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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
박지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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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을 더 나쁘게 상상하는 일을, 그때의 자신을 세상에서 격리시켜야 마땅한 악의 존재로 상상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는 너무 일찍 만들어진 자신의 괴담에 갇혀 책을 덮어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는 걸, 이야기는 얼마든지 다시 쓰일 수 있다는 걸 자꾸 잊었다. 206p

방 탈출 필승 공략법 : 일단 나가고 싶다고 생각한다. 206p

저는 한참 기다렸어요. 그러고는 깨달았죠. 저는 누가 밖에서 열어주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려고 해보지도 않고. 저는 진짜 나가고 싶은지 저에게 다시 물었고, 간절함을 확인한 후 손잡이를 잡고 가운데 버튼을 누르며 돌렸어요. 문이 열리더군요. 아주 간단히. 207p

어쩌면 우리는 자가 격리 할 방이 필요한 저 밖의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은 방을 만들고, 마침내 자신의 힘으로 그 방을 탈출할 수 있도록 질문을 던지고, 풀이 방법을 공유하는 일을 함께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일종의 워크숍 같은 것을. 213p


사나운 워크숍을 마치고, 독립출판 워크숍을 들으면서 느낀 것들이 말로 정리되지 않았는데 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을 읽으며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상조뉴스 인터뷰 후 내 마음에 가시같이 걸려있던 '수동적인 사람'

나는 왜 늘 스스로를 수동적인 사람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건지 순간 의문이 들었고 그게 지금 여기까지 왔다. 10년정도 묵혀두었던 이야기가 있었다.

내버려두었던 안전가옥 속 내면아이를 어떻게든 꺼내보려고, 그 아이를 성장시켜 현재의 나를 탈피해보려고 애썼던 시간들.

그러나 그 아이가 스스로 나오고 싶은 것인지 물어봐야 했다. 간절하지 않으니 나는 나올 수 없었고 오랫동안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다 읽고 나니 표지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이 이야기를 방탈출로 풀어낸 것도 독특하다고 느껴졌다. 안나도 기준도 근배도 우식도 결국 모두 내 안에 있는 모습들.

지금도 나는 어떻게든 안에 있는 것들을 꺼내겠다고 버둥거리는데 그것들은 아직 간절하지 않은 것일까? 문을 열 수 있는 손잡이가 어떻게 해도 손에 잡히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때가 되면, 밖에 있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아이는 너무나 간단히 손잡이를 잡아 비틀어 문을 열고 나올지도 모른다. 그때가 되면 나는 저주받은 사람 중에 가장 축복받은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너무나 간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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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양 - 가족의 오랜 비밀이던 딸의 이름을 불러내다
양주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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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얼굴 같은 아빠의 감정을 꼼짝없이 마주할 때면 어찌할 바를 몰라 어디로든 도망가고 싶었다.16p

저자가 알지 못하던 고모의 존재를 알게 된 날, 그녀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 연약한 민낯을 살짝 드러낸다. 그런데 그 날, 아버지의 한 마디 "양씨 집안 여자들은 불행했다"는 말. 그녀 역시 양씨 집안 여자였기에 술 취한 아버지의 이 한마디가 마음에 무겁게 가라앉았다. 고모는 왜 자살했던 것인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지금껏 고모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던 것인지.

당연하게 불행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다. 양씨 집안의 여자들은 불행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고모의 삶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면, 고모의 서사는 달라질 것이다. 27p

저자는 고모의 서사를 그저 '불행'으로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고모의 삶에 가까이 다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할 기회가 없었을 지도 모르는 고모의 서사를 듣기로 한다. 어떤 일들은 그 일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다른 이름이 붙여지기도 하니까. 저자는 아버지가 '불행했던 양씨집안 여자들' 중 하나로 남겨둔 고모의 이야기를 따라가 다른 이름을 붙일 수 있기를 바랐다.

