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땅 문지클래식 4
임철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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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우 작가의 책은 처음으로 읽었다. 아마 5.18을 다룬 '봄날'은 보기도 하고 듣기도 했던 것 같은데, 읽지를 못했다. 무언가 너무 소중한데, 다른 사람의 시선으로 된 관점을 읽어버리거나, 결론을 들어버리면 내 것은 없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무의식이 부러 '봄날'도 읽지 못하게 했던 것 같다. 하긴 5.18을 다룬 작품이, 과연 나의 경험에 도움이 되었으면 되었지, 해가 될 리도 없는데... 그냥 나의 게으름을 탓해야 겠다.

정말 게으름을 탓해야 겠다. 이렇게 훌륭한 작가를 이제야 만나게 되다니....!

그 시대의 낭만이랄까, 치열함 이랄까. 그냥 현실을, 역사를,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의연히 당당히 맞서 진솔되게 글을 쓰는 작가가 얼마나 될까? 요즈음 읽은 책 중 단연 이책은 최고이다!

한국전쟁이라는 온갖 협잡과 비겁함과 전도됨과 억움함과 그야말로 실타래 처럼 얽힌 시간들을 이렇게 진솔되게 쓸수 있는 작가가 있을수 있을까?

'곡두운동회'는 실은 완도에서 있었던 나주경찰들의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이야기 이며, '아버지의 땅'에 나오는 아버지는 누군가의 무수한 아버지의 모습이며, '그 밤 호롱불을 밝히고'의 두 모자의 사연, '뒤안에는 바람소리'.. 이런 소설들이 한국전쟁의 참상을 솔직하게 보여준다.

어쩌면 전쟁의 참상을 당한 이들은 이보다 더한 처절함속에 살았겠지만, 인간의 필력으로 이렇게까지 표현할수 있는 사람이 임철우 작가 말고 또 있을 수 있을까?

그리고 '사평역' ' 개 도둑' '잃어버린 집' '그물'...에서 70년대와 80년대초의 정서와 그 때의 처절함 또한 느낄수 있다.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지고 춥고 초라한 완행선 간이역에서 만난 고단한 삶의 이야기들, 시대에 의해서, 삶에 치여서 더이상 삶을 연속하기 힘든 인간 군상의 모습들... 사회적 암울함과 함께 그들의 고난한 삶 또한 절실히 다가온다.

나는 한편 한편의 소설들을 읽으며 매번 차오르는 벅찬 감정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다.

여기에 단편소설의 힘과 감동이 있다. 절정이라고 느끼는 순간 거기에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래서 감동의 여운은 더 크게 다가온 듯 하다.

이와 같은 글을 쓴 이는 이 사회의 모든 절망을 함께 했을수 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런 글을 쓸수 있는 도리가 있을 것인가?...

작가의 고향은 전남 완도였다. 아마 완도에서의 끔찍한 '곡두운동회'를 겪은 이들과 함께 살았기에 가능했으리라, 그와 함께 사는 이들의 군상을 옆에서 뼈속 깊이 공감하는 삶을 살았으리라... 그래야 이런 글들을 쓸수 있었겠지.

끝으로 나도 전라도 출신이라 이 책을 읽는 중 사투리가 나온 부분이 너무나 정겹고 반가워 좋았다. 그러면서 아마 다른지역 출신들은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문맥상 대충 넘어가고 있겠지 하고 혼자 '낄낄'대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나도 막상 일상에선 그런 단어들이 나오지 않는다. 내가 간혹 하는 사투리를 못 알아듣는 내 아이들을 보며, 이래도 되는가 하는 생각을 가끔 하기도 한다.

아름다운 것들은 항상 멀리 있다고 하더니.... 사투리도, 전쟁도, 외로움도, 쓸쓸함도.... 어쩌면 한발짝 멀리에서 보니 아름다울지 모르겠다.

#아버지의땅 #임철우 #임철우소설집 #곡두운동회 #사평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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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비룡소 걸작선 13
미하엘 엔데 지음, 한미희 옮김 / 비룡소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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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세번째로 모모를 읽었다.

