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킬레우스의 노래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 / 이봄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 욕망의 강도와 그 욕망이 꽃을 피는 속도에 나는 충격을 받는다. 나는 움찔하며 얼른 몸을 뗀다. 오후 햇살로 둘러싸인 그의 얼굴과 반쯤 하다 만 입맞춤으로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을 볼 수 있는 시간이 한 순간, 딱 한 순간 주어진다.
-
긴 정적이 흘렀다. 그가 내 말을 못 들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침내 그가 말했다. “오늘 네가 얻은 것을 그렇게 쉽게 포기할 생각은 마라.”
-
그는 무심한 듯 초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에 들 거야. 지금 달라진 네 모습이 말이야.” 내 얼굴이 다시 벌게졌다. 하지만 우리는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서로의 입술이 열렸고 그의 달콤한 입김이 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그의 입술이 부드럽다는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움직일 때마다 흘러나오는 숨결을 마시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건 경이로운 느낌이었다.
-
정적이 흘렀고, 나는 축축해진 돗짚자리나 땀범벅인 내 몸이 더이상 신경쓰이지 않았다. 금색이 점점이 박힌 그의 초록색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내 안에서 부풀어오른 확신에 목이 메었다. 절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테다. 그가 날 내치지 않는 한 영원히 이렇게 있을 테다.
-
그칠 줄 모르는 사랑과 비애의 아픔. 다른 생이었다면 나는 거절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머리를 쥐어뜯고 비명을 지르며 그의 선택을 그 혼자 책임지게 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번 생에서는 아니었다. 그는 트로이아오 건너갈 테고 나는 심지어 저승까지 그를 따라갈 것이었다.
-
추악한 죽음도, 나중에 내 몸과 머리칼에서 씻어낸 뇌수와 뼛조각들도 더이상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내 눈에 보인 것은 그의 아름다운 얼굴과 노래하는 팔과 다리, 이리 번쩍 저리 번쩍하는 발 뿐이었다.
-
천재지변과 대재앙이 내 머릿속을 온통 수놓는다. 지진이 나고 화산이 폭발하고 홍수가 터졌으면 좋겠다. 그 정도는 되어야 내 분노와 슬프을 담을 수 있을 듯하다.
-
화염이 나를 감싸고 나는 공기 중의 아주 희미한 떨림으로 남을 때까지 생에서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어둡고 적막한 저승으로 어서 빨리 건너가서 쉬고 싶다.
-
-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10년을 받쳤다고 합니다.

아마 다른분들도 이 책을 보면서 영화 트로이가 많이 생각나셨을 겁니다.
저도 그랬거든요.
⠀⠀⠀⠀⠀⠀⠀⠀⠀⠀⠀⠀⠀⠀⠀⠀
거기서 비중이 없던 그의 친구 파트로클로스의 이야기를 이렇게 엮어서 생각해낼 수 있구나 싶었습니다.
⠀⠀⠀⠀⠀⠀⠀⠀⠀⠀⠀⠀⠀⠀⠀⠀
그리고 동성이든, 이성이든 사랑이란 역시 숭고하고 아름답다 라는 것을
느낄 수 있던 소설이었스니다.
⠀⠀⠀⠀⠀⠀⠀⠀⠀⠀⠀⠀⠀⠀⠀⠀
왠지 이 소설에 배경이 된 <일리아스>도 꼭 읽어보고 싶어졌어요.
⠀⠀⠀⠀⠀⠀⠀⠀⠀⠀⠀⠀⠀⠀⠀⠀
최근에 읽었던 소설 작품중에서는 단연 최고인 듯 합니다.
⠀⠀⠀⠀⠀⠀⠀⠀⠀⠀⠀⠀⠀⠀⠀⠀
제가 담당해서가 아닌, 독자로써 꼭 추천해드리고 싶네요.
⠀⠀⠀⠀⠀⠀⠀⠀⠀⠀⠀⠀⠀⠀⠀⠀
#다음엔뭐읽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조각의 유통기한 - 어느 젊은 시인의 기억수첩
이지혜 지음 / 이봄 / 2018년 3월
평점 :
절판


가끔 문장을 써놓고 물끄러미 바라다봅니다. 다르게 기억하고 싶어 문장을 바꾸었다가, 이건 기억을 왜곡하는 거구나 싶어 다시 지우개로 지웁니다. 그렇게 솔직한 문장들을 써내려가고 내 마음의 소리를 듣다보니 시를 쓰게 되었죠. 그동안 순간을 잊지 않기 위해 문장을 써왔다면 시는 나를 잘 들여다보기 위해 써왔다고 하는 게 맞을 겁니다. 제가 생각하는 시란, 나만의 언어로 써내려가는 가장 솔직한 기록입니다.
