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의 탄생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우석훈의 책들은 무섭다.

'경제학'이란 학문이 분명 유쾌한 분야는 아니지만,
아니 유쾌하기는 커녕 우울하고 절망적인 학문인 것이 사실이지만
경제학자 우석훈이 쓴 책들은 우울과 절망을 넘어 '공포감'을 준다.

그러나 우석훈의 책에 스며들어 있는 공포감은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 주었다.
우석훈이 유명해진 건 있었던 것은 한국 경제가 공포스러울 정도로
파탄 직전인 상황이라는 게 가장 큰 이유겠지만, 이제 평범하고 침착한 어조로 
나즈막히 읊조리는 인문/사회과학 서적은 더이상 아무도 읽지도 찾지도 않는
'그들만의 공허한 외침'이 될 수밖에 없다는 한국 인문 서적계열의
현실을 처절히 반영해주는 현상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한다.

인문서적을 읽으며 가졌던 내용에 대한
조용한 성찰과 사색은 저 먼 곳으로 소외되고,
우린 이제 사회과학 분야마저 소설과 같이
빠르고 자극적인 것만을 찾는 매스미디어의 노예가 된 것일까?
뭐, 어쨌든 좋다! 그 구성이야 어찌됐건 [88만원 세대]는
결코 '자극'으로만 점철된 그저 그런 저작은 아니었으니.

[88만원 세대]가 히트할 수 있었던 건 소설같은 표현력이
가장 큰 이유라고 생각하지만 이 책이 만들어낸 파열음은 결코 작지 않았다.
패배주의는 커녕 사회적 위치를 인지조차 못하고 있던 도서관에 틀어박힌
이 세상의 수많은 20대들에게 한번쯤은 심각하게 자신에 대해,
그리고 사회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것.
이것 하나만으로도 [88만원 세대]는 '20대의 바이블'이 될 자격이 충분히 있었다.

그러나 이후 나온 그의 저서 [조직의 재발견]과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88만원 세대]의 연작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부실했던 것이 사실이다.
워낙에 [88만원 세대]의 임팩트가 커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간혹 보이는 자료수집의 부실함과 지나치게 비관적인 현실 인식, 진부한 결론 등
'[88만원 세대]의 대히트가 아니었다면 나올 수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실망을 많이 했었다.
('경제대안 시리즈'에 가장 부실한 것이 '대안'이라니 이런 아이러니가 또 있을까!)

[괴물의 탄생]은 '경제대안 시리즈'의 마지막 책이다.
우석훈은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 이제 최종 대안에 다다랐다.
과연 그는 한국 경제의 대안이 무엇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총 3부의 강의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1부에서는 세계 경제의 역사에 대해 간략하게 집어주고 있고,
2부에서는 한국 경제의 발전 역사를 살펴본다.
마지막 3부에서는 한국 경제의 대안을 모색한다. 

한국은 과연 파시즘으로 들어설까?
우석훈은 "한국 경제는 파시즘으로 들어설 조건에 다다랐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만약 한국에 파시즘이 들어선다면 전통적인 파시스트
국가와는 조금 다른 양상을 띠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았는데
"'건설자본 + 성장주의'라는 두가지 축이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여러 가지 대안에 대한 사회적 논의들을 억압하고, 정치지도자와  2~3%
정도의 경제 엘리트가 나머지 국민들을 끌고 가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이 파시즘화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건
현재 한국 경제는 '파시즘'이란 용어가 나와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엉망이라는 점이다.
파시즘이란 말이 공공연하게 지식인들 사이에서 나오고 있다..

이것보다 무서운 현실이 또 어디 있을까?

괴물이 탄생될 수밖에 없었던 한국 경제
비극의 시작을 우석훈은 '압축성장'에서 찾았다.
이승만 시절부터 전통적으로 한국은 경제의 주도권이
정부와 기업 중 정부에 월등히 쏠려있는 게 사실이었지만
21세기 한국 경제의 괴물이 탄생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것은 박정희 시절의 '압축성장' 구호였다는 것이다.

압축성장은 쉽게 말해 "경제 성장을 우선으로 하고,
부의 분배는 나중에" 하겠다는 성장우선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후 '분배'는 박정희가 뒈질 때까지 아예 거론조차 되지 않았다)
케인스주의를 극우적으로 가장 악랄하게 해석한
이 정책이 놀랍게도 당시 한국에서는 '먹혔다'.
아니 먹혔다기보다는 무언을 동조로 인식하는
당시 시대상황 상 누구에게도 선택의 자격이 없었다는 게 맞는 말이겠다.

