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택배왔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제일 기대하며 기다리는 반가운 소리가 아닐까 싶다.
내가 원하는 물건 어느 것이라도 주문만 하면 집앞까지 배송해 주는 서비스, 택배!
우리 삶을 빠르고 편하게 해주는 일에서 택배 서비스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일이 되어 있는 시대다.
더욱이 이번 감염병 사태에 옴짝달싹 못하는 우리를 대신해 손발이 되어 준
택배 기사님들의 노고와 수고에 대한 고마움은 빼놓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택배가 도착하는 순간, 인생이 뒤틀리기 시작했다."라는
책의 띠지에 써 있는 자극적인 문구...
범죄소설인가하는 상상을 하게 만들며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문구였지만,
책 뒷면의 주인공 '행운동'에 대한 소개가 나를 안심시키며,
읽고 싶은 마음을 한껏 불러 일으켰다.
대한민국의 평범한 택배기사 행운동,
정체도 모르고 심지어 이름도 모르는 주인공 '행운동'은
그저 그가 담당하는 지역의 이름 때문에 불려지는 이름이다.
실질적으로도 택배기사들에게 일어나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있겠지만
책의 제목이 <침입자들> 이기에 누가 누구로부터의 침입자인가에 대한 궁금증을
처음부터 끝까지 생각하며 읽게 되었다.
더욱이 조용히 살아가기를 원하는 행운동이
한 줌의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을 던져 놓은 터라
택배 일을 하며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대화를 하며,
어떤 반응을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흥미롭게 읽어나갔다.
마치 드라마를 보다가 아쉽게 끝나면
다음편의 예고로 무한 상상을 해가며 한 주를 기대하듯이
이 책 <침입자들>이 그랬다.
다른 일로 책을 계속 읽을 수 없을 때, 책의 뒤 내용이 궁금해져서
머릿속에 계속 머물러 있곤 했다.
그만큼 행운동의 말투와 사람들을 대하는 행동에 매력이 느껴졌던 것 같다.
차도남이라 해야할까? 까도남? 이라해야할까...
그의 어투와 행동은 까칠하기 이를 데가 없다.
나의 일상은 사막이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빛이 나의 일이고,
습기 한 점 없이 건조한 바람이 나의 시간이며,
끝없이 펼쳐진 모래가 나의 하루다.
먼 육지의 친구에게는 사막으로 집을 지으러 간 이의 소식으로 전해질 거다.
첫 페이지의 첫 문장이다.
이 문장을 시작으로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담배를 피우며
핸드폰으로 구직사이트를 훑어보는 마흔다섯의 한남자가 묘사된다.
동료들과도 말을 섞지 않고 굳이 새로운 인연을 만들고 싶지 않은 행운동은
그저 묵묵하고 성실하게 자신의 일만 하는 사람이다.
아침부터 밤 늦게까지 주위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택배 일을 시작하게 되고,
겨우 잠시 짬을 내서 담 배 한 대 피우는 틈에
매일 오후 한시에서 두시까지 딱 한시간,
벤치에 앉아 가장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는 한 여자 춘자의 접근을 시작으로
평범하고 성실한 택배기사 행운동을 향한 침입자들의 심리적 공격이 시작된다.
내 인생 하나만으로도 버겁다고 느끼는 행운동이지만
인생의 패배자들이라 느껴지는 약자들에게는 마음이 약해지고,
그렇지만, 연민에 책임을 지지 못할 경우 동정으로 전락해버리는 것을 알기에
애써 냉담하고 까칠하다.
일정한 시간 일정한 곳을 배송하며 만나게 된
100번지를 배회하는 마이클을 대할 땐 약자를 향한 연민의 감정에 최선을 다한다.
내가 생각하는 서비스업의 정의는 간단하다.
나는 고객에게 불친절하지 않을 의무가 있고(친절까지는 의무가 아니다)
고객은 나에게 불친절할 권리가 없다.(내가 먼저 불친절하지 않는 이상)
그뿐이다. -p75-
확고한 자기의 주관이 있기에
말 그대로 택배기사를 노예 대하듯 하는 진상 고객에 대해서는 그에 맞는 어투로
예의 바르고 배려있는 고객에 대해서는 또 그 친절함에 맞는 행동으로 응대한다.
