뽀삿 근방 하늘 밑 어딘가에 먹을 수 있는 진흙이 있다는 걸 어머니는 알고 있어요? 뽀삿강에서 범람한 그 광경이 이상하게도 바로 당신들을 사로잡는 그 범람한 흙을? 채석장의 폭발과 까마귀 떼가 폭발하듯 날아오르는 것을 언젠가 나는 당신에게 얘기할 거야, 왜냐하면 나는 당신을 다시 볼 것이고, 나는 당신을 다시 볼 수 있는 나이고, 그리고 당신과 나, 우리는 아직 살아 있지 않아? 당신 아닌 다른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며, 누가 나의 이야기를 들을까, 그리고 지금 내가 당신보다는 당장 부족한 양식을, 그것을 더 바란다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사람이 누가 있을까? 며칠 동안, 몇 주 동안 시시각각 그녀는 있지도 않은 음식을 생각하고 열망한다. 그녀는 그녀를 내쫓은 무지한 여자에게 말하러, 돌아갈 것이다. 나는 당신을 잊어버렸어. - P22

그녀는 잠을 잔다. 그녀가 깨어났을 때는 한밤중이다. 그녀는 야릇한 일을 본다. 그녀는 아이가 생선을 먹어버렸음을 알아차린다, 아이는 그것마저 빼앗아갔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는다. 이 저녁 굶주림은 극에 달할 것이다. 굶주림은 대체 무슨 일을 벌일 작정인가, 그녀가 결코 원하지 않는 어떤 일을? 따뜻한 밥 한 공기를 먹으러 바탐방으로 돌아가고 싶어, 그런 다음 나는 영원히 그곳을 떠날 거야. 그녀는 더운밥을 원한다. 그녀는 원하고, 이 세 마디를 말한다. 더운 밥. 아무것도 생기지 않는다. 그녀는 한 줌의 흙가루를 그러 모아 입안에 넣는다. 다시 한번 그녀는 깨어난다. 그녀는 입 안에 그것을 집어넣었음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녀는 밤의 어둠을 들여다본다. 그녀는 이해할 수가 없다, 흙가루는 거의 더운밥이었다. - P24

그녀는 떠난다. 그 일을 해낼 장소, 한 구멍을, 아이가 나올 때 아이를 받아낼, 아이를 완전히 떼어낼 누군가를 찾아 떠난다. 그녀를 쫓아낸, 피곤에 지친 어머니를 찾는다. 어떤 핑계로도 되돌아와서는 안 돼. 이 여인, 그녀는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지 않았다. 이 아침, 수만 리 뻗은 산맥도, 우매한 당신을, 순진한 척 당신을 찾아가는 걸 막지 못하리라는 것을. 너무 놀라 당신은 나를 죽이는 일도 잊겠지. 더러운 여인, 모든 것의 원인인 당신, 나는 당신에게 이 아이를 돌려줄 거야. 그리고 당신은 아이를 받겠지. 나는 당신을 향해 아이를 던지고, 영원히 도망칠 거야. 이 새벽빛과 함께 어떤 일들은 마무리될 것이고 다른 일들이 다시 시작되리라. 그러므로 이 탄생을 주관할 이는 그녀의 어머니, 바로 그녀다. 그리고 이 탄생으로부터 그녀, 나이 어린 소녀는 다시 한번 태어나리라. 새 혹은 꽃 만발한 복숭아나무로? - P27

소나기가 닥친다. 아주 잠시 내린다. 대사는 창문에 드리워진 발을 걷으러 간다. 갑작스레 소나기가 그치고 몇 분 동안 햇빛이 반짝 빛난다. 그리고 두꺼운 구름층 속 구멍이 다시 막힌다. 고요한 질풍 속에 정원의 그늘이 뽑혀 나간다. - P47

인도인 하인이 샤를 로세트를 깨운다. 반쯤 열린 문으로 약빠르고도 조심스럽게 머리가 나타난다. 주인께서는 일어나셔야 합니다. 눈을 뜬다, 잊어버렸다, 매 오후 그렇듯이 캘커타를 잊어버렸다. 방은 어둑하다. 주인께 차를 가져 올까요? 우리는 장밋빛의 여인, 장밋빛의 책 읽는 여인, 멀리 있는 파드칼레의 칼날 같은 바람 속에서 프루스트를 읽는 장밋빛 여인을 꿈꾸었다. 주인은 차를 원하시나요? 주인은 편찮으신가요? 우리는 이 장밋빛의 여인, 미, 책을 읽는 장밋빛의 여인 곁에서 일종의 권태를 경험했으며, 이 지역의 어슴푸레한 빛 속에서 다른 것, 매일 아침, 여름 계절풍 동안 비어 있는 테니스장을, 조용한 발걸음으로 가로지르는 흰색 반바지 차림의 여인을 꿈꾸었다. - P51