-
가끔 잘 ‘지내는‘ 나를 보며 잘 ‘지나온‘ 것이 많았는지 생각해본다. 시간이라는 숲에서, 숲을 빼곡하게 메운 나무 무더기들 사이에서 나는 잘 지나고 있었는지. 나무에 물을 주지 않아도 잘 자라 숲을 이룬 건지, 아니면 조금 더 많은 햇살을 비춰줘야 했는지. / 산문_기억의 숲에서 中
-
사라지지는 않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누군가의 감정이 그렇고 마음이 그렇고 결국 누군가가 그렇다. 짝사랑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 거다. 늘 그 사람 옆에 있는데 왜 나는 투명인간 같은 건지. 나는 늘 머물고 있는데 왜 눈에 띄지 않을까. 그러다 그가 사라지면 어쩌나 불안해서 사라지지 않을 방법을 찾았엇다. 하루에도 몇 번씩 기억해보고 남겨보고 곱씹어 생각했다. 그래도 내가 잊힐까 겁이 났다. / 산문_달의 마음 中
-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완연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 일을 똑바로 바라보고, 뚜렷하게 인식하고, 서로 비슷함을 깨닫는 시간. 그 후 서서히 무뎌지는 우리를 만날 수 있다. 자꾸 넘어지지 말기를, 차라리 넘어지는 데 대수롭지 않아 하기를. / 산문_그렇고 그런 일들 中
-
시작할 기회가 올 때. 성격은 각각 다르지만 그때마다 느끼는것이 있다. 모든 시간, 사건, 추억을 쉽게 쓰고 지울 수는 없을까라고.
마음에 무언가를 담는다는 일은 다음 무언가가 오기 전까지 잊지 않겠다는 약속일지도 모르겠다. / 산문_지우면서 기억한다는 것 中
-
추억을 어느 시간이 아니라 어느 조각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은, 아직 추억을 통째로 가지지 못한 사람이다. 꽃잎 하나 가졌다고 향을 가질 수는 없듯이. 다시 모든 것이 각도를 맞추어 잠시 그때가 되는 각도를 희망하지 않기로 했다. / 산문_조각의 유통기한 中
-
뻔한 이별은 정상적인 순서다. 우리는 늘 이별 앞에서 보통의 사람일 뿐. 누구에게나 특별한 무언가가 되고 싶지만 사랑이라는 지표 위에 점 하나를 찍는 일인데 뭐 그리 특별할까. ‘잊을 수 있을 만큼의, 잊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다.‘ 이 말을 써놓고 한참을 생각했다. 너와 내가 만나 잊을 수 있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지만 지나보면 안다. 잊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있기에 사실 우리는 뻔해도, 보석이란 것을 / 산문_흔한 보석 같은 中
-
자주 펼쳤던 책을 보면 어느 구간이 낡아 있다. 많이 읽은 페이지일수록 그렇다. 다시 책을 덮어보면 그 구간에 작은 틈이 보인다. 함께한 시간이 많을수록 그 구간은 간격을 조금씩 만들어두는 것 같다. 시간이 갈수록 개개의 반이 아름답다는 걸 알아가면서 서로의 자리를 조금 내어주게 되는 것은 아닐까. 소중한 당신의 자리를 더 만들어주는 것. 우리는 이렇게 영원히 반이 되는 걸까. / 산문_아름다움을 지켜주는 선에서 中
-
-
-
평소에 시집을 어려워하셨던 분들이라면 시와 산문을 통해
조금 더 쉽게 접근하실 수 있을거라 생각이 듭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 - 마음을 담아 전하는 선배 엄마의 그림 하나
정하윤 지음 / 이봄 / 2018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임신 기간이었을 때만 해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다는 건 별로 걱정되지 않았다. 신생아는 두 시간에 한 번씩 먹어야 한다는 것, 밤낮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 따라서 엄마는 하루종일 잠을 제대로 푹 자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다만 이 ‘지식’이 ‘삶’이 되었을 때의 힘겨움은 미처 알지 못했다.
-
엄마가 나를, 내가 아기를 조금이라도 더 먹이려 애쓰는 것은 자식을 향한 사랑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더 먹어서 더 건강해지길 마음. 밥은 이렇게 사랑의 대명사 노릇을 한다.
