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일로 진모가 개과천선해서 새 삶을 살 것이라는 교과서적인 기대는 일찌감치 버려야 할 것 같았다. 애시당초 진모에게는 새 삶이라는 것이 없을지도 몰랐다. 그 애에게는 삶이 바뀌는 것이 아니고 다만 역할이 바뀔 뿐이었다. 어떤 역할이 주어져도 진모가 해내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 애의 마음속에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은 그 애만의 우상이 존재하는 한은. - P188

상처 입은 사람들을 위로하는 것은 말이 아니었다. 상처는 상처로 위로해야 가장 효험이 있는 법이었다. 당신이 겪고 있는 아픔은 그것인가, 자, 여기 나도 비슷한 아픔을 겪었다, 어쩌면 내 것이 당신 것보다 더 큰 아픔일지도 모르겠다, 내 불행에 비하면 당신은 그나마 천만다행이 아닌가······.
나의 불행에 위로가 되는 것은 타인의 불행뿐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억울하다는 생각만 줄일 수 있다면 불행의 극복은 의외로 쉽다. - P188

우리가 얻은 방은 다행히도 온돌방이었다. 김장우와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상상은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침대라는 물건이 우리에게 줄 그 많은 이미지들을 어찌 감당할는지 나는 도저히 자신할 수 없었다. 마음이 이미지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가 우리들 마음을 이끌어버렸을 때 그 자괴감을 어찌 견딜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세속의 도시가 우리에게 가르친 것은 침대는 정신보다 육체를 더 많이 요구하는 침구라는 것이었다. 특히 숙박업소의 침대는 더욱 그랬다. - P192

"꽃을 사랑한다면, 당연히 그 이름을 자꾸 불러줘야 해. 이름도 불러주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냐." - P193

영규와 만나면 현실이 있고, 김장우와 같이 있으면 몽상이 있었다. 사랑이라는 몽상 속에는 현실을 버리고 달아나고 싶은 아련한 유혹이 담겨있다. 끝까지 달려가고 싶은 무엇, 부딪쳐 깨지더라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무엇, 그렇게 죽어버려도 좋다고 생각하는 장렬한 무엇. - P194

나는 시종일관 밖을 보았고 그는 운전하는 틈틈이 나만 보았다. 내가 너무 고집스럽게 바깥만 보았기 때문에 마침내 그도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나 나는 나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사랑이다, 라는 결론이 난 후부터 나는 나를 어찌해볼 수가 없었다. 김장우는 언제 이것이 사랑이다, 라는 결론을 내렸는지 나는 알고 싶었다. 그런 뒤에도 아무렇지 않았는지 그에게 묻고 싶었다. 나처럼 이렇게 누군가 발목을 붙잡고 잡아당기는 느낌, 가슴에 구멍이 뚫려 눈물이 나도록 외로운 느낌이 혹시 있었냐고 의논하고도 싶었다. - 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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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어쩌면 이 솔직함으로 나영규를 시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 안진진이라면 이런 도박쯤은 충분히 할 수 있을 만큼 교활하니까. 나는 마치 마지막 도박판에서 전 재산을 다 건 노름꾼처럼 굴고 있는 것이었다. 전부를 잃느냐, 아니면 전부를 얻느냐의 게임, 그러나 다 잃더라도 다음날이면 어딘가에서 다시 도박판을 벌이고 있을 노회한 노름꾼. - P157

나는 몹시 궁금했다. 그가 나영규이든 김장우이든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이든 간에, 이 사람과 결혼하고야 말겠어, 라는 결심은 언제 어떻게 생기는 것일까. 지금 결혼하여 살고 있는 다른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 P164

삶은 그렇게 간단히 말해지는 것이 아님을 정녕 주리는 모르고 있는 것일까. 인생이란 때때로 우리로 하여금 기꺼이 악을 선택하게 만들고 우리는 어쩔 수 없이 그 모순과 손잡으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주리는 정말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 P173