1999년에 한번 읽었고, 2011년경에 한번 더 읽었고, 2022년에 읽었으니 10년단위로 세번을 읽은것이다.

명작, 고전이라고 일컫는 책들이 바로 이렇게 읽고 또 읽히고 하는 책들일 것이다.

책의 활자는 그대로 이지만 나는 시시각각 변화 하였으므로, 읽을때마다 그 감동이 다른것 같다.

처음 모모가 나왔을때는 그 열풍에 밀려 '뭐가 있나?'하는 마음으로 읽었고, 10년 후엔 그때 그 책 재밌었는데 하고 다시한번 읽고, 이번엔 독서동아리 모임으로 읽게 되었다.

처음에 읽을땐 마냥 재미있었던 것 같고, 시간의 주인으로 인생을 즐기며 살아야 겠다고 느꼈던것 같고, 두번째 읽었을땐, 뒷이야기가 시시하다고 느꼈던것 같고, 이번엔 시간과 인생의 아름다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해와 달, 유성과 별들이 제 진짜 이름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이름들에는, 해와 달과 유성과 별들이 무엇을 하며, 어떻게 함께 영향을 미쳐 시간의 꽃 한 송이 한 송이를 탄생시키고

다시 소멸시키는지, 그 비밀이 담겨있었다.

모모는 문득 이 모든 말이 자기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먼 곳에 있는 별을 비롯해 온 세상이, 엄청나게 커다란 단 하나뿐인 얼굴을

모모에게 돌리고 모모를 바라보며 말을 걸고 있었다!

모모 224p

모모는 호라박사의 시간의 집에 가서 마침내 시간에 대한 진실을 마주했다. 시간은 그러니까 시간으로 이루어지는 우리 한사람 한사람의 인생은 실은 매 순간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우며, 아름다운 소리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다운 꽃과 같은 것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아름다운 것을 매순간 흘려보내며 살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시간을 '소비'하기 보다는 '음미'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예전에 읽을땐 미처 깊게 보지 못한 부분을 이번엔 이렇게 음미하며 읽게 되었다.

세상에 똑같은 것은 하나도 없고, 그 아름다움 또한 비교 불가능한 유일한 가치를 지닌 한사람 한사람의 시간, 인생. 이것을 위해 세상은 끊임없는 애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 세상 모두가 나의 인생에 무한한 애정으로 바라봐 주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우리는 소중한 존재이다.

이 깊은 사랑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수 있을까!

"나는 누구보다 소중하며 아름답고 독특하며 특별하다" 라며, 인생을 응원하는 이 책 '모모' !!

모모로 나의 삶에 무한한 위안과 응원을 받는다.

#모모 #모모를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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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라 그래 (양장)
양희은 지음 / 김영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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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양희은'이야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대스타'다.

그리고 날마다 오전 9시면 그 목소리가 전국에 울려퍼진다.

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십수년째 장수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니다.

그리고 최근엔 '엄마가 딸에게'라는 노래로 다시 한번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런 양희은에게 과연 '아쉬움'이 있고 '어려움'이 있을까.

나는 스타에 대한 '오해' 아닌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스타는 하늘에 떠있으니, 하늘의 상서로운 기운만을 받으며 구름위에 살것 같은.

그런데 가끔 연예뉴스나 이런거 보면서 안타까운 소식을 전하는 연예인들이 있어, '아이쿠...' 한 적은 있었으나 양희은에게 힘든일이 있을거라는 생각은 못했다. (내가 무심해서 몰랐을까..?)

양희은은 원래 노래 잘하기를 타고난 사람이다. 어렸을때 부터 노래에 두각이 나타났으니...

하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이혼하시고, 13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9살에 집안의 빚을 갚기위해 노래 아르바이트를 시작할수 밖에 없었다.