바탐방의 노래, 때때로 나는 커다란 물소 등 위에서 잠을 잤다. 어머니가 준 가득한 더운밥. 어머니, 역정에 찬 바짝 마른 어머니가 별안간 그녀의 추억에 벼락을 친다. - P70

헤어진 아이는 끊임없이 반복해 눈을 떴다가 다시 잠들고, 다시 눈을 반쯤 떴다가 잠이 든다, 더 이상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다른 여인들의 몫이다. 나 외에 덤으로 너, 불필요한 짝이야, 우리가 헤어지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는데, 조금만 뛰어도 동그란 머리가 등에 걸린 자루에서 빠져나와 매달려 흔들렸고 천천히 걸어야 했다. 이제는 뛰리라. 너무 큰 돌은 피해야 했고 땅을 쳐다보아야 했는데, 이제는 피하지 않으리라 하늘을 쳐다보리라. 의사는 아이에게 다가가 주사를 놓는다. 이 아이는 조그맣게 아픈 소리를 낸다. 소녀는 보건소에서 치료해주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아이의 찡그린 표정이 그녀를 똑같이 찡그리게 했다. 걷는 동안 그녀의 어깨에 자국을 냈던 무게. 아이가 살았건 죽었건 결코 그 이상을 넘지 않을 정확한 그 무게가 그녀를 잡아당긴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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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만들어낸 홍화오성관리제는 천재적인 발견이자 발명으로, 모두를 자발적이고 자치적인 궤도 안으로 밀어 넣었다. 소나 말에게 채찍을 쓰지 않고도 알아서 밭을 갈고 수레를 끌고 뛰어다니게 만든 것과 같았다.
다음 해에 1만 5000근을 생산하기 위해 부지런히 물을 주고 김을 매고 두둑을 손보았다. 다른 일은 하지 않고 해가 뜨면 나가서 일하고 해가 지면 멈추었다. 밤이면 돌아와 볼 수 있는 책을 읽고 침대와 탁자 맡의 꽃들을 세었다. 벌써 수십 송이를 모아 몇 줄이 빽빽해진 사람의 침대맡은 불이 붙은 것 같았다. 다섯 송이씩 줄을 맞춰 나란히 늘어선, 행진하는 붉은 군대 같은 꽃들을 그는 매일 한 번씩, 혹은 몇 번씩 군사를 검열하듯 살폈다. - P85

"이 책은." 아이가 말했다. "삽화 두 장당 꽃 한 송이씩 주겠다."
종교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일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아이에게서 종교는 열다섯 송이의 꽃을 한 번에 받았다. 열 다섯 송이를 침대맡에 붙이자 길게 늘어선 줄이 꺼지지 않는 등불 같았다. - P89

연극이 그렇게 끝났다.
무대 아래로, 마치 무대 아래에 애당초 아무도 없었던 것 같은 정적이 흘렀다. 연극을 본 뒤 돌아가는 30리 흙길에서 99구의 누구도 입을 떼지 않았다. 멀리 숙사에서 피어오르는 저녁밥 짓는 연기가 석양 속으로 퍼져가는 소리마저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발자국 소리도. 터덕터덕, 타박타박, 대지로 떨어지는 소리가 차가운 대지를 손으로 두드리는 것 같았다. 대지는 망망하니 넓었다. 망망하니 넓고 까마득히 멀어 모든 소리가 대지의 뱃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P94

