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욕심은 팔이 세 개, 발이 네 개, 눈은 열 개쯤이면 좋겠다고 바라는 거다. 욕심은 어디에 쓰나 그런 데다 쓰지. 바라는 데에 기도하는 데에 지우고 다시 적어가는 일기에 써야지, 욕심. H가 눈을 계속 크게 뜨고 있다. 정말 인색한 그런 사람 있잖아 너무 싫어. 너무 싫은 것까지는 모르겠다. 욕심도 자기 마음, 어디에 쓰든 자기 마음이지 했었다. 그 마음이 다른 마음들을 밀치고 외면하고 부수 는 걸 너무 많이 봤다. 그렇게 되지 않는 세상이면 좋았을 것이다. 내 욕심이 내 욕심으로만 끝나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므로 욕심은 어디 보이지 않는 곳에 잘 숨겨두자 하고 저 흑연 속에 꽁꽁. 오늘은 조금만 쓸게요, 내 욕심. 연필을 깎으면서 누구에겐가 허락을 구한다. 욕심은 부리는 게 아니라 쓰는 걸지도 모르겠어. - P215
탁 트인 호수 풍경에 달짝지근한 바람이 스치던 순간, 책장이 휘리릭 넘어가고 상관없다는 듯 눈을 감았던 순간, 붙잡고 싶은 중요한 게 하나도 없어서 겁이 나면서도 가벼웠던 순간, 정말 좋은 순간은 현실원칙이 전혀 상관없는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 P217
해가 지고 바람이 조금 더 쌀쌀해지면 그 기운에 기대 ‘너는 왜 내가 생각하는 네 모습이 아닌가‘를 두고 화를 내고 있는 한 사람에게 답장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네가 생각하는 나여야 할 이유가 있을까 하고. - P217
구름 사이로 해가 났다. 블라인드를 올리고 창을 조금 열었다. 고통을 이해받길 바라면서도 동시에 일반화는 거부하는, 무지에도 한숨이 나지만 아는 척에도 짜증이 나는 틈의 시간. 곁에 있는 타인의 짧은 한숨이 거대한 지뢰가 되는 이 복잡하고 기만적인 시간. - P219
아픈 몸이 아프지 않은 몸을 이해하고 있다. 통증 외에는 고요하다. 슬픔을 보이지 않는 일이 슬픔을 보지 않는 일과 만나 혼자가 된다. 자기 고통조차 혼자 두는, 고통의 진짜 이름을 모르는 우리의 안녕은 이제 누구에게 물어야 할까. 안녕하세요. 답하지 못한다. - P220
버지니아 울프가 썼다. 여성이 글을 막 쓰려는 순간 가장 먼저 깨닫게 되는 사실은 여성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마련된 어떤 공동의 문장도 없다는 것이라고. 아픈 여성의 몸에 대해서도 그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얼마 후 에이드리언 리치가 "이것은 압제자의 언어다. 그러나 당신과 대화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필요하다"라고 했을 것이다. 나도 이것이 필요하다. 관습, 관성, 관종의 규범을 거부하는 다른 언어를 제안하기 위해. 병과 몸을 이분법으로 나눠 대결시킬 수 없으니 ‘투병‘은 맞지 않았다. 앓아 누운 이미지의 ‘와병‘ 역시 아침저녁으로 달라지는 일상의 상태를 설명하기에는 적절치 못했다. 투병도 와병도 아픈 몸의 시간을 같이 살지 못하는 표현이었다. 지난 몇 개월 고통을 언어화하는 시도 가운데 적절한 언어를 찾을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소외감만 커졌다. - P224
혼자 살지만 고립되지 않기가 몇 년째 비혼 친구들의 화두이다. 너무 고립되어 자아상이 틀어졌거나 더는 연결하기 힘든 세계로 간 이들과의 절연 경험이 고민으로 이어져온 셈이다. 우리는 다를 수 있을까? 혼자 살면 어떤 면에서 보수성이 강화되는 지점이 있다는 얘기를 나누다가 그런 걱정 묻은 자문을 한다. 글쎄. 거의 낙관하지 않는 것도 이십 년 비혼 삶들의 특징 중 하나일까. 우리는 조금씩 우리가 이상해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실은 그걸 아는 사람들과만 친구로 지내고 있다. - P241
