨지지 않았다.

칼 폴라니는 1929년 미국에 불어닥친 대공황 현상을
금본위제를 기반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대공황이 발발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금본위제라는 것이다.
1차대전 종전 후 승전국들은 전쟁 발발 전과 마찬가지로 패전국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해주면서 전후 재건을 지원한다.
재건의 궁극적인 목적은 다시금 '금본위제로의 회복'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패전국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으며 실행한 재건 사업이 어느정도 마무리가 되고
이윽고 이들 국가들의 자국 통화 안정 정책이 이제 막 시행되기 시작할 무렵,
자국 통화정책 안정을 위한 막대한 부담은 파운드 가치의 안정성에 대한
불신을 전 세계적으로 확장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는 결국 미국 달러의 가치 변동까지 유발시킨다.

여기서 미국은 자국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파운드 가치의 수호를 위한
조치를 꾀하는데, 그 방편 중 하나가 런던에서 뉴욕으로의 자본 이동을
막기 위해 뉴욕 금융가의 이자율을 낮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경제에 있어선 이자율을 높여야 했다.
위태롭게 유지되던 세계경제의 균형은 비로소
1929년 미국에서 발발한 대공황으로 무너져내린다.
이는 진작에 왔어야 할 경기 침체가 뒤늦게 나타난 것이었기에 
그 충격파는 엄청난 위력을 수반한다. 

이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결코 많지 않았다.
어떻게든 다시금 19세기 중후반의 자유무역 체제를 확립해야 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펼친 정책들은 수입 쿼터제 실시,
지불 유예 협정, 자본 수출 금지, 외환 통제 등이었다.

"그런데 이 통화가치 보호를 위해 취해진 조치들 위로 엉뚱하게도
자급자족 경제의 꿈이라는 악마적 유혹이 스멀거리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조치들이 애초에 의도한 바는 분명
무역 자유화였건만 "그 결과는 자유무역의 교살"이었던 것이다.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발생시켰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영국은 1931년 금본위제를 탈퇴한다.
이제 자유무역의 꿈은 멀어진다.
1933년 독일의 국제연맹탈퇴는 자유무역의 급격한 쇠락을 가져왔고,
결국 나치즘이 발발하며 자유무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아직까지도 일부 경제학계에서 자유무역이 쇠퇴한 원인을
'금본위제의 포기'때문이라고 주장하며 금본위제의 환상에 빠져있는 상황에서
1944년 당시 칼 폴라니의 이러한 문제 인식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궁극적으로 주장하고자 했던 바는
금본위제가 몰고 온 자유무역의 종말 자체가 아니었다.
그는 "경제는 결코 사회에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경제가 여러 사회 관계 안에 묻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러 사회관계가 경제체제 안에 묻어 들어가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사회와 경제를 별개의 것을 간주할 때
"인간과 자연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19세기 영국에서 시행한 '스피넘랜드 법'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는 스피넘랜드 법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를
"사회를 바라보는 현대인들의 의식이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스피넘랜드 법은 일종의 '빈민 구제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정한 비율표를 만들어 가난한 이들,
노동자들에게 적정 임금을 보장한 정책이었다.
어찌보면 현대 복지정책의 시초였다고도 볼 수 있는
이 정책이 유발시킨 부작용은 어마어마했다.

가난한 이들은 스스로 벌어들인 소득과 무관하게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노동자 입장에선
임금을 많이 받건 적게 받건 비율표에서 정한만큼의 임금에 미치지 못한다면
구호를 받게 되어 있어서 고용주를 만족시켜줄 물질적 이해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는 급격한 노동력 저하로 나타나게 되고, 결국 나태한 인간들을 양산시켰다.

비록 스피넘랜드 법이 노동이 '시장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입된 법이었지만
그것이 유발시킨 끔찍한 재난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다시금 '빈민구제법'같은 정책은 생각조차 할 수 없게끔,
그리고 빈민들을 한심하고 무능한 인간으로 인식하게끔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즈음 고개를 슬며시 쳐든 시장 매커니즘은
스피넘랜드 법에 실망한 수많은 이들을 강력하게 결집시킨다.
자연스레 스피넘랜드 법이 궁극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노동의 시장화 방지'라는 온정주의 역시 폐기처분된다.

"시장 매커니즘이 이제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스스로를 온전한 것으로
완성시켜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으니, 즉 이제는 인간의 노동도 상품으로
만들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반동적인 온정주의가 이러한 필요에
저항해보려 했지만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스피넘랜드 법의 온갖 공포에 시달린 사람들은 이제 뒤도 돌어보지 않은 채
시장이라는 새로운 유토피아의 은신처를 향해 미친듯이 달렸던 것이다"

폴라니가 로버트 오언을 주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스피넘랜드 법의 재앙으로 인해 그 누구도 산업혁명의 광풍 속에서
인간성에 대해 돌아보지 않았던 그때 유일하게 인간에 대해 돌아보고,
산업사회라는 새로운 영역 '깊숙히' 파고들었던 이가 로버트 오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를 동물적인 접근으로 해명하려는 시도를 모두 거부했고,
기독교가 인간 성격 형성의 책임을 오로지 그 개인 자신에게만
뒤집어씌우는
'개인화'를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복음서가 사회 실재의 현실을 묵살하고 있음을 최초로 인식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오언은 산업혁명의 초창기 시절 "산업혁명으로 인해 거대 규모의
사회적 혼란이 야기될 것"이며 "빈곤은 거대한 사태의 경제적 측면에 불과함"
인식했으며 현재 문제가 경제적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를 사실을 파악하고,
입법을 통한 개입등으로 이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를 사회와 독립된 하나의 분야로 파악한 것이 아닌
사회에 종속적 존재로 인식한 오언의 주장은 
이 책을 관통하는 폴라니의 인식과 다름없다.

산업혁명에 따른 인간과 자연의 황폐함은
'역사적 발전'에 있어서 감내해야 할 댓가로 치부됐고,
이를 바탕으로 자유무역은 전 세계적으로 번창하게 된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금본위제의 도입으로 자유 무역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거대한 전환'이 시작되는 게 바로 이 지점이다.

거대한 전환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
즉, 자유주의의 죽음이 잉태한 자식들이 바로 '파시즘'과 '사회주의'다.
 

 

 

 

 

 

 

1920년대는 어떤 시대였던가?

"노동 세력은 그 수를 무기로 삼아 의회에 참호를 파고
단단히 자리를 잡았으며, 자본가들은 산업을 자신들의 철옹성으로
건설하여 그 위에 올라 앉아 온 나라를 호령했다.
이에 맞서 인민들은 각중 단체를 만들고 영업 활동에
인정사정없이 개입해 들어가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자 산업의 거물들은 사람들에 의해 선출된 정부와
의회의 지배자들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도록 뒤흔들어놓는다.
그러면 이번에는 민주주의적 기관, 단체들이
만인의 생계가 달려 있는 산업체제 전체에 대해 전쟁을 일으킨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자 마침내 경제 체제, 정치 체제
양쪽 모두가 완전히 마비될 위험이 닥친다.
공포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고,
사람들은 나중에 치러질 댓가를 따져보지도 못한 채
그저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날 쉬운 길만 제공해준다면
어떤 이들에게도 기꺼이 지도권을 안겨주기에 이르렀다"

파시즘의 시대가 무르익은 것이다.

폴라니는 파시즘의 출현을 국가의 지역적 원인,
민족성, 역사적 배경으로 설명하는 방법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파시즘은 "객관적 상황의 필요에 대한 대응으로서 나타난 정치운동"으로
결단코 우발적 요인들이 합쳐져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고 말한다.
즉 당시 국가들이 겪고 있는 제도적 교착 상태의
해결을 위해 나온 '하나의 탈출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시즘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산업, 정치 영역을 가리지 않고 민주주의적 제도들을
깡그리 부리뽑아버릴 것이며,
그것을 대가로 삼아 시장경제를 개혁한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인민들은 '재교육 과정'을 밟게 되고, 이 '재교육 과정'이라는
정치적 종교가 내포하고 있는 교리는 인간성의 철저한 말살이었다.
교리에 반하는 자들에겐 과학적 방법의 고문이 가해지는 것,
이것이 파시즘의 해결책이었다. 

