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나는 혼자고 지금은 밤이다
바바라 몰리나르 지음, 백수린 옮김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럼에도 몇몇 순진한 믿음을 지닌 사람들은 이 세계를 떠돈다. 사랑하고 섬기고 기다리는 불치병에 걸린 채. 12p

산타로사에서 오는 비행기

하지만 또 생각했다. 내일은 다시 시작해야만 하고,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또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매일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잘 알았다. 22-23p

D 당신은 내게 이렇게 말했었죠? "제가 저답게 살려면 약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M 그래요. 저는 자신을 넘어서려 하지 않을 거예요. 스스로에게 압도되지도 않을 거고요. 저는 그저 나 자신이 되고 싶을 뿐이에요.


98% T인 나에게 닥쳐온 또 한 번의 힘든 시간..

머리로 이해하려 하면 안되는 책이다.

매혹적인 문장들을 '그냥'따라가면 마치 어느 날 밤 온몸이 땀에 젖어 소스라치게 깨어나는 한 편의 악몽같다.

그리고 이내 무슨 꿈을 꾸었는지는 잊어버리지만 슬퍼져 버리는 새벽의 느낌이다.

대담에서 몰리나르는 자신을 넘어서려 하지 않는다고, 스스로에게 압도되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저 나 자신이 되고 싶을 뿐이라고.

하루동안 내가 하는 생각들을 들여다보면 생각은 논리적이지 않다.

그것들은 입안에서 튀어 오르는 팝핑캔디처럼 도발적이고 도대체 연결고리가 어디 있는 지 알 수 없는 종횡무진의 날 것들이다.

어쩌면 논리정연하게 생각하고 말을 가다듬는 것은 자신을 넘어서려 하는 행위인것일까.

몰리나르는 그것들에 압도되려 하지 않고 그저 흘러가는대로, 튀어오르는 대로 글을 쓰고 또 쓰고

그것을 찢고 또 찢고 그런 시간들을 보내왔는지 모른다.

그런데 왜 그녀의 글은 슬프게 느껴질까.

그녀가 그녀 자신이 되지 못했던 것일까?

아니면 내가 나 자신이 되지 못했던 것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렁이는 음의 밤
최지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종종 한 점의 얼룩 같았다. 나라는 얼룩을 미워하지 않으려 애썼다. 그의 앨범은 듣는 이에게 끝까지 살아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마치 살아 있음의 의미는 살아 있다는 것에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19p

이상은의 여섯 번째 정규앨범 『공무도하가』는 '이 세상 어딘가를 헤매었던 사람들'(「보헤미안」)을 향한 헌사다. 우리의 성취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일깨운다. 종종 살아 있는 게 거짓말 같을 때가 있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이 흐르고, '추억과 희망으로 가득찬 방랑자'는 막다른 길에 이르곤 한다.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아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다. 나도 모르게 내가 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흘러가고 있다.

그것이 우리의 시작이고 우리의 끝이라는 걸 안다. 무심하게 작은 방 안에서 창대하고 빛나는 세계를 빚는 사람들이 있다. 이상은의 음악은 순환하는 이 세상을 노래한다. 침묵을 깨고 다른 목소리로, 시간의 강을 건너는 이를 목도하며 마음을 다한다. 35-36p

소설가로 산 지 반백 년이 넘은 선배는 어지러운 현실에 무력감을 느낀다고 하소연하는 내게 세상에 질지언정 분노하라며 쓴소리를 했다. 39p

'앞으로 그렇게 살지 말자고 하지만 살기 위해 그렇게 살았을 뿐인데.'(「못 우는데」) 47p

너는 반복되는 일상이 지겹게 느껴진다고, 할 수 있다고 되뇌는 일상과 힘내자고 말하는 일상이 이제는 싫증 난다고 했다.