자본주의나 노동의 가치, 또는 케인즈 관점의 거시 경제학,
마르크스의 잉여노동,애덤 스미스등의 어휘 사용으로
주인공의 경제 상식의 풍부함이 드러나 있고,
일하지 않는 동안에는 늘 책을 들고 사는 주인공의 지적인 모습은
같은 일을 하는 동료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어 보인다.
현실의 생계를 위한 육체노동을 하면서도
머리와 가슴은 지식인의 논리와 사고에 있는 주인공은
단단하고 냉철하고 바르다.
쓰러질 것 같은 한 노인을 부축해 주는 인연으로
경제 강의를 하고 싶어하는 노인의 집을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해
경제공부강의를 들어주는 주인공은 택배를 하기전의 과거가 궁금해지는 캐릭터이지만
그의 과거는 끝까지 미지수다.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자신이 읽은 책의 인용구를 이용하고
자신의 감정이나 생각을 그 안에 함축해 넣어 전달한다.
타인의 이해를 구하지도, 타인을 설득을 하지도 않는 주인공 행운동은
'시크함' 그 자체인 것 같다.
대화에 튕겨 나오는 비꼬는 어투, 그리고 대화중에 마음의 소리에 묻어나오는
유머나 재치때문에 책을 읽으면서 웃게 되기도 했다.
서울대 동문 명부 택배를 기다리는 50대 꼰대 대머리아저씨의 서울대 운운에
서울대란 단어에 맞아 죽기전에 대화를 끝내야 했다는 내용과
등산복 차림의 건물주의 막말앞에서 불법 시설을 지적해주는
행운동의 사이다 같은 대꾸들로 읽는 내내 즐겁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면서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는 것들이 많았다.
대기업 퇴사 이후 폐지를 줍는 마스크를 쓴 젊은 여성의 사연에 얽히고 싶진 않지만
어려움을 도와주며 불의를 보면 눈을 질끈 감는 용기가 있다는 표현으로
자신의 양갱을 건네며 자신의 선행을 결코 드러내지 않고 유머로 넘겨 버린다.
춘자의 사연을 알게 되고 또 정체를 알게 되기도 하지만,
물질에 현혹되거나 흔들림이 없이 꿋꿋하게 자신의 소신을 지켜나가는 행운동...
진리와 진실은 달라요.
진리는 사는 데 도움이 되죠.
하지만 진실은 꼭 그렇지 않아요.
모를 때는 알고 싶지만 알고 나면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걸 하는 일이 대부분입니다.
상처만 배부르게 먹는 거죠.
일어난 일은 일어난대로 흘려버리는 것도 괜찮은 방법입니다.
살면서 모든 일의 이유를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p205
게이 bar의 물건을 배달해 주며 얽히게 된 일로 고초를 겪고,
심문을 당하기도 하면서 형사를 불신하며
자신이 읽고 있던 서머싯 몸의 책 <면도날>구절을 인용하기도 한다.
주인공과 형사와의 대화중 job과 call에 대한 정의가 있었다.
job은 우리가 흔히 부르는 직업이죠. 하지만 call은 다르죠.
하나님이 불렀다는 뜻입니다.
소명의식이 필요한 일이죠. 목사,의사,교육자,소방관.
아무튼 자신의 희생을 전제로 한 직업들을 말합니다.
가치있고 훌륭한 일이라는 뜻일 겁니다.
하지만 소명에 따르는 인간은 극소수예요.
대개는 그저 직업일 뿐이죠.
하지만 call이라 불리는 일은 달라요.
허투루하면 타인의 인생을 망가뜨리는 건 일도 아니죠.
직업에 대한 주인공의 가치관이 드러나 있는 부분인 것 같다.
택배기사들의 급여를 갖고 도주한 사장으로 인해
더이상 택배일을 할 수 없게 된 삼개월의 시간을
책과 소주와 적막으로 채우며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고 있을 때
행운동의 과거를 조사해 온 춘자는 도움을 주고 싶어 하지만
모든 것을 뒤로 하고 가방을 들쳐 메고 길을 떠난다.
자신의 통장 잔고를 긁어 함께 일했던 동료들에게 입금해주고서...
아직도 사막에서 집을 짓고 있는지를 묻는 먼 육지에 있는 친구와의 통화로
행운동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혹시 요즘 책 읽습니까?
어떤 책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장 그만 읽어요.
두 문장뿐인데도 유치함이 차고 넘치지 않습니까?
... ...
한동안 침묵
또다시 침묵. 하늘을 올려다봤다.
제길, 더럽게 맑은 하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