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버지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때 10살의 나이였다.
나 어렸을때, 방이 좁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내비치기라도 하면 "인공때는 이 만한 방에 100명이 넘게 잤다."라며 핀잔을 주셨다. 70년대 후반에 태어난 나로써는 '인공'이라는 단어가 낯설기도 하거니와 전쟁때 집이 다 파괴되고 없어서 코딱지만한 방에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잘수밖에 없었나 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우리동네에는 전쟁때 무너진 집들이 거의 없어 보였기에, 폭격때문에 집들이 없어진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 다닐때쯤 그 부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왜 '인공'때는 사람들이 작은 방에 몰려서 잘수밖에 없었는지, 집들이 다 무너져서 그랬는지 여쭤봤다.
아버지의 대답은 내 예상이랑 다른 것이었다.
우리집은 전라도 나주에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안되어 인민군이 집권하고 그 전에 면장, 경찰등은 다 도망가고 없었다. 당연히 이때 우리 면에도 인민위원회가 꾸려졌고, 이때를 사람들은 '인민공화국'을 줄여 '인공때'라고 부른다.
하지만 다 알다시피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인공'을 했던 사람들과 인민군들은 산으로 도망갈수 밖에 없었고, 떠났던 경찰들과 공무원들이 돌아오고 국군이 들어오면서 '인공'에 부역했거나 인공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색출했다. 하지만 '인공때' 사람들은 남쪽이라는 한계와 다시 전세가 역전되길 바라면서 인근 산속에 은신해 있었고 밤이면 마을에 내려와 식량을 얻어가곤 했던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인민군들이 들이대는 무기가 무서웠었는지, 인정때문이었는지 '인공'사람들에게 식량을 제공했었고, 이런일이 빈번해 지자, 국군은 마을 전체 소개작전을 펴서 마을 인근의 산들을 이잡듯 하여 '인공'사람들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그런데 그 소개작전은 거의 면단위로 이루어져서 한꺼번에 한 면의 사람들이 다른 면으로 피난을 갈수밖에 없었고, 졸지에 피란민 아닌 피란민을 받은 인근 면의 사람들은 코딱지만한 방에 100여명을 재워줄수 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소개작전은 인공의 활동의 중점 지역으로 이루어진듯 한데, 아마 우리 면이 그러한 지역이었나 보다. 우리 동네엔 '공둥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산에서는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지난 후에도 나무하러 갔다가 인민군의 시체를 봤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데, 우리 면 지역 인근 산에 '인민군'의 피난처가 조성되었었던것 같다. 산의 이름 또한 그렇다. 아버지께 왜 산 이름이 '공둥산'인지, '공산당산'이라서 그런건지 물으면 본인도 그것은 잘모르겠는데 어렸을때 부터 그 이름으로 불렸다고 하셨다. 그리고 국가 과거사위 조사결과 이러한 소개작전 중에 우리 면에서도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여러건 있었다고 밝혀졌다. 정말 끔찍한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한, 우리 아버지가 기억하는 한 한국전쟁의 피해는 이 정도였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인공과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고 인민군을 소탕하는 과정에 군경에 의해 민간인들 많은수가 학살되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지만, 지역의 90%가 유실되는 끔찍한 폭격은 없었다.
이 책 '냉전의 마녀들'을 읽고는 북쪽의 사람들이 왜 그렇게 미국에 적개심에 가득찼는지, 평양지하철은 왜 지하 100m 이상에 만들었는지, 아직도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극한적으로 살수밖에 없는지 알수있게 되었다. 만약 우리 남쪽도 그러한 어마어마한 피해를 소련군이나 중국군에 의해 당했다면 우리도 그러한 적개심으로 살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서울과 같은 대도시가 엄청난 피해를 당한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폭격도 실은 인민군이나 중국군에 의한 것이 아닌 미군이 인민군과의 전쟁중에 한 폭격이니, 그러한 적개심을 우리는 가질수 없었다.
1950년 11월 미공군이 집계한 북한 주요 도시들의 파괴율은 만포진 95퍼센트, 고인동 90퍼센트, 삭주 75퍼센트, 초산 85퍼센트, 신의주 60퍼센트, 강계 75퍼센트, 남시 90퍼센트, 의주20퍼센트, 회령 90퍼센트가 완전 파괴되었다고 한다.
과연 어떠한 전쟁에서 무엇때문에 이렇게 까지 사람이 사람에 향해 철저하게 파괴한 경험이 있는지, 그 상식이하의 행위에 어안이 벙벙할 정도이다.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나와 같이 현대사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조차 이러한 진상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니, 우리는 그동안 한국전쟁에 대해 정말 일면만 알고 있지 않았나 싶다.
북한은 이런 전대미문의 초토화 전쟁으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북한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국제민주여성연맹' (이하 '국제여맹')에 진상조사를 요구하였고, 국제여맹은 여성인권과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전쟁의 진상에 대한 조사 필요성을 느끼고, 전세계 여성인재들에게 조사위원회에 동참해 달라는 초청장을 보냈다.
그래서 초청에 응한 18개국 21명의 여성들로 현지 조사위원회가 꾸려지게 되었다. 이들은 덴마크, 체코슬로바키아, 네덜란드, 영국, 소련, 프랑스, 이딸리아, 오스트리아, 동독, 서독, 벨기에, 캐나다, 꾸바, 아르헨띠나, 튀니지, 알제리, 중국, 베트남에서 온 여성들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에 고루 분포되었으며, 직업도 변호사, 정치가, 도서관장, 대학교수, 교장, 작가, 저널 편집장, 공기업 대표등 다양하였다.
