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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 피아노 소설Q
천희란 지음 / 창비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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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창비의 소설Q 서포터즈로서 읽게 된 마지막 책은 작가 천희란의 『자동 피아노』. 스물하나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고 각 챕터마다 작가가 지정한 음악이 소제목으로 적혀있다. 이 책은 죽음을 이야기하지만 죽음을 권유하는 책은 절대 아니다. 죽음을 생각하는 이들에게 권하고 싶은 책인 건 맞으나 생과 사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이들에게도 어울리는 책이다. 유독 가을의 낙엽처럼 쓸쓸한 문체로 이야기하지만 그 어떤 여름날의 파도보다 격렬함을 느꼈다. 열렬히 죽고 싶지만 적극적으로 살고 싶은 작가의 이야기 동시에 우리들의 이야기. 


  아래는 본문의 한 구절이다. 나는 이 책을 위에 인용한 본문의 문장으로 압축시키고 싶다.

  "고독은 혼자가 되는 것이 아니고, 고독은 잉여, 잉여의 과잉, 과잉의 질식. 이제는 아직 씌어지지 않은 장면마저 각색이 끝난 허구로 느껴진다. 당신은 이것을 허구라 믿어도 좋다."


  오랫 동안 사라지지 않는 죽음의 목소리를 한 권의 책으로 완성시킨 작가에게 사랑을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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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러브 소설Q
조우리 지음 / 창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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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창비의 소설Q 서포터즈로서 읽게 된 두 번째 책은 작가 조우리의 『라스트 러브』. 아이돌 '제로캐럿'과 '제로캐럿' 팬 중 한 명인 '파인캐럿'이 쓴 팬픽들로 구성된 소설. 각 멤버들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들과 일곱편의 팬픽이 공존하는 이 책은 내게 애틋한 향수와 그리움을 안겨주었다. 동시에 내가 어렴풋이나마 알 법한 감정들이 묻어 있어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책임을 느꼈다.


  나는 공식 해체한 아이돌 '원더걸스'의 10년 넘은 팬이다. 갑작스러운 고백일 수도 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원더걸스 생각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사실 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연스레 떠올랐다. 불투명한 사랑이라는 감정에 날개를 달고 싶다면 이 책을 추천. 일명 누군가의 '덕후'라면(혹시 '덕후'라는 표현에 조금이라도 거부감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이 단어를 '팬'이라고 정정할 예정) 더더욱 사랑스럽게(혹은 슬프게) 읽을 것. 공감과 몰입. 어떤 것도 놓친 게 없다. 아이돌 산업, 연예 시장의 단면을 일부 보여주지만 그걸 직접적으로 고발하는 건 아니다. 작가 조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로지 사랑. 우리가 누군가를 향해 힘껏 소리쳐 왔던 것을 정당화시켜주는 듯 하다. 책의 뒷표지에는 '무대 위 누군가를 뜨겁게 사랑한 적 있는 당신에게'라 적혀있다. 나의 아이돌, 원더걸스가 유난히 보고 싶고 그리운 날들이다. 조금 유난처럼 보이기도 하겠지만 이번만큼은 유독 작가님과 출판사에게 인사드리고 싶다. 감히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있는 그들에게 보낸 나의 마음을, 보잘 것 없는 게 아니라고, 그것 역시 찬란한 사랑이었다고 따스히 안아주어서 감사합니다.


  2017년 봄에 이 소설을 연재하면서 사랑의 모양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표현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사랑의 모양들. 때로는 둥글고 때로는 날카로운. 그리고 그 사랑이 향하는 곳에 무엇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p.193, 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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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언니에게 소설Q
최진영 지음 / 창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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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7월 14일. 제야에겐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고 영영 도망치고 싶은 날이었다. 하지만 제야는 살고 싶었고 더이상 숨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그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며 애쓰는 사람이 되고자 했다. 결국 이제야는 달리기로 했다. 스스로를 깊은 나락으로 빠트린 날도 있었지만, 제야는 잠기지 않았다. 다시금 위로 올라왔다. 제야는 동생 제니에게 쓰는 편지에 "나는 아무도 용서할 수 없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들 틈에서 나를 기만하면서 살기도 싫어. 내게 일어났던 일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아. 그러면 그의 죄도 지워질 테고 지금의 나도 뒤엉켜버리니까."(p.227)라고 썼다.


