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놈들의 제국주의 - 한.중.일을 위한 평화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3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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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석훈식 글쓰기의 절정의 보여주는 책이다.
내일이라도 사회가 멸망할 것 같은 "니들 다 뒈졌어" 류의
겁 잔뜩 주는 문제제기는 여전하고 결론은 지나치게
현실과 동떨어진 원론적인 이야기만 늘어놓고 있다.

이 책은 [88만원 세대]로 시작한 '경제대안시리즈'의 세번째 저서다.
내가 [88만원 세대]를 처음 보고 놀랐던 건 이마를 탁 치게 만드는 해결책이 아니었다.
20대의 절망적인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하면서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잔뜩 유발시킨 뒤,
나중에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며 '그게 네 잘못만은 아니야'라고 하는 위로..
소설보다도 더 소설같은 뛰어난 완급조절에 있었다.

물론 문제 제기 측면에서도 기존엔 볼 수 없었던 다른 관점으로서의 접근도 좋았지만,
인문 서적을 소설과 같은 구성력으로 완성해 낸 그의 문학적 솜씨에 더 반했던 것 같다.
그래서 조금은 아쉬웠던 부실한 결론에도 불구하고 난 이 책을 '20대의 바이블'로 꼽았다.
(물론 '88만원 세대'라는 단어에서 오는 상징성도 이 책을 좋아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88만원 세대]를 '한국경제대안 시리즈' 중
첫번째 권이라는 사실을 알고 꽤나 기대를 했었다.

21세기, 지금의 20대를 무능한 존재가 아닌
사회가 드러낸 날카로운 발톱이 할퀴어서
상처받은 생채기를 어루만지는 존재로 인식하고
'우리'를 따뜻하게 바라 본 거의 유일한 지식인이었던
그가 짚어보는 '한국 경제의 대안'이라면,

획기적이지 않을지는 몰라도 적어도 기존과는 차별화 된 시각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그를 향해 기대감을 품었던 이유다.

그런 의미에서 시리즈의 두번째 권, [조직의 재발견]은 미흡했던 게 사실이다.
현 20대의 5~10%, 승자독식 게임에서 승리한 자들을 위한(?) 이 책에서
제시한 한국경제의 대안은 대기업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는
우리 내부의 조직을 들여다보고 재정비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아름다운 기업'이 나올 수 있단다.
(기업이 아름답다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 표현인가!?)

참.. 뜬구름 잡는 이야기다.
조직의 구조는 분명 중요하다.
비록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조직론이란 것이
이론적으로 활성화되진 않았지만 앞으로 사회 경제 전반의
발전을 위해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게 조직 구조의 변혁임은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이 누구나 알고 있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우석훈 같은 '경제학자'라면 최소한 현실적인 대안을 내놓아야 한다.

결국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힘만으로는 변혁할 수 없다'가 그가 내놓은 답이다.
그는 돌려말했지만 까놓고 말해서 국가가 신경을 써 주고
컨트롤 해줘야 한다는 것이 그가 제시한 우리나라 기업 조직 변화에 대한 해답이다.

재밌다... 아니 무책임하다.
노무현 정부 내내 정부에 대해 심하다 싶을 정도로
신랄하게 비판을 가했던 그가 또 다시 그 정부에게 기대고 있다. 

뭐 기대는 것 까지는 좋다.
그러나 기댈 땐 기대더라도 어느 정도 '대안'을 제시해주고 기대야 되는 게 맞는 거 아닌가?
문제 제기만 하고 "난 요만큼 했으니깐 이제 니들이 해야지ㅋㅋ" 뭐 이런 것인가?
정부의 무능력을 비판하고 관료주의에 회의적이던 경제학자가 왜 자신의 저서에서는
애매모호하고 어려운 '해결책'에 다다르면 그 책임과 해결책을 정부에게 넘기는 것인가?

우석훈 말처럼 노무현 정부가 그렇게도 무능한 정부라면,
자기가 제시한 문제점 하나도 파악 못해 쩔쩔매는 멍청한 정부가
자신도 모르는 해결책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필요할 땐 실컷 까대다가 결정적 순간에는
정부 뒤에 숨어버리는 비겁함은 정말 역겨운 것이다.

[88만원 세대]에서 내가 좋아했던 이유의 큰 부분이
박권일씨 때문에 아닐까 생각을 했을 정도로 전작에서 보여줬던
소설같은 흡입력과 뛰어난 구성력마저 사라진 것이 [조직의 재발견]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조직의 재발견]은 '조직론'이라는 생경한 이론을 한국형 경제 모델에
대입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는 면에서는 어느정도 의미가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촌놈들의 제국주의]에 와서 우석훈은... 갈피를 못 잡는다.
   

 

그는 우리나라를 '촌놈들의 제국주의'로 규정한다.
신선한 문제제기다. 일단 임팩트가 있다.
우석훈은 왜 이런 생각을 한 것일까?

"지난 5년 동안 노무현 정부 기간에 상당히 강화되어 온
기묘한 제국의식은, 실제로는 외부식민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공허한 메아리와 같다.
제국주의이고 싶으나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하고, 또 아무리 한국같은
엉성한 나라에 기꺼이 식민지가 될 턱이 없는 이 기묘한 현상을
우리는 '촌놈들의 제국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앞서 우석훈은 우리가 스스로를 촌놈으로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언급하는데,
"아무런 준비와 계획도 없이, 17~18세기에 유럽이 했던 제국주의의 길을
조절장치 하나 없이 따라가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면서 "현재의 한-중-일 형국은 19세기 중반 유럽에서
'민족국가'를 키워나가던 시기와 매우 닮았다"고 말한다.

21세기의 '한-중-일'을 보면서 19세기 중반 유럽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 너무 많이 나간 해석같이 보이지만
현재 동북아시아 3국의 관계는 상당히 미묘한 게 사실이다. 

3국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경제적 상호작용 뿐만 아니라
임지헌이 '적대적 공범자들'이라고 칭한 것과 같이 역사적으로는
동북공정, 독도 문제, 과거사 문제 등과 같이 끊임없이 대립하고 있으면서도,
이 대립 현상 자체를 한편으로는 한-중-일 각국의
국민들의 쇼비니즘을 강화시키는 목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동북아시아 3국이 역사학적인 측면에서 서로를 적대시하는 현상은 
'민족주의'를 자극시키며 국가의 응집력을 강화시킨다.
'촌놈들의 제국주의' 그는 이에 대한 근거로 이라크 파병과 한미 FTA를 든다.

우석훈의 말에 따르면 이라크 파병은 "미국을 등에 업은 일종의 전쟁 연습"이라고 한다.
"앞으로 경제적 이해가 존재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파병을 통해
세계 전쟁에 가담하겠다는,일종의 한국 자본주의의 질적 전환에 대한 암묵전 선언"
이라는게 그가 생각한 이라크 파병의 의미란다.

한미 FTA는 촌놈들의 제국주의의 화룡점정으로
'나 이제 준비됐어요~!!'하는 결심의 공포와 다름없단다.
"한미 FTA에 노무현이 그토록 집착한 것은 일종의 식민지 없는
제국주의가 이로써 가능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며,
이것이 사실상 국정홍보처가 얘기한 '경제영토'의 실질적 의미일 것이다.
그들은 오버한 것이 아니라, 가장 정확히 현실을 짚었던 셈이다"

미안하지만, 오버는 우석훈 자신이 하고 있는 것 같다.
이라크 파병을 저런 차원에서 확대해석 하는 건
극우파나 극좌파들조차 하지 않는 극단적 시각이다.
어쨌든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라는 점에서 흥미롭긴 하지만,
우석훈이 노무현 정부를 까는 이론적 무기로 적지 않게 써먹었던 것이
이라크 파병이라는 점에서 이 문제는 조금 더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노무현은 정말로 이라크 파병을 통해 '전쟁 연습'을 한 것일까?
그는 정말로 이라크 파병에 한국 자본주의의 질적 전환이라는 큰 의미를 부여한 것일까?
잠시, 과거 이라크 파병 당시를 생각해보자. 

노무현 정부 집권기간 5년 동안 내내 줄기차게 욕하고 헐뜯던
보수언론과 한나라당을 위시한 보수세력이 노무현 정부의 정책에
조용히 동조했던 적이 5년 동안 딱 두 번 있었는데, 그것이 한미FTA와 이라크 파병이었다.
이 사실만 보더라도 이 정책들이 한국의 진보진영(이라고 자처하는)
에게 얼마나 많은 몰매를 맞았는지 짐작이 가능하다.
 
그 누구를 막론하고 사람이 한번에 바뀌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이 온갖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정치판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반미 좀 가지면 어때?'라는 상징성을 일정 부분 등에 업고 당선된
대통령이 자신의 진보주의적 가치, 반미주의적 경향과 완전히 상반되는 정책을
결정한 것을 어떻게 '변절'이란 무책임한 한 단어로 성의없이 정의할 수가 있단 말인가?
결국 노무현은 2004년 6월, 같은 편이라 여기던 진보진영에 의해 나쁜 놈, 변절자가 됐다. 

나는 노무현을 이라크 파병 한방으로 무책임하게 변절자로 낙인찍어 버린
사회 각계의 반응을 선과 악, 이분법적 관념에 바탕을 둔 기독교적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는 보수적인 대한민국 사회의 가슴아픈 현실이라고 생각한다.

단 한 번의 망설임이나 깊이있는 토론, 관심도 없이 표면적으로 드러난
상황만을 가지고 한때 그의 편이었던 사람들이 졸지에 그를
배신자로 만들어버린 건 한국 진보진영의 한심하고 무능력한 작태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였다.

대통령은 바보가 아니다. 여론을 깡그리 무시하는 지도자는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대다수 여론의 반대 입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그의 입장에 대한 연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냥 파병했으니깐 '무조건 나쁜 놈'이란다.....

물론 파병의 반대 입장도 이해를 못하는 것은 아니다.
개혁 세력의 희망이었고, 상징이었던 노무현이
전형적인 제국주의의 상징이었던 이라크 전쟁에 한국 군인을
파병하겠다는 데 이런 상황에서 열 받지 않은 사람들이 이상한 것이다.
이해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토록 자신들이 믿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한번쯤은 더 생각을 해봤어야 했다.

그를 정말로 믿었다면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적어도 한번쯤은 깊게 생각을 해봤어야 했다.

'외교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이라크 파병은 결코 욕만 먹을만한 결정은 아니었다.
물론 '보편적 인권'이란 진보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가치를 배반한 결정이었음은
자명하지만, 이론이 아닌 실제 정치라는 권력의 장에서, 그것도 한 나라를 통치하는
지도자의 입장에서 '진보주의'라고 하는 원론적인 입장에만 매달릴 수는 없다.
외교는 민감한 문제다. 전혀 연결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 문제들도
각국의 이해관계에 실타래처럼 얽혀있다.

유럽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고? 우리가 유럽인가?
우리가 유럽처럼 이웃나라와의 연대가 결속력이 있는가, 경제력이 월등한가?
위에는 북한이라는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있는 상황에서 파병을 원하는 미국에게
"전쟁 나쁜거임! 저리 꺼지셈!" 이렇게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설마.. 없겠지?

파병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추구하는 성향과 이념을 막론하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대통령이라는 국내, 국외의 거시적인 정책을 총 지휘하는 위치에서 '파병'은
단순히 파병이라는 독립적인 문제로만 판단할 것이 아닌 사안임은 틀림없다.
우리에게 이런 이해심은 필요했다. 전 국민이 아니라 최소한 진보진영에서라도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라크 파병을 노무현이란 무능력한 지도자가 저질러버린
제국주의적 발상이라고 해석하는 우석훈의 주장은 더욱 슬프고..눈물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전쟁을 일으켜 자본주의를 발전시키는 수준이 아니다.
전쟁을 통해 자국의 경제를 활성화시키는 것은 일반 강대국도 아닌
미국같은 초강대국에서나 볼 법한 극단적인 방법이다.
그럼에도 단순히 '비전투병 3,000명'을 파병한 것을 가지고
자본주의의 질적 전환으로까지 해석한 것을 보면..
필자에게 어떤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우석훈은 자신이 확립한 '촌놈들의 제국주의' 이론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DJ의 햇볕정책까지 끌어들여 난도질한다.
그가 DJ독트린을 바라보는 시각은 철저히 '자본주의적'이다.
그의 관점에서 바라본 DJ독트린은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것이다.