또 정치적 성향으로도 소련과 중국여성에서 부터 영국의 펠턴 스티버니지 개발공사 총재와 같은 정치인,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덴마크의 카테 플레론 같은 이들까지 그 스펙트럼이 다양했다.
이들은 1940~50년대 교육과 노동현장의 노골적인 성차별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최고의 전문성을 가진 엘리트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자국에서의 전도유망한 여성 리더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 참상을 조사하기 위해 기꺼이 유서를 작성하고 1951년 5월 북한으로 향했다.
이들이 조사한 한국전쟁중의 북한의 참상은 언설로는 표현할 길이 없는 '초토화' '학살' 그 자체였다.
그들 또한 조사과정에서 밤마다 이어지는 미공군의 '공습'을 겪었으며, 어디를 가나 널려있는 전쟁 피해의 당사자들을 생생히 만날수 밖에 없었다.
조사위원들은 4개의 조로 나누어 다양한 지역의 현지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를 마치고 각각 지역의 조사결과는 그 지역 담당자들이 정리하였으며 전체적인 내용은 다함께 정리하여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최종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크게 세가지로 구분할수 있다.
첫째, 공중폭격의 양상과 영향, 둘째, 집단적 고문이나 학살의 주체와 양상, 셋째, 여성에 대한 성폭력의 주체와 양상들이다.
첫째 공중폭격의 양상과 영향은 북한 지역 어디를 가나 마주할수 있는 것으로 1951년 5월 북한의 모든 도시와 농촌은 사실상 잿더미로 변해 있었으며, 이는 미공군 문서들에 의해서도 명백한 사실로 입증되었다.
둘째, 집단적 고문이나 학살의 주체와 양상에서 학살의 주체로써 미군이 압도적으로 많이 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학살의 주체로써 미군을 제한적으로 강조한 이 보고서는, 일명 '치안대'라 불리는 현지 우익청년들에 의한 행위가 부인할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확정된 상황에서 조사위원회의 결과의 신빙성에 대한 심각한 문제로 제기될수 밖에 없다.
필자는 이러한 결과에 대해 아마도, 북한당국에 의한 통역원들의 의도적 정보누락때문이 아닐련지 추측하고 있다.
셋째, 여성에 대한 성폭력의 주체와 양상들에서도 (그 가해자가 주로 미군으로 한정된데에 대하여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긴 하지만) 광범한 지역에서 구체적인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성폭력 피해도 전달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 유형은 크게 세가지로 구분되었다.
첫째는 전시 성폭력의 가장 대표적 형태인 전시 강간이고, 두번째는 여성성과 관련된 신체의 특정 부위에 대한 가학행위나 야만적 성희롱과 성고문 행위, 세번째는 여성을 납치하여 '유곽'등으로 불리는 특정 장소에 감금한 후 장기간에 걸쳐 집단적 성폭력을 가하는 행위이다.
이는 모든 조사위원이 현지에서 직접 보고들은바를 정확히 파악하여 전달한 내용이다.
북한 현지조사를 진행했던 조사위원들은 1951년 5월 16일 밤부터 5월 27일까지 약 10일동안 현지를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한 뒤 각자의 조국으로 흩어져 돌아갔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한국전쟁에서의 북한 현지 피해 참상에 대해 연설, 집필등 활동을 하였으며, 북한여성돕기 캠페인을 조직하고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세계는 이미 미국의 매카시즘을 선두로 냉전으로 접어들었으며,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는 소련 공산당의 한낱 꼭두각시 행위에 의한 선전물로 치부되고 말았다.
이 책의 주인공격으로 등장하는 영국 재개발공사 총재였던 펠턴은 조사위원회 활동이 '배반' '반역'행위로 낙인찍혀 총재직을 박탈당하고, 심지어 조국을 떠나 망명을 떠날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속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국제여맹 보고서의 진정성에 대해 단 한차례도 부정하거나 의구심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제3세계 여성들의 삶과 관련된 탈식민주의적 · 여성주의적 · 평화주의적 저서를 집필하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북쪽 지역의 전쟁의 참상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없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질렀다고 보기엔 너무나 끔찍한 범죄들이었다. 폭격으로 국토를 초토화 시키는 것을 넘어서 가죽을 벗기고, 달군 쇠꼬챙이로 코를 꿰고, 나체로 끌고다니고, 유방을 도려내고, 엄마와 아기를 동시에 찔러 죽이고, 임산부의 배를 갈라 아기를 꺼내 죽이고....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그러한 짓을 할수 있는지... 하지만 이러한 전쟁 범죄는 이미 제주4.3, 여순학살에서도 나타났던 양상과 비슷하긴 하다.
여순진상규명위원회가 어제야 정식으로 출범하여 조사를 시작한다는 뉴스를 보았다. 역사는 이렇게 더디게 진실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의 또다른 반쪽에서 일어난 참상에 대해서는 아직 들여다 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직도 전쟁중이고, 북은 우리의 상대국이다.
한국전쟁 전후 시기 남쪽의 그때 상황에 대한 진상에 대해서도 이렇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북한이라야. 하지만 진실은 있었고, 그 진실을 조사한 조사위원회의 보고서가 있다.
조사위원들은 그 선량한 의도와 활동과는 무관하게 냉전의 희생양이 되어 그 시대의 '마녀'가 되었지만, 이렇게 조금씩이나마 그 진실이 밝혀지고 있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