  일기 형식을 빌린 이 책은 인물의 내면을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이제야가 겪은 고통을, 그의 심정을 전부 헤아린다고 말하기엔 스스로도 겁이 난다. 나의 공감과 이해가, 이제야에겐 다른 의미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감히 내가 제야를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네가 달리기로 한 것을, 살 수 있는 날까지 살기로 결심한 것을, 애쓰고 싶어 하는 그 마음을 나는 응원한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이 책에는 여러 '어른'이 나오지만 우리가 바라는 어른상과는 거리가 있다. 오로지 강릉이모만이 제야에게 안정감을 준다. 대학을 다니게 된 제야가 흔들리는 생활을 이어갈 때 이모는 제니의 연락을 받고 서울에 올라왔지만 제야는 이모를 볼 수 없었다.

  2008년 7월 14일의 제야는, 제야만의 몫이 아니다. 제야만이 짊어지고 갈 문제가 아니다. 제야만이 달려야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너무나 오래 멈춰 있었고, 스스로를 질타했다. 이제는 함께 달려야 할 때다. 제야가 나를 성가셔 하지 않을 때. 나는 그녀를 부드럽게 안아주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겠지. 잠깐의 일에 너무 오래 얽매여 있다고, 내가 내 인생을 유기한다고 생각하겠지.
마음만 먹으면 털어낼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겠지. 나를 나약하다고 생각하겠지.
여자애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겠지. 이게 과연 타인의 생각일까? 내 생각 아닌가? 내가 나를 멸시하는 거 아닌가?
멍청한 자기혐오 따위 그만두고 싶다. 계속 떨어질 수는 없다. 나는 달리고 싶다." - P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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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코르셋 : 도래한 상상
이민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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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의 저자 이민경이 탈코르셋에 관한 책을 썼다. 이 책에는 탈코르셋을 한 수많은 페미니스트 인터뷰이들이 살아숨쉬고 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들이지만,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교집합 덕분인지 그들과 나 사이의 거리가 굉장히 가깝게 느껴지더라. 탈코르셋은 페미니즘과 페미니스트 사이에서도 가장 뜨거운 난제로 손꼽히는 사안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역시 완벽하진 않지만 탈코르셋(이하 탈코)을 진행 중에 있다. 지난해, 텀블벅 <탈코일기> 시리즈 펀딩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탈코라는 것이 쉽지만은 않더라. 자기검열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누군가 명쾌하게 대답해 주지 않아 방황하는 날도 많았다. 넘치는 정보와 이야기들은 sns와 인터넷 커뮤니티에 퍼지기 마련이었다. 주관을 찾는 것은 중요하며 배우는 것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스스로에게 변명하고, 합리화 중인 '나'를 발견했다. 그런 방황기의 나에게 찾아온 이 책은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 <탈코르셋: 도래한 상상>은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탈코를 해온 내게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는 지표이자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탈코에서 정말 중요한 것이 하나 있다면, 탈코는 혼자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계속 인지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에겐 항상 연대 중인 그들이 있으며, 어딘가에서 서로를 묵묵히 응원하고 있는 자매들이 있다. 


  나는 교재나 개념서, 문제풀이가 아닌 이상 일반 책에 밑줄 긋거나 접는 걸 굉장히 싫어하는 편인데 이 책을 읽을 때만큼은 달랐다. 펜을 들고 접어가며 읽었다. 공부를 한다는 마음으로 읽었다. 내가 경험하고 공감되는 부분은 물론이고 내가 애써 외면해왔던 현실을 인터뷰이나 저자가 대신 말하는 부분에서도 과감히 펜을 들어 밑줄을 그었다. 이게 현실이었다. 나와 관계없는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이미 겪었고 앞으로도 겪을 이야기였다. 나도 겪고, 엄마도 겪고, 친언니도 겪었으며 직장 동료는 물론이거니와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도 겪은 일들이다. 탈코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늘 하고 있었고, 앞으로도 그만 둘 생각은 없었다. 나는 페미니즘과 탈코르셋은 늘 따라붙을 수 밖에 없는 수식어라고 생각했기에 '탈코'에 대한 현타가 여러 번 왔었다. 인터넷 커뮤니티나 sns에서 넘치는 정보를 받아들이고 거르는 일은 온전히 내몫이었다. 어느날엔 '좋은 날엔 좋은 거지!'라는 생각으로 도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은 후 결심했다. 앞으로 날 합리화하지 않을 것이다. 탈코르셋에 맞선 나의 편협한 생각들에 지지 않을 것이다.


