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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 부모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풀어야 할 본질적인 숙제
기시미 이치로 지음, 박진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7년 3월
평점 :
<후회 없이 내 마음대로>를 쓴 일본의 호스피스 의사 히라노 구니요시는 앞으로를 "간병의 시대"로 명명했다. 아니나다를까 초고령사회가 급격히 진행되는 요즘, 시내 어딜 가나 요양병원이나 주간보호센터가 쉽게 눈에 들어온다. 앞으로는 정말로 노인의 시대, 요양의 시대, 간병의 시대가 될 것이다. 그만큼 이 문제를 중심으로 엄청난 사회적 자원과 인력이 투입될 것이고, 급변하는 간병 환경에 필요한 다양한 논의들이 터져나올 테다.
나 개인적으로는 지난 1년 사이 가족 차원에서 많은 일을 겪었다. 한 살 위의 누나가 약물 자살로 생을 마감했고, 나는 아이 하나를 둔 채 결혼 생활을 정리했으며, 오랜 당뇨를 앓던 노모는 외과 수술 후 더딘 회복에 더욱 기력이 처지고 또렷하지 않은 정신 상태를 보이고 있다(치매 우려). 게다가 그나마 건강하던 80대 중반의 아버지는 기존의 청력 상실에 더해 어지럼증을 호소하며 병원을 전전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이 지난 1년 사이에 일어났으니 가족 관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고 할 만하다.
책의 부제가 가리키듯이 병약한 부모님을 간병하는 문제는 "살아가는 동안 누구나 풀어야 할 본질적인 숙제"일 것이다. 닥치기 전에는 와닿지 않는다. 그러나 막상 닥치면 눈앞의 현실이 된다. 그렇게 된 이유와 과정을 따질 겨를이 없다. 생활 패턴에 당장 변화가 생기고, 해야 할 일들이 바로 들이닥친다. 당장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하고 둘러보고 고민하고 실행하지 않을 수 없다.
부모의 질병과 간병 문제를 회피하는(혹은 운좋게(?) 피해가는) 자식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자식들은 하루가 다르게 노쇠하는 부모님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고민이 많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집어든 이유도 그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특히 내가 좋아하는 아들러 철학을 쉽게 안내하는 저자 기시미 이치로는) 병약한 부모님의 간병 문제를 어떻게 다루었을까 궁금했다.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한 책과의 만남은 독자로 하여금 눈에 불을 켜고 책을 읽게 한다. 명확한 문제의식으로 책을 읽으면 더 빨리 읽을 뿐 아니라 독서로 얻는 것도 훨씬 많다. 책을 읽는 내내 저자의 자리에 '나'를 대입하며 읽었다. "아~ 저자는 이럴 때 이렇게 했구나, 나라도 그렇게 했을까? 어라? 이건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인데?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그래, 저자의 말을 듣고 보니 확실히 그게 더 현명하고 유익한 처사군." 이런 깨달음을 주는 책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부모에 대한 저자의 사랑이 곳곳에 묻어남을 느꼈다. 뇌경색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와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오랜 기간 간병한 저자는 의무적인 효도라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부모의 모습을, 동등한 한 인간(친구)으로 바라보는 성숙한 태도를 보여주었다. 책에서 얻은 핵심 메시지를 몇 가지 정리해 보았다.
1) 병약한 부모의 완전한 회복을 목표로 삼지 않기.
연로한 부모가 예전의 건강 상태로 완전 회복하기란 사실 불가능하며(자연의 섭리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것을 목표로 삼으면 간병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더욱 힘들어진다. 현실적인 목표를 잡자. 부모님의 현재 상태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2) 행복의 한계 인정하기.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깨달음. 궁극적으로 각자의 행복은 각자가 책임지는 것. 누가 누구를 행복하게 해준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부모를 행복하게 해드리는 노력을 방치하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이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데는 한계가 있으며, 궁극적인 행복은 각자 스스로의 책임일 수 밖에 없다는 엄연하고도 겸손한 진실 앞에 서자는 요청.
p.124"아버지를 간병하면서, 저는 자식이 부모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도 사람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해줄 수도, 누군가에 의해 행복해질 수도 없습니다. 아이를 키울 때 부모는 아이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합니다. 하지만 부모는 아이를 행복하게 해줄 수가 없습니다. 아이의 행복을 원하는 것이 틀렸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이는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p.125: "내가 부모님을 행복하게 해줄 수는 없습니다. 물론 부모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부모님을 위해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이지요."
