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골 여성들은, 나에게 용기는 전염성이 있고 힘은 숫자에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혼자서 안 되는 것은 여러 사람이 같이하면 이루어지고,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사실을 배웠다. 그들은 수백 명의 실종자 어머니와 아내로 구성된 전국적인 조직에 속해 있었다. 그 어머니와 아내들은 매우 용감한 여성들이어서 정부가 쉽게 해산시키지도 못할 정도였다. 공식 발표는 실종자들이 존재한다는 공산주의적 선전을 부정하고, 그녀들을 체제 전복적이고 반애국적인 미친 여자들이라고 묘사했다. 검열에 순응한 언론은 이 여성들에 대해 다루지 않았지만, 여러 해 동안 독재 정권을 규탄하는 운동을 지속해 온 인권 운동가와 망명자들 덕분에 해외에서는 잘 알려졌다. - P406

연말이면 그는 나에게 우편으로 크리스마스 인사를 보내곤 했다. 몇몇 외국인들이 국내 소식들, 성공한 가족사진들과 함께 지인들에게 보내는 연하 회보의 하나였다. 이런 편지에는 성공, 여행, 출생, 결혼의 이야기만 담겨 있다. 파산, 수감, 암 등으로 고통 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자살하거나 이혼한 사람 이야기도 나오지 않는다. 다행스럽게도 그 어리석은 전통은 우리 문화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랄드 피스케의 연하 회보는 가족들의 환상이 담긴 연하장보다 훨씬 나빴다. 그것은 온통 새 이야기뿐이었다. 보르네오의 새, 과테말 라의 새, 북극의 새. 북극에도 새가 있다니 정말 믿기 힘든 일이다. - P408

나는 홀리안 브라보의 학대를 ‘가정폭 력‘이라고 부르지 않았고 오히려 ‘사고‘라는 핑곗거리를 찾아주었다. 그가 과음하는 바람에 손이 올라간 거라고, 내가 그를 자극했다고 생각했고, 그가 무슨 문제가 생겨서 나한테 화풀이를 했지만 이제 용서를 빌고 다짐을 하고 있으니 다시는 같은 일이 되풀이되지 않을 거라는 식으로 여겼다. 내가 그에게 매인 게 하나도 없고 그를 필요로 하지도 않았으며 자유로웠고 혼자인 채로 지냈지만, 그 학대를 끝장내는 데 몇 년이 걸렸다. 두려움 때문이었던가? 그렇다, 두려웠다. 그러나 불안, 정서적 의존, 타성, 침묵의 규율로 인해 나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나는 나 자신을 고립시켰다. - P432

그는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피했고, 얀테의 법칙이라는 북유럽적인 관념을 극단적으로 따르는 사람이었다. 그 법칙은 이런 뜻이었다. "네가 특별한 사람이라거나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지 말라. 가장 눈에 띄는 못이 망치에 맞는다는 걸 기억해라." 그는 자신이 발견한 새들에 대해서도 자랑하지 않았다. - P445

나는 최근에 네가 하얀 옷을 입고 행복해하는 동성애 여성 커플의 혼배미사를 열어주었다고 주교에게 불려가 질책을 들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주교는 페이스북에 올라온 결혼식 사진을 네 코앞에 들이댔다.
"첫 영성체 같은데요." 너는 비웃었다.
"당장 철회하고 사과해야 합니다!" 주교가 그렇게 명령했다.
너는 순종 서약의 허점을 이용했다.
"주교님께서 명령하신 바를 언론에 알리지 않고 일단 유보해 두겠습니다, 각하. 저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제 양심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모든 인간은 사랑할 권리가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결과를 책임지겠습니다." - P454

너는 불의, 계급제도, 가난에 분노했다. 교회의 위계질서, 미신적 종교, 그리고 정치인과 기업가, 수많은 사제의 어리석고 편협한 잣대에 반발하기도 했다. 그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가 있던 콩고에서 너는 행복해했다. 너는 목수이자 기계공이었고, 아이들을 가르치고 채소를 심고 돼지를 키웠다. 그곳은 너의 조국이 아니었고 애초에 조국이 바뀔 거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그저 도울 수 있는 곳에 가서 돕고자 했을 뿐이었다. - P457

