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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미래 - 다음 세대를 위한 민주주의 교과서 ㅣ 노무현 대통령의 진보의 미래
노무현 지음 / 동녘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전설이 된 노무현.. 그는 죽어서야 민주주의의 신화가 되었다.
그가 죽고나서야 비로소 (그가 생전에 자기 편이라고 여기던)
진보 언론의 통탄할 성찰이 나왔고,
그가 죽고나서야 사람들은 그의 정책에 대한
심도있고 깊은, 수준높은 연구를 시작했고 관심을 가졌다.
그의 재임기간 내내 그의 진심이 언론을 통해
대중들에게 올곧은 형태로 전달된 적은 없었다.
내용이 아니면 말꼬리라도 잡고 비튼 뒤에야
대중들에게 그의 생각이 전파됐고, 우리는 그를 난도질했다.
그러나 아무리 보수 언론이 숨기려해도 숨길 수 없는 게 있다.
그것은 '진실'이다.
진실은 비록 왜곡될 순 있을지언정,
결코 원래 없었던 것처럼 여겨질 순 없다.
이것이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으로 보여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노무현에게 있어 '진실'은 권위주의 타파로 대표되는 민주주의 가치의 발전이었다.
한국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보수세력조차도 이 '진실'은 결코 감출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진실을 애써 은폐하는 대신 프레임 자체를 재편한다.
바로 '민주주의'를 논쟁의 저끝으로 밀어내고
경제 문제를 프레임의 중심으로 끌어오는 방식으로 말이다.
언론과 결탁한 보수진영의 끝없는 경제 담론은 결국
민중들에게 있어 민주주의의 가치를 잠식시키고 노무현을 무너뜨린다.
이제 그는 레임덕에 허덕이는 실패한 대통령이 된다.
그를 지켜줘야 하는 진보 언론마저 보수의 프레임에 휩쓸려 중심을 잃어버린다.
보수진영에겐 너무나 쉬운 게임..
진보의 상징으로 우뚝 선 노무현 하나만 무너뜨리면
그들은 다시 헤게모니를 쥐게 된다.
결국 그는 보수진영의 끝없는 공세 속에 피를 철철흘리며
무너져버렸고 세상은 다시 보수진영의 프레임에 갇혀버린다.
그가 진정한 진보주의자인가? 하는 논쟁은 그의 재임기간 내내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전체적으로 따지고보면 그는 진보주의자들이 보기에는 절반의 성공은 한 셈이지만
굵직굵직하고 큰 사안들, 즉 언론에 부각되기 쉬운 사회적 논쟁거리에 대해서는
반진보주의적인 면모를 보여주면서 그는 '변절자'로 낙인찍힌다.
언론에 의해 무차별적으로 왜곡된 '좌파 신자유주의'라는
낙인 속에서 그의 편은 보수도, 진보도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가 퇴임을 하고나서야 비로소
노무현은 진정한 진보주의자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진보진영이 말했던 것처럼)정말로 변절했다면
결코 퇴임 후 그렇게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진보주의자가 아니라면 "야, 기분 좋다~!!"라는 외침은
가식이나 이미지메이킹을 위한 '쇼'가 되었겠지만, 우리는 모두 보았다.
그가 웃고 있는 함박웃음 속에 담겨져 있는 '진심어린 모습'을 말이다.
이것은 그의 재임기간 내내 그에게 실망한 진보진영에게조차도
매력적으로 비춰진, 진정으로 '멋진 지도자'의 모습이었다.
역대 우리나라 대통령 중 노무현처럼 뒷모습이 멋있었던 정치인이 있었던가?
그것은 결코 그가 거의 유일하게 '법적으로 깨끗하게'
임기를 끝낸 대통령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시민'이라는 민주주의의 진정한 권력속으로 들어가는
진보주의자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보수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5년을 통치한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진정한 진보주의자'로 다시 태어났다.
한 개인이 합법적으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력을 손에 거머쥐었던 사람이
비로소 민주주의 사회에 있어 '진정한 권력'의 주체로 다시 돌아간 그의 모습에서 본
환한 웃음은 그를 뼛속까지 진정한 진보주의자로 각인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가 죽기 전까지 매달린 진보에 관한
연구와 성찰을 집약한 이 책을 통해 비로소 그의 '진심'을 보았다.
이 책을 통해 바라 본 그의 진심은 눈물겹고 아름다운 '진보주의자의 꿈', 그 자체였다.
그의 재임기간 내내 민주주의의 가치에 대한 성찰은 실종됐었다.
그리고 그가 떠나간 뒤, 보수진영이 권력을 잡은
현재에 와서야 민주주의의 가치는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민주주의는 그런 것이다.
