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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의 역할 - 장하준이 제시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발전과 진보의 경제학'
장하준 지음, 황해선, 이종태 옮김 / 부키 / 2006년 11월
평점 :
나의 정치적 관점이나 경제를 바라보는 시선이 어느 정도
일관되게 정립되기 전, 그러니까 2005년 어느 날 즈음이었을꺼다.
그때 장하준의 대담집 [쾌도난마 한국경제]를 보았다.
이 책을 통해 느꼈던 충격에 가까운 신선함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그저 막연하게 신자유주의는 보수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사회를 좀먹는 수탈 체제라는
단편적인 지식만을 갖고 있던 나에게 이 책에 실려있던 장하준의 주옥같은 말들은
한나라당은 나쁜 놈들, 민주당은 덜 나쁜 놈들이라는 편협한 이분법에 사로잡혀있던
짧고도 무지한 정치적 관점에서 벗어나는 데에도 어느정도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이후 내가 두번째로 접했던 그의 책은 [나쁜 사마리아인들]이었다.
이 책은 70년대 리영희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그랬고,
80년대 한길사의 [해방전후사의 인식]이 그랬던 것처럼,
이후 2000년대의 젊은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회과학 서적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을 통해 한국의 경제체제를 배웠고,
이 책을 통해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보았으며,
이 책을 통해 신제국주의의 끔찍한 현실을 보았다.
[쾌도난마 한국경제]는 예외이지만 [나쁜 사마리아인들]을 먼저 접했건,
[사다리 걷어차기]를 먼저 접했건, 아니면 이 책 [국가의 역할]을 먼저 접했건
장하준의 경제에 관한 세 권의 저서를 모두 읽은 사람들은 아마 느낄 것이다.
장하준은 모든 책에서 거의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저서들이 단순히 '우려먹기'라고만 생각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대한민국사에서는 거의 유래 없을 정도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경제학자여서도 아니고,
제도경제학이라는 경제학의 한 분야에서 권위 있는 학자여서도 아니다.
바로 '학자'라는 세상에서 가장 딱딱한 위치에서 자신의 전문적인 지식을
단순한 '지식의 과시'에 머무르지 않으면서 끊임없이 일반 독자들에게
이해하기 쉽도록 친숙하게 풀어가는 대중친화적인 모습.
덧붙여 학자적 위상이나 금전적으로, 또는 같은 경제학계 내에서도 편한 길,
즉 親신자유주의자 라는 편한 길을 제쳐두고 어렵고 힘든 외길로 가면서도
꾸준히 자신의 이론적 무기를 강화해가고 있는 모습.
이 정도라면 그의 '우려먹기'에 대한 면죄부는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우려먹기는 장하준이 아니라 출판사 쪽에 그 책임이 있다.
장하준은 글을 쓸 뿐이다. 그저 출판사에서 똑같은 내용의 책들을
계속해서 한국어로 ‘번역‘해 출판할 뿐이지.)
신자유주의에 대해 파헤치고 있는 장하준의 세 권의 저서에 대해
간단하게 분류를 한다면 [사다리 걷어차기]가 선진국들이 추구하는 신자유주의를
그들의 역사적인 경제 발전 양상과 비교하며 모순을 파헤치는 데 초첨이 맞추어져 있다면
(이는 리스트가 말한 '사다리 걷어차기'라는 단 한마디로 압축된다)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성경에 나오는 사마리아인들에 빗대어
신자유주의의 폐단을 집어보는 대중 입문서라고 할 수 있고,
바로 이 [국가의 역할]은 장하준의 경제학 관점의
총정리판이라고 할 수 있다.(따라서 비교적 두 저서에 비해 전문적이다)
제목부터가 그런 느낌이 풍기지만 이 책은 그리 만만하게 볼 책이 아니다.
두께도 그렇거니와 [나쁜 사마리아인들] 정도를 예상하고
책을 펼쳐본다면 약간의 머리 아픔은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찌됐건 결론은 하나다.
강대국들이 내놓는 '유일한 답'인 신자유주의가 반드시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니 정답이 아닌 수준 정도가 아니라 아예 근본적으로 틀린 답이라는 사실이다.