자주 아픈 사람은 다른 사람의 고통과 감정을 잘 이해하고 감각한다. '나도 그렇게 세상도 쓸모 없지만'(「외로워 말아요 눈물을 닦아요」) 우리 앞에 와 있는 오래된 슬픔을 곱씹는다. 47p

그 시절 선배는 자기가 아무것도 아니어서 슬프다며 엉엉 울었다. 63p

의미는 뒤에 온다. 인간이 제멋대로 정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무의미하지 않으려면 스스로 그 의미를 불러야 한다. 95-96p

시인 백석은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나와 나타샤와 힌당나귀」)이라고 했다. 트루베르 멤버 피티컬은 이 구절을 동명의 곡 끝부분에서 반복해 부른다.

세상은 결코 버릴 수 없다는 듯이. 103-104p

나는 위로할 줄을 몰라 쓸쓸하다. 140p

목적지는 다다르지 못한 곳이죠. 세상에는 그런 곳이 무궁무진해요. 내 마음은 네 마음을 지나 새의 마음을 지나 살아내고 있어요. 사라지지 않으려고요. 144p


예전 싸이월드에서는 베스트 플리로 선정되면 도토리 100개를 주곤 했었다.

몇 번인가 베스트 플리로 선정되어 나도 도토리를 두둑하게 받고 또 그 도토리로 새로운 플리를 만들었다.

너무 내성적이라 자폐를 의심하던 시절, 플리를 만드는 건 나름대로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행위였다.

음악이란 그런 것이다. 제한된 범위를 넘어서는, 국경이 없는, 정의되지 않는 소통의 방식.

「일렁이는 음의 밤」은 하나의 노래, 또는 하나의 앨범을 QR코드를 통해 소개하며 각각 이야기를 전한다.

좋은 방식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밤, 음악을 듣고 있으면 뭔가가 일렁인다.

깊은 바닥으로 가라앉혀둔 감정들이다.

음악을 들으며 읽느라 오래 걸려 완독했다.

「일렁이는 음의 밤」은 작가가 내게 보내온 비밀스러운 편지 같은 책이다.

답장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이 전해준 음, 일렁이는 마음 잘 받았다고,

나의 일렁이는 음의 밤은 이러저러하다고 한 권의 책을 쓰고 싶어졌다.

내가 나에 대해 알아가던, 내가 나 자신이 되어가던 시절의 일렁이는 음들을 가득 담아. 밤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다 - 인권의 길, 박래군의 45년
박래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그런데 더 근원적으로는 내 이름 때문이다. 아버지가 이름을 잘못 지어주셨기 때문이다. 사실 내 생일도 문제다. 나는 1961년 생인데, 그해 양력 5월 1일에 태어났다. 5월 1일이 어떤 날인가. 세계적으로 데모하는 노동절 아닌가. 생일도 그런 데다가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박래군. 한자로는 '朴來群'이다. 눈 밝은 분들은 눈치채셨을 듯하다. '올 래'에 '무리 군'이라니. 무리가 온다? 그러면 무얼 해야 할까? 데모해야지. 나는 아버님이 지어주신 이름대로 살아왔을 뿐이다. 18p

"우리는 고참들한테 맞더라도 밑에 애들 안 때린다. 맞는 건 우리 대에서 끝내자."

그 다짐을 그는 실천했다. 고참들이 애들 '교육(기합과 구타)'을 안 시킨다는 이유로 그와 우리들을 두들겨 팼지만, 우리는 그 약속을 지켰다. 우리 소대는 구타가 없는 소대로 바뀌었다. 43p

하지만 퉁퉁 부어오른 상처보다 더 끔찍한 건 내 마음이었다. 폭력에 굴복했다는 무력감, 노동 해방을 위해 싸우는 전사가 이깟 폭력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는 자괴감에 너무 괴로웠다. 60p

장례 기간에는 느끼지 못했던 '부재의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나는 외로웠다. 76p

