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도 폭력이 될 수 있다. - P95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폭력에 대한 묘사가 읽기 고통스러웠다고 말하는 독자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실제 벌어진 일은 그보다 훨씬 더 끔찍해서 소설에 쓸 생각조차 할 수 없었으며, 그나마 쓴 것들도 나중에 지웠고 겨우 남은 것이 그 정도라 했다. 그는 본래 폭력적인 장면을 쓰는 데 특히 더 애를 먹는 작가다. 그렇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그가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저는 불판 위에서 구워지는 고기를 보는 일도 힘겨울 때가 있어요." 바로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오히려 그 소설을 쓸 수 있었으리라. 이것은 ‘폭력에 대한 감수성‘의 문제다. 이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더 민감해져도 좋다고 나는 생각한다. - P96

우리는 소설의 3요소를 ‘주제· 구성 문체‘라고 배운다. 간단한 이야기다. 목적과 재료와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중 재료를 이루는 세 가지를 따로 ‘구성의 3요소‘라 부르는데 흔히 ‘인물·사건·배경‘이라 외운다. 사실 정확한 순서는 ‘인물·배경·사건‘이라야 한다. 특정 타입의 인물이 특정 배경 속에 던져질 때 특정 사건이 발생하는 게 소설이라는 세계다.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예로 들자면, 하필 윤희중 같은 타입의 인물이 하필 무진이라는 공간에 던져졌기 때문에 하필 그와 같은 연애 사건이 발생하는 것이다. 즉, 인물은 모든 이야기의 출발점이다. - P138

뫼르소의 무도덕은 정직함의 어떤 극단적인 양상일 뿐이라고 말이다. 그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고 다음 날에는 애인과 섹스를 했다는 사실이 당신에게 그토록 불편한가? "육체적 욕구에 밀려 감정은 뒷전이 되는 그런 천성"이 뫼르소만의 것인가? 그는 단지 "삶을 좀 간단하게 하기 위해" 우리가 늘 하는 거짓말을 안 할 뿐이다. 더 나아가 카뮈는 뫼르소에게 기어이 이렇게 말하게 한다. "건전한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다소간 바랐던 경험이 있는 법이다." - P140

사고에서는 사실의 확인이, 사건에서는 진실의 추출이 관건이다.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사고가 일어나면 최선을 다해 되돌려야 하거니와 이를 ‘복구‘라 한다. 그러나 사건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사건이라면, 진실의 압력 때문에 그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무리하게 되돌릴 경우 그것은 ‘퇴행‘이 되고 만다. - P145

보르헤스 자신이 ‘기독교적 환상 문학‘이라 명명한 이 소설의 가설들이 놀랍도록 흥미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더 끌리는 논변은 지젝의 것이다. 《죽은 신을 위하여》(2003)에서 그는 유다의 행위가 ‘신뢰의 궁극적 형태로서의 배반‘이라고 말한다. 어떤 이가 공적 영웅이 되려면 누군가의 배반이 필요한 경우가 있다는 것, 그럴 때는 그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만이 기꺼이 그를 배반할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유다는, 가장 사랑하는 대상을 배반해야만 그 사랑을 완성할 수 있는 상황에 처했던, 비극적인 인물이다. 물론 신학적으로는 터무니없는 오독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문학은 이 오독의 빛에 의지해 인간이라는 심해로 내려 간다. - P148

소설에서 음악이 흐른다는 것은 무엇을 뜻할까. 노래는 거기 그대로 있는데 삶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사랑은 식고 재능은 사라지고 희망은 흩어진다. 삶의 그런 균열들 사이로 음악이 흐를 때, 변함없는 음악은 변함 많은 인생을 더욱 아프게 한다. 이 세상을 흐르는 음악이, 흐르면서, 인생을 관찰하는 이야기. 그러니까, 인물들이 음악을 듣는 것이 아니라 음악이 인물들의 얘기를 듣는 이야기. - P153

우리가 어떤 소설을 읽다가 내려놓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독자 각자가 소설에 기대하는 최소한의 어떤 것이 책의 뒷부분에서도 제공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그 순간에 책을 내려놓겠지. 나에게 ‘이 책을 그만 읽는 게 어떨까‘ 하는 유혹이 찾아오는 1차 고비는 처음 10쪽 부근, 2차 고비는 3분의 1 지점이다. 고비가 두 군데라는 것은 내가 소설에 기대하는 최소한의 어떤 것이 적어도 두 가지라는 뜻이다. - P158