그러나 실제로도 60~70년대 대다수 한국 국민들은
국가가 만들어낸 교묘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에 홀려
'나 하나의 희생으로 국익에 이바지하자'라는 신념 아래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이타적인 동물'이 되었기 때문에,
성장 우선주의 정책이 전적으로 폭압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는 말할 수 없다.

괴물의 탄생이 비극적인 이유는 그 양면성에 있다.

과거, 국익이라는 미명 아래 부의 재분배는 커녕
민중들의 기본적인 인권조차도 생각할 수 없었지만,
"분명한 건 1945년 저개발국가에서 지금 정도의 경제적 번영을 이룸과 동시에
그 과정에서 혁신적인 민주화도 이루어낸 나라는 극히 드물 뿐더러,
'국민 경제'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한 무역중개나 교역의 집결지 역할을
하는 도시국가 모델이 아니라, 실제로 1차-2차-3차의 산업의 유기적 관계를 만들어
생산하는 경제로 도약한 나라는 한국이 거의 유일하다는" 점은 그 시절을 무조건적으로
지워버려야만 하는 치욕적인 과거사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며, 
동시에 박정희가 아직까지도 보수진영의 메시아인 이유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심각한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수구들이 박정희를 찬양하는 주 레퍼토리 중 하나인
"인권유린은 있었지만, 독재는 있었지만 경제는 발전했잖아?
우리나라에 박통만큼 경제를 더 발전시킨 지도자가 어딨누?"라는 말은
문장 자체가 모순이다. 인권유린이 있었기에 한국 경제는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한강의 기적'은 영민한 지도자의 뛰어난 재능때문이라서가 아니라
인권유린을 하면서도 그 엄청난 댓가와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됐었던
독재라는 권위주의적이고 기형적인 사회구조 때문이었다는 말이다.
인권유린과 경제발전의 관계는 '하지만' 이란 접속사가 들어갈 수 있는
둘 사이의 전혀 별개의 문제가 아니라 원인과 결과 관계에 더 가깝다)

   

 

 

괴물이 되어버린 현재 한국 경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우석훈은 성장일변도의 경제정책, 그 중에서도 구조에 있다고 본다.
즉 한국적 특수성이 '한강의 기적'에 적용된 것이다.
"70년대 한국의 재벌들은 대부분 건설사를 모기업으로 하여,
이를 통해 순환출자와 기업지배 등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건설사에 돈이 풍부하게 있어야 나머지 회사들의 자금 회전이 원활해지는 구조"였다.

돌연변이는 여기서부터 탄생했다.
경제와 건설업과의 관계는 지긋지긋하게 이어져 2009년 현재까지 떨어지지 않고 있다.

한국 경제에서 국가의 힘이 가장 강력했던 전두환 시기를 지나
세계화에 미쳐버린 김영삼 정권에 와서 한국 경제는 커다란 격변기를 맞이하게 된다.
지금껏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가파르게 치솟게 해주는 데 큰 역할을 한 산업정책은
김영삼 정부의 무분별한 세계화 구호 아래 저멀리 뒷전으로 밀려나게 된다.

문민정부 때는 WTO체제 출범 등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바람이 불었던 시기였다.
게다가 김영삼의 공약 중 하나는 한국의 OECD 가입이었다.
우루과이라운드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정부는
아무런 준비조차 하지 않은 채 무작정 1995년을 '세계화 원년'으로 선포하고
OECD 가입을 위해 엄청난 무리수를 둔다. 결국 1996년 OECD가입을 전후로
폭발적으로 늘어난 외채는 IMF 발발을 자초한 큰 원인 중 하나였다.

더욱이 대기업은 삼성의 자동차 산업 진출 하나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기존 국가적인 산업정책에서 시행되던 산업에 대한 투자는 사라지고
단순히 덩치 불리기에만 급급해져서 순환출자와 차입경영이 극에 달하게 된다.
정부와 기업 모두 위태로운 상황에서 IMF는 차라리 필연이었다.

