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있어? 예수는 서른세 살에 죽었어. - P87

"기억은 욕망의 선택이죠. 욕망이 수호하는 시간만이 남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 왜 잊히지 않냐고 묻지 마세요. 욕망이 하는 일인 겁니다."
그러니까, 그 욕망은 도대체 누구의 것이냐고 묻고 싶었다. 내가 어쩌질 못하는 걸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고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는 개소리를 한 번만 더 하면 이 커피잔으로 프로이트의 코를 닮은 저 남자의 정수리를 내려쳐버려야지.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았다. 유약해 보이지만 나는 아주 강해 보이는 인간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종종 한다. 그들은 생각도 못한 일을. 내가 생존하고자 하는 일을 굳이 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이들이 강자다. 애써 하는 사람이 아니라 꼭 안 해도 되는 사람들이. - P96

몇 살까지 그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어두운 방에 들어가면서 늘 눈을 질끈 감곤 했다. 보통 어둠이 품고 있는 짐승들은 나를 해치지 않았지만 내가 약해져 있을 때는 달랐다. 그들은 내 상태를 쉽게 눈치챘다. 인간을 위장하는 짐승. 어리다는 건 잘 못 숨긴다는 말이고 철이 없다는 건 잘 들킨다는 말 일 거다. - P98

"요즘 궁금한 게 없어. 질문 좀 해봐."
"오늘 휴진이야?"
"그러니까 왔지."
"미리 전화를 하지."
"전화했으면 이런저런 핑계 대면서 못 오게 했을 거잖아."
"문자였으면 그랬겠지만 전화에는 그렇게 잘 대응 못해."
그러고는 한참 대화가 끊겼다. 보통 내가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쪽이지만 H 앞에서는 꽤 잘 견디는 쪽이 되곤 한다. 인간은 완성형이 될 순 없고 언제나 잠정적인 완결형 정도라고 여기는데 H를 볼 때면 어떤 잠정적 완결형은 완성형 너머에 있다는 생각도 든다. 얘는 너무도 지독하게 완결되어 있다. - P101

먹는 일이 어렵다. 잠과 침묵과 무통을 겨우 쟁취하듯. -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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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한다. 정말 힘든 건 그런 거다. 정지 버튼을 누르거나 궤도에서 이탈해버릴 수가 없다. 다만 아주 많이 느려질 뿐이다. 정신이 명료한 시간은 하루에 삼십 분. 하루에 쓸 글을 열흘에 나눠 천천히 쓰고 지운다. 어둠이 길면 반짝이는 것들의 수명을 알 수 있다. 향초가 다 탔다. 정당한 분노도 굵고 명확한 미움도 길게 이어갈 수 없다는 것이 아픈 몸의 유리함일지 모른다. 요즘 죄가 적다. - P64

인간은 정말 불쌍하게 복잡해, 하는 표정일까. 불쌍하게 약한 거야. 내가 턱밑을 긁자 사샤가 꼬리를 세웠다. 사샤는 자기를 구조하고 임보하고 입양한 여러 인간들이 대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를 유기한 인간에 대해서도, 그건 인간들의 문제니까. 나 역시 궁금해할 필요가 없는 거였을지 모른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 건 그의 문제이므로. - P72

그의 이야기는 여동생 손에 있던 돌멩이를 뺏기 위해 여동생 손에 여덟 개의 선명한 이빨 자국을 냈다는 것으로 끝났다.
"아, 피도 많이 났거든. 엄마랑 여동생이 나를 한동안 미친 애 보듯 하더라고.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기류가 또 한번 달라졌다. 그를 보는 내 눈빛도 달라졌다. 이 친숙한, 은은한 광기. 그와 나는 그렇게 친구가 됐다. - P75

당신은 또 놀란다. 아픈 이를 수식하는 그 많은 말에. 수식에 앞선 평가들에. 강하다, 긍정적이다, 성격이 좋아 회복이 빠르다, 생의 의지가 남다르다, 씩씩하다, 씩씩한 척한다······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아프지 않은 그들의 안심을 위한 말임을 알게 되지만 그전까지는 이런 말들이 아픈 몸을 쉽게 억압할 수 있다는 걸 당신은 몰랐다. 필요한 게 있으면 연락하란 말을 끝으로 소원해지는 건 어떤 부정적 영향도 받지 않겠다고 멀찌감치 떨어져 겨우 팔을 흔드는 일이나 다름없다는 것도 몰랐다. - P76

