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인권선언부터 개헌까지



촛불의 진화에 대한 다양한 논의들…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를 둘러싼 논쟁에서 어떤 결실을 만들 것인가

▣ 이순혁 기자 hyuk@hani.co.kr

촛불은 어디로 진화하는가?
아마도 이에 대한 ‘정확한’ 답을 내놓을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어떤 언론도, 그 어떤 지식인도, 이명박 정부가 출범한 지 100일이 채 안 돼 여중·여고생들로부터 시작된 촛불로 인해 지지율 10% 미만이라는 위기에 봉착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1987년 민주화 투쟁 이후 가장 많은 수의 시민들이 (생활)정치적 이슈를 가지고 광장에 나오리라 누가 예측했겠는가. 따라서 촛불의 시작과 그 중흥을 예측 못한 언론과 지식인에게서 촛불 진화의 정확한 방향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당연한 말일 수밖에 없다.






△ 촛불은 한국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광장에서의 직접민주주의를 승화시켜 ‘시민인권선언’을 만들어내자고 제안한다. (사진/ 연합 박지호)






하지만 촛불 이전과 이후의 국민은 같은 존재일 수 없다. 이제 ‘자각’으로 무장된 수많은 ‘촛불’들의 힘은 어디로 뻗어나갈 것인가? 이는 광우병에서 대운하와 의료산업화 등으로 의제를 다양화하는 ‘양적 확대’와는 다른,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이냐는 의미에서 촛불의 ‘질적 확대’와 관련된 질문이기도 하다. 촛불이 승리를 선언한 지금, 그 앞에 던져진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질문은 바로 촛불의 향방에 대한 물음인 것이다.

최장집 교수를 둘러싼 논쟁

이 논의는 촛불과 광장으로 상징되는 직접민주주의와 ‘먹통 국회’로 상징되는 대의민주주의의 관계를 어떻게 볼 것이냐에서부터 시작됐다. 이 논쟁이 가장 먼제 제기된 것은 촛불이 일어난 이유가 다름 아닌 대의민주주주의의 무능이었기 때문이다.
논쟁의 출발점은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외교학과)였다. 그는 지난 6월 참여사회연구소 등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촛불집회는 민주주의 제도들이 무기력하고 작동하지 않고 그 중심적 메커니즘으로서 정당이 제 기능을 못할 정도로 허약할 때 그 자리를 대신한 일종의 구원투수 같은 역할을 수행했다”며 “운동만으로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일은 불충분하다”고 말했다. 이른바 “현대 민주주의는 대의민주주의이며, 운동에 집중하느라 정당을 강화하는 데 무관심하면 반대편에서 파시즘을 불러들이는 우를 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김수진 이화여대 교수(정치외교학과)도 “촛불집회를 통해 발산되는 시민적 역동성은 한국 민주주의의 귀중한 자산이며 우리의 민주주의를 강력하게 만들어주지만, 참여민주주의가 대의민주주의를 대체할 수는 없다”고 최 교수의 의견에 공감을 표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주장은 일종의 대의민주주의 수렴론으로 받아들여졌고 많은 반론이 제기됐다. 특히 일부 젊은 지식인 그룹은 최 교수가 서양 이론에 함몰돼 있다는 원색적인 비판을 내놓기도 했다. 문학평론가 이명원씨의 비판이 대표적이다. 그는 지행네트워크 홈페이지에 올린 ‘이른바 최장집-박상훈 그룹의 제도 민주주의 학파가 한국 정치의 위기다’라는 제목의 글에서 “양당체제의 복원이라는 대의제의 신화화에 구속되어 있다. 이들의 민주주의론은 내 판단에 이제는 ‘낡은 보수주의’다”라며 “그들은 광장에서 이론을 구성하지 않고, 이론에서 광장을 유추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달 초 흥사단이 주최한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가’라는 제목의 시민토론회에서는 아예 대의민주주의의 ‘대안’들에 대한 구체적 방안들이 논의됐다. 김종서 배제대 교수(법학과)는 “(현재 상황에서는) 국민주권을 실현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며 “국민에 대해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대리자들에게 권력을 이양하는 일을 그만두고 국민이 실질적으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 새로운 제도, 새로운 헌정체제가 구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민발안과 국민투표, 국민소환제도 등 구체적인 제도적 대안이 필요하고, 개헌과 상시적 광장의 제도화 등이 함께 고민돼야 한다는 것이다.
하승우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위원 또한 “단순히 시민이 결정 권한을 가진다는 이유만으로 민주주의가 실현될 가능성은 낮다. 제도 자체가 민주주의를 실현하리라는 기대는 접어야 한다”면서도 “대의정치를 직접정치로 전환시키는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손우정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상임연구원과 이지문 흥사단 투명운동본부 공익센터소장은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기 위해서는 (대표가 아닌) 대리할 사람이 필요하다”며 ‘추첨제에 의한 위임권력 창출’이라는 좀더 근본적이고 실험적인 대안을 내놓기도 했다.