"남한 자본의 북한 진출... 사실상 이것이 DJ독트린이 국제적으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 진짜 내용이고, 이 내용이 가지고 있는 현실성이
이 특수한 독트린에 노벨평화상을 수여하게 한 핵심이었다. (...)
햇볕 정책에 대한 찬/반 입장의 차이는 북한을 내부식민지로 전환시키는
데에서 형식적으로 상대 정부를 그대로 두고 식민지 정책을 추진할 것인가,
아니면 상대 정권을 무너뜨리고 일종의 총독부처럼
직접 관리할 것인가에 있는 셈이다"

햇볕 정책이 이데올로기적 공세를 이겨내고 현실성을 갖기까지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이 북한에 잠재되어있는 '경제력'이었다는 건 사실이다.
만약 햇볕정책에 이런 현실성이 결여되어 있었다면 지금과 같은 평가는 커녕,
수구세력, 보수언론에게 물어 뜯겨 제대로 진행조차 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한국자본의 북한 진출을 '제국주의적 수탈'로 해석하는 점은 조금 이상하다.

"'우리 민족끼리 힘을 합쳐 통일도 하고, 경제 성장도 도모하고, 민족의 숙원이던
만주로의 진출도 꾀하고, 유라시아 대륙을 따라 철도망과 도로망도 건설하며
영원한 경제번영을 이루자는 이야기는 황홀하도록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는 하다.
지금 한국에서의 통일 근본주의와 이윤 중심주의가 결합하는 이런 과정은
형태상으로는 19세기 말 전형적인 제국주의의 탄생을 이뤄냈던 힘과 동일한 것이며,
지금 한국에서 매우 빠른 속도로 증가하는 민족패권주의는 현실세계에선
한국형 경제패권주의를 탄생시킨 힘과 동일하다"

햇볕정책이 통일근본주의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가?
그전에 그가 말하는 근본주의의 뜻이 궁금하다.
그는 근본주의를 환원주의와 동일한 뉘앙스를 가진 언어로 취급한다.
그러면서 DJ독트린이 통일근본주의를 띠고 있다는 증거로 제시한다는 것이
"일부 통일 근본주의자들이 개성공단 및 북한에 건설될 공단들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한미 FTA를 열광적으로 지지한 사건""만주행 민족패권주의"이다. 

남과 북이 더불어 만주를 쟁취하자는 통일구호는
한국 국민들의 통일에 대한 인식 중에서도 극히 일부분이다.
게다가 자신도 밝혔다시피 개성공단을 강조하며
FTA를 지지한 사람들 역시 '일부' 통일 근본주의자들이다.

뭔가 말이 되지 않는다.
이처럼, 국민 중 '일부'를 전체, 혹은 일반적 경향으로 묶어 그들을
햇볕정책이 통일근본주의가 될 수밖에 없는 근거로 말하고 있는
우석훈은 여기서 되려 자신이 환원주의의 함정에 빠진다.
이론적 근거랍시고 댄 예들 역시
환원주의, 근본주의에 기반을  둔 예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물론 단일민족주의라는 환상에 홀릭되어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한국 국민들의 보편적 현상은 민족주의가 탄생시킨 최악의 부작용이지만
이는 'DJ독트린'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것이다
 
남한이 북한을 자국의 경제적 발전의 효과적인 발판으로 삼고 있다
라는 말은 별로 신선한 주장이 아니고 숨겨진 음모도 아니다.
가격대비 뛰어난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북한의 노동력은 남북한이
경제 교류를 시작한 그 이후부터 줄곧 우리 자본이 군침을 흘리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우석훈은 무슨 대단한 것이라도 발견한 것 마냥 '공포감'과 '근본주의'까지 들먹이며
"남한이 북한을 수탈하고 있어 ㄷㄷㄷㄷ" 라며 한국을 극단적인 제국주의로 몰아간다.

   

 

그래서 우석훈이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가?
"한중일 3국의 평화경제 구축, 궁극적으로는
평화국가에 대해 나름의 전략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3국의 적대적, 경쟁적 관계에서
경제통합을 통한 역내 경제효율성을 고민하자는 이야기다.
이전까지 줄기차게 공포감을 조성하던 한-중-일
3국의 관계 묘사와 비교해볼 때 너무나 태평스러운 결론이다.

마지막으로 우석훈은 독특한 21세기 한국의 자본주의를 규정하는
가장 큰 힘은 '교육 파시즘'과 '쇼비니즘 마케팅'이라고 말한다.
"교육 파시즘과 쇼비니즘 마케팅이 만나서 만들어낼 미래의 1차적 모습이
제국주의고, 2차적 모습은 전쟁이다. 그리고 바로 그 전환 단계에서
지금 보이는 현실의 모습이 바로 '촌놈들의 제국주의'이다"

비록 우석훈이 이 책에서 주장하는 많은 부분이 내 생각과는 달랐지만
마지막 십여페이지에 불과한 한국 교육에 대한
그의 현실 인식은 눈물나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냉철한 현실 분석과 적절한 공포감 조성이라는 우석훈식 글쓰기의
장점이자 단점이 여기에선 빛나는 장점으로 작용한다.

"...그렇게 머리와 복장에서부터 다시 시작된 억압의 역사는
학생들과 부모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사교육의 형태로 한층 세련되게 이어졌는데,
이 과정에서 한국의 지배자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저항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것 뿐인가? 차라리 사교육은 차마 학생들의 돈을 직접적으로 착취하지 못해
부모의 돈을 착취하는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었지만
이제는 대놓고 10대를 타겟으로 기업들은 마케팅을 하고 있다.

여기서 10대들은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다.
공부해서 좋은 대학 가고 싶으면 사교육에 돈을 쏟아 부어야 하고,
공부에 관심 없고 놀기 좋아하는 10대는 어김없이 대기업 마케팅의 표적이 된다.
결국 10대는 어떻게든 자본주의의 그물에 포획될 수밖에 없는 불쌍한 어린 양이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가난한 집안의 10대는 여기에서조차 소외당한다..

"한국에서 지금 십대 시절을 보내면, 누구라도 멍해질 것이다.
이 정도로 고강도 억압을 하는 곳은 감옥도 아니고, 군대도 아니다.
이 정도로 청소년에게 강한 억압을 가하는 나라는,
불행히도 전 세계에 한국밖에 없다.
북한만 해도 거기에는 최소한 과외는 없다"

지나치게 자학적이라고 생각하는가?
난 이것이 현실이라고 본다.
한국의 10대는 정말이지 숨이 턱턱 막힌다.
더 기분 나쁜 것은 386세대로 불리는 현재 대한민국 10대의 부모세대들,
자신들의 학창시절은 사교육의 바다에서 자유로웠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이렇게 이기적이고 역설적인 존재들이 또 있을까?
자신들은 과외 없이, 사교육 없이 대학에 들어가서
'평등한 세상'을 외치며 거리에 뛰어들어 독재타도를 외쳤으면서
내 자식은 남보다 우월해야 한다며 사교육 바다에 밀어넣는다.
세상을 평등하게 하자는 젊은 날의 그 멋진 열정이 자식 앞에서는 쓰레기가 된다.

"부모들의 역사에 대한 배신과, '촌놈들의 제국주의'로 끊임없이 국가체제를
전환하고 싶은극우파의 꿈이 만나서 한국의 교육 파시즘이 작동되고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런 작동은 끊임없이 움직이면서 한국의 내부를
중남미형 경제구조로, 외형은 제국주의로 변화시키는 중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육 파시즘'에 대한 우석훈의 해결책 역시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지금 절정에 도달한 학교 파시즘, 여기에서 벗어날 출구는 두가지 뿐이다.
이 미친 짓을 어른들이 갑자기 깨달음을 얻어 정지시키든지,
아니면 십대들의 총파업, 예를 들면 '동맹휴학'이나 '수능총파업' 같은 걸로
그들 스스로 정지시키든지 둘 중의 하나이다"
 
...헛웃음이 나온다... 그리고 참 슬프다..
이런 걸 해결책이랍시고 말하고 있는 경제학자가
우리나라에서 꽤나 유명한 사람이라는 것과,
'학생 총파업'이라는 너무나도 극단적인 수단이
가장 현실적인 방법일 수밖에 없는 우리나라 교육의 현 상황이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아니, 분명 하나의 해결책을 내놓으라고 하면 이것이 정답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그의 주장이 실망스러운 이유는 그는 '학자'이기 때문이다.
누구나가 말할 수 있는 해결책을 똑같이 말한다면
이 세상에 학자나 지식인의 존재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우석훈은 이제 '작가'로서의 생명력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88만원 세대]가 나왔을 때만 해도 꽤나 신선했던 문제제기와 구성력으로 인해
부실한 '해결책'을 자연스레 덮어버렸지만, [조직의 재발견]과
이 책 [촌놈들의 제국주의]에 와서는 그의 전형적인 글쓰기 스타일, 
"현실의 확대분석 - 공포감 조성 - 맥빠지는 결론"의 매력이 바닥을 보였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흥미롭던 현실 + 공포의 드라마틱한 구성은 이내 식상해진다.
그나마 우석훈의 강점이던 '현실 인식' 역시 마지막 십여페이지를 제외하곤 매우 진부하다.

결국 중요한 건 해결책이다.
한국의 진보학자들은 문제 제기할 땐 신나게 하면서 결론에 있어선 너무나 무책임하다.
문제 제기와 현실분석은 학자가 아니더라도 책을 많이 읽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최소한 '학자'라면 완벽한 해답은 아닐지라도 공론화할 수 있는
그럴듯한 새로운 해결책 정도는 내놓아야 한다.
이것이 자신이 쓴 책을 돈 내고 사는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

생각하건대, 이 책은 [88만원 세대]가 없었으면 나올 수 없는 책이었다.
이 책 그 어디에도 '새로움'은 없다.
우석훈은 이 책을 10대들이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난 정반대다. 이 책은 10대들이 읽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것은 이 책이 이나라의 미래인 10대들이 결코 알아서는 안 되는
일급비밀급인 충격적인 사실을 담고 있어서가 아니다. 

상대적으로 지식 습득에 대한 필터링 장치가 없는 10대들이 이 책을 읽는다면
오히려 한국에 대한 패배주의와 더불어, 정치세력에 대한 냉소주의를 심화시켜
더더욱 정치와 거리를 멀어지게  만들 위험이 있고, 현실적 대안이 아닌
'총파업'이라는 한탕주의를 부추기는 결론을 도출해내는 이 책을 본다면
자칫 혁명주의와 영웅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고 우석훈의 생명력은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한국경제대안시리즈의 마지막, [괴물의 탄생]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그에 대한 기대감을
포기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을 갖게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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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책속에 길이 있지만, 그 길은 결국 내가 걸어야 한다.
    from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2009-12-29 11:16 
    결국 중요한 건 해결책이다. 한국의 진보학자들은 문제 제기할 땐 신나게 하면서 결론에 있어선 너무나 무책임하다. 문제 제기와 현실분석은 학자가 아니더라도 책을 많이 읽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최소한 '학자'라면 완벽한 해답은 아닐지라도 공론화할 수 있는 그럴듯한 새로운 해결책 정도는 내놓아야 한다. 이것이 자신이 쓴 책을 돈 내고 사는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       내꺼님
 
 
미루 2009-12-28 2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 있는데요..리뷰 너무 너무 맛나게(?) 잘 읽었어요.책 다 읽고나서 다시 한번 리뷰 읽어봐야겠어요.괴물의 탄생 리뷰도 학수고대합니다.^^ 내꺼님 덕분에 최장집 교수님의 책도 사서 읽어보고 싶은 마음 생겼습니다.

Seong 2009-12-29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을 읽고 여러가지 생각을 했습니다. 다음 리뷰도 기대합니다. ^.^
 
조직의 재발견 - 한국 자본주의와 기업이 빠진 조직의 덫, 개정판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2
우석훈 지음 / 개마고원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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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과 함께 쓴 [88만원 세대]로 우석훈이 얻은 명예와 인지도는 어마어마했다.

이 책([88만원 세대])이 지금과 같은 '20대의 바이블'이 된 것에는
책에서 보여준 사회 인식이 탁월했다기보다는 이 사회에서 천편일률적으로
'사회적 지진아' 취급하는 20대를 바라보는 발상의 전환이 가장 큰 역할을 했지만,
어쨌건 책의 대히트로 적어도 조금이나마 20대의 사회적 위치에 대한 이야기들이
공론화되었다는 점은 아마도 우석훈이 이 책을 통해 이루어 낸 가장 큰 업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두루뭉실하고 현실과 괴리감 있는 결론 부분은 참 아쉬운 부분이다) 

[조직의 재발견]은 우석훈의 '한국경제대안 시리즈' 두번째 작품이다.
그가 서문에서도 말하듯 전작이 한국의 20대 중 90~95%를 차지하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이 책은 20대의 나머지 5~10%,
즉 치열한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그들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그들이 속해있는 '기업'에 관한 이야기다.

