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나는 땅거미가 지는 해질 무렵을 너무도 사랑했다. 하루 중에서 무언가 굉장한 일이 닥칠 것만 같은 기분에 젖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이런 불확실한 시각에는 모든 거리와 장소가 평소보다 더 근사해 보였다. 사람들의 표정도 명상에 잠긴 듯 온화해졌고, 그 순간만은 나 역시 아름다운 청년이 된 것 같은 환상에 빠졌다. 거울이나 상점 진열창을 힐끗거리면 주름살 하나 없는 내 모습이 보였고, 놀란 내 손가락들이 얼굴을 더듬었다······ - P81
하지만 어느 저녁, 집에 돌아왔는데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불을 켠 뒤 밖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새벽까지 기다렸지만 헛일이었고,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두 번 다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한 개비 장작처럼, 성령의 숨결처럼 단순했던 내 어린 집시 여자. 내 난로에 불을 지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던 여자. 건물 잔해 속에서 찾아낸 무거운 널빤지들을 커다란 나무 십자가처럼 어깨에 메고서 끌고 오던 여자. 감자 스튜와 말고기 소시지면 족했고, 난로에 불을 지피고 가을 하늘에 커다란 연을 날리는 것 외에는 더이상 바라는 게 없었던 여자. - P83
나는 이 히틀러와 열광하는 남녀들과 아이들을 파쇄하고 짓이겼는데, 그럴수록 나의 집시 여자가 더 간절히 생각났다. 열광이라고는 모르던 여자. 내 난로에 불을 지퍼 자신의 스튜를 끓이고 내 맥주 단지를 채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던 여자. 빵을 성체처럼 쪼개고, 그런 다음에는 난로와 불꽃과 열기, 타닥타닥 타오르는 감미로운 불길을 보며 명상하는 것 외에는 바라는 것이 없던 여자. 이 불의 노래는 그녀가 유년기부터 알아왔고 그녀의 종족을 신성한 유대감으로 묶어주던 것이었다. 그 빛은 사람들의 얼굴에 우수 어린 미소를 그려 넣으며 모든 고통을 물리치는 것이었고, 그녀에게는 절대적인 행복의 그림자였다······ - P84
침대에 등을 대고 비스듬히 누워 있는데 아주 작은 생쥐 한 마리가 내 가슴팍 위로 떨어져 미끄러지듯 달아나 몸을 숨겼다. 내 가방이나 외투 호주머니에 두세 마리가 딸려온 게 틀림없었다. 마당에 변기 냄새가 가득 퍼져 있는 것을 보니 곧 비가 퍼붓겠다 싶었다. 술과 노동으로 멍해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이틀 동안 내 지하실을 청소하며 생쥐들을 희생시킨 참이었다. 그저 책이나 갉아먹고 폐지 더미에 뚫린 구멍 속에 살며 그 작은 둥지 안에서 새끼들을 낳고 키우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소박한 짐승들인데. 추운 밤이면 내 품안에서 공처럼 옹크렸던 내 어린 집시 여자처럼 몸을 사린 생쥐들이다. 하늘은 인간적이지 않다. 그래도 저 하늘을 넘어서는 무언가가, 연민과 사랑이 분명 존재한다. 오랫동안 내가 잊고 있었고, 내 기억 속에서 완전히 삭제된 그것이. - P85
무엇보다 그들이 낀 장갑에 나는 모욕을 느꼈다. 종이의 감촉을 더 잘 느끼고 두 손 가득 음미하기 위해 나는 절대로 장갑을 끼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곳에서는 그런 기쁨에, 폐지가 지닌 비길 데 없이 감각적인 매력에 아무도 마음을 두는 것 같지 않았다. 바츨라프 광장의 에스컬레이터를 탄 사람들처럼, 책들은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올라가 스미호프 양조장의 가마솥만큼이나 거대한 가마솥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저 끔찍한 용기가 가득차면 벨트가 멈추었고 거대한 수직 나사가 천장에서 내려와서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종이를 짓누른 뒤 지친 탄식을 내뱉으며 천장으로 도로 올라갔다. 그러고 나면 모든 게 다시 시작되었다. 벨트가 흔들리며 카렐 광장의 분수대만큼이나 커다란 타원형 용기 속으로 종이를 밀어넣었다······ 책더미들이 여기서 몽땅 파괴되었다. 나는 이제 마음을 추스르고 유리 벽 너머로 트럭들이 손때 묻지 않은 새 책들을 쏟아놓는 광경을 목격하고 있었다. 그 책들은 어느 누구의 눈이나 마음, 머리도 오염시키지 못한 채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 P89
