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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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씨, 보고서는 평범하게 쓰셔야죠

한나 아렌트,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우울했다. 번역의 어지러움에 따른 울렁증도 한 몫 했지만, 그보다는 이 책의 부제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때문이었다. 악이 평범하다니…. 그럼 내 안에도 아이히만이 있다는 말인가? 당신은 운이 좋았을 뿐, 그 때 그 자리에 당신이 있었다면 당신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인가? 마침 눈 여겨 두었던 영화 아이히만 쇼”(The Eichmann Show, 2015)도 책을 읽는 데 참고가 될까 해서 살펴 보았다. 유리 칸막이 뒤편에서 몸을 의자에 깊이 묻은 채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학살당하는 유대인의 영상을 쳐다보는 아이히만의 표정이 눈에 거슬린다. 몹시. 저런 인간이 내 안에도 있다고? 영화 속 촬영기사는 그런 주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고 거듭 거듭 부정한다. 나 역시 인정하고 싶지 않다. 한 마디로 불편한 책이다.

아렌트와 아이히만은 1906년 독일에서 출생한 동갑내기다. 아렌트는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밑에서 수학하다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자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첫 번째 주저인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그녀는 본격적인 정치사상가로서 활동하게 된다. 반면에 아이히만은 나치 친위대 중령으로 600만 유대인 학살을 집행한 인물이다. 패전 후 아르헨티나로 도망했으나 이스라엘 첩보기관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아이히만 재판은 국제적 관심 속에 7개월 간 열렸고, 결국 1962 5 31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아렌트는 <뉴요커>라는 미국 잡지의 요청으로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참관하고 그에 대한 보고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쓰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길,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낸 끔찍한 살인마라면, 그 놈은 악마여야 옳고, 적어도 삐뚤어진 성품과 이데올로기에 잠식당한 정신병자여야만 한다. 그러나 아렌트가 본 아이히만은 반유대주의자도 아니며, 그렇다고 나치즘 사상에 심취해 있는 사상가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생각할 능력이 없는 평범한 우편배달부”(221)의 성품을 가진 관료에 불과했다. 그의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않음을 지적하며(37), 악은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음을 보고했다.

당연히 논쟁을 불러올 수 밖에 없는 표현이다. 유대인 역사학자 게르슘 숄렘은 아렌트의 글에 대해 네가 과연 유대인의 딸이냐?”고 공격했고, 친한 유대인 동료들은 절교를 선언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였던 장 아메리는 아렌트의 주장에 대해 일류의 적에 대해 들어서만 알 뿐이고 오로지 유리로 된 새장을 통해서만 그를 보았을 뿐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악의적인 이들은 그녀가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하이데거의 주장 가운데 생각 없음개념을 끌어와 불필요하게 확대 적용했다고 비판하거나, 나치에 부역했던 하이데거의 복권을 도우려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을 쏟아냈다(조태성,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비웃었다한국일보, 201601).

논쟁은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계속되는 연구를 통해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속았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독일 학자 베티나 슈탄네트는 2014년에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을 출간한다. 명백히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겨냥한 제목이다. 이 책은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숨어 지낼 때 했던 인터뷰와 그가 왕래했던 나치 추종자들과의 대화 자료를 통해 아이히만이 철저한 반유대주의자였으며, 그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음을 밝힌다. 아이히만은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겠어요. 우리가 1천만 명의 유대인을 모두 죽였다면 만족했을 것이고 우리가 적을 절멸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난 일반적인 명령수행자가 아니었어요. 만약 그랬다면 난 그저 얼간이에 불과한 거죠. 난 함께 생각했으며 이상주의자였어요.”라고 고백했다. 아이히만의 상관이었던 하인리히 뮐러는 우리에게 50명의 아이히만이 있었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라는 말로 아이히만의 실체를 요약했다(이동기,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속았다”, 한겨레21, 1046).

