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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 - 절망의 시대에 쓰는 희망의 경제학 ㅣ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1
우석훈.박권일 지음 / 레디앙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애초에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왜냐고? 윗 세대가 최초로 20대들을 '피해자'의 입장으로 바라본 책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학점에, 토익에, 취업에 찌들어진 완벽하게 사회화되어버린 20대라도 이 책처럼
우리의 입장을 우리의 편에 서서 보듬어주는 책을 위해 지갑을 열 정도의 여유는 있다.
우리나라의 현대사에서 20대보다 더 신성한 세대가 있었던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통 시절부터 20대는 항상 민주화 담론의 중심에 있었다.
한일간 굴욕 외교를 반대하던 1964년 역사적인 6.3 항쟁의 중심에는 대학생이 있었고,
그들은 '6.3 세대'라는 말과 함께 전설이 되었다.
아니 그 전부터 였을게다.
이승만의 폭압정치에 반대하던 대학생들이 서울 시내에 나와 시민혁명을 이룬
60년 4월19일부터. 4.19 혁명은 비록 대학생들보다 중,고교생들이 없었다면
성공할 수 없었던 것이었기에 논외로 친다 하더라도 6.3세대부터
유신독재에 반대해 온 6.3세대, 그리고 87년 그 뜨거웠던 6월의 한달이 오기까지
늘 우리 현대사의 중심에는 20대가 있었다.
이것이 다른 독재국가와 차별되는 우리나라 민주화의 독특한 특징이다.
그러나 이러한 20대의 진보적 성향은 1991년 강경대 열사 치사 사건 이후
일명 분신정국때까지만 해도 어느정도 뚜렷한 영향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문민정부 출범 이후 민주화라는 '대의'를 잃어버린 운동권은 현실과 커다란 괴리감이 있는
통일구호만을 외치다가 결국 1996년 그 참혹했던 '연세대 사태' 이후 운동권이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명분과 실리는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사태가 이지경까지 된 건 비단 한국의 '민주화' 때문만은 아니다.
학생운동은 발전이 없었다.
독재정권 시절 민주화라는 커다란 대승적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운동권에서 외치던 다소 생경한 통일담론까지 용인될 수 있었지만
(명목상)민주화가 달성된 상태에서 그들의 외침은 공허했다.
그렇게 문민정부가 지나가고,
IMF가 닥쳐오고,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고, 노무현 정부가 들어선다.
IMF라는 괴물을 맞이한 20대, 대학생들은 빠르게 체제순응적으로 변해갔다.
그들이 원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었다.
좀 더 민주적인 사회? 평화통일? 다 좋다 이거다.
그런데 그것도 먼저 우리가 먹고 산 다음에야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니던가??
일부 386세대는 말한다.
우리는 니들 때 안 그랬다고.
우리는 대학뱃지 버리고 노동 현장에 뛰어들었다고.
맞는 말이다. 당신들 세대는 우리 나이 때 이러지 않았었다.
그 좋은 대학뱃지 던져버리고 공장에 위장 취업해서 노동자들의 의식화를 선도했다.
지방대 전대협 의장을 지키겠다고 '서울대 의대생'이 사수대로 나섰던.. 그런 세대였다.
그런데 과연 그들이 정말로 모든 걸 던져버리고 민주화에 한 몸 바쳤던 걸까?
매일 데모하고 F학점을 밥먹듯이 받아도 한국 역사상 최고 호황기였던 그 시대에
당신들은 정말로 '모든 걸 던져버리고' 민주화에 한 몸 바쳤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낮에는 민주화 투쟁하고 밤에는 전두환 정권의 유화정책의 일환 중 하나였던
에로영화나 보면서 킬킬대던 아이러니한 그 모습 속에서 당신들은 정말로
모든 걸 바쳐서 민주화를 이룩해냈다고 떳떳이 말할 수 있는가?
결코 그들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나를 비롯한 지금의 수많은 20대 역시 모두 그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
아니 어찌 현 시대를 살아가는 국민들 중 그들에게 빚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그들이 광주에 졌던 빚처럼 우리 역시 당신네들에게 갚지 못할 빚이 있음은 자명하다.
다만 어줍잖은 우월의식에 빠져 현재의 20대를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지 말라는 소리다.
민주화는 시대적 조류였다.
