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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전환 - 우리 시대의 정치.경제적 기원 ㅣ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8
칼 폴라니 지음, 홍기빈 옮김 / 길(도서출판) / 2009년 7월
평점 :
사회과학 서적들은 왜 재미가 없을까?
몇몇 예외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그렇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비단 저자의 '불친철함'만을 탓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사회과학 서적의 궁극적 목적이
'읽는 이에게 재미를 주기 위한 것'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소설도 아닌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목적은 자신이 전공한
분야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거나,
혹은 자신이 모르는 분야에 대한 호기심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사회과학 서적을 읽는 독자들은 '준비된' 독자들이다.
즉, 저자가 아무리 어렵고 전문적인 말들을 나열하며
자신의 지식을 글로써 과시한다 하더라도
울렁증이나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는 독자들이란 이야기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과학 서적에서 '재미'는 부차적 요소일 뿐 필수적 요소는 아니다.
그래서 한국의 인문/사회과학 서적들은 종말을 맞이했다.
사회과학 분야는 시대를 반영한다.
최소한 한국에서는 말이다.
한국에서 사회과학 분야가 가장 눈부시게 발전했던 시기를
돌이켜보면 5공시절이었다. 정권의 유화정책으로 금서가 어느정도 풀렸기에
그것도 가능한 일이었지만, 궁극적으로 그시절의 젊은이들(386세대)은
폭압정치의 울분을 거리와 책에서 풀었다.
스탈린과 맑스의 기름기 하나 없은 이론서들을 탐독하고
마오쩌둥의 실천론, 모순론도 모자라 주체이론까지 탐독한 그 시대는
분명 사회과학분야의 황금기였지만, 이와 반대로 시대는 암흑기였다.
찰나의 위트조차 존재할 수 없던 시대,
그래서 사회과학의 딱딱한 이론들은 그 시대에 자연스러울 수 있었다.
그로부터 20여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사회과학 분야는 초토화 상태이다.
이제 시대는 권위주의 정치에 눌린 절망적인 암흑기가 아니었다.
머리아픈 이론서들은 매스미디어의 화려한 비쥬얼에 압도당했다.
온 사회가 가벼움과 경망스러움에 넘쳐흐르는 이 시대에
이론만을 설파하고 있는 사회과학은 결코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래서 점차 그들만의 놀이터로 전락한 이 분야는
출판시장의 불황기를 맞이하며 인문 분야와 함께 가장 먼저 무너져내린다.
현실이 그랬다.
외국의 유명한 사회과학 서적들도 묻힐진대
하물며 한국의 지식인들은 오죽했을까.
그럼에도 진중권 같은 극소수 지식인들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위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모든 사회과학 서적들이 재미없고 딱딱하기만 한 건 아니다.
슬라보예 지젝과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들이 범접하기 힘든
딱딱함으로 무장한 전형적인 이 분야의 사례라면,
브라이언 그린이나 제레미 리프킨의 저서들은 앞서 말했던 '몇몇 예외'에 속한다.
그리고, 더없이 딱딱해보이는 제목의 책.
만만치않은 두께의 책.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
이 책은 2009년 내가 읽었던 사회과학 분야의 서적들 중 '예외 중 으뜸'에 속했던 책이다.
이제 신자유주의 담론은 지겨울 법도 하다.
지식인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너나 나나 신자유주의를 외치고 있고
되려 진보진영에서는 신자유주의를 빼면 경제 얘기는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할 정도로
신자유주의 담론에 완전히 잠식되어 있는 상태이다.
진보진영에게 신자유주의는 이제 '악, 그 자체'이다.
결코 좋은 현상이라고 볼 수 없다.
악은 그 자체로 나쁘기 때문에 세부적인 비판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악인데 뭣하러 힘들게 하나하나 조목조목 반박할 필요가 있는가? 그냥 나쁜 것임을.
(이런 태도는 보수파들이 줄기차게 주장하는 빨갱이 담론과 하등 다를 바 없다)
그래서 김대중은 그렇게 욕을 먹었고, 노무현은 죽어서도 욕을 먹고 있다.