두 기의 용광로 틈 사이로 내다보자 석양이 붉은 물처럼 지면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원래 하얗던 소금땅이 오가는 사람들에게 밟히면서, 여름날 물이 고였다가 가을과 겨울이면 말라버리는 웅덩이에서 검은 흙이 밟혀 올라와 석양 속에서 짙은 회갈색을 띠었다. 거기에 여섯 기의 용광로에서 반사되는 노란 불빛까지 더해지자 그곳의 땅과 사람들 얼굴에는 담황색과 자주색, 갈색이 한데 뒤섞였다. 그런데 음악의 얼굴만은 다른 남자나 여자와 달랐다. 그녀는 전혀 더러워 보이지 않는, 허리께까지 내려오는 빨간 외투를 입고 회색 털목도리를 둘렀다. 처음 99구에 왔을 때 검게 빛나던 그녀의 머리칼은 도시의 유행에 따라 귀에서 찰랑거렸지만 지금은 어느새 하나로 땋아 등에 늘어뜨릴 만큼이 되었다. 그녀는 정말로 학자의 뒤에 서 있었다. 카드를 치는 학자는 졌는지 얼굴에 종이를 붙이고 있었다. 학자 뒤에 있는 그녀의 얼굴이 붉은 기운에 눌리지 않는 하얀 보드라움과 윤기로 가득했다. 황허 강가로 불어오는 바람과 태양빛도 그녀에게는 너그러웠나 싶었다. - P110

그날은 실험이 용광로 옆을 지키는 차례였다. 매일 밤 간통범을 쫓아다니고 매일 밤 허탕을 쳤지만 그는 조금도 피곤해하지 않았다. 눈에 붉은 거미줄이나 그물처럼, 춘삼월 대지의 비옥한 땅에 만개한 빨갛고 노랗고 파란 꽃들같이 핏발이 서렸지만 정신은 극도로 또렷했다. 그의 눈은 넉넉하면서도 알찼다. 나란히 대칭을 이루는 두 개의 공원처럼 다양한 색깔을 품었고 그 속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과 발걸음이 쉼 없이 오갔다. 사람들 무리에서, 그는 항상 다른 사람들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 P119

식사할 때든 일할 때든 음악은 대부분 나와 함께 있으면서 자신이 음악을 배우고 피아노를 치던 청소년기에 대해 들려주었다. 그녀가 성 전체에서 가장 젊은 음악 교사이자 피아니스트로 자리매김한 것은 무대에서 서양 악기인 피아노로 민요를 연주하면서부터였다. 그녀가 무대 위 피아노 앞에 단정히 앉아 <커다란 꽃가마>, <탐스러운 재스민>, <파란 해방의 날>을 연주할 때마다 무대 아래의 눈동자들이 반 짝반짝 빛을 내며 신기하다는 듯 그녀를 쳐다보았다. 무대 위에서 내려다보면 그 눈동자들은 그녀에게로 날아오는 검은 깃털의 새 같았다. 특히 <공화국 혁명 행진곡>을 연주할 때 그녀의 열 손가락이 여름날 산야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경쾌하게 피아노 건반 위를 오가고 피아노가 그녀의 열 손가락 아래서 총소리, 대포 소리, 군인들의 호령 소리, 군마 소리, 교전과 승리, 축하의 장면을 진짜처럼 모방해내면 무대 아래에서 우레 같은 박수 소리가 끝없이 이어졌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꿈을 꾸는 것 같았다. - P119

학자와 음악이 잡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실험이 용광로에서 숨을 헐떡이며 뛰어왔지만 땅 위를 굴러가는 점 하나가 끝을 알 수 없는 흙길로 사라지듯, 학자와 음악과 상부를 태운 마차가 광야로 사라지는 모습만 볼 수 있었다. 하늘에 흩어지지 않을 것 같은 구름이 끼어 구름 뒤 오후의 햇살이 연소될 수 없는 불처럼 흐릿해졌다. 자욱하고 검누른 구름 속으로 한 점 두 점, 그 칠흑을 비집고 점점이 뿌려지는 빛만 보일 뿐이었다. 사람들은 이미 입구에서 흩어지고 있었다. 모두들 놀라고 편안한 표정이었다. 학자와 음악이 자신들 턱밑에서 사통과 쾌락을 즐길 수 있었다는 것에 놀랐고, 제 99구에서 결국 이런 일이 발생했으니 이제는 철을 찾고 나무하고 제련하는 매일의 단조로움에서 해방되었다는 것에 편안해했다. 오랫동안 떠들고 기억할 신선한 사건이 마침내 생겼다는 것은, 시작은 되었으나 아직 끝나지 않은 공연을 기억하는 것과 같았다. 뛰어서 돌아온 실험이 입구에 마차가 만든 바큇자국에 서서 여기를 쳐다봤다가 저기를 살펴보았다. 그의 얼굴은 실망과 경악으로, 머리 위 하늘의 시커멓지만 눈이나 비는 뿌리지 않는 구름처럼 잿빛이었다. - P122

