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봄 미국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저서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미국 진보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가 국내에 번역·출간돼 언론이 비상한 관심을 보이고 국회의원들이 가장 많이 읽은 책이 되는 등 뜨거운 주목을 받은 적이 있다. 이 책의 논지는 우리 사회에 제대로 전달되었는가? 2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평가해보자면,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지금 개혁·진보세력의 의제 설정은 여전히 ‘코끼리’ 생각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이다.
레이코프는 그 책에서 “어떤 사람에게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면 그 사람은 코끼리를 떠올릴 것이다”라며 “상대편의 프레임(생각의 틀)을 단순히 부정하는 것은 단지 그 프레임을 강화할 뿐이다”고 주장했다. 이는 단지 무엇에 반대하는 것만으론 부족할 뿐만 아니라 역효과를 내기 쉽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다.
언젠가 언론인 김중배 선생은 ‘신자유주의’를 잘못된 언어 사용이라고 질타한 바 있다. 보수 언론이건 진보 언론이건 언론이 그 말을 별 생각없이 수입해서 쓴 바람에 ‘신자유주의 타도’라는 구호는 단지 신자유주의 홍보 효과를 낼 뿐이라는 것이다. 어느 세월에 일반 대중에게 ‘자유주의 타도’와 ‘신자유주의 타도’의 차이를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인가?
지금 개혁·진보세력은 아직도 1970·80년대의 저항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하는 관점에서 의제를 독자적으로 생산해내는 게 아니라 지금 당장 닥친 것들 중에서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의제를 따라가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개혁·진보세력의 첫 번째 의제는 단연 비정규직을 포함한 실업 문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먹고 사는 데 가장 중요할 뿐만 아니라 사회정의의 초석이 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개혁·진보세력이 꿈꾸는 ‘더불어 같이 사는 사회’가 단지 상층계급을 향한 요구일 뿐이고, 중하층 계급 내부에선 전혀 작동하지 않는 원리라면, 아예 ‘개혁·진보’의 딱지를 떼는 게 좋다.
촛불시위에 등장한 “비정규직은 노동의 광우병입니다”라는 손팻말은 촛불시위의 둔감을 고발하는 비수와 같다. 비정규직 문제가 광우병이라는 프레임을 빌려 말해야만 할 정도로 낮은 단계의 의제란 말인가? <한겨레> 기사가 소개한, 김경욱 이랜드일반노조 위원장의 다음과 같은 고백은 어떤가.
“촛불 집회에 나오면서도, 전기가 끊겨 아이들이 촛불을 켜 놓고 공부한다던 비정규직 조합원의 말이 떠올라 차마 촛불을 못 켰다.”
과연 무엇이 문제인가? 우리는 ‘고통분담’이란 말을 위를 향해서만 외칠 뿐, 내가 나눠줘야 할 것도 있다는 걸 아예 생각하지 않는다. 밑은 보지 않고 위만 바라보는 한국인 특유의 상층지향성은 지금도 한국인의 근면성과 역동성을 낳는 큰 장점이긴 하지만, 이것이 사회정의 문제에 이르면 거의 재앙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