애도될 수 있는 죽음과 애도될 수 없는 죽음의 차이는 무엇일까? 죽음이 삶의 반대가 아니라 삶의 거울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죽음과 삶이 그만큼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또 닮았다는 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무덤들은 모두 누군가의 삶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나고 관리되지 않은 무덤과, 공원으로 조성되어 관리되는 무덤. 누군가가 계속해서 찾아오는 무덤과, 아무도 찾지 않는 무덤. 삶이 저마다 다르듯 죽음도 결코 똑같은 모양은 아니다. 163p

이 부분에서 깊은 공감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죽음은 결코 똑같지 않다. 내가 모셨던 첫 고인은 아주 어린아기였다. 시설에서 지내다가 영유아돌연사로 죽은 아이였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다. 시설에선 아이가 입던 내복과 양말을 보내왔고 씻기고 입히는 건 너무 금방 끝났다. 입관이랄 것도 없었다. 다음 고인도 비슷한 또래의 아이였는데 이 아이는 가족이 있었다. 입관실 복도에 가족들이 미리 와서 울고 있었다. 새로 마련한 이불에, 인형에. 나는 너무 화가 나서 머리가 아팠었다. 나중에야 그게 슬픔임을 알았다. 애도될 수 없는 죽음이라는 것은, 결국 삶도 그랬으리라는 것이다. 인간은 무력하게 태어난다. 주어지는 것들을 가지고 삶의 초반부를 꾸려나갈 수 밖에 없다. 어떤 이들은 주어지는 것들이 너무 초라해 삶도 초라하다. 그것조차도 채 누리지 못하고 죽은 아이가 마음이 아팠던 것을 나중에야 알았던 것은 삶에서 애도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저자는 본능적으로 삶에서 자기 이야기를 할 수 없었고, 죽었고, 잊혀져야 했던 고모의 삶을 애도해나가고 있었다. 그를 통해 고모와 같은 양씨 여자인 자신의 삶에 비어있는 어떤 것들을 더듬고 있었다.

윤심덕은 노래로라도 기억될 수 있지만, 고모는 남긴 것이 없었다. 문득 <양양>이 고모를 애도할 수 있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일었다. 164-165p

사의 찬미로 알려진 윤심덕의 죽음. 남녀의 차이가 극명하게 드러날 수 밖에 없었다. 윤심덕에게 노래가 없었다면 누가 윤심덕을 기억하고 애도했을까. 저자는 고모의 이야기를 찾아 헤매지만 고모가 남긴 것을 찾지 못한다. 처음부터 그런 고모를 애도할 수 있는 공간으로 양양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저자는 고모의 흔적을 더듬어 나가면서 그녀가 해야 할 일을 찾아냈다. 고모가 남기지 못한 어떤 것을 양양을 통해 남기는 일.

화목하고 밝은 집 안에 자리한 이질적인 방, 누가 열어 보지 못하도록 꼭 잠겨 있던 방, 충분히 애도 되지 못한 죽음이 잠든 방. 그 방에는 혜자 이모가 있고, 주디스가 있고, 엄마가 있다. 조용히 사라진 존재들이 잠들어 있다. 169p

지금까지의 가족의 시간 속에서 지워져야만 했던 이름, 흔적조차 남기지 않으려고 했던 바로 그 이름, 지영이었다. 그 이름을 지우는 데에는 누구도 쉽게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지만, 사라진 이름이 다시 새겨지고 드러나는 데에는 몇 배 이상의 시간과 고민이 필요했다. 자살했다는 이유로,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는 이유로, 질문조차 박탈당했던 이름의 귀환이었다. 마치 나와 손을 맞잡은 것처럼 내 이름 옆에 고모의 이름이 새겨진 것이 기뻤다. 지영과 주연. 그 네 글자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184-185p

아리고 쓰렸다. '지영' 두 글자를 새기기 위해 너무나 오랜 시간과 많은 고민이 필요했던 것이. 시대 속에 그녀의 삶이나 죽음이 떳떳하지 못한 것이 되었어야만 했던 것이. 만나본 적 없는 조카가 이렇게까지 고모의 흔적을 더듬었던 데에는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그 불행을 이해할 수 있는 맥락이 있다는 것이.

고모를 알아 갔던 특별한 여정을 통해 저는 사라질 수 없는 수많은 여성들의 존재를 알게 되었어요. 저와 그녀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이 더 가까워지면 좋겠네요.