유가족들은 늘 죽은 자식에게 못 해준 게 많아서 미안했다. 살아있을 때 이해하고 격려해 주지 못해서도 미안해했다. 세상에 준비된 유가족은 없었다. 109p

사랑은 가슴을 뛰게 한다고 했는데, 나는 죽은 자들을 사랑한 것일까? 그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일까?116p

"될 일은 언제건 되더라고." 144p

"아저씨, 저 위에서 내려오는 거요,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려는 거요?" 299p

교황은 방한 중에 "고통에는 중립이 없다"는 말로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 깊은 위로의 말을 남겼다. 344p

점심을 먹고 화장실에서 설거지를 하던 중에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는 가사가 들리는 순간, 갑자기 목을 메었다. 급기야 "내가 죽고서 네가 산다면"에서 참았던 눈물이 터졌다. 1988년 동생을 잃었을 때 내 마음이 그랬고, 세월호 유가족들의 마음이 그럴 것이었다.

그리고 2015년 5월 17일 광주 금남로가 생각났다. 5·18 광주민중항쟁 35주년 전야제가 열렸다. 나는 세월호 유가족과 그 자리에 참석했다. 전야제가 종반으로 치달아 갈 때 도청 쪽 무대에는 5·18유가족들이 세월호 유가족들을 끌어안았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5·18 유가족들 품에 안겨서 너나없이 울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시민들도 같이 울었다. 어떤 백 마디 말보다 "니 맘 다 안다"는 한 마디의 말이 모두를 울렸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

숨 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 나희덕의 시 <귀뚜라미> 중에서 363p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나는 '죽은 이들과 같이 산다, 귀신들이 나를 도와줄 거다'란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런 다음부터는 때가 되었는데도 그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서운하다. 그러므로 나의 뒷배는 죽은 자들이다. 그들을 생각하면 없던 용기도 샘솟는다. '목숨 걸고 싸우다 죽기까지 한 사람도 있는데, 이깟 것'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인생은 죽은 이들과 더불어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나만 그럴까?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 앞서 죽어 간 이들에 대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는 것 아닌가.

돌아보면, 내가 해온 인권운동은 죽은 자들이 죽어 가면서도 외쳤던 '유언'을 현실에 접목해서 구체화하는 일이었다. 436-437p

"모든 눈물에는 온기가 있음을 잊지 말자."그래야 사람으로 살 수 있으니까. 439p


읽다가 몇 번이나 힘들어 책을 내려두었다.

책을 힘겹게 겨우겨우 다 읽고 나서 내가 가장 먼저 느낀 것은 그것이었다.

내가 박래군이 아니라 다행이다. 내가 나라서 그나마 편하게 살았다. '여럿이 함께'라는 내 이름대로 살려고 나는 나 나름대로 작은 우물안에서 발버둥 치면서도 이렇게 괴로운데.

내가 박래군으로 태어났다면 나도 저렇게 살았으리라 저 괴로움을 겪었으리라 생각하니 내가 그래도 나라서 안온하게 살고 있구나, 나의 작은 아픔에 매여서만 사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부끄러웠고, 또 자랑스러웠다.

나는 나의 이름에 맞게, 나에게 주어진 삶 안에서 최선을 다해 여럿이 함께라는 내 이름대로 살고 있으니.

나의 눈물에도 온기가 있음을 잊느라 모든 눈물에 온기가 있음을 가끔 잊기도 하지만 그래도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그래도 내가 이 책을 읽으며 부끄러움도 느끼고 힘에 부쳐 내려놓기도 하는구나 싶었다.

무감하게 읽어넘겨지지 않고 피가 뜨겁게 끓는구나 싶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어야 하는 필독서라고 감히 말해본다.

차가운 바닥 위에 토하는 울음,

풀잎 없고 이슬 한 방울 내리지 않는

지하도 콘크리트 벽 좁은 틈에서

숨 막힐 듯, 그러나 나 여기 살아 있다.