그렇다면 파시즘은 왜 하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발생했었던 것일까?
여기서 바로 '민족' 개념이 나온다.
이들 국가들에선 "아직 해결되지 않은 민족 문제들을
지렛대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프랑스, 영국에선 파시즘이
반애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약화될 수 있었다"

이러한 언급 직후 폴라니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주의를 준다.
"이와 같이 1920년대 유럽에서의 파시즘이 민족주의적 경향이나
반혁명 경향과 연결되었던 것은 우연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는 독립된 기원을 가진 다른 운동들이 서로를 강화시켜주다가
마치 본질적인 유사성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만들어내기까지 하게 된
생의 경우라 할 수 있지만, 사실상 둘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현실에서 파시즘이 맡았던 역할을 결정한 것은
시장 체제의 상태라는 단 하나의 요인 뿐이었다"

1944년에 나온 이 책은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는 금본위제의 자동적 메커니즘이 사라진 현 상황에서 각 국가들은 반드시 국내의
정치 경제 체제를 획일적으로 통일시켜야 한다는 19세기의 교조주의를 극복해
각 국가 성향에 맞는 제도들을 만들어 나가며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규제를 도입하게 되면 자유는 확장되기도 하고 제약당하기도 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새로 얻는 자유와 새로 잃는 자유의 사이에
어떻게 균형을 취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그의 주장의 궁극적인 결론은 결국 '인간'이다.

바로 '인간'이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가치다.
이것이 바로 이론적인 이야기만 늘어놓는
여타 사회과학 서적들 사이에서 이 책이 빛나는 이유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시장경제 속에서 살아남은
고상한 가치들을 유지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라고 주장한다.

"시장 경제 아래에서는 자유도 평화도 제도화될 수 없었다.
그 체제가 목표로 삼는 것은 이윤과 물질적 안녕을 창출하는 것이었지
평화와 자유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의 '인간의 가치'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폴라니가 주장하는 제도적 해결책은 절대적인 강자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관료제로 인한 권력 남용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는,
절대로 침해할 수 없는 규칙들을 정하는 것이다.
단, 이 규칙은 "임의적 자유의 영역을 창출하고 그것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폴라니는 또한 파시즘과 사회주의의 차이를 '경제적'이
아닌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 실재의 현실에 대한 깨달음, 즉 권력과 강제는 사악한 것이며,
인간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이 완전히 사라져야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다는 현실의 냉정한 인식에 있어서
파시즘과 사회주의는 갈라지게 된다고 보았다.

"파시스트들은 자유를 포기하고 권력을 사회 실재의 현실로서
찬양하는 반면, 사회주의자의 경우 그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자유에 대한 주장을 드높인다"

그리고 이 사회실재의 현실에 대한 깨달음은
곧 우리 문명의 미래에 대한 길을 제시한다.

"사회 실재의 현실을 불평 없이 묵묵히 받아들인 이상,
인간은 이제 자신의 힘으로 제거할 수 있는 종류의 불의와 비자유라면
모조리 제거해내고 말겠다는 그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용기와 힘을 얻게 된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모든 동료들이 누릴 수 있도록 풍족한 자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그는 인간 스스로 이 과제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권력이나 계획과 같은 것들을 도구로 삼아
자유를 건설하려 한다고 해도 그것들이 인간의 원수로 변하여
자유를 파괴할 것이라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다.

자칫 이 말은 근거없는 낙관론으로 보일 수 있다.
21세기, 현재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다"이라는 말만큼
인간의 사회적 성향을 명확히 표현해주는 명제는 없다.
가끔은 의식화를 통해 이타적인 인간이 되기도 하지만
인간 본성을 지배하고 있는 이기적 동물이란 명제는
이책의 마지막 결론에 해당하는 폴라니의 위의 말은
지나친 이상주의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결국은 권력과 강제의 완전 소멸은 불가능하다는
'사회 실재의 현실'을 받아들인 모든 인간들이
폴라니의 말처럼 '불의'와 '비자유'를 제거하기 위해
용기와 힘을 얻을리는 만무하다.

또한 자신의 모든 동료들이 누릴 수 있는
풍족한 자유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할 가능성 역시 희박하다.
인간의 권력욕과 소유욕은 폴라니가 말하는 진보적 가치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이런 분석적 차원의 '인간 내면의 심리'가 아니다.
그는 인간은 물론 국가도, 시장도
사회의 우위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사회라는 실체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자유와 가치와 이상을 위해
국가와 시장이 그러한 목적에 복무할 수 있도록
기능적 제도로서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사회의 진정한 실체를 찾아가는 과정이자
인간 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2010년이 벌써 일주일이나 흐른 지금에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약간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2009년 내가 읽었던 사회과학 서적 중에서
나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사회과학 서적을 꼽으라면
스탠리 코언의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과
바로 이 책,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꼽고 싶다.

스탠리 코언의 책은 이후에 리뷰를 작성할 예정이니 일단은 차치하고
칼 폴라니의 이 책은 내게 있어 여러모로 상당히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일단은 이렇게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사회과학 서적도
이처럼 역동적일 수 있음을 보여줬고, 과학적으로 사회 전반에 대해 접근할 때
'이론적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방법이 유일한 길이 아닐 수도 있음을 보여줬다.

프랑스판 서문을 쓴 루이 뒤몽은 이 책이 이룬 결정적인 진전을
'사회학을 인류학적 접근'으로 해석한 최초의 책이라는 점을 들고 있는데,
내게 있어 이 책은 일종의 발상의 전환을 가져다 주었다고 말하고 싶다.

수많은 사회과학 서적들이 사회 일반에 대해 다룰 때
진보적 가치에 중점을 두고 접근하는 경우는 있어도
이 책만큼 인간의 동기와 자유,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궁극적인 가치를
이처럼 섬세하게 활용하면서, 아니 활용을 넘어서 문제의 핵심적인
해결책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한 책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이럴진대, 1944년 이 책이 출판될 당시 독자들은 오죽했을까.
결국 시대를 앞서나간 이 책은 출판 당시에는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파시즘의 시대가 채 끝나기도 전에 파시즘에 대한 독창적이고 완벽한 배경을
통찰력있게 분석하고, 혁명의 열기에 들떠 사회주의의 황금기가 시작되려 할 때
사회주의의 이면을 냉정하고 침착하게 들여다봤으며, 자유무역의 영광의 시기에 대한
향수가 완벽히 걷혀지기도 전에 시장경제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이 책은
애초에 동시대에 존재한 그 어떤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는 시장경제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제도적 장치를 주장했고
결국 그의 주장처럼 세계는 전후 강력한 보호주의 무역을 실시한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실로 유례없는 번영의 시기를 맞았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견제하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사회주의의 긍정적 요소(복지정책)를 도입하기에 이르렀고,
그에 따라 노동자를 비롯한 시민들의 생활 수준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무역이 찰나의 번영을 맞이하고 종말을 고했던 것처럼,
이러한 자본주의의 황금기도 채 30년도 되지 못해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케인스주의를 실물경제에 대입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폐단이 악화된 것이다.

결국 세계 경제는 또다시 '자유주의'라는 주술을 외우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
홀릭되고 무분별한 개방과 강대국들의 개발도상국에 대한 '신제국주의' 정책 속에
세계는 채 100년도 되지 않은 시기에 얻었던 교훈을 깡그리 잊어먹게 된다.
(이는 신자유주의 철학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급격한 사회전환'이 문제였다)

진정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2008년에 맞이한 세계 금융위기 폭풍을 잠재우기 위해 시행했던
강력한 국가개입주의 정책은 1929년 대공황 이후
전 세계 경제가 취한 해결책과 완벽히 동일하기 때문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금은 과거와 같이 무조건적으로
'개방' 혹은 '개입'을 외치는 극단주의자들은 별로 없다.
신자유주의자들로 대표되는 보수진영에서도
국가의 개입은 어느정도 용인하는 추세이고,
진보진영에서도 신자유주의 철학에 내포되어 있는
효율성과 시장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19세기 중후반 자유무역의 황금기가
'불안한 평화'였던 것처럼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은 더없이 불안하다.