분명히 다는 아니었겠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지금의 20대가
80년대로 돌아간다하더라도 그들 역시 민주화 투쟁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지금의 20대가 민주화의식과 사회비판정신 관련 세포가
결여됐기 때문에 이러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이 문제가 정말로 심각한 이유는 386세대의 심리적 우월감에
20대가 안주거리가 되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정말 심각한 건 지금의 20대들 역시 보수적인 사회가 만들어놓은 담론에
완전히 포섭되어버려 "우리는 원래 그런 존재니까"라고 체념하고
체제순응적인 인간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거짓말이라도 반복해서 들으면 진짜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학창시절부터 우리가 지켜봐 온 정치판은 '싸움장'이었다.
그곳에는 민주주의도 없었고, 단결도 없었고, 화합도 없었다.
항상 뉴스에서 국회를 비쳐줄 땐 반드시 개떼 싸움을 하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그런 개판5분전 국회라야만 뉴스꺼리가 되기 때문에
언론이 주목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그 어린 나이에 그런 걸 자각할 능력이 있었겠는가.
심지어 뉴스를 지켜보는 어른들도 그런다.
쯧쯧... 저 개새끼들.. 국회는 쓰레기통이여.
어떠한 주장과 신념도 고착되기 전인 그 시절에 우리는
어른들의 그런 말들을 들으며 자연히 '의식'이 형성되기에 이른다.
아.. 국회의원들은 다 나쁜 놈들이구나. 정치는 참 더러운 거구나.
바로 이것이다. 정치적 냉소주의..
냉소주의의 이면에 있는 보수세력의 헤게모니를 의식하기도 전에 정치는 머리 아프고
더러운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그것에 대해 거리를 두게 만들고 쓴웃음 짓게 만든다.
이 과정 중 그 어디에도 '민주적 의식'을 함양해 줄 수 있는,
즉 중립적 입장을 견지시켜 줄 수 있는 장치는 없다. 소수 진보적 여론은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로 거대언론에 잠식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자연스레 정치와 담을 쌓게 된 그들이 대학에 들어간다.
극소수의 몇몇 운동권 학생들을 제외하면 일부의 20대는 20살의 청춘과 젊음에 빠져들고,
일부는 대학에 오기까지 겪었던 그 지옥같은 시간을 똑같이 반복한다.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다시 반복된다.
이 틈 어디에도 '민주적 의식'을 함양해 줄 수 있는 장치는 없다.
그리고 우리는 가열차게 까인다.
누구에게? 진보와 보수를 자처하는 이들에게 말이다.
진보는 우리를 나라 걱정 안하는 정치에는 문외한인 멍청한 놈들로 낙인찍어 버리고,
보수는 우리를 능력도 안 되면서 눈만 높아서 대기업에 혈안이 되어
국가의 실업률이나 높이는 한심한 잉여인간 취급한다.
그 어디에 우리편이 있었던가? 이건 논쟁 자체가 불가능하다.
결국 20대는 사회적으로 불구자가 된다.
벼랑 끝에 몰린 우리는 우리가 정말 한심한 놈이고,
무능력한 놈이기 때문에 이 모든 욕을 먹는 거라 생각하며
아예 화를 낼 용기와 의지조차 잊어버린다.
이건 결코 20대가 뚜렷한 주관이나 자기 의지가 없어서가 아니다.
어느정도 상충되는 입장이 부딪치면서 파열음이라도 생겨야
난 이렇게 생각해, 난 저렇게 생각해라고 의식이 활성화될텐데
애초부터 양쪽 진영에서 한쪽을 향해 일방적으로 몰아붙여진 20대, 우리에게 주관은 없다..
그래서 이 책은 20대의 바이블이 됐다.
20대에 대한 위로는 둘째치고 처음으로 20대를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 책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굳이 '위로'가 필요한 건 아니었다.
우리를 바라보는 천편일률적인 시각이 아닌 다른 관점이 절실했다.
만에 하나 이 책이 우리를 가열차게 비판하는 논지를 가진 책이었을지라도
흥행은 되지 못했을 망정 나의 이런 생각은 동일하다.
하지만 이건 애초에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다.
이 책의 논조가 20대를 비판하는 책이었다면
기존의 관점들과 똑같은 말들의 돌림노래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로든 비판이든 기존과는 차별화된 시각이 필요했고,
그래서 이 '절망의 시대에 쓴 희망의 경제학'은 사회가 20대를 향한
서슬퍼런 칼날 중에서도 돋보일 수 있었고, 20대의 마음을 파고들 수 있었다.