돈 벌려고 부르는 노래는 힘든 일이었고, 27살이 되었을때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딱히 살고 싶은 희망도 없어졌다고 했다. 그러다 서른에 찾아온 암수술... 시한부 3개월일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그 뒤에도 집안의 빚을 갚아야 하는 가장의 역할은 계속되고...

36살엔 남편을 만났다. 첫사랑도 짝사랑도 떠나 보내고 찾아온 오롯한 사랑.

책을 읽다보면 양희은의 일상이 나온다.

새벽에 일어나 목욕하고 운동하고 생방송하고 장 봐와서 요리하고 공연팀과 공연연습하고... 이렇게 거의 매일이 같다. 또 지방공연이라도 공연을 가면 차 안에 있다가, 공연장 뒷편에서 대기하다가 공연만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이것은 정말 내가 생각했던 '스타'의 모습이 아니다.

뭔가 화려하고 우아하고 뭔가 우리네와 다른 모습 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상도 일하는 것도 일에 매여사는 것도 같다.

실망이라도 해야 될까. 안도라고 해야 될까.

모든 사람은 다 사연이 있고, 힘들고, 쉽지 않고... 그 가운데에서 '행복'을 찾으면서 사는구나...

이 책 '그러라 그래'를 읽고 인생 선배의 역경과 헤쳐나옴. 그리고 성실하게 지금도 뚜벅뚜벅 걷는 것을 배운다.

'스타'라고 다르기 보다는 한 사람으로써, 같은 사람으로써 인생을 살아갈수 있는 힘과 위안을 받는다.

인생살이에 있어 부득부득 따지기 보다는 여유롭게 바라보며 '그러라 그래' 하는 시선을 가질수 있게 해 준다.

#그러라그래 #양희은에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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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 죽음과 죽어감에 관한 실질적 조언
샐리 티스데일 지음, 박미경 옮김 / 비잉(Being)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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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라는 문장을 보고 들었던 생각은,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앞두고 나는 내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었는지, 내 삶의 의미는 무엇이었는지, 후대에 남기고 싶은 메세지는 무엇인지... 이런것을 성찰하는 책 일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책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서'는 그야말로, 인생의 마지막 순간은 어떻게 도래하는지, 그 과정에 어떤일들이 일어나는지, 죽는 순간은 어떤지, 죽은 다음에 시체는 어떻게 처리 할건지... 등에 대한 그야말로 실질적 인생의 끝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의 인생은 유한한다. 그래서 이 인생이 그렇게 애틋하고 소중하고 아름다울지 모르겠다. 영원히 무엇인가 지속된다면, 그것이 그렇게 귀하게 여겨지지는 않을것이다.

우리 사람은 오만스럽게도 이 세상에 스스로 주인이라고 자부하며 천년 만년 살것 처럼 아글타글하며 미워하며 욕심내면서 서로 상처주면서 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 인생은 그야말로 촌각과 같은 짧은 순간에 불과하고, 누구나 어김없이 그 끝이 있고야 만다.

어렸을땐 빨리 나이를 먹었으면, 아이들이 어렸을땐 빨리 컸으면, 학교 다닐때는 빨리 학교를 졸업했으면 이런 바람으로 하루하루가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랬는데, 정말 지나고 보니 모든것이 순식간에 지나간듯 하다.

쏜살같이 빠른 인생이라더니, 정말 그렇다.

그래서 지금 이글을 쓰는 순간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은 아직 멀은듯 하지만, 어느새 훌쩍 다가올것 같다.

그러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은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이 책에서 작가는 '좋은 죽음'이란 없다고 한다. 사람들이 봤을때 힘들어 보이는 죽음이라도 당사자가 원하는 모습으로 고통을 직면하며 죽은 죽음이 오히려 더 '좋은죽음'이라고 말할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흔히 사람들은 자신의 죽음이나 가까운 이들의 죽음이 가족들에 둘러싸여 따뜻한 말을 주고받으며 당사자의 안온한 방에서 이루어지리라고, 아니면 그런 죽음이 이상적인 죽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은 죽음의 현장은 그러한 경우는 드문경우다. 특히 요즘과 같은 핵가족 사회에서, 죽기 전의 환자를 집에서 모시는 일이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죽은 순간에 곁에서 사람들이 지켜보는 경우도 또한 드물다고 한다. 어쩌면 죽는 환자는 오롯이 혼자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할수도 있고...