장하준은 아예 처음부터 시원스레 답을 제시한다.
"신자유주의에 맞서 내세울만한 실질적 대안이 있는가?
그 대안은 이미 존재해왔다. 1980년대 이전 상당수 개발도상국이
추진했던 수입 대체 산업화(ISI) 정책이나 한국, 일본, 대만 등의 '동아시아 모델',
중국이 지난 십 수년 간 형성해 온 독특한 자본주의, 사회주의 혼합체제 등이다.
그러나 이런 대안적 모델들에는 고유의 문제점이 존재한다.
게다가 더 중요한 문제는 이 모델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그리고 실천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정통 교리에 도전할 만한
강고한 이론적 기반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답은 이것이다.
신자유주의에 맞설만한 대안은 얼마든지 존재한다.
멀리 볼 필요도 없다. 우리나라의 60~70년대를 살펴보자.
흔히들 우리 경제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한강의 기적'이라는 용어는
그 눈부신 경제 성장에 소비된 엄청난 사회적 비용을 깡그리 무시하는
역겨운 단어임에는 틀림없지만, 오로지 경제적 수치로만 보자면
당시 경제는 매년마다 문자그대로 기적적으로 발전했던 시기였다.
이토록 단시간 내에 고속으로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지금 강대국들이 말하고 있는 신자유주의의 근본적 이론과는
전면적으로 배치되는 국가주도하의 경제 체제 때문이었다.
이것은 비단 한국에 국한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고전학파 시절부터 언제나 경제의 가장 기본 명제는 '경제적 자유주의'였지만
역사적으로 서구 열강들이 경제적 자유주의만을 추구해서
부를 창출했던 사례는 단 한 건도 없었다.
보호무역주의로 어느정도 내수를 탄탄히 다져놓은 이후에야
야금야금 개방을 시도했고, 개방 이후에 조금이라도 자국의 경제에 피해가
간다고 생각되면 또 다시 문을 굳건히 걸어 잠그는 방식으로 이끌어 왔던 것이다.
자신들의 과거를 의도적으로 망각한 이들은 이제 자신들이 어떻게 해서
지금까지 왔는지는 까맣게 잊어버린 듯 오로지 개방만이 살 길이라며
개발도상국들에게 '전면 개방'을 외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사다리 걷어차기다.
그렇다면 선진국들은 왜 이렇게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는 것일까?
장하준은 그 이유를 신자유주의 속에 숨어 있는 '이데올로기'에 있다고 본다.
"반개입주의 이론들의 공통점은 경제문제의 '기술적' 측면보다
'정치적' 측면을 더 강조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신자유주의 이론들은 개입주의의 정치적 기반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윤리, 정의, 권력 등의 쟁점들을 경제학의 영역으로 복귀시켰다."
신자유주의는 경제학 적인 측면에서는 매우 '옳은 말'로 점철된 이론이다.
하지만 실제 경제란 무엇인가? 정치나 환경 등
우리 사회의 전 분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총체적인 집합체이다.
원론에 아무리 부합하는 이론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실제에 적용될 때는 수많은 변수로 인해 예측이 불가능하다.
신자유주의의 가장 큰 문제점이 바로 그것이다.
결코 사회 총체적인 실제 경제상에서는 성공할 수 없는 이론.
이론을 실제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부작용을 무마하기 위해,
즉 신자유주의가 간과하고 있는 이론과 현실과의 괴리감을 극복하기 위해
신자유주의자들은 현실과 이론 사이의 텅 빈 공간 안에 '정치'라는 요소를 집어넣는다.
현실 세계에서 정치란 머리 아픈 일이지만 신자유주의를 현실에 도입할 때
신자유주의자들이 써먹는 정치는 그리 머리 아픈 것이 아니다.
일단 국가, 즉 정부를 적으로 치환한다. 따지고 보면 이것이 전부이다.
자유시장은 서로 간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만
인위적인 국가의 간섭은 경제에 해악이 되는 것이다.
왜 현재 경제가 이렇게 엉망진창인것인가?
이유는 하나, 국가가 경제에 과도하게 개입했기 때문이다.
즉 우리(신자유주의자)의 목표는 국가의 역할을
'야경 수준'으로 후퇴시켜 경제적 효율을 최대한 끌어올리는 것 이다.
