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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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씨, 보고서는 평범하게 쓰셔야죠

한나 아렌트,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길사, 2006)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우울했다. 번역의 어지러움에 따른 울렁증도 한 몫 했지만, 그보다는 이 책의 부제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때문이었다. 악이 평범하다니…. 그럼 내 안에도 아이히만이 있다는 말인가? 당신은 운이 좋았을 뿐, 그 때 그 자리에 당신이 있었다면 당신도 아이히만이 될 수 있었다는 말인가? 마침 눈 여겨 두었던 영화 아이히만 쇼”(The Eichmann Show, 2015)도 책을 읽는 데 참고가 될까 해서 살펴 보았다. 유리 칸막이 뒤편에서 몸을 의자에 깊이 묻은 채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학살당하는 유대인의 영상을 쳐다보는 아이히만의 표정이 눈에 거슬린다. 몹시. 저런 인간이 내 안에도 있다고? 영화 속 촬영기사는 그런 주장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고 거듭 거듭 부정한다. 나 역시 인정하고 싶지 않다. 한 마디로 불편한 책이다.

아렌트와 아이히만은 1906년 독일에서 출생한 동갑내기다. 아렌트는 하이데거와 야스퍼스 밑에서 수학하다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자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첫 번째 주저인 <전체주의의 기원>으로 그녀는 본격적인 정치사상가로서 활동하게 된다. 반면에 아이히만은 나치 친위대 중령으로 600만 유대인 학살을 집행한 인물이다. 패전 후 아르헨티나로 도망했으나 이스라엘 첩보기관에 붙잡혀 재판에 회부되었다. 아이히만 재판은 국제적 관심 속에 7개월 간 열렸고, 결국 1962 5 31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아렌트는 <뉴요커>라는 미국 잡지의 요청으로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참관하고 그에 대한 보고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쓰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이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길,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가스실로 보낸 끔찍한 살인마라면, 그 놈은 악마여야 옳고, 적어도 삐뚤어진 성품과 이데올로기에 잠식당한 정신병자여야만 한다. 그러나 아렌트가 본 아이히만은 반유대주의자도 아니며, 그렇다고 나치즘 사상에 심취해 있는 사상가도 아니었다. 다만 그는 생각할 능력이 없는 평범한 우편배달부”(221)의 성품을 가진 관료에 불과했다. 그의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 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않음을 지적하며(37), 악은 평범한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있을 수 있음을 보고했다.

당연히 논쟁을 불러올 수 밖에 없는 표현이다. 유대인 역사학자 게르슘 숄렘은 아렌트의 글에 대해 네가 과연 유대인의 딸이냐?”고 공격했고, 친한 유대인 동료들은 절교를 선언했다. 아우슈비츠 생존자였던 장 아메리는 아렌트의 주장에 대해 일류의 적에 대해 들어서만 알 뿐이고 오로지 유리로 된 새장을 통해서만 그를 보았을 뿐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악의적인 이들은 그녀가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하이데거의 주장 가운데 생각 없음개념을 끌어와 불필요하게 확대 적용했다고 비판하거나, 나치에 부역했던 하이데거의 복권을 도우려는 것 아니냐는 비아냥을 쏟아냈다(조태성,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비웃었다한국일보, 201601).

논쟁은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 계속되는 연구를 통해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속았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독일 학자 베티나 슈탄네트는 2014년에 <예루살렘 이전의 아이히만>을 출간한다. 명백히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겨냥한 제목이다. 이 책은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숨어 지낼 때 했던 인터뷰와 그가 왕래했던 나치 추종자들과의 대화 자료를 통해 아이히만이 철저한 반유대주의자였으며, 그가 하고 있는 일의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음을 밝힌다. 아이히만은 당신에게 솔직히 말하겠어요. 우리가 1천만 명의 유대인을 모두 죽였다면 만족했을 것이고 우리가 적을 절멸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난 일반적인 명령수행자가 아니었어요. 만약 그랬다면 난 그저 얼간이에 불과한 거죠. 난 함께 생각했으며 이상주의자였어요.”라고 고백했다. 아이히만의 상관이었던 하인리히 뮐러는 우리에게 50명의 아이히만이 있었다면 우리는 전쟁에서 이겼을 것이라는 말로 아이히만의 실체를 요약했다(이동기, “아렌트는 아이히만에 속았다”, 한겨레21, 1046).

그렇다면 아렌트가 아이히만에게 정말 속은 걸까? 글쎄, 꼭 그런 것 같지만은 않다. 그녀의 다른 책 <한나 아렌트의 말>에서 그녀는 말한다. “우리 각자는 아이히만과 같은 측면을 갖고 있다는 말을 하려던 게 절대 아니에요. 내가 하려던 말은 오히려 그 반대에요…. 얘기 하나 할게요. 그의 경찰 조서를 읽어봤어요. 360페이지나 되는 조서를 읽고는 다시 한번 매우 꼼꼼히 읽어봤어요. 그러면서 얼마나 낄낄거렸는지 몰라요. 나는 큰소리로 폭소를 터뜨렸어요!” 그녀가 웃은 것은 아이히만이 어릿광대 같다고 생각해서였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악의 평범성이란 말은 결국 평범한 척 굴면서 정말 말 같지도 않은 변명만 늘어놓는 아이히만을 비웃는 표현이었던 셈이다(조태성).

이것이 아렌트의 본의라면, 그녀는 적어도 자신의 보고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제대로 보고하지 않은 셈이다. ‘악의 평범성이란 부제로 인한 논란을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인류의 범죄를 소재로 노이즈 마케팅을 일으킨 얄팍한 상술인 셈이 된다. 생각해보라. 교실에서 연구 과제를 발표하는 학생이 모호한 표현으로 논쟁만 가중시켰다면, 그것은 논쟁하는 학생들의 잘못이 아니라, 야릇한 표현으로 쓸데없는 오해를 불러온 보고서 작성자의 잘못 아닌가? 튈 생각으로 허언증을 남발하느니 정직하고 평범한 보고서를 썼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적어도 끔찍한 사고를 당해 슬픔에 빠져 있는 유족들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여전히 읽을 가치가 있는가? 완벽한 책이 없듯이 완전히 무가치한 책도 없다는 미명 하에 적어도 한 가지 생각은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생각해야 한다는 것. 전체주의적 사고를 조장하고 몰아가는 상황에서도 내 안에 꿈틀대는 양심의 촉에 한 번쯤 귀를 기울여봐야 한다는 것. 그래야 기계처럼 움직이는 세상 속에서 톱니바퀴로 전락하지 않는다는 것. 이 책에서 꼽을 수 있는 한 가지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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