왜? 신자유주의는 악마인데 그 악마적 정책을 시행한 지도자이기 때문에.
게다가 '진보의 상징'이었던 두 정치인이었기에 그 욕의 강도는 두배가 되었다.
무차별적인 난도질 속에 신자유주의 철학에 숨어있는 합리성과 효율성은 잠식당했고,
실질적 대안 하나 없이 난도질하며 "우리 진보는 자기편도 이렇게 냉철하게 깔 수 있뜸!!"
이라면서 자신들의 비난을, 아니 자신들의 욕을 끊임없이 정당화했다.
노무현이 죽고 김대중이 죽어서야 지난 10년의 정책에 대한 심도깊은 연구와 성찰이
진보진영 내부에서도 나오고 있긴 하지만, 지금 말하고 싶은 건 지난날을 반성하며
죽은 이들 앞에서 눈물 질질 흘리는 진보진영의 한심한 참회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비판 담론은 이제 지겨움을 넘어서 식상할 수준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유는,
이 책이 신자유주의 비판 담론이 위력과 영향력을 현저히 잃어버린
2009년도에 번역되었음에도 사회과학 분야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이유는,
신자유주의가 채 등장하기도 전인 1944년에 원서가 발매되었다는 이유 뿐만 아니라,
6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책에서 보여주는 칼 폴라니의
통찰력을 뛰어넘는 시장경제 비판담론이 결코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이 책은 독보적이다.
"19세기 문명은 무너졌다. 이 책은 이 사건의 정치적 경제적
여러 기원들 그리고 그것이 불러들인 거대한 전환을 다룬다."
폴라니는 "시장경제란 전혀 도달할 수 없는 적나라한 유토피아"라고 주장한다.
식상하게 들리는가? 그렇다면 이 책이 1944년에 발매되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차 세계대전이 채 끝나기 전, 비록 자유방임주의가 대공황의 철퇴를 맞고
히틀러로 인해 그 종말을 맞았을 때, 즉 케인스주의가 등장하며 뉴딜로 대표되는
개입 정책이 세계 경제를 재편하고 있을 무렵 나온 이 책이 주장하는
시장경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는 그리 색다른 시각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도 시장경제 비판담론은 흔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케인스가 튀어나오면서 경제적 전환을 맞긴 했지만
마르크스라는 괴물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채 고전파 경제학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수많은 경제학자들은
궁극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경제 형태는 시장주의 경제 체제라고 보았다.
비록 이후 이들의 목소리가 케인스주의의 무시무시한 영향력에 의해 작아지고
20여년이 지난 후에야 커졌다 하더라도 시장경제 비판담론은
결코 '주류 경제학'의 영역이 아니었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이 책이 가진 이러한 비판의식보다 더 뛰어난 점은
시장경제를 해석하는 독특한 세계관에 있다.
시장경제를 비판하는 데 있어서 이 책을 관통하는
두 가지 축은 '금본위제'와 '스피넘랜드 법'이다.
자유무역이 전세계적으로 가장 번성했던 시기는 언제였을까?
폴라니는 1846년에서 1879년 정도의 짧은 시기로 보고 있다.
그는 이 시기에 자유무역이 번성할 수 있었던 이유를 오트피낭스와
로스차일드 가문같은 초국가적 대형금융자본의 존재에서 찾는다.
오트피낭스는 "최고의 탄력성을 가진 채 상시적으로 적동하는 기관의 기능"을 했으며,
가장 강력한 정부조차도 이것의 독립성을 해칠 수 없었기에
모든 정부와 접촉을 유지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한나라의 정치가들과 투자자들이 함께 신뢰할 수 있는
독립적 기관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이다.
또한 그는 이당시 국지적 차원이 아닌 거시적 차원의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이유 역시 이들의 존재에 기인한다고 보고 있다.
