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자본주의
로버트 라이시 지음, 형선호 옮김 / 김영사 / 2008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매우 깔끔하다.

현대 자본주의의 폐해와 모순을 살펴보는 사회과학서적 중에서
이 책만큼 깔끔하고 시원스레 풀어나간 책은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하다]외에는 별로 보지 못했다.

과거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역임한 저자의 경력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로버트 라이시의 현대 자본주의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에 대한 통찰력있는 분석은 매우 뛰어나다.

그가 노동부 장관으로 있었던 클린턴 재임 시기 미국의 사회정책은 획기적이었다.
전세계 진보 진영의 분수령이 되었던 몇 가지 순간을 꼽는다면 나는
대처리즘을 종식시킨 영국 노동당 토니 블레어 총리의 '제3의 길' 선언과
1990년대 중반 스웨덴 사민당의 성공적인 신자유주의적 발상의 전환,
그리고 1990년대 초, 공화당의 12년 통치를 끝장낸
미국 클린턴 민주당의 '변신'을 꼽을 것이다.

60년대 말까지 전세계적으로 강력한 위력을 행사했던 진보 진영의 정책들이
신자유주의의 폭풍을 맞고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황금 시기'의 영광에 취해 있을 때,
미국의 민주당은 그 어느 선진국보다 빠르게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였다.

클린턴 행정부는 결코 기업을 '장악'하려 하지 않았다.
공공의 이름으로, 진보라는 이름으로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을 제약하는 '규제'를 철폐했다.
나아가 행정과 공적 사업을 민간 업체 및 시장에
이양하는 '권력이양' 정책이 실시되었다.

서민들에게 무조건적으로 복지혜택을 주던 과거의 모습을 버리고,
서민도 직접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려 사업을
창업, 확장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실시되었다.
공화당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신자유주의 노선을 택한 클린턴 행정부.
그들이 사활을 건 것은 노조 지원, 임금 인상, 부의 재분배와 같은
전통적인 진보진영의 정책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이 모든 것을 기업이 활동하는 시장의
자율적인 메커니즘에 맏겨두는 대신 '교육'에 모든 힘을 쏟아 붇는다.
제조업에서 지식경제기반 서비스업으로 변화되는 세계적 추세에서
살 길은 '창의적 시민'을 육성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결과 클린턴 행정부는 미국 역사상 가장 번영한 경제를 탄생시켰고,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여전히 미국은 독보적인 헤게모니를 성취할 수 있었다.

물론 전반적으로 그 당시엔 세계적으로 경기가 좋았던 시기였었고,
클린턴 행정부 시절 상대적으로 부의 재분배,
즉 양극화에 대해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있긴 하지만,
보수정권에서 르윈스키 스캔들 같은 대통령의 도덕성 흠집내기로
헤게모니 쟁취를 시도했다는 것이 입증하는 것과 같이
전반적으로 미국 사회 전체가 균형적으로 발전했던 '마지막 황금기'가 바로 이 시기였다.

(현재의 위치에서 과거의 모습을 돌이켜볼 때 과거의 긍정적인 모습이 부정적인 면면보다
상대적으로 더 부각되어 뇌리에 남게 되는 일반적인 현상을 굳이 부인하지는 않겠다) 

찬란했던 클린턴 행정부 시기의 미국..
그래서 미국의 마지막 영광의 시기에 핵심 요직을 지냈던
저자가 바라보는 현재 미국 자본주의의 모습이 궁금했다.  

'슈퍼자본주의'란 무엇인가?
라이시는 "대기업들은 훨씬 더 경쟁적이고 지구적이고 혁신적으로 된"
현재 자본주의의 상태를 슈퍼자본주의라고 칭하고 있다.

즉, 자본주의 안에서도 노사간 타협 같은 민주적인 조절장치가
어느정도 존재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국경없는 자본이
전 세계를 누비며 자본주의의 민주적인 요소를 파괴한,
자본주의 중에서도 '진보적 가치'가 배제된 철저한 자본주의
로버트 라이시가 말하는 '슈퍼자본주의'다.

