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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영혼 - 대학은 어떻게 더 나은 인간을 만드는가
파커 파머 & 아서 자이언스 지음, 이재석 옮김 / 마음친구 / 2017년 6월
평점 :
품절
중고등학교 시절, 나에게 대학은 “찬란한 꿈”이었다. 당시 나는 치열한 입시 경쟁에서 살아남아 일류 대학에 들어가기만 하면 의미와 가치로 충만한 삶, 학문 탐구를 통해 삶의 심오한 진리에 다가가는 멋진 인생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 믿었다. 모든 “좋은 것”에는 그만한 노력과 희생이 따른다는 걸 이미 체감했던 때문인지 나는 재수를 하면서까지 기어코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나의 실제 대학 생활은 그러한 이상에 한참이나 미치지 못하는 초라한 무엇이었다(자이언스가 3장 초입에 털어놓은 개인적 고백과 비슷하게). 일류 대학에 다닌다는 자부심으로 타인의 부러운 시선을 즐기는 일도 잠시, 무엇보다 그것은 지속적이고 참된 만족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같은 과의 나보다 똑똑한 친구들, 그리고 커트라인이 더 높은, 같은 대학의 더 “좋은” 과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주눅 드는 일이 많았다. 대학 입학 전에는 나의 “아래”만 보이던 것이 이제는 나의 “위”에도 상당히 많은 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내 얄팍한 우월의식이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었으니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같은 삶의 근본적인 물음들이 불쑥불쑥 올라오는 상황을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는 것이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친구들은 주변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고민들을 한데 모으고 나누는 일은 거의 없었다. 서로가 자신의 울타리에 갇힌 채, 이런 종류의 고민은 아주 개인적인 문제이며 어차피 딱 부러지는 해답이 없는 문제로 여겼다. 잠시 앓고 지나가는 젊은 날의 홍역이나 치기 정도로 치부했다. 간혹 종교나 학생운동 동아리에 이런 고민을 하는 친구들이 모이는 듯했으나 그들은 나와 소통하기 어려운 “그들만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삶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고민
무엇이 문제였을까. 삶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탐색과 대화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나의 성향 탓이었을까. 그도 있겠으나 지금 와서 돌아보면 결국 우리는 초중고 시절을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학교 성적을 기준으로 한 일종의 “줄 세우기” 작업을 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대학 입학은 이 줄 세우기 작업의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당시 어느 대학에 가느냐는 한 개인의 이후 삶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좌우하는 중요한 문제로서, 주변의 많은 사람이 궁금해 하는 초미의 관심사였다. 신속하고 효율적으로 진행되는 줄 세우기 작업의 와중에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일은 별 실익(!)이 없는 한가한 일로 여겨져 일시적으로, 아니 무한정으로 보류되었다. 그보다는 지금 내 앞에 주어진 시험 문제를 신속, 정확하게 풀어내는 일이 더 중요했다.
그러니까 우리의 교육은 처음부터 그 전제와 목표가 왜곡돼 있었던 거다. 그렇게 그때 우리에게 교육은-지금도 마찬가지지만-그 풍요로운 잠재성과 가능성에 한참이나 미치지 못하는 매우 협소하고 초라한 무엇으로 쪼그라들어 있었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대학에 가서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대학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논하는 열린 장이 아니라, 전공 지식과 학점을 단기간에 효율적으로 습득하는 동시에 또 다시 각종 시험으로 대변되는 취업의 관문에 대비하는 과정일 뿐이었다.
그런데 반드시 그래야만 했을까. 대학을 다니는 동안 삶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이야기를 좀 더 터놓고 할 수는 없었을까. 비슷한 고민을 가진 주변의 친구, 선배, 교수님과 함께 고민해볼 수는 없었을까. 더 좋기로는, 대학의 정규 수업에서 해당 과목의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그런 문제를 다루어볼 여지는 없었을까. 해당 과목의 지식을 익힘과 동시에 자기 내면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면서 나에 대한 앎을 키워갈 수는 없었을까(책의 부록에는 그러한 이상을 실현하고 있는 미국 대학의 실제 사례들을 소개한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앎과 삶의 괴리가 조금은 메워지지 않았을까. 삶의 가치와 의미에 대한 젊은 날의 목마름이 조금이나마 해소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삶의 뿌리를 조금 더 튼튼히 내려, 대학을 졸업한 이후의 삶에서 조금 더 지혜롭고 의연하게 세상의 풍파에 맞서지 않았을까.
