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는 게 비루하고, 지루하고, 또 견딜 수 없을만큼 지겹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거 대개 정해져있다. 텔레비전을 무심코 켠다든지, 쓸데없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든지, 인터넷을 이리저리 돌아다든지 하는 꽤 상투적인 일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책을 읽어도 머릿속에 통 들어오지가 않고, 텔레비전을 봐도 무심하며, 인터넷을 뒤질정도로 기운이 넘쳐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해결은 이렇게 끄적거려보기로 한다

황지우의 뼈아픈 후회에 들어있는 시이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았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누군가 한번쯤, 사랑하는 이를 기다려본 경험이 있는 이는 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문이 수없이 닫히고 열리기를 반복하면서 너를 생각하고, 이유없는 웃음이 나오고, 끝없이 너에게로 향하는 나의 마음을 말이다. 하지만 그 마음은 마음만으로 그칠 때가 많다. 물론 사랑하는 이가 올 거라는 확신을 갖고 기다리는 이가 아닌 한에서 말이다.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먼저 가 기다리는 화자는 사랑을 하고 있는 화자이기도 하겠지만, 오지 않을 너를 기다리며 먼저 가 기다리는 짝사랑의 주체일 수 있으니 말이다. 먼 옛날 내가 그런 것처럼.

하지만 내 뼈아픈 후회는 그가 오지 않아서가 아니다. 황지우의 같은 시집에 있는 다음과 같은 시가 나를 뼈 아프게 후회하게 만드니까. 

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사람들 /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 속에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수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혀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내가 자청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희생, 나의 자기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주는 바람뿐 

 

내 가장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가 되어 버린 것도, 내가 아무도 사랑하지 않은 이유인지 모르겠다. 나는 그걸, 그 누구를 진정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인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모든 나의 행동, 나의 생각들이, 모두 다 '자기 부정, 나를 위한 희생'이었던가 보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을까? 고백하지 못했다는 쓰라림이 아직도 남아,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떠나갔다. 그래서 내 사랑하던 자리는 모두 폐허로 남아있다. 폐허.  

한 교수님 말씀이 생각난다. 그 분은 자기는 불륜은 할 수 없을 거라 말씀하셨다. 불륜이 나빠서가 아니라, 그럴만한 에너지가 본인에게는 없기 때문이란다. 불륜도 사랑도 다 체력이 뒷받침되는 젊은 때나 가능하기 때문이라면서.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도 그와 상통하지 않을까?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서 사랑하게 될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을 거 같아   

어쩜 이 말은 사랑이 가진 처절한 열정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쉰이 넘은 나이에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 젊은 날 피터지게 그리워했던 만큼 그 누군가를 또 그리워하게 되는 일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건 육체적으로 오는 피로감이나 노쇄함보다는 젊은 날의 치기가 더 이상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집 앞에서 무심코 기다리던 시간들도, 미리 와 기다리고 있는 너를 생각하면서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를 다시 반복하기란 꽤나 지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도 젊은 날에 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내가 대학 때 많이 후회했던 것 중 하나, 학창시절 로맨스가 없다는 거였다. 사춘기 때의 풋풋한 사랑의 느낌이 무언지 도통 모른다는 게 참 슬펐다. 그렇다고 누군가 지금, 사랑을 다시 할까, 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요, 라고 말할 거 같다. 그러기에 나는 많이 늙어버렸고, 세상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버렸으며, 너무 일찍 돈맛을 알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위해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나는 대단한 나르시시트인지 모르겠다. 난 내가 나에게 고통을 주며 쾌락을 얻는 인간인줄 알았는데, 난 엄청나게 나 자신을 사랑한 구제불능의 인간이었나보다. 그래서 곁을 내어줄 수도, 곁에 누가 온 줄도 몰랐던 건 아니었을까? 그에게 말을 걸어볼 걸. 오빠, 오빠는 유일하게 제가 결혼하고 싶은 남자였어요, 지금 와 생각해보니. 라고 말이다.  

현실과 비현실은 이렇게 닮아있다. 만약 그와 결혼을 했더라도, 나는 불행했을 것이다. 현실은 현실이기 때문에. 그래서 아주 아름다운 여인과는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 아름다움은 시이지만, 결혼은 산문이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가슴에 묻기로했다. 그가 나에게는 아름다운 남자였으니 말이다. 그는 나에게 시였다. 아름다운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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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녹록하지가 않다. 예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요즘 부쩍 많이 깨닫고 있다.  