사실 한국에서 '조직론'이라는 건 다소 생소한 분야이다.
아직 우리는 한국의 조직을 들여다볼 만큼 '여유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게 가장 솔직한 이유일 것이다.
뒤돌아볼 새 없이 급속도로 무분별한 팽창을 이어가며 
죽음의 외줄타기를 하고 있던 한국 경제가 민주화 물결과 더불어
그제서야 겨우 내부를 들여다 보려는 찰나, 외환 위기가 닥쳐왔다.

제조업 분야의 폭발적인 성장과 반비례한 노동자의 권익은
87년 7~8월 노동자 대투쟁으로 기업의 내부는 어느정도 서구형 선진국의 면모를
부분적으로나마 갖추고 발전해시키려는 찰나에 신자유주의의 물결과 함께
무섭게 밀려들어 온 구조조정의 바람 앞에서 모든 것은 무용지물이 된다.
무조건 컴팩트해야 한다. 90년대 후반 이후 기업들은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결국 우리는 우리 내부의 조직을 차분히 바라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IMF란 이름 아래 허망하게 날려버린다.

대기업의 극단적인 독과점과 아웃소싱으로 겨우겨우 연명해가는 중소기업,
정규직은 점점 줄어들고 비정규직 천지인 우리 사회에서
'조직론'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인 게 아닐까?
우석훈은 바로 이 '조직론'이야말로 한국 기업과 경제,
나아가서 한국 사회 전반을 발전시키는 해답을 내포하고 있다고 말한다.   

 

"정부 조직을 줄여아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져 나왔던 지난 수 년 간,
사실 정부 조직은 전체적으로 하나도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커졌다. (...)
지난 수년 동안 우리나라의 정부 조직이 커진 실제 이유는 민간부분의 조직들이
생동감을 잃는 동안에 거기서 탈출한 인재들이 정부 부문으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유럽형 사민주의를 추구했던 노무현 정부에서
정부 조직이 커진 근본 원인이 유럽형 사회와는
전혀 다른 이유라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결국, 조직의 덩치가 작다, 크다라는 외형적 모습이 핵심이 아니라
그 조직 내부의 구조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느냐는 점이 핵심이다.

정부 조직이 비대하진 이유는 우리 사회가 유럽형 사민주의를 향해
발전해서가 아니라 종신고용과 안정성이 붕괴한 한국 기업 시장에서
유일하게 '안정성을 보장하는' 분야가 공공부문이기 때문이다.

기업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우리나라의 기업은
전통적으로 형식상 미국형 기업 구조를 띠고 있다
즉, "CEO를 정점으로, 말단사원까지 내려오는
수직적으로 분화된 구조"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구조는 "모든 정보가 CEO에게 집중되는 장점이 있는 반면,
의사결정라인의 중간에서 문제가 생기거나 CEO의 판단, 능력에 문제가 생기면
조직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며, 일반 사원들은 부서가 서로 다르면
인적 교환 뿐 아니라 정보 소통이 거의 불가능해진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전후~60년대 말까지 소위 말하는
포디즘 시대의 경제에 굉장히 효율적으로 작용해왔다.
자신이 할당받은 분야, 업무만 일하면 되는 제조업 중심의 체제에서
직원들의 상호 정보 소통은 큰 의미가 없었다. 창의적 능력 역시 큰 필요가 없었다.

후진국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진입하는 한국 사회가
받아들인 기업 시스템 역시 미국형 구조였다.
그리고.. 한국에서 미국형 기업 구조는
경영자의 절대적 권위를 발전시키는 최악의 형태로 진화했다.

반면 일본형 기업구조 "팀이라고 부르는 실무 단위로 움직이고, 조
장이나 반장의 의사결정을 따른다" 여기서 "조원, 반원은 순환보직에 의한
수평적인 방식으로, 주기적으로 서로의 업무를 교환하고,
수평적 조직에도 형식적으로 CEO는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사항은 수평적으로 협조하는 팀 단위로 결정"한다.

이 구조에서는 "기술혁신을 비롯한 새로운 방식이
발생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게 일반적인 관점이다.

미국형 기업구조, 일본형 기업구조를 이론으로 정형화시킨
일본 경제학자 아오키의 주장은 물론 일반화의 경향이 있음은 무시할 수 없고,
이러한 이론을 발표한 시기가 1988년이란 점, 즉, 일본의 '버블경제' 최대호황기에
발표되었다는 점은 레이거노믹스의 부작용이 만연하던  당시 미국보다 자국의 시스템에
더 우월성을 둘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이었음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일본식 기업구조가  "창의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돌연변이"의 탄생이   

더 쉬운 환경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비록 일본 경제의 거품이 빠지면서 일본 역시 신자유주의의 역풍으로
일본 고유의 기업 시스템이 무너지는 위기를 맞이하긴 했지만
한국처럼 무분별하게 다운사이징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종신고용제가 무너지고, 세계화의 바람과 동시에 IMF 외환위기를 동시에 맞은
한국 경제에서 조직 내부에 대한 심도있는 통찰은 아예 전무했고,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조직컨설팅'은 "조직시스템을 일관 되게 유지하는 게
아니라
기계적인 감원을 의미하는 조정만을 목표로"했다.

"따라서 암묵적 협약같은 진화의 결과로 생겨난
일종의 간접자산들이 그런 구조조정의 과정에서 사라져버리고,
이는 결국 조직에 치명적 결과를 가져오는데,
사람들만 사라지는 게 아니라 침묵의 조절장치들이 같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암묵적 협약은 기업과 노동자가 맺은 노동자의 '권익'에 해당한다.
'IMF'라는 괴물은 한국 경제의 거시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조직 내부의 미시적인 측면에서도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는데
그 변화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간접자산'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자의 권리이다.
이것은 단순히 임금하락, 인원 감축을 넘어 기업 내부의 '조절 장치'의 제거를 의미한다.

근본적으로 기업 내부를 '가족' 모델로 구성해서 한국인 특유의 정을 바탕으로
조직을 꾸려가거나, '군대' 모델을 차용해 수직적 기업형태에서
CEO가 미처 신경쓰지 못하는 개개인 조직원의 감시를 특정 직급의 조직원에게
권력을 부여해서 통제하는 형태로 이어갔던 한국 기업 내부의 시스템에서
노동자들이 쟁취한 자신들의 권리는 간신히 기업의 균형성을 지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지만, IMF 시기에 기형적으로 변형된 한국의 '조직 컨설팅'
개념에 의해 이 균형추마저 무너져버린 것이다. 

대신 기업들은 이러한 무차별 다운사이징에 대한 명목으로 인센티브제 등을 도입한다.
사람들은 잘라야 겠는데 아무 이유도 없이 자를 순 없다.
그래도 어느정도 합당한 이유가 필요하다.
그래서 도입한 것이 '인센티브제'로
조직원끼리 경쟁시켜 낙오자를 떨어뜨리는 방법을 택한다. 



여기서 우석훈은 시장과 조직의 차이점, 조직론의 미묘함이 발생한다고 말한다.
"구성원 사이의 경쟁 수준을 기계적으로 높이면 이에 대응하는 개인들은
오히려 소그룹을 만들어 소그룹 사이의 경쟁으로 전화시키면서
자신을 둘러싼 직접적 경쟁을 줄이는 방향으로 진화하는 대응전략을 사용"한다.

"조직 구성원 사이의 경쟁 촉진을 위해 IMF 이후 도입한 인센티브제 등
새로운 제도들이 오히려 소그룹 등장을 촉진시켜 생산적인 경쟁을
제약하는  방향으로 진화한 것을 우리는 지난 10년 간 목격했다"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인가? 아마도 그럴 것 같다.
하지만 단언할 수만은 없는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누구나 다른 사람보다 잘 살고 싶어하지만 성과급제와 같은
극단적이고 인위적으로 경쟁을 촉진시키려고 한다면 오히려 사람들은 뭉치게 된다.
나 하나의 성공보다 내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여러 사람과 함께하는 '안정성'을 택하는 것이다.
(문득, 어쩌면 여기서 진보주의의 성공 전략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경쟁이 없어도 소그룹이 강화되고, 경쟁이 강해지면 소그룹은 더욱 강화된다.
즉 경쟁의 촉발은 기업 내부의 다양성을 줄이는 힘으로 작동하여
결국 조직의 효율성과 창조성을 급격히 떨어뜨린다.
조직론이 미묘하고 섬세한 이유다.   

 

조직론이 아직까지도 체계적인 이론으로 발전하지 못하는 이유는,
조직의 결정은 수많은 가치와 목표가 충돌하면서 우연히 만들어진,
의도하거나 기획되지 않은 자기결정체에 가깝기 때문이다.
조직이 오래되고 커질수록 이러한 성향은 더욱 강해진다.
예측할 수 없는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조직은 너무나도 불안정하다.
사실 그 내부의 허약한 뼈대를 생각하본다면 조직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다.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우는 한국 경제의 황금시기에서
조직 내부의 문제는 그저 '덩치 키우기'로 가려졌다.
경제 발전이란 국가적 목표 아래 조직 내부는 그야말로 초토화됐다.
눈부신 경제성장률이 모든걸 가려줬다.

한국 경제가 세계화로 개편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이 상황은 더욱 최악으로 발전했다.

우석훈은 "현재 우리나라 시스템이 그래도 버티고 있는 것은
실업률이 증가하고, 대기업과 같은 상대적으로 좋은 조건을 제시할 수 있는
일자리들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나가봐야 별 볼 일 없다'라는 사실을 모두가
알고 있기에 현재 골격이 유지되는 셈이라는 점이다.
이런 조직 내부에서는 결코 지식기반 사회에 필요한 창의적인 돌연변이가 탄생할 수 없다.
노동자를 적대시하고, 기업이 더 많은 권력을 갖기 위해
비정규직만 늘어나는 이런 상황에서는 더더욱 힘들다.

조직원들을 경쟁시키는 것과 노동자를 상품화해서 일정기간 계약하는 것..
이러한 일련의 정책들은 조직을 시장과 동일시해서 취급하는 것에 기인한다.
그러나 조직은 결코 시장과 똑같지 않다.

"조직이라는 특별한 관점으로 기업을 분석하는 가장 큰 이유는,
조직은 시장과 달리 경쟁을 제한해서 '협동진화'를 만들어낸다는 데 있고,
바로 이 협동진화를 위해 이사회와 총회를
비롯한 수많은 협력 장치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협동'은 조직이, 그리고 인간이 시장과 차별화되는 가장 큰 특징이다.
한국의 대기업이 '아름다운 기업'이 되는 힘이 조직론에 존재하는 이유이다.

우석훈의 가장 큰 장점은 탁월한 현식인식과 문제제기이다.
그러나 이는 장점과 동시 단점이 된다. 용두사미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문제제기 면에서는 탁월하지만, 결론으로 다다르면 힘을 급격히 잃어버린다.
그가 결론이라고 내세우는 해결책은 너무나도 추상적이고 원론적이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다. 조직론을 통해 이루어야 할 '아름다운 기업'이라는
지극히도 역설적인 표현은 "희망은 없다"며 잔뜩 겁을 주고 시작한
초반의 문제제기와 비교하면 차라리 반전에 가깝다. 

비단 이것이 우석훈 혼자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한국 경제학 사상 유례없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제도경제학자 장하준 역시
머리를 치게 만드는 문제 분석에 비해 결론은 두루뭉실하다.
폴 크루그먼이나 로버트 라이시의 경제학 관련 저서들을 보아도 답은 '없다'

결국 이것이 경제학의 기본 특성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어쩌겠는가.. 태생이 절망적인 학문인 것을.
이런 문제제기마저 자본주의 체제 내에 잠식당하는 그 순간, '희망'은 없는 것이다.

사회는 상충되는 입장이 부딪치면서 발전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지나치게 부정적인 견해는 오히려 부적용을 유발시키지만
사회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이런 문제 제기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의 현실 분석은 [촌놈들의 제국주의]와
'경제대안시리즈' 최고의 저서 [괴물의 탄생]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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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미래 -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 노무현 대통령의 진보의 미래
노무현 지음 / 동녘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전설이 된 노무현.. 그는 죽어서야 민주주의의 신화가 되었다.