지나치게 단순하다.
그런데 국가의 역할을 축소하는 것이 어떻게 정치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일 수가 있냐고?
바로 이 신자유주의의 지나친 단순함에 그 답이 있다.
"대다수 신자유주의 이론은 인간행위에서의 동기와 복잡성, 현대 정치 형태의 복잡성,
정책 형성 및 수행과정에서 정당화의 중요성, 복잡한 현대 경제에서 집단적 관리의
필연성 등을 고려하지 않는다. 정치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극단적으로 단순한
개념은 그들의 주장을 기껏해야 남을 오도하는 것으로,
최악의 경우에는 사기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 행위의 수많은 인과 관계와 복잡성을 신자유주의자들은
"국가는 해악" 이라는 명제 아래 단순화 시킨다.
여기서 신자유주의 이론과 실제의 괴리를 채워주기 위해
도입되어진 '정치'는 단순히 국가의 역할에 대해
선악의 이분법만을 강요하는 극히 한정적인 역할로 규정된다.
결국 신자유주의 아래에서 정치란 놈은 경제에 예속되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의문은 남는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누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다 알 수 있는
이런 허술한 주장이 설마 먹힐거라고 진짜 믿고 있는 것일까?
아니, 정녕 그들은 국가가 경제 일반에 관한 모든 악의 근원이고
국가의 개입만 없으면 경제가 발전될 거라고 믿고 있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경제학자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한심하고 무모한 주장을 하는 것일까.
"만약 신자유주의자들이 '최소 국가' 수준을 제외한 모든 집단적 행위를
사실상 금지하는 방향으로 법률을 개정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면
지나치게 천진한 것이고, 그렇게 믿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런 주장을 끊임없이
내놓는다면, 그것은 그들이 대중적 담론 뒤에 은밀한 정치적 의제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장하준은 비록 이렇게 조심스레 말했지만 뭐 숨길 것 있나?
까놓고 말해서 그들은 노동조합이 지금처럼 활성화되지 않고
진보 진영이 이루어 놓은 노동자의 권익, 나아가 사회 복지로 이룩한 부의 재분배 등
수많은 눈부신 성과들이 이룩되기 이전인 그 시대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다.
신자유주의에 숨겨진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의도는
더이상 비밀이나 음모가 아니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지적인 황금시대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유효한 통찰로부터 이데올로기적 장막을 벗겨낸 뒤,
더욱 넓고 객관적인 지식의 틀로 통합시키는 새로운 종합이 우리의 목표이다"
이쯤에서 장하준은 신자유주의의 기원에 대해 살펴본다.
신자유주의는 왜 갑자기 튀어나왔나?
흔히들 이야기하는 자본주의의 황금시대는 1929년 대공황 이후
케인스주의가 나오면서부터 석유파동 등을 비롯 전세계적인
경제적 악재와 산업 위기가 겹친 1970년대까지를 일컫는다.
신자유주의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부터 말하는 '신자유주의'는 과거에는 수많은 독점적 권력을 누렸지만
사회주의와 경쟁하며, 혹은 케인스주의의 핵심 원칙에 따라 사회적 부를
'복지'라는 이름으로 재분배 당할 수밖에 없었던 선진국들의 상위층의 입장과
완전히 동일하다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 것이다)
70년대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에서 시작된 신자유주의자들은
현재(1970년대)의 경제 위기의 모든 원인을 '제도적 경직성'에서 찾았다.
즉 "모든 규칙과 제도들은 시장의 순조로운 작동을 방해하는 경직성이고,
이같은 제도적 경직성은 이익집단의 압력에 굴복한 국가의 개입으로 인해
발생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제도적 경직성은 생산요소가 수익성이 더 높은 부문으로 이동하는 것을
차단하기 때문에 국가 개입 및 각종 제도적 경직성 정도가 약한 국가일수록
경제성장과 산업구조조정에서 보다 나은 실적을 거둔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국가의 여러 경제적 제도들이 경제를 파탄낸다는 것이다.