그건 옳지 못한 거야, 라는 주리의 관용구. 주리는 바로 그 관용구 밑에 숨어서 더 이상은 세상 속으로 나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주리는 내 아버지를 킹콩으로 비유했던 그 어린 시절에서 한 발자국도 더 성장하지 않은 것이었다. 나는 주리를 그만 이해하기로 했다. 탐험해봐야 할 수많은 인생의 비밀에 대해 아무런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주리 같은 사람도 있는 것이었다. 그것 또한 재미있는 인생의 비밀 중의 하나가 아니던가 말이다.
그날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이제 내 이종사촌들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나와 그들 사이에 너무나 많은 시간이 흘러버렸다는 것을. 그러나 그 많은 시간들이 우리들 사이의 소통을 위해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나는 절실하게 깨달았던 것이었다. - P178

"진진아, 미안해. 너보다 우리 자식들을 더 사랑해서··· 너한테 정말 미안해······."
참말이지, 이모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모는 전화선 저쪽에서 몰랐을 것이다. 이모의 마지막 말 때문에 내가 그 순간 왈칵 울어버렸다는 것을. 나는 울음을 감추기 위해서 얼른 전화를 끊었다. 벌써 가득 고여 흐르고 있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며 나는 창밖을 보았다. 거기 가을을 건너가고 있는 높고 푸른 하늘이 무심하게 세상을 굽어보고 있었다. - P180

나는 타인들 앞에서 ‘나‘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나를 장악할 수 없어 스스로를 방치해버리는 순간을 맛보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결단코 ‘나‘를 장악하며 한 생애를 살아야 할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못 했지만, 나는 해내야만 하는 것이었다. - P184

이것이 어머니의 마지막 독서는 아닐 것이었다. 그것은 짐작할 수 있지만 미래에 내 어머니가 읽어야 할 책이 무엇인지, 세상과 맞서 싸우기 위해 또 어떤 난해한 분야의 책들을 골라 읽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다. 다만 한 가지, 어머니는 결코 이모가 읽어왔던 그 많은 소설책이나 시집을 선택해 책값을 치르지 않을 것이란 점만은 분명했다. 이 쌍둥이 자매들은 똑같이 책에 의지하는 성향이 강한 편이었지만, 선택하는 책은 이토록이나 정반대였던 것이다. 마치 그들의 삶처럼. - P1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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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오순도순했던 외갓집 풍경도 아버지의 패악이 굳어지면서 점점 뜸하게 연출되었다. 가족 중 누구 하나의 불행이 너무 깊어버리면 어떤 행복도 그 자리를 대체할 수 없는 법이었다. 어머니도 점차 외갓집 발길을 끊었다. - P133

이모부는 그런 사람이었다. 비유하자면 이모부는 결혼해서 지금까지 삼십 년이 가깝도록 단 한 번의 결행이나 연착 없이 정시에 도착하고 정시에 출발하는 기차 같은 사람이었다. 기차라면, 쇠바퀴를 굴려 굽이굽이 강가도 달리고, 덜컹컹 산자락도 달리는 기차라면, 폭설 후에는 결행도 하고 마주 오는 다른 기차를 피하느라 연착도 좀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렇게 믿고 있는 세상의 다른 부류들한테는 이해받기 힘들겠지만 하여간 이모부가 생각하는 기차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모부의 기차는 굽이굽이 강가를 달리더라도 절대 한눈을 팔면 안 되고 마주 오는 다른 기차를 들이받고라도 다음 역에 늦게 도착 하면 안 되는 기차였다. - P141

이모와는 특별했지만 나는 이종사촌들과는 그리 각별한 사랑을 나누지 못했다. […] 철이 들어 서로 교류를 나눌 수 있을 만한 나이에 이르러서는 그들 둘 다 유학을 떠나버렸다. 유학을 가지 않았다 하더라도 나는 이종사촌들과 공유할 만한 추억을 만들지 못했을 것이다. 철이 든다는 것은 말하자면 내가 지닌 가능성과 타인이 가진 가능성을 비교할 수 있게 되었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었다. 나 또한 내 어머니처럼 이종사촌들이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대해 도저히 대범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내가 어머니와 달랐던 점은 이종사촌들에 대한 질투심을 감쪽같이 잘 숨기며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그것마저 숨기지 못하고 여기저기 질질 흘렸다면, 만약 그랬다면 내 인생은 더 이상 볼 것도 없는 완벽한 실패작이었을 것이다. - P142