리스트가 주창하고 장하준이 그의 저서에서 인용해 유명해진 '사다리 걷어차기'
개념은 굳이 국가 대 국가 간의 거시적인 측면에서만 유효한 이야기는 아니다.
바로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20대를 향한 기성세대의 대처방법에서 똑같이 적용되고 있다.
"386세대.. 정치학자들은 이 세대를 주로 80년대 군사독재와의 싸움이라는 관점에서
분석하는 반면, 경제학적인 관점에서 이 세대는 교복을 입지 않았을 뿐 아니라
사교육 체제에 편입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거의 유일한 세대였다. 일본의 68세대인
전공투 세대가 주류 사회에서 완전히 고립된 채 세대의 엘리트들이 가미가제 세대에 의해
완전히 거세된 뒤, 나머지 세대원들이 '덩어리'로 지칭되는 단카이 세대로
전락한 것에 비하면 우리나라 386세대의 성공은 매우 눈부시다"
멀리 갈 것도 없다. '교육' 측면에서만 살펴보자.
어떻게 80년대에 그 수많은 '일류 대학' 학생들이 민주화 투쟁을 할 수 있었을까?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이화여대 학생들이 어찌 '사회적 소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걸 던져가며 거리로 나올 수 있었을까?
하나의 독점적인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는 현 사회를 기준으로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기는 아예 불가능하다.
그때와 지금의 교육 정책은 아예 질적으로 달랐기 때문이다.
고액 과외는 현재 일류대에 들어가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고교 때는 물론 대원외고 - 서울대로 이어지는 엘리트 코스를 위해
무려 초등학생들까지 사교육의 바다에서 헤엄친다.
당연히 돈이 없으면 과외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상류층의 자제분들이 현 일류 대학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들이 자라오면서 우리집과 그 주변을 바라봐도 어디에도
비정규직을 연연하고 생계를 걱정하는 사람은 없다.
사회적 소수를 위한 자신의 희생은 뒷전이 된다.
(그들의 무관심을 비난하는 게 아니다. 이건 상류층의 보편적인 현상이다)
우석훈은 말한다.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은 '출발선을 갖게 하자'라는
'형평성'의 관점에서 사회적 합의를 찾고 움직이는 시스템"이라고 말이다.
"초기 자본주의는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주의라는 큰 복병을 만나게 되었고,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쳤는데, 이 위기를 극복하게 해 준것이 '형평성'이라는 것"
이라고 한다. 즉 국민들 입장에서는 "평등을 포기하는 대신 형평성이라는 보다
완화된 가치에 동의를 해준 셈"인데, 이러한 "형평성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가 교육"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서구적 자본주의 관점에서 살펴본 시각이지만
80년대 신군부 시절에도 어느정도 적용이 되는 이야기다.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80년 7월30일 '과외금지안'이 발표되었기 때문이다.
형평성을 실현하는 가장 중요한 장치인 교육이 제도적으로나마
온 국민에게 평등하게 작용할 수 있는 틀을 마련해 준 것이다.
다만 서구 자본주의와 80년 우리나라와의 차이점은
이 형평성이 '사회적 합의'가 아닌 '국가의 강제'로 인해 이루어졌단 점이다.
비록 과외금지안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불법과외가 성행했지만
어쨌건 어느정도 출발선상은 같아진 셈이다.
즉 돈이 많건 적건, 집안이 잘나가건 가난하건
오로지 '공교육'만으로 학생 누구나가 정당하게 경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과연 이러한 강제적 법의 실시로 '평등'이 달성될 수 있었을까?
대답은 그렇다 이다.
과외금지안 덕택에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었다.
대학생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물론 이는 과외금지안과 동시에 졸업정원제 실시로 인한
무분별한 대학의 팽창도 한 몫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찢어지게 가난한 시절을 보내왔던 그들이
대학에 와서 만난 마르크스와 레닌, 스탈린과 주체이론은
'나같이 가난한 사람들도 인간 대접 받고,
모든 사람이 평등한 사회가 올 수도 있구나'라는 신념을 심어주게 되었고,
이는 곧 전두환 독재정치에 항거하고
미국의 신제국주의에 분노하는 '투사'를 잉태시켰던 것이다.
현 사회의 사교육의 팽창 원인이 꼭 기성세대의 부모들에게 있는 것만은 결코 아니다.
내 새끼 잘 되길 바라는 부모의 마음은 다 똑같지 않은가?