당시에 이런 주장이 경제학계에서 어느 정도 반향을 일으켰는지는 모르겠지만
숨어있는 이데올로기의 든든한 재정적 지원때문인지는 몰라도 어쨌거나
신자유주의는 70년대 이래로 지금까지 살아남았을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들에게 무차별 융단폭격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지나치게 단순한 이론의 문제점은
조금만 생각해도 금방 간파할 수 있으며, 한 나라의 경제에서
국가의 역할이 차지하는 중요성 역시 기본적인 경제적 지식만 있어도 알 수 있다.
장하준은 이에 대해 아주 시원스레 정리해준다.
"현대 경제에서는 생산 요소들이 소유권에서는 분산되어 있지만
사용에서는 상호의존적이다. 이런 경제에서 효율적으로 구조변동을
추진하려면, 해당 경제의 여러 부분에서 나타나는 각각의 변동을 조절할 필요가 있다.
각각의 개별 부문을 통제하는 주체들의 체제 전체를 보는 비젼의 결여나
다른 관련 경제 주체들의 행위의 불확실성을 이유로 우왕좌왕 하다보면
구조변동에 착수하거나 달성이 불가능할 수 있는 만큼,
경제 전반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일정한 경제 주체가
중심적 위치에서 조절 역할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구조 변동이란 단순히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선택모델 중
하나를 고르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즉 선택모델 그 자체를 수립하는
미래를 위한 비전을 제공하는 것으로 국가는 이러한 비젼 제공에
중심적 경제 주체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새로운 조절 구조의 수립에는 반드시 국가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집권 세력이 개입을 원하지 않는 경우에도 국가의 개입은 반드시 필요한데
그 이유는"단지 국가만이 새로운 소유권과 새로운 권력 관계를
법제화할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국가는 조절 구도를 제도적으로 현실화하고,
그 과정에서 국가는 충분히 합리적이지 못한 경제 주체들이
짧은 기간 내에 새로운 조직, 새로운 생산과정,
새로운 계약 과정들을 성취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즉, 국가의 개입은 경제 주체들의 입장에서는
'새로운 세계'와 접촉하는 과정에 필요한 정보 부담을 덜게 되는 셈이다.
국가의 개입 필요성에 대해 이보다 더 설득력있는 주장이 또 있을까?
실제로 이같은 국가의 개입으로 인해 전 세계의 수많은 국가들은
자본주의의 황금기에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비록 사회적으로는 그 부당함과 비도덕성으로 인해 많은 문제가 되긴했어도
경제적 측면 만을 놓고 봤을 때 한국과 대만, 특히 한국의 경우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아니 정부의 전폭적인 '계획' 아래 기업들은
어떤 위험에 대한 부담도 없이 마음껏 사업을 펼칠 수 있었고,
이와 관련된 리스크 전부를 국가가 커버하면서 눈부신 성장을 했다.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는 경제에 대한 국가의 역할이 비정상적으로
큰 사례에 속하지만 어찌됐건 이러한 국가의 주도적 개입은 한국을
일본 정도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나라도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룩한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경제발전의 이면에 존재하던 우리나라 노동자들의
극심한 인권 탄압은 '국가의 갈등관리'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것 역시 '국가의 역할'에 해당된다. 국가의 역할은 이처럼 신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경제적 효율성만을 갉아먹는 단편적인 역할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총체적으로 밀접한 영향을 끼치는 존재이다.
따라서 만에 하나 그들의 주장처럼 국가의 역할을 축소해서 국가가 '야경국가' 수준에
머무른다면 산업 활동 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갈등 관계에 대한 중재자의 역할은
결코 어떤 것도 국가를 대신할 수 없을 것이다)
장하준의 분류에 따르면 박정희의 군사정권 시절 우리나라는 '
산업정책국가'에 해당되는데, 산업정책국가에서는 '권위주의'로 표현되는 우익 연합이
국가를 통치했고, 정책결정과정은 관료체제가 지배했다.
구조변동을 주도한 주요 도구는 산업정책이었는데,
이는 정확한 목표를 겨냥한 다음 강압적으로 설정하고 수행되었다.
산업정책국가의 비전은 자국의 산업구조를 고기술과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빠르게 이행시키는 것이었는데,
그 과정에서 국가는 노동자들을 배제하고 경영자 조직과는 밀접하게 협의했다.