이들은 "전쟁이 벌어진다 해도 이득이 된다면 지원할 지극히 상업주의적 성향을
지녔지만, 만에 하나 강대국들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지고 체제 전체의
화폐적 기초까지 건드리게 된다면 이들의 영리 이익은 큰 손상을 입을 것이었기
때문에 세계 평화는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즉, "19세기 세력균형체제가 세계적 대전란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새로운 경제체제라는 배경에서만 가능했다"
분명 이 시기는 시장경제의 영광의 시기였다.
고전파 경제학자들에게 있어서, 그리고 현재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에게 있어서
이 시기는 시장경제의 합리성과 효용성을 입증할 수 있는 역사적 근거였다.
그러나 이러한 시장경제의 중심에 있는 거대 자본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각 국가들은 로스차일드 가문을 중심으로 불안한 평화를 외적으로는
'자발적'으로 유지하고 있었다고 보여지지만, 과연 이것이 그들이
그토록 줄기차게 주장하는 "시장경제의 '자발적' 이해관계 조정기능"임을
증명해주는 사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난 이것이 오히려 효율적인 경제체제를 위해서
국가가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를 입증해주는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시장의 자발적 조정기능이 아니라, 정부라는 통치 체제가
오트피낭스와 로스차일드로 대신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장경제의 황금기가 갑작스레 막을 내린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유무역경제가 종말을 고한 이유를
막연히 '민족적' 문제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각 국가의 민족 의식이 대두되면서 국가간 적대적 의식이 형성되고
이는 자연적으로 자유무역의 단절을 의미했다.'
뭐 이런 추상적인 사실로 말이다.
그러나 칼 폴라니는 자유무역의 종말의 이유를 '금본위제'에서 찾는다.
애시당초 금본위제는 자유무역을 더욱 더 강화해주는 기제로 도입된 것이었다.
"금본위제는 자기조정시장의 이론을 현실에 구현할 수 있는 제도적 혁신"이었다.
전 국가가 하나의 화폐 단위로 통합된다. 이는 자유주의경제학의 숙원이었다.
그리고 금본위제는 그 꿈을 이루어주는 강력한 마법이었다.
금본위제는 그 어떤 세계 정부나 기관이 없어도 금이라는 절대적 가치 단위
하나로 전 지구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된 것 같은 환상을 불어넣었다.
자본주의 옹호자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자들 조차도 금본위제에 대한 비판은
전무할 정도로 금본위제에 대한 믿음은 그 시대의 신앙이었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이어진다.
"실로 그 시대의 모든 계급, 모든 나라, 모든 이름의 종교와 사회철학이
함께 받아들인 유일무이의 교리가 있었으니,
이는 국제 경제 체제가 작동하는 데 금본위제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금본위제는 양날의 검이었다.
자유무역을 '완성'하기 위해 도입된 이 제도는
국내 경기 침체에 대해선 속수무책이었다.
모든 나라의 통화의 가치를 정해진 양의 금에 고정시키고,
국내 화폐 공급을 자국이 보유하고 있는 금의 양에 기초를 두고 조절하다보니
국내의 물가와 국제 가격이 차이가 날 때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자국의 금 유출을 막기 위해서
국가가 시행할 수 있는 합법적 수단은 디플레이션 뿐이었다.
다시말해, 대외적 균형이 회복될 만큼 임금 수준이 떨어지고
소비가 감소할 때까지 경제가 수축되도록 내버려둬야한다는 것을 뜻했다.
이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황폐해졌다.
실업이 증가하고 기업과 은행이 파산하는 상황이 속출해도 국내외의
물가 차이가 좁혀지지 않았다면 그대로 지켜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금본위제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이 너무 막대하기 때문에
각 국가들은 보호관세를 도입한다.
관세를 도입해 무역의 흐름이 가격변화에 민감하지 않게 만들겠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이로써 자유무역에서 '자유'라는 균형이 깨졌다.
금본위제의 폐해는 나아가 식민주의까지 유발시킨다.