소설적인 문장은 ‘소설적인 문장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속에서 고뇌한 흔적을 품고 있는 문장이다. 추상적인 명제이지만 정직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 고뇌는 반드시 전달된다. - P159

여기에 한 사람을 더 추가한다면 그것은 마땅히 오스카 와일드여야 할 것이다. 출처를 확인하지 못한 그의 아포리즘 중 하나를 나는 기억한다. "사랑에 빠진 남자는 여자를 위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 단, 영원히 사랑하는 것만 빼고." 이런 문장은 일단 한번 듣고 나면 결코 잊을 수 없게 된다. 그의 재기발랄한 문장들을 음미하며 맞장구를 치고 있자니 짓궂은 그가 또 이런 말을 한다. "사람들이 나에게 동의할 때마다 내가 틀렸다는 느낌이 든다." - P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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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런 불빛 아래 거울을 보니 잿빛 얼굴 여기저기 반점이 가득했다. 부디 계시라도 있기를, 내게 힘을 내리시기를. 승강기가 덜컥하며 멈췄는데도 위장은 계속 올라가는 것만 같았다. 결국 손잡이에 의지해 중심을 잡아야 했다. 교황의 즉위 초기 함께 이 승강기에 탔을 때였다. 대주교 둘이 들어오더니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주님의 대리자를 직접 마주하자 당혹스럽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교황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걱정 말고 일어나시게나. 나도 늙은 죄인일 따름이라네. 그대들과 마찬가지로······." - P18

"교황직은 어차피 격무입니다. 사람들도 그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어요."
트림블레이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말은 하지 않았다. 벨리니는 시선을 떨구었다. 묘한 긴장감. 로멜리는 잠시 후에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교황직이 격무라는 사실을 외부에 알릴 경우 사람들은 더 젊은 남자가 교황이 되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리고······ 아데예미는 겨우 60대 초반이며 다른 두 추기경보다 거의 10년이나 젊었다. - P31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밤공기 속으로 멀어져 갔다. 차단봉 안쪽에서 기자들과 사진사들이 추기경들을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동물원 짐승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유혹하는 관광객들 같았다. - P38

벨리니가 로멜리의 팔을 잡았다. "기도에 어려움을 겪으신다고요? 성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어쩌면 제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아시겠지만 그분도 종국엔 회의 때문에 고통받으셨답니다."
"성하께서 하느님을 의심하셨단 말씀입니까?" 그후 벨리니의 말은 영원히 잊을 수가 없었다.
"그럴 리가요! 하느님이라니요! 성하께서 신념을 잃은 상대는 교회였습니다." - P39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죽은 교황은 이따금 지나칠 정도로 검소와 겸손을 강조했다. 결국 과도한 겸손은 또 다른 차원의 허영이 아니겠는가? 더욱이 자신의 겸손을 과시한다면 그것도 죄다. - P47

아치길을 통과하자 안뜰이 계속 이어졌다. 안뜰 너머 안뜰, 또 안뜰. 비밀 회랑의 미로는 시스티나 예배당을 항상 왼쪽에 두고 돌았다. 성당의 벽돌 벽은 밋밋하고 어두침침해서 볼 때마다 실망스러웠다. 도대체 인간의 천재성은 어째서 온통 저놈의 화려한 내부에만 쏟아붓는 걸까? 로멜리가 보기엔 그놈의 천재성마저 지나쳐 미적 소화 불량에 걸릴 지경이었다. 반대로 외부는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은 탓에 그저 창고나 공장처럼 보였다. 아니면, 일부러 그 점을 노린 걸까? 지혜와 지식의 보물은 하느님의 신비한 내부에 숨어 있기에······. - P49

이따금 헬기 소음 너머로 시위 목소리도 들렸다. 수천의 목소리가 한목소리로 노래했다. 이따금 경적과 북소리, 호각 소리가 이어졌다. 무슨 이유로 시위를 하는지 알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동성 결혼 지지자, 동성 연합 반대파, 이혼 찬성 옹호자, 가톨릭 통일체 지지 가족 협의회, 사제 서품을 요구하는 여성들, 낙태와 피임을 원하는 여성들, 무슬림과 반무슬림, 이민자와 반이민자 그룹······ 이들이 하나로 모여 분노의 불협화음을 만들어내는 터라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딘가에서 경찰 사이렌 소리도 들렸다. 하나, 둘, 다시 셋······. 소음은 마치 서로에게 구애하며 도시를 헤집는 것 같았다.
이곳이 방주로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혼란의 파도에 휩싸인 방주. - P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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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 그리고 허무 그리고 허무(nada y pues nada y pues nada)." 이런 기분에 사로잡혀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행여 아직 없다 하더라도, 언젠가 세월이 흘러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에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이다가 우리는 문득 깨닫게 될지 모른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삶이, 언젠가 내가 읽은 적 있는 삶이라는 것을. - P61