거부할 수 없는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사회적 양극화는
이제는 필히 감내해야 할 조건이 되어버렸고,
세계 경제의 균형은 미국과 같은 거대 국가의 끊임없는
버블의 생성으로 간신히 이어지는 극도로 불안한 형국이다.
아직까지도 세계 산업은 화석연료와 같은 유한 자원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고,
자연환경이라는 공공재는 아무런 댓가도 지불하지 않은 채
유린하는 현실 속에서 우린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칼 폴라니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다.
결국, 아직도 답은 '인간'에 있는 것이냐고 말이다.
60년이 넘은 지금까지 이 책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칼 폴라니 개인에겐 무한한 영광일지 몰라도
이 책에 나와있는 과거의 폐단들을 아직까지도 무서우리만치
똑같이 오류와 과오를 저지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선 커다란 비극일 것이다.

다음 세대에겐 이 책이 그저 '놀랍도록 흥미롭고 재밌는 교양서적'이 되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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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샘 2010-01-20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회과학 분야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이책이 그렇단 말인가요?
올해 꼭 읽어볼 책으로 꼽아두겠습니다. 지켜질는지는... ^^
스탠리 코언도 기대하겠습니다.

everawake 2010-07-15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칼 폴라니, 이름만 들어왔는데 소개하신 글 덕분에 직접 읽어보고 싶어졌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
 
슈퍼자본주의
로버트 라이시 지음, 형선호 옮김 / 김영사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매우 깔끔하다.

현대 자본주의의 폐해와 모순을 살펴보는 사회과학서적 중에서
이 책만큼 깔끔하고 시원스레 풀어나간 책은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외에는 별로 보지 못했다.

과거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역임한 저자의 경력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로버트 라이시의 현대 자본주의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에 대한 통찰력있는 분석은 매우 뛰어나다.

그가 노동부 장관으로 있었던 클린턴 재임 시기 미국의 사회정책은 획기적이었다.
전세계 진보 진영의 분수령이 되었던 몇 가지 순간을 꼽는다면 나는
대처리즘을 종식시킨 영국 노동당 토니 블레어 총리의 '제3의 길' 선언과
1990년대 중반 스웨덴 사민당의 성공적인 신자유주의적 발상의 전환,
그리고 1990년대 초, 공화당의 12년 통치를 끝장낸
미국 클린턴 민주당의 '변신'을 꼽을 것이다.

60년대 말까지 전세계적으로 강력한 위력을 행사했던 진보 진영의 정책들이
신자유주의의 폭풍을 맞고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황금 시기'의 영광에 취해 있을 때,
미국의 민주당은 그 어느 선진국보다 빠르게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였다.

클린턴 행정부는 결코 기업을 '장악'하려 하지 않았다.
공공의 이름으로, 진보라는 이름으로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약하는 '규제'를 철폐했다.
나아가 행정과 공적 사업을 민간 업체 및 시장에
이양하는 '권력이양' 정책이 실시되었다.

서민들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지혜택을 주던 과거의 모습을 버리고,
서민도 직접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사업을
창업, 확장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실시되었다.
공화당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 노선을 택한 클린턴 행정부.
그들이 사활을 건 것은 노조 지원, 임금 인상, 부의 재분배와 같은
전통적인 진보진영의 정책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이 모든 것을 기업이 활동하는 시장의
자율적인 메커니즘에 맏겨두는 대신 '교육'에 모든 힘을 쏟아 붇는다.
제조업에서 지식경제기반 서비스업으로 변화되는 세계적 추세에서
살 길은 '창의적 시민'을 육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결과 클린턴 행정부는 미국 역사상 가장 번영한 경제를 탄생시켰고,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여전히 미국은 독보적인 헤게모니를 성취할 수 있었다.

물론 전반적으로 그 당시엔 세계적으로 경기가 좋았던 시기였었고,
클린턴 행정부 시절 상대적으로 부의 재분배,
즉 양극화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긴 하지만,
보수정권에서 르윈스키 스캔들 같은 대통령의 도덕성 흠집내기로
헤게모니 쟁취를 시도했다는 것이 입증하는 것과 같이
전반적으로 미국 사회 전체가 균형적으로 발전했던 '마지막 황금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

(현재의 위치에서 과거의 모습을 돌이켜볼 때 과거의 긍정적인 모습이 부정적인 면면보다
상대적으로 더 부각되어 뇌리에 남게 되는 일반적인 현상을 굳이 부인하지는 않겠다) 

찬란했던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미국..
그래서 미국의 마지막 영광의 시기에 핵심 요직을 지냈던
저자가 바라보는 현재 미국 자본주의의 모습이 궁금했다.  

'슈퍼자본주의'란 무엇인가?
라이시는 "대기업들은 훨씬 더 경쟁적이고 지구적이고 혁신적으로 된"
현재 자본주의의 상태를 슈퍼자본주의라고 칭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 안에서도 노사간 타협 같은 민주적인 조절장치가
어느정도 존재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국경없는 자본이
전 세계를 누비며 자본주의의 민주적인 요소를 파괴한,
자본주의 중에서도 '진보적 가치'가 배제된 철저한 자본주의
로버트 라이시가 말하는 '슈퍼자본주의'다.

"기업은 시민이 아니다. 기업은 계약들의 묶음이다.
기업의 목표는 경제게임을 가능한 한 치열하게 수행하는데 있다.
시민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업들이 룰을 정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슈퍼자본주의가 민주주의로 흘러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다"

신자유주의의 역설 중 하나는, 겉으로는 끊임없이 국가의 정책,
그러니까 정치적 의도가 배제된 '시장의 자율 조정'을 강조하면서도
내면에는 지극히 '정치적'인 의도를 품고 있다는 데 있다.
수많은 신자유주의 비판 담론들이 내포하고 있는 핵심 의제는 '과거로의 회귀'이다.
세계대전 이후 급격히 신장된 노동자들의 권익과 조세 등에 따른
부의 재분배 시기 이전, 케인스주의 이전의 시기로 돌아가서 상위 2%의 소수층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그 시기로의 회귀를 꿈꾸는 것이다. 

로버트 라이시는 과거 "거대기업은 거대노조와 상관관계를 이루었다"고 설명한다.
"양측이 임금과 근로조건에 대해 합의한 사항들이 산업 전반에 표준으로 작용하면서,
높은 생산성의 혜택을 나누어주고 중산층의 성장에 기여"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이들의 관계는 "'황금기에 가까운 시대'에
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의 중심적인 특징이 되었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라는 말이 아이러니하게 들리는 이유는
신자유주의적 담론에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포섭되어버린 결과일 것이다.
애초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의 관계가 결코 아니었다.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시각으로만 보더라도 '노동자의 권익 보장'같은
자본주의 내 존재했던 민주주의적 속성들은 
노동자 개개인의 능률 향상과 나아가 생산성의 향상으로 이어지며
'자본주의의 증식'을 가능하게 해준 결정적 요소 중 하나였다. 

비극은 1970년대에 시작되었다.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혁명은 신기술에 의한 것이었고, 이것의 현실적인 효과는
"과거 미국의 과점적인 생산체계를 무너뜨려, 부품이나 서비스가 어느 곳이든지
가장 잘 공급되는 곳에서 조달되는 전세계적 공급 체계들로 이행시킨 것이다"

수많은 새 기술들은 저렴하게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다수의 판매자들을
탄생시켜 과거의 안정적인 생산 시스템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에서 온 '혁명'보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불평등한 탈규제'였다.

신기술로의 변화와 세계화, 그리고 탈규제는 자연스레
소비자들을 얻거나 투자자들을 유치하려는 기업들의 경쟁을 심화시켰고,
이에 따라 기업들은 기업 내부의 다운사이징을 시도한다.
여기서 노동자들의 임금 인하 및 해고는 기업의 다운사이징에 있어서
가장 크고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로버트 라이시는 "탈규제가 낳은 가장 극단적인 폐해는 저축대부은행"이라고 말한다.

"저축대부은행은 탈규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부가 예금을 보호해 주었는데,
새롭게 얻은 지위로 높은 수익률이 나올 수 있는 정크본드 등의 고위험상품에 투자했다.
그 결과 미국 납세자에게 6천억 달러에 이르는 부담을 안겼고 (...)
고수익의 혜택은 민간투자자에게 주고 큰 위험이 따르는 실패는 공공부문에 넘긴다"

냉전시대의 종식과 함께 찾아온 세계 경제, 특히 미국 경제의
이러한 일련의 변화가 미국 자본주의 사상 가장 찬란했던
'민주주의적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데 일조했다는 건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금융분야의 탈규제는 자본주의의 급격한 신자유주의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데, 과거 기업들은 주식증서를
일부 부유한 개인들이 소유했지만 금융분야의 탈규제가 진행되면서
주식, 즉 기업이 일종의 사고 파는 상품으로 변하면서부터
기업들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으로 변해버린다.