비혼이라도 삶의 양상이 다 다르다. 친구들도 그렇다. 십 년, 이십 년 살다보면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기도 하고. 차이를 만드는 중요한 요소인 계급은 드러내 말하진 않지만 언제나 우리가 ‘너와 나는 다르지‘ 하고 등을 돌릴 수 있는 이유로 관계 틈에 도사리고 있다. 비혼 여자 둘이 ‘아파트‘에 사는 것과 비혼 여자 혼자 ‘반지하‘에 사는 일의 공통점을 찾으려고 하면 한쪽이 많이 지워진다. 이상하게 그런 부분은 잘 얘기되지 않는다. 자기 소유의 집에서 주식 동향을 살피며 살 수 있길 바라며 그 욕망에 혹시 흠이라도 생길까봐 어떤 존재들의 입을 막는 식이다. - P242
인생의 반을 혼자 살면서 거의 변하지 않은 것이라면 좋은 동행들과 서로 오고갈 길을 만드는 일의 중요성이다. 덕분에 무섭다가 무섭지 않고 막막하다가 또 늘 그렇지도 않다. 하지만 제도적으로는 잠시라도 대리/대타가 불가능하다는 것, 그래서 아파도 운신할 수 있을 만큼 아파야 한다는 현실의 제약은 여전히 누군가에게 혼자 살아, 라고 권하기 망설여지는 이유가 된다. 비혼은 결혼하지 않음의 상태 외에도 어떤 세계로부터 배제되어 친구 없이, 가족 없이 혼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선택이다. 내 선택이 나에게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삶. 위협과 함께 오는 고통을 지금껏 겪고 살아남았다는 게 또 힘이 될 거라고, 아파서 결근했다는 친구의 집 앞에 죽을 걸어두며 편지도 함께 남겼다. 아플 때, 힘들 때 여자들은 곧잘 자기 저울 위에 다른 여자들을 올린다. 혹독하고 사나운 마음이 된다. - P242
기괴한 방식으로 우리는 누군가의 거울이 된다. 거울을 조심하자. 아이에게 ‘다른 사람‘은 사실 좋은 뜻이라고 말해준다. 우리가 다른 사람이어서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거라고. 세상 모든 시계가 멈출 때까지 우리는 서로를 조심하자. 아이와 새끼손가락을 건다. 마음에 새긴다는 의미의 또다른 조심彫心이 있다는 건 다음에 말해줘야지. - P246
해러웨이가 말한 실뜨기는 수동과 능동이 교차하고 연결과 멈춤이 이어지고 주체와 객체의 자리가 유동하는,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은유이기도 할 텐데 그 줄을 잘라야 한다는 거니까. 부쩍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던 참이었으니까. 남 탓 없이 무책임한 내 탓이오도 없이 조용히 실을 끊는 게 가능할지에 대해서. 잊으면 그만이라던 사람도 자기는 냉정하다고 말하던 사람도 단박에 실을 끊기는 쉽지 않아 보였지만 어쩌면 이제 나는 할 수도 있겠다 싶어서. - P247
내가 자책을 했던가? 기억은 없지만 그랬을 것 같다. 남은 사람이 하는 많은 일들 중 하나로, 애도의 과정으로 그러고 말았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그를 떠올리는 일과 자책하기를 동시에 했다. 그로부터 나는 또 얼마나 멀어졌나. 가끔은 아득하고 가끔은 아뜩해진다. 이제 자책은 그만두었지? 그가 추신으로 쓴 질문이 새끼손가락에 걸려서 대롱거렸다.
그때처럼은 하지 않지 물론. 하지만 알잖아. 자책은 모습을 바꾸는 괴물이야. 자학이 되었다가 자조가 되었다가 요즘은 자애 쪽으로 방향을 트는 중이야. 아주 훌륭한 변태metamorphosis지.