서사의 각 국면에서 우리는 세 개의 물음(모티프)과 만나게 된다. 첫째, 말할 것도 없이 이것은 예술의 위대함을 찬미하는 이야기다. 생명이 있는 것들이 결코 극복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이다. 죽음을 극복하면 모든 것을 극복하는 것이다. 오르페우스가 악기 하나만으로 저승에까지 갈 수 있었고 아내를 데려갈 수 있게 허락을 받았다는 설정은 위대한 예술에 대한 그리스인들의 지대한 신뢰와 동경을 입증할 것이다. 둘째, 이것은 금지와 위반에 대한 이야기다. 플루토가 ‘뒤돌아보지 말라‘는 명령을 내린 이유는 분명치 않다. 죽은 자는 살려내선 안 된다는 자신의 원칙을 깨기 위해 최소한의 명분이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오르페우스가 결국 돌아보고 말았다는 점이다. 돌아보지 말라고 하면 결국 돌아보게 된다. 이 모티프가 구약의 창세기에서 한국의 민담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발견되는 것은 이 설정이 욕망의 본질(금지가 있는 곳에 위반이 있다)을 드러내는 효과적인 장치이기 때문일 것이다. 셋째, 이것은 상실과 애도에 대한 이야기다. 오르페우스는 애도를 끝내는 데 실패하고 타살의 형식으로 자살한 인물이다. 이상 세 가지 모티프는 이 원형적인 이야기로 들어갈 수 있는 세 개의 문이 된다. - P73

오르페우스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이것이 사랑하는 연인을 제 손으로 한 번 더 죽인 사람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이별의 순간에 연인은 나를 떠남으로써 내게서 한 번 죽는다. 그런데 더 사랑하는 사람은 더 사랑하는 사람의 위치에 서 있기 때문에 이별의 순간에 상대방을 질리게 만들 수 있다. 죽은 연인을 살리려는 노력이 외려 그를 한 번 더 죽이게 되는 경우다. 이 경우 떠난 것은 너이지만, 네가 돌아올 수 없게 만든 것은 내가 되고 만다. - P75

너무 오랫동안 울음을 참아온 그는 정작 자신이 그래왔다는 사실을 모른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것 중 하나는 자기 자신이 슬픔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슬픔이다. - P78

진정한 고통은 침묵의 형식으로 현존한다. 고통스러운 사람은 고통스럽다고 말할 힘이 없을 것이다. - P88

"나는 늘 내가 쓴 글이 출간될 때쯤이면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처럼 글을 쓰고 싶어 했다." 이렇게 시작되는 소설 아니 에르노의 《집착》(문학동네, 2005)은 ‘고통‘이라는 단어의 출현 빈도가 분량 대비 가장 높은 작품일 것이다.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은 근래 읽은 고통의 기록 중에서 가장 아름답다. "대부분의 젊은 사람들이 그렇듯 나도 젊었을 때는 젊은 나이에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소설의 첫 문장은 이렇게 닮아 있는데 그것은 이 소설들이 고통에 대해 말하는 작품이 아니라 고통 그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 P88

질문은 진실을 말하라고 던지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대체로 인간 개개인의 진실이라는 것은 도무지 한두 마디로 말해질 수 없는 것일 때가 많다. ‘나는 누구의 편도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진실은, 이렇게 시작되는 긴 이야기의 끝에서야, 겨우 떠오를 것이다. - P92