-
SNS에 아기 사진을 올리며 소소한 일상을 기록하는 것 역시 나와 비슷한 엄마들과의 대화를 원하기 때문이다. 집의 적막을 깨는 초인종 소리, 택배 아저씨마저 반갑다는 엄마들의 이야기가 우스갯소리만은 아니다.
엄마들은 외롭다. 그래서 아기를 들쳐 안고 힘들어도 굳이 외출을 하는 거다. 저렇게 어린 아기를 데리고 왜 나오느냐는 타인들의 눈총을 견디고, 식당과 카페를 왜 시끄럽게 만드느냐는 타박을 받아가면서 말이다.
-
변화 없는 일과가 계속되면 어느 순간 권태가 찾아온다. 육아에도 권태를 느낀다고 하면 엄마 자격이 없는 것같이 들리겠지만, 누구든 아무런 변화 없이 같은 일을 계속하면 지루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엄마도 예외는 아니다.
-
영화를 보며 나는 그녀의 심정에 너무나 공감했다. 나 또한 아이를 낳고 나서 ‘나만의 시간’이 절실해졌다. 아이를 챙기고 집안일을 하다 보면 어느새 하루가 다 가 있다. 밤에 자리에 누워 돌아보면 나를 위해 보낸 시간을 꼽아보기 어려워 마음이 공허해진다. 집에 아이를 봐 줄 사람이 누구라도 있는 날에는 화장실에 자주 가곤 했다. 조금이라도 혼자 있고 싶어서. 그리고 상상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서 조용히 밥을 먹고 혼자 종일 뒹굴거리며 책도 보는, 현실과 동떨어진 상상을.
-
자기 시간을 가지면, 마음과 생각이 정리되고 여유가 생기는 법이다. 아기에게 한번 더 웃어주고 아기의 짜증을 한 번 더 받아줄 여유 말이다. 그리고 덤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진 남편과의 관계를 개선해보고자 하는 의지마저 솟는다.
-
인생의 굵직한 변화를 맞을 때마다 다른 스타일의 자화상을 선보인 스키예르벡의 모습은 왠지 나에게 용기를 준다. 나 역시 일생일대의 전환기를 맞아 나의 그 무엇이 사라지는 것 같아 두려운 마음이 들지만, 사실은 나도 그녀처럼 새로운 스타일의 자화상을 그리고 있는 중이 아닐까, 예전의 색, 이전의 나를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것은 지금이 과도기여서 그런 게 아닐까, 실은 좀더 성숙한 모습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
커리어라는 측면에서 보면, 육아는 엄마들의 발걸음을 느리고 무겁게 만든다. 남들만큼 또 이전만큼 빨리, 많이 성취하기란 결고 쉽지 않다. 아니, 적어도 당분간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것을 겨우 깨닫기 시작한, 자꾸만 마음이 달그락거리는 초보 엄마인 내게 쉬빙의 작품은 마음의 여유를 더 가져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렇게 조급해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초조해할 필요 없다고. 그저 나의 길을 나의 속도로 가면,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면 된다고 다독인다.
-
온전히 함께할 시간이 유한하다는 생각은 지친 마음을 다시 가다금데 한다. 엄마 손을 잡고 싶어하는 오늘, 딸의 손을 꼭 잡는다. 엄마 옆에 있는 지금, 사랑을 충분히 표현해주는 것만이 훗날 내가 아이의 손을 놓아야 하는 그날의 아쉬움을 달래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부디 그날, 아쉽다는 탄식 대신 뷔야르의 어머니 같은 환한 미소를 지을 수 있기를 바라본다. 아이에 대한 온전한 사랑과 믿음으로 가득차 웃으며, 행복한 이별을 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
-
-
이 책이 육아를 하면서 표현은 못해도 힘들어하는 어머님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
그리고 그림을 전혀 알지 못하는 나로써도 그림을 통해서 공감과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면 보통 생활이 바뀌는 건 여자다. 남자도 물론 아이를 키우는데 도움은 주지만 자신의 삶이 바뀌지는 않는다. 그런 사실을 이 책을 통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고 조금 더 내 어머니, 누나 그리고 아이를 키우는 모든 어머니들에게 박수를 드리고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나란히 앉아서 각자의 책을 읽는다 읽어본다
장으뜸.강윤정 지음 / 난다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해 첫날 아침에 서가를 둘러본다.
올해는 또 어떤 책들이 이 서가를 채울까.