제 몸을 스스로 아낌의 그 자애. 방향을 틀고 있다는 건 거짓말이다. 바람을 담은 거짓말이니까 이 일기가 예언의 글이 되어서 내일의 자애를 불러오면 좋겠다. - P255
우리의 종족들에 대해 나눈 이야기들, 우리 괴물들과 우리 화석들, 뼈들과 떨어져나간 살점들이 묻힌 사막은 이제 누구도 돌보지 않는 폐허가 될 것이다. 필멸과 불멸 속 고통의 물질인 우리가 이제 사랑 없이 고통 속으로 돌아간다. 마음이 소용의 전부였던 시간이 마음도 소용없는 시간으로. 그렇게 이별이다. 그러므로 하나만 바라자. 무언가를 시도해보기도 전에 평가와 질타의 매서움부터 감당해야 했던 우리의 여성성이 각자 혼자가 되더라도 더는 연약해지지 않기를. 우리는 서로에게 환대의 역사이기도 하다. - P256
변화는 오로지 과거형으로만 인식할 수 있다. 그러니까 ‘변했다‘로만. 변한다거나 변하고 있다거나 하는 건 기원이자 주술이지 사실 우리는 전혀 모르는 것 같다고. 겨우 방향만 감지할 뿐인 것 같다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표식으로서의 돌탑이든 냄새든 기운이든 겨우 그런 것들에 의지해 맞게 가고 있나보다 안심할 수 있을 뿐이지 않나, 하고. - P273
고래의 육체만큼 거대한 기억을 가진 인간이라면 고래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의 고통도 잘 설명하지 못하지만 우리가 누군가에게 주는 고통 역시 정확히 알지 못한다. 그 점이 늘 두렵다. 이해할 수 없는 그 고통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고통. - P276
인간은 사물들을 우회로 삼아 세계와 자신을 잇기도 한다. 장난감가게나 선물가게 앞에서 아이의 눈빛이 달라지는 건 일찌감치 자신을 세계와 연결할 매개로서의 사물을 알아봐서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곳의 사물들은 너무나 자극적이니까. 갖고 싶지 않아요, 라고 거짓말 하면서 목소리가 떨리고 마는 그런 것들. - P277
누군가를 웃게 할 수 있다는 건 그 사람의 불안을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 P282
비록, 내 전생이 고되고, 현생이 슬프더라도 다음 세상에는 이곳에 내리지 않도록 하옵시고 내가 두른 이 헛껍질처럼 하얗게 투명한 빛이 되어 살게 하소서. - P289
웃음으로 끝나는 기억은 안심할 수 있다. - P291
신기하다. 최초로부터 이만큼, 한참 왔는데도 그 상처의 자리로 어떤 이질감 없이 이동한다는 것이. 그 자리와 비슷한 상황, 사람들의 친숙한 악의, 돌연한 두근거림이 갖춰지는 순간 주먹을 쥐는 것만도 힘에 부치는 그 시절의 아이가 된다. 번번이 그렇다. 이대로 끝나도 괜찮아. 잠이 들 때에야 솔직할 수 있었던 자리로. 이해하시겠죠? 하지만 동쪽이는 그 자리를 허물고 싶지 않다. 나의 불완전한 낙원은 그 자리를 뼈대로 지어졌다. 좀 거추장스럽고 불편하지만 그게 내 이야기이다. 이야기 안에 자신을 기입하려는 자가 무너뜨려야 하는 건 과거가 아니라 과거를 교정하려는 지금, 주변의 억압이다. - P294
최선은 잘 모르겠지만 진심에 관해서라면 조금 안다. 밤 열시, 장례식장 앞에서 친구 문상을 하고 나온 노인들의 떨리는 손. 진심은 그런 손을 잡는다. 초저녁잠 많은 노인들이 졸음 가득한 눈으로 서로를 보다 말다 하며 서 있었다. 그들 곁에 서서 어떻게 인사를 하고 집에 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던 내 손도 떨렸다. 우리는 모두 모임의 리더 격인 노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화장실에서 나온 노인이 한 손에 손수건을 꼭 쥐고 해산 명령을 내리듯 말했다. "그만 가요. 가서, 우리는 살던 거 마저 삽시다." - P297
하루에도 몇 번씩, 몇 달 동안 외우고 읊었을 "이 물건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으로 시작되는 지하철 잡상인의 멘트는 그날도 이어졌는데 엄청난 대본량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의 망설임이나 실수 없이 제품 설명을 이어가던 그가 갑자기 툭, 물건을 든 팔을 떨구고 고개를 숙이고 입을 닫았다. 그를 따라 시간이, 지하철이 갑자기 멈춘 것 같았다. 불과 몇 초 동안 나는 몇 분의 정적에 휩싸인 것처럼 초조해졌다. 말하자면 생방송 사고였다. 생존 사고이기도 했다. 실려가고 실려오던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어 그를 봤다. "아, 못하겠다......" 나지막한 한마디. 그와 가까이 앉아 있던 사람들에게만 들렸을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물건을 정리해 애초에 그럴 계획이었던 것처럼 다음 역에서 내렸다. 장사를 포기한 잡상인으로서가 아니라 훼손당하지 않으려고 결심한 자의 뒷모습으로, 나는 그가 내린 역으로부터 세 개 역을 더 가야 했고, 역들을 지나는 내내 얼떨떨하다가 약속이 있던 역에 내린 다음에야 울음이 터졌다. 그 갑작스러운 파열을 지금도 설명할 수 없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똑같이 울고 싶어진다. ‘아, 못하겠다······‘ 다음을 채우는 것들. 멈춤이고 하차이고 쉼이고 영영 그러지 못해서 치닫는 슬픔이다. 궤도 밖에도 삶이 있으므로 우리는 계속 고통받겠지만 "아, 못하겠다······" 하고 일단은 밖으로 탈주하는 상상. 트랙에서 병실에서 이 행성과 몸에서. - P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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