각 국가가 보호관세라는 탑을 쌓은 상태에서 경제적으로 유리해지려면
속국을 만드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자유무역은 금본위제로 인해 무너졌다.
그러나 금본위제의 환상은 결코 깨지지 않았다.
칼 폴라니는 1929년 미국에 불어닥친 대공황 현상을
금본위제를 기반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대공황이 발발한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 바로 금본위제라는 것이다.
1차대전 종전 후 승전국들은 전쟁 발발 전과 마찬가지로 패전국들에게
재정적 지원을 해주면서 전후 재건을 지원한다.
재건의 궁극적인 목적은 다시금 '금본위제로의 회복'이었다.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패전국들에 대해 우선적으로 막대한 자금을
쏟아부으며 실행한 재건 사업이 어느정도 마무리가 되고
이윽고 이들 국가들의 자국 통화 안정 정책이 이제 막 시행되기 시작할 무렵,
자국 통화정책 안정을 위한 막대한 부담은 파운드 가치의 안정성에 대한
불신을 전 세계적으로 확장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이는 결국 미국 달러의 가치 변동까지 유발시킨다.
여기서 미국은 자국의 피해를 방지하기 위해 파운드 가치의 수호를 위한
조치를 꾀하는데, 그 방편 중 하나가 런던에서 뉴욕으로의 자본 이동을
막기 위해 뉴욕 금융가의 이자율을 낮게 유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미국은 인플레이션 현상이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 경제에 있어선 이자율을 높여야 했다.
위태롭게 유지되던 세계경제의 균형은 비로소
1929년 미국에서 발발한 대공황으로 무너져내린다.
이는 진작에 왔어야 할 경기 침체가 뒤늦게 나타난 것이었기에
그 충격파는 엄청난 위력을 수반한다.
이런 상황에서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결코 많지 않았다.
어떻게든 다시금 19세기 중후반의 자유무역 체제를 확립해야 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펼친 정책들은 수입 쿼터제 실시,
지불 유예 협정, 자본 수출 금지, 외환 통제 등이었다.
"그런데 이 통화가치 보호를 위해 취해진 조치들 위로 엉뚱하게도
자급자족 경제의 꿈이라는 악마적 유혹이 스멀거리며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조치들이 애초에 의도한 바는 분명
무역 자유화였건만 "그 결과는 자유무역의 교살"이었던 것이다.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을 발생시켰고,
이러한 혼란 속에서 영국은 1931년 금본위제를 탈퇴한다.
이제 자유무역의 꿈은 멀어진다.
1933년 독일의 국제연맹탈퇴는 자유무역의 급격한 쇠락을 가져왔고,
결국 나치즘이 발발하며 자유무역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아직까지도 일부 경제학계에서 자유무역이 쇠퇴한 원인을
'금본위제의 포기'때문이라고 주장하며 금본위제의 환상에 빠져있는 상황에서
1944년 당시 칼 폴라니의 이러한 문제 인식은 놀랍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가 궁극적으로 주장하고자 했던 바는
금본위제가 몰고 온 자유무역의 종말 자체가 아니었다.
그는 "경제는 결코 사회에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경제가 여러 사회 관계 안에 묻어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여러 사회관계가 경제체제 안에 묻어 들어가게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사회와 경제를 별개의 것을 간주할 때
"인간과 자연을 상품으로 취급하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19세기 영국에서 시행한 '스피넘랜드 법'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는 스피넘랜드 법이 가지는 역사적 가치를
"사회를 바라보는 현대인들의 의식이 여기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스피넘랜드 법은 일종의 '빈민 구제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일정한 비율표를 만들어 가난한 이들,
노동자들에게 적정 임금을 보장한 정책이었다.
어찌보면 현대 복지정책의 시초였다고도 볼 수 있는
이 정책이 유발시킨 부작용은 어마어마했다.