책의 저자들에 의하면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저자들은 심지어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고 거기에 답하는 일이 대학 본연의 사명이라고까지 선언하고 있다. 책에는 대학의 주요한 목적이 “학생들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하고, 삶의 더 큰 목적을 탐색하도록 돕는 것, 또 대학 문을 들어섰을 때보다 조금 더 나은 인간으로 대학 문을 나서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20쪽).
영성의 계발
비슷한 맥락에서 책은 대학 교육의 목적이 “온전한 인간됨의 계발”에 있다고도 한다. 여기서 온전한 인간됨이란 지성과 감성 그리고 영성이 조화된 전인적 인간이다. 이때 지성과 감성은 우리가 흔히 들어온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라는 표현을 통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영성이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언뜻 감이 오지 않는다. 파커 파머는 책에서 영성을 이렇게 정의한다. “영성이란 인간이 자신의 자아ego보다 더 큰 무엇과 연결되고자 하는 끝없는 갈망이다.”
그러니까 영성이란 말하자면 “전체성에 대한 감각”이다. 그런데 이 영성 개념은 현대에, 특히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한국 사회에 무척 생소한 개념이다. 우리는 하루 중 지성과 감성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시간이 대부분으로, 영성과 조우하고 그것을 인식하는 시간은 매우 적다. 적어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대로의 삶의 방식에 영성이 개입할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대부분의 사람이 영성이 무엇인지, 그런 게 도대체 필요한지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영성이 불현듯 모습을 드러내는 때가 있다. 한창 열심히 사는-생활하는-중에 “응? 내가 지금 이걸 왜 하고 있지? 이 모든 게 무슨 의미와 가치를 갖는 거지?” 하는 의문이 불쑥 올라오는 때가 그런 순간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성이 없이는, 영성을 무시하거나 억누른 채로는 계속해서 살 수가-적어도 “잘” 살 수는-없는 거다. 영성이라고 해서 반드시 종교(특히, 기독교)를 떠올릴 필요는 없다. 삶의 의미와 가치를 묻고 스스로 답을 찾아가는 삶이라면 곧 영성적 삶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도 영성이 개별적 자아를 초월한 전체성에 대한 감각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결국, 우리는 개별 자아의 울타리에 갇힌 채로는 삶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물음에 원만히 답할 수 없다. 개별 자아를 넘어선 전체성에 대한 조망이 가능할 때라야 이 물음들에 자기 나름대로의 답을 할 수 있다. 종교가 큰[宗] 가르침[敎]인 이유도 전체성에 대한 인간의 영성적 갈망에 답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사실, 전체성을 조망하는 작업으로서의 영성 개념은, 신과학, 특히 물리학 분야의 양자이론에 의해서도 근거를 얻고 있다. 책의 저자 아서 자이언스는 물리학자로서 양자이론에서 말하는 ‘얽힘’과 ‘창발’이라는 두 가지 현상으로 실재의 상호연결성을 이야기한다.
그와 파커 파머는 주변에서 단절된 또는 독립된 개별적 자아라는 생각의 허구성, 그리고 삶과 생명과 우주의 전체성, 상호연결성이 증명되고 있다고 하면서 우리의 대학 교육도 이제 이러한 새로운 실재상(相)을 반영하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책에서 말하는 통합 교육integrative education이란 바로 이러한 교육 철학을 두루 아우르는 표현이다. 특히, 파커 파머는 통합 교육 비판자들의 다섯 가지 비판에 대한 응답을 통해 이러한 통합 교육의 철학적 토대를 놓고자 시도한다.
자기 성찰 통한 지혜 함양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영성을 계발할 수 있는가? 책에서 이야기하는 방법은 “자기 성찰을 통해 지혜와 사랑의 마음을 키우는 것”이다. 명상, 자기수양 등 동양의 오랜 수행법과도 일맥상통한다. 서양인들은 근대 과학의 객관화, 파편화된 연구 방법론에 대한 반성으로 이런 방법에 커다란 관심을 갖는 것 같다. 그러나 오히려 우리 동양인들은 명상, 자기수양 등의 방법이 오래 전부터 “우리 것”이라며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가? 그러나 사실 자기 성찰의 방법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다. 오직 실천 수행을 통해 그것을 자기 삶에서 체현하고 그 이로움을 누리고 베푸는 자의 것이다.