그렇다면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정말 속은 걸까? 글쎄,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그녀의 다른 책 <한나 아렌트의 말>에서 그녀는 말한다.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려던 게 절대 아니에요. 내가 하려던 말은 오히려 그 반대에요…. 얘기 하나 할게요. 그의 경찰 조서를 읽어봤어요. 360페이지나 되는 조서를 읽고는 다시 한번 매우 꼼꼼히 읽어봤어요. 그러면서 얼마나 낄낄거렸는지 몰라요. 나는 큰소리로 폭소를 터뜨렸어요!” 그녀가 웃은 것은 아이히만이 어릿광대 같다고 생각해서였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악의 평범성이란 말은 결국 평범한 척 굴면서 정말 말 같지도 않은 변명만 늘어놓는 아이히만을 비웃는 표현이었던 셈이다(조태성).

이것이 아렌트의 본의라면, 그녀는 적어도 자신의 보고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셈이다. ‘악의 평범성이란 부제로 인한 논란을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인류의 범죄를 소재로 노이즈 마케팅을 일으킨 얄팍한 상술인 셈이 된다. 생각해보라. 교실에서 연구 과제를 발표하는 학생이 모호한 표현으로 논쟁만 가중시켰다면, 그것은 논쟁하는 학생들의 잘못이 아니라, 야릇한 표현으로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온 보고서 작성자의 잘못 아닌가? 튈 생각으로 허언증을 남발하느니 정직하고 평범한 보고서를 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적어도 끔찍한 사고를 당해 슬픔에 빠져 있는 유족들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여전히 읽을 가치가 있는가? 완벽한 책이 없듯이 완전히 무가치한 책도 없다는 미명 하에 적어도 한 가지 생각은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생각해야 한다는 것. 전체주의적 사고를 조장하고 몰아가는 상황에서도 내 안에 꿈틀대는 양심의 촉에 한 번쯤 귀를 기울여봐야 한다는 것. 그래야 기계처럼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톱니바퀴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것. 이 책에서 꼽을 수 있는 한 가지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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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 2017 개정신판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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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는 이정표로 보인다

유시민, 『 국가란 무엇인가 』(돌베개, 2017)

 

기대와 실적 사이에 큰 괴리가 있었던 책. 2011 4.27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직전에 출간해서 잠시 관심을 끌었다가, 김해() 패배와 더불어 정치인 유시민과 함께 급전직하의 운명을 맞았던 국가론 에세이국가론에 대한 공부와 정치에 대한 경험을 나름 잘 버무렸다는 자부심이 있지만 대중의 인정을 크게 받지는 못했음.” 저자 유시민이 자신의 책에 대해 쓴 소감문이다. 사람의 운명 알 수 없듯이, 책의 운명도 그러한가 보다. 크게 인정 받지 못했다는 이 책, 내 손에 들린 책을 들춰보니 2017 1월에 개정판이 출간 되었고, 5월에 10쇄를 찍었다. “유시민님, 홈페이지에 올리신 책에 대한 소감문을 대대적으로 수정하셔야겠습니다.”