가난한 이들은 스스로 벌어들인 소득과 무관하게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받았기 때문에 노동자 입장에선
임금을 많이 받건 적게 받건 비율표에서 정한만큼의 임금에 미치지 못한다면
구호를 받게 되어 있어서 고용주를 만족시켜줄 물질적 이해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이는 급격한 노동력 저하로 나타나게 되고, 결국 나태한 인간들을 양산시켰다.
비록 스피넘랜드 법이 노동이 '시장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도입된 법이었지만
그것이 유발시킨 끔찍한 재난은 사람들에게 있어서
다시금 '빈민구제법'같은 정책은 생각조차 할 수 없게끔,
그리고 빈민들을 한심하고 무능한 인간으로 인식하게끔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즈음 고개를 슬며시 쳐든 시장 매커니즘은
스피넘랜드 법에 실망한 수많은 이들을 강력하게 결집시킨다.
자연스레 스피넘랜드 법이 궁극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노동의 시장화 방지'라는 온정주의 역시 폐기처분된다.
"시장 매커니즘이 이제 자신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스스로를 온전한 것으로
완성시켜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으니, 즉 이제는 인간의 노동도 상품으로
만들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반동적인 온정주의가 이러한 필요에
저항해보려 했지만 허사로 끝나고 말았다.
스피넘랜드 법의 온갖 공포에 시달린 사람들은 이제 뒤도 돌어보지 않은 채
시장이라는 새로운 유토피아의 은신처를 향해 미친듯이 달렸던 것이다"
폴라니가 로버트 오언을 주목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스피넘랜드 법의 재앙으로 인해 그 누구도 산업혁명의 광풍 속에서
인간성에 대해 돌아보지 않았던 그때 유일하게 인간에 대해 돌아보고,
산업사회라는 새로운 영역 '깊숙히' 파고들었던 이가 로버트 오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를 동물적인 접근으로 해명하려는 시도를 모두 거부했고,
기독교가 인간 성격 형성의 책임을 오로지 그 개인 자신에게만
뒤집어씌우는 '개인화'를 저지르고 있다고 비난"했다.
복음서가 사회 실재의 현실을 묵살하고 있음을 최초로 인식한 인물이었던 셈이다.
오언은 산업혁명의 초창기 시절 "산업혁명으로 인해 거대 규모의
사회적 혼란이 야기될 것"이며 "빈곤은 거대한 사태의 경제적 측면에 불과함"을
인식했으며 현재 문제가 경제적 문제가 아닌 사회적 문제를 사실을 파악하고,
입법을 통한 개입등으로 이에 맞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제를 사회와 독립된 하나의 분야로 파악한 것이 아닌
사회에 종속적 존재로 인식한 오언의 주장은
이 책을 관통하는 폴라니의 인식과 다름없다.
산업혁명에 따른 인간과 자연의 황폐함은
'역사적 발전'에 있어서 감내해야 할 댓가로 치부됐고,
이를 바탕으로 자유무역은 전 세계적으로 번창하게 된다.
그러나 앞서 말했다시피 금본위제의 도입으로 자유 무역은 종말을 고하게 된다.
'거대한 전환'이 시작되는 게 바로 이 지점이다.
거대한 전환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사건,
즉, 자유주의의 죽음이 잉태한 자식들이 바로 '파시즘'과 '사회주의'다.
1920년대는 어떤 시대였던가?
"노동 세력은 그 수를 무기로 삼아 의회에 참호를 파고
단단히 자리를 잡았으며, 자본가들은 산업을 자신들의 철옹성으로
건설하여 그 위에 올라 앉아 온 나라를 호령했다.
이에 맞서 인민들은 각중 단체를 만들고 영업 활동에
인정사정없이 개입해 들어가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러자 산업의 거물들은 사람들에 의해 선출된 정부와
의회의 지배자들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도록 뒤흔들어놓는다.
그러면 이번에는 민주주의적 기관, 단체들이
만인의 생계가 달려 있는 산업체제 전체에 대해 전쟁을 일으킨다.
이러한 상태가 계속되자 마침내 경제 체제, 정치 체제
양쪽 모두가 완전히 마비될 위험이 닥친다.
