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낡은 집에 아직 남아 있는 작품 한 점은 피아노 옆에 걸려 있었다. 생논Saint-Non(1727-1791) 신부가 이탈리아 화가인 지오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의 데생을 보고 제작한 작은 애쿼틴트aquatint 판화였다. 이 판화에서는 풀치넬라Pulcinella(이탈리아 희극의 캐릭터로 교활하면서도 어리숙한 익살꾼을 풍자한다)가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Pinacotheque de Brera에 전시되어 있는 만테냐Mantegna의 〈죽은 그리스도〉와 같은 자세로 술에 취해 모자를 옆에 둔 채 잠들어 있었다. 브리오니 왕녀로부터 지금은 사라진 이 컬렉션 이야기를 듣고 나는 한 가지 교훈을 얻었다. 열망해서 얻은 것들은 결국 우리의 손을 떠나버린다는 것을. -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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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신중해져서 아무것도 믿지 못한다. 믿기 위해 계속 의심하는 삶이라니. 그냥 믿음 없이 사는 게 낫겠다, 하고 반은 농담으로 버무린 그 말이 이후 삶의 방식이 되어버리고, 그렇게 한참 살았는데 요즘 자꾸 간절히 믿고 싶은 것들이 생긴다. 믿음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들이 삶을 추동하는 모양이다. 그렇구나. 믿음 없이는 살 수 있어도 믿고 싶은 것 없이 사는 건 힘든 거였어. - P175

웃음으로 가릴 수 있는 게 많다는 걸 아는 사람들이 제일 어쩔 줄 모르겠다 싶은 곳이 병원 응급실과 장례식장이다. 눈물로 가릴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그러니까 웃자. 병원에 다녀왔다. 장례식장에는 가지 않았다. 대신 카페에 가서 한 시간 정도 앉아 있었다. 라테를 가져다주는 서버에게 고맙습니다, 인사할 때는 마스크 안에서도 활짝 웃는 입이었다. - P182

욕을 먹고 사과하고 용서받으며 배워야 하는 것도 있다. 서로가 짐작하는 관계의 불 완전성 여부는 공격해보지 않고는 모른다. - P183

외로움은 일반적인 생의 조건이고 결혼 유무 정도로는 벗어날 수 없다. 양갈래 혹은 그 이상의 갈림길 앞에서 혼자의 외로움이 여럿의 괴로움보다 견디기 쉬워서 한 선택들이 지금 나를 여기에 데려다놓은 것이다. 그동안 내가 익숙해졌다고 해서 그게 외로움이 아닌 건 아니다. 늙어도 외롭지 않다거나 살수록 인생이 더 재미있고 즐겁다는 말의 진짜 의미와 효용에 닿기도 전에 인간은 죽는다. 존재세(존재해서 내는 세금)적인 관점에서 보면 혼자도 외롭고 늙어도 외롭고 살수록 외롭다. 게다가 외로움이 우리가 감당해야 할 최악의 조건은 아니다. H와 L과 내 머리가 같이 움직인다. 끄덕끄덕. ‘혼자라는 상황에 대한 천편일률적 오해가 쌓아놓은 벽들이 더 곤란하다. 그래서 내가 수많은 너를 찾는다. 잡는다. 곁에서 꼬물거린다. 외롭지 않으려고가 아니라 계속 외로워야 해서. 외롭게 돌을 던져야 해서. 외롭지 않으려고 하는 모든 일 끝에 결국 외로움이 답이었다. - P190

무언가를 두려워 한다고 해서 그 두려움을 발생시키는 상황이나 대상에 대비하는 즉각적이고 능동적인 행동을 반드시 취하는 건 아니다. 그보다는 망각이나 외면이 효과가 좋았다. 어떻게 저렇게 얼렁뚱땅 말도 안 되게 살 수 있지, 에서 ‘저렇게‘에 해당되는 삶이었다. 이유를 게 없었다. 이유가 없다는 건 여유가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불편함은 참는 거지 바꿀 수 있는 게 아니었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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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드로 파라모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93
후안 룰포 지음, 정창 옮김 / 민음사 / 2003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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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겁고 건조하고 강렬하고 황량하고 찬란하고 비극적인 문학 작품. 전체적으로 암울한 느낌이면서 어쩜 이리 아름다울 수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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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있소, 헤라르도 씨
페드로 파라모가 돈을 건네며 말했다. - 돈이란 다시 되살아나는 게 아니니, 잘 간수하시오.
- 하긴 죽은 사람도 다시 되살아나지 않더군요.
그는 여전히 불편한 심사를 감추지 못하고 덧붙였다. - 불행하게도 말입니다. - P159