저자는 인생의 낙폭이 제법 크다. 학생운동을 하다 징역을 살기도 하고 장관을 지내기도 했으니 말이다. 국민의 선택을 받아 국회의원이 되는 짜릿한 순간도 있었고, 세 번이나 낙선의 고배도 마셨으니, 흡사 롤러코스트 인생이다. 그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상승했고, 그의 정치 후퇴와 함께 추락했다. 2013년 그는 트위터에원하는 삶을 찾기 위해 직업으로서의 정치를 떠난다는 글을 올리고 정계를 은퇴했다. 자연인으로 돌아온 그는 전업 작가와 TV 방송활동을 열심히 한다. 그의 책이 대중에게 읽히기 시작한 시점도 이때부터가 아닐까? <국가란 무엇인가>를 읽으면서 문득 들었던 생각, “나는 왜 이 책을 읽는가?” 이에 대한 솔직한 대답은 저자가 유시민이니까 이다. 국가론에 대한 개론서라면, 다른 저자의 책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런데 굳이 이 책을 꼽은 이유는 저자가 유시민이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보던 그를 앞에 앉혀 놓고 강의를 듣듯, 질문에 대답을 듣듯,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저자 때문이다.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크게 네 개의 큰 흐름으로 분류한다. 전체주의 성향을 지닌 국가주의 국가론’, 세계적으로 가장 기반이 넓은 자유주의 국가론’, 지배계급을 위한 계급투쟁을 수행하는 도구로 국가를 본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이다. 표현과 방법은 다르지만 이들의 지향점은 동일하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안전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갈구하는 인간의 본능적 욕구를 반영한다. 그러나 저마다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고, 온전히 만족시켜 주지도 못한다. 그래서 저자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형이상학에서 발원한 목적론적 국가론을 하나 더 꼽는다. “최고로 발전한 인간 공동체인 국가의 본질과 목적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 2천년 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의 어깨 위에 올라가 보겠다는 저자의 제안이 무척 흥미로우면서도 인류는 과연 발전하고 있는가라는 의구심도 들게 한다.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론이기도 한 목적론적 국가론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목적이 있다는 목적론적 사고에 기인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국가의 목적은 으뜸가는 선을 훌륭하게 추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시민 각자가 훌륭해지는 것이 국가의 목적을 이루는 길이라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대답한다.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고대 철학자의 국가론이지만, 저자는 이것이 자유주의 국가론과 결합할 때 보다 나은 국가론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가로 하여금 선을 행하게 하는 활동, 곧 정의를 수행하는 것. 이것이 진보정치세력에게 필요한 국가론이며, 이것을 진보정치의 목표로 삼자고 제안한다.

여기서 드는 의문은 도대체 선의 기준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저자는 선과 악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하며, 인간은 직관적으로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다고 하면서도,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에 대한 판단은 때론 사람의 주관에 좌우된다고 한다. 저자는 선과 악의 개념에 대한 철학적 토론을 차단하고 국가에 집중하자고 하지만, 모호한 목적지를 설정한 채 제대로 안내해줄 네비게이션이 있을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보수정치가 추구하는 목표는 선이 아닌가? 진보정치가 추구하고 변화시키려는 목표가 선이라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등등의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생각난다. 물론 완벽한 책은 없다. 저자의 말 대로 이 책은 국가에 대해 논할 뿐이다. 그러나 그냥 지나쳐 버리기에는 그 그늘이 너무 크다.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포스트모던시대에 직관과 주관을 넘나드는 선의 경계는 방향을 잃어버리기 딱 좋지 않은가?

국가란 무엇인지를 묻고, 더 나은 국가, 정의로운 국가로 가는 길을 찾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맞닿아 있다. G. K. 체스터턴이 한 남자가 사창가의 문을 두드릴 때, 그의 마음은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 말했다는데, 이것은 고스란히 국가란 무엇인가에도 적용되는 것 같다. 이상 사회를 향한 마음은 잃어버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갈망을 담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는 구석 구석에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이정표를 발견한다. 그리고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한편 이런 사실이 몹시 씁쓸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하며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야 할 이 땅의 그리스도인들이 지나치게 보수적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을 자주 읽을수록 정치, 사회 이슈에 대해 개방적이며 진보적인 관점을 더 많이 갖게 된다는 통계를 <크리스처니티투데이>에서 읽은 적이 있다. 미국 통계 자료인데, 미국에서도 한국에서도 현실은 통계자료가 무색하다. 현실과 이상은 그 괴리가 크다. 이상 국가와 현실 국가의 차이처럼 말이다. 이 차이를 좁혀야 하는 책임은 오롯이 성숙한 시민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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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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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고 거칠며 섬뜩한 이야기

유발 노아 하라리, 『 사피엔스 』(김영사, 2015)

 

크고 선명한 손바닥 지문이 호기롭다. 책 표지의 손바닥 지문은 가는 곳마다 정복하고 굴복시킨 정복자의 것과 닮아 있다. 책이 전하고자 하는 생각을 제법 잘 표현한 듯 하다. 그러나 선명한 족적 뒤에는 더 큰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법. 저자는 인류가 지나간 자리마다 생태계에 얼마나 많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는지도 잊지 않는다. 호기로운 손바닥 지문은 연쇄살인범의 것이다.