이렇게 죽음에 직면하는 글을 읽다보니, 참으로 인생이라는 것이 오묘하면서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누구나 왔다 가지만 한사람 한사람에게는 온 생이니, 그 인생보다 더 귀중한 무엇이 있으리... 하루 하루 내 삶에 더욱 공력을 들여 살아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죽으면 아무것도 없을진데..

그러면 어떤 삶을 살아야 죽으면 아무것도 없어지는 인생이 좀더 가치가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도덕경 13장이 떠올랐다. 내가 근심이 있음은 이 몸이 있기 때문이지, 이 몸이 없다면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그러면 유한한 이 몸이 있을때 어떻게 살면 좋을까? 노자는 "愛以身爲於天下(애이신 위어천하) 若可託天下(약가탁천하)자기 몸을 아끼는 것처럼 천하를 아끼는 사람에겐 정녕코 천하를 부탁할수 있는 것이다." 라고 말했다.

천하를 내 몸을 아끼는 것처럼 아끼는 사람....

이런 사람이야말로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후회없이 눈을 감을수 있지 않을까.

도덕경 13

도덕경 13장 寵辱若驚(총욕약경) 貴大患若身(귀대환약신) 何謂寵辱若驚(하위 총욕약경) 寵之爲下(총지위하) 得之若驚(득지약경) 失之若驚(실지약경) 是謂寵辱若驚(시위 총욕약경) 何謂貴大患若身(하위 귀대환약신) 吾所以有大患者(오소이유대환자) 爲吾有身(위오유신) 及吾無身(급오무신) 吾有何患(오유하환) 故貴以身爲於天下(귀이신 위어천하) 若可寄天下(약가기천하) 愛以身爲於天下(애이신 위어천하) 若可託天下(약가탁천하) 총애를 받거나 욕을 당하거나 다같이 놀란것 같이 하라. 큰 환란을 귀하게 여기기를 내 몸을 귀하게 여기듯 하라. 총애를 받으나 욕을 당하거나 다같이 하란 말은 무엇을 일컫음인가? 총애는 항상 욕이 되기 마련이니 총애를 얻어도 놀란 것처럼 할 것이요, 총애를 잃어도 놀란 것처럼 할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총애를 받으나 욕을 당하거나 늘 놀란 것 같이 하라 한 것이다. 큰 환란을 귀하게 여기기를 내 몸을 귀하게 여기듯 하란 말은 무엇을 일컬음 인가? 나에게 큰 환란이 있는 까닭은 내가 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몸이 없는데 이르르면 나에게 무슨 환란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자기 몸을 귀하게 여기는 것처럼 천하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에겐 정녕코 천하를 맡길수 있는 것이다. 자기 몸을 아끼는 것처럼 천하를 아끼는 사람에겐 정녕코 천하를 부탁할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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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의 마녀들 - 한국전쟁과 여성주의 평화운동
김태우 지음 / 창비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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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버지는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났을때 10살의 나이였다.

나 어렸을때, 방이 좁다든가 하는 이야기를 내비치기라도 하면 "인공때는 이 만한 방에 100명이 넘게 잤다."라며 핀잔을 주셨다. 70년대 후반에 태어난 나로써는 '인공'이라는 단어가 낯설기도 하거니와 전쟁때 집이 다 파괴되고 없어서 코딱지만한 방에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잘수밖에 없었나 보다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우리동네에는 전쟁때 무너진 집들이 거의 없어 보였기에, 폭격때문에 집들이 없어진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대학 다닐때쯤 그 부분을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왜 '인공'때는 사람들이 작은 방에 몰려서 잘수밖에 없었는지, 집들이 다 무너져서 그랬는지 여쭤봤다.

