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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척의 배 - 트로이아 전쟁의 여성들
나탈리 헤인스 지음, 홍한별 옮김 / 돌고래 / 2024년 2월
평점 :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는 소설을 어려워 여러 번 삼국지를 완독하려고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하곤 했다. 항상 3권을 넘기지 못했다. 동양보다 서양의 등장인물의 이름은 더 복잡해 그리스·로마신화 역시 읽고 싶었으나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꼭 한번 완독하고 싶은 책 들이지만 언제 가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트로이 전쟁을 여성 등장인물을 통해 이야기하는 <천 척의 배>를 읽으면서 도전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천 척의 배>를 재밌게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어, 나 스스로 벅찬 감동과 자신감이 생겼다. <천 척의 배>를 다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나탈리 헤인스의 글이 매력적이고, 흡인력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방송인, 작가, 코미디언 등 다양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런 요소들이 그녀의 글을 풍부하게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양한 등장인물과 특히 서양 이름이라 상당히 부담되었지만, 지속해서 등장인물의 이름이 언급되어 소설을 매끄럽게 읽을 수 있었다. 결국 등장인물이 많은 <천 척의 배> 완독했다. 그것은 나에게 큰 의미이다. 이것은 아마도 홍한별 번역가의 역할이 한몫하지 않았겠느냐고 추측해 본다. 나처럼 등장인물이 많은 소설을 심히 두려워해 읽는 시도조차 잘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는 것 같다. 작가가 반복적으로 이름을 의도적으로 썼는지 아니면 번역가가 의도적으로 이름을 지속해서 번역했는지 모르겠으나 나한테는 개인적으로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 소설을 잘 소화하는데 상당히 적합한 방법이었다.
트로이아 전쟁에 관해 자세히 알지 못해도 이 책을 읽으면 트로이아 전쟁에 대해 알 수 있다. 트로이아 전쟁에 대해 구체적으로 잘 몰랐으며, 알더라도 얄팍한 지식만 가지고 있던 사람으로 이 소설을 읽었는데 거부감이나 난해하거나 어렵지는 않았다. 나를 몰입의 순간으로 이끄는 소설로 인하여 휘몰아치며 책을 읽었다. 그것은 작가의 필력이 뛰어나서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어려운 내용도 쉽게 쓰는 작가를 선호한다. 어려운 내용을 어렵게 설명하는 작가는 그다지 선호하지 않게 된다. 나의 머리 용량이 부족해서일까? 싫다. 그러 면에서 나탈리 헤인스 작가는 어려운 내용의 전쟁과 다양한 신, 전쟁으로 고통을 겪는 여성들을 밀도 높으면서도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썼다. 그녀의 다른 소설을 벌써부터 찾아 읽고 싶어지게 한다.
트로이아 전쟁에 관련 대다수의 책은 남성적인 측면에서 쓰이고 기술되었다고 한다. 이에 반해 <천 척의 배>는 트로이아 전쟁에서의 여성을 집중적으로 조명했다. 새로운 시각에서 고전을 바라보며 쓴 <천 척의 배>는 현시대와도 걸맞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해석으로 새로운 글을 쓴다는 것은 여간해서 쉬운 도전은 아니다. 글을 쓰면서 주저앉고 싶을 때가 얼마나 많았겠느냐는 생각이 드니 목이 멘다. 대부분의 책이 남성 위주로 쓰였기에 여성 위주의 내용은 거의 없어 자료 조사를 해도 많이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작가는 굳건히 작가의 시선으로 새로운 측면에서 소설 쓰는 열망과 노력을 하였기에 책이 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작가에게 우레와 같은 찬사를 보낸다.
10년간의 트로이아 전쟁에서 그리스는 승리하고, 트로이아는 패함으로써 여성들은 아버지, 어머니, 남편, 아들, 딸, 형제를 잃었다. 더 비참한 것은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비참한 인물 중 안드로마케의 비참함은 형언할 수 없는 만큼 사지가 뜯기고 찢어지는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자기 남편 헥토르와 자기 가족을 죽인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가 그녀의 아들 아스티아낙스까지 죽인다. 그런데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녀는 네오프톨레모스의 아들 몰로소스를 출산한다. 이런 비극적이고, 비참한 현실에도 그녀는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마침내 그녀는 헥토르의 동생 파리스와 함께 그리스에서 작은 트로이아를 만든다.
“ 말년에 안드로마케는 젊은 시절 재앙 속에서 잃은 모든 것의 그림자와 환영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행복의 그림자가 행복 자체에는 못할지라도, 트로이아 해안에서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쓰러져 울 때 기대했던 것보다는 훨씬 나은 삶이었다.”
- (395페이지)
이 소설은 전쟁에서 비참했던 순간들을, 여성을 통해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신들의 장난일까. 헤라, 아프로디테, 아테나가 사과를 두고 싸우는 장면, 그들로 인해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는 시발점이 되었다고 읽었다. 잘 이해하고 읽었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나의 기억은 그러하다. 신들의 수준이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 자신감이 생겨 그리스·로마 신화를 읽는 시도가 조금 더 앞당겨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의 원천은 <천 척의 배>이다. <천 척의 배>를 시간이 되면 다시 읽어야겠다. 그토록 흥미롭고 다채롭고 재미있다. 책을 읽으면서 나오는 등장인물의 가계도를 그리면서 읽으니 한층 더 소설을 이해하는 데 도움 되었다.
트로이아 크레우사, 트로이아의 전쟁에 뛰어들었던 아마조네스 자매(히폴리테, 펜테실레이아), 그리스에 트로이아 여성들이 잡혀있을 때 리더로서 모습을 보인 헤카베, 브리세이스, 크리세이스, 키산드라, 그리스에서는 전쟁 나간 남편인 오딧세우스를 그리워하는 페넬로페, 자기 아들을 죽인 남편 아가멤논이 전쟁 후 그리스로 돌아왔을 때 남편을 죽인 클리타임네스트 등 다양한 여성 인물과 여신을 만나보는 재미를 느껴볼 수 있는 흥미로운 고전 소설이다. 이 책을 읽으며 여성 문학상 최종 후보에 오른 다른 나라 작가의 훌륭한 작품을 만날 수 있어 충만한 기쁨의 순간이었고, 재밌게 글 쓰는 훌륭한 작가를 알게 되어 뜻깊다. 나탈리 헤인스 그녀의 이름을 기억해야겠다. 그리고 그녀의 또 다른 책을 읽어야겠다.
*출판사의 지원으로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