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브리스 델 동고, 아글라야, 나스타샤, 미슈킨, 주위에서 그들을 얼마나 많이 보게 되는지! 그들은 모두 미지로의 여행의 출발점에 있다. 물론 그들은 방황한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방황이다. 그들은 방황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채 방황하는 것이다. 이중적인 의미에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을 모르고 또, 자기 자신을 모른다. 어른이 되어서 거리를 두고 볼 때에야 방황이 방황으로 보인다. 더 나아가 이렇게 거리를 둘 때에만 방황의 개념 자체를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미래의 어느 날 지나간 젊음을 향해 어떤 시선을 던지게 될지 현재로서는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 확신이 얼마나 연약한 것인지를 이미 경험한 어른들보다 훨씬 공격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옹호한다. - P204

젊은 시절에 대한 시오랑의 격노는 분명한 무언가를 보여준다. 즉 출생에서 죽음 사이를 잇는 선 위에 관측소를 세운다면 각각의 관측소에서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자리에 멈춰 있는 사람의 태도도 변한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람의 나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 정말이지 이것은 분명하다. 아, 너무나 분명하다!
그러나 처음에는 오직 이데올로기적인 거짓 증거들만 눈에 보인다. 실존적 증거들은 명백한 것일수록 덜 드러나 보인다. 삶의 나이는 커튼 뒤에 숨어 있다.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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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누구라도 만일 내가 다른 곳에서, 다른 나라에서 다른 때에 태어났다면 내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법이다. 이 질문은 가장 널리 퍼진 인간의 환상 가운데 하나 즉 우리 삶의 상황을 단순한 배경이나, 아니면 항상 독립적이고 지속적인 우리의 ‘자아‘가 단순히 지나치는 우연적이며 바뀔 수 있는 상황으로 인식하게 하는 환상을 내포한다. 자신의 다른 삶, 여남은 개 되는 가능한 다른 삶을 상상하는 일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러나 몽상은 이제 그만! 우리 모두는 출생의 날짜와 장소에 구체적이고 유일한 상황을 벗어나서 생각할 수 없으며, 이러한 상황에서만 그리고 그를 통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낯선 두 사람이 조셉 K가 기소당했음을 알리기 위해 아침에 그를 찾아오지 않았더라면 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딴판의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 P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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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브로비치는 <페르디두르케>에서 20세기에 일어난 근본적인 전환을 포착했다. 그때까지 인류는 두 가지 부류, 즉 현상을 유지하려는 자와 그것을 바꾸려는 자로 양분되었다. 그러데 역사의 가속화는 그 중대한 결과들을 가져다주었다. 예전에는 매우 천천히 바뀌는 사회의 동일한 환경 속에서 살았지만, 갑자기 굴러가는 양탄자처럼 역사가 발밑에서 움직이는 것을 느끼는 순간이 온 것이다. 현상이 움직이게 된 것이다! 갑자기 현상과 일치함은 움직이는 역사와 일치함과 같은 것이 되었다. 결국 사람들은 진보적이면서도 순응적이며, 보수적이면서도 반항적일 수 있게 되었다!
- P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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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와 아젤라스트 사이에 평화란 불가능합니다. 한 번도 신의 웃음소리를 들어 보지 못한 아젤라스트들은 진리란 명확하고 모든 사람이 같은 것을 생각해야 하며, 자신이 스스로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존재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한 개인이 되는 것은 진리의 명증성과 다른 사람들의 일치된 동의를 상실함으로써입니다. 소설이란 개인들의 상상적인 낙원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안나도 카레닌도 그 누구도 진리의 소유자가 아닌 영역이며, 그러면서도 모두가, 안나도 카레닌도 이해될 수 있는 자격을 지니는 영역입니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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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합리적인 체계는 정치적 생활까지도 지배한다. 공산주의 러시아는 지난 세계 대전에서도 상징의 전쟁에서도 승리했다. 가치를 열망하면서도 그것들을 분별할 수 없는 에슈 같은 인물들로 구성된 거대한 군대는 최소한 반세기 동안만큼은 선과 악의 상징을 퍼뜨리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유럽인들의 의식 속에서 집단 수용소는 결코 나치즘과 같은 절대적 악의 상징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월남전에 대해서는 집단적이고 자발적으로 항의했던 사람들이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베트남, 식민주의, 인종차별주회, 제국주의, 파시즘, 나치즘 같은 단어들은 마치 보들레르의 시에서 색채와 소리가 서로 화답하듯 같은 울림을 갖는다. 반면에 아프가니스탄에서의 전쟁은, 말하자면 상징적 벙어리인 셈이고 절대적 악의 마술적 테두리 바깥, 상징의 간헐천 바깥에 있는 것이다.
- P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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