  p.121

  "…벗어야 할 코르셋이 무엇부터 무엇까지를 의미하는지는 그것을 입은 상태에서는 알 수 없다. 알기 때문에 벗는 것이 아니라 벗어야 알게 된다. 여러 가지 이유로 여성의 몸이 고통에 둔감해졌다는 것이 탈코르셋 운동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p. 146

  "탈코르셋을 한 여성은 여성으로 식별되지 않는다는 것만으로 갑자기 감시망에서 벗어나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규범을 벗어났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응시당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p. 147

  "…그러니까 제가 문제인지도 몰랐던 문제들을 알게 되는 것. 그리고 거기에서부터 벗어나는 것. 그게 탈코르셋인 것 같아요. 세계를 완전히 3D로 보다가 4D가 된 거죠."


  나는 학창시절만해도 치마는 교복치마 밖에 몰랐다. 남성교복에 비해 유난히 짧고 라인이 들어간 상의와 치마. 하복상의는 더 심했다. 그런 내가 스무살에 접어들자 치마에 눈을 떴고, 레이스 달린 블라우스와 원피스를 즐겨입었다. 바지 입는 날의 빈도가 줄어드니 그당시바지 입는 나를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하체에 자신이 없었던 내가 치마를 선호하는 건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멍청한 소비로 그때를 보냈구나, 싶어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진다. 본문 169쪽에는 "규범적 여성성 수행에 동반되는 다른 꾸밈 행위가 그러하듯이 패션은 의도적으로 여성의 신체를 통제하고 구속하는 장치로 쓰인 것이다"라고 쓰여있다. 오프숄더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입었던 건 스물네살의 여름이었다. 더 정확히는 하늘색의 식탁보 패턴의 체크무늬 오프숄더 원피스였다. 치마도 치마지만, 어깨에 자꾸만 신경이 갔다. 결국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그 옷을 입은 적이 없다. '사탕껍질'이라는 건 이런 걸 일컫는 게 아닐까. 탈코르셋은 멀리있지 않다. 산소처럼 늘 우리 곁에 맴돌고 있다. 언제든지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본문에 나온 말처럼, 우리는 항상 학습은 쉬우나 탈학습은 어려웠다. 배우고자 하는 마음을 잃어버려선 안 된다. 포기는 더더욱 안 된다. 지치고 힘든 시기가 오더라도 우리는 나자신과 더불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지지를 표하는 수많은 여성들을 떠올려야만 한다.


  p. 205

  "여성은 자신이 선망하는 바가 어디를 향하는지 미처 깨닫지 못했거나, 외모의 영역에서만 유일하게 인정 욕구를 채울 수 있음을 일찍부터 깨달았기 때문에 모든 자원을 이 영역에 쏟아버린다."


  p. 250

  "'탈코르셋은 편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탈코르셋을 했다고 해서 여성이 곧장 편해질 수 없는 현실을 지적하기도 하지만, 애초에 이 운동은 여성의 영역 내에 존재하는 불편함을 제거하기를 넘어 규범을 위반할 때 생겨나는 불편함을 유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음을 주지하기도 한다."


  p. 256

  "내가 살았던 경험들을 페미니즘적으로 다시 재구성해봐야 한다고 말씀하셨었는데, 제가 그걸 제 문제로 체화한 것 같아요."


  이 책은 나처럼 스스로에 대한 지독한 검열과 그 간극에 대해 혼란을 느끼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권한다. 그리고 나와 같이 결심하게 될 것이다. 지금의 행동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더이상 예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거라고. 본문 290쪽의 글을 인용하며 부족한 리뷰를 마친다.