이러한 국가에서 갈등 관리 방법은 구조변동으로 인한 피해 집단의 저항을
국가의 강력한 힘으로 진압하는 한편, 효율적인 제조업 부문의 자원을 이용해
피해집단 중 일부를 매수하는 것 등이었다.
이것은 곧 암울했던 그 시절 우리나라의 이야기였다.
70년 전태일의 분신자살 이후 노동자들의 집단 저항은 공권력이 깔아 뭉개버렸고,
노동자의 최소한의 인권만이라도 보장해 달라던 민주노조의 외침은
어용노조와 정권의 돈에 매수된 수뇌부들에게 짓밟혔다.
국가의 눈부신 경제 성장은 그들을 노동자가 아닌
'근로자'로서, 인격체를 상실한 하나의 '노동기계'로 전락시켰다.
이러한 억압적인 국가의 갈등 관리와 반대되는 유형은
'사회적 조합주의' 형태의 국가의 갈등 관리 시스템이다.
여기서 국가 기구는 주로 '사회민주주의적 연합'에 의해 점유되었고,
중앙집권화된 노조와 경영자 연합이 정책 형성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수행했으며,
구조변동의 주요도구는 적극적인 노동시장 개입과 결합된 거시정책이었다.
사회적 조합주의 형태의 갈등관리 시스템에 의해 발전해 간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조직화된 노동, 조직화된 자본, 국가 간의 3자 협상 체제에
바탕을 두고 갈등의 실마리를 풀어갔으며, 이러한 시스템이 구축될 수 있었던
근본적 원인은 국가가 고도로 조직화된 노동-고도로 조직화된 자본 간의
계급 타협에 따른 사회민주주주의적 헤게모니 하에 있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이들 국가들은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에 비해 완전 고용과 소득 평등,
그 결과 확보되는 사회적 평화를 보존하기 위해 구조조정의 속도를 늦추는 것을 선호했다.
이러한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많은 비용이 들지만 장기적으로는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구조조정이 실업과 일자리 소멸, 생활 수준의 급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었고, 따라서 구조조정에 대한 저항이
현저히 줄어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산업정책 국가'와 '사회적조합주의 국가'는 갈등 관리 시스템에서
현저히 차이가 나지만, 공통점은 존재한다. 산업화, 구조변동 등
사회적 목표에 헌신적으로 봉사한 정치 엘리트 및 관료 엘리트의 존재가 그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동시에 두 유형의 국가 모두에게 독이 되었고,
신자유주의가 성장할 수 있는 하나의 커다란 요인이 되었다.
"신자유주의의 반격은 후생경제학의 전성기에 횡행했던,
국가의 역할에 대한 기술관료적 관점이 지닌 기본적 문제점 등을 드러냈는데,
이는 정치학을 다시 경제학과 융합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제도경제학파인 장하준은 책의 전반에 걸쳐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서
제도경제학을 제안하고 있는데, 신자유주의자들이 기존 후생경제학을 파괴하기 위해
관료적 관점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정치학을 다시금 경제학과 융합시키며 제도학파들의 핵심 주장,
즉 "어떤 시장이든, 누가 어떤 조건으로 참여하느냐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시장이든 궁극적으로 자유로울 순 없다"라는 이론의 초석을
깔아주고 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의 탈출구를 찾고 있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정치경제학' 논의에 공공연하게 참여한 것이
'제도주의'적 비판으로 이어지는 관문을 열어 젖혔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마치 자신이 구세주라도 된 것처럼 자신만만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여러 가지 주장들을 전개하고 있고, 그 덕분에 사람들은 신자유주의가 일관된 내용과
명백한 결론을 가진 이론이라고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이 같은 대중적 인상과는 달리
신자유주의 독트린은 사실 매우 이질적이고 내적으로 상반된 요소들이
난마처럼 얽힌 지적체계이다"
우리가 후생경제학이라든지, 장하준이 제시하는 제도경제학 등과 같이
신자유주의의 대척점에 있는 다른 경제학 이론들이
'대안'처럼 느껴지지 않은 진정한 이유는 바로 이것이 아닐까?