'목표'로서의 민주주의는 가공할 만한 위력을 발휘하지만,
'현실'에 있어서의 민주주의는 누군가가 민주주의의 심장에
총을 겨누지 않는 이상 존재감을 느낄 수 없다.
민주주의의 목숨이 위태로운 극단의 상황에 가기 전에,
즉 현실에 있어서 민주주의가 존재하는 그 시기에
세상을 민주주의의 내재적 가치를 발전시키며
좀 더 나은 사회로 만들고자 하는 그것, 그것이 진보주의의 가치다.
노무현은 말한다.
"오늘날 왜곡되어있는 정치를 바로잡는 일도, 정치논쟁의 주제를 기타 비합리적인
주제가 아니라 진보와 보수의 정책논쟁으로 돌려놓아야 가능한 일"이라고 말이다.
진보와 보수의 정책논쟁.
이것은 결코 우리 사회를 민주화 이전의 과거로 회귀하자는 말이 아니다.
'때가 어느 땐데 이런쟁으로 시간을 허비하느냐, 경제나 살려라' 따위의 말은
보수진영이 만들어놓은 경제담론 프레임, 다시 말해
사회 전체를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희석시키려는 보수주의의 전략에 포섭된 것과 다름없다.
"나는 국정 목표에 경제 문제를 걸지 않았다. 너무 당연한 이야기라서.
그리고 여론이 경제문제에 소리를 높이면 높일수록 경제정책이 왜곡되고,
국민에게 부메랑이 되었던 지난 날의 경험 때문에,
경제는 경제만으로 성공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경제 문제가 다른 모든 가치를 덮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나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나는 경제 문제에 파뭍혀버렸다"
결국 노무현은 경제 때문에 무너졌다.
김대중 정부의 5년을 겪은 국민에게 민주주의는 더이상 중요한 가치가 될 수 없었다.
이미 민주주의는 '당연한 것'이 되어버렸고,
이 시기에 참으로 절묘하게도 IMF라는 위기를 맞게 된 덕분에(?)
지나치게 자본주의화 된 국민들에게 가장 중요한 건 '자유'가 아니라 경제, 즉 '돈'이었다.
지금 당장 일자리와 먹고 살 걱정 없는 유토피아를 바라는 이들에게
비전2030과 같은 중장기적 전략은 이상주의이자 뜬구름 잡는 이야기에 불과했다.
"내가 대통령이 되고 나자 민주주의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는
그의 말을 자신의 처지에 대한 신세한탄과 푸념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는 과감하게 적진에 뛰어든다.
"그래서 나는 경제문제를 주체로 하여 연구하고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이것은 보수진영이 깔아놓은 무대 위에서
보수가 제기한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자는 것이다"
결국 방법은 없다.
경제를 무기로(정확히 말하면 경제적 효율성) 자신들이 유리한 쪽으로
여론을 끌고 가는 보수주의의 전형적인 수법에 말리면 말릴수록 더욱 더 그들의 입지를
탄탄하게 굳혀주는 것이라 해도 보수진영의 담론에 완전히 포섭된 한국 사회에서
그것을 정면돌파하는 방법 외에는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길은 전무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방어적 수세적 논리'로만 그치는
보수를 향한 진보진영의 일반적인 대응방법에서 탈피해
"니들 생각이 그렇다면 어디 제대로 맞짱 한번 떠보자!"라는 정면승부를 선택한 것이다.
자본주의의 황금기가 종말을 고한 6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로 대변되는
보수주의의 엄청난 공세 속에 진보진영은 이제 생존을 걱정할 처지가 되었다.
그렇게 나온 것이 영국 노동당이 내세운 '제3의 길'이었다.
80년대 내내 영국을 지배했던 대처리즘의 광풍 속에서
전통적 좌파주의 정당인 노동당이 정권을 다시 쥘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진보주의의 전통적 가치에 대한 포기였다.
영국 노동당은 '조세를 통한 부의 재분배'를 과감하게 버렸다.
'세금 인상'을 포기한 것이다.
또한 중앙은행을 독립시켜 국가의 거시경제 관리 기능을 포기한다.
전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좌파 정당이었던
영국의 노동당의 이러한 변화는 변절이고 배반이었다.
대신 그들은 교육에 모든 걸 투자한다.
제조업에서 서비스업으로 변화된 세계 경제의 추세 속에서
제조업 노동자를 중심으로 구축된 과거 진보의 가치는 국가 발전에 있어서 계륵과 같았다.
그들은 노동자의 특권을 해체하는 대신 서비스업의 핵심인 '지식'을 육성하기 위해
교육 분야에 진보주의의 모든 가치를 투자하며 발전시켰다.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었다.
노무현은 여기서 미래를 보았다.