저자 유발 하라리는 이스라엘 히브리 대학교의 역사교수로서 거시적 안목으로 역사를 보는 연구를 계속해왔다. 역사학자이지만 그의 책은 인류학, 사회학, 생물학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들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역사 현실을 설명한다. 그는 이 책에서 큰 그림을 그린다. 무려 7만 년 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류가 어떻게 지구의 주인이 되었는지, 긴 역사를 담고 있다. 그러니 수명 연장의 꿈을 품어야 겨우 100년을 내다보는 인간의 한 사람으로서 가히 짐작도 되지 않는 장구한 역사이다.

책은 우리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서 이처럼 막대한 힘을 얻게 되었는지를 풀어 설명한다. 별로 중요하지 않던 동물이었던, 먹이사슬의 중간 정도 밖에 위치하지 않던 호모 사피엔스는 6종의 인간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들은 세 가지 혁명, 곧 약 7만 년 전의 인지혁명, 12,000년 전의 농업혁명 그리고 500년 전에 시작된 과학혁명을 통해 역사상 가장 막대한 힘을 가진 존재로 성장해왔다.

이 과정 속에서 인류는 대규모 협력망을 이루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저자는 상상의 질서라고 대답한다. 인간은 상상의 질서를 창조하고 문자체계를 고안해내서 협력망을 지탱할 생물학적 본능이 결핍된 틈을 메웠다.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상상의 질서란, 판타지나 신화 같은 몽상적인 이야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상상의 질서는 사회를 지탱하고 행복을 추구하는 수단으로서의 제도와 같은 것들인데, 저자는 대표적인 예로 돈, 제국, 종교를 꼽는다.

돈은 종교, 사상, 인종을 뛰어넘어 통합된 세계를 이루는 기초를 닦았다. 돈은 역사상 극도의 관용과 융통성을 발휘하여, 기꺼이 협력을 불러오는 신뢰의 산물이다. 제국은 지난 2,500년간 세계에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정치조직이었다. 제국은 수많은 작은 문화를 융합해 몇 개의 큰 문화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특히 종교는 수많은 사람들을 협업의 방향으로 이끌었다. 종교는 초인적 질서에 대한 믿음을 기반으로 하는 인간의 규범과 가치체계이다. 저자는 현대에 이르러 유신론적 종교의 쇠퇴와 함께 인본주의적 종교 즉 자유주의, 공산주의, 자본주의, 민족주의, 국가사회주의와 같은 이데올로기 역시 종교로 분류한다. 이들도 종교가 가진 속성, 즉 초자연적인 질서와 불변의 법칙을 믿으며 심지어 예언서나 경전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혁명은 과학과 정치와 경제의 연대를 통해 본격화되었다. 과학혁명의 핵심은 무지의 인정이다. 자연 현상을 모두 신의 섭리로 풀어 설명하던 과거에는 굳이 더 알고자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인간은 근대에 들어 아직 모르는 것을 인정하며, 문제를 풀어 진보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이제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 넘는 중이다. ‘지적 설계란 창조론을 설명하려는 기독교의 신조어이지만, 이미 인류는 생명을 만들어내고, 조작하며, 변형하는 지적 설계를 진행 중에 있다.