공포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고,
사람들은 나중에 치러질 댓가를 따져보지도 못한 채
그저 그러한 상태에서 벗어날 쉬운 길만 제공해준다면
어떤 이들에게도 기꺼이 지도권을 안겨주기에 이르렀다"
파시즘의 시대가 무르익은 것이다.
폴라니는 파시즘의 출현을 국가의 지역적 원인,
민족성, 역사적 배경으로 설명하는 방법을 단호히 거부한다.
그에 따르면 파시즘은 "객관적 상황의 필요에 대한 대응으로서 나타난 정치운동"으로
결단코 우발적 요인들이 합쳐져서 나온 결과가 아니라고 말한다.
즉 당시 국가들이 겪고 있는 제도적 교착 상태의
해결을 위해 나온 '하나의 탈출구'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시즘이 제시하는 해결책은 무엇인가?
"산업, 정치 영역을 가리지 않고 민주주의적 제도들을
깡그리 부리뽑아버릴 것이며, 그것을 대가로 삼아 시장경제를 개혁한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인민들은 '재교육 과정'을 밟게 되고, 이 '재교육 과정'이라는
정치적 종교가 내포하고 있는 교리는 인간성의 철저한 말살이었다.
교리에 반하는 자들에겐 과학적 방법의 고문이 가해지는 것,
이것이 파시즘의 해결책이었다.
그렇다면 파시즘은 왜 하필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발생했었던 것일까?
여기서 바로 '민족' 개념이 나온다.
이들 국가들에선 "아직 해결되지 않은 민족 문제들을
지렛대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프랑스, 영국에선 파시즘이
반애국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에 약화될 수 있었다"
이러한 언급 직후 폴라니는 다시 한번 우리에게 주의를 준다.
"이와 같이 1920년대 유럽에서의 파시즘이 민족주의적 경향이나
반혁명 경향과 연결되었던 것은 우연적인 것에 불과하다.
이는 독립된 기원을 가진 다른 운동들이 서로를 강화시켜주다가
마치 본질적인 유사성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만들어내기까지 하게 된
공생의 경우라 할 수 있지만, 사실상 둘 사이에는 아무런 관련도 없다.
현실에서 파시즘이 맡았던 역할을 결정한 것은
시장 체제의 상태라는 단 하나의 요인 뿐이었다"
1944년에 나온 이 책은 미래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는 금본위제의 자동적 메커니즘이 사라진 현 상황에서 각 국가들은 반드시 국내의
정치 경제 체제를 획일적으로 통일시켜야 한다는 19세기의 교조주의를 극복해
각 국가 성향에 맞는 제도들을 만들어 나가며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러나 규제를 도입하게 되면 자유는 확장되기도 하고 제약당하기도 하기 때문에
중요한 것은 새로 얻는 자유와 새로 잃는 자유의 사이에
어떻게 균형을 취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그의 주장의 궁극적인 결론은 결국 '인간'이다.
바로 '인간'이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가치다.
이것이 바로 이론적인 이야기만 늘어놓는
여타 사회과학 서적들 사이에서 이 책이 빛나는 이유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우리에게 시장경제 속에서 살아남은
고상한 가치들을 유지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라고 주장한다.
"시장 경제 아래에서는 자유도 평화도 제도화될 수 없었다.
그 체제가 목표로 삼는 것은 이윤과 물질적 안녕을 창출하는 것이었지
평화와 자유를 창출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의 궁극적인 목표의 '인간의 가치'를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해
폴라니가 주장하는 제도적 해결책은 절대적인 강자를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관료제로 인한 권력 남용의 위협을 제거할 수 있는,
절대로 침해할 수 없는 규칙들을 정하는 것이다.
단, 이 규칙은 "임의적 자유의 영역을 창출하고 그것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폴라니는 또한 파시즘과 사회주의의 차이를 '경제적'이
아닌 '도덕적'이며 '종교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 실재의 현실에 대한 깨달음, 즉 권력과 강제는 사악한 것이며,
인간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이런 것들이 완전히 사라져야 하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다는 현실의 냉정한 인식에 있어서
파시즘과 사회주의는 갈라지게 된다고 보았다.
