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말라가의 밤
조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죽고 싶은가, 살고 싶은가.

이것이 지난 10년 동안 나를 살아 있게 한 질문이었다.

지금껏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살고 싶어서가 아닌, 아직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28p

은우가 그런 아이였다.

또래 남자아이들이 땡볕 아래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는 지렁이나 달팽이를 함부로 짓밟고, 비비탄총으로 거미를 맞추며 키득거릴 때 은우는 미물 하나 밟지 않으려고 바닥을 살피며 걷던 아이였다.

은우가 죽인 것은 오직 자기 자신 뿐이었다. 56-57p

웃다가, 웃다가, 울음이 쏟아졌다. 62p

인생은 물속처럼 상하좌우 구분이 안 돼 헤맬 때가 있지만, 도로는 정확해서 길을 따라가면 목적지가 나왔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다음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것. 이것이 내가 지난 10년간 삶을 버텨온 방식이었다. 63p

고난과 불행에 연이어 발목을 붙잡히는 기막힌 삶은 소설이나 영화뿐 아니라 현실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자기가 경험한 세계가 전부인 줄 아는 사람들은 자기 잣대로 쉽게 확신하고 말하며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만, 세상에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걸 이해하는 사람이나 삶의 극단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을 아낀다. 마음 하나도 신중히 쓴다. 가까이 있어도 안전한 사람들. 나는 이들이 안전한 사람들이라고 느꼈다. 70p

"누구나 저마다의 압력을 견디며 살아가는 거지. 누군가는 기다리고,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욕조에서 이불 빨래를 하고, 누군가는 심장이 터지도록 달리면서."

잠든 개의 흉곽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진 사장님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숨을 참는 거고." 76p

그리고, 나는 안다.

실은 녀석들 모두 내 안에 그대로 있다는 것을.

사람은 제 안에 어린아이를 품은 채로, 영영 온전히자라지 못한 채로 속절없이 늙어가는 거니까. 322p

나는 자살예방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현장에서 일하는 22년간 숱하게 많은 자살자들과 자살사별자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살예방교육 강사로 활동하기 위해 교육을 받으면서 유난히 괴로웠던 것은 9살짜리 아이가 자살한 이야기를 들었던 때였던 것 같다.

죽고 싶은가, 살고 싶은가를 그 아이는 얼마나 생각했을까.

생각하다 생각하다 생각하기조차 지쳤던 것은 아닐까.

괜한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이었었다.

말라가의 밤은 담백하고 잔잔하게 영상을 보는 것처럼 흘러간다.

강렬한 감정의 폭발도 없이 그저 물이 흐르듯 흘러간다.

그래서 책을 읽어 넘기는 것 자체는 그리 힘들이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단숨에 완결까지 다 읽고 나서도 잔잔하게 여운이 오래도록 남을 것 같은 책이다.

우리의 삶은 꾸역꾸역 웃다가 한 번 무너지며 엉엉 울고, 또 다시 꾸역꾸역 웃으며 버티는 날들이 더 많기에, 죽고 싶은지 살고 싶은지를 끊임없이 되새기게 된다.

삼구가 자신의 압력을 버티며 숨을 참고 정확한 도로를 따라 목적지에 도착하고, 또 다시 다음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나의 구도, 일구와 이구도, 삼구도 모두 내 안에 있고, 나 역시 영영 자라지 못한 채로 속절없이 늙어가고 있다.

누군가 웃다가 웃다가 울음이 쏟아질 때 내가 건강한 상태이길, 여유가 있기를 바라면서.

또 내가 웃다가 웃다가 울음이 쏟아질 때 내 옆에 있는 누군가가 건강한 상태이길, 여유가 있기를 바라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헌 옷 추적기 - 당신이 버린 옷의 최후
박준용.손고운.조윤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솔직히 책 제목만 보고도 부담스럽고 불편한 느낌이 든다.

나는 패션에 큰 관심도 없고 옷을 많이 사는 편도 아니지만, 사실 싼 옷을 사서 막 입고 더러워지고 낡으면 버리는 것에 거리낌은 없었다.

옷을 버리는 게 아니라 헌 옷 수거함에 넣는 것이니 재활용 될 것이라는 알량한 기대로 그 뒤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제목을 달고 책이 나오지 않더라도 조금만 생각해본다면 그 모든 헌 옷들이 재활용 될 리 만무하다.