고모 이야기가 그 시작이 되길 바라며,

당신을 그리워하는 조카 주연. 196-197p

화목한 가정, 밝은 세상 속 방 한 칸에 가두어져 있어야 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 애도되지 못한 존재들. 저자는 고모의 이야기를 통해 그런 시절도 있었구나, 공감할 수 없는 세상이 더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고모에게 편지를 띄운다.

만약 한 여성이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는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세상은 터져 버릴 것이다.

뮤리엘 루카이저, <케테 콜비츠> 중 199p

세상은 좀 터져도 된다. 많은 여성들의 자신의 삶에 대해 진실을 털어놓기를. 그래서 세상이 좀 터지고 확장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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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미에르 피플 - 개정판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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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책을 좋게 읽었기에. 그리고 종교도 있고 그 정도의 여유는 있기에. 김새섬 그믐대표가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해주십사 빈다.

801호부터 810호까지, 이렇게 모아두기도 힘들 정도로 독특한 인물들의 향연이다.

801호 슬픔이 필요해서 세브란스 장례식장 근처를 맴돌던 박쥐인간과 만난 슬픈 임산부

802호에 사는 게 힘든 여자아이 쩜이 만들어 낸 이야기 속 거지같은 상황에 빠진 남자와 모기

803호 키도 크고 꽤 잘생긴, 그리고 신기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청각장애인 재홍과 138cm 엄지공주(와 802호 쩜)

804호 죽은 동생의 연인이 쓴 작품 「뤼미에르 피플」의 출간허락요청과 이현수를 찾아달라는 요청을 동시에 받는 나연

805호 아내와 어린자식 앞에서 돈다발로 맞으면 돈을 주겠다고 제안하는 재벌2세들과 사채업자들에게 쫓기느라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남자

806호 삶이 어렵지 않은 여자, 소연경과 인터넷 여론 조작기관팀 알렙의 멤버들

807호 결막염으로 인해 버려져 길냥이 세계에 뛰어든 마티

808호 쥐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반인반서(쥐)들의 인간세상 생존기

809호 아직 인정받지 못하는 천재라고 스스로를 생각하고 복잡한 패턴을 한 눈에 인식하는 능력이 미래에는 필요할 것이라 믿으며 훈련하는 상호

810호 차기 밤섬 당주가 될 운명인 현수.

「뤼미에르 피플」은 한마디로 기이하고도 절묘한 인간 군상의 실험실이다. 801호부터 810호까지 열 개의 방 안에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존재들이 산다. 그들은 모두 저마다의 결핍을 안고 있지만 그 결핍은 이 소설의 세계를 굴러가게 하는 동력처럼 작용한다.이 책이 흥미로운 이유는 단순히 기이한 인물들의 연작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층위를 실험적으로 분할해 보여준다는 점이다. 읽는 내내 이건 현실인가, 환상인가를 자꾸 되묻게 된다. 그러나 장강명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이미 충분히 비현실적인 존재임을 증명한다.

「뤼미에르 피플」 의 매력은 각 호실이 완전히 독립된 듯하면서도 미묘하게 이어진다는 데 있다. 슬픔, 욕망, 생존, 서사, 비인간성. 이 모든 키워드들이 서로 다른 인물들을 매개로 교차한다.

그렇기에 「뤼미에르 피플」은 실험적이고도 인간적인 세계다.

저자는 현실을 정면으로 응시하면서도 그것을 기묘한 상상의 틀 안에서 다시 비틀어낸다. 사회를 향한 통렬한 비판과 인간을 향한 연민, 건조한 유머가 교차한다.

장강명은 이 책에서 인간을 단순히 ‘살아 있는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란 존재가 얼마나 쉽게 비인간이 되고, 또 얼마나 끈질기게 인간으로 남으려 하는지를 보여준다. 박쥐인간, 반쥐 인간, 길냥이 마티처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이 등장하지만 그들이 품고 있는 감정과 욕망은 가장 인간적이다. 반대로 인간인 인물들은 종종 가장 괴물 같은 선택을 한다.

결국 이 작품은 ‘무너지는 시대의 인간들’을 위한 일종의 실험 보고서다. 장강명은 사회 구조 속에서 기묘하게 변형된 감정들을 해부하듯 펼쳐놓고, 그 속에서 우리가 잊고 있는 감정의 형태를 찾아낸다.