"파시스트들은 자유를 포기하고 권력을 사회 실재의 현실로서
찬양하는 반면, 사회주의자의 경우 그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자유에 대한 주장을 드높인다"
그리고 이 사회실재의 현실에 대한 깨달음은
곧 우리 문명의 미래에 대한 길을 제시한다.
"사회 실재의 현실을 불평 없이 묵묵히 받아들인 이상,
인간은 이제 자신의 힘으로 제거할 수 있는 종류의 불의와 비자유라면
모조리 제거해내고 말겠다는 그 아무도 꺾을 수 없는 용기와 힘을 얻게 된다.
이제 인간은 자신의 모든 동료들이 누릴 수 있도록 풍족한 자유를
창조해야 한다는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되었다"
그는 인간 스스로 이 과제에 충실하기만 한다면,
권력이나 계획과 같은 것들을 도구로 삼아
자유를 건설하려 한다고 해도 그것들이 인간의 원수로 변하여
자유를 파괴할 것이라고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확신을 얻을 수 있다고 말이다.
자칫 이 말은 근거없는 낙관론으로 보일 수 있다.
21세기, 현재 "인간은 이기적 동물이다"이라는 말만큼
인간의 사회적 성향을 명확히 표현해주는 명제는 없다.
가끔은 의식화를 통해 이타적인 인간이 되기도 하지만
인간 본성을 지배하고 있는 이기적 동물이란 명제는
이책의 마지막 결론에 해당하는 폴라니의 위의 말은
지나친 이상주의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결국은 권력과 강제의 완전 소멸은 불가능하다는
'사회 실재의 현실'을 받아들인 모든 인간들이
폴라니의 말처럼 '불의'와 '비자유'를 제거하기 위해
용기와 힘을 얻을리는 만무하다.
또한 자신의 모든 동료들이 누릴 수 있는
풍족한 자유를 창조하기 위해 노력할 가능성 역시 희박하다.
인간의 권력욕과 소유욕은 폴라니가 말하는 진보적 가치보다 우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했던 바는
이런 분석적 차원의 '인간 내면의 심리'가 아니다.
그는 인간은 물론 국가도, 시장도
사회의 우위에 있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즉, 사회라는 실체가 가지고 있는 인간의 자유와 가치와 이상을 위해
국가와 시장이 그러한 목적에 복무할 수 있도록
기능적 제도로서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사회의 진정한 실체를 찾아가는 과정이자
인간 생활을 더욱 풍요롭게 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2010년이 벌써 일주일이나 흐른 지금에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약간 늦은 감이 있긴 하지만
2009년 내가 읽었던 사회과학 서적 중에서
나의 사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사회과학 서적을 꼽으라면
스탠리 코언의 [잔인한 국가, 외면하는 대중]과
바로 이 책,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꼽고 싶다.
스탠리 코언의 책은 이후에 리뷰를 작성할 예정이니 일단은 차치하고
칼 폴라니의 이 책은 내게 있어 여러모로 상당히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일단은 이렇게 전문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는 사회과학 서적도
이처럼 역동적일 수 있음을 보여줬고, 과학적으로 사회 전반에 대해 접근할 때
'이론적 관점'으로만 접근하는 방법이 유일한 길이 아닐 수도 있음을 보여줬다.
프랑스판 서문을 쓴 루이 뒤몽은 이 책이 이룬 결정적인 진전을
'사회학을 인류학적 접근'으로 해석한 최초의 책이라는 점을 들고 있는데,
내게 있어 이 책은 일종의 발상의 전환을 가져다 주었다고 말하고 싶다.