그러나 그 순간 나는 미소 짓는 주혁의 얼굴에서 이모부의 얼굴을 읽어냈다. 지난 4월 프랑스 레스토랑에서 내가 보았던 이모부의 의례적인 미소가 거기 있었다. 아니, 불발이나 연착 따윈 죽어도 용납하지 않는, 그래서 인생을 심심하게 만드는 이모부의 얼굴이 아들인 주혁에게 고스란히 옮겨져 있는 것이었다. 그랬다. 주리와 주혁이는 이모의 자식이기도 했지만 역시 엄연한 이모부의 자식들이었다. 나와 진모가 어머니의 자식이면서 아버지의 삶으로 많은 부분 규정지어진 것처럼. - P145

쓰러지지 못한 대신 어머니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었다. 소소한 불행과 대항하여 싸우는 일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 무릎을 꿇는 일이 훨씬 견디기 쉽다는 것을 어머니는 이미 체득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생애에 되풀이 나타나는 불행들은 모두 그런 방식으로 어머니에게 극복되었다. 불행의 과장법, 그것이 어머니와 내가 다른 점이었다. 내가 어머니에게 진저리를 치는 부분도 여기에 있었다. 그렇지만 어머니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과장법까지 동원해서 강조하고 또 강조해야 하는 것이 기껏해야 불행뿐인 삶이라면 그것을 비난할 자격을 가진 사람은 없다. 몸서리를 칠 수는 있지만. - P152

그 애를 그렇게 방치할 수 없었다. 푸르른 일몰의 시간, 사방에서 저녁 짓는 연기가 올라가고 있는 그 시간, 그 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지 말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우리들은 아버지의 자식들이었고 그랬으므로 푸르른 일몰의 시간은 숙명적인 우리의 아킬레스건이었다. - P153

지난 몇 년 동안의 평화를 어떻게 견디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어머니는 이 불행을 해결하는 데 온갖 신명을 다 내고 있었다.
벽을 붙잡고 절규를 하며 울부짖던 어머니의 과장법은 이렇게 쓸모가 있었던 것이었다. 부풀릴 수 있을 만큼 한껏 부풀려놓은 불행에서 이처럼 맵시 있게 빠져 나오는 어머니. 8월에 보는 어머니는 역시 과장법의 대가였다. 나는 진실로 어머니에 대해 감탄했다. - P156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솔직함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 솔직함은 때로 흉기로 변해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 부메랑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 P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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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서 몇 밤을 지내고 서울로 돌아오면 며칠 동안 적응이 안 돼. 돌아가고 싶어지지. 산새 소리, 풀잎 눕는 소리, 계곡물에 바람 스치는 소리, 두고 온 그런 것들 생각 때문에 오래 마음이 심란해지지. 도시는 나를 불안하게 해. 어디에 있어도 내 자리가 아니어서 불편해." - P117

"형이랑 같이 살 때, 난 밤마다 기다렸다가 형이 벗어둔 양말을 깨끗이 빨아서 널어놓은 뒤에야 잠을 잤지. 냄새나는 형의 양말, 나 때문에 더욱 냄새가 날 수밖에 없는 그 양말을 주물러 빨고 있으면 그렇게 마음이 편했어. 지금도 형 집에 가면 형수 몰래 가끔 형 양말을 빨아주고 돌아와."
착하고 착한 김장우. 나는 ‘그날 오후‘에서 하염없이 술을 마신다. 하염없이 마셔도 아버지를 닮은 나는 조금도 취하지 않았다. 그래도 김장우는 계산을 마치고 나서 얼른 나를 부축했다. 그럴 필요는 조금도 없었는데, 가슴만 뜨거울 뿐 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였다. 맥주라는 술 따위에 정신을 앗긴다는 것은 이 안진진에겐 치욕이었다. - P119