인류의 시작부터 아직 오지 않은 종말의 모습까지, <사피엔스>는 인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굵은 필체로 그려냈다. 이를 위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것, 역사학, 인류학, 정치학, 생물학, 고고학, 경제학 등 여러 학문을 융합하여 종횡무진 역사의 무대를 바쁘게 누빈다. 그러다 보니, ‘우연히라는 표현, ‘설명할 수 없는이란 표현이 난무하고, 그럴 때마다 눈에 거슬린다. 오랜 역사를 입증하기엔 너무 빈약한 증거들을 재료로 사상누각을 세워 놓은 것이 위태롭고, 빈 공간을 상상이란 진흙으로 채웠는데, 이게 언제 허물어질지 불안하다. 또한 우연과 설명할 수 없는 상상을 학문의 영역에 이토록 쉽게 허용해도 되는 건지 의심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더욱이 다른 것은 모르겠으나 종교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동의하기 힘든 불편함이 역력하다. 이런 기분을 전에 다른 작가의 책에서도 느꼈는데, 비전문가의 싸잡은 평가를 대하는 전문가의 생뚱맞은 느낌이었다. 예를 들어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그리고 다시 제설(諸說)혼합주의로의 종교 발달 이해는 종교에 대한 너무 쉬운 설명이다. 거대한 역사 이야기를 거칠게 표현할 때 발생하는 생략과 덤핑과 축약으로 인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도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살짝 의구심이 든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다. 이 책이 끌어다 쓴 각 분야를 대표하는 전문가들에게 책에서 평가하고 있는 자기 분야에 대한 설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분야 별 서평을 모아 보는 것. 흥미로울 것 같다.

긴 역사를 관통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이 인류에게 가르쳐주는 것이 있다 말한다. “기술은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하고, 마침내 사람들이 기술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1945년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 사람들이 사용할 수 있었던 기술은 정확히 똑같았는데, 오늘날 남북한의 기술 격차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 동일한 언어와 역사, 전통, 문화, 비슷한 기술을 가졌으나 그 결국은 완전히 다른 사회가 되었다. 인류의 미래도 별반 다르지 않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행복한 유토피아로 도약할 것인가? 아니면 지옥도가 펼쳐질 것인가? 사피엔스는 생태계를 멸종시킨 연쇄살인범에서 회개할 것인가? 아니면 결국 자기 자신도 죽음의 수렁에 빠뜨릴 것인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다.

 

인류의 미래도 별반 다르지 않다.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 행복한 유토피아로 도약할 것인가? 아니면 지옥도가 펼쳐질 것인가? 사피엔스는 생태계를 멸종시킨 연쇄살인범에서 회개할 것인가? 아니면 결국 자기 자신도 죽음의 수렁에 빠뜨릴 것인가? 선택은 우리에게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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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의 달인, 호모 부커스 인문학 인생역전 프로젝트 5
이권우 지음 / 그린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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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간이 날아간다. 큰 애의 친구들을 모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인문학 교실을 시작한지 벌써 6년 차가 되었다. 그 사이 은밀한 소문(?)이 나서 초등반이 2, 중등반이 1개로 모임이 늘었고, 잠깐 거쳐간 아이들까지 합하면 대략 40명 가량이 되는 것 같다. 매주 1권의 책을 읽고 서평을 쓴다는 것이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지만, 한 번 시작한 아이들은 꽤 오랜 기간을 버텨주었다. 힘든 과정이지만, 서로가 써온 글을 읽고 토론하는 것을 내심 즐기는 아이들이 대견하다. 애써 버티는 사이, 자신들의 글 실력이 늘었음을 확인하는 것은 즐거운 덤이다. 함께해준 아이들이 고맙다.

이권우의 <책 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는 중등반에서 아이들과 함께 읽은 책이다. 내친 김에 평소에 눈 여겨 보았던 책 읽기와 글 쓰기 책 몇 권을 겹쳐 읽었다. 책 읽기와 관련해서는 야마무라 오사무의 <천천히 읽기를 권함>, 글 쓰기와 관련해서는 서민의 <서민적 글쓰기>와 임승수의 <글쓰기 클리닉>을 함께 보았다.