문학이 귀한 것은 가장 끝까지 듣고 가장 나중에 판단하기 때문이다. -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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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소는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5)에서 천하의 무자비한 폭군도 극장에서는 타인의 불행을 보며 눈물을 흘릴 수 있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태생적 동정심을 긍정했다. 그런데 한 저자는 저 대목을 거꾸로 읽는다. 극장에서는 태연한 눈물을 흘리는 인간도 자신이 직접 행하는 악덕에는 무감각해질 수 있다는 뜻으로 말이다. "우리가 스스로 야기한 상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야기하지 않은 고통 앞에서는 울 수 있어도 자신이 야기한 상처 앞에서는 목석같이 굴 것이다."(사이먼 메이, 《사랑의 탄생》, 문학동네, 2016, 292쪽) 이 말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원인을 제공한 슬픔에 더 깊이 공감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행동한다. 이 경우 타인의 슬픔은 내가 어떤 도덕적 자기만족을 느끼며 공감을 시도할 만한 그런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추궁하고 심문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 슬픔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 나를 불편하게 할 것이다. - P25

아이스킬로스의 소위 ‘고통을 통한 배움(pathei mathos)‘ (〈아가멤논〉, 177행)이란 고통 뒤에는 깨달음이 있다는 뜻이지만 고통 없이는 무엇도 진정으로 배울 수 없다는 뜻도 된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같은 경험과 같은 고통만이 같은 슬픔에 이를 수 있다는 것 말이다. - P27

〈킬링 디어〉가 엄밀한 의미에서 ‘비극‘인 것은 이 인간 조건의 비극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특정한 결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가 바로 결함이라는 것. 그러므로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 P27

〈킬링 디어〉의 첫 장면을 가득 채우는 것은 뛰고 있는 심장이다. 이 장면은 말한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심장이다. 심장은 언제나 제 주인만을 위해 뛰고, 계속 뛰기 위해서만 뛴다. 타인의 몸속에서 뛸 수 없고 타인의 슬픔 때문에 멈추지도 않는다. 타인의 슬픔에 대해서라면 인간은 자신이 자신에게 한계다. 그러나 이 한계를 인정하되 긍정하지는 못하겠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슬퍼할 줄 아는 생명이기도 하니까. 한계를 슬퍼하면서, 그 슬픔의 힘으로,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니까. 그럴 때 인간은 심장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심장이다. 아마도 나는 네가 될 수 없겠지만, 그러나 시도해도 실패할 그 일을 계속 시도하지 않는다면,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이 도대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나. 이기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위선적이기도 싫지만, 자주 둘 다가 되고 마는 심장의 비참. - P28

"거대한 고통은 정체되어 있다가 이완의 순간에 터져 나오는 법이다. 이 시종을 본 순간이 바로 그 이완의 순간이었다." 예컨대 별안간 부모의 초상을 치르게 된 사람이 미처 슬퍼할 겨를도 없이 장례식을 치르고 집에 돌아와서는, 현관에 놓인 부모의 낡고 오래된 신발 한 짝을 보고 비로소 주저앉아 통곡하게 되는 상황 같은 것일까. 아마 그런 것이리라. 벤야민은 자신의 해석까지 소개하고 덧붙이기를, 헤로도토스가 왕의 심경에 대한 어떠한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으므로 이 이야기가 오랫동안 생명력을 갖게 된 것이라 했다. - P31

상처와 고통의 양을 저울 위에 올려놓는 일이 비정한 일인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비정한 일은, 네가 아픈 만큼 나도 아프다고, 그러니 누가 더 아프고 덜 아픈지를 따지지 말자고 말하는 일일 것이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제로 덜 아픈 사람이다. 지배하는 사랑과 미성숙한 사랑의 공통점 중 하나는 저울을 사용할 줄 모르거나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데 있다. - P53

자신의 뒷모습을 볼 수 없는 인간은 타인의 뒷모습에서 인생의 얼굴을 보려 허둥대는 것이다. - P55

허무에 계신 우리의 허무님, 당신의 이름으로 허무해지시고, 당신의 왕국이 허무하소서. 하늘에서 허무하셨던 것과 같이 땅에서도 허무하소서. 우리에게 일용할 허무를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허무한 것을 허무하게 한 것과 같이 우리의 허무를 허무하게 해주소서. 우리를 허무에 들지 말게 하시고, 다만 허무에서 구하소서. 허무로 가득한 허무를 찬미하라, 허무가 그대와 함께하리니.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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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욕심은 팔이 세 개, 발이 네 개, 눈은 열 개쯤이면 좋겠다고 바라는 거다. 욕심은 어디에 쓰나 그런 데다 쓰지. 바라는 데에 기도하는 데에 지우고 다시 적어가는 일기에 써야지, 욕심. H가 눈을 계속 크게 뜨고 있다. 정말 인색한 그런 사람 있잖아 너무 싫어. 너무 싫은 것까지는 모르겠다. 욕심도 자기 마음, 어디에 쓰든 자기 마음이지 했었다. 그 마음이 다른 마음들을 밀치고 외면하고 부수 는 걸 너무 많이 봤다. 그렇게 되지 않는 세상이면 좋았을 것이다. 내 욕심이 내 욕심으로만 끝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므로 욕심은 어디 보이지 않는 곳에 잘 숨겨두자 하고 저 흑연 속에 꽁꽁. 오늘은 조금만 쓸게요, 내 욕심. 연필을 깎으면서 누구에겐가 허락을 구한다. 욕심은 부리는 게 아니라 쓰는 걸지도 모르겠어. - P215