앞서 나는 신자유주의를 '허술한 이론'이라고 칭했지만,
사실 그렇기 때문에 이것만큼 명확한 이론 또한 없다.
"국가는 경제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이론의 전부이다.
신자유주의에 힘을 실어준 가장 큰 요소는 아마 '단순함'이 아닐까 싶다.
장하준은 신자유주의의 핵심을 이 한 문장으로 간파한다.
"신자유주의 독트린 배후에 있는 주요한 가정은 정치가 '분파적 이익'때문에
시장 시스템의 합리성을 왜곡하는 만큼 시장에서 정치를 축출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신자유주의자들의 가장 큰 무기는 단순함과 동시에 '자기 포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들은 구세주를 자처한다. 작금의 경제 위기는 관료제, 즉 국가의 부패에 따른 것이다.
국가는 정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따라서 부패는 정치와 연관되어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탈정치화'를 추구한다. 바로 부패를 근절하기 위해서이다.
절대악인 부패를 근절시키기 위해 정치를 배제하자는 신자유주의자.
참으로 멋진 자기포장술이다.
하지만, 정치는 곧 부패라는 그들의 고정관념은 차치하고라도
그들이 추구하는 경제적 합리성은 결국
제도적 구조와의 관계 속에서만 유의미하게 정의할 수 있다.
장하준은 "제도적 구조 그 자체가 정치의 산물"이라고 이야기한다.
또한 그들이 그렇게 주장하는 탈정치화는 결국 "정치가 정당성을 유지하며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을 좁히게 되고, 이 같은 상황에서는 사회적 소외계층이
그나마의 정치적 영향력마저 더욱 축소되어 양극화의 심화"로 이어진다.
이쯤되면 뭔가 감이 잡히는 것이 있다. 그렇다.
'경제의 탈정치화'라는 신자유주의적 아젠다의 목표.
그것은 곧 "구자유주의 정치학을 위장한 형태로 부활시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구자유주의자들 역시 현재의 제도 체계에
'지분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에게 정치적 권력을 부여하는 것은 시장을 통해
달성된 사회적 결과나 제도 체계의 수정으로 귀결된다고 믿었다.
구자유주의자들은 그래서 민주주의에 공공연하게 반기를 쳐들었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민주주의 자체를 반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에 따라 신자유주의자들이 시도한 반민주주의 전술은 '정치 일반'에 반하는
주장을 제기하면서 외관상으로는 '산뢰할 수 없는 정치가들'의 영향력을 줄이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궁극적 목표는 '독립적인' 중앙은행이나
규제 당국에 대한 요구에서 보듯 민주적 통제 그 자체를 축소하자는 것이다"
처음에 신자유주의 이론에 내제되어 있던 이러한 정치적 의도를 알았을 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었는데 자극도 계속 받으면 익숙해진다고 했던가.
지금은 별 감정이 들지 않는다.
그래도 이렇게 나름대로 교묘하게 정치적 의도를 숨겨놓은 게 기특한(?) 마음까지 드니.
(이는 개인적인 정치적 냉소 때문이아니라 워낙 겉과 속이 다른
세상사를 접하다보니 익숙해진 무감각이라고나 할까)
신자유주의자들의 반격을 들어볼 차례이다.
그들은 한국과 대만같은 국가주도형 경제체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신자유주의자들은 자유방임정책에는 그다지 많은 제도적 선결조건이
필요하지 않아 어느 나라에서나 실행할 수 있지만, 동아시아의 대단히
개입적인 정책은 정책을 효율적으로 실행하기 위한
정교한 제도가 있어야만 시행된다고 주장한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 주장이다.
한국전쟁 후 모든 것이 초토화 된 한국에서 그 어떤 제도적 장치가 있었는가?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군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실제로
장면 정부에서 수립한 계획안을 토대로 진행된 것이라고 해도
그걸 감안한다 하더라도 정교한 제도를 구축하기에는
너무나도 단시간에 계획하고 실행한 것이었다.
한국의 군사정권 60~70년대의 경제적 성장에 그 어떤 정교한 제도적 장치가 있었는가?
