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들이 많이 죽었을 거라고 했어. 그즈음 히로시마에는 조선인들이 많았다구.
[…]
그러던 사람이 나를 붙잡고 그러는 기야. 희자 어마이, 내레 더이상 기도를 못하겠어. 천주님, 그때 뭐하고 계셨어. 어린아이들, 죄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찢겨 죽어가는 동안 뭐하고 계셨더랬어.
[…]
회자 어마이, 전지전능한 천주님이 왜 손을 놓고 계신 기야. 나는 슬퍼만 하는 천주님께 속죄하고 싶지 않아. 천주님 앞에서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말하고 싶지 않아. 천주님이 정말 계신다면 그때 뭐하고 계셨느냐고 따지고 들고 싶어. 예전처럼 무릎 꿇고 천주님, 천주님 감사합니다. 말하고 싶지 않아. 기래, 나를 살려주셨지. 기래서 감사하다고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 목숨은 뭐가 되나.
[…] 예전의 희자 아바이였다면 천주님께 감사합니다. 이렇게 살아서 조선으로 올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했을 텐데, 희자 아바이는 천주님한테 사과받고 싶댔어. 그게 얼마나 무서운 소리간. - P123

삼천아, 내 너한테 허풍을 떨었다. 희자 아바이가 곁에 있는 시간이 짧아도 괜찮다고 했지. 아예 다시 보지도 못하고 헤어지는 것보다 낫다면서. 그런데 아니야. 희자 아바이가 고통받는 모습을 보는 거이 내가 할 짓이 아니구나. 지옥이 있대두 이보다 더할 수는 없을 기야, 삼천아.
내가 허풍을 떨어도 심하게 떨었어. 난 이걸 버틸 수가 없다. 버틸 수가 없어.
삼천아, 희자 아바이를 기억해줘. 그게 희자 아바이 유언이다. 희자 아바이를 기억해줘, 삼천아. - P125

희자 아바이 묻어주고 오는 길에 하늘에 뜬 낮달을 봤다. 아, 희자 아바이가 이제 그 고운 눈으로 저 달을 보지 못하갔구나. 푸른 하늘두, 5월의 보리밭두, 우리 희자두······ 그 좋아하는 것들을 보지 못하갔구나. 울면서 한참을 타박타박 걷다보니 달이 나를 앞서 걷는 것 같지 않갔어. 마치 내게 할말이 있는 것처럼. 기래 뭐이야, 하구 달을 보는데 그 둥근 달이 하늘로 가는 문처럼 보였다. 저 문을 열고 들어갔겠지······ 우리 희자 아바이······ 저짝으로 가서 그렇게 미워하고 사랑하는 천주님 얼굴 보았구나······ 그런 생각이 그 어떤 의심도 없이 들었어. 내 고저 이런 생각을 하구 희자 아바이 보내고 있어.
삼천아, 보고 싶어. 이게 뭐라고 너에게 편지로도 말하지 못했을까. 항상 건강해야 한다, 우리 삼천이. - P128

"젊은 애를 잡아두고서 편지나 읽게 시키구."
"아니에요. 나중에 더 읽어드릴게요."
"고맙구나."
할머니는 그렇게 말하고 내 손등에 손가락을 살짝 올려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고른 숨을 쉬면서 잠들었다. 나는 내 손등 위에 놓인 할머니의 손가락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컵을 챙겨 부엌으로 갔다. 설거지를 하고 큰방으로 돌아와 할머니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바라봤다. 반듯이 누운 자세에서 고개는 왼쪽으로 조금 기울어져 있었고 입을 작게 벌리고 있었다. 미간의 주름 때문에 심각한 꿈을 꾸는 것처럼 보였다. 돌담 아래에서 새비 아저씨를 부르며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그리움을 묻어야 했을 열두 살 영옥의 모습이 이 얼굴 어딘가에 숨어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한쪽에 놓인 담요를 가져다가 할머니에게 덮어주었다. 그러고 조용히 밖으로 나와 현관문을 닫았다. - P129