아직 쓰이지 않은 많은 책에 대해 상상해보다가
한 권의 책 앞에서 눈이 멎는다.
-
우리는 함께 서점에 가서, 함께 책을 고르고, 며칠 간격으로 나란히 책을 읽고, 두 사람이 모두 읽고 나면 이야기를 나눈다.
물론 자주 그러는 것은 아니다.
취향이 다르고, 읽는 속도가 다르며, 내가 자주 게으름을 피우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런 말을 나눌 때는 정말 행복하다.
“이 책은 어때?”
“아, 그거 나도 보고 싶었어.”
-
생각해보면 단 한 번도 말은 내 안에 머문 적이 없다. 말은 나의 입술 바깥에서 처음 생겨나 주변의 공기를 흔들고 이내 사라진다. 말이 사라지는 동안 우리는 그것을ㅡ순간의 진실을ㅡ붙잡으려고 애쓴다. 앞선 말에 이어질 말들을 불러내느라 진실로부터는 점점 멀어지면서도. 말은 사라지면서 말의 잔상은 그 순간의 나를 박제한 것처럼 남는다. 그것이 나 자신인 것처럼
-
그런 사연을 듣고 있자니, 과연 한 권의 책이 그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 자신이 없어졌다. 하지만 결국 그가 선물하고자 하는 건 자신의 마음일 것이다. 책은, 주는 마음과 받는 마음이 잘 닿을 수 있게 완충제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
그러다 어느 순간 책을 덮고 생각에 잠긴다. 나 자신의 마음속을 거니는 듯한 생각들이다. 이 책을 읽을 때면 늘 그렇다. 같은 장면에서 멈춰 서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다.
결말을 알고 싶지 않은 책이란, 과거 속으로 던지지 않고 더 오래 곁에 두고 싶은 그런 책일 것이다.
-
시간에 맞서 싸우기 위해 고른 책을 읽는 게 내 일과 중 그 어느 때보다 비효율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때라는 점. 묘하게 자조적이고 자학적이면서도 적극적인 시간 운용 같아 기쁘다. 천천히 읽는 것을 두려워 말고 다만 차분히 끝까지 읽는 데만 집중해보리.
-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이 쌓여가며 공유하는 많은 것들 가운데 책에 관한 경험의 공유만큼 일상적이면서 특별한 것이 또 없다는 것을 새삼 느낄 만큼. 마침 나도 아직 읽지 않은 작품이다. 처음으로 남편이 나보다 먼저 읽는 키냐르. 설레고 기대된다. 우리가 함께 키냐르를 읽는다는 것이.
-
일종의 직업병처럼, 서점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한다. 우선은 무탈히 존재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시간이 쌓여야 한다는 것. 그럴수록 그 공간에 출판의 흐름과 지역의 개성과 다년간 독자들의 취향이 녹진녹진 배어들어 그 자체로 소소하면서 장구한 이야기를 품은 미디엄이 되리라는 것. 너무 금방 잊고 잊히는 것이 자연스러워진 이 시대에, 곳곳에 테이프레코딩 되듯 시간을 품고 기록하는 곳이 있어준다면 든든하고 좋겠다는 생각.
-
두툼한 두 권짜리 책. 굉장한 소설이었고 한동안 압도되었지만 다시 읽을 리는 없다. 읽은 책을 다시 읽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깊이 있는 새로움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러기에 사놓고 읽지 못한 책, 빌려두고 읽지 못한 책, 만들고 있는 책과 연관된 책 등등이 너무 많으니까.
그저 당신을 부러워한다. 그 책을 지금 이 순간 생생하게 읽는 당신을. 이미 나도 경험했지만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그 느낌을 지금 이 순간 느끼고 있는 당신을.
-
며칠 후에 이 책은 서점 진열대에서 독자들에게 선을 보일 것이다. 그때 독자 누구도 이 책을 만든 사람을 떠올리진 않을 것이다. 책의 표지를 여러 방향에서 그려보고, 원고의 사소한 실수들을 잡아나가고, 서점에 보낼 책의 소개문을 쓰고, 인쇄소의 소음 속에서 마침내 첫번째로 만들어진 책을 손에 쥐며 다양한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작은 숨결을.
-
그의 소설은 너무나 쉽고 일상적인 말들만을 사용한다. 나 역시 한 문장도 고르지 못하고 책을 덮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좋았다. 이 책에는 빛나는 구절들이 많다. 다만 그것이 맥락 속에서만 빛날 뿐이다. 우리 인생 대부분의 행복들이 그렇듯.