사채동결과 통화개혁을 비롯한 수많은 비상식적이고 엉망진창의 제도 속에서도
한국 경제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해보고 안되면 말고" 식의 막무가내 정신,
즉 그 어떤 세력도 견제하지 못하던 전지전능한 국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장하준은 "그러나 시장의 올바른 기능을 위해서도 특정한 제도적 선결조건이 필요하고,
가령 아무리 자유무역정책이라도 계약법이나 무역금융제도, 효과적인 결제 매커니즘
같은 제도가 필요하다. 또한 자유방임정책은 산업내부의 경쟁을 규제하고 관리하는
산업별 단체나 카르텔이 없을 경우 초과 생산 설비나
도산같은 낭비를 유발할 수 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굳이 이러한 것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신자유주의를 도입한 개발도상국들은 거의 모두 경제적으로 실패했다.
지적재산권, 공기업 민영화와 같은 문제에서 제시하는
신자유주의자들의 시장친화적 주장은 이론적으로 따져볼 때
그리고 실제 경제체제에 대입해서 생각해 볼 때 거의 대부분의 주장이 모순투성이다.
결국 모든 시장은 본연을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 규제를 필요로 한다.
이것이 장하준이 이 책에서 주장하는 핵심이다.
어쩌면 신자유주의 이론에 대한 논의는 애초에 의미없는 짓일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자들의 목적은 완벽하고 철옹성같은 경제적 이론의 완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의 근본적 목적은 탈정치화, 다시 말해 과거로의 회귀에 있다.
이것은 일종의 추측일 뿐인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신자유주의 이론에 숨어 있는 정치적 의도를 감안하지 않는다면
이론 자체가 가지는 정당성은 단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차라리 배후에 숨어있는 음모(?)라도 있어야 그나마
신자유주의자들의 학자적 위치를 조금이나마 인정하는 길이 아닐까 싶다.
현재 시중에 나와 있는 신자유주의의 모순에 대해 되짚어보는 책들은 많지만
이 책이 그 중에서도 특별한 이유는 제도경제학이라는 자신의 이론적 무기를
굳이 들먹이지 않으면서도 신자유주의의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이론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조목조목 살펴본 흔치 않은 책이라는 점이 아닐까 싶다.
비록 전작들보다 이 책은 꽤 두껍고 페이지를 쉽사리 넘기기 어려운 내용들이 많다.
하지만 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을 때 장하준의 그 어떤 저서들보다
큰 울림을 받으리라 확신한다.
그러나 이러니 저러니 많은 얘길 주저리주저리 떠들어 봤자
우리가 아무리 이러한 경제 관련 서적을 읽어도 세계는 신자유주의로 예편 중이다.
이전 정부는 물론이고 특히나 MB정부에서 우리나라는 꽤나 기형적인 모습을 보이는데,
대규모 '국책' 토목사업을 벌이면서 내부경제를
극소수층에 집중시키는 동시에 개방 문호는 활짝 열어젖힌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황이다. 부의 재분배는 제도적으로
꽉꽉 막힌 상태에서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넘실댄다.
이런 상황에서는 답이 없다.
케인스가 살아 돌아온다 한들 우리나라의 경제를 기적적으로 살릴 수 있을까?
비극적이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이건 패배주의가 아니라 현실이다.
그래도 내가 장하준의 신간이 나오면,
한국의 '경제'를 말하고 있는 사회과학 서적이 나오면
웬만하면 다 챙겨보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당할 때 당하더라도 뭔지 좀 알고나 당하자는 마음에서이다.
아무리 내가 무엇을 한들 바뀌는 게 없다고 해도
눈 뜬 장님마냥 허우적 대며 앉아서 당하기는
아무리 생각해도 내 20대가 너무나 아깝기 때문이다.
70년대의 대학생이 아니라서 유신투쟁 한번 못해보고
80년대의 대학생이 아니라서 역사상 단 한 번이었던 진보의 승리를 느껴보지 못해보고
90년대의 대학생이 아니라서 신군부의 공안정국을 향해서 화염병 한번 못 던져 본
2000년대의 대학생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이것 뿐이다.
낭만과 공포가 잡탕으로 어우러진
선배들의 그 시대를 꿈꾸기에는 우리는 너무 멀리 와 버린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