너도 알다시피 그즈음에 내가 계단에서 넘어졌잖니. 전혀 심각한 것이 아니었다. 많이들 하는 고관절 교체 수술과 몇 달간의 운동으로 다시 걸을 수 있었지. 그런데 더 이상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지팡이, 에텔비나의 강한 팔, 보행기, 그리고 나중에는 휠체어가 필요했다. 휠체어에 앉는다는 것의 가장 나쁜 점은 내 코가 다른 사람들의 배꼽에 닿고 내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오는 게 그들의 코털이라는 점이다. 이제 자동차, 2층에 있는 내 사무실, 극장과는 안녕이었지. 그리고 완전히 마일렌의 손에 맡기게 된 재단과도 작별해야 했다. 나는 타인의 보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겸손해지면 의존하는 나날의 굴욕감이 덜 아프다. 그러나 신체적인 장애는 예상치 못한 선물을 가져다주었지. 엄청난 마음의 자유를 나에게 안겨 주었단다. - P464

기쁘고 궁금한 것도 사실이지만 가끔은 두렵기도 하다. 저편에는 오로지 적막함이 존재할 수도 있다. 우주 공간에서 부르짖고 또 부르짖는 영원한 방황만이 존재 할지도 모른다. 아니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빛이 있을 것이다. 많은 빛이 있을 것이다. 불확실성의 순간은 아주 짧다. - P475

나는 지난 20년 동안 죄를 지을 기회가 없었고 이전의 잘못에 대해서는 이미 대가를 치렀다. 나는 간단한 행동 규칙을 따라 살았다. 내가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 하라는 규칙 말이다. - P47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특정한 카드를 갖고 태어나 그 카드로 인생이라는 게임을 한다. 나쁜 카드가 걸려 모든 걸 잃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쁜 카드를 능숙하게 사용해 성공하는 사람도 있지. 카드는 우리가 누구인지, 즉, 나이, 성별, 인종, 집안, 국적 등을 결정한다. 카드를 바꾸는 건 불가능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최선을 다해 카드를 잘 쓰는 것이다. - P258

"저는 진부한 삶을 살았어요. 레비 박사님. 특별히 말 할 가치가 있는 일을 한 적도 없지요. 나는 평범한 사람이에요." 잠시 환담을 나눌 때 나는 그에게 말했다.
그는 누구와 비교하는지에 따라 모든 삶은 진부하고 우리 모두 평범해진다고 대답했다.
"비올레타, 왜 비극적인 삶을 원하는 거지요?" 그는 나에게 물었고 목소리가 갈라져 있었다. 아마도 자신이 겪은 고통에 대해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 경우에 쓰는 ‘당신의 삶이 재밌어지길 기원합니다‘라는 중국식 저주가 있습니다. 그에 해당하는 축복의 말은 바로 ‘평범한 삶을 기원합니다‘지요." 그가 덧붙였다. - P270

나는 딸과 단둘이서 이야기를 나누었고, 그 애가 살았을 때 해주지 않은 말을 마침내 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로 너를 사랑했다고, 여러 해 동안 네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고. 나는 그렇게 내 딸과 헤어질 수 있었고 안녕이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그 애에게 키스하며 무심하고 소홀했던 내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내 딸로 와주어서 고맙다는 말도 할 수 있었다. 내 마음과 아들의 마음속에 네가 언제나 살아 있을 거라는 약속도 했다. 그리고 나를 버리지 말아달라고, 꿈속에서 나를 찾아와 달라고, 신호와 암호를 보내달라고, 거리의 모든 아름다운 아가씨의 화신으로 나타나 달라고, 가장 깊은 밤이면 영혼으로 나타나 주고 한낮에는 퍼져나가는 햇살로 나타나 달라고 부탁을 했다. 니에베스, 나의 니에베스. - P316

