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티즌들의 ‘조·중·동 광고주 압박운동’에 대해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이런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 도시에 A그룹과 B그룹의 시민들이 있었다. 자치단체를 장악한 A그룹이 B그룹을 부당하게 대우하자 B그룹은 시정을 요구했고, 자치단체가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자 실력 행사의 일환으로 A그룹 소속 시민이 운영하는 시내 모든 가게에 대해 불매운동에 나섰다. 분쟁의 직접 당사자가 아닌 제3자를 대상으로 하는 2차 불매운동이었다. B그룹 시민들은 평화롭게 어린아이를 앞세우고 거리행진도 벌였고, 다소 덜 평화롭게 가게들 앞에 진을 치고 드나드는 이들을 감시하기도 했다. 때론 좀더 험악한 분위기도 연출됐는데, 불매운동의 한 지도자는 집회에서 “누구든 저 가게들에 들어가다 우리한테 걸리면 목을 부러뜨리겠다”고 호언했다. 결국 피해를 입은 가게들이 B그룹 지도자들을 상대로 업무방해 등을 이유로 한 소송을 냈다.
이 나라 최고법원은 이렇게 판결했다.
“(업체 간 자유로운 경쟁을 해치거나 노동쟁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등) 순전히 경제적인 동기의 불매운동과 달리, 자기 권리를 찾기 위해 정치·사회·경제적 변화를 이루려는 불매운동은 표현의 자유에 관한 문제다. 표현의 자유란 단지 추상적인 토론을 할 자유만 뜻하는 게 아니라, 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이 의도한 어떤 행동을 하게끔 만드는 것도 포함한다(신문의 기능도 이런 게 아닌가). 이를 위해 연설이나 거리행진 또는 상대방을 사회에서 매장시키겠다는 위협(social ostracism) 등의 수단을 썼다고 해서 불법 행위로 규정할 수는 없다. 또 신체적인 위해를 가하겠다는 협박은 불법이지만, 그것이 명백히 과장된 언사라고 이해될 수 있다면 처벌할 수 없다. 물론 폭력적인 ‘행위’에까지 이르렀다면 명백히 불법이다. 하지만 설사 사소한 폭력 행위가 빚어졌다고 하더라도 이로써 불매운동 전체를 폭력적인 불법 공모로 몰아서는 안 된다. 숲의 참된 빛깔을 드러내는 건 자유롭게 서 있는 수많은 나무들의 잎이지, 잡초에 숨어 있는 파충류 몇 마리가 아니잖은가.”(미 연방대법원 ‘전미흑인지위향상협회 대 클레이본 철물점’ 사건, 1982)
검찰이 조·중·동 광고주 압박운동에 대한 처벌 논리를 구하기 위해 이 나라의 법리를 검토한다는 기사를 보고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이런 법리를 적용한다면, 광고주 압박운동은 적법할 뿐 아니라 일부 폭력적 언사가 있더라도 표현의 자유라는 대원칙 아래 보호돼야 할 일이 된다.
지난해 이 나라에서는 인종차별·성차별·동성애 혐오·유대인 혐오 발언 등을 서슴지 않던 한 방송 프로그램 진행자를 응징하기 위해 시민들이 해당 프로그램 광고주들을 불매운동으로 압박한 일도 있었다. 결국 그 진행자는 쫓겨나게 됐는데, 이 일로 검찰이 나섰다거나 누가 처벌을 받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미 코넬대 로스쿨 교수인 마이클 도프는 이 사건을 다룬 칼럼에서 “2차 불매운동을 금지하는 것은 노동법 문제에 국한되며, 그마저도 표현의 자유 원칙과 부딪쳐 논란이 되고 있다”고 설명한다. 부도덕한 기업의 물건은 사고 싶지 않은 소비자들이 있을 터. 노조가 이런 기업의 물건을 파는 제3의 업체를 상대로 그 기업의 정체를 밝히는 불매운동을 벌일 때 이를 막는 것은 노조와 소비자 사이의 정보 전달, 즉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노조의 2차 불매운동도 단순히 전단지를 나눠주는 방식이냐, 업체 출입 자체를 가로막는 것이냐 등 구체적 기준에 따라 허용·금지가 갈리고 있다. 하물며 정치·사회적 의사 표현의 방식으로 이뤄지는 불매운동은 말할 나위도 없다는 것이다.
이런 법 원칙을 확인하면서 도프 교수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는데, 이 또한 곱씹어볼 만하다. 즉, 방송 진행자를 내쫓은 2차 불매운동이 표현의 자유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궁극적으로 겨냥한 곳이 언론매체인 만큼 또 다른 표현의 자유인 언론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모순이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말만 골라 내뱉는 신문사나 방송 프로그램이라도 그들 또한 표현의 자유를 누려야 한다는 고귀한 충언이다.
문명화한 사회라면 이 기막힌 역설을 어떻게 풀 것이냐는 고차원적 고민에 이마를 괴어야 하지 않을까.(다만 우리의 경우 시민들의 집단적 의사 표현을 배후니 괴담이니 하며 억압하려는 언론사가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렇게 표현의 자유에 역행하는 언론사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냐는 또 다른 문제가 제기된다.) 그런데 국가라는 거대 권력이 대뜸 어느 한쪽의 편을 들어 다른 쪽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나서는 건 무슨 행태인가. 도프 교수는 마치 지금의 우리 검찰을 향해 말하듯 칼럼에 썼다. “법은 광고주에 대한 2차 불매운동을 막기 위해 끼어들어선 안 된다.” 서로의 의견이 자유롭게 부딪치고 깎이면서 옥석이 가려지는 ‘생각의 자유시장’에 맡길 일이다. 법은 낄 데 안 낄 데를 가려야 한다.