이를 대학의 연구, 교육, 학습 장면에 대입해 말한다면 자기 앞에 놓인 공부(연구, 탐구)의 주제 혹은 대상을-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을-가만히 들여다보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그렇게 찬찬이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연구 대상이 나에게 “말을 걸어올” 것이라고 한다. 이런 연구 방법을 두고 주관적이며 통제가 곤란한 방법, 객관적 측정이 어려운 허황된 방법이라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자연 과학의 객관적 지식도 실은 인간의 감각과 직관, 경험이라는 매우 주관적인 토대 위에 성립하고 있다는 점을 책은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자신의 개인적 직관과 경험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을 보다 “신뢰할 만한 무엇”으로 만드는 일이다. 책에는 옥수수 유전자 연구로 노벨상을 수상한 바바라 매클린톡을 이러한 연구 방법의 예로 제시한다.
옮긴이는 책의 중심 메시지를 크게 세 가지 차원에서 이해해보았다. 통합 교육의 본질을 각각의 차원에서 밝혀주는 이 프레임들은 통합이라는 말 그대로 개별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첫째, 부분이 아니라 전체. 책은 생태적 세계관, 모든 존재의 상호연결성을 강조하면서, 현재의 대학 교육이 안주해 있는 분과 학문의 “분업적 지식 노동”에서 과감히 벗어나 학제간 탐구, 현장 체험학습 등 다양한 통합 교육의 방법을 시도해볼 것을 요청한다.
둘째, 지식이 아니라 지혜. 지식이나 기능의 인간이 아니라 지혜와 사랑의 인간을 교육할 것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는 명상 등의 다양한 자기 성찰의 방법으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한다. 이런 “주관적” 방법은 “객관적인” 학문 연구에 적합하지 않다고 볼 수 있으나 사실 순도 100%의 객관성이란 존재할 수 없다. 연구자 자신의 실제 경험과, 대상과의 관계 맺기를 중시하는 새로운 학문 탐구의 방법론이 대두하고 있으며 책은 이에 대한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셋째, 홀로가 아니라 함께. 대학은 혼자서 “자기만의 연구”를 수행하는 장소인 동시에 대화를 통해 더 큰 가능성으로 함께 나아가는 기회가 존재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 가능성을 실현하는 방법으로 저자가 제안하는 것이 동료 학자-교수들과 나누는 대학 교육에 관한 허심탄회한 대화이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나누는 대화라고 해서 시시껄렁한 잡담이나 나누자는 건 아니다. 저자들이 제안하는 대화에는 정직하고 열린 질문honest and open question이라는 분명한 대화 원칙이 있다. 사실, 겉으로 드러난 형식이 대화일 뿐, 사실은 각자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자기 내면의 진실과 마주하는 내면 작업을 동료들과 함께 나누는 과정이라고 해야 맞겠다.
내일의 대학
청년 일자리가 시대의 화두인 요즘, 인공지능과 4차 산업혁명으로 멀지 않은 미래에 현재 존재하는 직업의 상당수가 사라질 것이라는 예측이 무성한 지금 “대학의 영혼”을 이야기하며 온전한 인간됨의 계발이라는 대학 본연의 정신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어쩌면 한가한 이야기로 들릴지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이 책은 대학이 원래 무엇 하는 곳인지 물음으로써 대학의 본령을 회복할 것을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은 시대적 변화에 역행하는 발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학이 위기에 처한 지금, 위기의 근본 원인을 파악하는 일, 변화무쌍한 시대의 흐름을 허겁지겁 좇기보다 대학의 본래적 정신과 뿌리를 찬찬이 살피는 일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이고 미래지향적인 해결책이기 때문이다. 근원으로, 본령으로 돌아가는 것이 오히려 가장 미래적이라는 저자들의 생각에 옮긴이는 적극 공감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위기의 대학을 넘어 희망의 대학으로, 현실의 대학을 넘어 이상의 대학으로, 지식의 대학을 넘어 지혜의 대학으로, 오늘의 대학을 넘어 내일의 대학으로 나아가자는, 설득력 있고 근거 있는 초대이자 호소문이다. 대학 교육에 몸담고 있거나 어떤 식으로든 대학 교육과 관계 맺은 이들이 이 책을 통해 대학 교육에 대한 자기만의 새로운 영감을 발견하고 이를 교육 현장에서 시도해볼 수 있다면 옮긴이로서 더 할 수 없는 보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