대담해진 나는 압축통을 에워싼 승강대 위로 기어올라가보았다. 한 번에 5만 리터의 맥주를 생산해내는 스미호프 양조장에서처럼 그곳을 어슬렁거리면서, 공사가 진행중인 집의 비계 위에 올라선 것처럼 난간에 기대어 홀을 내려다보았다. […] 스웨터들과 캡들이 앵무새나 꾀꼬리, 물총새의 깃털처럼, 요란한 색깔의 향연 속에 길을 잃고 있었다. 소름 끼치는 일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나는 상황을 정확히 이해했다. 저 거대한 압축기가 다른 모든 압축기에 치명타를 가할 것이고, 내가 몸담고 있는 직업에도 상이한 유형의 사람들과 작업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가 열릴 것이었다. 실수로 그곳에 버려진 책들과 사소한 기쁨도 끝이었다! 뜻하지 않게 교양을 쌓게 된 나처럼 늙은 압축공들이 누렸던 좋은 시절도 끝이 나고 만 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게 되었으니까. 매 꾸러미에서 책을 한 권씩 골라 보너스로 준다 해도 나는 거기서 끝장이었고, 내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책 속에서 근본적인 변화의 가능성을 찾겠다는 열망으로 우리가 종이 더미에서 구해낸 장서들도 모두 끝장이었다. - P90
그러나 내 용기를 결정적으로 꺾어놓은 건 그 젊은이들이었다. 양다리를 벌린 채 손을 허리에 갖다대고 우유와 코카콜라를 병째 들이켜 는 젊은이들. 더럽고 지친 늙은 일꾼이 일감에 매달려 혼신의 힘으로 맞붙었던 시절은 완전히 끝이 나고 만 것이다! 새 인간, 새 방식과 더불어 바야흐로 새 시대의 막이 오른 것이다. 우유를 수리터씩 들이켜며 일한다는 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암소들이라면 갈증이 나서 죽을지언정 우유라면 한 모금도 마시려 하지 않을 텐데. - P91
그들의 그리스 휴가 계획은 나를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다. 헤르더와 헤겔의 책들은 나를 고대 그리스에 던져놓았고 프리드리히 니체는 디오니소스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건만 내가 막상 휴가를 떠나본 적은 없었다. 일을 따라잡느라 휴가는 늘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하루라도 결근을 하면 소장은 가차없이 추가로 이틀을 더 근무하게 했다. 어쩌다 하루 쉬는 날이 찾아와도 나는 수당을 받고 일하러 갔다. 일이 항시 밀려 있는데다, 내 역량을 넘어서는 종이 더미를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으니까. 사르트르 양반과 카뮈 양반이, 특히 후자가 멋들어지게 글로 옮겨놓은 시시포스 콤플렉스는 지난 삼 십오 년 동안 내 일상의 몫이었다. 그러나 부브니의 사회주의 노동단원들은 일이 밀리는 법이 없었다. 고대 그리스의 미소년들처럼 볕에 그을린 젊은 남녀들이 작업을 재개하고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플라톤도, 괴테도, 불멸의 고대 그리스도 모르는 그들은 헬라스에서 여름을 보내는 일에도 그저 무덤덤하기만 했다. - P93
저 젊은이들은 완전히 새로운 존재인 게 확실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내 지하 공간으로 돌아왔다. 뒷문으로 들어와 어슴푸레한 빛과 희미한 전구, 곰팡내를 다시 찾았다. 내 압축기와 반들반들 윤이 나는 압축통, 세월의 손길이 밴 그 나뭇결을 어루만졌다. 그 순간 난데없이 비통한 고함소리가 귓전을 때려 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천장에서 소장이 충혈된 눈으로 얼굴을 아래로 들이밀고 내지르는 소리였다. 내가 긴 시간 자리를 비운 사이 작업장 안마당이 종이로 뒤덮여 있었다. 그런데도 나는 그가 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꾸짖는지 제대로 파악하지도 못하면서 스스로가 비열한 인간처럼 여겨졌다. 더이상 나를 보아넘길 수 없게 된 소장은 내가 아직 아무한테도 들어본 적 없는 욕설을 쏟아놓았다.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무능한 인간이고 바보천치였다······ 부브니의 거대한 압축기와 청년 사회주의 노동단원들 그리고 그들의 그리스 여행에 심적으로 팽팽히 대립해 있는 나는 멍청한 인간이었고, 내 작은 압축기보다 더 미미한 존재였다. - P97
만차는 이미 잿빛이 된 머리를 짧게 자른 모습이었다. 어린 소년이나 운동선수, 아니면 신의 은총을 입은 육상 선수의 머리 모양이랄까. 한쪽 눈이 다른 쪽 눈보다 아래로 내려가 우아한 인상을 주었다. 사시처럼 보이기도 했지만, 시각적인 결함이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무한의 문턱 너머에 자리한 정삼각형의 한복판, 존재의 심부에 영원히 고정된 채 길을 잃고 방황하는 눈이었다. 그녀의 사팔눈은, 어느 가톨릭 실존주의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금강석에 난 영원한 흠을 암시했다. 나는 망연자실하여 그곳에 남아 있었다. 무엇보다 경악을 금할 수 없었던 건 두 개의 크고 흰 장롱처럼 보이는 천사의 두 날개였다. 그것들이 보일락 말락 파닥이는 것 같았다. 비상에 앞서, 아니면 하늘로부터 귀환한 뒤 잠깐 동안, 만차가 부드럽게 날갯짓을 하는 것 같았다. 이제 나는 두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책이라면 질겁하며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던 만차가 말년에 성스러움의 경지까지 올랐음을······ - P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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