당신은 유난히 놀란다. 아픈 몸에 깃드는 새 지도들과 언어에. 어떤 말은 영영 예전의 의미를 찾지 못할 것이다. 걱정 어린 안부와 가벼운 호기심의 차이도, 기쁜 일과 힘든 일을 가리지 않고 함께하는 이들과 ‘도움이 되는 나‘에 취해 힘든 일에만 반응하는 이들의 차이도 더없이 선명하고 분명하지만 아픈 이의 감정적 반응은 대개 "아파서"로 해석되므로 당신은 다만 조용히 기록한다. 통감 이외의 다른 감각을 놓치지 않도록. - P77

기억은 철새 같은 거라고 그가 말했다. 오고가는 시기가 있다는 말인가 했는데 그는 조금 다른 이유를 댔다.
"다음 해에는 언제나 더 많은 무리와 함께 오죠. 기억의 무리가 매해 다른 대형을 짜요." - P80

영국인이 매사추세츠 해안에 도착해 피쿼트 족과 처음 만났을 때 그들은 그들 자신이 피쿼트 족의 세계에 침입했다는 사실을 오만하게 지우고 물었다. 이 이방인들은 누구지? 리처드 커니는 그 순간 피쿼트 족 역시 같은 질문을 했을 것이라고 짐작한다. 피퀴트 족 입장에서는 당연한 질문이지만 우리는 영국인 시점으로의 이방인을 먼저 인식하고 역사로 전유한다. 권력은 원주민을 이방인으로 만든다. - P82

깨달음은 궁극의 실망이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다는데 궁극의 실망이라니, 그거 매일 똥 싸면서 하는 거 아닌가. - P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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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는 죽고 싶음과 살고 싶지 않음을 구분해야 하는 세계. 미라 A는 자신이 죽은 게 아니라 비활성의 삶으로 전환된 것뿐이라고 말 했다. 부러워서 나도 손과 발에 붕대를 감아보았다. 미라 C가 언짢다는 듯 말했다.
화상이라도 입은 것 같아.
미라는 밀랍의 옛말이기도 하다면서요?
넌 아직 살아 있는 인간이구나. 산 인간들은 밤낮 헛소리 아니면 딴소리지. - P41

그를 떠날 수 있을지 모른다. 어차피 편히 디딜 곳 없는 이 땅도 하지만 미래가 남는다. 나는 어떻게 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살 수 있을까. 미래로 향하는 의문문을 멈출 수 없다. 비활성의 삶을 욕 망하는 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막막함 옆으로 긴 선을 긋는 일이자, 살 수 있을까‘ 하는 절망에 꼬리를 다는 일이다. 미래를 떠나야만 얻을 수 있는 비활성이라면 포기해야 한다. 내가 없는 어딘가로 가는 걸 포기한 것처럼. - P42

늙어버린 약속이 말한다. 종일 유실물처럼 앉아서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상상을 해요. 나는 멀리 가고 싶다고 하는 대신 그렇게 대꾸한다. 자신도 모르는 말을 무책임하게 허공으로 던져서는 안 돼. 약속이 나무란다. 유실물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넌 짐작조차 못할 텐데. 내가 대꾸가 없자 늙은 약속이 말투를 누그러뜨린다. 다독인다.
"그래도 애써봐. 괜찮은 인간은 애써보는 인간이야."
애쓰고 있다. 나도 모르는 걸 내가 쓰면서 나를 따라가는 일, 나를 훼손하지 않으려는 걸음걸음에. 멀리 가고 싶다. 약속이 갓 태어난 마음처럼 발그레한 세계로. - P47