헌옷수거함은 늘 꽉꽉 차 있고 매 시즌마다 새로운 옷이 쇼윈도를 장식하는데 과연 그 옷들은 모두 어디로 갈까?

새 옷들조차 완전히 판매되지는 않을텐데 남은 재고들은 어디로 갈까?

나는 그런 고민들마저 헌 옷 수거함에 쉽게 버려버리곤 했다.

그나마 나는 당근마켓 등에서 중고 의류를 구매해서 입는 편이라 나름 의식있는 편이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되었던 다큐영상, TRACER: 우리가 수거함에 버린 옷은 어디로? 153벌 GPS 활용 전세계 추적기.

책 내용이 기시감이 들었던 것은 그 영상을 책으로 펼쳐낸 것이어서였다.

'헌 옷이 어디로 갈까?'

단순한 궁금증에서 시작된 한겨레21의 프로젝트.

153개의 gps 추적기를 옷에 하나하나 손수 달아 수거함에 넣었다.

영상을 보는 내내 경악을 금치 못했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다시 잊혀져있었던 내용들이었다.

광활한 유튜브의 바다속에서 이 영상을 접했던 걸 생각하면 책으로 펴낸 것의 의미가 크게 다가온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프로젝트이고 또 그 내용이 너무 중요하다보니 최대한 많은 매체를 통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면 좋겠다는 저자들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다.

한겨레출판이 아니면 어디서 이런 책을 만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책 속에도 버려진 옷들의 산이 페이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장면을 접할 수 있는데 나는 오히려 영상으로 버려진 옷들의 산을 뒤지는 pd님을 봤을 때보다 그 페이지를 보고 더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생산한 옷, 우리가 소비한 옷을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로 수출하고 책임을 떠넘기고 쓰레기장으로 쓰는 것.

더 가슴이 아팠던 것은 이 옷들을 재활용하기 위한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아무런 보호장비도 갖추지 못하고 화학물질들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들의 어린 자녀들은 버려진 헌 옷이 가득 쌓인 곳에서 자란다는 것이었다.

헌옷들이 흘러간 곳 중에는 중고옷을 수입하는 게 금지된 나라들도 있었는데 이 말은 곧 불법적으로 밀수입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재활용이 되는 옷들도 엄청난 오염수를 방출하고 노동자를 병들게 하고, 재활용되지 않는 옷들은 끝내 소각되고 만다.

소비하는 데도 버리는 데도 윤리가 필요하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귀찮고 부담스럽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들에게 용돈을 주며 한 번 읽어보라 꼬셔봐야겠다.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눠보고 싶은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 - 경성에서 서울까지, 시간을 건너는 미술 여행
우진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앞서 한겨레 출판사에서 나왔던 『두 번째 미술사』를 너무 재밌게 읽었던 터라 『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를 기대하며 펼쳤다. 그리고 역시 기대했던 만큼 재미있게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다짐했다. 어떻게든 조각난 마음을 맞추기로. 억지로 흐르던 시간에 갇혀 있던 때였다. 직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힘든 일들이 "이제 네 순서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기다린 듯 겹쳐오는 그 파도를 온몸으로 맞던 때였다. 좋아하는 그림과 미술사에 대한 애정은 성난 파도에 휩쓸렸다. 떠올랐다. '나를 지킬 수 있는 방법'과 '내가 하고 싶은 것'을 생각하라던 친한 후배의 한 마디가. 9p

내가 쓴 글인가, 싶을 정도로 마음에 닿았던 구절. 너무나 좋은 직장임이 분명한 우리 회사. 그런데도 이 회사는 내겐 악질이다. 나를 전면에 내세워 홍보는 실컷 하고 내팽겨쳤다. 14년이 지나가는 동안 나를 보호하지 않았고 나를 공격하고 고립시키고 보상하지 않았다. 그 모든 것들의 정점이었던 올해. 내가 피해자 모드가 될까 저어하고 있는동안 나는 직장내괴롭힘용 인간이 되어 버린 것 같았다.

'좋아하는 것'에 눈을 돌리니 괴로움이 옅어져 갔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10p

저자처럼 나도 올해 책을 읽고 피아노를 치고 글을 쓰며 인형뽑기를 하며 괴로움을 희석시켰다. 느리지만 분명하게.