그 밤, 어디로 어떻게 달려서 집으로 돌아왔는지 나는 모른다. 대문 앞 외등에 비춰 본 내 손목시계는 아직 열시도 채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사랑의 인사를 나누었던 젊은 남자와 여자가 헤어지기에는 너무도 이른 시각이어서 나는 잠시 어이가 없었다.
대문 옆 담장에 기대어 나는 피식 웃었다. 김장우는, 그 남자는, 왜 자신의 고물차에서 나를 내려놓을 장소가 여기뿐이라고 생각했을까······. 나는 왜 갑자기, 어딘가에서 그 남자의 냄새나는 양말을 깨끗이 빨아놓고 잠들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까······. - P120

이모의 초대를 전하면서 어머니는 애써 심드렁한 척한다. 외국에 나가 있던 주리와 주혁이 돌아왔고, 시장이 노는 날이고, 게다 가 이모부가 출장으로 집을 비운다는 세 가지 조건이 다 맞아떨어졌으니 아니 갈 수가 없다는 식이다.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잘사는 이모가 가난한 어머니한테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두 사람 사이의 내왕은 완전 불가능이다. 이모는 어머니가 변했다 하고, 어머니는 이모가 변했다고 그랬다. 내가 보기엔 두 사람 다 변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상대의 삶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쌍둥이의 숙명이라는 것을. - P124

사람들은 작은 상처는 오래 간직하고 큰 은혜는 얼른 망각해버린다. 상처는 꼭 받아야 할 빚이라고 생각하고 은혜는 꼭 돌려주지 않아도 될 빚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장부 책 계산을 그렇게 한다. - P127

"양보? 네가 양보한 것이 무엇인 줄 알기나 해?" 아무리 결혼 몇 년 만에 싸움닭처럼 거칠어진 어머니라 해도 차마 뒷말만은 더 이상 잇지 않았다. 너는 이 지긋지긋한 불행을 내게 양보한 대신 알짜만 가득한 행복을 넘겨받은 것이라고. - P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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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알게 되었던 것이다. 화살표가 어긋날 것을 두려워하는 출연자들이 최선책보다 차선책을 더 많이 선택한다는 것을. 그게 아니라면 대개의 출연자들은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이성을 선호한다는 것을. 그래서 천하의 매력남이나 매력녀는 의외로 불발이 많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별 볼 일 없이 생긴 출연자라 해도 화살표를 받는 일에 큰 애로는 없다. - P101

나는 두 남자를 놓고 종종 화살표 긋기를 해본다. 먼저 조심스럽게 나영규한테 화살표를 보내본다. 그러다 움찔 놀라 화살표를 북북 지워버린다. 김장우 대신 차선책인가··· 그래서 이번에는 김장우를 향해 화살표를 주욱 긋는다. 그렇다면 김장우와 내가 비슷한 수준의 인생들이란 말인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 나는 스스로가 놓은 덫에 걸려버린 것이었다.
내가 이러고 있을 때 이미 갈등 한 번 없이 직진으로 내게 화살표를 보낸 사람은 나영규였다. 지나간 한 달이 내게 의미심장했던 것도 사실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확고하게 마음을 정했다고 했다. 처음부터 그랬다고 했다. 망설임 끝에 희미하게 화살이 날아왔다는 자국만 남기고 있는 쪽은 김장우였다. 김장우라는 사람, 원래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 P101

희미한 존재에게로 가는 사랑.
이렇게 말하면 보다 정확해질지도 모르겠다. 강함보다 약함을 편애하고, 뚜렷한 것보다 희미한 것을 먼저 보며, 진한 향기보다 연한 향기를 선호하는, 세상의 모든 희미한 존재들을 사랑하는 문제는 김장우가 가지고 있는 삶의 화두다. 나는 그렇게 느낀다. 그래서 그는 세상을 향해 직진으로 강한 화살을 쏘지 못한다. 마음으로 사랑이 넘쳐 감당하기 어려우면 한참 후에나 희미한 선 하나를 긋는 남자. - P102