귀뚜르르 뚜르르 보내는 타전 소리가

누구의 마음 하나 울릴 수 있을까.

울리는 마음들이 모두 연대하는 세상이 되어보길, 바라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말라가의 밤
조수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죽고 싶은가, 살고 싶은가.

이것이 지난 10년 동안 나를 살아 있게 한 질문이었다.

지금껏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살고 싶어서가 아닌, 아직 답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28p

은우가 그런 아이였다.

또래 남자아이들이 땡볕 아래에서 방향을 잃고 헤매는 지렁이나 달팽이를 함부로 짓밟고, 비비탄총으로 거미를 맞추며 키득거릴 때 은우는 미물 하나 밟지 않으려고 바닥을 살피며 걷던 아이였다.

은우가 죽인 것은 오직 자기 자신 뿐이었다. 56-57p

웃다가, 웃다가, 울음이 쏟아졌다. 62p

인생은 물속처럼 상하좌우 구분이 안 돼 헤맬 때가 있지만, 도로는 정확해서 길을 따라가면 목적지가 나왔다. 목적지에 도착하면 다음 목적지를 향해 달리는 것. 이것이 내가 지난 10년간 삶을 버텨온 방식이었다. 63p

고난과 불행에 연이어 발목을 붙잡히는 기막힌 삶은 소설이나 영화뿐 아니라 현실에도 엄연히 존재한다. 자기가 경험한 세계가 전부인 줄 아는 사람들은 자기 잣대로 쉽게 확신하고 말하며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만, 세상에 다양한 삶이 존재한다는 걸 이해하는 사람이나 삶의 극단까지 가본 사람들은 말을 아낀다. 마음 하나도 신중히 쓴다. 가까이 있어도 안전한 사람들. 나는 이들이 안전한 사람들이라고 느꼈다. 70p

"누구나 저마다의 압력을 견디며 살아가는 거지. 누군가는 기다리고, 누군가는 술을 마시고, 누군가는 욕조에서 이불 빨래를 하고, 누군가는 심장이 터지도록 달리면서."

잠든 개의 흉곽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가 진 사장님이 말을 이었다.

"우리는, 숨을 참는 거고." 76p

그리고, 나는 안다.

실은 녀석들 모두 내 안에 그대로 있다는 것을.

사람은 제 안에 어린아이를 품은 채로, 영영 온전히자라지 못한 채로 속절없이 늙어가는 거니까. 322p

나는 자살예방교육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현장에서 일하는 22년간 숱하게 많은 자살자들과 자살사별자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살예방교육 강사로 활동하기 위해 교육을 받으면서 유난히 괴로웠던 것은 9살짜리 아이가 자살한 이야기를 들었던 때였던 것 같다.

죽고 싶은가, 살고 싶은가를 그 아이는 얼마나 생각했을까.

생각하다 생각하다 생각하기조차 지쳤던 것은 아닐까.

괜한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이었었다.

말라가의 밤은 담백하고 잔잔하게 영상을 보는 것처럼 흘러간다.

강렬한 감정의 폭발도 없이 그저 물이 흐르듯 흘러간다.

그래서 책을 읽어 넘기는 것 자체는 그리 힘들이지 않고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읽을 수 있었다.

하지만 단숨에 완결까지 다 읽고 나서도 잔잔하게 여운이 오래도록 남을 것 같은 책이다.

우리의 삶은 꾸역꾸역 웃다가 한 번 무너지며 엉엉 울고, 또 다시 꾸역꾸역 웃으며 버티는 날들이 더 많기에, 죽고 싶은지 살고 싶은지를 끊임없이 되새기게 된다.

삼구가 자신의 압력을 버티며 숨을 참고 정확한 도로를 따라 목적지에 도착하고, 또 다시 다음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목적지를 향해 나아간다.

나의 구도, 일구와 이구도, 삼구도 모두 내 안에 있고, 나 역시 영영 자라지 못한 채로 속절없이 늙어가고 있다.