다시 말해, 이제 더이상 "더 큰 규모의 경제를 위해 공장 장비에 재투자"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연구에 대한 투자는
계획경제 시절 기업 자신들의 발전에 있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지만
'기업의 상품화'가 이루어진 현재 기업에게 중요한 건 이러한 투자보다
얼만큼 '매끈한 상품'이냐에 초점이 맞춰진다. 

로버트 라이시는 여기서 중요한 건 '기업'이 아니라고 말한다.
기업은 언제나 자본주의적인 속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현재 기업의 모습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소비자, 즉 우리 시민에게 있다는 것이다.
노조의 쇠락을 기업이 아닌 "최상의 거래를 얻으려고 애쓰는
소비자와 투자자에게 있다"는 그의 시각은 흥미롭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은 우리 대부분의 안에 두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즉, 소비자와 투자자로서 우린 더 좋은 거래를 원하지만, 시민으로서 우리는
그런 거래에서 비롯되는 많은 사회적 결과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황금기에 가까운 시대'에 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 체계는
이와 사뭇 다른 균형을 취했다. 그때는 소비자와 투자자로서
우리가 그렇게 잘하진 못했지만 시민으로서의 우리는 지금보다 더 잘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오류 중의 하나는 '소비자' 혹은 '투자자'라는
자본주의적 개념과 '시민' 혹은 '민중'이라는 민주주의적 개념을
간혹 전혀 다른 두 가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소비자'와 '시민'은 동일하다. 그리고 '노동자' 역시 동일하다.
소비자는 시민임과 동시에 노동자이고, 노동자 역시 
투표를 행사하는 시민이면서 물건을 사는 소비자다.

로버트 라이시는 이 점을 지적하는데, 그가 말하는 '황금기에 가까운 시대'에는
소비자와 투자자로서 추구하는 '혜택'보다 시민으로서의 의무감이 더 컸다면,
현재는 시민으로서의 의무감보다 소비자와 투자자로서
더 큰 이익을 얻겠다는 욕망이 상대적으로 큰 시대라고 말한다.
이것이 "슈퍼자본주의의 시대에 민주주의가 맞은 진정한 위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파우스트와 거래를 한 셈이다. 오늘날의 경제가 우리에게 좋은 거래들을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은 경제의 다른 부분에서 우리가 손해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들을 비난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와 같은 거래를 한 것은 사실 우리 자신이다"
 

 

나는 소비자로서, 그리고 투자자로서 조금 더 싸고 좋은 상품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라고 생각한다.
이왕이면 싼 돈에 좋은 상품을 접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은 당연하다.
결국 신자유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도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자극한 담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이시는 우리 안의 시민이 우리 안의 소비자와 투자자를
억제하는 유일한 방법은 '법과 규제'라고 말한다.
즉 법과 규제를 통해 우리의 구매와 투자가
개인적 선택일 뿐 아니라 사회적 선택이기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장벽은 일반적으로 법과 규제는
기업의 이익에 따라 제정되고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로비스트의 존재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고,
'전문가들'의 기업 차원에서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으며
언론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 

기업의 이익을 '전문가들'을 통해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서
언론에 발표해 시민들을 눈 뜬 장님으로 만드는 것이 이들의 역할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이미지메이킹을 한다.
우리가 언론으로 접하거나 광고에서 접하는 기업의 휴머니즘과 선한 모습들은
대중이, 그리고 민주주의가 다뤄야 할 문제들을 가려버릴 수 있다고 라이시는 말한다.

또한 정치인들은 습관적으로 그릇된 기업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데,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결정적인 것, "그런 기업들이 앞으로 달리 행동하게 만드는
입법같은 것은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 더 큰 문제점은 이러한 정치인의 신랄한 비판은
대중들에게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어
그 기업에 관한 문제를 특정 정치인에게 미뤄버리는 현상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로버트 라이시의 결론은 "게임의 규칙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슈퍼자본주의는 수익을 악화시키는 착한 기업의 행동을 허용하지 않는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슈퍼자본주의에서는 규제만이 기업들의 수익에
해가 되는 일을 하도록 유도하는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기업에 민주주의의 권리나 의무가 부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여기서 특히 중요한 점은 '기업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기업들에게 인간적 속성을 부여하는 경우, 원래 사람들에게 속해야 할 의무와 권리를
기업들에게 부여하는 결과를 낳고, 이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경계를 애매하게 만든다"
것이 로버트 라이시가 말하는 '기업의 의인화의 오류'이다.

슈퍼자본주의의 개선을 위한 '규제'로서 그가 제시하는 것은 '법인세의 폐지'이다.
"저소득 투자자들이 소유하는 지분만큼의 유보 수익에 매겨지는 법인세율은
그들이 다른 소득에 지불하는 세율보다 대개 더 높은 반면,
고소득 투자자들이 소유하는 지분만큼의 유보 수익에 매겨지는 법인세율은
그들이 다른 소득에 지불하는 세율보다 더 낮다"
결국 현재 법인세율은 부의 재분배는 커녕 양극화에 일조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그는 "법인세를 폐지하고 주주들에게 기업에 그들을 대신해
벌어들인 모든 소득에 개인적인 세금을 내게 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을 주장한다. 

이는 나아가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기업들은 더 이상 사내 유보를 할 동기가 없어지게 되고,
저소득자 주주들과 고소득자 주주들은
각각에 맞는 저율의 세금과 고율의 세금을 내게 된다"

어찌됐건 결국 답은 소비자이자 투자자이자 시민인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슈퍼자본주의의 증식을 막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인 '법과 규제' 역시
슈퍼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자각한 시민들에 의한 여론이
형성이 되지 않는다면 결코 논의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게임의 규칙을 바꾸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우리의 생각을 바로세우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진보에 대해 연구하기로
마음먹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책은,
사상적으로는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이었다.
그러나 진보에 대한 연구를 '책'으로 집필해 많은 시민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책은,
로버트 라이시의 바로 이 책 [슈퍼자본주의]였다.

과연 이 책은 명확하다.
한국의 이른바 '진보적인 학자'들의 책이 간혹 진보적 담론에 가려져서
대중성이 배제되어 고립성을 띠는 데 반해 로버트 라이시의 [슈퍼자본주의]는
전문적이면서도 독자들이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생생한 예시와 함께
놀라운 분석력과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동안 알려진 진보적 담론의 무의미한 나열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서의 분석.
(개인적으로 기업을 '의인화의 오류'의 측면에서 분석한 건 이 책 외에는 보지 못했다)


미국의 사례를 예로 들고 있어서 우리와는 약간 정서적으로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세계 경제의 중심인 미국이 끼치는 영향력은
동서를 막론하고 막강하기 때문에 미국 자본주의의 현재에 대해
살펴보는 이 책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매우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다.

선진국들의 지배정책이 제국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전환한 것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느꼈던 '생명'에 대한 죄의식과
단순한 온정주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총과 칼에 의한 학살보다
자본으로서의 통제가 더 효율적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리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본주의의 현실에 대해,
자본주의의 '인간성'에 대해 다시금 고찰해야 한다.

입으로는 신자유주의를 부르짖고 있으면서도 금융위기에는
철저히 케인스주의로 대처하고, 경기가 회복되면 다시금 신자유주의를 노래부르는
우리에게 어쩌면 바로 지금, 미국발 세계공황의 여파속에서 서서히 회복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지금이 아니라면 우리의 '슈퍼자본주의'가 인간성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시기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로 지금 이 책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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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란
현기영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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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미덕은 무엇일까?
아니, 미덕이라고 물어보기엔 너무 거창하다.
당신은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부분에서 매력을 느끼는가?
누군가는 자신과는 다른 세상이 책 속에서 펼쳐지는 모습을 보며
판타지에 빠질 수도 있고, 누군가는 현실적인 우리네들의 이야기를
문학적 미학으로 포장하는 예술성에 감동을 하기도 한다.