"신자유주의가 실제적으로 강조하는 핵심 가치는 감세와 복지의 축소이다.
여기에 대해선 분명하게 '아니다'라고 대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장, 국가, 민영화, 규제 완화, 노동 유연화 같은
구체적, 실제적인 정책 수준의 선택으로 결론이 날 수밖에 없는 사안에 대해서는
'그것은 구체적인 타당성의 문제이다. 구체적으로 논의해보자'
이런 융통성있는 태도로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제3의 길이라는 것을 이런 길로 가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교리에는 보수주의의 핵심 논리도 있고
진보 보수 관계없이 진보도 보수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우리 사회의 생산성과 효율성의 논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둘을 합쳐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으로 공격하다보니까
너무 전선이 넓어지고 불필요하게 우리 편을 적으로 돌리는
이런 문제가 있지 않느냐 하는 것이지요"
보수주의가 진보주의를 공격할 때 결코 진보의 '가치'를 공격하는 일은 없다.
"그들은 진보주의의 불경제와 도덕적 해이를 공격한다"
보수주의는 '경제'를 먼저 그들의 프레임으로 끌어들여서
절대적으로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제에 있어서 진보와 보수의 논쟁은
자연스레 보수진영이 구축한 '경제 죽여? 살려?'의
유치하고 단순한 답이 뻔히 보이는 무의미한 대립으로 변질되는 것이다.
진보의 보수의 대립을 다시금 사회적 논쟁의 주체로 돌려놓기 위해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행동하는 시민"들을 양성하는 길 뿐이다.
그래서 노무현은 시민 속으로 들어왔다.
조금 더 나은 세상을 위해.
결국엔 진보주의를 중심으로 세상은 발전할거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는 자신을 향해 조여오는 권력의 손아귀 속에서도 끝까지 진보를 연구했고
부엉이 바위에 몸을 던지기 직전까지도 '글을 쓸 수 없'음을 슬퍼했다.
한국은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을 막론하고 기독교적 세계관이 지독하게 강한 나라다.
선과 악의 이분법을 즐겨 사용하고, 늘 메시아를 꿈꾼다.
보수진영에게 박정희는 메시아였고,
지난 10년 간 김대중과 노무현은 악 그 자체였다.
보수의 헤게모니에 잠식당한 이 사회에서 박정희는
아직까지도 가장 존경받는 지도자로서 불멸의 존재가 된다.
진보진영에서 박정희와 전두환의 독재는
악 그 자체였고 민주화는 신성한 것이었다.
87년 6월의 민주화는 전 국민의 힘으로 이루었지만
이후 권력이양의 과정에서 무책임하게 정치판에 권력을 내어줬다.
그러면서 독재를 증오했던 그들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이끌어 줄 또다른 메시아를 꿈꾸었다.
그것이 김대중이었고 노무현이었다.
김대중이 정권을 잡은 그 자체로,
노무현이 정권을 잡은 그 자체로 민주화는 '완성'된 것이 아니었음에도,
진보진영은 마치 모든 걸 이룩한것처럼 기뻐했고
그들이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가열차게 비난했다.
지난 10년간의 과정에서 무책임하게 포기한
민주주의 시민 자신들의 진정한 '권력'은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노무현은 죽어서야 진보진영의 메시아가 됐다.
이명박 정부의 탄생으로 인해, 그리고 자살로 인해서 그는 신화가 되었다.
한국의 진보진영에서 살아있는 이명박은 적이 되었고, 죽은 노무현은 선이 되었다.
역설적이다. 그는 정말로 이런 세상을 꿈꾸었을까.
살아생전 단 한 순간도 노무현은 자신을 타인 위에 군림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정부 관공서 출입기자실을 개혁하며
언론의 카르텔을 깨뜨리기 위해 노력했다.
국민의 위에 군림하지 않기 위해 재신임을 끊임없이 주장했고, 당정 관계를 폐지했다.
청와대와 검찰의 유착을 근절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결국 그는 '장악하지 않은' 검찰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았다.
하지만 그는 이제 민주주의의 신화가 되었다.
그를 보듬어 주고 인정하기는 커녕
살아생전 침묵과 냉소로 일관하던 이들에 의해 전설이 되어버린 정치인 노무현...
하늘에서 이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쓴웃음을
짓고 있을 그를 생각하니 그가 했던 이 말이 더욱 가슴이프게 다가온다.
"지금껏 피지배계층은 전부 권력을 거부하는 논리들을 주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아닙니다. 권력없인 아무 것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권력을 장악해야 합니다. 권력을 향해 나아가는 시민들이 조직되어야 되는 것이죠.
결국... 민주주의는 시민들의 행동 속에, 궁극적으로는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