숨어버린 빛줄기를 찾고자 썼다. 2023년 여름의 초입, 가장 괴로운 시절이었다. 칼럼 첫 회가 게재되었다. 좋아하는 것을 잊지 않으려는 외침이었다. 10p

이렇게 쓰여진 책이구나, 하며 이미 내 마음으로 이 책이 들어와버렸다. 그녀의 뒤를 따라 갤러리를 누비는 관람객이 되어보았다.

"나 자신이 초라하다고 느껴지던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때 허물어질 듯한 판잣집을 보았고 그 모습이 왠지 나와 비슷해 보였다." 24p

작가는 작업을 통해 어느 시절 초라했던 스스로의 모습을 위로하고 치유했다고 한다. 25p

정영주의 <도시-사라지는 풍경 531> 2020년 작의 이야기다. 한 때 나는 구룡마을이라는 곳에 살았었다. 나는 그 곳이 허름하다던가 초라하던가 하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여기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이 서울 하늘 아래 우리가 모여 몸 누이고 밥 숟가락 뜰 수 있는 곳이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우리방에서-자매와 늘 같은 방을 썼다- 창문 밖을 바라보면 보이던 풍경과 닮은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도시의 귀퉁이에 웅크린 나의 모습같은가? 옹기종기 모여 엎드린 사람들같다. 거기 나는 없다. 소외된 나.

이 책은 작품을 소개하고 저자의 이야기를 듣고 작가와의 인터뷰를 보면 한 챕터가 끝난다. 알차다. 저자의 필력이 장난아니라 글맛이 너무 좋다. 저자의 글을 읽는 재미, 낯선 작품들을 소개받는 재미, 그 작품의 작가와의 인터뷰를 읽는 재미에 쉼 없이 완독할 수 있었다.

도시는 명멸한다. 유난히 내 그림자가 짙어 보이는 날도 있다. 다만 잊지 않기를. 뾰족한 빌딩 숲 속 곡선을 그리는 건 당신임을. 끝내 살아가리라. 달콤하고 살벌한 이 도시에서.54p

저자의 글을 읽는 것은, 쫀득한 키보드를 두드릴 때 느끼는 쾌감과 비슷한 느낌이다.

감정의 진폭은 주로 일상에서 크게 움직인다. 자기혐오, 인간관계에서 오는 중압감, 미래에 대한 불안, 세계에 대한 우려 등 다양한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살아간다. '작업'은 이 소용돌이를 잠재우기 위한 행위이다. 스튜디오에서 작업하며 내 세계관 속으로 다시 발을 들이는 일은, 일상에 쌓인 무의식을 정화하고 그것과 나를 다시 연결하는 과정이다. 56p 민준홍.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여덟 시간의 작업 시간. 59p 민준홍

크게 공감했다. 나에게 소용돌이를 잠재우고, 일상에 쌓인 무의식을 정화하고 그것과 나를 다시 연결하는 과정은 무엇일 수 있을까? 책을 읽는 것, 글을 쓰는 것, 피아노를 치는 것, 연기를 하는 것 무엇이든 좋으니 나도 그런 작업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하루 여덟 시간 하고 살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는 태어난다. 성별은 주어질 뿐이다. 각자가 던져진 생 안에서 분투한다. 그 길 위에서 여자 또는 남자라는 이유로 아플 일들이 줄어들었으면. 나혜석이 지금의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이 어떨지 묻고 싶다. 이재헌이 바라는 여성과 남성을 넘어서는 인간다움에 대해서도. 다시 계절의 끝자락이다. 당신의 자화상이 자주 웃음 짓기를. 116p

잠들지 못하는 밤과 새벽이 얼마나 길고 힘겨운지 잘 알고 있다. 상실과 마주하면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비로소 깨닫곤 한다. 문득 달라진다. 캔버스 가득한 풀숲이 쌓인 잿더미 같다. 붉고 하얀 풀꽃들이 무채색으로 보인다. 타오르다 남겨진 것들이 서글프다. 128p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속이 상했다. 작은 공간도 남겨두지 않은 작품 속 풍경이. 해사한 꽃송이 하나 발견할 수 없는 적막한 숲이. 아픔을 직면하라는, 너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외침 같았기에.