그가 죽고나서야 비로소 (그가 생전에 자기 편이라고 여기던)
진보 언론의 통탄할 성찰이 나왔고,
그가 죽고나서야 사람들은 그의 정책에 대한
심도있고 깊은, 수준높은 연구를 시작했고 관심을 가졌다.

그의 재임기간 내내 그의 진심이 언론을 통해
대중들에게 올곧은 형태로 전달된 적은 없었다.
내용이 아니면 말꼬리라도 잡고 비튼 뒤에야
대중들에게 그의 생각이 전파됐고, 우리는 그를 난도질했다.

그러나 아무리 보수 언론이 숨기려해도 숨길 수 없는 게 있다.

그것은 '진실'이다.     


진실은 비록 왜곡될 순 있을지언정,
결코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여겨질 순 없다.
이것이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으로 보여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노무현에게 있어 '진실'은 권위주의 타파로 대표되는 민주주의 가치의 발전이었다.
한국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보수세력조차도 이 '진실'은 결코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진실을 애써 은폐하는 대신 프레임 자체를 재편한다.

바로 '민주주의'를 논쟁의 저끝으로 밀어내고
경제 문제를 프레임의 중심으로 끌어오는 방식으로 말이다.
언론과 결탁한 보수진영의 끝없는 경제 담론은 결국
중들에게 있어 민주주의의 가치를 잠식시키고 노무현을 무너뜨린다.

이제 그는 레임덕에 허덕이는 실패한 대통령이 된다.
그를 지켜줘야 하는 진보 언론마저 보수의 프레임에 휩쓸려 중심을 잃어버린다.

보수진영에겐 너무나 쉬운 게임..
진보의 상징으로 우뚝 선 노무현 하나만 무너뜨리면
그들은 다시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

결국 그는 보수진영의 끝없는 공세 속에 피를 철철흘리며
무너져버렸고 세상은 다시 보수진영의 프레임에 갇혀버린다.   

그가 진정한 진보주의자인가? 하는 논쟁은 그의 재임기간 내내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전체적으로 따지고보면 그는 진보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절반의 성공은 한 셈이지만
굵직굵직하고 큰 사안들, 즉 언론에 부각되기 쉬운 사회적 논쟁거리에 대해서는
반진보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주면서 그는 '변절자'로 낙인찍힌다.
언론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왜곡된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낙인 속에서 그의 편은 보수도, 진보도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퇴임을 하고나서야 비로소
노무현은 진정한 진보주의자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진보진영이 말했던 것처럼)정말로 변절했다면
결코 퇴임 후 그렇게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진보주의자가 아니라면 "야, 기분 좋다~!!"라는 외침은
가식이나 이미지메이킹을 위한 '쇼'가 되었겠지만, 우리는 모두 보았다.
그가 웃고 있는 함박웃음 속에 담겨져 있는 '진심어린 모습'을 말이다.
이것은 그의 재임기간 내내 그에게 실망한 진보진영에게조차도
매력적으로 비춰진, 진정으로 '멋진 지도자'의 모습이었다. 

역대 우리나라 대통령 중 노무현처럼  뒷모습이 멋있었던 정치인이 있었던가?
그것은 결코 그가 거의 유일하게 '법적으로 깨끗하게'
임기를 끝낸 대통령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민'이라는 민주주의의 진정한 권력속으로 들어가는
진보주의자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보수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5년을 통치한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진정한 진보주의자'로 다시 태어났다.
한 개인이 합법적으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을 손에 거머쥐었던 사람이
비로소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 '진정한 권력'의 주체로 다시 돌아간 그의 모습에서 본
환한 웃음은 그를 뼛속까지 진정한 진보주의자로 각인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가 죽기 전까지 매달린 진보에 관한
연구와 성찰을 집약한 이 책을 통해 비로소 그의 '진심'을 보았다.
이 책을 통해 바라 본 그의 진심은 눈물겹고 아름다운 '진보주의자의 꿈', 그 자체였다.  

 

그의 재임기간 내내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한 성찰은 실종됐었다.
그리고 그가 떠나간 뒤, 보수진영이 권력을 잡은
현재에 와서야 민주주의의 가치는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민주주의는 그런 것이다.

'목표'로서의 민주주의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하지만,
'현실'에 있어서의 민주주의는 누군가가 민주주의의 심장에
총을 겨누지 않는 이상 존재감을 느낄 수 없다.

민주주의의 목숨이 위태로운 극단의 상황에 가기 전에,
즉 현실에 있어서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그 시기에
세상을 민주주의의 내재적 가치를 발전시키며
좀 더 나은 사회로 만들고자 하는 그것, 그것이 진보주의의 가치다.


노무현은 말한다.
"오늘날 왜곡되어있는 정치를 바로잡는 일도, 정치논쟁의 주제를 기타 비합리적인
주제가 아니라
진보와 보수의 정책논쟁으로 돌려놓아야 가능한 일"이라고 말이다.

진보와 보수의 정책논쟁.
이것은 결코 우리 사회를 민주화 이전의 과거로 회귀하자는 말이 아니다.
'때가 어느 땐데 이런쟁으로 시간을 허비하느냐, 경제나 살려라' 따위의 말은
보수진영이 만들어놓은 경제담론 프레임, 다시 말해
사회 전체를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희석시키려는 보수주의의 전략에 포섭된 것과 다름없다.

"나는 국정 목표에 경제 문제를 걸지 않았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서.
그리고 여론이 경제문제에 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경제정책이 왜곡되고,
국민에게 부메랑이 되었던 지난 날의 경험 때문에,
경제는 경제만으로 성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제 문제가 다른 모든 가치를 덮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나는 경제 문제에 파뭍혀버렸다"

결국 노무현은 경제 때문에 무너졌다.
김대중 정부의 5년을 겪은 국민에게 민주주의는 더이상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없었다.
이미 민주주의는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고,
이 시기에 참으로 절묘하게도 IMF라는 위기를 맞게 된 덕분에(?)
지나치게 자본주의화 된 국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유'가 아니라 경제, 즉 '돈'이었다.

지금 당장 일자리와 먹고 살 걱정 없는 유토피아를 바라는 이들에게
비전2030과 같은 중장기적 전략은 이상주의이자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내가 대통령이 되고 나자 민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는 
그의 말을 자신의 처지에 대한 신세한탄과 푸념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는 과감하게 적진에 뛰어든다.

"그래서 나는 경제문제를 주체로 하여 연구하고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보수진영이 깔아놓은 무대 위에서
보수가 제기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결국 방법은 없다.
경제를 무기로(정확히 말하면 경제적 효율성) 자신들이 유리한 쪽으로 
여론을 끌고 가는 보수주의의 전형적인 수법에 말리면 말릴수록 더욱 더 그들의 입지를 
탄탄하게 굳혀주는 것이라 해도 보수진영의 담론에 완전히 포섭된 한국 사회에서
그것을 정면돌파하는 방법 외에는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길은 전무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방어적 수세적 논리'로만 그치는
보수를 향한 진보진영의 일반적인 대응방법에서 탈피해
"니들 생각이 그렇다면 어디 제대로 맞짱 한번 떠보자!"라는 정면승부를 선택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황금기가 종말을 고한 6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보수주의의 엄청난 공세 속에 진보진영은 이제 생존을 걱정할 처지가 되었다.
그렇게 나온 것이 영국 노동당이 내세운 '제3의 길'이었다.

80년대 내내 영국을 지배했던 대처리즘의 광풍 속에서
전통적 좌파주의 정당인 노동당이 정권을 다시 쥘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진보주의의 전통적 가치에 대한 포기였다.

영국 노동당은 '조세를 통한 부의 재분배'를 과감하게 버렸다.
'세금 인상'을 포기한 것이다.
또한 중앙은행을 독립시켜 국가의 거시경제 관리 기능을 포기한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좌파 정당이었던
영국의 노동당의 이러한 변화는 변절이고 배반이었다.

대신 그들은 교육에 모든 걸 투자한다.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변화된 세계 경제의 추세 속에서
제조업 노동자를 중심으로 구축된 과거 진보의 가치는 국가 발전에 있어서 계륵과 같았다.
그들은 노동자의 특권을 해체하는 대신 서비스업의 핵심인 '지식'을 육성하기 위해
교육 분야에 진보주의의 모든 가치를 투자하며 발전시켰다.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었다.

노무현은 여기서 미래를 보았다.

"신자유주의가 실제적으로 강조하는 핵심 가치는 감세와 복지의 축소이다.
여기에 대해선 분명하게 '아니다'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장, 국가, 민영화, 규제 완화, 노동 유연화 같은
구체적, 실제적인 정책 수준의 선택으로 결론이 날 수밖에 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그것은 구체적인 타당성의 문제이다. 구체적으로 논의해보자'
이런 융통성있는 태도로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제3의 길이라는 것을 이런 길로 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교리에는 보수주의의 핵심 논리도 있고
진보 보수 관계없이 진보도 보수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생산성과 효율성의 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을 합쳐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공격하다보니까
너무 전선이 넓어지고 불필요하게 우리 편을 적으로 돌리는
이런 문제가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지요" 

보수주의가 진보주의를 공격할 때 결코 진보의 '가치'를 공격하는 일은 없다. 

"그들은 진보주의의 불경제와 도덕적 해이를 공격한다"
보수주의는 '경제'를 먼저 그들의 프레임으로 끌어들여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에 있어서 진보와 보수의 논쟁은
자연스레 보수진영이 구축한 '경제 죽여? 살려?'의
유치하고 단순한 답이 뻔히 보이는 무의미한 대립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진보의 보수의 대립을 다시금 사회적 논쟁의 주체로 돌려놓기 위해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시민"들을 양성하는 길 뿐이다.
그래서 노무현은 시민 속으로 들어왔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결국엔 진보주의를 중심으로 세상은 발전할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자신을 향해 조여오는 권력의 손아귀 속에서도 끝까지 진보를 연구했고
부엉이 바위에 몸을 던지기 직전까지도 '글을 쓸 수 없'음을 슬퍼했다.   

 

한국은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을 막론하고 기독교적 세계관이 지독하게 강한 나라다.
선과 악의 이분법을 즐겨 사용하고, 늘 메시아를 꿈꾼다.

보수진영에게 박정희는 메시아였고,
지난 10년 간 김대중과 노무현은 악 그 자체였다.
보수의 헤게모니에 잠식당한 이 사회에서 박정희는
아직까지도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서 불멸의 존재가 된다.

진보진영에서 박정희와 전두환의 독재는
악 그 자체였고 민주화는 신성한 것이었다.
87년 6월의 민주화는 전 국민의 힘으로 이루었지만
이후 권력이양의 과정에서 무책임하게 정치판에 권력을 내어줬다.
그러면서 독재를 증오했던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이끌어 줄 또다른 메시아를 꿈꾸었다.

그것이 김대중이었고 노무현이었다. 

김대중이 정권을 잡은 그 자체로,
노무현이 정권을 잡은 그 자체로 민주화는 '완성'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진보진영은 마치 모든 걸 이룩한것처럼 기뻐했고
그들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가열차게 비난했다.
지난 10년간의 과정에서 무책임하게 포기한 
민주주의 시민 자신들의 진정한 '권력'은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노무현은 죽어서야 진보진영의 메시아가 됐다.
이명박 정부의 탄생으로 인해, 그리고 자살로 인해서 그는 신화가 되었다.
한국의 진보진영에서 살아있는 이명박은 적이 되었고, 죽은 노무현은 선이 되었다.
역설적이다. 그는 정말로 이런 세상을 꿈꾸었을까.

살아생전 단 한 순간도 노무현은 자신을 타인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정부 관공서 출입기자실을 개혁하며
언론의 카르텔을 깨뜨리기 위해 노력했다.
국민의 위에 군림하지 않기 위해 재신임을 끊임없이 주장했고, 당정 관계를 폐지했다.
청와대와 검찰의 유착을 근절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결국 그는 '장악하지 않은' 검찰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민주주의의 신화가 되었다.
그를 보듬어 주고 인정하기는 커녕
살아생전 침묵과 냉소로 일관하던 이들에 의해 전설이 되어버린 정치인 노무현... 
하늘에서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짓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그가 했던 이 말이 더욱 가슴이프게 다가온다.
  