 

ps. 숲의 참된 빛깔을 드러내는 건 자유롭게 서 있는 수 많은 나무들의 잎이지, 잡초에 숨어있는 몇 마리 파충류가 아니라고 했다. 그런데  정부의 이번 인터넷종합대책을 보면 숲의 빛깔을 볼 능력 뿐만이 아니라 그런 의지 조차 없는 것 같다. 몇몇 시들고 병든 나무에만 집착한 채 이를 치료한다는 명목으로 온 숲에 농약을 공중살포하고 있는 건 아닌지... 큰그림을 볼 줄 모르는 지도자의 폐단이 이번 대책을 통해 단적으로 드러나는 것 같아 씁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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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영주도 차마 못했거늘…

 

 19세기 말 아일랜드에서는 소작료 인하를 놓고 소작인과 지주가 팽팽하게 대립했다. 그 중 한 지주의 마름이었던 찰스 보이콧은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소작인을 소작지에서 모두 내쫓았다. 소작인이 폭동을 일으키면 영주의 군대가 진압할 상황이었다. 이때 소작료 인하 운동을 주도한 찰스 파넬은 폭력 대신 지역 주민에게 보이콧과는 거래를 하지 말아달라고 설득한다. 결국 전체 소작인에게 배척당한 보이콧은 영지를 떠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다수가 공동으로 특정인에 대해 거래를 거절하는 운동을 지칭하게 되었다.

요즘 뜨거운 감자인 조선·중앙·동아일보 광고주에 대한 불매운동도 ‘보이콧’의 일종이다. 보이콧은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주체에 의해, 다양한 목적을 위해 행사되어 왔다. 노예 노동력을 이용하는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이나, 영국에서 수입하는 차 불매운동은 노예제 폐지와 미국의 독립이라는 역사적 결과를 낳기도 했다. 반면 나치 정부의 유대인 기업 물품 불매운동처럼 인종차별적 집단행동에 이용되기도 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보이콧처럼 미국과 소련을 주축으로 한 동서양 진영의 냉전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보이콧의 정당성을 두고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은 그때그때 견해를 달리해왔다. 2005년 황우석 사건을 보도한 MBC <PD수첩>에 대한 광고주 불매운동이 한창일 때 보수 언론은 침묵으로 이에 동조했다. 반면 진보 언론은 언론에 대한 재갈 물리기 시도라며 염려했다.
그러나 최근 광고주 불매운동으로 큰 타격을 입은 조·중·동 등 보수 언론은 언론에 대한 ‘테러’ ‘폭력’이라고 아우성치는 반면, 진보 언론은 헌법에 보장된 소비자 운동이라며 적극 옹호한다. 똑같은 불매운동이지만 그 목적이 무엇인지와 찬반 여부에 따라서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뉴시스지난 6월27일 서울중앙지검에서 열린 ‘사이버 폭력 유관기관 대책회의’.
그때그때 달랐던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

그렇다면 ‘객관적 무기’인 보이콧은 어떻게 규율해야 할까. 보이콧도 누가 어떠한 목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약이 되거나 독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약인지 독인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혹은 사람에 따라 약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독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판단해줄 절대자가 없는 민주주의의 원죄다.

이같은 민주주의의 본질적 한계를 극복하는 길은 다시 민주주의로 돌아가는 방법뿐이다. 보이콧의 동기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시민이 참여 여부를 판단하게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이나 수단에 기망과 폭행·협박 같은 불법적 요소가 개입되지 않는 이상, 보이콧 권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물론 다수가 항상 옳을 수는 없지만 선택된 소수가 불특정 다수보다 낫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바로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광고주 불매운동으로 조·중·동의 광고가 꽤 감소했다고 한다. 조·중·동이 시민과 광고주로부터 신뢰를 듬뿍 받았다면, 성난 누리꾼이 아무리 불매운동을 하겠다고 해도 광고가 줄어들 리 없다. 많은 시민이 동참했기에 광고를 철회한 것이고 이는 다수에 의해 보이콧의 정당성이 확인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보이콧 주창자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 21세기의 검찰이, 중세 말 영주의 군대도 내버려두었던 보이콧을 출국 금지와 구속이라는 폭력적 수단을 동원해 진압하는 것은 시대착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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