"99구에는 100쌍도 넘는 눈이 있지." 내가 차갑게 큰 소리로 대꾸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보고했어야 했어요." 안타까움과 후회 때문에 실험이 두 주먹을 쥐었다가 풀고, 풀었다가 다시 쥐었다. 꼭 허리쯤에서 독수리 두 마리가 날아오르려 했다가 내려가려 했다가를 반복하는 것 같았다. - P124

그는 누구의 침대맡이나 탁자 앞에서도 갑자기 늘어난 스무 송이의 작은 꽃을 찾지 못했다. 그 사람을 찾지 못한 채 며칠이 지나면서 실험은 이전의 원기 왕성한 모습을 잃어버렸다. 도둑맞은 뒤 범인을 찾지 못해 맥 빠진 사람처럼, 일해야 할 때는 일하고 끝내야 할 때는 끝냈지만 말수가 줄고 풀이 죽은 채 항상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공훈이라는 대문이 순식간에 눈앞에서 닫히고 자물쇠마저 채워진 듯, 실험의 앞길이 수문에 가로막힌 것 같았다. - P126

"갖고 싶나요?" 실험이 웃으며 모두를 바라보았다. "여기 스물다섯 송이는 더 이상 제게 필요 없습니다. 누구든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사람에게 제가 피땀 흘려 얻은 이 두 송이를 드릴게요."
사람들이 모두 놀라서 일주일 전에 그가 제련할 수 있는 강철 원료를 찾았다고 말했을 때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그 때는 정신병원에서 나온 사람을 흘겨보듯 바라봤지만 이번에는 개선장군을 우러러보듯 신뢰와 의아함, 부러움이 촘촘하게 얽힌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누구도 입을 떼지 못했다.
"필요 없나 봐요?"
실험이 갑자기 손에 든 작은 꽃 한 송이를 천천히 찢었다. 그러고는 손가락 틈 사이로 떨어뜨리자 바스러진 붉은 종잇조각들이 작은 나비가 공중에서 떨어지듯 서서히 빙그르르 떨어져 내렸다. - P133

아이와 상부에서 아무런 지시를 내리지 않았음에도 사람들은 99구 마당을 깨끗하게 쓸고 문과 창문을 말끔히 닦았으며 대문에 커다랗고 붉은 대련까지 붙였다. ‘천지를 흔드나니 바다처럼 드넓은 곡물 창고로 서구를 비웃고, 시간을 붙드나니 산처럼 높은 강철로 천하를 호령하네‘라는 대련의 두 구절은 웅장하면서 기백이 넘쳤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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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칠세기 중엽에 플랑드르의 화가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는 이탈리아의 항구 도시 제노바에서 시칠리아의 수도 팔레르모로 이주했는데, 도착했을 때는 마침 그 도시가 다시 발생한 역병의 희생자로 전락하고 있던 참이었다. 섬세하고 세련된 취향에도 불구하고, 반 다이크는 남아서 공포를 자신의 주제로 삼았다. 많은 예술가에게 죽음의 광경은 통과 의례이자 인간 생명의 치명적 취약성에 대한 맹렬한 교육이며 영혼의 덧없는 일시성을 들여다보는 창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죽음은 상이었다. 죽음은 니콜라 푸생의 풍경과 오귀스트 로댕의 인물들 뒤에 있다. 죽음은 단테와 베케트 안에 있다. 하지만 아마 카라바조보다 더 흑사병의 심리적 영향을 교묘하게 휘두르며 그처럼 유익하고 창의적으로, 또 그처럼 집요하게 사용한 예술가도 달리 없을 것이다. <골리앗의 머리를 든 다윗>이 가진 힘은 다윗이 일시적인 승리와는 무관하게 자신이 그 죽음을 뒤따를 것을 안다는 사실에서 얼마간 기인한다. - P128

나는 시에나에서 아직 뭐라 표현할 말은 없으나 지금껏 찾고 있던 무언가를 발견했다. 잘 공명될 시점에 그것이 당도하기도 했다. […] 내가 시에나에, 너무도 단호히 시작되고 끝나는 이 도시에 온 것이 그런 때였다. 나는 매일 도시의 경계까지 걸었다. 북으로, 남으로, 동으로, 서로. 나 자신의 한계를 더듬는 듯이 느껴질 때가 많았다. 시에나는 너무 다채로우면서도 한결같고 너무 작으면서도 무진장해서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하나의 알레고리 또는 마음의 상태였을 뿐만 아니라, 스쳐가는 모든 영향력과 펼쳐지는 모든 날과 더불어 변화하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대상이기에, 소박하고 특별하지만 결코 완전히 알 수는 없는, 도시로서의 자아였다. - P132