누군가 웃다가 웃다가 울음이 쏟아질 때 내가 건강한 상태이길, 여유가 있기를 바라면서.

또 내가 웃다가 웃다가 울음이 쏟아질 때 내 옆에 있는 누군가가 건강한 상태이길, 여유가 있기를 바라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헌 옷 추적기 - 당신이 버린 옷의 최후
박준용.손고운.조윤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솔직히 책 제목만 보고도 부담스럽고 불편한 느낌이 든다.

나는 패션에 큰 관심도 없고 옷을 많이 사는 편도 아니지만, 사실 싼 옷을 사서 막 입고 더러워지고 낡으면 버리는 것에 거리낌은 없었다.

옷을 버리는 게 아니라 헌 옷 수거함에 넣는 것이니 재활용 될 것이라는 알량한 기대로 그 뒤를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이런 제목을 달고 책이 나오지 않더라도 조금만 생각해본다면 그 모든 헌 옷들이 재활용 될 리 만무하다.

헌옷수거함은 늘 꽉꽉 차 있고 매 시즌마다 새로운 옷이 쇼윈도를 장식하는데 과연 그 옷들은 모두 어디로 갈까?

새 옷들조차 완전히 판매되지는 않을텐데 남은 재고들은 어디로 갈까?

나는 그런 고민들마저 헌 옷 수거함에 쉽게 버려버리곤 했다.

그나마 나는 당근마켓 등에서 중고 의류를 구매해서 입는 편이라 나름 의식있는 편이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러다 우연히 보게 되었던 다큐영상, TRACER: 우리가 수거함에 버린 옷은 어디로? 153벌 GPS 활용 전세계 추적기.

책 내용이 기시감이 들었던 것은 그 영상을 책으로 펼쳐낸 것이어서였다.

'헌 옷이 어디로 갈까?'

단순한 궁금증에서 시작된 한겨레21의 프로젝트.

153개의 gps 추적기를 옷에 하나하나 손수 달아 수거함에 넣었다.

영상을 보는 내내 경악을 금치 못했었는데 어느 사이엔가 다시 잊혀져있었던 내용들이었다.

광활한 유튜브의 바다속에서 이 영상을 접했던 걸 생각하면 책으로 펴낸 것의 의미가 크게 다가온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프로젝트이고 또 그 내용이 너무 중요하다보니 최대한 많은 매체를 통해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면 좋겠다는 저자들의 간절한 마음이 느껴졌다.

한겨레출판이 아니면 어디서 이런 책을 만날 수 있을까 싶기도 했다.

책 속에도 버려진 옷들의 산이 페이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장면을 접할 수 있는데 나는 오히려 영상으로 버려진 옷들의 산을 뒤지는 pd님을 봤을 때보다 그 페이지를 보고 더 충격을 받았다.

우리가 생산한 옷, 우리가 소비한 옷을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로 수출하고 책임을 떠넘기고 쓰레기장으로 쓰는 것.

더 가슴이 아팠던 것은 이 옷들을 재활용하기 위한 과정에서 노동자들은 아무런 보호장비도 갖추지 못하고 화학물질들에 노출되어 있으며, 그들의 어린 자녀들은 버려진 헌 옷이 가득 쌓인 곳에서 자란다는 것이었다.

헌옷들이 흘러간 곳 중에는 중고옷을 수입하는 게 금지된 나라들도 있었는데 이 말은 곧 불법적으로 밀수입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재활용이 되는 옷들도 엄청난 오염수를 방출하고 노동자를 병들게 하고, 재활용되지 않는 옷들은 끝내 소각되고 만다.

소비하는 데도 버리는 데도 윤리가 필요하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귀찮고 부담스럽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들에게 용돈을 주며 한 번 읽어보라 꼬셔봐야겠다.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눠보고 싶은 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 4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