읽고 나면 오래도록 마음 한쪽이 낯설게 쿡 찔린다. 우리역시 뤼미에르 피플 중의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한 소설집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에 대한 거대한 관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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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몸으로 살기 - 나를 다듬고 타자와 공명하는 어른의 글쓰기
김진해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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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는 내 얘기가 독자에게 가닿기를 간절히 바라는 행위입니다. '당신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있으니 잠깐 시간을 내어 주세요.' 글은 독자와 공명하고 싶을 때 하는 작업입니다. (중략) 자세를 낮추고 목소리를 가다듬어 곡진하게, 간절하게 말해야 합니다. 자리에 앉자마자 자기 얘기만 퍼붓는 사람은 거북합니다. 끝까지 듣기도 어렵죠.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내 글을 읽어줄 사람의 상태를 살피면서 써야 합니다. 16-17p

일기 외에 글을 써본 적이 없던 내게 글을 쓰는 것은 혼잣말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글을 써보겠다고 마음을 먹자 도통 뭘 써야 할 지 모르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아무거나 자유롭게 써봐주세요, 라는 말을 들어도 써달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때와 달리 써지지 않았다. 저자의 말처럼 글쓰기가 내 얘기가 독자에게 가닿기를 간절히 바라는 행위라면 납득이 되는 일이다. 나는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를 해본 경험이 별로 없고 또 누군가가 '나의 이야기'를 들어준 경험도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가닿기를 간절히 바라는 경험은 생경하다. 일기는 혼잣말이기 때문에 자리에 앉자마자 내 얘기만 퍼붓는 것이 오히려 내게는 익숙하다.

확고한 글보다는 흔들리는 글, 배회하고 찾아 헤매는 글, 삶의 두께가 느껴지는 글을 쓴 사람이 보고 싶더군요. 글의 주인이 보고 싶어지는 글은 그 글이 나에게 와 닿았다는 뜻입니다. 글을 쓰는 이유도 누군가에게 가닿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겠고요. 17-18p

그러나 이어 저자는 글을 쓰는 이유도 누군가에게 가닿고 싶다는 마음 때문일 것이라 이야기한다. 결국 내가 일기를 쓰는 것도 어쩌면 나 자신에게라도 내 마음을 전하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닿을 수 없다면 나 자신에게라도.

글은 연속적이고 뒤엉킨(미분화된) 세계에서 어떤 것은 언급하고 어떤 것은 누락시키는 방식으로 편집합니다. 우리의 기억도 편집입니다. 24p

예전에 일기를 썼던 것을 돌이켜보면 일기라기보다 일지에 가까웠다. 우리의 기억도 편집이기에, 최대한 기억이 편집 작업을 많이 진행하기 전에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싶었던 것 같다. 각자 편집된 기억으로 다투고 상처를 주고받는 게 싫었다. 그렇다면 나는 글을 써왔던 사람이라기보다는 기록해왔던 사람이 아닐까.

주제와 글감은 서로에게 기대고 있습니다. 글감이 따로 있고 주제가 따로 있는 건 아닙니다. 동시적입니다. 글감 안에 주제가 말하고, 주제 안에서 글감이 제 빛을 냅니다. 47p

어떤 게 나은 구성일까요? 저는 제가 선택한 구성이 제일 좋더군요. '이게 제일 좋은데!'라는 느낌이 들면 그게 좋은 겁니다. '아직 덜된 것 같은데!'라는 느낌이 들면 아직 덜된 겁니다. 다른 기준은 없습니다. 81p

유일한 문장은 없습니다. 최후의 문장도 없습니다. 그저 쓸 뿐. 92p

막연하게 글을 써보고 싶다, 글을 쓰겠다는 생각만 있던 찰나에 이렇게 친절한 글쓰기 책이라니. 저자는 친절하고 상냥하게 글 쓰는걸 두려워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계속해서 전한다. 누구나 쓸 수 있고, 어렵지 않게 써도 되고, 그저 써보라고.