탁 트인 호수 풍경에 달짝지근한 바람이 스치던 순간, 책장이 휘리릭 넘어가고 상관없다는 듯 눈을 감았던 순간, 붙잡고 싶은 중요한 게 하나도 없어서 겁이 나면서도 가벼웠던 순간, 정말 좋은 순간은 현실원칙이 전혀 상관없는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 P217

해가 지고 바람이 조금 더 쌀쌀해지면 그 기운에 기대 ‘너는 왜 내가 생각하는 네 모습이 아닌가‘를 두고 화를 내고 있는 한 사람에게 답장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네가 생각하는 나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고. - P217

구름 사이로 해가 났다. 블라인드를 올리고 창을 조금 열었다. 고통을 이해받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일반화는 거부하는, 무지에도 한숨이 나지만 아는 척에도 짜증이 나는 틈의 시간. 곁에 있는 타인의 짧은 한숨이 거대한 지뢰가 되는 이 복잡하고 기만적인 시간. - P219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은 몸을 이해하고 있다. 통증 외에는 고요하다. 슬픔을 보이지 않는 일이 슬픔을 보지 않는 일과 만나 혼자가 된다. 자기 고통조차 혼자 두는, 고통의 진짜 이름을 모르는 우리의 안녕은 이제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안녕하세요. 답하지 못한다. - P220

버지니아 울프가 썼다. 여성이 글을 막 쓰려는 순간 가장 먼저 깨닫게 되는 사실은 여성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된 어떤 공동의 문장도 없다는 것이라고. 아픈 여성의 몸에 대해서도 그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얼마 후 에이드리언 리치가 "이것은 압제자의 언어다. 그러나 당신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필요하다"라고 했을 것이다. 나도 이것이 필요하다. 관습, 관성, 관종의 규범을 거부하는 다른 언어를 제안하기 위해. 병과 몸을 이분법으로 나눠 대결시킬 수 없으니 ‘투병‘은 맞지 않았다. 앓아 누운 이미지의 ‘와병‘ 역시 아침저녁으로 달라지는 일상의 상태를 설명하기에는 적절치 못했다. 투병도 와병도 아픈 몸의 시간을 같이 살지 못하는 표현이었다. 지난 몇 개월 고통을 언어화하는 시도 가운데 적절한 언어를 찾을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소외감만 커졌다. - P224

혼자 살지만 고립되지 않기가 몇 년째 비혼 친구들의 화두이다. 너무 고립되어 자아상이 틀어졌거나 더는 연결하기 힘든 세계로 간 이들과의 절연 경험이 고민으로 이어져온 셈이다. 우리는 다를 수 있을까? 혼자 살면 어떤 면에서 보수성이 강화되는 지점이 있다는 얘기를 나누다가 그런 걱정 묻은 자문을 한다. 글쎄. 거의 낙관하지 않는 것도 이십 년 비혼 삶들의 특징 중 하나일까. 우리는 조금씩 우리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실은 그걸 아는 사람들과만 친구로 지내고 있다. - P241

비혼이라도 삶의 양상이 다 다르다. 친구들도 그렇다. 십 년, 이십 년 살다보면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기도 하고. 차이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인 계급은 드러내 말하진 않지만 언제나 우리가 ‘너와 나는 다르지‘ 하고 등을 돌릴 수 있는 이유로 관계 틈에 도사리고 있다. 비혼 여자 둘이 ‘아파트‘에 사는 것과 비혼 여자 혼자 ‘반지하‘에 사는 일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하면 한쪽이 많이 지워진다. 이상하게 그런 부분은 잘 얘기되지 않는다. 자기 소유의 집에서 주식 동향을 살피며 살 수 있길 바라며 그 욕망에 혹시 흠이라도 생길까봐 어떤 존재들의 입을 막는 식이다. - P242