아버지의 대답은 내 예상이랑 다른 것이었다.

우리집은 전라도 나주에 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얼마 안되어 인민군이 집권하고 그 전에 면장, 경찰등은 다 도망가고 없었다. 당연히 이때 우리 면에도 인민위원회가 꾸려졌고, 이때를 사람들은 '인민공화국'을 줄여 '인공때'라고 부른다.

하지만 다 알다시피 그해 9월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고 '인공'을 했던 사람들과 인민군들은 산으로 도망갈수 밖에 없었고, 떠났던 경찰들과 공무원들이 돌아오고 국군이 들어오면서 '인공'에 부역했거나 인공에 참여했던 사람들을 색출했다. 하지만 '인공때' 사람들은 남쪽이라는 한계와 다시 전세가 역전되길 바라면서 인근 산속에 은신해 있었고 밤이면 마을에 내려와 식량을 얻어가곤 했던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인민군들이 들이대는 무기가 무서웠었는지, 인정때문이었는지 '인공'사람들에게 식량을 제공했었고, 이런일이 빈번해 지자, 국군은 마을 전체 소개작전을 펴서 마을 인근의 산들을 이잡듯 하여 '인공'사람들을 죽이거나 잡아갔다.

그런데 그 소개작전은 거의 면단위로 이루어져서 한꺼번에 한 면의 사람들이 다른 면으로 피난을 갈수밖에 없었고, 졸지에 피란민 아닌 피란민을 받은 인근 면의 사람들은 코딱지만한 방에 100여명을 재워줄수 밖에 없게 된 것이었다. 소개작전은 인공의 활동의 중점 지역으로 이루어진듯 한데, 아마 우리 면이 그러한 지역이었나 보다. 우리 동네엔 '공둥산'이라는 산이 있는데, 그 산에서는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한참 지난 후에도 나무하러 갔다가 인민군의 시체를 봤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데, 우리 면 지역 인근 산에 '인민군'의 피난처가 조성되었었던것 같다. 산의 이름 또한 그렇다. 아버지께 왜 산 이름이 '공둥산'인지, '공산당산'이라서 그런건지 물으면 본인도 그것은 잘모르겠는데 어렸을때 부터 그 이름으로 불렸다고 하셨다. 그리고 국가 과거사위 조사결과 이러한 소개작전 중에 우리 면에서도 군경에 의한 민간인 학살이 여러건 있었다고 밝혀졌다. 정말 끔찍한 시간들이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는 한, 우리 아버지가 기억하는 한 한국전쟁의 피해는 이 정도였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인공과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고 인민군을 소탕하는 과정에 군경에 의해 민간인들 많은수가 학살되는 끔찍한 일들이 일어났지만, 지역의 90%가 유실되는 끔찍한 폭격은 없었다.

이 책 '냉전의 마녀들'을 읽고는 북쪽의 사람들이 왜 그렇게 미국에 적개심에 가득찼는지, 평양지하철은 왜 지하 100m 이상에 만들었는지, 아직도 전쟁과 같은 상황에서 극한적으로 살수밖에 없는지 알수있게 되었다. 만약 우리 남쪽도 그러한 어마어마한 피해를 소련군이나 중국군에 의해 당했다면 우리도 그러한 적개심으로 살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서울과 같은 대도시가 엄청난 피해를 당한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폭격도 실은 인민군이나 중국군에 의한 것이 아닌 미군이 인민군과의 전쟁중에 한 폭격이니, 그러한 적개심을 우리는 가질수 없었다.

1950년 11월 미공군이 집계한 북한 주요 도시들의 파괴율은 만포진 95퍼센트, 고인동 90퍼센트, 삭주 75퍼센트, 초산 85퍼센트, 신의주 60퍼센트, 강계 75퍼센트, 남시 90퍼센트, 의주20퍼센트, 회령 90퍼센트가 완전 파괴되었다고 한다.