"현실에 절망할지라도 아름다운 것을 향해간다." 129p

고통은 흐르지 않는다. 겪어낼 뿐이다. 가혹하다. 만약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날을 지나고 있다면. 시간이라는 마법에 기대어보자고 얘기하고 싶다. 계절은 흘러간다. 340p

이채원의 고요의 바다 속에 갇힌 것 같은 요즘, 이 책을 읽고나니 그림들을 보러 가고 싶다. 갤러리 한 구석에서 남몰래 울다 오고 싶다.

『근대와 현대 미술 잇기』는 우진영의 마음과 미술잇기, 독자의 마음과 미술잇기, 작가들의 마음과 미술잇기, 작가들의 마음과 독자의 마음 잇기, 독자의 마음과 저자 우진영의 마음잇기 같다.

외롭고 서글퍼서 무언가와 이어지고 싶은 날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
박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는 자신을 더 나쁘게 상상하는 일을, 그때의 자신을 세상에서 격리시켜야 마땅한 악의 존재로 상상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너무 일찍 만들어진 자신의 괴담에 갇혀 책을 덮어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는 걸, 이야기는 얼마든지 다시 쓰일 수 있다는 걸 자꾸 잊었다. 206p

방 탈출 필승 공략법 : 일단 나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206p

저는 한참 기다렸어요. 그러고는 깨달았죠. 저는 누가 밖에서 열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려고 해보지도 않고. 저는 진짜 나가고 싶은지 저에게 다시 물었고, 간절함을 확인한 후 손잡이를 잡고 가운데 버튼을 누르며 돌렸어요. 문이 열리더군요. 아주 간단히. 207p

어쩌면 우리는 자가 격리 할 방이 필요한 저 밖의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은 방을 만들고, 마침내 자신의 힘으로 그 방을 탈출할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고, 풀이 방법을 공유하는 일을 함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종의 워크숍 같은 것을. 213p


사나운 워크숍을 마치고, 독립출판 워크숍을 들으면서 느낀 것들이 말로 정리되지 않았는데 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을 읽으며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상조뉴스 인터뷰 후 내 마음에 가시같이 걸려있던 '수동적인 사람'

나는 왜 늘 스스로를 수동적인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건지 순간 의문이 들었고 그게 지금 여기까지 왔다. 10년정도 묵혀두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내버려두었던 안전가옥 속 내면아이를 어떻게든 꺼내보려고, 그 아이를 성장시켜 현재의 나를 탈피해보려고 애썼던 시간들.

그러나 그 아이가 스스로 나오고 싶은 것인지 물어봐야 했다. 간절하지 않으니 나는 나올 수 없었고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다 읽고 나니 표지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이 이야기를 방탈출로 풀어낸 것도 독특하다고 느껴졌다. 안나도 기준도 근배도 우식도 결국 모두 내 안에 있는 모습들.

지금도 나는 어떻게든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겠다고 버둥거리는데 그것들은 아직 간절하지 않은 것일까? 문을 열 수 있는 손잡이가 어떻게 해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때가 되면, 밖에 있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아이는 너무나 간단히 손잡이를 잡아 비틀어 문을 열고 나올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나는 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너무나 간단히.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양양 - 가족의 오랜 비밀이던 딸의 이름을 불러내다
양주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맨얼굴 같은 아빠의 감정을 꼼짝없이 마주할 때면 어찌할 바를 몰라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었다.16p

저자가 알지 못하던 고모의 존재를 알게 된 날, 그녀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 연약한 민낯을 살짝 드러낸다. 그런데 그 날, 아버지의 한 마디 "양씨 집안 여자들은 불행했다"는 말. 그녀 역시 양씨 집안 여자였기에 술 취한 아버지의 이 한마디가 마음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고모는 왜 자살했던 것인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지금껏 고모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것인지.

당연하게 불행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양씨 집안의 여자들은 불행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고모의 삶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고모의 서사는 달라질 것이다. 27p

저자는 고모의 서사를 그저 '불행'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모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을 지도 모르는 고모의 서사를 듣기로 한다. 어떤 일들은 그 일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이름이 붙여지기도 하니까. 저자는 아버지가 '불행했던 양씨집안 여자들' 중 하나로 남겨둔 고모의 이야기를 따라가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기를 바랐다.