"기업은 시민이 아니다. 기업은 계약들의 묶음이다.
기업의 목표는 경제게임을 가능한 한 치열하게 수행하는데 있다.
시민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업들이 룰을 정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다.
슈퍼자본주의가 민주주의로 흘러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 것이 유일한 대안이다"

신자유주의의 역설 중 하나는, 겉으로는 끊임없이 국가의 정책,
그러니까 정치적 의도가 배제된 '시장의 자율 조정'을 강조하면서도
내면에는 지극히 '정치적'인 의도를 품고 있다는 데 있다.
수많은 신자유주의 비판 담론들이 내포하고 있는 핵심 의제는 '과거로의 회귀'이다.
세계대전 이후 급격히 신장된 노동자들의 권익과 조세 등에 따른
부의 재분배 시기 이전, 케인스주의 이전의 시기로 돌아가서 상위 2%의 소수층이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그 시기로의 회귀를 꿈꾸는 것이다. 

로버트 라이시는 과거 "거대기업은 거대노조와 상관관계를 이루었다"고 설명한다.
"양측이 임금과 근로조건에 대해 합의한 사항들이 산업 전반에 표준으로 작용하면서,
높은 생산성의 혜택을 나누어주고 중산층의 성장에 기여"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이들의 관계는 "'황금기에 가까운 시대'에
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의 중심적인 특징이 되었다"고 말한다.

'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라는 말이 아이러니하게 들리는 이유는
신자유주의적 담론에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포섭되어버린 결과일 것이다.
애초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는 만날 수 없는 평행선의 관계가 결코 아니었다.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시각으로만 보더라도 '노동자의 권익 보장'같은
자본주의 내 존재했던 민주주의적 속성들은 
노동자 개개인의 능률 향상과 나아가 생산성의 향상으로 이어지며
'자본주의의 증식'을 가능하게 해준 결정적 요소 중 하나였다. 

비극은 1970년대에 시작되었다.
 
 

 

1970년대 초부터 시작된 혁명은 신기술에 의한 것이었고, 이것의 현실적인 효과는
"과거 미국의 과점적인 생산체계를 무너뜨려, 부품이나 서비스가 어느 곳이든지
가장 잘 공급되는 곳에서 조달되는 전세계적 공급 체계들로 이행시킨 것이다"

수많은 새 기술들은 저렴하게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다수의 판매자들을
탄생시켜 과거의 안정적인 생산 시스템을 무력화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런 패러다임의 변화에서 온 '혁명'보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불평등한 탈규제'였다.

신기술로의 변화와 세계화, 그리고 탈규제는 자연스레
소비자들을 얻거나 투자자들을 유치하려는 기업들의 경쟁을 심화시켰고,
이에 따라 기업들은 기업 내부의 다운사이징을 시도한다.
여기서 노동자들의 임금 인하 및 해고는 기업의 다운사이징에 있어서
가장 크고 확실하고 효과적인 방법이었다.

로버트 라이시는 "탈규제가 낳은 가장 극단적인 폐해는 저축대부은행"이라고 말한다.

"저축대부은행은 탈규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정부가 예금을 보호해 주었는데,
새롭게 얻은 지위로 높은 수익률이 나올 수 있는 정크본드 등의 고위험상품에 투자했다.
그 결과 미국 납세자에게 6천억 달러에 이르는 부담을 안겼고 (...)
고수익의 혜택은 민간투자자에게 주고 큰 위험이 따르는 실패는 공공부문에 넘긴다"

냉전시대의 종식과 함께 찾아온 세계 경제, 특히 미국 경제의
이러한 일련의 변화가 미국 자본주의 사상 가장 찬란했던
'민주주의적 자본주의'를 파괴하는 데 일조했다는 건 두 말 할 필요가 없다.

여기서 금융분야의 탈규제는 자본주의의 급격한 신자유주의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데, 과거 기업들은 주식증서를
일부 부유한 개인들이 소유했지만 금융분야의 탈규제가 진행되면서
주식, 즉 기업이 일종의 사고 파는 상품으로 변하면서부터
기업들은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으로 변해버린다.