스포이드, 햇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란체라, 호로포, 룸바 리듬 사이에서 그 작은 생쥐는 살아남았다. 6주가 지난 뒤 우리는 너무나 많은 것을 베풀어준 로이 쿠퍼와 리타 리나레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아기는 모든 시간을 다 쏟아부어야 하는 존재고, 에너지와 수면, 정신 건강을 소모시키는 존재다. 나 같은 쉰두 살 여성에게 육아는 심하게 어려운 일이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젊어지게도 했다. 나는 너와 사랑에 빠졌단다, 카밀로. 그 사랑 덕분에 나는 너를 키우는 도전을 감행할 수 있었고, 내 딸의 죽음에 대한 애도를 내 손자의 삶에 대한 축복으로 바꾸려는 도전도 할 수 있었다. - P321

로이와는 늘 똑같은 루틴이 반복되었고, 우리 둘 다 즐겼다는 확신으로 평온해졌으며 그런 다음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서로의 팔에 안겨 쉬었다. 말은 거의 하지 않았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았으며 미래는 존재하지 않았다. - P397

내가 젊었을 때처럼 노동으로 돈을 벌기는 어렵다. 고된 일일수록 급여는 더 적어진다.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돈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기고 투기를 하고 주식 시장의 기회를 이용하고 다른 사람의 노력에 투자해서 부자가 되는 게 훨씬 쉽다. 그리고 매일의 노동으로 먹고살면 모든 것을 잃고 길에 나앉게 되기가 쉽다. 그러나 돈이 많으면 돈을 다 써버린다는 게 어렵다. 돈은 더 많은 돈을 끌어들이고, 은행의 계좌와 투자라는 신비한 영역을 통해 몇 배로 늘기 때문이다. - P4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머는 하나의 생존 형식이었다. 노예들은 유머를 통해서 노예제로부터 필연적으로 심리적 거리를 둘 수 있었다. 또한 유머는 지하 세계로 들어가는 암호였다. 그곳에서 주인님은 외부자이고 놀림의 대상이다. 랠프 엘리슨은 에세이 「웃음의 호사스러움」에서 백인은 흑인의 웃음소리를 들으면 "왠지 모르게 놀림을 당했다는 전반적으로 당혹스러운 감정"을 느낀다고 적고 있다. - P80

결국 흑인이든 백인이든 어떤 여자도 만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함으로써 프라이어는 자신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는다. 바로 이 대목에서 나는 갑자기 웃음을 멈추고 생각한다. 이것은 프라이어가 흑인 남성의 남자다움을 과시하는 근육질의 외피를 벗어버리고 자기 치부를 드러내는 방식인 것이다. - P83

한은 가혹했던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미국에 의해 지탱되었고 정치적으로 바로 세우지 못한 독재의 역사 때문에 쌓인 울분, 아쉬움, 수치심, 우울, 앙심의 혼합물이다. 한은 지금도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다음 세대로 대물림될 수도 있다. 한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한을 느끼는 것이다.
프라이어의 온갖 흉내 연기 사이사이로 분노와 절망이 스친다. "내가 백인이 아니고 흑인이라서 다행이에요. 당신네 백인들은 달에도 가야 하잖아요"라고 말할 때 서리는 프라이어의 우수는 웃음이 그친 한참 후까지도 맴돈다. 그 우수는 그가 세상을 선명하게 바라볼 수 있도록 해준다. 앙리 베르그송은 유머는 숭고함을 거스른다는 점에서 신성이 배제되어 있고 온전하게 인간적이라고 적고 있다. 즉 우리는 유머를 통해 초월성보다는 우리의 피부를 통절히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 P83

프라이어는 내가 소수적 감정(minor feelings)으로 칭하는 것을 채널링하는 사람이었다. 소수적 감정은 일상에서 겪는 인종적 체험의 앙금이 쌓이고 내가 인식하는 현실이 끊임없이 의심받거나 무시당하는 것에 자극받아 생긴 부정적이고, 불쾌하고, 따라서 보기에도 안 좋은 일련의 인종화된 감정을 가리킨다. 이를테면 어떤 모욕을 듣고 그게 인종차별이라는 것을 뻔히 알겠는데도 그건 전부 너의 망상일 뿐이라는 소리를 들을 때 소수적 감정이 발동한다. - P84

