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란
현기영 지음 / 창비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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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미덕은 무엇일까?
아니, 미덕이라고 물어보기엔 너무 거창하다.
당신은 소설을 읽으면서 어떤 부분에서 매력을 느끼는가?
누군가는 자신과는 다른 세상이 책 속에서 펼쳐지는 모습을 보며
판타지에 빠질 수도 있고, 누군가는 현실적인 우리네들의 이야기를
문학적 미학으로 포장하는 예술성에 감동을 하기도 한다.

현기영의 [누란]은 이 두 가지 경우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부류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픽션이 주는 '다른 공간으로의 이동' 차원의
판타지를 전해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철저하게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예쁜 포장지로 감싼 아기자기한 소설도 아니다.

그저 '왕년에' 민주화를 부르짖었던 한국 학생운동사의 마지막 '진정한 운동권', 
허무성이란 인물의 변절과 21세기 현실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 내가 이 소설을 읽고자 마음먹었던 이유는 작가의 유명세때문에 아니었다.
시사잡지의 서평에서 읽었던 이 소설의 소재,
'386운동권의 현실'이란 소재에 끌렸던 것이다.
사실 나는 386세대를 부정적으로 보는 20대 중 한명이다. 

그들이 이루어낸 '민주화'는 물론 값진 것이었고,
87년 당시 초등학생도 아니었던 내가 '그깟 민주화가 대수냐?' 운운하며
그들을 깎아내리는 건 건방진 말일 뿐더러
나에게 그런 주장을 할 자격도 없는 게 사실이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알게 된 그들의 87년 이후의 행보에서 염증과 절망감을 느꼈다.

모두가 그런 건 아니라고?
그 시절 그때의 영광은 '특권적'으로 누리려고 하면서
지금의 잘못만은 '세대'가 아닌 '개인'의 것으로 취급하며
회피하려는 태도는 나는 사실 조금.. 치사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소설가 방현석은 그들이 '386세대'란 용어를 승인한 순간 80년대는 끝났다고 말했다.
386세대라는 말은 매우 상징적이고 영광스러우며 동시에 위험하고 역설적인 말이다.
독재정권의 추악함을 타도하기 위해 거리로 뛰어나온 80년대 대학생들은
독재정권이 종식됨과 동시에, 6.29 선언 이후 정치판에 국가의 모든 '권력'을
무책임하게 위임함과 동시에 민주화라는 추상적인 목표가 달성되었음을
자축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집단화를 통한 민중간, 세대간 단절이라는 교묘한 정치전략의 술책이었던
'386세대'란 용어는 사회에 완전히 포섭되어버린 그들을  다시금 과거의
낭만주의의 향수에 빠뜨려 스스로를 '신성화', '특권화'했다.
그들이 '386세대'로 규정되는 순간,
사회는 80년대의 고졸과 뜨거웠던 6월의 시민들을 철저하게 주변화된 존재로,
승리의 '주연'이 아닌 '조연'으로 만들어버렸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은 '386세대'라는
사회적 상징성에서 오는 의미만큼의 값어치를 하지 못했다.
철저하게 획일화, 사회화되어버린 그들의 행보에서
'386세대'라는 말은 자신들의 현실을 위로하는
술판의 안주거리 이상의 그 무엇이 될 수 있었단 말인가?

전적인 책임을 그들한테 묻는 것 만큼 바보같고 무책임한 투정은 없지만,
젊은날 '평등한 세상'을 외치던 열정을 잃어버린 기성세대가 보여주었던
급격한 사회적 보수화와 고립성은 유래없을 정도로 빠르고 강력했다.
그들은 30대가 지나고, 40대가 지나도, 50대로 다가가도
여전히 386이란 철의 장막에 갇혀있다.

어쩌면 이것은 그들이 '386세대'란 말로
형상화되면서부터 예견된 비극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난 그들의 '변명'을 한번 들어보고 싶었다.
아니다. 지금와서 잘잘못을 따지는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어차피 '모두가 다 잘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취급하면 훈훈하고 따뜻하지 않은가!

뭐, 그래도.. 허무맹랑하고 자기합리화에 불과한 이야기일지라도
지금처럼 내가 그들을 바라보는 냉소적인 태도가 정립되기 전,
그러니까 학창시절 때 동경의 대상이었던 그들이
대학에 와서 변절의 아이콘으로 변해버렸을 때,
내가 느꼈던 뜨거운(!) 실망감을 생각한다면
최소한 그들을 합리화해줄 수 있는 변명거리는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 소설은 386의 변명이 아닌 현실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남산 기슭의 한 지하실에서 시작한다.
대학 4학년 허무성은 형사 김일강에게 처절하게 고문당한다.
2장까지 계속되는 고문 묘사는 실로 매우 그로테스크하다.
죽음의 고비에서 그는 한순간에 변절자가 된다.
그 댓가로 허무성은 '동지'를 잃는 대신 대학교수라는 '미래'를 얻었다. 