과연 어떠한 전쟁에서 무엇때문에 이렇게 까지 사람이 사람에 향해 철저하게 파괴한 경험이 있는지, 그 상식이하의 행위에 어안이 벙벙할 정도이다.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나와 같이 현대사에 관심이 많았던 사람조차 이러한 진상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니, 우리는 그동안 한국전쟁에 대해 정말 일면만 알고 있지 않았나 싶다.

북한은 이런 전대미문의 초토화 전쟁으로 인해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북한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국제민주여성연맹' (이하 '국제여맹')에 진상조사를 요구하였고, 국제여맹은 여성인권과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전쟁의 진상에 대한 조사 필요성을 느끼고, 전세계 여성인재들에게 조사위원회에 동참해 달라는 초청장을 보냈다.

그래서 초청에 응한 18개국 21명의 여성들로 현지 조사위원회가 꾸려지게 되었다. 이들은 덴마크, 체코슬로바키아, 네덜란드, 영국, 소련, 프랑스, 이딸리아, 오스트리아, 동독, 서독, 벨기에, 캐나다, 꾸바, 아르헨띠나, 튀니지, 알제리, 중국, 베트남에서 온 여성들로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남북아메리카에 고루 분포되었으며, 직업도 변호사, 정치가, 도서관장, 대학교수, 교장, 작가, 저널 편집장, 공기업 대표등 다양하였다.

또 정치적 성향으로도 소련과 중국여성에서 부터 영국의 펠턴 스티버니지 개발공사 총재와 같은 정치인, 보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덴마크의 카테 플레론 같은 이들까지 그 스펙트럼이 다양했다.

이들은 1940~50년대 교육과 노동현장의 노골적인 성차별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자리에서 최고의 전문성을 가진 엘리트 여성들이었다. 그들은 자국에서의 전도유망한 여성 리더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 참상을 조사하기 위해 기꺼이 유서를 작성하고 1951년 5월 북한으로 향했다.

이들이 조사한 한국전쟁중의 북한의 참상은 언설로는 표현할 길이 없는 '초토화' '학살' 그 자체였다.

그들 또한 조사과정에서 밤마다 이어지는 미공군의 '공습'을 겪었으며, 어디를 가나 널려있는 전쟁 피해의 당사자들을 생생히 만날수 밖에 없었다.

조사위원들은 4개의 조로 나누어 다양한 지역의 현지조사를 실시하였다.

조사를 마치고 각각 지역의 조사결과는 그 지역 담당자들이 정리하였으며 전체적인 내용은 다함께 정리하여 보고서를 발표하였다.

최종보고서의 핵심 내용은 크게 세가지로 구분할수 있다.

첫째, 공중폭격의 양상과 영향, 둘째, 집단적 고문이나 학살의 주체와 양상, 셋째, 여성에 대한 성폭력의 주체와 양상들이다.

첫째 공중폭격의 양상과 영향은 북한 지역 어디를 가나 마주할수 있는 것으로 1951년 5월 북한의 모든 도시와 농촌은 사실상 잿더미로 변해 있었으며, 이는 미공군 문서들에 의해서도 명백한 사실로 입증되었다.

둘째, 집단적 고문이나 학살의 주체와 양상에서 학살의 주체로써 미군이 압도적으로 많이 제시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학살의 주체로써 미군을 제한적으로 강조한 이 보고서는, 일명 '치안대'라 불리는 현지 우익청년들에 의한 행위가 부인할수 없는 역사적 사실로 확정된 상황에서 조사위원회의 결과의 신빙성에 대한 심각한 문제로 제기될수 밖에 없다.

필자는 이러한 결과에 대해 아마도, 북한당국에 의한 통역원들의 의도적 정보누락때문이 아닐련지 추측하고 있다.

셋째, 여성에 대한 성폭력의 주체와 양상들에서도 (그 가해자가 주로 미군으로 한정된데에 대하여는 의문을 제기하고 있긴 하지만) 광범한 지역에서 구체적인 피해를 호소하는 여성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성폭력 피해도 전달하고 있다.