하루하루가 지나면서, 나는 한 발자국씩 불에 다가가고 있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불은 따뜻하고 유쾌했지만, 어째선지 나는 알고 있었다. 불은 나를 소멸시킬 수 있었다. 나는 침묵의 나날 속에서 어쩌면 그것이 불의 진정한 욕망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 P134

나는 위에 걸린 그림을 보고 있었다. 연마한 스테인리스 스틸에 기타를 연주하는 여성을 실크스크린으로 찍은 미켈란젤로 피스톨레토(Michelangelo Pisto-letto)의 판화 <터키식 목욕탕>이었다. 여성은 등을 돌린 채 앉아 있다. 피부는 따스한 색조로 채색됐다. 엉덩이 위쪽에 두 군데 오목하게 팬 자국이 기분 좋게 에로틱하다. 형태를 보아서는 고대의 유물인 듯하지만, 여자는 살아 있는 사람이다. 왼쪽 허벅지를 보면, 자주 빨지 않아서인지 누르스름해진 흰색 스타킹을 신고 있는데, 그 부분이 유일하게 무언가를 걸치고 있는 부위다. 보이지 않는 손가락으로 알 수 없는 화음을 연주하며 기타의 목을 짚은 손과 손목을 제외하면, 여자는 어느 시대 사람인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 P140

나는 무엇이 여자의 손과 손목을 동시대적으로 보이게 만드는 걸까 의문을 품었다. 제 음악의 효과에 자신이 없거나 아니면 누가 들을까 싶어 걱정하기 때문인지, 여자는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리고 있다. 왼쪽 가슴은 기타 뒷면에 눌렸다. 이제 막 연주를 시작하는 참이라는 걸 의미하는 듯한 등의 곡선을 헤아리며, 나는 윤을 낸 그 나무판이 처음엔 차갑게 느껴졌을지, 아니면 지금도 여전히 그럴지 궁금했다. - P142

"아, 하지만 내 일생을 세 마디로 정리할 수는 없어. 너무 길어. 적당히 꾸며내야 해. 난 꾸며낸 삶을 정말 좋아하거든."
" 저도 그래요."
"내 개들은 어때?" 그이가 로시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개는 우리가 늙어 간다는 걸 모르니까, 멋지지. 우리가 흉해지고 있다는 걸 모르는 거야. 개는 우리가 세상에서 가장 좋은 존재라고 생각해." - P143

죽은 자들에게 살아 있는 자들을 기억한다는 건, 영혼이 육체였을 때 알았던 이들을 여전히 알아볼 수 있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나는 궁금했다. 성인 같은 이들은 천사들의 영접을 받는다. 그들은 재회조차 성직자답다. 그러고는 시에나 공동묘지에 함께 묻힌 부부들 같은, 손을 맞잡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는 남자들 과 여자들이 있다. 사랑해 마지않는 이의 손을 맞잡고 그저 그 눈을 오랫동안, 아니 아마도 영원히 바라보는 것, 그것이야말로 존재의 방법이라고 나는 혼자 생각했 다. - P154

하단 오른 쪽에 있는 쌍만이 제삼의 인물, 더 나이 든 인물을 만류하는 듯한 젊은 수녀를 동반하고 있다. 젊은 수녀는 다가오는 수도사와 인사하지 못하도록 제지하려는 듯이 더 나이 든 자신을 팔로 감싸고 있다. 이들이 멀리서만 사랑할 수 있었던 연인, 엘로이즈와 아벨라르일 수도 있을까? […] 나는 디 파올로가 그들의 편지를 읽었고, 편지 쓰기를 ‘질병‘이라 주장하며 편지를 쓰지 말라고 요 구했던 아벨라르의 절박한 탄원을 알고 있었으리라 확신했다. 반면에 엘로이즈는 관습에 대한 위반을 신경쓰지 않았다. 그보다는 나타남과 사라짐에 관심을 가졌다. 엘로이즈는 아벨라르에게 편지를 썼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이 가까이 있을 때보다 아주 멀리 있을 때 그들의 그림을 더 아낍니다. 부재하는 친구들의 초상화를 보는 것이 즐겁다면 (…) 편지는 얼마나 더 즐겁겠나요." 그리고 그에게 요구할 때, 그녀는 놀랄 정도로 탐욕스럽다. "당신에 관한 모든 걸 낱낱이 알려 주세요." - P154