"그 항쟁의 한가운데서 투항자가 되어버린 그는 자신의 처지가
S대생 박종철과 정반대가 되었음을 알았다.
박종철과 허무성, 혹독한 고문 속에서 한 사람은 죽고
다른 한 사람은 살아남았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두 사람의 생과 사는 정반대의 것이 되어 있었다.
죽은 박종철이 6월의 광장에서 자유의 넋으로 크게 부활하는 기적을
목도했던 그는 자신의 정신적 죽음을 뼈저리게 느껴아만 했다"

허무성은 김일강의 사촌형이 재단이사장으로 있는 H대 역사학과 교수가 되었다.
국회의원이 된 김일강은 끊임없이 그를 꿈속에서 괴롭혔다.
아직도 집에 돌아가는 어두운 골목 뒤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들이
자신을 덮쳐 검정색 승용차에 태운 뒤 남산으로 끌고 갈 것 같다.

90년대로 점프한 그 공간에서 허무성은
학생들에게 '불필요한 교수'가 되어버렸다.
친일파를 청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그에게
학생들은 '과거에서 벗어나라'고 말한다.
취직공부도 좋지만 책도 읽어야 한다는 그는
학생들에게 '꼰대' 취급을 받는다.
사학과 학생들 거의 전부가 취직을 위해
부전공을 선택하는 현실에서 허무성은 철저히 고립된다.

그를 과거와 연계해주는 유일한 끈은 김일강이다.
그는 국회의원이 되어서도 꾸준하게 안부전화를 하고
일년에 서너차례 찾아와 같이 술을 마신다.
거기에 과거 자신을 고문한 '가해자'의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이제 그에게 있어 과거는
87년 6월의 영광과 환희가 아니라 남산의 공포와 절망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말시가 부드럽게 들린다고 하더라도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김일강이었다.
그 부드러움 속에 비수가 숨겨져 있었다.
껄껄껄 웃다가도 문득문득 쏘아보는 날카로운 눈빛!
'난 내가 만든 자를 결코 버리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너는 내가 될 것이다'
라고 그는 그 지하실에서 말했었다."

대학 교수 구조조정의 칼바람.. 철학과와 함께 구조조정 일순위가
사학과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허무성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보수세력의 싱크탱크의 일원이 되는 것 뿐이다. 

아직까지 박정희를 맹신적으로 추구하고 파시즘을 꿈꾸는 김일강은
사촌형과 상의 끝에 H대에 '박정희와 그의 시대'를 신설하기로 결정하고
그 강좌를 자신보고 맡으라고 제안(강요)한다.

"뭐, 괴물? 허무성, 정말 그렇게 빈정거릴 거야, 엉?"

"죄송합니다."

"아아, 아냐. 내가 참지. 자네 지금 심정을 알아. 좀 착찹할 거야.
낯선 일을 맡게 되면 누구나 처음엔 바동거리는 법이니까. 하하하!"

현실과 신념은 다르다.
월드컵의 붉은 물결 속에서 파시즘의 가능성과 대중의 위력을 동시에 본
그의 최후의 선택은 현실도 신념도 아닌, '누란'이라는 이상이었다.
 

 

 

이 작품 속에서 밝고 희망찬 캐릭터는 단 한명도 없다.

옛 운동권 동지였던 허무성의 처 문정선은 결국 인도로 떠나고,
페미니스트 송난주와 사학과 제자 오용미는 결국
무성의 주변 인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단골 술집 주인 미미 역시 절망적인 현실을 떠나
수녀가 되고 싶어하는 30대 초반 여성이다.
그들의 대학 동기는 노숙자, 보수당 국회의원, 박봉의 논술강사 등이 고작이다.

등장인물들의 현재만큼이나 소설은 철저하게 회색톤이다.
소설 속 캐릭터로 표현하는 작가 자신의 주장은 더없이 직설적이다.
작품 속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김일강과 허무성이 '토론'을 하는 장면이 있다.
김일강의 끝없는 박정희에 대한 찬양과 파시즘에 입각한 정치관은
그에 대한 트라우마를 떨쳐내지 못해 소심하고 어눌한 말투의 
허무성의 진보주의와 끝없이 파열음을 낸다.

대중에겐 명백한 '적'이 있어야 체제가 안정화가 된다는 김일강과
민족주의, 파시즘은 '공상'일 뿐이라는 허무성.
그 둘 사이의 논쟁은 이제 붉은 등 밑의 술집 손님 중
하나에 불과한 시시콜콜한 술주정이 되어버렸다.
어눌한 허무성과 대조되는 당당하고 호탕한 모습의 김일강의 모습은
'가해자'가 '권력자'이자 '승리자'가 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절망과 냉소의 표현일 것이다.

진정 이 책에서 희망은 없다.
386세대의 미화되고 낭만적인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은 적합하지 않으며, 정치는 머리아픈 것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에게 이 책은 그 어떤 사회과학 서적보다 재미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의미가 있다.
철저하게 기름기가 제거된 386세대의 현실.
정치가 현실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월드컵을 가장한 쇼비니즘 마케팅의 잔혹함.
피해자는 있지만 그 어디에도 가해자는 존재하지 않는 역겨운 사회 구조.
이러한 현실 속에서 현실을 세상 모두가 절망이 아닌
희망으로만 그린다면 나는 더욱더 암울할 것 같다.

함석헌 선생은 '울고 싶어도 울 수 없는 씨알들을 위해
대신 울 수 있는 사람이 시인이고 학자'라고 말했다.
[누란]을 통해 현기영이 대신 울어주는 우리 현실에 대한 눈물은
절망 속에서 한 톨의 '희망'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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