소수적 감정은 현대 미국문학에 잘 등장하지 않는데, 그런 감정이 생존과 자기 결정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서사에 잘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성장소설의 구성 원리와는 다르게, 소수적 감정은 중대한 변화에 의해 촉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변화의 결여에 의해, 특히 변하지 않는 구조적 인종주의와 경제 상황에 의해 촉발된다. 소수적 감정을 다루는 문학은 인종 트라우마를 개인적 성장을 이루기 위한 극적인 장치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인종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체제의 트라우마가 개인을 제자리에 묶어 두는 현상을 탐구한다. - P8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저서 『농담과 무의식의 관계』에서 농담을 경향성 없는 농담과 경향성 있는 농담의 두 범주로 분류한다. 경향성이 없는 농담은 아이들에게 수수께끼를 들려주듯 무해하고 무독하다. 경향성을 갖는 농담은 공격적이거나 저속하거나 아니면 둘 다여서 우리의 의식 속에서 억눌린 부분을 캐낸다. 1940년대 미국 흑인 연예인들은 무대 뒤에서 터무니없이 과장된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런 농담을 가리켜 ‘거짓말‘이라고 불렀다. 그 ‘거짓말‘은 경향성을 지녔으며, 고지식한 백인들로부터 멀리 떨어진 길모퉁이, 당구장, 이발소에서 구전되었다. 프라이어는 – 이야기를 왜곡하고, 시끄럽게 불평하고, 큰소리치고, 볼링핀이든 오르가슴에 이른 촌놈이든 닥치는 대로 흉내 내며–거짓말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프라이어가 들려주는 거짓말은 내가 당시 읽고 있던 대부분의 시와 소설보다 인종에 관해서 솔직했다. - P62

비평가들이 지적한 대로 프라이어의 탁월함은 영리한 말솜씨뿐만 아니라 독백을 체화하는 방식에서 나온다. 그는 어떤 사람이든 흉내 낼 수 있고 방대한 인간의 감정을 잡아내는 일에 눈부신 재능을 갖춘 1인 앙상블 팀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그의 얼굴에 매료됐다. 만약 프라이어의 입담이 듣는 사람에게 상처를 낸다면, 그의 얼굴은 그가 받은 상처를 드러낸다. 프라이어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하던 반려 원숭이들이 어떻게 죽었으며 그가 뒤뜰에서 슬퍼하는데 이웃집 셰퍼드가 담장을 뛰어 넘어와 그를 위로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일러두건대, 프라이어는 여기서 개를 연기한다. 하지만 그는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눈으로 인간의 모든 아픔을 상기시킨다. - P63

존 키츠에 따르면 시인은 "정체성이 없다–시인은 끊임없이 어떤 다른 사람을 대신하고 그 사람의 역할을 한다". 롤랑 바르트에 따르면 "문학은 모든 주체가 피해 가는 그 중립자, 그 합성물, 그 모호성이며, 글을 쓰는 사람의 정체성을 비롯하여 모든 정체성이 실종되는 덫이다". - P67

나는 독자가 내 시를 읽고 나서 내 이름을 보면, 그 시와의 연결 퓨즈가 끊어지면서 시가 좋긴 한데 다시 생각해보니 공감은 안 간다고 여기는 것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그렇다는 어떤 증거가 있단 말인가? 그냥 내가 재능이 없어서 그런 건지 어찌 알겠는가. 그걸 모른다는 것이 바로 문제였다. 둘 중 어느 쪽이든, 나는 이 꼼짝달싹 못 하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늘 내 신체적 정체성이 문제인 줄 알았으나 글을 쓰면서 깨달은 점은 글에서 나를 드러내지 않더라도 여전히 내 정체성에 초연할 수 없다는 것이었으며, 그 때문에 일종의 절망 상태로 곤두박질쳤다. - P68