여기서 디 파올로는 진정한 지옥이란 불의 지옥이 아니라 우리와 가장 가까웠던 이들에게 알아봐지지 못하는 지옥이라 생각 하는 듯하다. 우리는 그들에게 보이기를, 그로 인해 우리 기억의 힘을 재발견하고, 마침내는 의도와 표현 사이, 감추어진 감정과 그 외적 형태 사이에 놓인 위안을 발견하기를 원한다. 그 그림은 이걸 안다. 그 그림은 우리가 제일 바라는 것, 낙원보다 더 바라는 것이 알아봐지는 것임을 안다. -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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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그렇게 살게 되었다. 일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땅이 발을 받쳐 들고 돌아왔다. 금빛으로 석양이 물들었다. 일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투박하게 빛나는 빛 속에 일고여덟 냥쯤 되는 막대가 차곡차곡 빽빽하게 쌓였다. 아이의 발이 석양 속에서 춤을 추었다. 온기가 발을 파고들고 가슴과 배까지 파고들었다. 사람들이 온기에 부딪혔다. 온기가 사람들을 옥죄었다. 위신구의 집, 오래된 푸른 벽돌과 기와, 켜켜이 세월을 쌓은 혼돈의 빛이 광야에서 처음을 맞았다. 사람들이 그렇게 살게 되었다. 일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빛이 좋아서 신은 밝음과 어둠을 가르고 밝음은 낮이라, 어둠은 밤이라 불렀다. 저녁이 생기고 아침이 생겼다. 그렇게 갈라졌다. 어둠이 오기 직전은 황혼이라 불렀다. 황혼은 참 좋았다. 닭은 횃대에 오르고 양은 우리로 돌아갔으며 소는 쟁기를 벗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의 일을 멈추었다. - P13

사람들은 땅에 흩어져 있었다. 하늘에 새가 날아다녔다. 멀리 황허에서 비릿한 물비린내가 풍겨왔다. 새로 갈아엎은 밭이 햇빛 아래서 황적색으로 반짝거렸다. 대지에서 내뿜는 천년 묵은 온기와 향내가 비단처럼 나부끼고 연기처럼 빛 속에 흩날렸다. 땅 위의 사람들이 노곤함에 쪼그리고 앉아 휴식을 취했다. - P21

사람들이 낡은 신발을 버리듯 책을 가져왔다. 모두들 한 권, 혹은 몇 권씩 책 더미에 던졌다. 책 더미가 높아졌다. 태양도 높아졌다. 책 더미가 커지자 태양도 커졌다. 책 더미에서 나는 종이 냄새와 누렇게 바랜 빛깔이 가을 들녘의 숨결에 섞여 떠다녔다. 책 더미가 그렇게 자꾸 높아졌다. 책 더미가 그렇게 자꾸 산 구룽만큼 높아졌다. - P36

"문학적 성과가 매우 뛰어나더이다. 그러니 교화 지구에서 인민을 위한 진정한 혁명 문학작품을 써주시오." 성도를 떠나던 날 나를 뽑은 부서 동료들이 전부 배웅을 나와서 입을 모았다. 당신은 스스로의 명예와 성과, 명성으로 개조에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당신이 떠난 뒤에 당신 가족과 아이, 친구는 우리가 잘 돌보겠습니다. - P43

모두들 죄를 짓고 말았다. 모두의 죄란 무당 600근을 생산할 수 없다고 단정한 거였다. 그로 인해 더 이상 예전과 같을 수 없게 되었다. 모래가 돌이 되고 미풍이 폭우가 되고 말았다. - P48