정글에 내던져진 내 새끼가 최소한 살아남으려면 남들 하는 것 만큼은 해야되겠고,
이왕이면 좋은 대학 가는 게 좋을 것 같고, 그러다보니 경쟁적으로 사교육은 팽창해버렸다.
(물론 그 이면에는 부모들의 교육열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권력자들의 음모가 존재한다)
사교육 경쟁과 입시지옥으로 만든 사회의 작금의 실태 모두를 386세대,
기성세대들에게 지울 순 없지만 동시에 그들은 결코 현 사회의
피폐화된 교육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비록 강압적인 법 집행이었다고는 하나 자신들은 사교육 없는 세상에서
열심히 공부해 '능력의 경쟁'만으로 일류 대학에 갈 수도 있었으면서
왜 당신들의 자식들은 사교육 속으로 가열차게 몰아 넣는 것인가?
"남들이 하니까 어쩔 수 없이"라는 말은 핑계는 될 수 있어도
결코 당신들을 합리화해주지는 못한다.
민주화라는 대의를 위해 '투사'가 된 그들은
어째서 자식 교육에 대해선 '투사'가 될 수 없었던 것일까?
모두가 잘 사는 평등한 세상'을 대학 새내기 때 접했던 그들은
어째서 자식 교육에 관한 한 평등을 외칠 수 없었던 것일까?
"이미 30대 중반에 자신들의 대변인을 정치조직의 정점에 올린 386세대는
자신들의 목소리를 반영시킬 수 있는 사회적 장치와 흔들리지 않는 단결력 등
세대 간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해방 후 그 어느 세대보다
강력한 보호장치를 가졌던 세대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68세대와 달리
386의 자기 결집은 사회에 대한 긍정적 효과를 만들어 다음 세대에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진화하지 못했다"
우석훈의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386세대는 대의제 민주주의 체제 내에서 발전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표본이 되었다.
이 말인 즉슨, 해당 세대 각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치적 소통수단이
'정당'이 될 수밖에 없는 대의제 민주주의에서 그들 세대는 자신들의 동료들이
'민주화 투사'라는 영광을 등에 엎고 정계에 진출한 덕택에 어찌보면 우리나라
사상 최초로 자신들의 목소리를 정치적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훌륭한 무기를 가진 셈이었다.
물론 세대 간 입장에서 전체를 묶어버린 과도한 일반화일 수 있다.
결코 386세대의 정치인들이 그들 세대들의 모든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는 보장은 없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치는 특별한 사람들만의 것'이라고 지금까지
생각해왔던 보편적 국민들의 시각에서 볼 때, '거리의 투사'였던 386세대들의 정계 진출은
수십년간 지속되어 온 정치 엘리트가 세워놓은 난공불락의 거대한 벽을 깨뜨리고
비로소 정치가 '현실'로 다가왔던 일종의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이것은 한국의 그 어느 세대도 이룩하지 못한 것이었다.
정치 혁명이라 불리워도 부족하지 않을 386세대의 정계 진출은 그러나 처참히 실패했다.
국회의원 개개인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물질적으로는 어쩌면 성공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권력의 달콤한 맛을 본 그들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체제에 순응해버렸고,
그들에게 '피끓는 청춘의 시대'에 그들이 꿈꾸던 혁명적 개혁은 바라지 않았더라도,
일말의 변화를 기대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감을 배반하며
정치적 냉소주의를 더욱 더 심화시켰다.
그러나 이것 뿐이면 어쩌면 다행이었을 지도 모른다.
386세대의 정치적 실패는 냉소주의의 심화와 더불어
20대의 사회적 잠식에 있어서 매우 큰 역할을 한다.
"사교육에 의한 지적소화력 상실의 집단 경험을 갖고 있지 않은 이 세대(386세대)는
포디즘 이후에 새로 생겨날 변화들에 대해 오히려 현재 20대보다 훨씬 높은 적응 능력을
갖고 있다. 개별적 능력과 세대 내 단결이라는 두 가지 장치를 모두 가지고 있는 이 세대가
향후 세대 내 경쟁을 점차 완화시키고, 세대 간 경쟁을 통해 다음 세대에게 돌아갈 몫을
선점할 것이라는 점은 자명하다. (...) 사회적 연공서열제와 종신고용제가 깨어진 지금
386 세대는 다음 세대를 돌보아야 할 아무런 의무도 없다."
제조업이 쇠퇴하고 서비스업이 발달하면서 자본과 노동의 유연성이 극대화된,
소위 말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개인의 창의력은 곧 국가 경쟁력이다.