현기영의 [누란]은 이 두 가지 경우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부류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픽션이 주는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 차원의
판타지를 전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철저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예쁜 포장지로 감싼 아기자기한 소설도 아니다.

그저 '왕년에' 민주화를 부르짖었던 한국 학생운동사의 마지막 '진정한 운동권', 
허무성이란 인물의 변절과 21세기 현실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 내가 이 소설을 읽고자 마음먹었던 이유는 작가의 유명세때문에 아니었다.
시사잡지의 서평에서 읽었던 이 소설의 소재,
'386운동권의 현실'이란 소재에 끌렸던 것이다.
사실 나는 386세대를 부정적으로 보는 20대 중 한명이다. 

그들이 이루어낸 '민주화'는 물론 값진 것이었고,
87년 당시 초등학생도 아니었던 내가 '그깟 민주화가 대수냐?' 운운하며
그들을 깎아내리는 건 건방진 말일 뿐더러
나에게 그런 주장을 할 자격도 없는 게 사실이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게 된 그들의 87년 이후의 행보에서 염증과 절망감을 느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라고?
그 시절 그때의 영광은 '특권적'으로 누리려고 하면서
지금의 잘못만은 '세대'가 아닌 '개인'의 것으로 취급하며
회피하려는 태도는 나는 사실 조금.. 치사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소설가 방현석은 그들이 '386세대'란 용어를 승인한 순간 80년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386세대라는 말은 매우 상징적이고 영광스러우며 동시에 위험하고 역설적인 말이다.
독재정권의 추악함을 타도하기 위해 거리로 뛰어나온 80년대 대학생들은
독재정권이 종식됨과 동시에, 6.29 선언 이후 정치판에 국가의 모든 '권력'을
무책임하게 위임함과 동시에 민주화라는 추상적인 목표가 달성되었음을
자축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집단화를 통한 민중간, 세대간 단절이라는 교묘한 정치전략의 술책이었던
'386세대'란 용어는 사회에 완전히 포섭되어버린 그들을  다시금 과거의
낭만주의의 향수에 빠뜨려 스스로를 '신성화', '특권화'했다.
그들이 '386세대'로 규정되는 순간,
사회는 80년대의 고졸과 뜨거웠던 6월의 시민들을 철저하게 주변화된 존재로,
승리의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만들어버렸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은 '386세대'라는
사회적 상징성에서 오는 의미만큼의 값어치를 하지 못했다.
철저하게 획일화, 사회화되어버린 그들의 행보에서
'386세대'라는 말은 자신들의 현실을 위로하는
술판의 안주거리 이상의 그 무엇이 될 수 있었단 말인가?

전적인 책임을 그들한테 묻는 것 만큼 바보같고 무책임한 투정은 없지만,
젊은날 '평등한 세상'을 외치던 열정을 잃어버린 기성세대가 보여주었던
급격한 사회적 보수화와 고립성은 유래없을 정도로 빠르고 강력했다.
그들은 30대가 지나고, 40대가 지나도, 50대로 다가가도
여전히 386이란 철의 장막에 갇혀있다.

어쩌면 이것은 그들이 '386세대'란 말로
형상화되면서부터 예견된 비극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난 그들의 '변명'을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아니다. 지금와서 잘잘못을 따지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차피 '모두가 다 잘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취급하면 훈훈하고 따뜻하지 않은가!

뭐, 그래도.. 허무맹랑하고 자기합리화에 불과한 이야기일지라도
지금처럼 내가 그들을 바라보는 냉소적인 태도가 정립되기 전,
그러니까 학창시절 때 동경의 대상이었던 그들이
대학에 와서 변절의 아이콘으로 변해버렸을 때,
내가 느꼈던 뜨거운(!) 실망감을 생각한다면
최소한 그들을 합리화해줄 수 있는 변명거리는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386의 변명이 아닌 현실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남산 기슭의 한 지하실에서 시작한다.
대학 4학년 허무성은 형사 김일강에게 처절하게 고문당한다.
2장까지 계속되는 고문 묘사는 실로 매우 그로테스크하다.
죽음의 고비에서 그는 한순간에 변절자가 된다.
그 댓가로 허무성은 '동지'를 잃는 대신 대학교수라는 '미래'를 얻었다. 

"그 항쟁의 한가운데서 투항자가 되어버린 그는 자신의 처지가
S대생 박종철과 정반대가 되었음을 알았다.
박종철과 허무성, 혹독한 고문 속에서 한 사람은 죽고
다른 한 사람은 살아남았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두 사람의 생과 사는 정반대의 것이 되어 있었다.
죽은 박종철이 6월의 광장에서 자유의 넋으로 크게 부활하는 기적을
목도했던 그는 자신의 정신적 죽음을 뼈저리게 느껴아만 했다"

허무성은 김일강의 사촌형이 재단이사장으로 있는 H대 역사학과 교수가 되었다.
국회의원이 된 김일강은 끊임없이 그를 꿈속에서 괴롭혔다.
아직도 집에 돌아가는 어두운 골목 뒤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자신을 덮쳐 검정색 승용차에 태운 뒤 남산으로 끌고 갈 것 같다.

90년대로 점프한 그 공간에서 허무성은
학생들에게 '불필요한 교수'가 되어버렸다.
친일파를 청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그에게
학생들은 '과거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취직공부도 좋지만 책도 읽어야 한다는 그는
학생들에게 '꼰대' 취급을 받는다.
사학과 학생들 거의 전부가 취직을 위해
부전공을 선택하는 현실에서 허무성은 철저히 고립된다.

그를 과거와 연계해주는 유일한 끈은 김일강이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꾸준하게 안부전화를 하고
일년에 서너차례 찾아와 같이 술을 마신다.
거기에 과거 자신을 고문한 '가해자'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이제 그에게 있어 과거는
87년 6월의 영광과 환희가 아니라 남산의 공포와 절망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말시가 부드럽게 들린다고 하더라도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김일강이었다.
그 부드러움 속에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껄껄껄 웃다가도 문득문득 쏘아보는 날카로운 눈빛!
'난 내가 만든 자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너는 내가 될 것이다'
라고 그는 그 지하실에서 말했었다."

대학 교수 구조조정의 칼바람.. 철학과와 함께 구조조정 일순위가
사학과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허무성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보수세력의 싱크탱크의 일원이 되는 것 뿐이다. 

아직까지 박정희를 맹신적으로 추구하고 파시즘을 꿈꾸는 김일강은
사촌형과 상의 끝에 H대에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신설하기로 결정하고
그 강좌를 자신보고 맡으라고 제안(강요)한다.

"뭐, 괴물? 허무성, 정말 그렇게 빈정거릴 거야, 엉?"

"죄송합니다."

"아아, 아냐. 내가 참지. 자네 지금 심정을 알아. 좀 착찹할 거야.
낯선 일을 맡게 되면 누구나 처음엔 바동거리는 법이니까. 하하하!"

현실과 신념은 다르다.
월드컵의 붉은 물결 속에서 파시즘의 가능성과 대중의 위력을 동시에 본
그의 최후의 선택은 현실도 신념도 아닌, '누란'이라는 이상이었다.
 

 

 

이 작품 속에서 밝고 희망찬 캐릭터는 단 한명도 없다.

옛 운동권 동지였던 허무성의 처 문정선은 결국 인도로 떠나고,
페미니스트 송난주와 사학과 제자 오용미는 결국
무성의 주변 인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단골 술집 주인 미미 역시 절망적인 현실을 떠나
수녀가 되고 싶어하는 30대 초반 여성이다.
그들의 대학 동기는 노숙자, 보수당 국회의원, 박봉의 논술강사 등이 고작이다.

등장인물들의 현재만큼이나 소설은 철저하게 회색톤이다.
소설 속 캐릭터로 표현하는 작가 자신의 주장은 더없이 직설적이다.
작품 속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김일강과 허무성이 '토론'을 하는 장면이 있다.
김일강의 끝없는 박정희에 대한 찬양과 파시즘에 입각한 정치관은
그에 대한 트라우마를 떨쳐내지 못해 소심하고 어눌한 말투의 
허무성의 진보주의와 끝없이 파열음을 낸다.

