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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연습
조정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로뎅 - 오뎅 - 덴뿌라 - ?’
예전에 유행했던 무슨 무슨 시리즈를 기억하고 있는가? 정확히 무슨 시리즈였는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상의 작가는 누구인가 라는 내용의 유머였다. A가 정답으로 ‘로뎅’을, A를 컨닝한 B가 ‘오뎅’으로 그리고 B를 컨닝한 C가 ‘덴뿌라’로 답안을 작성한다.
한물간 시리즈를 돌이켜보니 문득 ‘현실 사회주의’가 스쳐간다.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지만) 맑스의 사상-굳이 맑스의 사상이 아니라 이상주의라 봐도 무방하다-이 로뎅이었다면, 오뎅과 덴뿌라는 각각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코 로뎅과 오뎅, 덴뿌라 사이에는 질적인(?) 연관성도 없을뿐더러 그저 제멋대로 한 컨닝에 불과한 산물일 뿐이다.(더욱이 덴뿌라(=스탈린주의)는 먹지도 못하는, 먹어서도 안 돼는, 음식물 쓰레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 왜 현실 사회주의는 몰락했을까 하는 물음을 던져본다. 그것은 오뎅이 로뎅이 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레닌주의와 스탈린주의를 비롯한 사회주의는 결코 맑시즘의 구현이 아닌 정치적으로 악용된 사상의 껍데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단지 ‘혁명’만 있었을 뿐 어디까지나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없는 국가자본주의의에 다름 아니기에 말이다. 더군다나 사회주의보다 상위개념인 공산주의는 더더욱 실현된 적이 없는 사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적 가치는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며 “최악의 사회주의조차 최선의 자본주의보다 항상 더 낫다.”는 루카치의 말은 여전히 가슴속에 간직하고 싶다.
사설이 길었지만 조정래의 장편 「인간연습」을 읽으며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이러한 생각이었다. 90년대 초 소비에트와 공산권의 붕괴를 배경으로 한 소설은 과거 비전향 장기수였지만 타의로 전향자가 된 윤혁이라는 인물의 삶을 그리고 있다. 또한 몰락해버린 사상 속에서 한 인물의 심적 변화과정을 담아냄과 동시에 그의 치열한 고민과 내적갈등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우리가 잊고 있던 사상 장기수의 고통과 분단 현실 또한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이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장편이라 칭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분량을 지적하고 싶다. 충분히 더 늘려 써도 좋을 법한 소재가 너무 압축된 듯 느껴진 탓이다.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소비에트의 몰락, 박동건 동무의 죽음 그리고 북한의 참상을 지켜보며, 윤혁은 ‘헛 살았다’는 말을 내뱉는다. 이렇듯 한 인물에게 있어 전부였던, 삶의 의미와 방향이라 생각해왔던 것들이 한 순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것은 자신이 ‘아부라기’-소비에트가 ‘덴뿌라’이기에 북한은 ‘아부라기(어묵의 다른 말)’라고 불리는 편이 어떨까 한다 -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정답이 오답이었음을 깨달음과 동시에 그간 자신의 사상 때문에 해를 당했던 그의 가족들에 대한 반성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소설에서 눈여겨 봐야할 것은 윤혁의 가슴 아픈 허무와 탄식이 아니라 그의 변화과정에 있다. 자신의 피와 눈물로 쓴 수기를 통해 과거를 돌이켜보며 미래를 내다본다. 경희와 기준 그리고 보육원 아이들과 함께하며 ‘회한과 허무에서 행복과 희망으로’ 대치된 그를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정답이 사상이라는 틀 속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국 “사람만이 희망”인 것이다.
“인간은 기나긴 세월에 걸쳐서 그 무엇인가를 모색하고 시도해서, 더러 성공도 하고, 많이는 실패하면서 또 새롭게 모색하고 시도하고…….그 끝없는 되풀이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자 한 ‘연습’이 아닐까 싶다. 그 고단한 반복을 끊임없이 계속하는 것, 그것이 인간 특유의 아름다움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말)
소설은 윤혁뿐만 아니라 여러 인물을 통해 작가가 말한 ‘연습’의 모습을 담고 있다. 먼저 사상에 갇혀 버린 박동건, 시민운동으로 전환한 강민규 그리고 윤혁이 교도소에서 만난 양심적인 지식인인 윤리교사 등에서 이러한 면면을 확인할 수 있다. 나아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사상의 틀에 맞춘 이념형 인간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하려는 작가의 문제의식도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