다시 말해, 이제 더이상 "더 큰 규모의 경제를 위해 공장 장비에 재투자"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새로운 기술의 도입과 연구에 대한 투자는
계획경제 시절 기업 자신들의 발전에 있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지만
'기업의 상품화'가 이루어진 현재 기업에게 중요한 건 이러한 투자보다
얼만큼 '매끈한 상품'이냐에 초점이 맞춰진다. 

로버트 라이시는 여기서 중요한 건 '기업'이 아니라고 말한다.
기업은 언제나 자본주의적인 속성을 띠고 있기 때문에
현재 기업의 모습들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소비자, 즉 우리 시민에게 있다는 것이다.
노조의 쇠락을 기업이 아닌 "최상의 거래를 얻으려고 애쓰는
소비자와 투자자에게 있다"는 그의 시각은 흥미롭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진실은 우리 대부분의 안에 두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즉, 소비자와 투자자로서 우린 더 좋은 거래를 원하지만, 시민으로서 우리는
그런 거래에서 비롯되는 많은 사회적 결과들을 좋아하지 않는다.
'황금기에 가까운 시대'에 민주주의적인 자본주의 체계는
이와 사뭇 다른 균형을 취했다. 그때는 소비자와 투자자로서
우리가 그렇게 잘하진 못했지만 시민으로서의 우리는 지금보다 더 잘했다"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오류 중의 하나는 '소비자' 혹은 '투자자'라는
자본주의적 개념과 '시민' 혹은 '민중'이라는 민주주의적 개념을
간혹 전혀 다른 두 가지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소비자'와 '시민'은 동일하다. 그리고 '노동자' 역시 동일하다.
소비자는 시민임과 동시에 노동자이고, 노동자 역시 
투표를 행사하는 시민이면서 물건을 사는 소비자다.

로버트 라이시는 이 점을 지적하는데, 그가 말하는 '황금기에 가까운 시대'에는
소비자와 투자자로서 추구하는 '혜택'보다 시민으로서의 의무감이 더 컸다면,
현재는 시민으로서의 의무감보다 소비자와 투자자로서
더 큰 이익을 얻겠다는 욕망이 상대적으로 큰 시대라고 말한다.
이것이 "슈퍼자본주의의 시대에 민주주의가 맞은 진정한 위기"라는 것이다.

"우리는 파우스트와 거래를 한 셈이다. 오늘날의 경제가 우리에게 좋은 거래들을
제공해줄 수 있는 것은 경제의 다른 부분에서 우리가 손해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들을 비난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와 같은 거래를 한 것은 사실 우리 자신이다"
 

 

나는 소비자로서, 그리고 투자자로서 조금 더 싸고 좋은 상품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욕구라고 생각한다.
이왕이면 싼 돈에 좋은 상품을 접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은 당연하다.
결국 신자유주의가 성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도
인간의 기본적 욕구를 자극한 담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라이시는 우리 안의 시민이 우리 안의 소비자와 투자자를
억제하는 유일한 방법은 '법과 규제'라고 말한다.
즉 법과 규제를 통해 우리의 구매와 투자가
개인적 선택일 뿐 아니라 사회적 선택이기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장벽은 일반적으로 법과 규제는
기업의 이익에 따라 제정되고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로비스트의 존재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고,
'전문가들'의 기업 차원에서의 필요성이 여기에 있으며
언론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 

기업의 이익을 '전문가들'을 통해 그럴듯한 말로 포장해서
언론에 발표해 시민들을 눈 뜬 장님으로 만드는 것이 이들의 역할이다. 

기업은 끊임없이 이미지메이킹을 한다.
우리가 언론으로 접하거나 광고에서 접하는 기업의 휴머니즘과 선한 모습들은
대중이, 그리고 민주주의가 다뤄야 할 문제들을 가려버릴 수 있다고 라이시는 말한다.