직접민주주의와 대의민주주의를 경합 관계로만 파악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나왔다. 참여사회연구소 토론회에서 “정당민주주의의 정상화 필요성을 통감하며 그 새로운 발전이 요구된다는 데에 동의한다. 한국의 민주주의는 반드시 생활양식으로서의 민주주의, 광장의 풀뿌리 민주주의가 제도 민주주의와 함께 이중 민주주의의 전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주장한 이병천 강원대 교수(경제무역학부)가 대표적이다. 정상호 한양대 제3섹터연구소 연구교수도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직접민주주의 대 대의민주주의 논쟁은) 정확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은 지식인적 사고 같다”며 “정당정치와 운동정치 사이의 소통과 연계가 강화돼 민주주의가 한 단계 발전한다는 것이 보편적 패턴이다. 서유럽의 경우는 사회경제적 의제가 정당을 통해 관철되고, 생활정치나 지역정치를 통해 직접민주주의의 기제들이 일상에서 작동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장집 교수 쪽이 정치를 선거와 정당으로 너무 협소화시키고 운동을 정치의 부수 기제로만 한정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지만, 그 반대편도 운동과 정당이 연계되지 않았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정치적 부작용에 대한 최 교수의 고민을 너무 쉽게 비난한다는 것이다.






△ 대의민주주의의 무능에 실망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일어섰다. 촛불이 민주주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대의민주주의와 어떤 관계를 맺을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들이 개진됐다. (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직접’과 ‘대의’는 경합 관계인가

하지만 대의민주주의와 직접민주주의를 둘러싼 이런 논쟁에선 공허감이 느껴지는 것 또한 사실이다. 주민자치 차원에서 도입된 지방자치단체장 주민소환제와 사법부의 국민참여재판 등 참여민주주의적 소통 통로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인 점도 간과됐다. 또 아직 강력한 제도권력을 독점하고 있는 ‘모르쇠 정부’ 앞에서 새로운 제도적 대안을 얘기하는 것은 실효성이 낮을 수밖에 없다. 김종엽 한신대 교수(사회학)는 국민발안이나 국민소환 같은 직접민주주의 기제들에 대해 “제안은 좋지만 그러려면 법을 바꾸고 개헌을 해야 하는데, 솔직히 이것을 지금의 시민 파워가 해낼 수 있겠냐”며 “현실성이 낮을뿐더러 광장이 헌법기관을 소환하는 것의 제도화는 너무 과격하고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 또한 7월7일 진보신당 홈페이지에 올린 ‘촛불집회에 대한 단상’이라는 글에서 “촛불집회를 통해 확인된 시민의 힘을 이명박 정권이라는 시장주의 탈레반들과의 싸움에서 사회적 공공성을 수호가기 위한 저항으로 승화시켜야 한다”면서 “이번 기회에 한나라당이든, 민주당이든, 민주노동당이든, 창조한국당이든, 아니면 진보신당이든, 자기의 정체성에 맞는 정당에 가입해 적극적으로 활동했으면 한다. 정치에 대한 혐오증이 이명박이라는 혐오스러운 대통령을 낳았다는 점을 잊지 말자”라고 주장했다. “해결책은 어차피 정책이라는 형태로 수립되고, 법률이라는 형태로 고정돼야 한다. 따라서 정당 자체를 바로잡고 나아가 보수 일색의 정당 구조를 바로잡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결국 정당정치에서건, 직접민주주의 통로인 광장에서건 촛불들이 계속적인 행동과 참여의 끈을 놓지 말자는 것이다.
직접민주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이를 ‘시민인권선언’이라는 열매로 갈무리하자는 제안도 있다. 박래군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가 제안한 ‘광장에서 만드는 시민인권선언’이 그것이다. 그는 최근 ‘인권오름’에 기고한 글에서 “광장의 정치는 지속되어야 하고 직접행동의 민주주의가 발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며 “이때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은 광장에서 제안되고, 토론되고, 합의되어서 만드는 시민인권선언 같은 구상”이라고 주장했다. “누군가 기초해서 서명하는 선언이 아니라 그 자체가 과정이 되어서 광장에 제출됐던 과제들을 권리로 명제화하고 그 권리를 지키기 위해 싸우자는 데 합의하는 그런 선언”을 만들어내자는 것이다.