-
책을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여러 번 살고 여러 번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공간에서, 아무 소리도 없으나, 책을 읽는 내안에 그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즐겁다. 오로지 나만 아는 기쁨.
-
-
-
다 읽고 나니 조용히 마음속에서 울컥하는 감정이 일렁였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마음이구나. 느끼는 감정은 달라도 생각하는 건 비슷하다는 걸. 단순히 독서일기가 아닌 책을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느낄 수 있음에 더 고마웠다. 더 할말이 많은 책이지만 글자수 한계가 있어 여기서 줄여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날의 온도 그날의 빛 그날의 분위기 - 스탠딩에그 여행산문집
에그2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11월
평점 :
절판


여행을 다녀온 이에게 누군가가 ‘거긴 어땠어?‘라는 질문을 던져주지 않는다면, 그래서 여행에서 돌아온 이가 여행하는 동안 느낀 점들을 다시금 떠올리지 않는다면 우리의 여행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
모든 것이 낯설고 불확실한 곳일수록 스스로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된다. 자신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것들, 특별한 이유도 없이 고집하게 되는 습관들, 편견이라 생각해본 적 없던 편견들. 훌쩍 떠나보려 했던 현실의 자신으로부터 한 걸음도 벗어나지 못한 채 우리는 오히려 가장 ‘리얼한‘ 우리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
나는 언제나 이런 모습에 쉽게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만듦새가 순박해서 만든 이의 철학과 의지가 그대로 드러나는, 그래서 세상 모든 것이 변해도 제발 그 모습 그대로 있었주었으면 싶은 것들 말이다. 물론 ‘최신‘, ‘최첨단‘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들도 나름대로 매력적이긴 하지만 그중 대부분은 1년만 지나도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고 말기에 왠지 각박하고 허무한 느낌이 들어서 왠지 쉽게 마음을 내주기가 힘이 든다.
-
낯선 지명들, 처음 보는 꽃의 이름을 천천히 발음하다보면 왠지 그제야 그것들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여행지에서 무언가를 마음에 들이고 싶다면 그것들의 이름을 물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마음에 드는 누군가를 만나면 가장 먼저 이름을 묻듯이.
-
사랑의 감동은 때때로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내 모습에서 오는 것 같다. ‘그래, 난 이리도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구나‘ 하는 일종의 자아도취랄까. 아무튼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때까지 그녀를 깨우지 않는 것이야말로 내게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하면 그래도 한동안은 다시 이 삭막하면서도 권태로운 풍경을 견뎌낼 수 있었다.
-
에펠탑은 바로 눈앞에 있었고, 천천히 걸어도 3분이면 닿을 거리였다. 금방 갈 수 있는 곳도 최대한 천천히 걸으며 아주 사소한 것들까지 놓치지 않고, 그곳에 사는 사람들은 무심히 지나칠 수밖에 없는 ‘작은 의미;들을 발견하는 것이 지금의 나에게 주어진 숙제라고 위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젠 점처럼 멀어지고 있는 소년들이 더없이 아름다워 보였다. 일종의 부러움 이었다.
-
헌책 냄새는 늦가을 거리에 가득 쌓인 낙엽 냄새, 어린시절 할아버지의 품에서 나던 냄새와 비슷하다. 낡고 삭아서 조금씩 사라져가는 것들의 냄새.
-
함께 여행 중인 일행이 있다 하더라도 그 여행이 풍요로워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각자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일행이 서운해한대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새롭게 보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 생각할 시간도 필요하거니와 함께 여행하는 사람과 나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도 오직 그때뿐이기 때문이다.
-
커피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커피 한 잔이 완성되어가는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 커피의 맛이 궁금해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
-
-
<스탠딩 에그> 에그2호님의 여행 에세이.
글도 글이지만 꽤 많은 양의 사진들이 있다.

그리고 글들 마지막엔 어느 나라 어느 도시에서 썼는지도 표시가 되어있다. 덕분에 이 나라에서, 이 도시에서는 이런 기분이 드는구나 라고 대신 느낄 수 있었기에 더더욱 상상을 하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작곡을 하시는 분이고, 첫번째 책에서 읽었던 그 감성 그대로 여행에 담겨 있어서 글자를 읽는데 그 도시의 향기가 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힘들었던 요즘 책 한 권으로 몇 군데의 세계를 둘러본 것 같았다. 저렴한 책 한 권 값으로 이렇게 큰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니.

더할나위 없이 기쁜 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