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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의 사랑이 남편을 죽였다
차란희 지음 / 푸른향기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가깝지만 멀게만 느껴지는 북한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는 계기가 될까 싶어 이 책을 선택했다. 책 제목도 선택을 결정하는데 한 몫 했다. 한국에 자신의 이야기를 책으로 내고 싶어 무작정 출판사에 메일을 보냈다는 저자는 현재 북한에서도, 남한에서도 살지 못하고 먼 타국에서 외로움을 견디며 살고 있다고 한다. 본글에 들어가기 전 편집자의 글을 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작가의 사정이 정말 안쓰러워 눈물이 '찔끔' 하고 나왔다.
저자는 책을 통해 가족의 이야기는 물론 지인들의 이야기와 북한 사람들의 생활, 북한 내부의 상황 등등 많은 이야기를 풀어냈다. 주변에서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을 쓴 것이기 때문에 깊이 파고 들어간 글은 아니었지만 북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던지라 새롭고 재미있고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했다. 읽는 도중 낯선 단어들이 좀 있었지만 본문에도, 뒤장에도 따로 설명이 되어 있어 직접 찾아봐야 하는 수고는 덜 수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소위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란 사람이다. 부족함 없이 풍족하게 자랐고, 북한 내에서 인정받는 남편을 만나 어려움 없이 살았다. 그 일이 있기 전까지..
태권도 사범인 남편을 따라 여기 저기 해외에서 몇 년을 살았는데, 장성한 아들이 대학을 다니다 외국인 여자와 사랑에 빠져 가출하게 된 것이다. 이 일로 저자와 남편은 물론 북한에서도 발칵 뒤집어졌다.
유학생들은 엄격한 감시와 통제를 받곤 했는데 유학 중 자유를 찾아 다른 나라로 도망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란다. 그 중 남녀간에 사랑에 빠지는 것을 엄히 제한한다고. 비교적 자유로운 외국에서 그곳에 물들어 사상이 변질될까 싶어 그렇게 통제를 해왔다고 한다.
아들의 사랑도피로 졸지에 북한 당국으로부터 추적을 받게 된 저자와 남편.
그래도 덕망있는 남편 덕택에 현지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안전하게 숨어 있을 수 있었다고 한다. 아들과 연락도 끊기고 조국으로부터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뒤집어 쓴 채 쫓기며 걱정과 불안에 하루 하루를 버텨가던 중 남편이 심장마비로 하루 아침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 남편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고 나서야 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아들 곁에는 연인인 나타샤가 함께였다고 한다. 저자는 둘을 원망도 많이 했지만 자식인 아들과 딸 같은 나타샤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사랑이 무슨 죄인가.
저자의 가족은 그렇게 충성을 바친 조국으로부터 사랑한 죄로 버림을 받고 막막한 가운데에서 어쩔수 없이 조국을 포기해야 했다. 한국으로 들어갈까 생각도 해봤지만 북한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이 이상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어 타국에서 외롭게 지내고 있다는 그녀. 어릴 땐 가족의 그늘 안에서, 어른이 되어선 든든한 남편의 그늘 안에서, 조국의 그늘 안에ㅓ 편히 살아 온 그녀에게 이런 고통스러운 상황은 억울하고, 슬프고, 또 억울했을 것이다.
저자는 이런 자신의 이야기를 보고 공감해주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글을 쓰게 됐고, 한국에서 책을 내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지만 같은 언어를 쓰는 한 민족이니 더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책을 읽으며 북한에서는 내부에서나 외부에서나 서로가 감시하도록 시스템이 만들어져 있다는 것을 비롯해 여러 가지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국가로부터 통제와 감시를 받지 않고 자유로이 살고 있는 내가 보기에는 많은 것이 놀랍고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다른 세계의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북한도 역시 사람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부분도 어느 정도 수긍이 가기도 하고.
저자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녀의 상황이 좀 더 나아지길 비는 것 밖에는 없는 것 같다. 앞으로 저자의 근황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펴냄으로써 그동안의 아픔이 조금은 덜어졌기를 바란다.
p.374
잠시 후 이 방을 나가면, 나는 더 이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일 수 없었다. 내가 태어난 땅을, 내 어미가 살고 있고 내 아비가 묻힌 땅을, 내 형제들이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는 그 땅을 버리려 하고 있었다. 내가 맨발로 걸음마를 하고 어린 시절 동무들과 어울려 흙장난을 할 때 맡았던 그 달콤한 향기를 나는 다시는 냄새 맡을 수 없을 거였다. 까만 내 머리카락 위에 비추던 햇빛과 하얀 볼을 스치고 지나가던 바람도 만져볼 수도 없게 될 것이었다. 사랑하는 남편을 처음 만나던 날, 잔잔히 흐러던 대동강의 물소리와 첫 입맞춤을 하던 떨기나무 그늘 밑에도 가볼 수 없을 것이다. 내 아이가 태어나고 내 아이가 뛰어놀던 그 세상으로부터, 우리 가족이 단란하게 살았던 시간으로부터, 모든 추억으로부터 나는 영원히 추방당하고 있었다.
이제 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공민이 아닌, 나와 조금도 닮지 않은, 나와 전혀 다르게 생긴, 물 설고 땅 설은 외지에서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말도 통하지 않는 이방인으로 살아야 한다. 이 나라의 국적을 얻어 원한다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겠지만 지구상에 딱 하나, 갈 수 없는 곳, 나를 허락하지 않을 그곳은 내 조국이며 내 고향이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내 아들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나는, 내 아들은, 내 남편은 그 모든 익숙하고 따뜻하고 사랑스런 것들로부터 차갑게 밀쳐져야 했던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내가 왜 여기에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