인생의 반을 혼자 살면서 거의 변하지 않은 것이라면 좋은 동행들과 서로 오고갈 길을 만드는 일의 중요성이다. 덕분에 무섭다가 무섭지 않고 막막하다가 또 늘 그렇지도 않다. 하지만 제도적으로는 잠시라도 대리/대타가 불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아파도 운신할 수 있을 만큼 아파야 한다는 현실의 제약은 여전히 누군가에게 혼자 살아, 라고 권하기 망설여지는 이유가 된다. 비혼은 결혼하지 않음의 상태 외에도 어떤 세계로부터 배제되어 친구 없이, 가족 없이 혼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선택이다. 내 선택이 나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삶. 위협과 함께 오는 고통을 지금껏 겪고 살아남았다는 게 또 힘이 될 거라고, 아파서 결근했다는 친구의 집 앞에 죽을 걸어두며 편지도 함께 남겼다.
아플 때, 힘들 때 여자들은 곧잘 자기 저울 위에 다른 여자들을 올린다. 혹독하고 사나운 마음이 된다. - P242

기괴한 방식으로 우리는 누군가의 거울이 된다. 거울을 조심하자. 아이에게 ‘다른 사람‘은 사실 좋은 뜻이라고 말해준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어서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거라고. 세상 모든 시계가 멈출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조심하자. 아이와 새끼손가락을 건다. 마음에 새긴다는 의미의 또다른 조심彫心이 있다는 건 다음에 말해줘야지. - P246

해러웨이가 말한 실뜨기는 수동과 능동이 교차하고 연결과 멈춤이 이어지고 주체와 객체의 자리가 유동하는,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할 텐데 그 줄을 잘라야 한다는 거니까. 부쩍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던 참이었으니까. 남 탓 없이 무책임한 내 탓이오도 없이 조용히 실을 끊는 게 가능할지에 대해서. 잊으면 그만이라던 사람도 자기는 냉정하다고 말하던 사람도 단박에 실을 끊기는 쉽지 않아 보였지만 어쩌면 이제 나는 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 P247

내가 자책을 했던가? 기억은 없지만 그랬을 것 같다. 남은 사람이 하는 많은 일들 중 하나로, 애도의 과정으로 그러고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를 떠올리는 일과 자책하기를 동시에 했다. 그로부터 나는 또 얼마나 멀어졌나. 가끔은 아득하고 가끔은 아뜩해진다. 이제 자책은 그만두었지? 그가 추신으로 쓴 질문이 새끼손가락에 걸려서 대롱거렸다.

그때처럼은 하지 않지 물론. 하지만 알잖아. 자책은 모습을 바꾸는 괴물이야. 자학이 되었다가 자조가 되었다가 요즘은 자애 쪽으로 방향을 트는 중이야. 아주 훌륭한 변태metamorphosis지.

제 몸을 스스로 아낌의 그 자애. 방향을 틀고 있다는 건 거짓말이다. 바람을 담은 거짓말이니까 이 일기가 예언의 글이 되어서 내일의 자애를 불러오면 좋겠다. - P255

우리의 종족들에 대해 나눈 이야기들, 우리 괴물들과 우리 화석들, 뼈들과 떨어져나간 살점들이 묻힌 사막은 이제 누구도 돌보지 않는 폐허가 될 것이다. 필멸과 불멸 속 고통의 물질인 우리가 이제 사랑 없이 고통 속으로 돌아간다. 마음이 소용의 전부였던 시간이 마음도 소용없는 시간으로. 그렇게 이별이다. 그러므로 하나만 바라자. 무언가를 시도해보기도 전에 평가와 질타의 매서움부터 감당해야 했던 우리의 여성성이 각자 혼자가 되더라도 더는 연약해지지 않기를. 우리는 서로에게 환대의 역사이기도 하다. - P256

변화는 오로지 과거형으로만 인식할 수 있다. 그러니까 ‘변했다‘로만. 변한다거나 변하고 있다거나 하는 건 기원이자 주술이지 사실 우리는 전혀 모르는 것 같다고. 겨우 방향만 감지할 뿐인 것 같다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표식으로서의 돌탑이든 냄새든 기운이든 겨우 그런 것들에 의지해 맞게 가고 있나보다 안심할 수 있을 뿐이지 않나, 하고. - P273