"엄마, 아 쫌!"은 전 세계 딸들의 공통어가 아닐까. 오늘만 해도 벌써 세 번 썼다. 엄마, 밥 많아. 하지 말아요. 하지 마시라니깐. 쌀은 왜 꺼내요. 엄마, 아 쫌! 못 이긴다. 기어코 밥을 해서 냉동실에 쌓으면서 엄마가 그런다. 다음에 와서 검사할 거야, 다 먹었나. 웃음이 터진다. 나를 낳은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만큼만 내가 자라길 바라는 것 같다. 나는 죽을 때까지 엄마한텐 애지? 나 죽을 때까지 아님 너 죽을 때까지? 핵심은 애냐 아니냐 거든요. 나 죽고 너 죽고 나서도 애지. 죽음도 이기는 연이고 밥이니 세긴 세다. "아 쫌!" 해봤자. - P54

타인이 내게 궁금해하지 않은 것들을 나는 내게 궁금해하고 대답하며 산다. 그 문답이 쌓여서 나의 감각과 태도가 될 것이다. 내가 나의 타인이다. 그렇다, 라고 다짐하면 어쩐지 당장 무엇과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 것 같은데 늘 다행스레 혼자다. 혼자일 때만 나는 수월하게 사람인 것 같다. - P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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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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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엄마의 사랑하고 미워하는 들끓는 관계를, 그들이 살아온 과정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글이 우리 주위에 몇이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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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래가 없이 산다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는 나쁜 짓거리에 낭비할 시간이 없다. 나는 엇나간 충동이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스르르 삭아버리는 걸 보았다. 울컥하는 분노가 그보다 한 수 이성적인 이해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도. 쩨쩨한 집착은 알아서 힘을 잃고 모종의 감정적 정의에 승리를 내어준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보았고, 이 모든 것을 보는 일이 즐거웠다. 그러다가 미래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일의 무익함을 알게 되는 날이 오기도 한다. 울타리를 두른 정원 안에서의 삶은 사실 번듯하게 꾸며놓은 감옥 안마당에서의 삶과 다르지 않다. - P267

일어나서 일기를 썼다. "사랑이란 수동적인 감정이 이끄는 기능이며 만족스러운 확신보다는 이상에 의지한다. 사랑이란 우리가 태어났을 때의 원초적인 자세라 할 수 있다. 반면 일이란 적극적이고 표현적인 삶의 기능이며 아무런 결과를 내지 않는다 해도 행동하는 자아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은 여전히 남는다. 상상했던 삶에 대한 접근을 부정당할 때 사람은 더 크고 깊게 사랑을 추구할 수 있다." - P272

새벽 네 시에 일어나 책상에 앉아선 일기와 책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일하는 장소의 질서정연함을 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엄마는 사랑이라는 신전을 숭배했지만 평생 돌려받은 건 권태였어. 사랑이 준 건 죽은 경품이었어. - P273

"진짜 야비하다."
"뭐?" 그가 소리쳤다. "뭐가 야비하기까지 해? 난 그저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뿐이야. 같이 뉴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걸 당신이 미리 알았다면 그럴 수 있었을까? 이게 그렇게까지 잘못한 일이야? 우리 정말 근사한 시간 보냈잖아. 안 그래?"
"나를 속이고 이용한 거지. 미리 말해줬어야 하는 걸 일부러 숨겼잖아. 내가 아는 것보다 우리가 잘 지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혼자 결정해버린 거잖아. 당신한테는 나보다 상황이 더 중요했던 거지."
"그렇지 않아." 그가 말했다. - P277

우선, 성애 자체가 막강한 힘을 갖고 있다. 욕망은 다정함을 보장한다. 다정함은 위험을 저지한다. 위험에서 빠져나오면 자유롭게 나 자신을 포기한, 비밀스러운 삶 속으로 기꺼이 들어갈 수가 있다. 침대에서 꼭 내가 나일 필요는 없다. 나를 잃어버릴 수 있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안전할 수 있다. 잃어버린 나에게서 빠져나오면, 거기엔 조가 있다. 나를 꼭 붙들고 있는 조가 자기만의 활력에서 새로 태어나는 모습을 보노라면 그에게 더없는 신뢰가 간다. - P286