새벽이 시작되고 있었지만, 날은 거꾸로 어둠을 향해 가고 있었다. 대지에는 마치 지축을 붙들어 고정시킨 경첩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흡사 어둠을 들춰내는 오래된 대지의 꿈틀거림 같은 소리였다. - P165

신부는 그 자리에서 당장 물러나고 싶었다. 성유를 뿌리고 ‘자, 이제 모든 게 끝났습니다.‘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마지막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한 여인의 회한이 얼마나 깊은지,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성호를 그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끊임없이 회의가 일고 있었다. 어쩌면 그 여인은 마지막 순간까지 어떤 후회나 고해를 해야 할 아무런 이유조차 없는지도 몰랐다. - P173

"늙으면 잠이 없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깜빡 잠이 들었다가도 헛생각을 하고 있으니, 이런 게 내게 남은 유일한 소일거리란 말인가." 이어 그는 목소리를 높여 중얼거렸다. "머지않았어, 머지않았다고." - P178

순간 그는 혼자서 쓸쓸하게 누워 있을 아내를 생각했다. 시신이 부패하지 않도록 마당의 침상 위에 눕혀놓은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쿠카, 그녀는 불과 하루 전만 해도 암말처럼 생생히 살아 숨쉬던 아내였다. 잠자리에서 코를 비비고 입술로 깨물던 여자였다. 태어나자마자 죽긴 했지만 그의 아들을 낳아준 여자였다. 시력이 좋지 않고 몸에 냉기가 흐르는 체질에 가슴앓이 병을 앓고 있었기에, 아니 의사의 말에 의하면 이름조차 모르는 병을 앓고 있었기에 자식을 낳을 수 없었다. 왕진을 다녀가는 의사에게 진료비를 지불하기 위해 나귀까지 팔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쿠카, 그녀는 찬 이슬을 맞으며 차디찬 침상 위에 누워 있었다. 동이 트는 것도 모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달려오는 햇살도, 상큼한 아침 바람도, 아무것도 보고 느끼지 못한 채. - P184

그는 눈을 감고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휘영청 밝은 달이 떠 있던 날, 나는 당신을 쳐다보느라 눈이 멀 정도였어. 당신의 얼굴에 달빛이 스며드는데, 넋을 잃을 수밖에. 달빛이 보드랍게 스쳐 간 얼굴, 별빛이 만든 무지개 빛깔로 촉촉한 입술, 밤의 물결에 투명하게 드러나던 당신의 육신. 수사나, 수사나 산 후안······." - P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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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느낀다. 내가 있고, 내가 생각하고 있는 곳을······.
나는 레몬이 익어가던 계절을 떠올리고 있다. 2월의 바람에 꺾인 저 산의 고사리 꽃대가 마르기 전, 오래된 정원을 그윽하게 채우던 레몬 향기를.
2월의 아침에 산에서 내려오던 바람을, 나는 기억한다. 구름이 산골짜기 밑으로 데려가 줄 때까지 푸른 하늘에 몰려 있는 동안, 아침 햇살 사이로 불어오던 바람을, 대지 위로 뽀얀 흙먼지를 일으키며 오렌지 나무를 심술궂게 흔들어대던 그 바람을.
그사이 참새들은 떨어지는 나뭇잎을 쪼면서 웃고 있었다. 나는 기억한다. 나비들을 쫓아 나뭇가지 사이를 넘나들던 참새들을.
2월의 아침은 푸른 하늘과 바람과 참새들의 웃음소리와 함께 열리고 있었다. 나는 기억한다. - P117

아무도 오지 않았어. 차라리 그게 나았는지도 몰라. 죽음이란 사물이 하나인 것처럼 결코 나눌 수 없는 것이니까. 슬픔이란 어느 누구도 함께 찾아 나서는 게 아니니까. - P119

빗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지. 나는 네게 말했어.
- 나가봐.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에서 지워버릴 거야. 그러니 돌아가라고 해. 장례 미사 치를 돈 때문에 왔다고? 어머니는 일전 한 푼 남기지 않았다고 전해. 미사를 드리지 않으면 구천을 떠돌 거라고? 후스티나, 우리에게 그런 심판을 내릴 수 있는 자가 누구라는 거지? 내가 미쳤다고? 그래, 나는 미쳤어. - P119

바람이 불고 있었다. 며칠을 두고 내린 비가 그쳤지만 바람은 멈추지 않았다. 들판에는 여린 옥수수 이파리들이 바람을 피해 바싹 몸을 숙인 채 엎드려 있었다. 밤이 되자 덩굴나무와 지붕을 뜯어낼 기세로 달려들던 바람이 격노한 짐승의 울음소리를 내기 시작하면서 하늘에 드리워진 먹장구름을 밀어 내고 있었다. -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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