대중에겐 명백한 '적'이 있어야 체제가 안정화가 된다는 김일강과
민족주의, 파시즘은 '공상'일 뿐이라는 허무성.
그 둘 사이의 논쟁은 이제 붉은 등 밑의 술집 손님 중
하나에 불과한 시시콜콜한 술주정이 되어버렸다.
어눌한 허무성과 대조되는 당당하고 호탕한 모습의 김일강의 모습은
'가해자'가 '권력자'이자 '승리자'가 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절망과 냉소의 표현일 것이다.

진정 이 책에서 희망은 없다.
386세대의 미화되고 낭만적인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적합하지 않으며, 정치는 머리아픈 것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 이 책은 그 어떤 사회과학 서적보다 재미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의미가 있다.
철저하게 기름기가 제거된 386세대의 현실.
정치가 현실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월드컵을 가장한 쇼비니즘 마케팅의 잔혹함.
피해자는 있지만 그 어디에도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는 역겨운 사회 구조.
이러한 현실 속에서 현실을 세상 모두가 절망이 아닌
희망으로만 그린다면 나는 더욱더 암울할 것 같다.

함석헌 선생은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씨알들을 위해
대신 울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고 학자'라고 말했다.
[누란]을 통해 현기영이 대신 울어주는 우리 현실에 대한 눈물은
절망 속에서 한 톨의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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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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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우석훈의 책들은 무섭다.

'경제학'이란 학문이 분명 유쾌한 분야는 아니지만,
아니 유쾌하기는 커녕 우울하고 절망적인 학문인 것이 사실이지만
경제학자 우석훈이 쓴 책들은 우울과 절망을 넘어 '공포감'을 준다.

그러나 우석훈의 책에 스며들어 있는 공포감은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 주었다.
우석훈이 유명해진 건 있었던 것은 한국 경제가 공포스러울 정도로
파탄 직전인 상황이라는 게 가장 큰 이유겠지만, 이제 평범하고 침착한 어조로 
나즈막히 읊조리는 인문/사회과학 서적은 더이상 아무도 읽지도 찾지도 않는
'그들만의 공허한 외침'이 될 수밖에 없다는 한국 인문 서적계열의
현실을 처절히 반영해주는 현상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인문서적을 읽으며 가졌던 내용에 대한
조용한 성찰과 사색은 저 먼 곳으로 소외되고,
우린 이제 사회과학 분야마저 소설과 같이
빠르고 자극적인 것만을 찾는 매스미디어의 노예가 된 것일까?
뭐, 어쨌든 좋다! 그 구성이야 어찌됐건 [88만원 세대]는
결코 '자극'으로만 점철된 그저 그런 저작은 아니었으니.

[88만원 세대]가 히트할 수 있었던 건 소설같은 표현력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이 만들어낸 파열음은 결코 작지 않았다.
패배주의는 커녕 사회적 위치를 인지조차 못하고 있던 도서관에 틀어박힌
이 세상의 수많은 20대들에게 한번쯤은 심각하게 자신에 대해,
그리고 사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것.
이것 하나만으로도 [88만원 세대]는 '20대의 바이블'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이후 나온 그의 저서 [조직의 재발견]과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88만원 세대]의 연작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부실했던 것이 사실이다.
워낙에 [88만원 세대]의 임팩트가 커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간혹 보이는 자료수집의 부실함과 지나치게 비관적인 현실 인식, 진부한 결론 등
'[88만원 세대]의 대히트가 아니었다면 나올 수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실망을 많이 했었다.
('경제대안 시리즈'에 가장 부실한 것이 '대안'이라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괴물의 탄생]은 '경제대안 시리즈'의 마지막 책이다.
우석훈은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이제 최종 대안에 다다랐다.
과연 그는 한국 경제의 대안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총 3부의 강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1부에서는 세계 경제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집어주고 있고,
2부에서는 한국 경제의 발전 역사를 살펴본다.
마지막 3부에서는 한국 경제의 대안을 모색한다. 

한국은 과연 파시즘으로 들어설까?
우석훈은 "한국 경제는 파시즘으로 들어설 조건에 다다랐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만약 한국에 파시즘이 들어선다면 전통적인 파시스트
국가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띠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는데
"'건설자본 + 성장주의'라는 두가지 축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여러 가지 대안에 대한 사회적 논의들을 억압하고, 정치지도자와  2~3%
정도의 경제 엘리트가 나머지 국민들을 끌고 가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이 파시즘화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현재 한국 경제는 '파시즘'이란 용어가 나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엉망이라는 점이다.
파시즘이란 말이 공공연하게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이것보다 무서운 현실이 또 어디 있을까?

괴물이 탄생될 수밖에 없었던 한국 경제
비극의 시작을 우석훈은 '압축성장'에서 찾았다.
이승만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한국은 경제의 주도권이
정부와 기업 중 정부에 월등히 쏠려있는 게 사실이었지만
21세기 한국 경제의 괴물이 탄생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박정희 시절의 '압축성장' 구호였다는 것이다.

압축성장은 쉽게 말해 "경제 성장을 우선으로 하고,
부의 분배는 나중에" 하겠다는 성장우선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분배'는 박정희가 뒈질 때까지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케인스주의를 극우적으로 가장 악랄하게 해석한
이 정책이 놀랍게도 당시 한국에서는 '먹혔다'.
아니 먹혔다기보다는 무언을 동조로 인식하는
당시 시대상황 상 누구에게도 선택의 자격이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겠다.

그러나 실제로도 60~70년대 대다수 한국 국민들은
국가가 만들어낸 교묘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홀려
'나 하나의 희생으로 국익에 이바지하자'라는 신념 아래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타적인 동물'이 되었기 때문에,
성장 우선주의 정책이 전적으로 폭압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괴물의 탄생이 비극적인 이유는 그 양면성에 있다.

과거, 국익이라는 미명 아래 부의 재분배는 커녕
민중들의 기본적인 인권조차도 생각할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1945년 저개발국가에서 지금 정도의 경제적 번영을 이룸과 동시에
그 과정에서 혁신적인 민주화도 이루어낸 나라는 극히 드물 뿐더러,
'국민 경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무역중개나 교역의 집결지 역할을
하는 도시국가 모델이 아니라, 실제로 1차-2차-3차의 산업의 유기적 관계를 만들어
생산하는 경제로 도약한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는" 점은 그 시절을 무조건적으로
지워버려야만 하는 치욕적인 과거사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며, 
동시에 박정희가 아직까지도 보수진영의 메시아인 이유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심각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수구들이 박정희를 찬양하는 주 레퍼토리 중 하나인
"인권유린은 있었지만, 독재는 있었지만 경제는 발전했잖아?
우리나라에 박통만큼 경제를 더 발전시킨 지도자가 어딨누?"라는 말은
문장 자체가 모순이다. 인권유린이 있었기에 한국 경제는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강의 기적'은 영민한 지도자의 뛰어난 재능때문이라서가 아니라
인권유린을 하면서도 그 엄청난 댓가와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됐었던
독재라는 권위주의적이고 기형적인 사회구조 때문이었다는 말이다.
인권유린과 경제발전의 관계는 '하지만' 이란 접속사가 들어갈 수 있는
둘 사이의 전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원인과 결과 관계에 더 가깝다)

   

 

 

괴물이 되어버린 현재 한국 경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우석훈은 성장일변도의 경제정책, 그 중에서도 구조에 있다고 본다.
즉 한국적 특수성이 '한강의 기적'에 적용된 것이다.
"70년대 한국의 재벌들은 대부분 건설사를 모기업으로 하여,
이를 통해 순환출자와 기업지배 등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건설사에 돈이 풍부하게 있어야 나머지 회사들의 자금 회전이 원활해지는 구조"였다.

돌연변이는 여기서부터 탄생했다.
경제와 건설업과의 관계는 지긋지긋하게 이어져 2009년 현재까지 떨어지지 않고 있다.

한국 경제에서 국가의 힘이 가장 강력했던 전두환 시기를 지나
세계화에 미쳐버린 김영삼 정권에 와서 한국 경제는 커다란 격변기를 맞이하게 된다.
지금껏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가파르게 치솟게 해주는 데 큰 역할을 한 산업정책은
김영삼 정부의 무분별한 세계화 구호 아래 저멀리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문민정부 때는 WTO체제 출범 등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바람이 불었던 시기였다.
게다가 김영삼의 공약 중 하나는 한국의 OECD 가입이었다.
우루과이라운드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정부는
아무런 준비조차 하지 않은 채 무작정 1995년을 '세계화 원년'으로 선포하고
OECD 가입을 위해 엄청난 무리수를 둔다. 결국 1996년 OECD가입을 전후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외채는 IMF 발발을 자초한 큰 원인 중 하나였다.