IMF를 겪고나서 한국 경제에서 정부와 기업의 위치는 완전히 역전된다.
"지난 10년간 한국에서 정부가 일정한 권한을 가지고 시장에 대해
어느정도 제어할 수 있었던 시기는 김대중 정권 1기(1998~2000)가 유일"했다.

"대부분의 기업과 은행들이 정부에서 제공하는 지급보증이나 공적자금 없이는
언제든 도산할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우석훈은 2000년 이후
"삼성구조본-법률회사김앤장-재경부전현직고위간부로 구성된 3각동맹체제"가 형성됐고,
이것은 단순한 동맹 차원을 넘어 "국가가 대기업들을 지휘하면서 형성된
한국 특유의 동원경제의 해체를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가 온전히 '괴물의 형태'를 띠게 된 결정적인 순간은 언제였을까?
우석훈은 "2003년 7월 노무현이 '2만 달러 경제'를 새로운 국정 지표로 선택했던 순간과,
탄핵에서 복귀해 2004년 11월, 한국형 뉴딜을 발표하던 순간 사이"를 그 순간으로 꼽는다.

나는 노무현의 이 부분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를 배신자라고 생각했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그에게 '증오'의 감정까지 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노무현이라면 뭔가 다를거라고 생각했던
그에 대한 나의 믿음에 금이 갔던 순간이 탄핵 이후 그가 그토록 바랬던
'재신임'을 국민들이 투표로 보여줬던 총선 이후의 행보 때였다.  

  

   

 

내생에 첫 투표권을 행사했던 2002년, 아직은 '어린 생각'을 가졌던 그때에도
나는 그가 대통령이 되면 '모든 것'이 바뀔 거란 철없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다.
친일파 규명이라는 역사의 잔재에 대한 청산부터, 더 자유롭고 기분좋은 사회.
최소한 강대국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하지는 않는 사회..
뭐 이런 막연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그는 정말 끝없이 싸우기도 했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여전했던 보수언론에 대한 적대적 감정은
결코 내생에 첫 투표가 헛되지 않았음을 느끼게 해주었다.
탄핵 때 거리로 나온 수많은 촛불의 파도를 보면서 아직까지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는 것에 용기를 얻기도 했으며,
2004년 총선의 그 영광의 순간을 보면서
나는 처음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말 멋지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후 그의 행보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무엇보다도 그는... 경제에서 무너져버렸다.
결국엔 다시 부동산과 토목으로 돌아가버린 것이다.
그 무엇도 바꿀 수 있을 것만 같던 그 의석수를 가지고
국보법 하나 폐지 못한 채 한국 경제는 그대로 과거로 회귀했다. 

한국 경제가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었던 마지막 순간에서
괴물을 탄생시킨 원흉이 노무현 정부였다는 우석훈의 주장에
슬프지만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산' 이명박 덕분(?)에 '죽은' 노무현은 이제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함'을 획득했지만
그의 죽음이 재임기간 동안의 오류와 과오까지 희석시킨다면 난 더더욱 슬플 것 같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서거 전에 나왔던 이 책을 읽으면서
동정과 추모의 마음이 배제되어 더욱더 냉철하고 객관적일 수밖에 없는,
우석훈이 노무현 정부를 바라보는 시각을 눈을 부릅뜨고 대면하려 했던 것 같다.  

 

  

우석훈이 바라보는 한국 사회 전반의
가장 안타까웠던 순간은 2002~2004년 이었던 것 같다.
그는 "대한민국에서 풀뿌리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가 현실화되고
중앙형 시스템이 분산형 시스템으로의 전환에 대한 논의가
최초이자 가장 활발했던 때는 2002~2004년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이 2004년 한국형 뉴딜이라는 토목형 경제로
방향을 급선회하고, '선택과 집중'이라는 신자유주의적 구호에 의거해
'말 잘 듣는 지역에 집중투자하겠다'식의 지역별 줄세우기까지 하게 되면서,
전국 경제는 '땅값 경제'로 급변하면 이 같은 가능성은 완전히 닫혔"다.

한국 경제 위기의 모든 원인을 하나의 유형적인 존재(노무현 정부)로
환원해서 판단해버리는 일부 학자들의 고질적인 문제점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그의 관점이 거슬리긴 하지만,
그전까지 지나치게 국가에 의존해서 경제를 풀어나갔던
한국 사회의 구조적 특징을 생각하면 이렇게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풀뿌리 민주주의라고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중앙권력집중형 시스템 안에서
우리 경제는 항상 잘되도 국가 탓, 못되도 국가 탓이지 않았던가.