내가 많이 외로워서 그런가? 아니면 몸이 피곤해서 그런가? 이도저도 아니면, 아직껏 가을을 타고 있는 건가? 그냥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지는 밤이다. 아니지, 나는 조금 생각이 많았지.  

나도 모르는 나의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건 꽤 야릇한 경험이다. 나는 내가 20살이 될 때까지 초콜릿을 좋아하는지 모르고 살았다. 내가 과자를 고르는 걸 쭉 보고 있었던 선배는 '너 초콜릿 좋아하는구나'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내가 고른 대개의 과자들이 초콜릿이 묻혀져 있는 과자인 걸 알았던 때도 그랬고, '너는 너를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를 잘 모르는 거 같아, 그냥 네 비위를 맞추어주는 그런 아첨쟁이들만 좋아하는 걸 보면'라고 말하는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 내가 사람의 속보다 겉모습을 더 좋아하는구나를 알게 되었던 때도 그랬다.  

그리고, 부탁이 있어 전화를 건, 아주 오랜만에 그의 사무실로 전화를 걸어, '저, 전화를 드리지 않으려고 했었어요. 한 30분동안 전화를 걸까 말까 고민했었어요. 그래서'이라는 내 말을 듣고 저 멀리서 '응, 그럴 줄 알았어, 너는 생각이 너무 많은 아이였잖니'라는 그의 말을 듣고 나서야 나는 내가 생각이 아주 많은 그것도 쓰잘데기 없는 생각들이 아주 많은 사람이라는 걸 불현듯 깨닫게 된 그 때도 그랬었다.  

인생이 뭔지, 사는 게 뭔지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알았다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나보다. 11월, 샤걀의 눈 내리는 마을이 생각나고, 11월의 가을비가 생각나고, 이미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된 그가 생각나고, 목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참 많이 좋아했던 선생님도 생각나고, 많이 유치하다. 나란 인간.  

해놓은 건 하나도 없고, 쌓인 건 우울과 냉소뿐인 그래서 더 짜증나는 얼굴을 하고 있는 나란 인간이 말이다. 한 장 남은 달력을 봐도, 내가 2010년을 살아내고 있다는, 진짜 2010년이 있을까? 그렇게만 치부했던 어린 날의 그 날들을 지금의 내가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는 오늘 밤도 나에게는 참 힘들다.  

거울 속 늙어가는 내 얼굴도, 작년 사진, 재작년 사진과 달라진 내 표정도, 자꾸 커가는 다섯살 조카를 보면서도, 나는 늙음을 체험하고 있다. 늙음이란 진행 중인데, 그걸 모르고 사는 게 인간이라니. 그걸 체험이란 말로 쓸 수밖에 없는 삶이라니. 그것도 참 슬프다.  

오늘은 그 날인가 보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 

여승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슬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에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 백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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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소국 그랜드 펜윅의 뉴욕 침공기 그랜드 펜윅 시리즈 1
레너드 위벌리 지음, 박중서 옮김 / 뜨인돌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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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엉뚱함, 황당함은 다른 이들의 지탄의 대상이 된다. 그것이 기존의 제도, 기존의 통념과 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황당한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세상을 이끈 건 바로 그 황당함에 있었지 않나 싶다. 모두가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말할 때, 지구가 태양을 돈다고 말한 갈릴레오도 황당했었고, 가치는 노동에서 나온다고 말한 리카도의 주장을 다시 고개들게 한 마르크스도 당시로서는 꽤 황당한 사람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황당함이 황당하지 않게 된 사회에서, 그런만큼 조금 더 민주적이 되었다고 말하는 사회에서 기득권자들이 가진 '황당함은 이제 그만' 엉뚱한 건 용납하지 못해, 아니 용납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웃어넘겨줄게, 라고 너스레를 떠는 건 참 꼴같지 않은 일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건 아닌데, 나는 책의 내용을 쓰려고 했는데, 그럼 다시 각설하고 이야기 속으로. 

