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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령의 시간 ㅣ 교유서가 다시, 소설
김이정 지음 / 교유서가 / 2024년 9월
평점 :

이틀내내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고 있다. #유령의시간 속 #깁이섭 이 외롭게 소주 한 잔에 삶의 고통을 삼키고 휘적휘적 걸어가는 뒷모습처럼 싸늘한 날씨다.
나는 대한민국 서민의 가정에서 나고 자랐 다. 손기술이 좋았던 아버지는 매일 작은 오토바이로 30분을 달려 양복점에서 밤늦도록 남의 옷을 지으셨다. 외갓집의 살림밑천이었던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몸에 벤 살림에 육아를 하면서 한 순간도 부업을 놓지 않으셨다. 어린 시절 나와 동생은 학교를 다녀오면 동네 친구들과 지칠 때까지 밖에서 놀았고, 머리가 커가며 이 사회에 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나름 고군분투했다. 많은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 생각했다. 그러나 이렇게 특별할 게 없는 일들이 #유령의시간 속 #김이섭 과 그의 가족에게는 쉬이 허락되지 않았다.
선천적으로 병약했던 이섭은 산을 타고 냉수마찰을 하며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었고, 태어나면서 갖게된 모든 것들을 놓으며 당시의 통념을 깨뜨렸다. 감히 누가 누구를 무엇으로 종속하고 종속될 수 있단 말인가. 우린 그저 다같은 인간일 뿐인데... 인간 자체를 존중하고 사랑하려던 그의 의지는 6.25 전후로 일었던 사상의 격렬한 갈등 끝에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주홍글씨처럼 평생을 따라다녔다.

6.25 전쟁에 그를 찾아 북으로 떠난 첫사랑 진과 삼남매를 평생의 죄책감이자 끊어버릴 수 없는 희망으로 안고, 전쟁이 남긴 또다른 상처를 가진 미자와 부부가 되어 사남매와 현실을 살았다.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는 가장이었지만 언제나 부족했고, 얽히고 설킨 죄책감과 희망을 부여잡고 캄캄한 시간을 버텼다. 죽기 전까지 전쟁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남편을 대신해 가장이 된 순희는 그의 버티다 곪아터진 무른 속내를 비추는 거울같았고, 그녀의 곁에서 그는 잠시나마 숨을 고를 수 있었다. 큰 소리로 목놓아 울지못하는 가련한 영혼이라니...
꿈에서 현실에서,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나라 어디에서도 그는 결코 떳떳한 인간일 수 없었다. 사람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생각은 어느 쪽을 편드는 사상이 아니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평화로운 세상을 바람일 뿐이었다. 하지만 권력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편이 아니면 반대편, 그렇게 만들어놓은 구렁텅이에 빠진 가엾은 인간은 살아남기 위해 일생을 허우적댔다. 안타깝게도 권력은 아직도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좌익과 우익, 붉은 색과 푸른색은 절대로 같이 존재할 수 없는 일일까?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전쟁이었을까? 6.25 전후 그는 허공에 발을 딛고 떨어지지 않기위해 버둥거리거나 질퍽한 진흙에 빠지지 않으려 온힘을 다해 휘적거렸다. 전쟁은 끝났지만 그도, 그와 연루된 사람들도 결코 평화를 얻지 못했다. 구둣바닥이 닳고 닳도록 걷던 이섭은 #유령의시간 이라는 자서전을 집필한지 한 달뒤 갑작스런 죽음을 맞는다. 딸 지형은 아버지의 자서전을 통해 물음표 투성이였던 그의 삶을 비로소 온전히 이해한다. 살아있으되, 온전한 존재로 살아갈 수 없던 존재, 유령처럼 버텨온 시간들...유령 이섭은 죽고나서야 비로소 그의 흔적을 남길 수 있었다.

초판과 개정판 작가의 말에서 저자 #김이정 은 평생의 과업을 마친 후련함과 감사함을 토로했다. 언뜻언뜻 스치는 그의 삶에 있었던 깊은 굴곡을 상상만할 뿐, 어떤 깊이의 고통과 슬픔이었을지 감히 어느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다만, 이제는 단단한 땅에 굳건히 두 발을 딛고 서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는 것은 모르고 지나쳤을, 모르는 척 외면했을 세상의 이면을 마주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나는 조금씩 세상의 진짜 일원이 되어간다. 지나간 전쟁과 폭력으로 아직도 어딘가에서 고통을 받고있을 사람들을 생각한다. 눈에 띄지 않아도 보고 들으려는 노력은 멈추지 말아야겠다 다짐했다. 저녁 밥상에 놓으려 끓인 뜨끈한 미역국 한 그릇을 이섭을 위해 내어주고 싶다. 사막 위 모래에 푹 빠져버린 의자에 앉아 하염없이 바라다가 주검이 된 영혼에게 따뜻한 쉼이 허락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