3) 부모의 지금 모습 그대로에서 언제나 다시 시작하기.
부모가 치매에 걸려 엉뚱한 소리를 하고 속이 상하더라도 지금 모습 그대로에서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깨달음.
87쪽: 만약 아내가(부모가) 나를 잊어버리면 그 시점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면 됩니다. 매일 관계를 새롭게 만들어나가면 됩니다. 어제부터 시작된 관계를 오늘로 이어나가는 것이라 생각지 말고, 오늘부터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4) 부모 간병은 '부모를 위해 내가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관점 갖기.
나 역시 부모 간병을 "즐길" 수 있으면 된다. 쉽게 말해서 내가 좋아서, 나를 위해서 한다는 관점을 갖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말처럼 쉽지 않고 상당한 상상력이 필요하긴 하지만, 잘 살펴보면 부모 간병이 반드시 나의 "백퍼센트 희생"인 것만은 아니다. 가령, 부모 간병을 하는 중에 지금껏 몰랐던 삶의 진실에 눈뜰 수도 있고, 노인들과 병약한 이들을 가까이 보게 되면서 전에 알지 못하던 것들을 알게 되는 수도 있다. 또 지금까지의 나의 생활 패턴을 돌아보고 전체적인 삶의 이정표를 다시 잡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p.126: "벚꽃 피는 계절에 벚꽃 구경을 시켜드리려고 부모님을 모시고 외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벚꽃이 보고 싶어서 즐기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 꽃놀이를 부모님을 위해서 간 것이 아니라 부모님도 같이 가서 즐긴 것이라고 생각하면, 혹여 부모님이 나중에 꽃놀이 간 사실을 잊어버렸다 하더라도 그 일로 낙담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5) 부모의 존재 자체에 고마움을 갖기.
병약한 노부모들이면 누구나 하는 말 "어서 죽어야지.. 쓸데없이 오래 살면 자식들 고생시키는 거야." 이런 말을 듣는 자식들은 속이 어떨까. "아니에요, 아버지(어머니). 살아 계셔 주시는 것만으로 저희에게 얼마나 큰 마음의 위안이 되는지 몰라요." 이렇게 말하고 싶지만 언뜻 입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이에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216쪽: "나이 든 부모님은 당신이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자신을 ㅇ맇고, 자신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나 같은 건 없는 편이 낫지'라며 괴로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가족 안에서 당신들의 자리가 없다고 느끼게 됩니다. 그런 부모님에게 ... 존재 그 자체에 '고맙다'고 해줌으로써 부모님의 존재가 가족들에게 도움이 되고 있음을 안식시켜주어야 합니다."
6) 늙고 병들어가는 부모님을 간호한다는 것은, 앞으로 필연적으로 다가올 "나의" 병듦과 죽음에 대한 예행연습이라는 관점.
나 역시 앞으로 필연적으로 늙고 병들어 죽어갈 것이다. 부모의 늙음, 병듦, 죽음을 지켜보는 일은 이에 대한 실전 예행연습이다. 내가 어떻게 늙고 병들고 죽어갈 것인가에 관하여 이보다 더 도움이 되는 현장실습이 또 있을까. 잘 지켜보면서 배울 것은 배워가며 그렇게 인생을 마무리해야 한다.
스티브 잡스가 말했던가. 죽음은 인생 최고의 발명품이라고.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오만할 것인가,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욕심에 똘똘 뭉칠 것인가, 죽음이 없다면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을 것인가. 고맙다, 죽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