그랜드 펜윅은 물론 존재하지 않는 나라다. 그리고 책에서도 아주 작은 나라로 그려져 있다. 수출을 하긴 하지만 그게 전 세계를 향한 거시적인 무언가라기 보다, 이 쪽과 저 쪽의 교환으로만 치부되는 아주 작은 중세적 마인드를 갖고 있는 나라이다. 그래서 그네들의 무기도 갑옷과 활이다. 세계지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아주 꼬맹이 약소국. 그 나라가 그랜드 펜윅이다. 그런데 바로 그 나라가 뉴욕을 침공해서, 아니 미국과 전쟁을 해 승리를 거두게 된다. 그 이유는...... 

그랜드 펜윅이 가진 소규모성에 있다. 미국을 향해 전쟁을 하면서도 20명 남짓이 탈 수 있는 범선으로 항구에 정박한다거나, 핵과 미사일로 무장한 뉴욕 한복판에서 박물관에 전시될 법한 갑옷과 활시위로 경찰을 사로잡았다거나 하는 것을 보면 잘 알수 있다. 

물론 그네들의 성공을 도와준 내부 고발자들도 있다. 바로, 예전 무기라서 겁먹을 수밖에 없었던 미국의 경찰들, 그랜드 펜윅의 사람들을 보고 외계인이 왔다고 난리법석을 피우는 언론들, 그 언론을 가감없이 수용하는 미국의 속물적인 중산층과 관료들.  

첨단 과학기술이 전지구적으로 해결할 것만 같았던 전쟁의 염려는 오히려 첨단 과학기술로 그 염려가 더 커지고 있다. 핵이 있으면 전쟁은 없어질 거야, 라는 생각은 안일한 것으로 판명되었으니 말이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보아도, 이라크 전쟁을 보아도 누가 적이고 누가 우리 편인지조차 알 수 없는 전쟁이 지금껏 자행되고 있다.  

텔레비전에서 중계되는 전쟁은 마치 공상과학 영화처럼 실감은 나지만, 그게 그저 화면 속의 일일 뿐이야 라고 속단하게 만들며, 적을 살상하려는 무기는 적이 아닌 민간인 그것도 어린아이들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고 있다. 그랜드 펜윅이 성공하게 된 건, 그들의 무지라기 보다 그들의 엉뚱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끝내 마음 속에 내내 남아 껄끄러운 건, 그 성공이 바로 핵무기를 전제로 한 성공, 핵무기가 그랜드 펜윅에 있다는 그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저자는 비관적이지 않다. 끝까지 독자들을 실망시키지 않는 비장의 무기가 있으니. 바로 모든 나라가 그랜드 펜윅의 말을 듣게 만든 그 핵무기가 실은 잘못 끼워진 머리핀 하나로 대량살상무기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를 공포에 떨게 만드는 건 말, 그 수소폭탄이 거기에 있으니 그 나라 말을 잘 들어야지 하는 여기저기 알려진 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언론 장악이 정권에 필요했었나? 우리를 기쁘게도 슬프게도, 두려움에 떨게도 만드는 게 실상 있지도 않은 사람들의 말말들 때문이니 말이다.  

정작 무서운 건 믿음, 사람들이 갖고 있는 편견, 누구나 그렇다고 치부하는 생각들이라니, 정말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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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 - 갈무리신서 2
크리스 하먼 지음, 김형주 옮김 / 갈무리 / 199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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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하먼의 책을 읽기 시작했던 건 어떤 책부터였을까? 글쎄, 아마 크리스하먼의 마르크스 경제학 가이드였을 것이다. 그 뒤부터 그의 행적을 뒤쫓는 탐정, 아니 탐정은 너무 지적이니까, 그의 행적을 뒤쫓는 스토커처럼 그의 책을 하나씩 둘씩 사들이기 시작했다.  

내가 쫓은 사람이 크리스 하먼이었던 건, 그의 책이 읽기 쉽게 쓰여졌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면서도 아직 읽지 못한 건 마르크스 경제학이 가진 어려움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 언저리 근처에서 헤메이다가 좋은 넝마를 주운 기분, 그게 바로 크리스 하먼의 책이었다.  