우리는 둥글고 푸른 배를 타고 컴컴한 바다를 떠돌다 대부분 백 년도 되지 않아 떠나야 한다. 그래서 어디로 가나.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했다. 우주의 나이에 비한다면, 아니, 그보다 훨씬 짧은 지구의 나이에 비한다고 하더라도 우리의 삶은 너무도 찰나가 아닐까. 찰나에 불과한 삶이 왜 때로는 이렇게 길고 고통스럽게 느껴지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참나무로, 기러기로 태어날 수도 있었을 텐데, 어째서 인간이었던 걸까.
원자폭탄으로 그 많은 사람을 찢어 죽이고자 한 마음과 그 마음을 실행으로 옮긴 힘은 모두 인간에게서 나왔다. 나는 그들과 같은 인간이다. 별의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이 빚어내는 고통에 대해, 별의 먼지가 어떻게 배열되었기에 인간 존재가 되었는지에 대해 가만히 생각했다. 언젠가 별이었을, 그리고 언젠가는 초신성의 파편이었을 나의 몸을 만져보면서. 모든 것이 새삼스러웠다. - P130

"이상한 일이야. 누군가에게는 아픈 상처를 준 사람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정말 좋은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게." 그렇게 말하는 엄마를 보며 나는 엄마의 마음을 짐작하려고 노력했다. 엄마는 별다른 감정 없이 나지막하게 이야기했지만 화가 난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런 말을 해야 하는 상황 자체에 지쳐 보이기도 했다. - P134

엄마는 일평생 내게 기대하고, 실망했다. 너 정도로 똑똑하고 너 정도로 배운 사람이라면 응당 자신은 꿈도 꿔보지 못한 삶을 사는 게 마땅하다는 것이 엄마의 주장이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가진 것 별로 없는 그와 결혼한다고 했을 때 엄마는 내게 크게 실망했지만, 내가 결혼을 하고 정상 가족을 꾸린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하는 것으로 마음을 돌렸다. 엄마는 사위를 살뜰히 챙겼다. 우리가 우리의 가족을 잘 굴려나가서 남들 보기에 그럴듯한 모습으로 살기를 기대했다. - P135

나는 엄마의 그 작은 기대마저도 충족시키지 못했다. 엄마를 철저히 실망시켰다. 엄마에게 인정받기를 기대하고 번번이 상처받기보다는 내 일에서 인정받고 친구들에게 지지를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머리로는 아는 일을 내 가슴은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자식은 엄마가 전시할 기념품이 아니야.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소리치면서도, 엄마의 바람이 단지 사람들에게 딸을 전시하고 싶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마음이 아팠다. - P136

천천히 올라왔는데도 엄마는 밭은 숨을 쉬고 있었다.
"열심히 운동해야겠어, 엄마. 멕시코 가려면."
"응, 그때까지 열심히 걸을 거야."
"약속해."
" 약속할게."
엄마는 나를 보며 무안한 듯 웃어 보였다. 그런 엄마가 예전처럼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보는 엄마의 표정에서 엄마 또한 내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다는 걸 알아챌 수 있었다. 예전처럼 며칠씩 서로 말도 붙이지 않을 정도로 신경전을 벌일 만한 일이 우리에게는 더이상 없었다. 큰불이 나기 전에 꺼버렸고, 상대에게 작은 불씨를 던졌다는 것에 문득 무안해지기도 하는 사이가 된 것이었다. 그건 우리가 그만 큼 친밀한 사이가 아니라는 뜻이기도 했다. 서로에게 큰 상처를 입혔다가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우리는 눈빛으로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더이상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정말 끝이 날까봐 끝까지 싸울 수 없는 사이가. 우리는 싱거운 이야기를 나누면서 산을 내려왔다. - P136

할머니는 그때의 희자가 지금 여기에 있으면 언니 기억나우? 물으며 새비 아저씨와 함께 연을 날리던 일을 이야기할 것 같다고 말했다. 함께 만든 연을 들고 언덕 위에 올라가서 바람을 맞으며 앞으로 달려 가던 아저씨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다고. 그때 희자와 할머니가 얼마나 깔깔대며 웃었는지, 겨울바람에 얼굴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얼마나 오래 연 놀이를 했었는지 이야기할 것 같다고 말이다. 그러면 할머니도 희자야, 나도 기억난다, 하고는 희자를 보며 같이 웃었으리라고.
나는 희자가 높은 하늘에 연을 띄우듯이, 기억이라는 바람으로 잊고 싶지 않은 순간을 마음에 띄워 올리곤 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런 바람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일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으리라고 짐작하면서. - P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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