"지금껏 피지배계층은 전부 권력을 거부하는 논리들을 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아닙니다. 권력없인 아무 것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권력을 장악해야 합니다. 권력을 향해 나아가는 시민들이 조직되어야 되는 것이죠.
결국...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행동 속에, 궁극적으로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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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애초에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왜냐고? 윗 세대가 최초로 20대들을 '피해자'의 입장으로 바라본 책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학점에, 토익에, 취업에 찌들어진 완벽하게 사회화되어버린 20대라도 이 책처럼
우리의 입장을 우리의 편에 서서 보듬어주는 책을 위해 지갑을 열 정도의 여유는 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에서 20대보다 더 신성한 세대가 있었던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통 시절부터 20대는 항상 민주화 담론의 중심에 있었다.
한일간 굴욕 외교를 반대하던 1964년 역사적인 6.3 항쟁의 중심에는 대학생이 있었고,
그들은 '6.3 세대'라는 말과 함께 전설이 되었다. 

아니 그 전부터 였을게다.

이승만의 폭압정치에 반대하던 대학생들이 서울 시내에 나와 시민혁명을 이룬
60년 4월19일부터. 4.19 혁명은 비록 대학생들보다 중,고교생들이 없었다면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이었기에 논외로 친다 하더라도 6.3세대부터 
유신독재에 반대해 온 6.3세대, 그리고 87년 그 뜨거웠던 6월의 한달이 오기까지
늘 우리 현대사의 중심에는 20대가 있었다. 

이것이 다른 독재국가와 차별되는 우리나라 민주화의 독특한 특징이다.

그러나 이러한 20대의 진보적 성향은 1991년 강경대 열사 치사 사건 이후
일명 분신정국때까지만 해도 어느정도 뚜렷한 영향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문민정부 출범 이후 민주화라는 '대의'를 잃어버린 운동권은 현실과 커다란 괴리감이 있는
통일구호만을 외치다가 결국 1996년 그 참혹했던 '연세대 사태' 이후 운동권이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명분과 실리는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사태가 이지경까지 된 건 비단 한국의 '민주화' 때문만은 아니다.
학생운동은 발전이 없었다.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라는 커다란 대승적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운동권에서 외치던 다소 생경한 통일담론까지 용인될 수 있었지만
(명목상)민주화가 달성된 상태에서 그들의 외침은 공허했다. 

그렇게 문민정부가 지나가고,
IMF가 닥쳐오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다.
IMF라는 괴물을 맞이한 20대, 대학생들은 빠르게 체제순응적으로 변해갔다.
그들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었다.
좀 더 민주적인 사회? 평화통일? 다 좋다 이거다.
그런데 그것도 먼저 우리가 먹고 산 다음에야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니던가??  

 

  

 

일부 386세대는 말한다.
우리는 니들 때 안 그랬다고.
우리는 대학뱃지 버리고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다고.
맞는 말이다. 당신들 세대는 우리 나이 때 이러지 않았었다.
그 좋은 대학뱃지 던져버리고 공장에 위장 취업해서 노동자들의 의식화를 선도했다.
지방대 전대협 의장을 지키겠다고 '서울대 의대생'이 사수대로 나섰던.. 그런 세대였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정말로 모든 걸 던져버리고 민주화에 한 몸 바쳤던 걸까?
매일 데모하고 F학점을 밥먹듯이 받아도 한국 역사상 최고 호황기였던 그 시대에
당신들은 정말로 '모든 걸 던져버리고' 민주화에 한 몸 바쳤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낮에는 민주화 투쟁하고 밤에는 전두환 정권의 유화정책의 일환 중 하나였던
에로영화나 보면서 킬킬대던 아이러니한 그 모습 속에서 당신들은 정말로
모든 걸 바쳐서 민주화를 이룩해냈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가?

결코 그들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나를 비롯한 지금의 수많은 20대 역시 모두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아니 어찌 현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들 중 그들에게 빚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들이 광주에 졌던 빚처럼 우리 역시 당신네들에게 갚지 못할 빚이 있음은 자명하다. 

다만 어줍잖은 우월의식에 빠져 현재의 20대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지 말라는 소리다.
민주화는 시대적 조류였다.
분명히 다는 아니었겠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의 20대가
80년대로 돌아간다하더라도 그들 역시 민주화 투쟁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지금의 20대가 민주화의식과 사회비판정신 관련 세포가
결여됐기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이 문제가 정말로 심각한 이유는 386세대의 심리적 우월감에
20대가 안주거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정말 심각한 건 지금의 20대들 역시 보수적인 사회가 만들어놓은 담론에
완전히 포섭되어버려 "우리는 원래 그런 존재니까"라고 체념하고
체제순응적인 인간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거짓말이라도 반복해서 들으면 진짜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학창시절부터 우리가 지켜봐 온 정치판은 '싸움장'이었다.
그곳에는 민주주의도 없었고, 단결도 없었고, 화합도 없었다.
항상 뉴스에서 국회를 비쳐줄 땐 반드시 개떼 싸움을 하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그런 개판5분전 국회라야만 뉴스꺼리가 되기 때문에
언론이 주목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그런 걸 자각할 능력이 있었겠는가. 

심지어 뉴스를 지켜보는 어른들도 그런다.
쯧쯧... 저 개새끼들.. 국회는 쓰레기통이여.
어떠한 주장과 신념도 고착되기 전인 그 시절에 우리는
어른들의 그런 말들을 들으며 자연히 '의식'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아.. 국회의원들은 다 나쁜 놈들이구나. 정치는 참 더러운 거구나. 

바로 이것이다. 정치적 냉소주의..
    

 

 

 

냉소주의의 이면에 있는 보수세력의 헤게모니를 의식하기도 전에 정치는 머리 아프고
더러운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그것에 대해 거리를 두게 만들고 쓴웃음 짓게 만든다.
이 과정 중 그 어디에도 '민주적 의식'을 함양해 줄 수 있는,
즉 중립적 입장을 견지시켜 줄 수 있는 장치는 없다. 소수 진보적 여론은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거대언론에 잠식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정치와 담을 쌓게 된 그들이 대학에 들어간다.
극소수의 몇몇 운동권 학생들을 제외하면 일부의 20대는 20살의 청춘과 젊음에 빠져들고,
일부는 대학에 오기까지 겪었던 그 지옥같은 시간을 똑같이 반복한다.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다시 반복된다.
이 틈 어디에도 '민주적 의식'을 함양해 줄 수 있는 장치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가열차게 까인다.
누구에게? 진보와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말이다.
진보는 우리를 나라 걱정 안하는 정치에는 문외한인 멍청한 놈들로 낙인찍어 버리고,
보수는 우리를 능력도 안 되면서 눈만 높아서 대기업에 혈안이 되어
국가의 실업률이나 높이는 한심한 잉여인간 취급한다. 

그 어디에 우리편이 있었던가? 이건 논쟁 자체가 불가능하다.
결국 20대는 사회적으로 불구자가 된다.
벼랑 끝에 몰린 우리는 우리가 정말 한심한 놈이고,
무능력한 놈이기 때문에 이 모든 욕을 먹는 거라 생각하며 
아예 화를 낼 용기와 의지조차 잊어버린다.  

이건 결코 20대가 뚜렷한 주관이나 자기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어느정도 상충되는 입장이 부딪치면서 파열음이라도 생겨야
난 이렇게 생각해, 난 저렇게 생각해라고 의식이 활성화될텐데
애초부터 양쪽 진영에서 한쪽을 향해 일방적으로 몰아붙여진 20대, 우리에게 주관은 없다..
 

  

 

 

그래서 이 책은 20대의 바이블이 됐다. 


20대에 대한 위로는 둘째치고 처음으로 20대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 책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굳이 '위로'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우리를 바라보는 천편일률적인 시각이 아닌 다른 관점이 절실했다.
만에 하나 이 책이 우리를 가열차게 비판하는 논지를 가진 책이었을지라도
흥행은 되지 못했을 망정 나의 이런 생각은 동일하다. 

하지만 이건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다.
이 책의 논조가 20대를 비판하는 책이었다면
기존의 관점들과 똑같은 말들의 돌림노래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로든 비판이든 기존과는 차별화된 시각이 필요했고,
그래서 이 '절망의 시대에 쓴 희망의 경제학'은 사회가 20대를 향한
서슬퍼런 칼날 중에서도 돋보일 수 있었고, 20대의 마음을 파고들 수 있었다.

리스트가 주창하고 장하준이 그의 저서에서 인용해 유명해진 '사다리 걷어차기'
개념은 굳이 국가 대 국가 간의 거시적인 측면에서만 유효한 이야기는 아니다.
바로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20대를 향한 기성세대의 대처방법에서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386세대.. 정치학자들은 이 세대를 주로 80년대 군사독재와의 싸움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는 반면,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이 세대는 교복을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교육 체제에 편입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세대였다. 일본의 68세대인
전공투 세대가 주류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된 채 세대의 엘리트들이 가미가제 세대에 의해
완전히 거세된 뒤, 나머지 세대원들이 '덩어리'로 지칭되는 단카이 세대로
전락한 것에 비하면 우리나라 386세대의 성공은 매우 눈부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교육' 측면에서만 살펴보자.
어떻게 80년대에 그 수많은 '일류 대학' 학생들이 민주화 투쟁을 할 수 있었을까?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학생들이 어찌 '사회적 소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던져가며 거리로 나올 수 있었을까?
하나의 독점적인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현 사회를 기준으로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기는 아예 불가능하다.
그때와 지금의 교육 정책은 아예 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이다. 

고액 과외는 현재 일류대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고교 때는 물론 대원외고 - 서울대로 이어지는 엘리트 코스를 위해
무려 초등학생들까지 사교육의 바다에서 헤엄친다.
당연히 돈이 없으면 과외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상류층의 자제분들이 현 일류 대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들이 자라오면서 우리집과 그 주변을 바라봐도 어디에도
비정규직을 연연하고 생계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사회적 소수를 위한 자신의 희생은 뒷전이 된다.
(그들의 무관심을 비난하는 게 아니다. 이건 상류층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우석훈은 말한다.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출발선을 갖게 하자'라는
'형평성'의 관점에서
사회적 합의를 찾고 움직이는 시스템"이라고 말이다.

"초기 자본주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주의라는 큰 복병을 만나게 되었고,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쳤는데, 이 위기를 극복하게 해 준것이 '형평성'이라는 것"
이라고 한다. 즉 국민들 입장에서는 "평등을 포기하는 대신 형평성이라는 보다
완화된 가치에 동의를 해준 셈"인데, 이러한 "형평성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가 교육"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서구적 자본주의 관점에서 살펴본 시각이지만
80년대 신군부 시절에도 어느정도 적용이 되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80년 7월30일 '과외금지안'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형평성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인 교육이 제도적으로나마
온 국민에게 평등하게 작용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 준 것이다.
다만 서구 자본주의와 80년 우리나라와의 차이점은
이 형평성이 '사회적 합의'가 아닌 '국가의 강제'로 인해 이루어졌단 점이다.

비록 과외금지안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불법과외가 성행했지만
어쨌건 어느정도 출발선상은 같아진 셈이다.
즉 돈이 많건 적건, 집안이 잘나가건 가난하건
오로지 '공교육'만으로 학생 누구나가 정당하게 경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이러한 강제적 법의 실시로 '평등'이 달성될 수 있었을까?
대답은 그렇다 이다.
과외금지안 덕택에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었다. 
대학생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물론 이는 과외금지안과 동시에 졸업정원제 실시로 인한
무분별한 대학의 팽창도 한 몫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을 보내왔던 그들이
대학에 와서 만난 마르크스와 레닌, 스탈린과 주체이론은
'나같이 가난한 사람들도 인간 대접 받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가 올 수도 있구나'라는 신념을 심어주게 되었고,
이는 곧 전두환 독재정치에 항거하고
미국의 신제국주의에 분노하는 '투사'를 잉태시켰던 것이다. 

현 사회의 사교육의 팽창 원인이 꼭 기성세대의 부모들에게 있는 것만은 결코 아니다.
내 새끼 잘 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지 않은가?
정글에 내던져진 내 새끼가 최소한 살아남으려면 남들 하는 것 만큼은 해야되겠고,
이왕이면 좋은 대학 가는 게 좋을 것 같고, 그러다보니 경쟁적으로 사교육은 팽창해버렸다.
(물론 그 이면에는 부모들의 교육열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권력자들의 음모가 존재한다)

사교육 경쟁과 입시지옥으로 만든 사회의 작금의 실태 모두를 386세대,
기성세대들에게 지울 순 없지만 동시에 그들은 결코 현 사회의
피폐화된 교육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비록 강압적인 법 집행이었다고는 하나 자신들은 사교육 없는 세상에서
열심히 공부해 '능력의 경쟁'만으로 일류 대학에 갈 수도 있었으면서
왜 당신들의 자식들은 사교육 속으로 가열차게 몰아 넣는 것인가?
"남들이 하니까 어쩔 수 없이"라는 말은 핑계는 될 수 있어
결코 당신들을 합리화해주지는 못한다.