우선 저자들의 면면이 눈에 들어 온다. 이권우는 국문학과를 나와 줄곧 책 언저리에서 살아온 도서평론가이다. 스스로를 책에 눈 멀어 책만 읽으며 살아가려는 한심한 영혼이라고 폄하하지만, 나는 그의 뚝심이 맘에 든다. 그래서 인지 그의 책 <호모부커스>는 읽는 내내 꽤 신뢰가 되었다. 한편 서민과 임승수는 글쓰기를 통한 커브가 절묘하다. 서민은 기생충학과 교수요 의사이지만 글쓰기에 대한 욕심이 대단하다. 임승수는 자칭 글치 공학도였는데, 아예 전문 작가로 전업한 경우이다. 두 사람 모두 글쓰기가 인생을 바꿨다고 힘주어 말한다. 야마무라 오사무의 이력은 특이하다. 대학 문학부를 나온, 현재는 학교법인 직원이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바, 그는 단연코 책 성애자이다. 빨리 녹아버리는 초콜릿이 아까워 천천히 빨아 먹는 아이처럼, 그는 천천히’ ‘탐닉하며읽기를 적극 권한다.

저자들의 인생 약력이 입증하듯, 책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사람이 배움에 이르는 통로 세 가지를 흔히 사람, 경험, 책이라고 말한다. 책은 사람을 바꾼다. 좋은 인생을 살고 싶다면, 좋은 책을 가까이 하면 된다. 책은 어떤 이에게는 직업을, 어떤 이에게는 치유를, 어떤 이에게는 행복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니 나에게도 무엇인가를 가져다 주지 않을까? 책으로 인해 계 탈 날을 은근히 기대해본다.

네 권의 책을 겹쳐 읽으며 얻은 소득 중 가장 큰 몫은 마음의 부담을 덜고, 열등감을 해소한 것이다. 고백하건대, 사실 나는 책 읽기에 대해 약간의 열등감이 있다. 책 읽기보다는 영화 보기와 자전거 타기를 더 좋아하는 나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현실을 산다. 그래서 한 해를 시작하며 읽은 책 목록표를 만들어 보리라 다짐하고 부지런을 떨지만,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 스코어도 40권 남짓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한 주에 한 권 정도 겨우 읽는 셈이다. 더욱이 내 주변에는 책 읽기라면 이골이 났다고 할 법한 재야의 고수들이 제법 포진해있다. 그들의 독서 내공 앞에서 나는 수련이 시원찮은 사제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니 언제쯤 하산이 가능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 나를 우리나라 사람 이권우가, 바다 건너 일본 사람 야마무라 오사무가 괜찮다고 위로해주니 눈물이 난다. 오히려 천천히 읽는 것이 더 좋단다. 이들은 다치바나 다카시의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식의 독서법에 제동을 건다. ‘한쪽을 읽는데 1, 좀 늦더라도 2, 3로 읽어대는 다치바나 다카시의 속독법이 아닌 천천히 읽는 법, 즉 지독법(遲讀法)이 책을 제대로 읽는 방법이라고 명토 박아 말한다.

책 읽는 방법도 시대의 흐름을 타는 걸까? 빛의 속도로 달려나가는 현 시대를 닮아 책 읽는 것 조차 빠르게 읽고 정보를 소화해내는 속독법이 인정을 받는 눈치이다. 꼭 속독까지는 아니어도 책을 빨리 먹어 치우는 사람들의 은근한 자랑은 SNS에서도 좋아요를 외치며 엄지 손가락을 들게 만든다. 그러니 일주일에 겨우 한 권을 읽었다는 말은 명함도 못 내민다. 그러데 야마무라 오사무는 과거에는 책을 천천히 읽으라는 조언이 제법 많았다고 귀띔한다. 심지어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저자와 함께 15일 동안 집을 비우는 일이라고 말할 정도였다니! 이럴 수가, 그에 비하면 나는 너무 빨리, 그리고 너무 많이 읽고 있는 셈이다. 천천히 읽기는 속도에 피로감을 느낀 사람들의 반론이 아닐까? 빨리 읽어 치우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외침 말이다.