  "…가부장제를 철폐해 여성을 억압으로부터 해방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탈코르셋 운동은 한 개인의 삶이 변화하려면 사회적 차원의 움직임이 반드시 필요하기에 일어난 운동의 원본인 동시에, 애초부터 한 세대의 힘으로 달성되지 않을 단 하나의 과업을 지금 등장한 개인의 몸으로 우연하게 통과하며 써 내려가는 또 하나의 각색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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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도시의 사랑법
박상영 지음 / 창비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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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박상영 작가의 신작 <대도시의 사랑법>. 감사하게도 정식 출간 이전, 창비에게 수록된 작품 중 하나인 <재희> 가제본을 받아 읽게 되었다. <재희>의 첫인상은 대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의문이었다. 사람 이름이라는 건 짐작이 되지만 그 이름을 가지고 어떻게 이야기가 진행될 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나는 소설을 접하기 전, 제목과 표지만을 보고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하며 혼자 추측하는 습관이 있다.) 그렇게 나는 재희와 '나', 그러니까 영이를 만나게 되었다. 서로가 지극히 n극과 s극이지만, 악어와 악어새처럼 서로 공생해야 하는 존재인 둘. 물론, 이 한 줄로 그 둘의 관계를 다 표현할 수는 없다. 서로가 남자와 섹스에 미쳐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정말 그렇게 밖에 말할 수 없으니까). 그렇다고 이 이야기가 그렇게만 흘러가는 건 절대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 경멸하지 말 것. 단순하게 말하자면 <재희>는 헤테로 여성과 게이 남성의 우정이라면 우정이고, 사랑이라면 사랑, 가족이라면 가족인 어쩌면 이 모든 관계를 가뿐히 뛰어넘는 서로의 이야기니까. 이 단편을 읽은 후 우리는 핑클의 <영원한 사랑>을 반복재생하게 될 테고 저절로 재희와 '나'의 노래하는 모습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재희의 결혼식으로 시작하는 이 이야기는 결국 영원할 줄 알았던 재희와 '나'의 시절이 영영 끝나버렸다는 것을 깨닫는 영이로 마무리된다. 재희가 결혼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며 차라리 자신이 여자를 만나 결혼을 하는 게 더 현실적으로 느껴질 지경이었다고 한다. 정착과 안정과는 거리가 먼 재희가 결혼이라니. 이젠 독자인 나마저도 배신감(?)이 들기도 하고. 나는 재희의 성격이 드러나는 표현들이 너무 너무 좋았다. 예를 들면, '인생의 중요한 문제들을 아무렇게나 넘겨버리는 데에는 재희만한 고수가 없었다' 같은 것. 또는 계속 연애나 하지, 굳이 결혼을 왜 하냐는 '나'의 질문에 하자고 하니까 그냥 한 번 해보는 거라며, 살다가 아님 말고라고 말하는 재희의 답 같은 것. 


  재희와 '나'의 깊은 관계를 잘 보여주는 대목은 재희의 임신 중절 수술을 위해 병원을 함께 방문하여 주는 '나'와 그날, 형편없는 실력으로 미역국을 끓이는 '나'가 아닐까. 아니 어쩌면 남자와 진한 키스를 하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뭐하고 있냐며 묻는 재희의 스무살, 그때부터. 그들의 관계는 사랑과 우정이라는 단편적인 단어에 그칠 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 이 이야기에 대해 실컷 떠들고 싶다. 누군가와 <재희>로 하루 종일 떠들고 싶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또 새로운 아침이 찾아와 <재희> 이야기로 꽃을 피워도 질리지 않을 것 같다. <대도시의 사랑법>에 수록된 다른 소설들은 어떤 분위기일까. 어떤 인물들이 또 나를 맞아줄까. 재희가 금방이라도 '나'에게 달려와 늦은 우기의 바캉스에서 돌아오자마자 대도시의 사랑법은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이었다고 재잘재잘 떠들 것 같다. 함께 마스크팩을 하며 누워있던 스무살 그때처럼.


  그 시절 우리는 서로를 통해 삶의 여러 이면들을 배웠다. 이를테면 재희는 나를 통해서 게이로 사는 건 때론 참으로 좆같다는 것을 배웠고, 나는 재희를 통해 여자로 사는 것도 만만찮게 거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 대화는 언제나 하나의 철학적 질문으로 끝났다. 

  - 우리 왜 이렇게 태어났냐.

  - 모르지 나도.

  / 43p.


  <대도시의 사랑법>에 수록된 <재희>는 현대문학 교수 350명이 뽑은 2019 올해의 문제 소설에 선정되었다고. 방이동 아파트에서 지내고 있을 재희가, 냉동실을 열어 블루베리 한 봉지를 꺼내먹을 '나'가 서로의 부재에도 굴하지 않고 그리고 잊지 않으며 담담하게 잘 살아갔으면 좋겠다. 시간이 지나도 스스로가 지니고 있는 정체성이, 그들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게, 오래오래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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