민주화라는 대의를 위해 '투사'가 된 그들은
어째서 자식 교육에 대해선 '투사'가 될 수 없었던 것일까?
모두가 잘 사는 평등한 세상'을 대학 새내기 때 접했던 그들은
어째서 자식 교육에 관한 한 평등을 외칠 수 없었던 것일까?
 

 

  

 

 

"이미 30대 중반에 자신들의 대변인을 정치조직의 정점에 올린 386세대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반영시킬 수 있는 사회적 장치와 흔들리지 않는 단결력 등
세대 간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해방 후 그 어느 세대보다
강력한 보호장치를 가졌던 세대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68세대와 달리
386의 자기 결집은 사회에 대한 긍정적 효과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화하지 못했다"

우석훈의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86세대는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발전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표본이 되었다.
이 말인 즉슨, 해당 세대 각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적 소통수단이
'정당'이 될 수밖에 없는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그들 세대는 자신들의 동료들이
'민주화 투사'라는 영광을 등에 엎고 정계에 진출한 덕택에 어찌보면 우리나라
사상 최초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정치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훌륭한 무기를 가진 셈이었다.

물론 세대 간 입장에서 전체를 묶어버린 과도한 일반화일 수 있다.
결코 386세대의 정치인들이 그들 세대들의 모든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보장은 없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는 특별한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보편적 국민들의 시각에서 볼 때, '거리의 투사'였던 386세대들의 정계 진출은
수십년간 지속되어 온 정치 엘리트가 세워놓은 난공불락의 거대한 벽을 깨뜨리고
비로소 정치가 '현실'로 다가왔던 일종의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이것은 한국의 그 어느 세대도 이룩하지 못한 것이었다.

정치 혁명이라 불리워도 부족하지 않을 386세대의 정계 진출은 그러나 처참히 실패했다.
국회의원 개개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물질적으로는 어쩌면 성공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권력의 달콤한 맛을 본 그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체제에 순응해버렸고,
그들에게 '피끓는 청춘의 시대'에 그들이 꿈꾸던 혁명적 개혁은 바라지 않았더라도,
일말의 변화를 기대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감을 배반하며
정치적 냉소주의를 더욱 더 심화시켰다.
 

  

 

 

그러나 이것 뿐이면 어쩌면 다행이었을 지도 모른다.
386세대의 정치적 실패는 냉소주의의 심화와 더불어
20대의 사회적 잠식에 있어서 매우 큰 역할을 한다.
 
"사교육에 의한 지적소화력 상실의 집단 경험을 갖고 있지 않은 이 세대(386세대)는
포디즘 이후에 새로 생겨날 변화들에 대해 오히려 현재 20대보다 훨씬 높은 적응 능력을
갖고 있다. 개별적 능력과 세대 내 단결이라는 두 가지 장치를 모두 가지고 있는 이 세대가
향후 세대 내 경쟁을 점차 완화시키고, 세대 간 경쟁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돌아갈 몫을
선점할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 사회적 연공서열제와 종신고용제가 깨어진 지금
386 세대는 다음 세대를 돌보아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다."

제조업이 쇠퇴하고 서비스업이 발달하면서 자본과 노동의 유연성이 극대화된,
소위 말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개인의 창의력은 곧 국가 경쟁력이다.
답은 쉽다. 개개인의 창의적 능력을 발전시키면 나라는 발전한다.
그 과정이 문제인 것이다. 지금 행하고 있는 오로지 일류 대학만을 바라보는
사교육 속에 창의력은 존재할 수 없다. 자유로운 환경과 다독과 많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창의력은 주입식 교육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영국 노동당이 80년대 내내 나라를 지배했던 대처리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대안은 바로 '교육'이었다.
전세계 좌파의 전설적인 존재인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 폭풍 속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교육'이었다.
미국의 오바마가 의료보험 개혁과 함께 사활을 걸고 있는 것도 바로 '교육'이다.
그들이 말하는 '교육'은 누구나가 평등한 출발선에서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어찌보면 신자유주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좌파적 교리가 교육일 수밖에 없는
이 시점에서 한국은 가열차게 정반대로 달리고 있다.
워낙에 보수기득권층이 득세한 한국 특유의 정치적 분위기도 한 원인이겠지만
주류에서 '진보'라고 자처하는 이들, 즉 386세대의 의원들조차 교육 개혁에 있어선 
집권 세력 앞에서 작아진다. 물론 우석훈의 위의 주장은 지나치게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 면이 없잖이 있지만, 어쨌건 386세대들을 대표하는 386세대 의원들이 자신들이
누렸던만큼  충분히 사회적 환원을 정치적으로 하지 않고 있는 점은 분명 문제이다.
그들은 언제나 '독재'라는 말을 앞세워 자신들이 누렸던
특권들조차 '잘라내야 할 독재의 잔재'로 취급하고 있다
 

  

 

 

 

"현재의 20대가 맞게 된 사회적 고통의 원인은 20대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본질적으로 경제 구조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는데, 직접적인 요인 두 가지는
한국 경제 영광의 30년 동안 화려하게 활동했던 중소기업이 지난 5년 동안
붕괴한 것과 사회적으로 경제적 약자의 탈출구였던 자영업의 경제적 기반이
사라지게 된 것을 들 수 있다."

이 말은 이 책의 핵심이자, 이 책이 히트를 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우석훈은 결코 나약한 20대 자신들을 문제의 원인으로 꼽지 않는다.
본질적인 경제 구조의 변화가 그 문제인 것이다.

비록 우석훈의 말처럼 지난 30년동안 중소기업이 화려하게 활동한 적은 없지만
(박정희 전두환의 재벌 정책 아래 중소기업은 결코 단 한번도 '화려한' 적은 없었다)
현재에 와서 중소기업의 현실이 더욱더 악화된 것은 사실이고,
경제적 약자의 탈출구였던 자영업은 그 기반을 잃었다.

이제 더이상 출구가 없는 것이다. 공무원 아니면 대기업이다.
여기서 낙오하면 더이상 갈 데가 없다.
그래서 우리의 20대들은 토익책을 손에 쥐고,
임용고시에 행정고시에 파뭍혀 도서관에 틀어박혀 청춘을 학살한다.

여기에 사회적 의식화가 개입될 여지는 어디도 없다.
(여기에 단 하나의 예외가 있긴 했다. 그것은 바로 2008년 6월의 촛불집회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적 자의식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주관과 가치판단의 기준을 잃어버린다.
오직 자기자신을 상품화하는 자기소개서만이 사회와의 유일한 소통기구인 셈이다.
사회적 자폐아가 되어버린 우리를 기성세대는 열심히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자신들의 헤게모니에 들어맞지 않는 '경제 구조의 변화'는 거론하지 않은 채
이렇게도 높은 실업률과 대기업에 목매는 20대들을 '개개인의 문제'로 치환한다.
"능력이 없으니까 그런거야. 능력만 있어봐" 혹은 "눈이 너무 높구나? 네 주제에"
가치판단의 능력이 결여된, 의식화가 전무한 20대들에게
이 말은 한 톨의 필터링도 거치지 않은 채 가슴에 박힌다.

결론은? 경쟁의 심화다.
우리 20대는 20대라는 세대간 동질감이 아니라 차라리 밟고 올라가야 하는 적이다.
이보다 더 잔인한 게 있을까? 

더 잔인한 건 이처럼 지극히 보수적인 프레임을 진보개혁세력에서조차
아무런 자각없이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그들은 이것도 모자라서 20대를 '적' 혹은 '패배자'로 은연 중에 규정한다.
그 절정이 바로 2008년 6월의 촛불집회였다.
 
 

  

 

 

2008년의 뜨거웠던 여름은 중,고등학생들의 고사리같은 손에서 시작됐다.
보수진영은 경악했고, 진보진영은 감동에 눈물을 흘렸다.
4.19혁명의 재림이네 뭐네 하면서 한껏 그들을 비행기 태운다.

여기서 20대는 철저히 이용당한다.
촛불시위가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비록 그 시작은 10대들이었지만
20대를 비롯한 전국에서의 범국민적인 참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그 모든 진영에서는 '10대의 참여'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20대는 '386세대(또 386이다!)의 자식 세대'인
10대의 성숙한 사회의식을 돋보이게 하기위해 기꺼이 바보가 된다.

진보진영은 너나 할 것 없이 촛불시위에 감동을 받았단다.
10대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건 그야말로 '혁명'이란다.
지금까지 취업과 토익에 미친 20대를 보면서
느꼈던 절망이 10대를 보면서 희망으로 바뀌었단다.
지금까지 진보개혁세력의 '고립된' 운동이 미처 이루지 못했던
중요한 부분을 촛불 시위, 그것도 10대를 통해 느꼈단다.

진보세력이 지금껏 취업에 눈 먼 20대들을 향해서는
결코 보이지 않던 '눈물'이 10대들이 치켜든 촛불 하나에 뚝뚝 떨어졌다.
그렇게.... 20대는 10대의 심리적 우월감을 위한
도구로 희생됨과 동시에 10대 그리고 30~40대와 단절된다. 

이쯤되면 정말 서러워서라도 20대는 뭉쳐야된다. 

똑같은 세상에서 태어났는데 왜 우리만 이렇게
사회적으로 병신 취급을 받아야 하는걸까?
그러나 이러한 분노를 느끼기에는 우리는 너무 사회화 되었다.

아니, 분노를 느끼는 것까지는 모든 20대들이
동일할 지 몰라도 결코 뛰쳐나올 순 없다.
어쩌면 우리는 은근히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옆의 경쟁자가 사회에서 이탈해 불구자가 되기를.. 

그래서 우리 20대는 슬프다. 

 

 

 

 

"지금 88만원 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만의 바리케이트와
그들이 한 발이라도 자신의 삶을 개선키기기 위해 필요한 짱돌이지,
토플이나 GRE점수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 책을 보면서
누구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분노와 울분을 느낄 수는 있지만 행동할 수는 없다.
이미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보수진영이 만들어 놓은
제도에 아무런 자각도 없이 너무 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88만원 세대>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20대..
하지만 금새 눈물을 닦고 코 한번 팽하고 풀고 다시 토익책을 움켜잡는 20대..
마음 속에 있는 울분과 분노를 어떻게 다스리고
제어하고 폭발해야 하는지 모르는 20대..
그렇기 때문에 다시 전쟁터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20대.. 

결국 바뀌는 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이런 걸 원한 것이다.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누군가가 우리를 향한 '적대적 시선'을 버리고 따뜻한 시선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런 걸 바란 것이다.
그래야 내 옆의 경쟁자를 밟고 올라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조금은 덜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내가 지금 이렇게 하는 건 내가 돈과 명예에 환장한
속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 구조'때문이라고 탓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라도 합리화하지 않으면 우리의 20대들은 온통 경쟁자와
전쟁터인 피튀기는 이 사회에서 정말로 질식해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 입시지옥의 전쟁터에서 내 옆의 짝꿍에게 총구를 겨누고
피를 철철 흘린 채로 올라온 대학에서조차 학점의 전쟁터에서 청춘을 잃어버리고,
내 동기는, 내 선배는, 내 후배는 내가 밟고 올라가야 할 적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를 연연하면서 대기업과 공무원만을 꿈꾸는 절망적인 현실속에서
전쟁터의 살인광이 되어버린 나에게 "그게 네 잘못만은 아니야"라고 보듬어주는
이 책 한권이라도 없었다면 우리 20대는... 너무 암울하고 서글픈 세대가 되지 않았을까..



사회가 만들어 낸 수많은 20대 괴물들의 이면에 있는
피맺힌 절규를 우리 사회는 언제쯤 귀 기울여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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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역할 - 장하준이 제시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발전과 진보의 경제학'
장하준 지음, 황해선, 이종태 옮김 / 부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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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정치적 관점이나 경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느 정도
일관되게 정립되기 전, 그러니까 2005년 어느 날 즈음이었을꺼다.
그때 장하준의 대담집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보았다.
이 책을 통해 느꼈던 충격에 가까운 신선함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저 막연하게 신자유주의는 보수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사회를 좀먹는 수탈 체제라는
단편적인 지식만을 갖고 있던 나에게 이 책에 실려있던 장하준의 주옥같은 말들은
한나라당은 나쁜 놈들, 민주당은 덜 나쁜 놈들이라는 편협한 이분법에 사로잡혀있던
짧고도 무지한 정치적 관점에서 벗어나는 데에도 어느정도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이후 내가 두번째로 접했던 그의 책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이었다.
이 책은 70년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그랬고,
80년대 한길사의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그랬던 것처럼,
이후 2000년대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회과학 서적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한국의 경제체제를 배웠고,
이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보았으며,
이 책을 통해 신제국주의의 끔찍한 현실을 보았다.