물론 오해는 없어야겠다. 이들의 천천히 읽기는 어쩌다 한 번씩 책을 들추는 게으르게 읽기가 아닌 책을 사랑한 나머지 탐닉의 경지에 이른 것을 말한다. 오래 곱씹고 반복하여 읽으며, 천천히 음미하며 읽는 것이다. 그럴 때에야 비로소 발견하게 되는 책의 감추어진 진면목이 있다. 빠르게 읽기로는 결코 눈치 챌 수 없는 찰나가 있다. 이것이 조금 이해 되는 것이, 성경을 읽을 때 다독을 위한 통독도 하지만, 세밀하게 읽고 살피는 묵상도 하지 않는가? 천천히 읽기는 책을 묵상하듯 읽으라는 말의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책을 읽다 보니 송나라 북송 시절 시인이요 학자였던 구양수가 학문을 하는 자세로 다독, 다작, 다상량이라 했던 삼다의 방법이 보다 정확히 이해가 되었다. 적어도 다독에 있어서, 그것은 말 그대로 많이 읽는다는 것인데, 그 옛날 책을 구하는 것이 쉽지도 않았을 뿐더러 지금처럼 쏟아져 나오는 출판의 양에 비하면 턱없이 적었을 테니, 구양수가 말한 다독은 빠르게 읽기가 아닌 반복하여 읽기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다독은 속독보다 지독에 가까운 독서법인 셈이다. 그렇게 천천히, 반복하여 읽는 중에 다상량즉 많이 생각하기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목적에 따라 빠르게 읽어 내야 할 순간도 있겠지만, 책을 사랑하여 천천히 그 내용을 살피고 음미하라는 가르침이다.

반면에 글쓰기의 노하우는 달라진 바가 없다. 다작! 그것이다. 서민은 자신이 경험했던 글쓰기 지옥훈련을 소개한다. 10년 동안 하루에 두 편씩 블로그에 글쓰기! 글의 완성도야 알 수 없지만, 하루에 두 편의 글을 꼬박꼬박 써서 올렸다니, 그의 성실함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서민의 글쓰기 노하우는 성실한 글쓰기이다. 임승수는 사람들이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로 완성도에 목을 메느라 시간을 지나치게 낭비하는 경향을 꼬집는다. 글쓰기를 배우는 입장이라면 완성도에 집착하지 말고 일단 글의 양에 집중하라는 조언이다.

글을 많이 써보라는 조언과 관련하여 불편한 것 하나는 어느 수준까지 나를 드러내느냐의 문제이다. 어차피 글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쓰는 것이니만큼, 자신의 생각과 입장을 표현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나는 이 적정 수위에 인색하다. 인터넷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지인들을 볼 때면, 그들의 용감한 자기 개방이 좋기도 하면서(엄지 척!), “아니, 이런 것까지?”라는 물음이 슬그머니 마음 한 켠을 차지한다. 내가 무엇을 먹었는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나는, 당연히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알리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다. 한 마디로 인터넷 상의 시시콜콜함이 나는 싫다. 그러니 인터넷에 글을 쓰려면 아예 노출증 환자가 되라는 임승수의 조언이 부담스럽다. 서민은 자신의 책에서 작정한 듯, 자신의 외모를 셀프 디스한다. 책 사이사이에 얼마나 자신이 못났는지 입증하려는 듯 전신 사진을 올려놓았다. 이런 외모였으니 왜 열등감이 없었겠느냐고, 또 글쓰기로 열등감이 자신감이 되었다고 강변한다. 외모를 보아하니, 미안하지만 그랬을 것 같다. 덕분에 그의 책은 유쾌하고 설득력이 있다. 서민의 책에 부재로 붙은 열등감에서 자신감으로, 삶을 바꾼 쓰기의 힘이 느껴진다.

인정한다. 글쓰기에 대한 욕망과 노출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서 나는 두려움이 조금 더 큰 셈이다. 이런 생각이 누군가에게는 아쉬울 것 없는 배부른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솔직한 나의 현 위치이다. 그러니 이 부분에서 나는 노력이 필요하다.