코미디에는 시에서 만날 수 없는 투명함이 있다. 코미디언은 정체성이 없는 척할 수가 없다. 그들은 무대에 올라가 총살당하는 사람처럼 벽돌 벽을 등지고 선다. 도저히 숨을 곳이 없으므로, 별수 없이 자기 정체성을 먼저 인정하고 나서("자, 여러분은 내가 흑인이라는 걸 알아챘을 겁니다.") 비로소 다른 소재로 넘어가거나 아니면 정체성 문제를 더 본격적으로 파고든다.
또한 청중을 억지로 웃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허튼소리로 코미디를 이어가기란 쉽지 않다. 진짜 웃음은 오르가슴과 마찬가지로 의지와 관계없이 근육이 갑자기 수축하면서 터져 나온다. 놀라야 웃음이 나오고, 놀라는 것은 한 번뿐이다. 그래서 코미디는 가차 없이 찰나적이다. 농담만큼 금방 낡아버리는 것도 없다. - P69

시 낭독은 내가 시에 대한 신념을 잃기 일보 직전이라는 점을 상기시켜주는 것 말고는 다른 기능을 수행하지 못했다. 낭독회는 어쩌면 한때는 공동생활의 한 중요한 형태였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정형화된 농담, 숨소리 섞인 "시인의 목소리", 기계적인 웃음소리, 누가 혼자서 음 하며 동의하는 소리 등등 모든 것이 고루한 교회 예배 의식처럼 되어버려, 예전에 지녔던 의미는 흔적만 남았다는 느낌이 심하게 들었다. 나는 현자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시의 힐링 효과를 칭찬하는 시인 역할에 장단을 맞추었지만, 속으로는 그 감상적인 달콤함에 당뇨 쇼크가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최악은 내가 나를 속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예술적 진정성이 훼손될까 봐 청중의 개념을 거부한 바로 그 시인이었다. 그러나 낭독회에서는 청중을 부인할 길이 없었다. 나는 강연장을 메우고 앉아 지루해하는 백인들을 위해 공연을 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인정받기를 절실하게 갈망했다. - P70

나는 어떤 상을 수상한 유색인종 시인이 질의응답 시간에 한 말을 잊지 못한다. "인종에 관해 쓰고 싶으면 예절 바르게 써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니까요." - P73

시인 프라기타 샤마가 말한 대로, 미국인은 죽음을 애도하는 일도 기한을 정해놓고 하듯 인종에 관해서도 유효 기간을 설정한다. 미국인들은 일정 기한이 지나면 우리가 인종 문제를 극복할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비록 나는 회의적이지만, 이 기회에 우리가 미국 문학계를 완전히 바꿔놓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다. 우리의 정체성을 자동으로 규정하는 낡은 인종 서사, 우리의 삶을 백인 청중의 구미에 맞추면서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다양한 현실을 삭제해버리는 낡은 인종 서사를 갈아치우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주어진 공식에 따라 우리 자신을 설명하는 일을 그만두자는 것이다. - P75

라히리의 소설은 설명하지 말고 보여주라(show, don‘t tell)라는 문예창작 과정의 교리를 대체로 잘 따르고 있다. 그렇게 하면 독자는 등장인물의 고통을 체험하면서도, 수전 손택이 말한 대로 자신의 특권을 등장인물의 고통과 "동일한 지도" 위에 위치 매김 하지 않아도 된다. 등장인물의 내면적 생각이 제거되었으므로 독자는 빈번한 사건 개입에 방해받지 않고 등장인물의 의식이라는 조종석에 앉아 영화 보듯 등장인물의 시각을 체험할 수 있다. - P76

물론 유색인종 작가는 인종적 트라우마를 이야기해야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는 너무나 오랫동안 백인이 상상하는 대로 구성되어왔다. 출판업계는 작가가 자신의 트라우마를 사적인 것으로 간주하기를 기대한다. 즉 등장인물이 특이한 가족 관계나 역사적 비극에 의해 시험에 들었다가 결국 자기 긍정이라는 계시에 도달하는 이야기를 기대한다. 아시아계 미국인 작가들의 소설을 보면 작가가 트라우마의 배경을 머나먼 고국 땅이나 고립된 아시아계 가족 내부로 설정하여, 그들의 아픔이 미국의 제국주의 지정학이나 미국 내 인종주의에 대한 새삼스러운 증거가 아님을 확실히 해두는 작품이 많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외부적 요인은–가부장적인 아시아인 아버지, 과거 시대의 백인들–독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도 되도록 충분히 멀찌감치 설정한다. - P77

리처드 프라이어는 고통받는 흑인의 육체가 오랜 세월 미국인들의 오락거리였다는 점을 완전하게 직시하고 자신의 트라우마를 특정한 방식으로 표현한다. 리처드 프라이어에 관한 특집 기사를 『뉴요커』에 기고한 힐튼 얼스는 흑인의 체험을 미화하는 "단일한 이야기"에 대해 언급한다.