답은 쉽다. 개개인의 창의적 능력을 발전시키면 나라는 발전한다.
그 과정이 문제인 것이다. 지금 행하고 있는 오로지 일류 대학만을 바라보는
사교육 속에 창의력은 존재할 수 없다. 자유로운 환경과 다독과 많은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창의력은 주입식 교육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영국 노동당이 80년대 내내 나라를 지배했던 대처리즘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대안은 바로 '교육'이었다.
전세계 좌파의 전설적인 존재인 스웨덴의 사회민주주의가
신자유주의 폭풍 속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교육'이었다.
미국의 오바마가 의료보험 개혁과 함께 사활을 걸고 있는 것도 바로 '교육'이다.
그들이 말하는 '교육'은 누구나가 평등한 출발선에서
자신의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잠재력을 이끌어내는 것이다.
어찌보면 신자유주의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좌파적 교리가 교육일 수밖에 없는
이 시점에서 한국은 가열차게 정반대로 달리고 있다.
워낙에 보수기득권층이 득세한 한국 특유의 정치적 분위기도 한 원인이겠지만
주류에서 '진보'라고 자처하는 이들, 즉 386세대의 의원들조차 교육 개혁에 있어선
집권 세력 앞에서 작아진다. 물론 우석훈의 위의 주장은 지나치게 부정적인 시각으로
본 면이 없잖이 있지만, 어쨌건 386세대들을 대표하는 386세대 의원들이 자신들이
누렸던만큼 충분히 사회적 환원을 정치적으로 하지 않고 있는 점은 분명 문제이다.
그들은 언제나 '독재'라는 말을 앞세워 자신들이 누렸던
특권들조차 '잘라내야 할 독재의 잔재'로 취급하고 있다
"현재의 20대가 맞게 된 사회적 고통의 원인은 20대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본질적으로 경제 구조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는데, 직접적인 요인 두 가지는
한국 경제 영광의 30년 동안 화려하게 활동했던 중소기업이 지난 5년 동안
붕괴한 것과 사회적으로 경제적 약자의 탈출구였던 자영업의 경제적 기반이
사라지게 된 것을 들 수 있다."
이 말은 이 책의 핵심이자, 이 책이 히트를 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우석훈은 결코 나약한 20대 자신들을 문제의 원인으로 꼽지 않는다.
본질적인 경제 구조의 변화가 그 문제인 것이다.
비록 우석훈의 말처럼 지난 30년동안 중소기업이 화려하게 활동한 적은 없지만
(박정희 전두환의 재벌 정책 아래 중소기업은 결코 단 한번도 '화려한' 적은 없었다)
현재에 와서 중소기업의 현실이 더욱더 악화된 것은 사실이고,
경제적 약자의 탈출구였던 자영업은 그 기반을 잃었다.
이제 더이상 출구가 없는 것이다. 공무원 아니면 대기업이다.
여기서 낙오하면 더이상 갈 데가 없다.
그래서 우리의 20대들은 토익책을 손에 쥐고,
임용고시에 행정고시에 파뭍혀 도서관에 틀어박혀 청춘을 학살한다.
여기에 사회적 의식화가 개입될 여지는 어디도 없다.
(여기에 단 하나의 예외가 있긴 했다. 그것은 바로 2008년 6월의 촛불집회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적 자의식을 잃어버리고
자신의 주관과 가치판단의 기준을 잃어버린다.
오직 자기자신을 상품화하는 자기소개서만이 사회와의 유일한 소통기구인 셈이다.
사회적 자폐아가 되어버린 우리를 기성세대는 열심히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자신들의 헤게모니에 들어맞지 않는 '경제 구조의 변화'는 거론하지 않은 채
이렇게도 높은 실업률과 대기업에 목매는 20대들을 '개개인의 문제'로 치환한다.
"능력이 없으니까 그런거야. 능력만 있어봐" 혹은 "눈이 너무 높구나? 네 주제에"
가치판단의 능력이 결여된, 의식화가 전무한 20대들에게
이 말은 한 톨의 필터링도 거치지 않은 채 가슴에 박힌다.
결론은? 경쟁의 심화다.
우리 20대는 20대라는 세대간 동질감이 아니라 차라리 밟고 올라가야 하는 적이다.
이보다 더 잔인한 게 있을까?
더 잔인한 건 이처럼 지극히 보수적인 프레임을 진보개혁세력에서조차
아무런 자각없이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그들은 이것도 모자라서 20대를 '적' 혹은 '패배자'로 은연 중에 규정한다.