"이건 큰들별꽃. 다음 장소로 이동하느라고 계곡을 건너다가 기슭에서 이 꽃을 발견했는데······.
김장우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놀라 쳐다보니 눈에 눈물이 글썽글썽했다.
"푸른 잎사귀 속에 숨어서, 저토록 아련한 큰들별꽃들이, 깜박 깜박 조용히 빛나고 있는 거야. 안진진. 나, 그냥 울어버렸다. 너무 작아서··· 아니, 저 홀로 숨어서 이렇게 아름답게 살아도 되는가 싶으니까 무지 눈물이 나대······." - P103

김장우는 사진을 봉투 안에 정성스럽게 담아 내 쪽으로 밀어놓았다. 그리곤 괜히 민망해서 시선을 이리저리 황망하게 돌렸다. 김장우와 만나면 나는 이렇게 선명해진다. 그는 희미한 것들을 사랑하고 나는 가끔 그것들을 못 견뎌한다. - P104

큰들별꽃 사진은 그날로 내 방 벽의 가장 중심에 걸렸다. 그 좌우로 실꽃풀과 흰젖제비꽃도 걸었다. 한결같이 흰 꽃을 피우고, 한결같이 가냘프고 가냘퍼서 센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가 버릴 듯 존재가 애매한 저 꽃들을 필름에 담기 위해 열흘씩이나 산과 들을 헤매는 사람, 김장우. - P104

"안진진. 인생은 한 장의 사진이 아냐. 잘못 찍었다 싶으면 인화 하지 않고 버리면 되는 사진하고는 달라. 그럴 수는 없어." 하긴 그랬다. 사진은 정지된 하나의 순간이고, 인생은 끝없이 흘러가는 순간순간들의 집합체인 것을, 멈춰놓고 들여다볼 수 있는 게 아닌 것을······. - P106

저 웃음. 그는 모든 말과 말 사이를, 모든 행동과 행동 사이를 언제나 웃음으로 연결 짓는다. 마치 수채화 붓으로 연푸른 선 하나를 짧게 긋듯이 씨익······. - P108

나영규의 활짝 웃음이 옆 사람까지도 웃게 만드는 전염성 강한 것이라면 김장우의 수채화 웃음은 여운이 길어 웃음이 끝난 뒤에도 계속 생각나게 만드는 묘한 웃음이다. - P110

김장우는 세상 돌아가는 이치에는 아무런 관심도 흥미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이 무엇인지도 나는 잘 몰랐다. 나영규라면 그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나는 자신한다. 하지만 김장우라면, 아무 때나 씨익, 수채화 붓질하듯이 한 번 웃고는 얼른 입을 다무는 저 남자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들어있는지 유추하기란 몹시 어렵다. - P111

나는 마음속으로 조금 움찔한다. 착하고 착한 우리 안진진, 이라고 말하는 남자 앞에서는 더욱 착해지고 싶은 것이다. 또, 그런 남자를 배신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게 되는 것이다. 김장우가 나한테 거는 주문은 이것이다. 착하고 착한 안진진······.
나는 착한 인간이 아니었다. 통나무집에서의 식사를 마친 후 다시 ‘그날 오후‘라는 카페를 찾아 장흥으로 넘어가는 시골길을 택하는 것만 보아도 나의 교활함은 여실히 증명되는 것이었다. 통나무집에서 김장우가 다시 밥값이 모자라는 난처한 경우를 당할 까봐 내가 먼저 계산을 하는데도 어, 하는 표정을 짓다 말고 휘적 휘적 나가버리는 그에게 잠시 화가 났던 것만 보아도 나는 착하지 않았다. - P115

비비추 무더기의 이곳저곳에 렌즈를 들이대면서 김장우는 어쩔 줄을 모른다. 나는 그늘에 서서 그가 일하는 모습을 구경한다.
처음이었다. 깊은 산 숲 속에서도 제 흥에 겨워 저렇게 혼잣말을 하며 사진을 찍을까. 숨어있는 야생화들을 찾아 온종일 걷다가 어느 순간 큰들별꽃 같은 작고 소박한 꽃을 만나면 눈물이 나기도 하겠지. 아무도 없이 너 홀로 이렇게 아름다워도 되느냐고 꽃을 쓰다듬으며 울 수도 있겠지······. - P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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