나는 나 자신이 될 필요가 없었다. 조와 함께 있으면서 난생처음으로 자신이 될 필요가 없다는 것의 매혹을 느꼈다. 얼마나 가뿐하고 매력적인 안심인가. 나는 평생 스스로 충분히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충분히 특별하지도, 충분히 재능 있지도 않아서 사랑이든 우정이든 나에게 다가오는 사람의 관심을 붙들어놓을 수가 없다고 생각해왔다. 물론 매력적일 수 있고 인생에 사람을 끌어들일 수도 있다. 분명 그렇게 해오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을 내 곁에 오래 머물게 할 수 있을까? 그건 확신할 수 없었다. 이제는 그 점을 확신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성적인 끌림이 긴장과 불안을 수습했다. 하루 단위로 관심이나 존중을 애써 얻어내야 할 것 같은 의무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었다. 거래는 성사되었다. 나는 이 안에서 마음을 놓을 수 있다. 결혼의 강력한 이점도 알아볼 수 있었다. 반드시 온전한 한 사람과 온전한 한 사람으로 연결될 필요는 없다. 반쪽만으로도 결혼 생활을 충분히 유지할 수 있다. 좀 열어놓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난다고 해서 결혼이 반드시 위험에 빠지는 것도 아니다. - P287

그날 저녁 내내 슬프고 고요하고 무거운 무언가가 줄곧 엄마에게 내려앉아 있는 것만 같았다. 오늘 밤 엄마는 무척 어여쁘게 보인다. 결이 고운 흰머리, 보드라운 피부, 그 자체로 완벽한 작품처럼 보이는 주름지고 지친 노인의 얼굴. 하지만 지난 세월은 엄마를 엄마만의 세계로 끌고 가고 눈에는 다시 그 혼란이 찾아온다. 엄마를 놓아주지 않는 저 끈질긴 삶이라는 혼란.
"인생이 연기처럼 사라지네." 엄마는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저미는 듯해 그 고통을 감히 느낄 수조차 없을 것 같다. "정말 그렇네" 나는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대답한다. "제대로 살지도 않았는데. 세월만 가버려."
엄마의 부드러운 얼굴이 결심이라도 선 듯 확고하고 단단해진다. 나를 보더니 강철 같은 목소리로, 이디시어로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네가 다 써봐라. 처음부터 끝까지, 잃어버린 걸 다 써야 해."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다. 우리는 끈끈하게 얽힌 혈육이 아니다.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 같은 인생을 그저 바라보는 두 여자다. 엄마는 젊어 보이지도 늙어 보이지도 않고 그저 당신이 목도하고 있는 바, 그 혹독한 진실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엄마한테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나도 모른다. - P300

항상 엄마와 함께 걸었지만 요즘은 전처럼 자주 걷지 않는다. 전처럼 싸우지도 않는다. 항상 하던 것들도 더는 하지 못한다. 이제 더 이상의 ‘항상‘은 없다. 정해져 있던 패턴이 서서히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이 어그러짐의 과정 속에 나름의 즐거움도 있고 놀라움도 있다. 이제는 그 놀라움이 우리에게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더 이상 변화에 기댈 수 없는 우리는 오직 놀라움에만 기댄다. 그렇다고 항상 놀라움에 기댈 수도 없다. 그것은 언제나 우리를 긴장하게 하니까. - P301

"그때 왜 일하기로 한 거야? 아니 내 말은 다른 때가 아니라 왜 하필 그 시기에?"
"무슨 소리니, 난 늘 일하고 싶었다. 주머니에 내 돈 들어 있는 기분이 얼마나 끝내주는데! 그때 전쟁 중이었잖아. 이력서만 내면 일곱 군데 회사에서 연락이 왔어. 거부할 수가 없었지."
"그래서 어떻게 했는데?"
"아침에 구인 광고 보고 옷 갈아입고 지하철 타고 시내 나가서 지원했지. 10분 만에 바로 나와서 일하라고 그러더라. 그 회사 이름이 뭐였더라? 까먹었네."
"앤젤리카 유니폼 회사." 나는 바로 대답했다.
"기억하는구나!" 엄마는 반색하면서 나를 향해 웃는다.
"이거 봐라. 우리 딸은 다 기억해. 나는 잊어버려도. 우리 딸 기억력 진짜 좋아."
"나는 엄마의 인생 저장소야, 알잖아" - P304