그의 책은 진지함과 냉철함, 그리고 꽤나 심각한, 민중에 대한 철저한 사랑이 깔려있다. 그래서 그의 책은 읽기가 쉽다. 읽기가 쉽다는 말은 잘못된 말일 것이다. 읽기가 재미있다. 그가 쓴 '민중의 세계사'에서도 그리고 이 책, 동유럽에서의 계급투쟁에서도 계급투쟁이 성공하기 위해, 사회주의가 성공하기 위해 민중이 해야 할 일, 지식인이라 똑똑한 체하는 인간이 해야 할 일을 매우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있으니 말이다. 

대개의 계급투쟁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 유명한 프랑스혁명도 쁘띠 부르주아의 혁명으로 끝나버렸다. 공산주의의 상징, 레닌의 사상을 오롯이 간직했다고 믿었던 구소련의 공산당 통치도 관료들만의 세상으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그건 민중이 무지하니까, 민중들은, 아니 대중들은 이리저리 휩쓸리는 못난 존재들이니까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민중은 그럼에도 선하기 때문이다.  

스탈린 정권의 눈치를 보아야 했던, 체코, 헝가리, 폴란드에서의 계급투쟁도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혁명은 꼭 성공해야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다. 계급투쟁은, 그것이 한 번 일어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크나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건, 그 혁명의 투지가, 그 혁명의 치열함이 또 다른 혁명을 준비할 씨앗을 마련해줄 수 있어서이다.  

그럼에도, 미국의 천박한 자본주의보다는, 유로코뮤니즘이 덜 천박하고, 더 민주적인 것처럼 말이다.  

혁명은 자체만으로도 찬란한 빛을 뿜어낼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봉기를 일으키는 민중이 할 일은 다 한 것은 아니다. 보다 중요한 건, 혁명의 열기가 사그러지기 전, 민족주의, 애국심, 파시즘, 타민족에 대한 분노에 쉽게 타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혁명은, 봉기는 전복이어야 한다. 그래서 지금 필요한 건, 마음에 들지 않는 정권을 오롯이 무너뜨릴 수 있을만한 용기와 베짱, 차가운 가슴인 것이다. 바로 그 일은, 민중이 스스로 해야 한다는 데에 봉기의 의의가 있다. 그래서 봉기는 외롭고, 슬프며, 때로는 가슴 먹먹한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내내 아쉽고, 또 한숨이 나왔다. 뜨거운 봇물이 터져나오듯, 노동자의 열정이 타오르지만, 그렇게 쉴새없이 타오르는 열정을 노동자들 스스로, 겁먹어버리기 때문이다. 외려 의기소침하는 경향이 노동자가 이끄는 민중에게서 계속해서 반복되어 나타난다는 것. 그게 바로 계급투쟁의 본보기인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읽는 내내 우울했다. 우울하다기보다, 그런 상황이 아주 자연스럽게 연출된다는 데 맥이 빠졌다. 그래서 중요한 게 조직, 정당이었나? 조금만 더 밀고 나갔으면, 투쟁은 성공했을 텐데, 그럼 유토피아에서 그리는 그런 세상이 펼쳐졌을 텐데, 바로 그 세상이 펼쳐지려는 찰나, 대중은 스르르 무너져내리고 말았다. 이쯤에서만 끝내도 돼, 임금투쟁에서만 끝내도 되지, 경제적 투쟁이 정치적 투쟁으로 못내 이어지지 못한 애닯음. 

그래서 우리는 조직이 필요하다. 끝까지 연대의 끝을 놓지 않게 나를 붙잡아 줄, 끝까지 애국심, 민족이라는 허상에 속아넘어가지 않게 나를 든든히 지켜줄 그 누군가, 바로 정당이 필요한 것이다. 개개인은 한없이 나약해질 수 있다. 하지만 개인이 모인 정당은 꽤나 튼튼하고 뚝심있게 나를 그 길로 인도해줄 수 있을 거다. 아니 그랬으면 좋겠다. 그게 내가 없어지더라도, 내가 죽더라도 슬프지 않을 유일한 길인 거 같으니까. 내가 없어져도 노동자들 스스로 이끄는 평의회가 나올 수 있겠다는 희망. 그 희망이 내 죽음을 쉬이 잊혀지지 않게 해줄 것만 같다.  