그 절정이 바로 2008년 6월의 촛불집회였다.
2008년의 뜨거웠던 여름은 중,고등학생들의 고사리같은 손에서 시작됐다.
보수진영은 경악했고, 진보진영은 감동에 눈물을 흘렸다.
4.19혁명의 재림이네 뭐네 하면서 한껏 그들을 비행기 태운다.
여기서 20대는 철저히 이용당한다.
촛불시위가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비록 그 시작은 10대들이었지만
20대를 비롯한 전국에서의 범국민적인 참여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그 모든 진영에서는 '10대의 참여'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20대는 '386세대(또 386이다!)의 자식 세대'인
10대의 성숙한 사회의식을 돋보이게 하기위해 기꺼이 바보가 된다.
진보진영은 너나 할 것 없이 촛불시위에 감동을 받았단다.
10대들이 거리로 뛰쳐나온 건 그야말로 '혁명'이란다.
지금까지 취업과 토익에 미친 20대를 보면서
느꼈던 절망이 10대를 보면서 희망으로 바뀌었단다.
지금까지 진보개혁세력의 '고립된' 운동이 미처 이루지 못했던
중요한 부분을 촛불 시위, 그것도 10대를 통해 느꼈단다.
진보세력이 지금껏 취업에 눈 먼 20대들을 향해서는
결코 보이지 않던 '눈물'이 10대들이 치켜든 촛불 하나에 뚝뚝 떨어졌다.
그렇게.... 20대는 10대의 심리적 우월감을 위한
도구로 희생됨과 동시에 10대 그리고 30~40대와 단절된다.
이쯤되면 정말 서러워서라도 20대는 뭉쳐야된다.
똑같은 세상에서 태어났는데 왜 우리만 이렇게
사회적으로 병신 취급을 받아야 하는걸까?
그러나 이러한 분노를 느끼기에는 우리는 너무 사회화 되었다.
아니, 분노를 느끼는 것까지는 모든 20대들이
동일할 지 몰라도 결코 뛰쳐나올 순 없다.
어쩌면 우리는 은근히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내 옆의 경쟁자가 사회에서 이탈해 불구자가 되기를..
그래서 우리 20대는 슬프다.
"지금 88만원 세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들만의 바리케이트와
그들이 한 발이라도 자신의 삶을 개선키기기 위해 필요한 짱돌이지,
토플이나 GRE점수가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 책을 보면서
누구나 가슴 속에 공통적으로 분노와 울분을 느낄 수는 있지만 행동할 수는 없다.
이미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보수진영이 만들어 놓은
제도에 아무런 자각도 없이 너무 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88만원 세대>를 보며 눈물을 흘리는 20대..
하지만 금새 눈물을 닦고 코 한번 팽하고 풀고 다시 토익책을 움켜잡는 20대..
마음 속에 있는 울분과 분노를 어떻게 다스리고
제어하고 폭발해야 하는지 모르는 20대..
그렇기 때문에 다시 전쟁터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20대..
결국 바뀌는 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단지 이런 걸 원한 것이다.
절대로 바뀌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우리가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누군가가 우리를 향한 '적대적 시선'을 버리고 따뜻한 시선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이런 걸 바란 것이다.
그래야 내 옆의 경쟁자를 밟고 올라가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조금은 덜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내가 지금 이렇게 하는 건 내가 돈과 명예에 환장한
속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 구조'때문이라고 탓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라도 합리화하지 않으면 우리의 20대들은 온통 경쟁자와
전쟁터인 피튀기는 이 사회에서 정말로 질식해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때부터 입시지옥의 전쟁터에서 내 옆의 짝꿍에게 총구를 겨누고
피를 철철 흘린 채로 올라온 대학에서조차 학점의 전쟁터에서 청춘을 잃어버리고,
내 동기는, 내 선배는, 내 후배는 내가 밟고 올라가야 할 적이 되어버린 이 시대에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를 연연하면서 대기업과 공무원만을 꿈꾸는 절망적인 현실속에서
전쟁터의 살인광이 되어버린 나에게 "그게 네 잘못만은 아니야"라고 보듬어주는
이 책 한권이라도 없었다면 우리 20대는... 너무 암울하고 서글픈 세대가 되지 않았을까..
사회가 만들어 낸 수많은 20대 괴물들의 이면에 있는
피맺힌 절규를 우리 사회는 언제쯤 귀 기울여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