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겔 에르난데스는 뛰어난 시인이지만 이상하게도 형편없는 시인들이 그를 숭배한다(확실한 답은 아닐 것 같아서 저어되지만 내가 생각해 낸 설명은 이렇다. 에르난데스는 고통의 편에 서서 고통에 대해 노래한다. 그런데 형편없는 시인들은 대개 실험용 쥐처럼 괴로워하기 마련이다. 특히, 남들보다 오랫동안 지지부진하게 사춘기를 겪으면서 말이다).
한번은 내가 어떤 여자를 좋아하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어린 청년이 그저 시간을 죽이려고 무심코 던진 바보 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아저씨는 내 질문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고 한참 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 마침내 대답을 찾았는지 입을 열었다. <나는 조용한 여자가 좋아.> 그러더니 곧장 이렇게 덧붙였다. <그런데 죽은 사람만 조용하지.> 아저씨는 동안을 두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죽은 사람도 조용하지 않군.〉
"그러면 이제 이 나라가 악마의 손아귀에 들어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아직 이 땅에 있는 사람들은 악몽을 꾸기 위해 살아남은 거야. 그저 누군가는 남아서 꿈을 견뎌야 하니까 말이야."
그 시간의 게레로 거리는 무엇보다 공동묘지와 흡사하다. 그러나 1974년의 공동묘지도, 1968년의 공동묘지도, 또 1975년의 공동묘지도 아닌 2666년의 공동묘지처럼 보인다. 송장이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의 눈꺼풀 아래서 잊혀진 공동묘지, 무언가를 망각하고 싶어 한 끝에 모든 것을 망각하게 된 한쪽 눈의 무심한 눈물 같다.
일상은 단지 몇 초 동안 지속되는 얼어붙은 투명함이다. 그래서 나는 돌아와 일상을 바라보았고 일상이 나를 둘러싸도록 가만히 있었다. 난 어머니야, 솔직히 공포 영화가 나한테 어울린다고 생각지 않아. 내가 일상에게 말했다. 그때 일상이 비눗방울처럼, 그러나 미친 듯이 부풀어 올라 펑 터졌다.
그러나 반쯤 왔을 때 떠오르는 생각이 있어 뒤로 돌아섰다. 하지만 거리에는 이미 임팔라가 없었다. 보이다가 안 보이다가, 있다가 없다가 했다. 거리는 어둠의 퍼즐로 변했는데 조각이 몇 개 빠져 있었고, 모자라는 조각 중 하나가 기이하게도 나 자신이었다. 내 임팔라는 가버렸다. 상황 파악이 덜 된 나도 가버렸다. 내 임팔라가 머릿속에 되돌아왔다. 내가 머릿속에 되돌아왔다.그때 나는 멕시코인 특유의 사고방식이 발동해서 겸허하게, 그러면서도 당혹해하면서 우리가 운명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그 폭풍우 속에서 우리 모두가 익사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가장 교활한 자들만, 나는 틀림없이 아닌 그런 자들만 조금 더 물 위에 떠 있을 수 있으리라는 것도 깨달았다.
공간은 이렇게 오직 단어들, 흰 종이에 적힌 기호들과 함께 시작된다. 공간을 묘사하기: 공간을 명명하기, 공간을 글로써 그리기, 해도 제작자들처럼 해안을 항구의 이름들로, 곶의 이름들로, 작은 만의 이름들로 채워넣어, 마침내 육지와 바다가 오로지 연속되는 하나의 텍스트 띠로만 분리되게 만들기. 알레프, 전 세계가 동시에 보이는 이 보르헤스의 장소는 바로 알파벳이지 않을까? - P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