더욱이 대기업은 삼성의 자동차 산업 진출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기존 국가적인 산업정책에서 시행되던 산업에 대한 투자는 사라지고
단순히 덩치 불리기에만 급급해져서 순환출자와 차입경영이 극에 달하게 된다.
정부와 기업 모두 위태로운 상황에서 IMF는 차라리 필연이었다.

IMF를 겪고나서 한국 경제에서 정부와 기업의 위치는 완전히 역전된다.
"지난 10년간 한국에서 정부가 일정한 권한을 가지고 시장에 대해
어느정도 제어할 수 있었던 시기는 김대중 정권 1기(1998~2000)가 유일"했다.

"대부분의 기업과 은행들이 정부에서 제공하는 지급보증이나 공적자금 없이는
언제든 도산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우석훈은 2000년 이후
"삼성구조본-법률회사김앤장-재경부전현직고위간부로 구성된 3각동맹체제"가 형성됐고,
이것은 단순한 동맹 차원을 넘어 "국가가 대기업들을 지휘하면서 형성된
한국 특유의 동원경제의 해체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가 온전히 '괴물의 형태'를 띠게 된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였을까?
우석훈은 "2003년 7월 노무현이 '2만 달러 경제'를 새로운 국정 지표로 선택했던 순간과,
탄핵에서 복귀해 2004년 11월, 한국형 뉴딜을 발표하던 순간 사이"를 그 순간으로 꼽는다.

나는 노무현의 이 부분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를 배신자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에게 '증오'의 감정까지 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노무현이라면 뭔가 다를거라고 생각했던
그에 대한 나의 믿음에 금이 갔던 순간이 탄핵 이후 그가 그토록 바랬던
'재신임'을 국민들이 투표로 보여줬던 총선 이후의 행보 때였다.  

  

   

 

내생에 첫 투표권을 행사했던 2002년, 아직은 '어린 생각'을 가졌던 그때에도
나는 그가 대통령이 되면 '모든 것'이 바뀔 거란 철없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친일파 규명이라는 역사의 잔재에 대한 청산부터, 더 자유롭고 기분좋은 사회.
최소한 강대국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하지는 않는 사회..
뭐 이런 막연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는 정말 끝없이 싸우기도 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여전했던 보수언론에 대한 적대적 감정은
결코 내생에 첫 투표가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탄핵 때 거리로 나온 수많은 촛불의 파도를 보면서 아직까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에 용기를 얻기도 했으며,
2004년 총선의 그 영광의 순간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말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후 그의 행보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무엇보다도 그는... 경제에서 무너져버렸다.
결국엔 다시 부동산과 토목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그 무엇도 바꿀 수 있을 것만 같던 그 의석수를 가지고
국보법 하나 폐지 못한 채 한국 경제는 그대로 과거로 회귀했다. 

한국 경제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에서
괴물을 탄생시킨 원흉이 노무현 정부였다는 우석훈의 주장에
슬프지만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산' 이명박 덕분(?)에 '죽은' 노무현은 이제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함'을 획득했지만
그의 죽음이 재임기간 동안의 오류와 과오까지 희석시킨다면 난 더더욱 슬플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서거 전에 나왔던 이 책을 읽으면서
동정과 추모의 마음이 배제되어 더욱더 냉철하고 객관적일 수밖에 없는,
우석훈이 노무현 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을 눈을 부릅뜨고 대면하려 했던 것 같다.  

 

  

우석훈이 바라보는 한국 사회 전반의
가장 안타까웠던 순간은 2002~2004년 이었던 것 같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현실화되고
중앙형 시스템이 분산형 시스템으로의 전환에 대한 논의가
최초이자 가장 활발했던 때는 2002~2004년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2004년 한국형 뉴딜이라는 토목형 경제로
방향을 급선회하고, '선택과 집중'이라는 신자유주의적 구호에 의거해
'말 잘 듣는 지역에 집중투자하겠다'식의 지역별 줄세우기까지 하게 되면서,
전국 경제는 '땅값 경제'로 급변하면 이 같은 가능성은 완전히 닫혔"다.

한국 경제 위기의 모든 원인을 하나의 유형적인 존재(노무현 정부)로
환원해서 판단해버리는 일부 학자들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그의 관점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전까지 지나치게 국가에 의존해서 경제를 풀어나갔던
한국 사회의 구조적 특징을 생각하면 이렇게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풀뿌리 민주주의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중앙권력집중형 시스템 안에서
우리 경제는 항상 잘되도 국가 탓, 못되도 국가 탓이지 않았던가.

지역주의 해소와 대타협을 위해 동거정부 구상, 개헌 주장, 극단적으로 대연정까지
주장하며 재임기간 내내 지역차별 철폐를 외쳤던 노무현의 정책을 '지역별 줄세우기'로
해석한 우석훈의 상상력이 갸륵하기도 하다.
뭐 동기야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지역주의를 부추기는 꼴이 되었으니
지역주의를 강화시켰다는 오욕도, 한국 경제를 '땅값 경제'로 급변시켰다는
치욕도 감수하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역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가 2002~2004년 무렵이었는지는 몰라도 
한가지 확실한 건 한국 경제가 이지경까지 온 데에는, 아니 한국 사회 전반을 관통하는 
고질적인 불치병을 아직까지 앓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풀뿌리 민주주의,
즉 지역 경제가 발전하지 못해서라는 사실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단순히 '민주주의'라는 신념의 가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 나라 경제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우석훈 역시 한국 경제의 대안으로
무엇보다도 먼저 '지역 경제의 발전'을 꼽는 것이다.
그는 불과 20년 전만 해도 가난한 나라였던 스위스가 극적으로 선진국 반열에
들 수 있었던 이유는 지역 사회의 발전에 있다고 말한다. 

지식 기반의 사회로 재편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현 추세에서 '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 사람'들이 워커홀릭 수준으로 야근에 휴무를 반납하며
일하는 한국의 노동자들보다 창의성 면에서 뛰어나리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일주일 중 나머지 5일을 자기계발에 투자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월급을 조금 받지 않느냐고? 그래도 큰 상관이 없다.
바로 여기서 지역경제의 강점이 나온다.

"일하는 시간은 좀 줄이는 대신 임금은 좀 적게 받지만, 이렇게 줄어든 임금만큼
국가 혹은 지역사회가 적극적 주거정책과 교통 및 교육에서의 공공정책 등으로써
생활비를 줄여준다면, 그 시스템은 돌아가게"되어 있다.
즉, "노동의 유연성이란 고용과 해고의 유연성이 아니라,
노동과정의 유연성으로 전환되어야"한다.

우석훈은 스위스형 경제, 나아가 한국 경제의 병폐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임금 수준의 불평등 해소를 최우선으로 꼽는다.
"대기업은 임금이 높은 대신에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기 때문에 안정성이 아주 낮고,
공공부문은 임금이 낮은 대신에 안정성은 아주 높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선 "공공부문이 안정성도 높고 임금도 높은 상태"이기 때문에 인재들이
공무원 시험에 죽자살자 매달리는 추세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대기업과 공공부문 중간의 '제3부문'의 구축이다.
즉, "대기업과 공무원의 중간 정도의 월급을 받되, 노동과정은 아주 유연해서
출퇴근과 시간관리가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그러면서도 평생 일할 수 있는 직장"말이다.
이를 위해선 스위스형 모델처럼 공공부문 혹은 지역경제가 제3부문의 적은 월급이
결코 적게 느껴지지 않도록 사회적 비용에 대한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모든 권력이 중앙(서울)에 집중되어 있고, 형식적인 지자체 수준에만 머물러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스위스와 같은 사회적 시스템은 꿈만 같은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단 우리는 그게 어찌됐건 일단 문제제기라도 하고 비록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도
이렇게 구체적인 사안들을 자꾸 내놓고 끊임없이 공론화시켜야 한다.
어느 선진국들도 결코 처음부터 직접민주주의가 시행되고, 경제가 찬란했던 경우는 없다.
상충되는 입장이 부딪치는 파열음에 의해 그 나라는 한단계씩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교육은 경제 대안에 있어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한국의 교육은 완전 전멸 상태다.
교육과 경제를 떼어놓고 판단할 수 있다면
경제는 그나마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중이라면
교육은 수직낙하해서 콘크리트 바닥에 처박혀 있는 수준이다. 