지역주의 해소와 대타협을 위해 동거정부 구상, 개헌 주장, 극단적으로 대연정까지
주장하며 재임기간 내내 지역차별 철폐를 외쳤던 노무현의 정책을 '지역별 줄세우기'로
해석한 우석훈의 상상력이 갸륵하기도 하다.
뭐 동기야 어찌 됐든 결과적으로 지역주의를 부추기는 꼴이 되었으니
지역주의를 강화시켰다는 오욕도, 한국 경제를 '땅값 경제'로 급변시켰다는
치욕도 감수하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역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던 유일한 기회가 2002~2004년 무렵이었는지는 몰라도 
한가지 확실한 건 한국 경제가 이지경까지 온 데에는, 아니 한국 사회 전반을 관통하는 
고질적인 불치병을 아직까지 앓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풀뿌리 민주주의,
즉 지역 경제가 발전하지 못해서라는 사실이다.
풀뿌리 민주주의는 단순히 '민주주의'라는 신념의 가치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이는 그 나라 경제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래서 우석훈 역시 한국 경제의 대안으로
무엇보다도 먼저 '지역 경제의 발전'을 꼽는 것이다.
그는 불과 20년 전만 해도 가난한 나라였던 스위스가 극적으로 선진국 반열에
들 수 있었던 이유는 지역 사회의 발전에 있다고 말한다. 

지식 기반의 사회로 재편되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현 추세에서 '
일주일에 이틀 일하는 사람'들이 워커홀릭 수준으로 야근에 휴무를 반납하며
일하는 한국의 노동자들보다 창의성 면에서 뛰어나리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일주일 중 나머지 5일을 자기계발에 투자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월급을 조금 받지 않느냐고? 그래도 큰 상관이 없다.
바로 여기서 지역경제의 강점이 나온다.

"일하는 시간은 좀 줄이는 대신 임금은 좀 적게 받지만, 이렇게 줄어든 임금만큼
국가 혹은 지역사회가 적극적 주거정책과 교통 및 교육에서의 공공정책 등으로써
생활비를 줄여준다면, 그 시스템은 돌아가게"되어 있다.
즉, "노동의 유연성이란 고용과 해고의 유연성이 아니라,
노동과정의 유연성으로 전환되어야"한다.

우석훈은 스위스형 경제, 나아가 한국 경제의 병폐를 해소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임금 수준의 불평등 해소를 최우선으로 꼽는다.
"대기업은 임금이 높은 대신에 언제든지 해고될 수 있기 때문에 안정성이 아주 낮고,
공공부문은 임금이 낮은 대신에 안정성은 아주 높은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에선 "공공부문이 안정성도 높고 임금도 높은 상태"이기 때문에 인재들이
공무원 시험에 죽자살자 매달리는 추세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건 대기업과 공공부문 중간의 '제3부문'의 구축이다.
즉, "대기업과 공무원의 중간 정도의 월급을 받되, 노동과정은 아주 유연해서
출퇴근과 시간관리가 상대적으로 자유롭고, 그러면서도 평생 일할 수 있는 직장"말이다.
이를 위해선 스위스형 모델처럼 공공부문 혹은 지역경제가 제3부문의 적은 월급이
결코 적게 느껴지지 않도록 사회적 비용에 대한 지원이 필요할 것이다.

모든 권력이 중앙(서울)에 집중되어 있고, 형식적인 지자체 수준에만 머물러 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스위스와 같은 사회적 시스템은 꿈만 같은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단 우리는 그게 어찌됐건 일단 문제제기라도 하고 비록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도
이렇게 구체적인 사안들을 자꾸 내놓고 끊임없이 공론화시켜야 한다.
어느 선진국들도 결코 처음부터 직접민주주의가 시행되고, 경제가 찬란했던 경우는 없다.
상충되는 입장이 부딪치는 파열음에 의해 그 나라는 한단계씩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교육은 경제 대안에 있어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한국의 교육은 완전 전멸 상태다.
교육과 경제를 떼어놓고 판단할 수 있다면
경제는 그나마 서서히 무너지고 있는 중이라면
교육은 수직낙하해서 콘크리트 바닥에 처박혀 있는 수준이다. 