보수 정치권 개헌 논의에 대응

시민인권선언은 촛불을 일회성 사건이나 행사로 흘려보낼 수 없다는 인권운동가들의 절박함에서 비롯된 발상으로 보이는 측면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광장에서의 경험의 자연스러운 산물이기도 하다. 박래군 활동가는 “그동안 광장에서 백승헌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회장과 한상희 건국대 교수, 손우정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연구위원 등과 함께 4차례에 걸쳐 ‘헌법 1조’ 거리특강을 진행했는데, 시민들의 참여 열기가 뜨거워 놀랐다”고 말했다. 그는 촛불을 둘러싼 정국이 안정되는 대로 촛불에 참여했던 각종 카페에 함께 고민해보자는 제안을 하고 아고라 토론방에도 제안을 띄워볼 계획이다.
시민인권선언이 더욱 주목받는 것은 현재 보수 정치권에서 본격적으로 시동을 걸고 있는 개헌 움직임과 결부되면서다. 현재 한나라당과 민주당, 자유선진당 의원 100여 명은 미래한국헌법연구회를 발족하고 개헌 공론화를 시작했으며, 지난 7월10일 취임한 김형오 국회의장도 임기 내 개헌 추진을 공언한 상태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과 ‘공룡 여당’이 주도할 수밖에 없는 새 헌법 초안에는 국민의 기본권 등 분야에서 후퇴한 내용을 담을 가능성이 크다. 운동 또는 시민들 차원에서 헌법에 담을 기본 이념에 대한 구체적 논의를 준비해야 한다는 것인데, 시민인권선언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그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제헌절인 7월17일 논의를 시작해 세계인권선언 60돌 기념일인 12월10일 안을 내놓을 수 있으면 좋겠다”(박래군 활동가)는 바람이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소강상태로 접어든 촛불 국면에서, 자발적인 동력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쉽사리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을 수도 없다. 촛불은 지금까지 일반적인 예측과는 다르게 움직이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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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6일은 러시아혁명사에서 두 가지 중요한 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1918년 오늘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였던 니콜라이 2세가 살해됐다. 그리고 1900년 오늘, 3년 동안 시베리아에 유형됐던 레닌이 스위스로 망명했다. 18년 사이 세계는 바뀌어버렸던 것이다.





1917년 2월혁명으로 퇴위한 니콜라이 2세는 당시 우랄산맥의 광산도시 에카테린부르크에 감금돼 있었다. 김학준의 <러시아혁명사>에 차르와 아내 알렉산드라, 아들 1명과 막내딸 아나스타샤 등 딸 4명의 살해 장면이 나온다.



“유로프스키는 10명의 무장한 사람들과 함께 나타났다. 그는… 이제 우리는 당신들을 사살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선언했다. 니콜라이 2세가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 ‘뭐라고’ 하면서 아내와 아들을 막아보려 했다. 그 순간 체카 대원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총을 쏘았다. 그는 즉시 죽었다… 그냥 기절해 쓰러졌던 아나스타샤가 의식을 회복하곤 소리를 질렀다. 다시 모든 체카 대원들의 난사가 뒤따랐다.” 광산 등에 흩어져 암매장됐던 차르 일가의 유골들이 확인된 건 80여년이 지난 1996년이 되어서다.

한 세기나 전, 러시아 마지막 황제의 죽음과 실패한 레닌의 혁명 이야기를 지금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 현재 최고의 스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59)이 <지젝이 만난 레닌>(2002)에서 던지는 질문도 바로 그것이다. 그는 레닌이 1917년에 쓴 핵심적 문건들을 이 책의 전반부에 모아놓은 후, 책의 후반부에서 21세기의 현실을 레닌의 텍스트들에 대입해 해석한다. “레닌을 재현실화한다는 생각에 대한 공중의 첫번째 반응은 물론 빈정거리는 폭소다”라고 지젝은 책의 첫머리에 쓴다.