한국의 교육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우석훈은 사교육이 폭발한 계기를 2000년 4월,
헌재의 과외금지안 위헌 판결로 보고 있다.

전두환 때 금지된 과외금지안이 행복추구권에
위배된다며 헌재가 위헌판결을 내린 것이다.
헌재의 위헌 판결을 거론한 것은 비록 상징적인 차원의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사교육의 폐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사교육은 일종의 기생 산업이라서 다른 산업과는 달리
경제 내 파생적 효과가 매우 제한되어 있다.
이 산업은 이렇다 할 산업 유발 효과 없이 부모들의 가처분 소득만을
떨어뜨려, 정상적인 내수시장을 파행적으로 몰고 가는 효과만 만드는 것이다"

사교육은 결국 '내 자식 성공시키기'라는 한탕주의의 산물이다.
'안하면 손해'라는 인간 심리가 작용한다.
모든 사람들이 동참하진 않지만 안하면 내 자식만 뒤쳐지는 것 같다.
그래서 결국 돈이 많이 드는 걸 알면서도 울며 겨자먹기로 하는 것이다.
이건 모두 죽는 게임이다. 유일하게 살아남는 존재가 있다면 사교육업자들이다.
어차피 이젠 법에 저촉되지도 않겠다,
사교육 시장은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한다.

사교육은 오로지 대학입시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개개인의 창의성을 말살시킨다.
결국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기준이 '점 찍어 준 암기를 누가 더 잘하느냐'가 되는 것인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현실에서 지식기반 사회로 변화해가는
세계적인 추세 속에 국가경쟁력을 키울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모두 죽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일류대에 합격하지 못하면 사교육에 투자한 돈은 허망하게 날아가는 꼴이고,
일류대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사회의 중장기적인 측면에서 보면 
창의성이 전무한 개인은 세계시장에서 경쟁이 되지 않는다. 

영국과, 덴마크, 핀란드, 스웨덴, 오바마의 미국까지.
왜 그렇게 교육 혁신에 목 매는지 우리나라 정부는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사교육시장이 손도 못 댈 정도로 커져버렸기 때문일까.

우석훈은 교육 혁신에 대한 해결책으로
"중등교육에서부터 지식기반과 문화기반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표준교육은 최소한으로 하고, 개인이 원하는 지식과 문화교육
비중을 높이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교육 체제를 운용하는 시간을
법적으로 줄이자는 이야기인데, 이것이 실현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도 현재 한국 사회 전반의 근본적인
학벌위주의 사회를 개혁하기 전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이명박이 교육정책이랍시고 내놓은 자립형 사립고는
공교육 과정 절반만 이수하도록 규정해놓아서
얼핏 우석훈의 '대안'에 근접한 것처럼 보이지만,
절반의 빈공간을 학교에선 '입시 대비'로 채울 것이 뻔하다.
"청소년들을 위한 지식과 문화 프로그램들을 사회가 제공해야 한다"
해결책이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과 비슷한데,
교육개혁은 분명히 필요하다. 사교육을 철폐해야 한다.
그러나 사교육을 철폐하기 힘든 이유는
사회 구조가 학벌지상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학벌지상주의의 타파가 우선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학벌지상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선 먼저 사교육을 제거해야 한다.
이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뱅글뱅글 돌 수밖에 없는 게 한국 교육의 현실이다.

결국 한국 경제의 해결책은 지역 경제의 활성화와 교육 개혁,
그리고 (우석훈의 표현에 따르자면)제3부문의 활성화다.
우석훈이 제시하는 '대안' 역시 이 세가지로 압축된다.  

  

  

 

내가 [88만원 세대]이후 '한국경제대안 시리즈'란 이름을 달고 나온 두 권의 책,
[조직의 재발견]과 [촌놈들의 제국주의]에 비록 적지않은 실망을 했음에도
마지막 책 [괴물의 탄생]을 집어든 건 순전히 시리즈의 완결을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조직의 재발견]과 [촌놈들의 제국주의]가 기대만큼 미치지 못해
실망을 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풍부한 상상력과
공포감을 이용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현실 문제에 대한 관심 유발 '전략'은
지금껏 보아왔던 그 어떤 사회과학 서적보다 효과적이고 무엇보다 재밌었다.
그래서 그 두루뭉실한 결론에 대해 '쓴소리'를 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던 것 같다.
(정말 애정이 없고 따분하고 재미없다면 쓴소리조차 귀찮아서 나오지 않는다)

우석훈이라는 경제학자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과 마지막 시리즈라는 것에
끌려서 집어든 [괴물의 탄생]은 전작들에 비해 훨씬 더 매력적인 책이었다.
전작들은 경제학의 범위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주제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여러부분에서 간혹 부실한 모습이 보였었는데, [88만원 세대]이후 오랜만에
경제라는 주종목으로 돌아온 우석훈의 현실 분석 능력은 역시 탁월했다.

비록 [88만원 세대]를 읽고 느꼈던 '감동'은 이제 더이상 찾을 수 없었지만,
한국 경제 전반에 대한 한치의 자비라고는 없는 날카로운 시각은
소설적 구성 못지않은 흡입력을 자랑하며 시원스레 결말로 다가갔다. 

그리고.. 결코 이 책에서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전작처럼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이론'에 그치지 않았다.

사교육, 중등교육에서 시작해 사립대학의 등록금과 운영방식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그의 '대안'은 비록 지금 당장은 도입하기 힘든,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해결책이언정 충분히 곱씹어보고 공론화할 만한 가치가 있었고,

스위스 및 여타 유럽의 선진국들의 구체적인 사례를 거론하며 제3부문,
즉 기업과 국가 사이의 완충자, 균형자 역할을 하는 부문을 찾아내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기업들의 공적, 사회적 기금 조성 / 생협의 발전 / 정부가 일정부분 기금을
대주며 지원을 해서 발전시켜야 한다는 그 세부적인 방법까지 제시해주는 모습을 보며
전작들에서 결론의 허망함으로 인해 느꼈던 실망감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설령 그것이 당장 실현불가능해 보이는 '대안'이라도 좋다.
앞서 말했다시피 사회의 발전은 상충되는 입장의 파열음에서 오는 것이다.
원석이 다듬어져 점차 빛나는 보석으로 세공되는 것처럼 그 어떤 것이라도 캐내야 한다.
이러한 파열음마저 낼 수 없는 사회가 되는 순간,
우리 사회는 파시즘이자 전체국가로 타락하는 것이다.

4대강이라는 건국 이래 최대의 토목사업에 국가의 온 예산을 퍼붓는 미친 정부.
1년에 순이익 1억을 올리는 초우량 공공기업까지 4대강에 끌어들여 빚을 지게 하고,
그 기업의 엄청난 예산 적자 구멍을 카지노 사업으로 매꾸려하는 미친 정부.
허덕이는 국가 예산에서 소득세, 법인세율 마저 내려 부자 감세를 자행하는 미친 정부.
국민들은 신자유주의에서 살아남으라고 등 떠밀고 대기업은 꼭 감싸안는 미친 정부.

정말 우리에게 이제 더이상 희망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우석훈같은 악바리 지식인이 있기 때문이다.
진중권의 시간강사 해임에 분노하고 김제동의 정치적 탄압에
분노할 수 있는 '깨어 있는' 시민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몸을 던져
우리 곁으로 뛰어든 멘토는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수십년간 빨갱이 소리 들으면서도 인동초처럼 살아남아
진정한 민주주의를 보여준 그분 역시 이젠 볼 수 없지만,
이 책처럼 진지하고 냉철하게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대안을 내놓는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난 믿는다.

하나하나의 꿈과 희망과 대안이 모여
언젠가는 수많은 물줄기가 바다로 모이듯,
한국 사회가 더 나은 빛나는 미래로 발전될 것을 말이다.

읽으면서 화도 많이 났고, 안타깝기도 하고, 무릎을 치게도 만들었던
길기도 참 길었던 우석훈의 '한국경제대안 시리즈'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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