[쾌도난마 한국경제]는 예외이지만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먼저 접했건,
[사다리 걷어차기]를 먼저 접했건, 아니면 이 책 [국가의 역할]을 먼저 접했건
장하준의 경제에 관한 세 권의 저서를 모두 읽은 사람들은 아마 느낄 것이다.
장하준은 모든 책에서 거의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저서들이 단순히 '우려먹기'라고만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대한민국사에서는 거의 유래 없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경제학자여서도 아니고,
제도경제학이라는 경제학의 한 분야에서 권위 있는 학자여서도 아니다.

바로 '학자'라는 세상에서 가장 딱딱한 위치에서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을
단순한 '지식의 과시'에 머무르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일반 독자들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친숙하게 풀어가는 대중친화적인 모습.

덧붙여 학자적 위상이나 금전적으로, 또는 같은 경제학계 내에서도 편한 길,
즉 親신자유주의자 라는 편한 길을 제쳐두고 어렵고 힘든 외길로 가면서도
꾸준히 자신의 이론적 무기를 강화해가고 있는 모습.
이 정도라면 그의 '우려먹기'에 대한 면죄부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우려먹기는 장하준이 아니라 출판사 쪽에 그 책임이 있다.
장하준은 글을 쓸 뿐이다. 그저 출판사에서 똑같은 내용의 책들을
계속해서 한국어로 ‘번역‘해 출판할 뿐이지.)

신자유주의에 대해 파헤치고 있는 장하준의 세 권의 저서에 대해
간단하게 분류를 한다면 [사다리 걷어차기]가 선진국들이 추구하는 신자유주의를
그들의 역사적인 경제 발전 양상과 비교하며 모순을 파헤치는 데 초첨이 맞추어져 있다면
(이는 리스트가 말한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단 한마디로 압축된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인들에 빗대어
신자유주의의 폐단을 집어보는 대중 입문서라고 할 수 있고,
바로 이 [국가의 역할]은 장하준의 경제학 관점의
총정리판이라고 할 수 있다.(따라서 비교적 두 저서에 비해 전문적이다)

제목부터가 그런 느낌이 풍기지만 이 책은 그리 만만하게 볼 책이 아니다.
두께도 그렇거니와 [나쁜 사마리아인들] 정도를 예상하고
책을 펼쳐본다면 약간의 머리 아픔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됐건 결론은 하나다.
강대국들이 내놓는 '유일한 답'인 신자유주의가 반드시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정답이 아닌 수준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근본적으로 틀린 답이라는 사실이다. 
 

 

장하준은 아예 처음부터 시원스레 답을 제시한다. 

"신자유주의에 맞서 내세울만한 실질적 대안이 있는가?
그 대안은 이미 존재해왔다. 1980년대 이전 상당수 개발도상국이
추진했던 수입 대체 산업화(ISI) 정책이나 한국, 일본, 대만 등의 '동아시아 모델',
중국이 지난 십 수년 간 형성해 온 독특한 자본주의, 사회주의 혼합체제 등이다.
그러나 이런 대안적 모델들에는 고유의 문제점이 존재한다.
게다가 더 중요한 문제는 이 모델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정통 교리에 도전할 만한
강고한 이론적 기반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답은 이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맞설만한 대안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멀리 볼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의 60~70년대를 살펴보자.

흔히들 우리 경제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용어는
그 눈부신 경제 성장에 소비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깡그리 무시하는
역겨운 단어임에는 틀림없지만, 오로지 경제적 수치로만 보자면
당시 경제는 매년마다 문자그대로 기적적으로 발전했던 시기였다.

이토록 단시간 내에 고속으로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강대국들이 말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근본적 이론과는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국가주도하의 경제 체제 때문이었다.

이것은 비단 한국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고전학파 시절부터 언제나 경제의 가장 기본 명제는 '경제적 자유주의'였지만
역사적으로 서구 열강들이 경제적 자유주의만을 추구해서
부를 창출했던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보호무역주의로 어느정도 내수를 탄탄히 다져놓은 이후에야
야금야금 개방을 시도했고, 개방 이후에 조금이라도 자국의 경제에 피해가
간다고 생각되면 또 다시 문을 굳건히 걸어 잠그는 방식으로 이끌어 왔던 것이다.
자신들의 과거를 의도적으로 망각한 이들은 이제 자신들이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왔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 오로지 개방만이 살 길이라며
개발도상국들에게 '전면 개방'을 외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사다리 걷어차기다.

그렇다면 선진국들은 왜 이렇게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장하준은 그 이유를 신자유주의 속에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에 있다고 본다.

"반개입주의 이론들의 공통점은 경제문제의 '기술적' 측면보다
'정치적' 측면을 더 강조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신자유주의 이론들은 개입주의의 정치적 기반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윤리, 정의, 권력 등의 쟁점들을 경제학의 영역으로 복귀시켰다."

신자유주의는 경제학 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옳은 말'로 점철된 이론이다.
하지만 실제 경제란 무엇인가? 정치나 환경 등
우리 사회의 전 분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총체적인 집합체이다.

원론에 아무리 부합하는 이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에 적용될 때는 수많은 변수로 인해 예측이 불가능하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그것이다.
결코 사회 총체적인 실제 경제상에서는 성공할 수 없는 이론.
이론을 실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부작용을 무마하기 위해,
즉 신자유주의가 간과하고 있는 이론과 현실과의 괴리감을 극복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자들은 현실과 이론 사이의 텅 빈 공간 안에 '정치'라는 요소를 집어넣는다.

현실 세계에서 정치란 머리 아픈 일이지만 신자유주의를 현실에 도입할 때
신자유주의자들이 써먹는 정치는 그리 머리 아픈 것이 아니다.
일단 국가, 즉 정부를 적으로 치환한다. 따지고 보면 이것이 전부이다.

자유시장은 서로 간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만
인위적인 국가의 간섭은 경제에 해악이 되는 것이다.
왜 현재 경제가 이렇게 엉망진창인것인가?
이유는 하나, 국가가 경제에 과도하게 개입했기 때문이다.
즉 우리(신자유주의자)의 목표는 국가의 역할을
'야경 수준'으로 후퇴시켜 경제적 효율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 이다.

지나치게 단순하다.
그런데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는 것이 어떻게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일 수가 있냐고?
바로 이 신자유주의의 지나친 단순함에 그 답이 있다.

"대다수 신자유주의 이론은 인간행위에서의 동기와 복잡성, 현대 정치 형태의 복잡성,
정책 형성 및 수행과정에서 정당화의 중요성, 복잡한 현대 경제에서 집단적 관리의
필연성 등을 고려하지 않는다. 정치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극단적으로 단순한
개념은 그들의 주장을 기껏해야 남을 오도하는 것으로,
최악의 경우에는 사기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 행위의 수많은 인과 관계와 복잡성을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는 해악" 이라는 명제 아래 단순화 시킨다.
여기서 신자유주의 이론과 실제의 괴리를 채워주기 위해
도입되어진 '정치'는 단순히 국가의 역할에 대해
선악의 이분법만을 강요하는 극히 한정적인 역할로 규정된다.
결국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정치란 놈은 경제에 예속되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의문은 남는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다 알 수 있는 
이런 허술한 주장이 설마 먹힐거라고 진짜 믿고 있는 것일까?
아니, 정녕 그들은 국가가 경제 일반에 관한 모든 악의 근원이고 
국가의 개입만 없으면 경제가 발전될 거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경제학자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한심하고 무모한 주장을 하는 것일까.

"만약 신자유주의자들이 '최소 국가' 수준을 제외한 모든 집단적 행위를
사실상 금지하는 방향으로 법률을 개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면
지나치게 천진한 것이고, 그렇게 믿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런 주장을 끊임없이
내놓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대중적 담론 뒤에 은밀한 정치적 의제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장하준은 비록 이렇게 조심스레 말했지만 뭐 숨길 것 있나?
까놓고 말해서 그들은 노동조합이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고
진보 진영이 이루어 놓은 노동자의 권익, 나아가 사회 복지로 이룩한 부의 재분배 등
수많은 눈부신 성과들이 이룩되기 이전인 그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숨겨진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의도는
더이상 비밀이나 음모가 아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적인 황금시대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유효한 통찰로부터 이데올로기적 장막을 벗겨낸 뒤,
더욱 넓고 객관적인 지식의 틀로 통합시키는 새로운 종합이 우리의 목표이다"

이쯤에서 장하준은 신자유주의의 기원에 대해 살펴본다.
신자유주의는 왜 갑자기 튀어나왔나?
흔히들 이야기하는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는 1929년 대공황 이후
케인스주의가 나오면서부터 석유파동 등을 비롯 전세계적인
경제적 악재와 산업 위기가 겹친 1970년대까지를 일컫는다.

신자유주의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부터 말하는 '신자유주의'는 과거에는 수많은 독점적 권력을 누렸지만
사회주의와 경쟁하며, 혹은 케인스주의의 핵심 원칙에 따라 사회적 부를
'복지'라는 이름으로 재분배 당할 수밖에 없었던 선진국들의 상위층의 입장과
완전히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 것이다) 

70년대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자들은
현재(1970년대)의 경제 위기의 모든 원인을 '제도적 경직성'에서 찾았다.
"모든 규칙과 제도들은 시장의 순조로운 작동을 방해하는 경직성이고,
이같은 제도적 경직성은 이익집단의 압력에 굴복한 국가의 개입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제도적 경직성은 생산요소가 수익성이 더 높은 부문으로 이동하는 것을
차단하기 때문에 국가 개입 및 각종 제도적 경직성 정도가 약한 국가일수록
경제성장과 산업구조조정에서 보다 나은 실적을 거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국가의 여러 경제적 제도들이 경제를 파탄낸다는 것이다.

당시에 이런 주장이 경제학계에서 어느 정도 반향을 일으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숨어있는 이데올로기의 든든한 재정적 지원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신자유주의는 70년대 이래로 지금까지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들에게 무차별 융단폭격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지나치게 단순한 이론의 문제점은
조금만 생각해도 금방 간파할 수 있으며, 한 나라의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이 차지하는 중요성 역시 기본적인 경제적 지식만 있어도 알 수 있다.

장하준은 이에 대해 아주 시원스레 정리해준다.

"현대 경제에서는 생산 요소들이 소유권에서는 분산되어 있지만
사용에서는 상호의존적이다. 이런 경제에서 효율적으로 구조변동을
추진하려면, 해당 경제의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는 각각의 변동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각각의 개별 부문을 통제하는 주체들의 체제 전체를 보는 비젼의 결여나
다른 관련 경제 주체들의 행위의 불확실성을 이유로 우왕좌왕 하다보면
구조변동에 착수하거나 달성이 불가능할 수 있는 만큼,
경제 전반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일정한 경제 주체가
중심적 위치에서 조절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구조 변동이란 단순히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선택모델 중
하나를 고르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즉 선택모델 그 자체를 수립하는
미래를 위한 비전을 제공하는 것으로 국가는 이러한 비젼 제공에
중심적 경제 주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새로운 조절 구조의 수립에는 반드시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집권 세력이 개입을 원하지 않는 경우에도 국가의 개입은 반드시 필요한데
그 이유는"단지 국가만이 새로운 소유권과 새로운 권력 관계를
법제화할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국가는 조절 구도를 제도적으로 현실화하고,
그 과정에서 국가는 충분히 합리적이지 못한 경제 주체들이
짧은 기간 내에 새로운 조직, 새로운 생산과정,
새로운 계약 과정들을 성취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즉, 국가의 개입은 경제 주체들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세계'와 접촉하는 과정에 필요한 정보 부담을 덜게 되는 셈이다.