그러나 그는 다가올 자본주의의 위기 상황이 1917년 레닌 앞에 놓였던 상황의 되풀이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우리는 목욕물을 버리면서 아기까지 함께 버린 것은 아닌가?” 레닌의 텍스트, 펜이 곧 무기였던 그의 글에 들어있는 ‘유토피아의 불꽃’은 여전히 우리 시대의 문제로 되살려내야 한다는 이야기다.(하종오기자)

08. 07. 16.

P.S. 아예 레닌을 주제로 한 학술심포도 얼마전에 개최된 바 있다. 이 관련기사도 스크랩해 놓는다(더 자세한 것은 http://www.greenbee.co.kr/blog/29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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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08. 07. 10) 왜 지금 레닌을 소환하는가?

'촛불 시대에 다시 생각하는 레닌과 러시아혁명.’ 8일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그린비 출판사가 주최한 학술심포지엄의 주제다. 왜 지금 갑자기 레닌인가?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발제문 ‘레닌의 정치학에서 외부성의 문제’에서 “지금 레닌을 불러낸다는 것은 뼈아픈 실패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거기서 혁명 혹은 혁명적 사유에 대해 다시 사유하는 것”이고 “그 실패를 통해 새로운 출구를 찾는 것”이다. 이 교수는 모든 혁명은 자신의 시대와 대결하고, 주어진 세계를 전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반시대적 사유’일 수밖에 없다며, 따라서 현실 사회주의 몰락 이후 혁명 자체가 낡은 것으로 간주되는 지금이야말로 레닌과 혁명에 대해 사유하기에 좋은 시대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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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 오슬로대 교수는 ‘민주주의자로서의 레닌’에 주목했다. 박 교수는 그 이유로 자본주의가 새로운 주기적 위기를 맞고 있는 지금의 대의 민주주의 위기상황을 들면서, ‘촛불집회 정국’이 그것을 여실히 보여줬다고 했다. 그는 촛불을 든 민초들의 ‘직접적 참여 민주주의’가 건강권과 주권 문제 등에서 국회를 대신해 정국을 일변시켰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그는 촛불 민주주의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나 대운하 계획 등을 반대하고 저지할 수는 있지만 “신용을 잃어가는 대의 민주주의 기관(국회 등)들을 대신하는 ‘대안적 집권기관’”이나 “구체적인 민중적 주권행사 기관”으로 발전하진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박 교수가 내놓은 대안은 노동자 또는 주민 평의회, 곧 소비에트다. 물론 ‘대안적 권력 창출’을 이야기할 단계가 아니지만, 그는 “비정규직과 정규직, 대기업과 소기업 소속 등을 초월하는 ‘노동자 평의회’ 건설과 지역정치에의 활발한 참여는 한국 민주주의의 심화에 상당한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지금의 헌정질서 안에서 그것은 ‘시민단체’의 외형을 띠면서 권력화가 아니라 계급적 연대 수준에 머물겠지만, 그럼에도 “고용형태, 성별, 연령, 소속 기업 규모 등의 구분을 뛰어넘어 대자적인 계급으로서의 새로운 성숙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한다. 그는 그러면서 볼셰비키당의 권력독점과 혁명의 왜곡으로 귀결된 정당 정치인 레닌이 아니라 <국가와 혁명>을 쓸 당시의 레닌을 살려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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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의 제헌권력, 그 열림과 닫힘’이란 글을 발제한 조정환 다중네트워크센터 대표도 <국가와 혁명>에 주목했다. 조 대표는 한때 한국 사회를 풍미한 사상가 레닌이 급속히 잊혀진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한국에 도입된 레닌이 <두 가지 전술>, <무엇을 할 것인가>의 레닌, 말하자면 1905년 부르주아혁명 단계의 레닌이었지 <국가와 혁명>, <4월 테제>의 레닌, 곧 1917년 프롤레타리아 혁명 단계의 레닌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1987년 체제’와 함께 제헌의회파의 주장은 힘을 잃었으며, 신자유주의적 자유화와 함께 확장된 형식적 민주화는 비합법 전위정당 노선과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가 레닌의 용도 폐기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국가와 혁명> 단계의 레닌이 답인가? 조 대표는 권력, 무장력, 폭력, 민주집중제, 소비에트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제헌권력 등 레닌의 개념들은 근대적 부르주아 사회체제 범주를 벗어날 수 없다며, 낡은 의회조직이나 국가는 “삶 속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에 대한 다중들 자신의 직접적 토론과 행동적 표현을 통한 직접적 제헌적 결정과정”으로 대체하고, 이를 제도화할 절대 민주기관을 창출해야 한다고 제안한다.(한승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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