말라버린 우물처럼 밤이 깊은 지 오래였다. 달이 머리 꼭대기에서 허공에 맺힌 얼음처럼 냉랭한 기운을 내뿜으며 하얗게 빛났다. 방에서 들리는 피곤에 전 코골이 소리가 비 오는 날 흙길에 생긴 진창처럼 누렇게 질퍽거렸다. - P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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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는 집단 매장이라는 개념을 생각하지 않기가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생각보다 집단 매장이 흔하다는 사실도 밝혀지고 있다. 집단 매장이 편의주의적 발상인 것은 분명하다. […] 하지만 다량의 시체 안치 또는 처리의 역사는 어째선지 땅을 선호해 왔다. 아마 거기엔 단순한 편의 이상의 무언가가 있으리라. 어쩌면 그 단어 자체가 매혹적인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묻기‘는 부정하기, 무언가가 사라지도록 애쓰기이니까. 한 개인은 존엄한 장례와 멋진 묘석으로 기려질 수 있겠지만, 스물이나 백 같은 큰 숫자가 개입된다면, 또는 1996년 6월 29일 카다피 독재 정권의 명령에 따라 불과 몇 분 사이에 천이백칠십 명의 정치범이 처형당한 뒤, 쓰러진 바로 그 자리, 교도소 땅에 묻힌 트리폴리의 아부 살림 교도소 같은 경우라면, 상황은 복잡해진다. 그렇다면 집단 매장 행위는 적어도 서로 모순되는 두 가지 목적, 즉 증거를 보이지 않게 만들려는 목적뿐만 아니라 증거를 한곳에 모음으로써 더 유효하게 만들고 그 성취의 규모를 증대시키려는 목적의 달성에도 관련된다. 그리고 아마 그 순간 생존자이기도 한 사형 집행인의 마음속에서 취약하나마 여전히 타오르고 있을 도덕성 같은 것은 서로 얽힌 채 쌓인 그 무질서한 시체들이 적어도 홀로 깊은 곳에 들어가지는 않는다는 사실에서 기묘한 위안을 받으리라. - P124

유럽에서 일부는 정말로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에게 갑작스럽고 설명할 수 없는 이 역병의 지배는 신이 선하지도 자비롭지도 않다는 최종적인 증거였다. 그들은 "신속하게 얻을 수 있고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쾌락을 생에서 얻겠다"고 맹세하면서 투키디데스를 안내인으로 내세웠다. 그들은 술에 취해 필요한 것을 훔치고 절제 없이 마구잡이로 사통했다. 런던의 어느 보고자는 "한 집에서 죽음의 격통 아래 울부짖는 소리와 바로 옆에서 술을 퍼마시고 창녀와 관계하며 신에 대한 불경을 지껄이는 소리를 동시에 들을 수 있다"고 썼다. 여기서부터 유럽의 기독교 세계와 문화는 바뀌었다. 마치 유럽이 잠에서 깨어나 자신이 내내 죽음의 왕국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은 듯했다. 유럽은 그 깨달음이 예술로 표현되기를 원했다. 유럽은 망각을 두려워했다. 유럽은 그 공포를 믿었고, 그 공포를 소통하며 후세에 전하고자 했다. 역병은 상상력에 외상을 입혔다. 모든 것이 죄로 물들었다. - P125

무슬림 세계에서도 비슷한 쾌락주의와 영적 유책성 반응이 일어났으나 주변부에만 머물렀다. 주된 반응은 결정론적인 것이었다. 무슬림들은 그 유행병을 폭풍이나 홍수와 다를 것 없는 재난이자 저항하고 견뎌내야 할 것으로 보았다. 그 병은 분노한 신이 아니라 세상의 질서를 관장하는 운명의 명을 받고 왔다. 비난받아야 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이븐 바투타가 쓴 다마스쿠스 기록에서 보듯이, 서로 다른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연대 속에서 안정과 위안을 찾곤 했다. 그러나 그 때부터 인간이 자신의 미래를 어느 정도까지 형성할 수 있는지에 관한 의심이 자라났다. 죽음의 참상에 직면하고서 아랍과 유럽 사회 모두가 운명론에 더 취약해졌다. 상상력과 가치 구조 자체가 변했다. - P126

알베르 카뮈가 그 역병에 관심을 가진 이유가 그래서였다. 그는 역병의 극단성을 신뢰했다. 그는 인간 본성을 조명하는 역병의 힘을, 인간 본성이라는 것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가면 쓴 인물이라도 되는 듯이, 그 인간 본성을 폭로하는 역병의 힘을 믿었다. 카뮈가 가장 두려워하면서도 가장 끌렸던 것이 유토피아였다. 세계의 저주는 이상주의자들이라고, 그는 믿었다. 이상주의자는 역병만큼이나 설득하기가 어렵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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