국가의 개입 필요성에 대해 이보다 더 설득력있는 주장이 또 있을까?
실제로 이같은 국가의 개입으로 인해 전 세계의 수많은 국가들은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비록 사회적으로는 그 부당함과 비도덕성으로 인해 많은 문제가 되긴했어도
경제적 측면 만을 놓고 봤을 때 한국과 대만, 특히 한국의 경우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아니 정부의 전폭적인 '계획' 아래 기업들은 
어떤 위험에 대한 부담도 없이 마음껏 사업을 펼칠 수 있었고,
이와 관련된 리스크 전부를 국가가 커버하면서 눈부신 성장을 했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 비정상적으로
큰 사례에 속하지만 어찌됐건 이러한 국가의 주도적 개입은 한국을
일본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나라도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한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경제발전의 이면에 존재하던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극심한 인권 탄압은 '국가의 갈등관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것 역시 '국가의 역할'에 해당된다. 국가의 역할은 이처럼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경제적 효율성만을 갉아먹는 단편적인 역할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총체적으로 밀접한 영향을 끼치는 존재이다.
따라서 만에 하나 그들의 주장처럼 국가의 역할을 축소해서 국가가 '야경국가' 수준에
머무른다면 산업 활동 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 관계에 대한 중재자의 역할은 
결코 어떤 것도 국가를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장하준의 분류에 따르면 박정희의 군사정권 시절 우리나라는 '
산업정책국가'에 해당되는데, 산업정책국가에서는 '권위주의'로 표현되는 우익 연합이
국가를 통치했고, 정책결정과정은 관료체제가 지배했다.
구조변동을 주도한 주요 도구는 산업정책이었는데,
이는 정확한 목표를 겨냥한 다음 강압적으로 설정하고 수행되었다.  

산업정책국가의 비전은 자국의 산업구조를 고기술과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빠르게 이행시키는 것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국가는 노동자들을 배제하고 경영자 조직과는 밀접하게 협의했다.
이러한 국가에서 갈등 관리 방법은 구조변동으로 인한 피해 집단의 저항을
국가의 강력한 힘으로 진압하는 한편, 효율적인 제조업 부문의 자원을 이용해
피해집단 중 일부를 매수하는 것 등이었다.

이것은 곧 암울했던 그 시절 우리나라의 이야기였다.
70년 전태일의 분신자살 이후 노동자들의 집단 저항은 공권력이 깔아 뭉개버렸고,
노동자의 최소한의 인권만이라도 보장해 달라던 민주노조의 외침은
어용노조와 정권의 돈에 매수된 수뇌부들에게 짓밟혔다.
국가의 눈부신 경제 성장은 그들을 노동자가 아닌
'근로자'로서, 인격체를 상실한 하나의 '노동기계'로 전락시켰다.

이러한 억압적인 국가의 갈등 관리와 반대되는 유형은
'사회적 조합주의' 형태의 국가의 갈등 관리 시스템이다.
여기서 국가 기구는 주로 '사회민주주의적 연합'에 의해 점유되었고,
중앙집권화된 노조와 경영자 연합이 정책 형성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수행했으며,
구조변동의 주요도구는 적극적인 노동시장 개입과 결합된 거시정책이었다.

사회적 조합주의 형태의 갈등관리 시스템에 의해 발전해 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조직화된 노동, 조직화된 자본, 국가 간의 3자 협상 체제에
바탕을 두고 갈등의 실마리를 풀어갔으며, 이러한 시스템이 구축될 수 있었던
근본적 원인은 국가가 고도로 조직화된 노동-고도로 조직화된 자본 간의
계급 타협에 따른 사회민주주주의적 헤게모니 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들 국가들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완전 고용과 소득 평등,
그 결과 확보되는 사회적 평화를 보존하기 위해 구조조정의 속도를 늦추는 것을 선호했다.
이러한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많은 비용이 들지만 장기적으로는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구조조정이 실업과 일자리 소멸, 생활 수준의 급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었고, 따라서 구조조정에 대한 저항이
현저히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산업정책 국가'와 '사회적조합주의 국가'는 갈등 관리 시스템에서
현저히 차이가 나지만, 공통점은 존재한다. 산업화, 구조변동 등
사회적 목표에 헌신적으로 봉사한 정치 엘리트 및 관료 엘리트의 존재그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두 유형의 국가 모두에게 독이 되었고,
신자유주의가 성장할 수 있는 하나의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반격은 후생경제학의 전성기에 횡행했던,
국가의 역할에 대한 기술관료적 관점이 지닌 기본적 문제점 등을 드러냈는데,
이는 정치학을 다시 경제학과 융합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제도경제학파인 장하준은 책의 전반에 걸쳐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서
제도경제학을 제안하고 있는데, 신자유주의자들이 기존 후생경제학을 파괴하기 위해
관료적 관점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정치학을 다시금 경제학과 융합시키며 제도학파들의 핵심 주장, 

"어떤 시장이든, 누가 어떤 조건으로 참여하느냐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시장이든
궁극적으로 자유로울 순 없다"라는 이론의 초석을
깔아주고 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탈출구를 찾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정치경제학' 논의에 공공연하게 참여한 것이
'제도주의'적 비판으로 이어지는 관문을 열어 젖혔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마치 자신이 구세주라도 된 것처럼 자신만만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여러 가지 주장들을 전개하고 있고, 그 덕분에 사람들은 신자유주의가 일관된 내용과
명백한 결론을 가진 이론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대중적 인상과는 달리
신자유주의 독트린은 사실 매우 이질적이고 내적으로 상반된 요소들이
난마처럼 얽힌 지적체계이다"

우리가 후생경제학이라든지, 장하준이 제시하는 제도경제학 등과 같이
신자유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다른 경제학 이론들이
'대안'처럼 느껴지지 않은 진정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앞서 나는 신자유주의를 '허술한 이론'이라고 칭했지만,
사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만큼 명확한 이론 또한 없다.
"국가는 경제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이론의 전부이다.
신자유주의에 힘을 실어준 가장 큰 요소는 아마 '단순함'이 아닐까 싶다.

장하준은 신자유주의의 핵심을 이 한 문장으로 간파한다.
"신자유주의 독트린 배후에 있는 주요한 가정은 정치가 '분파적 이익'때문에
시장 시스템의
합리성을 왜곡하는 만큼 시장에서 정치를 축출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가장 큰 무기는 단순함과 동시에 '자기 포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은 구세주를 자처한다. 작금의 경제 위기는 관료제, 즉 국가의 부패에 따른 것이다.
국가는 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부패는 정치와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탈정치화'를 추구한다. 바로 부패를 근절하기 위해서이다.
절대악인 부패를 근절시키기 위해 정치를 배제하자는 신자유주의자.
참으로 멋진 자기포장술이다.

하지만, 정치는 곧 부패라는 그들의 고정관념은 차치하고라도
그들이 추구하는 경제적 합리성은 결국
제도적 구조와의 관계 속에서만 유의미하게 정의할 수 있다.
장하준은 "제도적 구조 그 자체가 정치의 산물"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탈정치화는 결국 "정치가 정당성을 유지하며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을 좁히게 되고, 이 같은 상황에서는 사회적 소외계층이
그나마의 정치적 영향력마저 더욱 축소되어 양극화의 심화"로 이어진다.
이쯤되면 뭔가 감이 잡히는 것이 있다. 그렇다.
'경제의 탈정치화'라는 신자유주의적 아젠다의 목표.
그것은 곧 "구자유주의 정치학을 위장한 형태로 부활시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구자유주의자들 역시 현재의 제도 체계에
'지분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정치적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시장을 통해
달성된 사회적 결과나 제도 체계의 수정으로 귀결된다고 믿었다.
구자유주의자들은 그래서 민주주의에 공공연하게 반기를 쳐들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민주주의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에 따라 신자유주의자들이 시도한 반민주주의 전술은 '정치 일반'에 반하는
주장을 제기하면서 외관상으로는 '산뢰할 수 없는 정치가들'의 영향력을 줄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독립적인' 중앙은행이나
규제 당국에 대한 요구에서 보듯 민주적 통제 그 자체를 축소하자는 것이다"

처음에 신자유주의 이론에 내제되어 있던 이러한 정치적 의도를 알았을 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었는데 자극도 계속 받으면 익숙해진다고 했던가.
지금은 별 감정이 들지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나름대로 교묘하게 정치적 의도를 숨겨놓은 게 기특한(?) 마음까지 드니.
(이는 개인적인 정치적 냉소 때문이아니라 워낙 겉과 속이 다른
세상사를 접하다보니 익숙해진 무감각이라고나 할까)
 

신자유주의자들의 반격을 들어볼 차례이다.
그들은 한국과 대만같은 국가주도형 경제체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유방임정책에는 그다지 많은 제도적 선결조건이
필요하지 않아 어느 나라에서나 실행할 수 있지만, 동아시아의 대단히
개입적인 정책은 정책을 효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정교한 제도가 있어야만 시행된다고 주장한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 주장이다.
한국전쟁 후 모든 것이 초토화 된 한국에서 그 어떤 제도적 장치가 있었는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실제로
장면 정부에서 수립한 계획안을 토대로 진행된 것이라고 해도
그걸 감안한다 하더라도 정교한 제도를 구축하기에는
너무나도 단시간에 계획하고 실행한 것이었다.

한국의 군사정권 60~70년대의 경제적 성장에 그 어떤 정교한 제도적 장치가 있었는가?
사채동결과 통화개혁을 비롯한 수많은 비상식적이고 엉망진창의 제도 속에서도
한국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해보고 안되면 말고" 식의 막무가내 정신,
그 어떤 세력도 견제하지 못하던 전지전능한 국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하준은 "그러나 시장의 올바른 기능을 위해서도 특정한 제도적 선결조건이 필요하고,
가령 아무리 자유무역정책이라도 계약법이나 무역금융제도, 효과적인 결제 매커니즘
같은 제도가 필요하다. 또한 자유방임정책은 산업내부의 경쟁을 규제하고 관리하는
산업별 단체나 카르텔이 없을 경우 초과 생산 설비나
도산같은 낭비를 유발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굳이 이러한 것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개발도상국들은 거의 모두 경제적으로 실패했다. 

지적재산권, 공기업 민영화와 같은 문제에서 제시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시장친화적 주장은 이론적으로 따져볼 때
그리고 실제 경제체제에 대입해서 생각해 볼 때 거의 대부분의 주장이 모순투성이다.
결국 모든 시장은 본연을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규제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장하준이 이 책에서 주장하는 핵심이다.

어쩌면 신자유주의 이론에 대한 논의는 애초에 의미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자들의 목적은 완벽하고 철옹성같은 경제적 이론의 완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근본적 목적은 탈정치화, 다시 말해 과거로의 회귀에 있다.
이것은 일종의 추측일 뿐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신자유주의 이론에 숨어 있는 정치적 의도를 감안하지 않는다면
이론 자체가 가지는 정당성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배후에 숨어있는 음모(?)라도 있어야 그나마
신자유주의자들의 학자적 위치를 조금이나마 인정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신자유주의의 모순에 대해 되짚어보는 책들은 많지만
이 책이 그 중에서도 특별한 이유는 제도경제학이라는 자신의 이론적 무기를
굳이 들먹이지 않으면서도 신자유주의의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이론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조목조목 살펴본 흔치 않은 책이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비록 전작들보다 이 책은 꽤 두껍고 페이지를 쉽사리 넘기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다.
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장하준의 그 어떤 저서들보다
큰 울림을 받으리라 확신한다.

그러나 이러니 저러니 많은 얘길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봤자
우리가 아무리 이러한 경제 관련 서적을 읽어도 세계는 신자유주의로 예편 중이다.

이전 정부는 물론이고 특히나 MB정부에서 우리나라는 꽤나 기형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대규모 '국책' 토목사업을 벌이면서 내부경제를
극소수층에 집중시키는 동시에 개방 문호는 활짝 열어젖힌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다. 부의 재분배는 제도적으로
꽉꽉 막힌 상태에서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넘실댄다.

이런 상황에서는 답이 없다.
케인스가 살아 돌아온다 한들 우리나라의 경제를 기적적으로 살릴 수 있을까?
비극적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건 패배주의가 아니라 현실이다.

그래도 내가 장하준의 신간이 나오면,
한국의 '경제'를 말하고 있는 사회과학 서적이 나오면
웬만하면 다 챙겨보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당할 때 당하더라도 뭔지 좀 알고나 당하자는 마음에서이다. 

아무리 내가 무엇을 한들 바뀌는 게 없다고 해도
눈 뜬 장님마냥 허우적 대며 앉아서 당하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 20대가 너무나 아깝기 때문이다. 

70년대의 대학생이 아니라서 유신투쟁 한번 못해보고
80년대의 대학생이 아니라서 역사상 단 한 번이었던 진보의 승리를 느껴보지 못해보고
90년대의 대학생이 아니라서 신군부의 공안정국을 향해서 화염병 한번 못 던져 본
2000년대의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이것 뿐이다.

낭만과 공포가 잡탕으로 어우러진
선배들의 그 시대를 꿈꾸기에는 우리는 너무 멀리 와 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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