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에게 -사과-는 시에 해당한다. 연약하고 여린 속살을 품은 예민한 볽음이다. 상처받기 쉬워 흠과로 남게 되는 시인의 시를 항한 자세는, 표제 시 외에도 수록 시 <그렇게 오랫동안>에서 거듭 발견할 수 있다. 15년간 숙성시켰다는 시집의 이력이 시를 만날 때의 조심스럽고 예민한 시인의 자세를 반영하는 지표랄까. 오래 사용하던 냉장고를 들어내고 그 벽에 얼룩으로 남은 두 손을 든 사람을 얻었다는 <그렇게 오랫동안>에서의 시적 내색은 시인의 삶과 완벽히 닮아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까 ,시인에게서 -흠과-는 자신의 삶이 어딘가에 부닺쳐 얻은 눈물겨운 얼룩들이며 곧 시이기도 할 것이다. 가볍고 조용한, 감각적인데도 이상하게 조심스런 시인의 문장은 일종의 멍을 포함하고 있으며 시적 아름다움은 그 멍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드러난다. 그윽하게 오래 머물러야 전체가 보이는 시집이다.
어디까지가 시인지? 를 되물으며 시의 한계를 쿡! 찔러보는 외계 생명체의 지구에 살며 시 쓰기. 리호의 시들은 명랑 쾌활하다. 좌충우돌하며 이 지구를 사는 이들의 삶의 관습, 언어적 한계를 흔들어 새로운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다. 이럴 때의 그는 시와 시적인 어떤 것들은 시의 경계를 타고앉아 한껏 맹랑해진다. 전통적 시의 입장에선 괴팍해 보일 것이 분명하지만, 누군가는 전통이 가진 엄숙주의와 고루함을 쪼아 새로운 지향을 모색한다. 그러므로 시집 <설탕이니까> 를 읽으려면 기존의 시적 질서를 받아들이는 우리네 자세 중에서 해석을 담당하는 이가 심하게 썩을지도 모른다. 그렇거나 말거나 시의 가장 뾰족한 일면을 만나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자. 이 시집을 만나보라고 권하는 까닭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존재의 자기 탐색인 까닭이다. 다만 좀 더 개성적이며, 분명한 자기의 목소리를 가졌다는 점을 참고할 것! 쾌활한 자의 슬픔까지도 정말 쾌할할지 되묻는 것으로 독후를 마친다.
뽀송한 솜뭉치로 만든 인형을 만질 때의 감각적 기분이 이 시집을 읽는 내내 남았습니다. 이런 느낌을 현대시에서 만나기는 드문데도, 그럼에도 언어적 밀도나 이미지의 환원, 기표 아래로 흐르늗 서정적 여백을 두루 가졌단 생각을 하게 됩니다. 파가니니의 생애를 달려온 바이올린 줄을 느슨하게 푸는 순간 같은, 절묘한 포만감을 만끽합니다. 긴장감과 여유가 공존하는 즐거운 시집! 입니다.
시인은 낯선 미국에서 이민자로 남아 화가와 시인의 예술적 삶을 밀어간다. 환경에 예민할 수 밖에 없는 그의 예술가로서의 삶은 시에서 이민자, 혹은 아메리칸이 아닌, 이방인들이 경험할 법한 쓸쓸함과 소외감 등을 덤덤한 어조로 표현해 내는 듯하다. 가장 평등한 사회를 구현하고 있을 것만 같은 곳에서, 공기 속에 스며든 냄새를 그리듯 은연 중에 만연한 차별적 징후들 말이다.이럴 때 장윤녕의 시들은 낮은 목소리이며, 시집에 실린 시 <항해>를 통해 대표적으로 은유된다. 기대할 바깥이 부재할 때의 내면은 그 '기댈 곳 없음'의 반탄력으로 인해 아름답고 지극히 섬세한 떨림을 동반한다.그의 시가 숱한 현실적 벽을 밀어내고 새로운 조화로운 세계와 만나기를 기대한다. 그런 바람의 육화된 형태가 그의 삶인 시이며 그림이기도 할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