이렇게 번역은 수많은 후보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107p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 역시 번역이라는 생각을 한다.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더라도 서로의 언어는 다를 수 밖에 없다. 첫 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나의 첫 눈과 상대방의 첫 눈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결국 우리의 언어는 고유하고 유일하다. 그래서 서로의 말을 나의 말로 번역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수많은 후보 중 하나를 선택하는 것에서 저 사람과 내가 잘 맞는지, 맞지 않는 지가 갈리는 것 같다.

길게 쓴 문장은 선물을 정성껏 감싼 포장 같습니다. 매번 그러면 실속 없는 겉치레가 되지만, 소중한 사람에게 선물하면서 주머니에서 덜렁 목걸이만을 꺼내 주지는 않습니다. 포장을 뜯을 때 갖게 되는 기대감과 궁금증을 함께 선물하는 겁니다. 그럴 때 곱게 싼 포장은 선물의 일부입니다.

문장을 길게 쓴다는 것은 필요 없거나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덕지덕지 붙인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행위를 둘러싼 시공간, 전후 상황, 동시적 상황, 여러 사건 중에서 어떤 것이 우위에 있는지를 한 문장에 담는다는 뜻입니다.

(중략) 길게 쓴 문장은 하나의 사건을 곧바로 말하지 않고, 그것과 연결된 사건을 일부러 함께 보여줌으로써 벌어진 사건을 단순화하지 않고 장면을 쉽게 넘기지 않게 만듭니다. 그 장면에 좀 더 머물라고, 조금만 더 있다가 가라고 손목을 잡습니다. 글은 독자를 머무르게 하는 것이니 문장을 길게 쓰는 것도 익혀봄직합니다. 129-130p

문장을 길게 쓰는 편이다. 간결한 글이 좋은 글이라는 것을 알지만 쓰다보면 문장이 길어져 고민이었는데 이 대목에서 위안이 되었다. 간결한 문장도, 긴 문장도 나름의 멋과 맛이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보다 그냥 먼저 써보는 게 좋다고 저자는 꾸준히 이야기한다.

글쓰는 사람이 갖춰야 할 제1의 덕목은 '세계를 감각하기 위한 집요함'이라는 것. 136p

글이 할 일과 생각이 할 일을 분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순서를 바꿔보시기 바랍니다. 생각이 먼저가 아니라 글이 먼저입니다. 글이야말로 여러분의 삶에 형태를 부여합니다.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글을 씀으로써 뿌옇게 뒤엉킨 생각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글이 할 일에 여러분의 생각이 간섭하지 않도록 하세요. 생각은 진부합니다. 그러니 글쓰기 실력을 높이려면 무조건 초고를 빨리 써야 합니다. 156-157p

정말 지금 나에게 꼭 필요한 책을 읽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생각이 먼저가 아니라 글이 먼저. 너무 명쾌하다. 생각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

자, 여기서 중요한 걸 놓쳤습니다. 바로 '무당집'자체입니다.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무당집이 기억난다면, 그건 글쓴이에게 중요한 글감이었겠죠. 그런데 '무당이 사는 집이 있었다' '지날 때마다 기웃거렸다' '굿하는 장면을 구경하기도 했다'고만 하면, 독자는 그 집을 실감 나게 떠올리지 못합니다. (중략) 물론 모든 문장에서 장면을 떠올리게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 마음을 사로잡은 글감에 대해서는 장면을 보여줘야 합니다. 183-184p

이 부분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 간결해야 하는 것은 간결하지 않고 불필요한 것은 과하게 묘사하고 있지 않았는가 되돌아보게 되었다. 친절하고 상냥하지만 콕 짚어야 하는 부분들은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설명해준다. 편안하게 읽힌다는 것이 불편하고 어렵지 않다는 것이지 쉬운 것만 말한다는 뜻은 아니다. 저자가 몸으로 부딪치며 얻어낸 중요한 부분들을 이해하기 쉽게 알려준다.