수많은 사회과학 서적들이 사회 일반에 대해 다룰 때
진보적 가치에 중점을 두고 접근하는 경우는 있어도
이 책만큼 인간의 동기와 자유, 인간이 추구해야 하는 궁극적인 가치를
이처럼 섬세하게 활용하면서, 아니 활용을 넘어서 문제의 핵심적인
해결책이라는 측면에서 접근한 책은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21세기에 들어서도 이럴진대, 1944년 이 책이 출판될 당시 독자들은 오죽했을까.
결국 시대를 앞서나간 이 책은 출판 당시에는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파시즘의 시대가 채 끝나기도 전에 파시즘에 대한 독창적이고 완벽한 배경을
통찰력있게 분석하고, 혁명의 열기에 들떠 사회주의의 황금기가 시작되려 할 때
사회주의의 이면을 냉정하고 침착하게 들여다봤으며, 자유무역의 영광의 시기에 대한
향수가 완벽히 걷혀지기도 전에 시장경제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파헤친 이 책은
애초에 동시대에 존재한 그 어떤 쪽에서도 환영받지 못할 운명이었을 것이다.
그는 시장경제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강력한 제도적 장치를 주장했고
결국 그의 주장처럼 세계는 전후 강력한 보호주의 무역을 실시한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실로 유례없는 번영의 시기를 맞았다.
자본주의는 사회주의를 견제하며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사회주의의 긍정적 요소(복지정책)를 도입하기에 이르렀고,
그에 따라 노동자를 비롯한 시민들의 생활 수준은 비약적으로 향상되었다.
그러나 자유주의 무역이 찰나의 번영을 맞이하고 종말을 고했던 것처럼,
이러한 자본주의의 황금기도 채 30년도 되지 못해 종말을 맞이하게 된다.
케인스주의를 실물경제에 대입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폐단이 악화된 것이다.
결국 세계 경제는 또다시 '자유주의'라는 주술을 외우는 신자유주의자들에게
홀릭되고 무분별한 개방과 강대국들의 개발도상국에 대한 '신제국주의' 정책 속에
세계는 채 100년도 되지 않은 시기에 얻었던 교훈을 깡그리 잊어먹게 된다.
(이는 신자유주의 철학 자체에 문제가 있었다기보다는 '급격한 사회전환'이 문제였다)
진정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다.
2008년에 맞이한 세계 금융위기 폭풍을 잠재우기 위해 시행했던
강력한 국가개입주의 정책은 1929년 대공황 이후
전 세계 경제가 취한 해결책과 완벽히 동일하기 때문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지금은 과거와 같이 무조건적으로
'개방' 혹은 '개입'을 외치는 극단주의자들은 별로 없다.
신자유주의자들로 대표되는 보수진영에서도
국가의 개입은 어느정도 용인하는 추세이고,
진보진영에서도 신자유주의 철학에 내포되어 있는
효율성과 시장의 중요성을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는 19세기 중후반 자유무역의 황금기가
'불안한 평화'였던 것처럼 지금 현재 우리의 모습은 더없이 불안하다.
거부할 수 없는 세계화의 추세 속에서 사회적 양극화는
이제는 필히 감내해야 할 조건이 되어버렸고,
세계 경제의 균형은 미국과 같은 거대 국가의 끊임없는
버블의 생성으로 간신히 이어지는 극도로 불안한 형국이다.
아직까지도 세계 산업은 화석연료와 같은 유한 자원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고,
자연환경이라는 공공재는 아무런 댓가도 지불하지 않은 채
유린하는 현실 속에서 우린 어디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칼 폴라니에게 한번 물어보고 싶다.
결국, 아직도 답은 '인간'에 있는 것이냐고 말이다.
60년이 넘은 지금까지 이 책이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칼 폴라니 개인에겐 무한한 영광일지 몰라도
이 책에 나와있는 과거의 폐단들을 아직까지도 무서우리만치
똑같이 오류와 과오를 저지르고 있는 우리에게 있어선 커다란 비극일 것이다.
다음 세대에겐 이 책이 그저 '놀랍도록 흥미롭고 재밌는 교양서적'이 되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