고래의 육체만큼 거대한 기억을 가진 인간이라면 고래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고통도 잘 설명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누군가에게 주는 고통 역시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 점이 늘 두렵다. 이해할 수 없는 그 고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고통. - P276

인간은 사물들을 우회로 삼아 세계와 자신을 잇기도 한다. 장난감가게나 선물가게 앞에서 아이의 눈빛이 달라지는 건 일찌감치 자신을 세계와 연결할 매개로서의 사물을 알아봐서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곳의 사물들은 너무나 자극적이니까. 갖고 싶지 않아요, 라고 거짓말 하면서 목소리가 떨리고 마는 그런 것들. - P277

누군가를 웃게 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의 불안을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 P282

비록, 내 전생이 고되고, 현생이 슬프더라도 다음 세상에는 이곳에 내리지 않도록 하옵시고 내가 두른 이 헛껍질처럼 하얗게 투명한 빛이 되어 살게 하소서. - P289

웃음으로 끝나는 기억은 안심할 수 있다. - P291

신기하다. 최초로부터 이만큼, 한참 왔는데도 그 상처의 자리로 어떤 이질감 없이 이동한다는 것이. 그 자리와 비슷한 상황, 사람들의 친숙한 악의, 돌연한 두근거림이 갖춰지는 순간 주먹을 쥐는 것만도 힘에 부치는 그 시절의 아이가 된다. 번번이 그렇다. 이대로 끝나도 괜찮아. 잠이 들 때에야 솔직할 수 있었던 자리로. 이해하시겠죠? 하지만 동쪽이는 그 자리를 허물고 싶지 않다. 나의 불완전한 낙원은 그 자리를 뼈대로 지어졌다. 좀 거추장스럽고 불편하지만 그게 내 이야기이다. 이야기 안에 자신을 기입하려는 자가 무너뜨려야 하는 건 과거가 아니라 과거를 교정하려는 지금, 주변의 억압이다. - P294

최선은 잘 모르겠지만 진심에 관해서라면 조금 안다. 밤 열시, 장례식장 앞에서 친구 문상을 하고 나온 노인들의 떨리는 손. 진심은 그런 손을 잡는다. 초저녁잠 많은 노인들이 졸음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보다 말다 하며 서 있었다. 그들 곁에 서서 어떻게 인사를 하고 집에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내 손도 떨렸다. 우리는 모두 모임의 리더 격인 노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화장실에서 나온 노인이 한 손에 손수건을 꼭 쥐고 해산 명령을 내리듯 말했다.
"그만 가요. 가서, 우리는 살던 거 마저 삽시다." - P297

하루에도 몇 번씩, 몇 달 동안 외우고 읊었을 "이 물건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으로 시작되는 지하철 잡상인의 멘트는 그날도 이어졌는데 엄청난 대본량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망설임이나 실수 없이 제품 설명을 이어가던 그가 갑자기 툭, 물건을 든 팔을 떨구고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닫았다. 그를 따라 시간이, 지하철이 갑자기 멈춘 것 같았다. 불과 몇 초 동안 나는 몇 분의 정적에 휩싸인 것처럼 초조해졌다. 말하자면 생방송 사고였다. 생존 사고이기도 했다. 실려가고 실려오던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아, 못하겠다......"
나지막한 한마디. 그와 가까이 앉아 있던 사람들에게만 들렸을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물건을 정리해 애초에 그럴 계획이었던 것처럼 다음 역에서 내렸다. 장사를 포기한 잡상인으로서가 아니라 훼손당하지 않으려고 결심한 자의 뒷모습으로, 나는 그가 내린 역으로부터 세 개 역을 더 가야 했고, 역들을 지나는 내내 얼떨떨하다가 약속이 있던 역에 내린 다음에야 울음이 터졌다. 그 갑작스러운 파열을 지금도 설명할 수 없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똑같이 울고 싶어진다.
‘아, 못하겠다······‘ 다음을 채우는 것들. 멈춤이고 하차이고 쉼이고 영영 그러지 못해서 치닫는 슬픔이다. 궤도 밖에도 삶이 있으므로 우리는 계속 고통받겠지만 "아, 못하겠다······" 하고 일단은 밖으로 탈주하는 상상. 트랙에서 병실에서 이 행성과 몸에서. -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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