한국의 교육이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우석훈은 사교육이 폭발한 계기를 2000년 4월,
헌재의 과외금지안 위헌 판결로 보고 있다.

전두환 때 금지된 과외금지안이 행복추구권에
위배된다며 헌재가 위헌판결을 내린 것이다.
헌재의 위헌 판결을 거론한 것은 비록 상징적인 차원의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사교육의 폐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마어마하다.

"사교육은 일종의 기생 산업이라서 다른 산업과는 달리
경제 내 파생적 효과가 매우 제한되어 있다.
이 산업은 이렇다 할 산업 유발 효과 없이 부모들의 가처분 소득만을
떨어뜨려, 정상적인 내수시장을 파행적으로 몰고 가는 효과만 만드는 것이다"

사교육은 결국 '내 자식 성공시키기'라는 한탕주의의 산물이다.
'안하면 손해'라는 인간 심리가 작용한다.
모든 사람들이 동참하진 않지만 안하면 내 자식만 뒤쳐지는 것 같다.
그래서 결국 돈이 많이 드는 걸 알면서도 울며 겨자먹기로 하는 것이다.
이건 모두 죽는 게임이다. 유일하게 살아남는 존재가 있다면 사교육업자들이다.
어차피 이젠 법에 저촉되지도 않겠다,
사교육 시장은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한다.

사교육은 오로지 대학입시만을 바라보기 때문에 개개인의 창의성을 말살시킨다.
결국 일류대학에 들어가는 기준이 '점 찍어 준 암기를 누가 더 잘하느냐'가 되는 것인데,
이런 어처구니 없는 현실에서 지식기반 사회로 변화해가는
세계적인 추세 속에 국가경쟁력을 키울 수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모두 죽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일류대에 합격하지 못하면 사교육에 투자한 돈은 허망하게 날아가는 꼴이고,
일류대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사회의 중장기적인 측면에서 보면 
창의성이 전무한 개인은 세계시장에서 경쟁이 되지 않는다. 

영국과, 덴마크, 핀란드, 스웨덴, 오바마의 미국까지.
왜 그렇게 교육 혁신에 목 매는지 우리나라 정부는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사교육시장이 손도 못 댈 정도로 커져버렸기 때문일까.

우석훈은 교육 혁신에 대한 해결책으로
"중등교육에서부터 지식기반과 문화기반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표준교육은 최소한으로 하고, 개인이 원하는 지식과 문화교육
비중을 높이는 방식"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교육 체제를 운용하는 시간을
법적으로 줄이자는 이야기인데, 이것이 실현될 가능성은 별로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도 현재 한국 사회 전반의 근본적인
학벌위주의 사회를 개혁하기 전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이명박이 교육정책이랍시고 내놓은 자립형 사립고는
공교육 과정 절반만 이수하도록 규정해놓아서
얼핏 우석훈의 '대안'에 근접한 것처럼 보이지만,
절반의 빈공간을 학교에선 '입시 대비'로 채울 것이 뻔하다.
"청소년들을 위한 지식과 문화 프로그램들을 사회가 제공해야 한다"
해결책이 '해결책'이 될 수 없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이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의 논쟁과 비슷한데,
교육개혁은 분명히 필요하다. 사교육을 철폐해야 한다.
그러나 사교육을 철폐하기 힘든 이유는
사회 구조가 학벌지상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학벌지상주의의 타파가 우선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학벌지상주의를 타파하기 위해선 먼저 사교육을 제거해야 한다.
이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뱅글뱅글 돌 수밖에 없는 게 한국 교육의 현실이다.

결국 한국 경제의 해결책은 지역 경제의 활성화와 교육 개혁,
그리고 (우석훈의 표현에 따르자면)제3부문의 활성화다.
우석훈이 제시하는 '대안' 역시 이 세가지로 압축된다.  