성폭력 피해 유형은 크게 세가지로 구분되었다.

첫째는 전시 성폭력의 가장 대표적 형태인 전시 강간이고, 두번째는 여성성과 관련된 신체의 특정 부위에 대한 가학행위나 야만적 성희롱과 성고문 행위, 세번째는 여성을 납치하여 '유곽'등으로 불리는 특정 장소에 감금한 후 장기간에 걸쳐 집단적 성폭력을 가하는 행위이다.

이는 모든 조사위원이 현지에서 직접 보고들은바를 정확히 파악하여 전달한 내용이다.

북한 현지조사를 진행했던 조사위원들은 1951년 5월 16일 밤부터 5월 27일까지 약 10일동안 현지를 조사하고 보고서를 작성한 뒤 각자의 조국으로 흩어져 돌아갔다.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한국전쟁에서의 북한 현지 피해 참상에 대해 연설, 집필등 활동을 하였으며, 북한여성돕기 캠페인을 조직하고 도움을 주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세계는 이미 미국의 매카시즘을 선두로 냉전으로 접어들었으며, 조사위원회의 보고서는 소련 공산당의 한낱 꼭두각시 행위에 의한 선전물로 치부되고 말았다.

이 책의 주인공격으로 등장하는 영국 재개발공사 총재였던 펠턴은 조사위원회 활동이 '배반' '반역'행위로 낙인찍혀 총재직을 박탈당하고, 심지어 조국을 떠나 망명을 떠날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속되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국제여맹 보고서의 진정성에 대해 단 한차례도 부정하거나 의구심을 드러내지 않았으며, 제3세계 여성들의 삶과 관련된 탈식민주의적 · 여성주의적 · 평화주의적 저서를 집필하는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북쪽 지역의 전쟁의 참상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수 없었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질렀다고 보기엔 너무나 끔찍한 범죄들이었다. 폭격으로 국토를 초토화 시키는 것을 넘어서 가죽을 벗기고, 달군 쇠꼬챙이로 코를 꿰고, 나체로 끌고다니고, 유방을 도려내고, 엄마와 아기를 동시에 찔러 죽이고, 임산부의 배를 갈라 아기를 꺼내 죽이고.... 어떻게 사람이 사람에게 그러한 짓을 할수 있는지... 하지만 이러한 전쟁 범죄는 이미 제주4.3, 여순학살에서도 나타났던 양상과 비슷하긴 하다.

여순진상규명위원회가 어제야 정식으로 출범하여 조사를 시작한다는 뉴스를 보았다. 역사는 이렇게 더디게 진실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의 또다른 반쪽에서 일어난 참상에 대해서는 아직 들여다 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직도 전쟁중이고, 북은 우리의 상대국이다.

한국전쟁 전후 시기 남쪽의 그때 상황에 대한 진상에 대해서도 이렇게 쉽사리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데 하물며 북한이라야. 하지만 진실은 있었고, 그 진실을 조사한 조사위원회의 보고서가 있다.

조사위원들은 그 선량한 의도와 활동과는 무관하게 냉전의 희생양이 되어 그 시대의 '마녀'가 되었지만, 이렇게 조금씩이나마 그 진실이 밝혀지고 있어 다행이다.

만약 어느 조사위원이 북한여성들을 향해 "70년이 지나도 전쟁은 끝나지 않을거에요"라고 말했다면, 그 누가 온전히 그녀의 말을 믿을수 있었을까. 하지만 이는 사실이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 전쟁 상황하에 살아가고 있다. 분단체제라는 전쟁과 같은 굴레 아래에서 문자 그대로 악전고투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더 '전쟁의 지속'과 '전쟁의 형식'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했던 국제여맹 조사위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전쟁이 왜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는지, 그 수행 방식은 왜 그토록 잔인했는지,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지 더 진지하고 집요하게 물어보아야만 할 것이다. 국제여맹 조사위원들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냉전의 마녀들 31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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