엄마와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내가 입을 연다. "만약 지금이라면 말이야. 아빠가 일하러 가지 말라고 하면 안 할 거야?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엄마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엄마는 여든이다. 눈은 흐려졌고 머리는 하얗게 셌다. 몸은 마르고 허약하다. 엄마는 차 한 모금 마시고 컵을 내려놓더니 조곤조곤 말한다. "뭐라고 하긴. 지옥으로 꺼지라고 했겠지."
진정 놀라운 순간. - P306

"이제 그만 넣어." 주전자에 커피를 한 스푼씩 넣는데 엄마가 말한다.
"아니야. 더 넣어야 돼." 내가 대답한다.
"내 말 들어. 얘가 왜 이래!"
"엄마가 직접 와서 보셔. 여기 눈금에 이만큼 넣으라고 나와 있지?"
엄마는 본다. 명백한 반증 앞에서 할 말이 없다. 주전자에 아직 커피를 충분히 넣지 않았다. 엄마는 돌아서서 손을 허공에 휘젓는, 아니꼬워 죽겠다는, 내가 익히 아는 그 몸짓을 또 한다.
"그래 맘대로 하든지" 나 하는 짓이 어찌나 마음에 안 드는지 목소리까지 떨린다. 엄마의 오만. 엄마의 경멸. 엄마에게서 결코 떨어지지 않을 기질. 절대적으로 엄마 곁에 머물러 있을 것들. 언어의 상징이요 존재의 숙어로 이것들이야말로 엄마의 자아를 완성한다고 믿는다. 타인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건 불쾌한 일에서 헤어나는 엄마만의 방식, 당신과 타인을 분리하는 방법, 옳고 그름을 아는 법, 당신의 주장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방식이다. 그 순간 엄마의 삶이 이해되면서 묵직한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것만 같다. - P308

엄마 얼굴에서 분노와 자기연민이 가시는 걸 보면 나한테 있던 분노와 자기연민도 증발해버린다. 한참 서로를 꼬챙이로 찔러대다가 엄마가 이렇게 말할 때도 있다. "이게 네 복이다. 너도 더 좋은 엄마 밑에서 태어났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세상천지 하나밖에 없는 엄마가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오랜만에 맞는 말 하셨네. 우리는 동시에 웃기 시작한다. 누가 됐든 우리 둘 다 악의적인 말은 피차 한 문장 이상 내뱉지 않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 같다. 내 생각엔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상대에게 무엇을 원하는지에만 골몰하는 대신 더도 덜도 말고 딱 1분이라도 그저 이 세상에 함께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기울일 수 있게 됐을 정도로 그 긴긴 세월을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우리 두 사람 다 감격하는 듯하다. - P310

이 안정적인 관계는 언제 휘발될지 모른다. 어쩌면 끊임없는 변화, 유동적인 상태야말로 우리가 날마다 맞닥뜨리는 진실이 아닐까 한다. 이 불안정성이야말로 그 자체로 놀라운 일이요 인생의 신비와 약속을 관통하는 진리가 아닐까. 엄마와 나는 더 이상 얼굴을 가까이 맞대고 있지 않는다. 드디어 어느 정도의 거리감이 영구적으로 성취되었다. 나는 우리 둘 사이의 거리를 흡족하게 엿본다. 약간의 공간이 나에게 이따금 찾아오는 일용한 기쁨을 가져다준다. 내가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날 것이라는 믿음. - P311

인생은 어렵다. 영광이 있고 고초가 있다. 생각은 멋들어진 동료요 흥분이다. 한편 외로움은 나를 끝없이 갉아먹으려 한다. 이 노력과 자기연민 사이의 조화가 유지될 때는 나 자신이 그 짝 없는 여자들 The Odd Women중에 한 명이 되었다고 느낀다. 그러니까 나 역시 평등과 여성 인권이 신장돼온 이 200년 넘는 노력의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이 시대의 새로운 정신, 새로운 의지에 기운을 받는 당찬 여자다. 그러다 조화를 잃어버릴 때면 사랑도 연대도 없이, 실패와 박탈감에 산 채로 매장당한 기분에 빠진다. 우정은 불완전하고, 고민은 나를 잠식하며, 일은 내 무능력의 총체적 결과다. - P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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