책을 읽으며 야마무라 오사무의 책에서 발견한 코끼리와 생쥐의 비유가 마음에 들었다. 심장 박동이나 혈액 순환 사이클에 있어서 코끼리가 생쥐보다 열여덟 배나 긴 리듬으로 산다는 어느 교육 방송의 연구보고이다. 음식을 먹는 코끼리와 생쥐를 상상해보라. 생쥐에 비해 열여덟 배 느린 코끼리의 리듬은 마치 슬로우 비디오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반면에 생쥐의 리듬은 빨리 감기를 하듯 쏜살같다. “살아가는 리듬이 다르면 세계관이 다르고 가치관이 다르다”(33). 물론 저자는 책 읽기에 있어서 코끼리의 리듬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나는 이 비유를 다르게 읽었다. 책 읽기는 코끼리의 리듬으로, 글 쓰기는 생쥐의 리듬으로 하면 좋겠다. 코끼리처럼 천천히 곱씹어 보는 깊이 읽기를 실천해보리라. 생쥐처럼 글감을 발견하면 완성도 때문에 혹은 노출 수위 때문에 주저하지 않고 일단 재빨리 써보리라.

그러고 보니, 그 동안 리듬을 반대로 살아왔다. 책 읽기는 생쥐의 재빠른 리듬을 따라가지 못해 버거워하며 숨이 찼다. 반면에 글 쓰기는 완성도를 따지고, 노출 수위를 생각하느라 코끼리 리듬으로 쓰다 보니 완성하지 못한 채 미적거렸다. 어떤 리듬을 타느냐가 중요하다. 책 읽기는 코끼리처럼, 글 쓰기는 생쥐처럼. 적절한 리듬감이 책 읽기와 글 쓰기를 생동감 넘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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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설교 룻기 읽는 설교 시리즈
조영민 지음 / 죠이선교회 / 201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릴 적, 내 방은 부엌에 딸린 작은 방이었다. 살림이 많은 집이었다면 창고로 썼을 법한 작은 방에는 책상과 서랍장이 들어가고, 한 사람이 누우면 딱 좋은 공간이 남았다. 별로 내세울 것도 없는 어릴 적 그 방이 가끔 생각나는 것은, 아침마다 들려오던 어머니의 밥 짓는 소리 때문이다. ‘칙칙폭폭요란한 압력밥솥 소리와 또각또각야채 다듬는 도마 소리에 눈을 떴고, 방문을 열면 요리에 열중하시는 어머니의 뒷모습이 어김없이 내 눈에 들어왔다. 막 지은 밥 냄새와 구수한 국 냄새가 내 속이 비어 있음을 일깨웠고, 그렇게 어릴 적 아침은 풍요로웠다. 어떻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똑 같은 소리와 똑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었을까? 내 어릴 적 아침을 가득 채우고 있는 어머니의 곡진한 사랑이 나는 아직도 그립다.

<읽는 설교 룻기>를 대하며 어머니의 밥 짓던 모습이 연상되었다. 자신의 이름을 마라’(쓴 물)라 부르며 애통해하는 나오미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채워가시는가? 나오미의 아픔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은 수 천 년을 뛰어넘어 이 시대의 아픔도 치유하기에 충분하다. 헤세드, 무한한 긍휼로 베풀어지는 사랑. 이방 며느리 룻의 헤세드가 보아스의 헤세드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헤세드로 변주되는 이야기에서 교회의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는 저자의 헤세드도 읽힌다. 생명의 양식을 전하기 위해 말씀과 씨름했을 저자의 모습이 어머니의 그것과 닮아있다.

저자의 설교는 화려하지 않으며 눈을 번쩍 뜨이게 할만한 성공의 약속도 없다. 그러나 진실하다. 희망 고문과 긍정적 사고로 허물어진 공허한 가슴을 정직한 복음으로 채워간다. 세상이 부러워할만한 약속대신 신실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킨다. 그래서 저자의 설교는 집 밥과 같다. 물리는 법은 없으되 건강은 확실히 챙길 수 있겠다. 화려하고 자극적이지 않으면 시선을 끌 수 없는 세상에서, 정도(正道)를 따라가고자 하는 목회자의 우직함이 읽혀서 좋다. <읽는 설교 룻기>가 인상 깊은 이유이다. 지역 교회를 말씀으로 성실히 섬겨가는 목회자의 발견은 그래서 더욱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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