애도될 수 있는 죽음과 애도될 수 없는 죽음의 차이는 무엇일까? 죽음이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의 거울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죽음과 삶이 그만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또 닮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덤들은 모두 누군가의 삶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고 관리되지 않은 무덤과, 공원으로 조성되어 관리되는 무덤. 누군가가 계속해서 찾아오는 무덤과,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 삶이 저마다 다르듯 죽음도 결코 똑같은 모양은 아니다. 163p

이 부분에서 깊은 공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죽음은 결코 똑같지 않다. 내가 모셨던 첫 고인은 아주 어린아기였다. 시설에서 지내다가 영유아돌연사로 죽은 아이였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시설에선 아이가 입던 내복과 양말을 보내왔고 씻기고 입히는 건 너무 금방 끝났다. 입관이랄 것도 없었다. 다음 고인도 비슷한 또래의 아이였는데 이 아이는 가족이 있었다. 입관실 복도에 가족들이 미리 와서 울고 있었다. 새로 마련한 이불에, 인형에.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머리가 아팠었다. 나중에야 그게 슬픔임을 알았다. 애도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것은, 결국 삶도 그랬으리라는 것이다. 인간은 무력하게 태어난다. 주어지는 것들을 가지고 삶의 초반부를 꾸려나갈 수 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주어지는 것들이 너무 초라해 삶도 초라하다. 그것조차도 채 누리지 못하고 죽은 아이가 마음이 아팠던 것을 나중에야 알았던 것은 삶에서 애도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본능적으로 삶에서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죽었고, 잊혀져야 했던 고모의 삶을 애도해나가고 있었다. 그를 통해 고모와 같은 양씨 여자인 자신의 삶에 비어있는 어떤 것들을 더듬고 있었다.

윤심덕은 노래로라도 기억될 수 있지만, 고모는 남긴 것이 없었다. 문득 <양양>이 고모를 애도할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일었다. 164-165p

사의 찬미로 알려진 윤심덕의 죽음. 남녀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윤심덕에게 노래가 없었다면 누가 윤심덕을 기억하고 애도했을까. 저자는 고모의 이야기를 찾아 헤매지만 고모가 남긴 것을 찾지 못한다. 처음부터 그런 고모를 애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양양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저자는 고모의 흔적을 더듬어 나가면서 그녀가 해야 할 일을 찾아냈다. 고모가 남기지 못한 어떤 것을 양양을 통해 남기는 일.

화목하고 밝은 집 안에 자리한 이질적인 방, 누가 열어 보지 못하도록 꼭 잠겨 있던 방, 충분히 애도 되지 못한 죽음이 잠든 방. 그 방에는 혜자 이모가 있고, 주디스가 있고, 엄마가 있다. 조용히 사라진 존재들이 잠들어 있다. 169p

지금까지의 가족의 시간 속에서 지워져야만 했던 이름,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고 했던 바로 그 이름, 지영이었다. 그 이름을 지우는 데에는 누구도 쉽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지만, 사라진 이름이 다시 새겨지고 드러나는 데에는 몇 배 이상의 시간과 고민이 필요했다. 자살했다는 이유로,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유로, 질문조차 박탈당했던 이름의 귀환이었다. 마치 나와 손을 맞잡은 것처럼 내 이름 옆에 고모의 이름이 새겨진 것이 기뻤다. 지영과 주연. 그 네 글자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184-185p

아리고 쓰렸다. '지영' 두 글자를 새기기 위해 너무나 오랜 시간과 많은 고민이 필요했던 것이. 시대 속에 그녀의 삶이나 죽음이 떳떳하지 못한 것이 되었어야만 했던 것이. 만나본 적 없는 조카가 이렇게까지 고모의 흔적을 더듬었던 데에는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그 불행을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이 있다는 것이.

고모를 알아 갔던 특별한 여정을 통해 저는 사라질 수 없는 수많은 여성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어요. 저와 그녀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더 가까워지면 좋겠네요.

고모 이야기가 그 시작이 되길 바라며,

당신을 그리워하는 조카 주연. 196-197p

화목한 가정, 밝은 세상 속 방 한 칸에 가두어져 있어야 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 애도되지 못한 존재들. 저자는 고모의 이야기를 통해 그런 시절도 있었구나, 공감할 수 없는 세상이 더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모에게 편지를 띄운다.

만약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 버릴 것이다.

뮤리엘 루카이저, <케테 콜비츠> 중 199p

세상은 좀 터져도 된다. 많은 여성들의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기를. 그래서 세상이 좀 터지고 확장되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