또한 정치인들은 습관적으로 그릇된 기업들을 공개적으로 비난하는데,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결정적인 것, "그런 기업들이 앞으로 달리 행동하게 만드는
입법같은 것은 거의 나오지 않고 있다" 더 큰 문제점은 이러한 정치인의 신랄한 비판은
대중들에게 "민주주의가 작동하고 있다는 착각"을 심어주어
그 기업에 관한 문제를 특정 정치인에게 미뤄버리는 현상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로버트 라이시의 결론은 "게임의 규칙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슈퍼자본주의는 수익을 악화시키는 착한 기업의 행동을 허용하지 않는다.
바로 그렇게 때문에 슈퍼자본주의에서는 규제만이 기업들의 수익에
해가 되는 일을 하도록 유도하는 유일한 수단인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기업에 민주주의의 권리나 의무가 부여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인데, 여기서 특히 중요한 점은 '기업은 인간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기업들에게 인간적 속성을 부여하는 경우, 원래 사람들에게 속해야 할 의무와 권리를
기업들에게 부여하는 결과를 낳고, 이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경계를 애매하게 만든다"
것이 로버트 라이시가 말하는 '기업의 의인화의 오류'이다.

슈퍼자본주의의 개선을 위한 '규제'로서 그가 제시하는 것은 '법인세의 폐지'이다.
"저소득 투자자들이 소유하는 지분만큼의 유보 수익에 매겨지는 법인세율은
그들이 다른 소득에 지불하는 세율보다 대개 더 높은 반면,
고소득 투자자들이 소유하는 지분만큼의 유보 수익에 매겨지는 법인세율은
그들이 다른 소득에 지불하는 세율보다 더 낮다"
결국 현재 법인세율은 부의 재분배는 커녕 양극화에 일조하고 있는 셈이다.

따라서 그는 "법인세를 폐지하고 주주들에게 기업에 그들을 대신해
벌어들인 모든 소득에 개인적인 세금을 내게 하는" 방식으로의 전환을 주장한다. 

이는 나아가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기업들은 더 이상 사내 유보를 할 동기가 없어지게 되고,
저소득자 주주들과 고소득자 주주들은
각각에 맞는 저율의 세금과 고율의 세금을 내게 된다"

어찌됐건 결국 답은 소비자이자 투자자이자 시민인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슈퍼자본주의의 증식을 막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인 '법과 규제' 역시
슈퍼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자각한 시민들에 의한 여론이
형성이 되지 않는다면 결코 논의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게임의 규칙을 바꾸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할 일은 우리의 생각을 바로세우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진보에 대해 연구하기로
마음먹기까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책은,
사상적으로는 제레미 리프킨의 [유러피언 드림]이었다.
그러나 진보에 대한 연구를 '책'으로 집필해 많은 시민들에게
알려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책은,
로버트 라이시의 바로 이 책 [슈퍼자본주의]였다.

과연 이 책은 명확하다.
한국의 이른바 '진보적인 학자'들의 책이 간혹 진보적 담론에 가려져서
대중성이 배제되어 고립성을 띠는 데 반해 로버트 라이시의 [슈퍼자본주의]는
전문적이면서도 독자들이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생생한 예시와 함께
놀라운 분석력과 통찰력을 보여준다.
그동안 알려진 진보적 담론의 무의미한 나열이 아닌 다른 시각으로서의 분석.
(개인적으로 기업을 '의인화의 오류'의 측면에서 분석한 건 이 책 외에는 보지 못했다)


미국의 사례를 예로 들고 있어서 우리와는 약간 정서적으로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세계 경제의 중심인 미국이 끼치는 영향력은
동서를 막론하고 막강하기 때문에 미국 자본주의의 현재에 대해
살펴보는 이 책은 우리에게 있어서도 매우 의미심장할 수밖에 없다.

선진국들의 지배정책이 제국주의에서 자본주의로 전환한 것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통해 느꼈던 '생명'에 대한 죄의식과
단순한 온정주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총과 칼에 의한 학살보다
자본으로서의 통제가 더 효율적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리라.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본주의의 현실에 대해,
자본주의의 '인간성'에 대해 다시금 고찰해야 한다.

입으로는 신자유주의를 부르짖고 있으면서도 금융위기에는
철저히 케인스주의로 대처하고, 경기가 회복되면 다시금 신자유주의를 노래부르는
우리에게 어쩌면 바로 지금, 미국발 세계공황의 여파속에서 서서히 회복의 조짐을
보이고 있는 지금이 아니라면 우리의 '슈퍼자본주의'가 인간성에 대해
돌아볼 수 있는 시기는 영영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바로 지금 이 책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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