[흑인성이라는 주제는 미국인의 사고에서 기이하고도 불만스러운 여정을 거쳐왔다. 왜냐하면 첫째로 흑인성은 들어줄 사람을 찾기 위해 거의 언제나 백인 위주의 청중에게 설명되어야 했고, 둘째로 흑인성은 오로지 한 가지 이야기 – 진보 성향 사람들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억압당한 이야기 – 만 들려준다고 상정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 P7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잘 믿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잘 믿지 못한다. 그래서 목소리를 너무 크게 낸다고, 자존심이 너무 세다고, 혹은 야심이 너무 과한 게 아닐까 자책한다. 샤마는 그 시에서 자기 가족의 자존심을 이카로스에 비유한다. "보라, 우리가 하늘에 너무 가깝게 솟아올랐다가 어떻게 추락했는지. 추락이 우리를 끝장내지 못할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았을까. 여기 떨어지고, 저기 떨어지고, 비명을 지르며.
오 허세부리지, 너희 생각만큼 나쁠 리는 없으니." - P47

정이라는 한국말은 번역하기 까다롭지만, 가장 근접한 정의는 한국인끼리 흔히 느끼는 "즉각적인 깊은 연결감"이다. 내가 그 심리치료사와 정으로 이어졌다고 상상했나? 왜 그 사람이 나를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을까? 마치 우리가 공유하는 유산이 친밀함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도 되듯 말이다. 어쩌면 내가 한국계 미국인 치료사를 찾았던 것은, 길고 느린 심리치료를 원치 않았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마도 내 삶을 별로 설명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지 모른다. 유대인 친구 하나는 자기는 절대로 유대인 심리치료사에게 가지 않는다고 했다. 가족의 모든 문제가 문화적인 문제라고 쉽게 전제되기 때문이란다. 때로는 스스로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그 경험을 상대방에게 애써 설명할 필요가 있다. - P48

트라우마를 겪고 이곳으로 이민 온 많은 이민자들은 살아남기 위해 어떤 일이든 감수한다. 사람을 속인다. 아내를 구타한다. 노름을 한다. 그들은 생존자이고, 대다수의 생존자가 그렇듯, 지독한 부모가 된다. 나는 다오를 보면서, 당신의 아버지가 집에서 질질 끌려 나오는 모습을 목격하던 우리 아버지를 생각했다. 역사를 통틀어 강제로 질질 끌려가던 아시아 사람들을 생각했다. 태어난 고향 집에서, 제2의 고향 집에서, 태어난 고국에서, 제2의 고국에서 쫓겨나고 내쳐지고, 퇴출, 퇴거, 추방되던 그들을 생각했다. - P57

나는 "다음은 아시아인이 백인이 될 차례"라는 소리를 들으면 "백인이 될"을 "사라질"로 교체한다. 다음은 아시아인이 사라질 차례다. 우리는 성취가 대단하고 법을 잘 지킨다는 평판을 듣다가 기억상실의 안개 속으로 사라질 것이다. 우리는 권력자가 되지 못하고 그저 권력에 흡수될 것이고, 백인의 권력을 나눠 갖지 못하고 우리의 조상을 착취한 백인 이데올로기의 꼭두각시가 될 것이다. 우리의 인종 정체성은 쟁점에서 벗어나며, 괴롭힘을 당하거나 승진에서 누락되거나 매번 발언을 방해받는 것도 인종 정체성과는 무관한 거라고 이 나라는 우긴다. 우리 인종은 심지어 이 나라와도 무관하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론조사에서 흔히 "기타"로 분류되고 신고된 강간, 직장 내 차별, 가정폭력 사건의 인종별 집계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 P5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