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스물아홉, 그가 나를 떠났다 - 2005 페미나상 상 수상작
레지스 조프레 지음, 백선희 옮김 / 푸른숲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이거 이거 소설 분위기 왜 이렇게 옳지 않아!”
개그맨 신봉선의 유행어를 빌려 소설을 단 한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한 여인의 긴 독백으로 시작하는 소설은 첫인상부터 그다지 유쾌하지 않았다. (소설의 첫인상은 책을 덮고 나서까지도 지속되었다.) ‘이 여자 뭐라고 계속 중얼 되는 거야’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뒤덮었고 소설의 첫 대화가 나왔을 때는 반갑기까지 했다. 하지만 소설은 나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 되고 있었다.
「스물아홉, 그가 나를 떠났다」는 이별 통보를 받는 여인(지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것도 아주 특이하게 애인(다미앙)의 아버지(조셉)로부터 그리고 그의 어머니(솔랑주)로부터 통고를 듣게 된다. 여느 이별이야기가 그렇듯 가슴 아프고 눈물 쏙 빼놓는 소설로 그려지는 것이 아닌 아주 기이하게 그리고 럭비공처럼 좀 잡을 수 없게 흘러간다. 소설은 말 그대로 ‘그로테스크’ 그 자체였고 속된말로 사람을 ‘정신 사납’게 만들었다. 소설의 무엇이 나를 그토록 불편하게 만들었을까?
먼저 소설은 독특한 인칭 변화를 갖는다.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어있을 때」처럼 등장인물 모두 하나의 시점(1인칭)을 가지고 서술된다. 차이라면 책의 장(章)에 따라 바뀌는 것이 아닌 중간 중간 불쑥 불쑥 이루어진다. 서술 시점의 변화는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는 하지만 그 보다 그들의 기나긴 독백이 더 문제였다. 거기에 추가로 독특하고 볼썽사나운 묘사까지 더한다. 처음엔 신선했지만 지루하게만 느껴지는 네 인물의 서술과 독백은 작가의 설정이라고는 하지만 소설의 방향을 잃어버린 채 낙오된 심정으로 읽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소설의 원제는 「Asiles de Fous」이다. ‘바보들의 은신처’ 쯤으로 해석되는 제목은 한글 제목과는 너무나 거리가 있어 보인다. 읽는 동안 ‘스물아홉’이라는 숫자에 대단한 의미가 숨겨져 있나 생각했고 해석해보려 했지만 숫자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않는다. 작가의 의도를 해아릴 수 없게 만들어 버린 한글 제목 또한 불쾌하기 마찬가지다.
“사랑이란 “공해”, “거북스런 장애물”, “습관”, “피를 빨다가 문득 우리의 몸이 역겨워진, 피곤한 모기”같은 것일 뿐이다. 그들은 사랑을 “이용”하고, 그 “해독”을 경계하고, “파괴적위고 위험한” 그 감정의 무절제함을 두려워한다. 또한 그들이 말하는 가족이란 “보호용 고치가 필요해서 서로 연결된 추한”관계요, “조상 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는 돼지우리”일 뿐이다. 작가는 숫제 “모든 가정은 정신병동”이라고 잘라 말한다. (p.262 역자후기 중)
‘바보들의 은신처’라는 의미로 소설을 들여다봤을 때, 등장인물의 시점 변화와 그들의 독백은 의미를 가지지 않나 싶다. (물론 보다 싶게 작가의 의도를 설명할 수 있었겠지만, 실험적인 구성과 형식으로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 네 인물들이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보는 시선을 보면, 그들의 눈에 비친 사랑과 가족은 보편적인 의미의 그것들이 아니다. 또한 서로간의 얽혀있는 속내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결국 소설이 말하는 사랑과 가족은 바보들이 모이는 은신처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또한 원문이 길어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너저분하기 그지없는 복문의 활용도 불쾌했다. 혼란스럽게 하기위한 작가의 의도였다면 성공적이었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소설을 읽고 난후 전부터 가져온 두 가지 의문 중 하나는 알게 되었고 나머지 하나는 여전히 의문에 쌓여있다. 전자는 페미나상-이 작품은 2005년 페미나상 수상작이다.-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것이고 후자는 ‘가장 프랑스적인 작가’라는 게 도통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가장 프랑스적인 작가란 정녕 무엇이란 말이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