  

  

 

내가 [88만원 세대]이후 '한국경제대안 시리즈'란 이름을 달고 나온 두 권의 책,
[조직의 재발견]과 [촌놈들의 제국주의]에 비록 적지않은 실망을 했음에도
마지막 책 [괴물의 탄생]을 집어든 건 순전히 시리즈의 완결을 보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조직의 재발견]과 [촌놈들의 제국주의]가 기대만큼 미치지 못해
실망을 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한국 경제를 바라보는 풍부한 상상력과
공포감을 이용해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현실 문제에 대한 관심 유발 '전략'은
지금껏 보아왔던 그 어떤 사회과학 서적보다 효과적이고 무엇보다 재밌었다.
그래서 그 두루뭉실한 결론에 대해 '쓴소리'를 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던 것 같다.
(정말 애정이 없고 따분하고 재미없다면 쓴소리조차 귀찮아서 나오지 않는다)

우석훈이라는 경제학자에 대한 일말의 기대감과 마지막 시리즈라는 것에
끌려서 집어든 [괴물의 탄생]은 전작들에 비해 훨씬 더 매력적인 책이었다.
전작들은 경제학의 범위에서 약간 벗어나 있는 주제로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여러부분에서 간혹 부실한 모습이 보였었는데, [88만원 세대]이후 오랜만에
경제라는 주종목으로 돌아온 우석훈의 현실 분석 능력은 역시 탁월했다.

비록 [88만원 세대]를 읽고 느꼈던 '감동'은 이제 더이상 찾을 수 없었지만,
한국 경제 전반에 대한 한치의 자비라고는 없는 날카로운 시각은
소설적 구성 못지않은 흡입력을 자랑하며 시원스레 결말로 다가갔다. 

그리고.. 결코 이 책에서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전작처럼 추상적이고 원론적인 '이론'에 그치지 않았다.

사교육, 중등교육에서 시작해 사립대학의 등록금과 운영방식에 이르기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그의 '대안'은 비록 지금 당장은 도입하기 힘든,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해결책이언정 충분히 곱씹어보고 공론화할 만한 가치가 있었고,

스위스 및 여타 유럽의 선진국들의 구체적인 사례를 거론하며 제3부문,
즉 기업과 국가 사이의 완충자, 균형자 역할을 하는 부문을 찾아내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기업들의 공적, 사회적 기금 조성 / 생협의 발전 / 정부가 일정부분 기금을
대주며 지원을 해서 발전시켜야 한다는 그 세부적인 방법까지 제시해주는 모습을 보며
전작들에서 결론의 허망함으로 인해 느꼈던 실망감은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설령 그것이 당장 실현불가능해 보이는 '대안'이라도 좋다.
앞서 말했다시피 사회의 발전은 상충되는 입장의 파열음에서 오는 것이다.
원석이 다듬어져 점차 빛나는 보석으로 세공되는 것처럼 그 어떤 것이라도 캐내야 한다.
이러한 파열음마저 낼 수 없는 사회가 되는 순간,
우리 사회는 파시즘이자 전체국가로 타락하는 것이다.

4대강이라는 건국 이래 최대의 토목사업에 국가의 온 예산을 퍼붓는 미친 정부.
1년에 순이익 1억을 올리는 초우량 공공기업까지 4대강에 끌어들여 빚을 지게 하고,
그 기업의 엄청난 예산 적자 구멍을 카지노 사업으로 매꾸려하는 미친 정부.
허덕이는 국가 예산에서 소득세, 법인세율 마저 내려 부자 감세를 자행하는 미친 정부.
국민들은 신자유주의에서 살아남으라고 등 떠밀고 대기업은 꼭 감싸안는 미친 정부.

정말 우리에게 이제 더이상 희망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는 우석훈같은 악바리 지식인이 있기 때문이다.
진중권의 시간강사 해임에 분노하고 김제동의 정치적 탄압에
분노할 수 있는 '깨어 있는' 시민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변화시키기 위해 스스로 몸을 던져
우리 곁으로 뛰어든 멘토는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수십년간 빨갱이 소리 들으면서도 인동초처럼 살아남아
진정한 민주주의를 보여준 그분 역시 이젠 볼 수 없지만,
이 책처럼 진지하고 냉철하게 한국 사회를 바라보고
대안을 내놓는 목소리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난 믿는다.

하나하나의 꿈과 희망과 대안이 모여
언젠가는 수많은 물줄기가 바다로 모이듯,
한국 사회가 더 나은 빛나는 미래로 발전될 것을 말이다.

읽으면서 화도 많이 났고, 안타깝기도 하고, 무릎을 치게도 만들었던
길기도 참 길었던 우석훈의 '한국경제대안 시리즈'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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