'평정심'은 우리가 추구할 이상적인 상태일 뿐입니다. 감정은 시시때때로 변합니다. 우리는 감정 자체입니다. 감정과 함께 감정과 싸우면서 삽니다. 사실이나 사건과 싸우는 게 아닙니다. 사실과 사건이 만들어내는 감정과 싸우는 겁니다. 225p

간지럽히는 손가락이 웃으면 안 됩니다. 간지럽힘 당하는 옆구리가 웃어야 합니다. 227p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을 에워싸고 있는 현실과는 다른, 또 하나의 깊고도 흥미로운 삶을 자신의 내부에서 창조해보고픈 욕구를 가진 사람들입니다."309p

책을 다 읽고 느낀 것은 저자가 인간적인 매력과 여유가 넘치는 사람일 것 같다는 것이었다. 쓰는 몸으로 살자는 치열한 이야기를 하면서 이렇게 편안하고 유머러스하게 독자를 설득할 수 있다니. 도서평론가 이권우 님이 추천사에서 말하듯 방황과 모색의 시간 없이 바로 '쓰는 몸'을 갖추게 해주는 글쓰기 책이다. 정말 저자는 단아하고 명징하고, 진지하고 능청맞으며 부드럽게 성찰하지만 날카롭게 비판한다. 그리고 글쓰기도 잘 가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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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미술사 - ‘정설’을 깨뜨리고 다시 읽는 그림 이야기
박재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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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에 대해 잘 알지 못 하는터라 내가 이해하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했던 것이 무색하게 「두 번째 미술사」 는 부담없이 잘 읽히는 재밌는 책이었다. 책을 잡고 한 번도 내려놓지 않고 끝까지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가장 처음에 소개하는 것은 고흐인데, 나처럼 미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누구나 알고 있는 사람과 이야기를 통해 책에 몰입하게 했다. 닥터 후라는 드라마에 고흐가 미래로 와서 자신이 미래에는 사랑받는 화가가 되었고 자신의 작품들 역시 많은 이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음을 보고 감격하는 장면이 있었다. 이 장면은 숏폼과 릴스로 재가공되어 드라마를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널리 퍼졌었다. 저자는 과연 정말 고흐는 살아 생전 작품을 하나 밖에 팔지 못했던 것인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를 풀기 시작한다.


고흐가 죽고 동생 테오도 일찍 죽게 되었을 때, 테오의 아내는 어땠을까? 그간 시아주버님께 후원했던 돈도 만만치 않았을 것인데 빛을 볼만하니 죽어버리고, 남편도 죽고 생계는 책임져야 하고. 그녀가 야무지게 브랜딩을 시작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생계유지뿐 아니라 지금 이렇게 고흐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거장으로 기억될 수 있었을 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예술계의 라이벌에 대한 이야기를 흥미로워한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이야기처럼. 하지만 실제 이야기는 더욱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에게 자극이 되고 서로에게 한계를 뛰어넘는 성장의 가능성을 보게 하는 존재. 존중하고 우정을 나누며 대화하며 서로의 존재 덕분에 자신이 갈 수 있었던 한계를 뛰어넘는 더 높은 경지에 도달하게 하는 존재. 나는 이런이야기가 더 좋다.


결국 지금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고 사랑받고 기억되는 작가들은 브랜드가 잘 구축되어 있는 이들이다. 예술이 뛰어난 경지에 이르는 것만큼이나 자신을 브랜딩하는 것도 중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은 것이다.


미켈란젤로의 파트도 너무 재미있었다. 대리석을 조각하는 것 뿐 아니라 그는 자기 신화를 조각하는 것에도 천재적이었다. 현대에서도 이런 식의 아티스트 신화 전력은 유효하니까.


다 읽고 나서 느낀 것은 재밌다는 감상이었다. 만들어진 신화와, 시간이 흐르면서 뒤얽힌 오해, 잊혀졌다가 시대적인 흐름에 맞아 다시 기억되고, 이름을 다시 붙여 작품의 가치가 달라지는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정설인 첫번째 미술사 보다 이 두번째 미술사가 훨씬 더 흥미진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보여지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보다 그 이면과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인간 보편성을 더 즐기는 사람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프롤로그에서 말하듯 누가 역사에 남고 누가 사라지는가는 단순히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와 사회가 어떤 이야기를 선택해 기억하는가에 달려 있기 때문에 아직 끝나지 않은 미완의 이야기들이 있음을 쉽고 편안하고 즐겁게 알게 하는 좋은 책, 두 번째 미술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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