금요일, 몸도 마음도 지치는 밤이다. 내일이 토요일이라 기쁘기는 하지만, 또 다른 월요일이 시작되는 것도 은폐시킬 수 있는 토요일인 걸 이제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슬프다, 슬프다. 반복되는 하루하루, 지리한 시간들을 쉼없이 견뎌내야 하는 게 인생이라니, 이런 하소연이 여기서만 그칠 거 같다니, 이런 현실을 이 사회적 상황을 바꿀 수는 있을까?  

계급투쟁의 필요성이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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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적으로 철학하기 2 - 성장, 읽기 말하기 쓰기
텍스트해석연구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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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적으로 철학하기는 그 이름에서 느껴지는 두께에 비해 꽤 명랑한 책이다. 그리고 아주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책이 가진 감동과 의미가 가볍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럼에도 둔중한 깨달음을 주기 때문이다. 

통합적으로 철학하기는 1, 2권이 나와 있는데, 1권은 고독에 대해, 2권은 성장에 대해 4명의 이야기꾼이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꾸며져 있다. 물론 고독과 성장에 대한 텍스트를 갖고 말이다. 고독에 비해 성장이 눈길을 끌었던 건, '성장'에 방황하는 대학 때 읽었던 신경숙의 '외딴 방'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성장에서 다루고 있는 텍스트는 모두 다섯, 데미안, 피노키오의 모험, 하나오, 외딴 방, 그리고 스탠 바이 미이다. 이 중 세 개는 소설, 하나오는 만화, 스탠 바이 미는 영화를 그 텍스트로 하고 있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단연코 스탠 바이 미를 소개하고 싶다. 물론 내 방황하는 젊은 날 읽었던 '외딴 방'도 좋은 텍스트이긴 하지만, 외딴방이 자전적 소설이 가진 성장의 의미에 치우쳐 있다면 스탠 바이 미는 여러 명의 성장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고디를 주인공으로 고디의 성장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성장'에서도 고디의 성장에 포커스가 놓여져 있지만 내 관심을 끌었던 건, 바로 고디의 친구,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던, 번과 테디의 성장이다. 영화에서도 책에서도 이들의 성장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물론 번과 테디가 성장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주인공 고디와 크리스에 비해 성장의 깊이가 옅은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디는 작가로, 크리스는 유명 변호사로 성장하게 되나, 번과 테디는 마을을 벗어나지 못하는 방랑하는 실업자로 그려진다. 번과 테디에게도 성장은 큰 주제임에도 이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주변부적 위치에 매여있다. 그것이 이들이 처한 빈곤일수도, 그네들이 가진 의지의 약함일 수도, 그럭저럭 사는 게 행복이라고 치부하는 평범함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팠던 건, 번과 테디에게도 삶은 고달팠겠다 라는 것이다. 같은 죽음을 두고, 똑같이 어릴 적 시체찾기 게임을 즐긴, 누구는 훌륭한 작가로 누구는 알아주는 변호사로 성장했지만 그럴 수 없었던, 소외된 두 명의 또 다른 주인공의 모습에서 어쩌면 성장이란 개인의 문제라기 보다, 그를 성장하게끔 비계가 설정되어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나뉘어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아쉬움인 것이다.  

사회는, 구조적이다. 개인이 어쩔 수 없이 기댈 수밖에 없는, 그만큼의 생각만큼 할 수 없게 만드는 뿌리깊은 구조적인 것. 성장이란 어쩌면 그 구조 내에서 이루어지는 동전의 앞뒤가 아닐까? 어떤 이에게는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재미있는 지붕 체험일 수도 있고, 어떤 이에게는 사다리가 내팽개쳐진 채, 지붕에서 떨어지는 아찔함일 수도 있는 것이다. 번과 테디는 처음부터, 철없는 뚱보 번, 불우한 과격 청년 테디로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끝까지 그 굴레를 넘지 못한다. 그래서 주인공이 되지 못했던 것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주위 수많은 번과 테디에게 사다리가 되어주는 성장은 언제쯤 이루어질까? 그들이 방황하지 않게, 더 이상 마을을 어슬렁거리지 않게 해 줄 성장의 촉매는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그래서 조금 씁쓸한 성장 편이었다. 이 세상, 수많은 테디와 번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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