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명이 넘는 사람들의 퉁퉁 부어 반질거리는 얼굴이 햇빛 아래에 이르자 허공에 걸린 물주머니 같았다. 한낮의 마당에서는, 겨울이었지만 바람이 없어서 지면 위로 나른하게 따뜻함이 흘렀다. 99구 바깥의 광야에서 아직 녹지 않은 눈이 햇살을 받아 눈부신 빛을 반사해냈다. 사람들은 허기 때문에 현기증이 나서 멀리까지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저 발밑의 반쯤 마르고 반쯤 젖은 회색 모래땅을 보고 위에서 내려온 가장 높은 상부의 헝겊신을 볼 뿐이었다. 입구가 뾰족하게 파이고 검은색인 신발은 손바느질로 꿰맨 밑창이 눈처럼 하얬고, 밑창 옆에 사람들이 눌러 죽인 이의 피처럼 붉은 모래알이 묻어 있었다. 그는 자를 세워놓은 듯 똑바로 날이 선 회색 모직 바지를 입고 있었다. - P388
어두워지기 직전의 마지막 붉은빛이 땅에 피처럼 스며들었다. 배고픈 나비가 피 바닥 위를 나풀나풀 날아가는 것처럼 학자가 붉은 피를 밟으며 걸어갔다. 뱃속에서 위장이 전부 물에 휩쓸려 내려갈 듯 꼬르륵 꾸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배가 고프다 못해 장이 뜯기듯 아팠다. 학자는 배를 움켜쥐고 힘껏 눌러 온몸의 힘을 다리와 발로 모으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참새 한 마리가 아이의 숙사 입구에서 먹이를 찾고 있었다. 학자는 참새를 통째로 삼키고만 싶었다. 그래서 침을 꿀떡 삼킨 뒤 걸음을 멈추고 돌을 하나 집어 참새에게 던졌다. 하지만 호두만 한 돌은 참새 근처는커녕 멀찍한 곳에 떨어졌다. 돌 하나를 제대로 던질 힘마저 없었다. 참새가 학자를 보며 비웃듯 짹짹 하고는 날아갔다. - P397
종교가 아이의 얼굴을 힐끗거리며 오른손으로 성모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후벼 팠다. 정말로 성모의 눈에 구멍이 뚫리고 눈동자가 종잇조각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종교가 성모의 다른 눈동자를 파내려 할 때 아이의 붉누른 낯빛이 검푸르게 변했다. 아이가 몸을 비틀어 사발의 콩을 움켜쥐고는 종교의 몸과 얼굴에 던졌다. 종교가 성모의 두번째 눈동자를 파내기 전에 볶은 콩이 그의 얼굴과 몸에 부딪혀 방 안 곳곳으로 튀었다. 아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매섭게 종교의 손을 노려 보았다. 종교가 깜짝 놀라 눈동자를 후비던 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다시 아이의 얼굴을 힐끗거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황급히 꿇어앉아 콩을 줍기 시작했다. 줍는 동시에 입으로 집어 넣었다. 콩을 씹는 소리가 석판에 못을 박는 것처럼 울렸다. - P401
이미 6개월이나 밀가루를 맛보지 못한 터라 그게 어떤 맛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하얀 만터우 반 개를 자세히 살필 새도 없이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마르고 딱딱한 만터우 덩어리에 목이 메었지만 이내 침이 딱딱한 만터우로 스며들자 회백색을 띠는 만터우의 볶은 참깨 같은 향기가 생생하게 살아나면서 입속을 휘감았다. 잇몸과 혀끝, 온몸의 위장이 부들부들 떨리는 통에 나는 향기를 제대로 음미할 틈도 없이 마른 만터우를 덥석덥석 베어내 뱃속으로 삼켜버렸다. 하얀 만터우 반 개를 다 먹은 뒤 이 사이에 남은 만터우 부스러기에서 비로소 만터우에서 났던 게 참깨 향이 아니라 밀가루 녹말과 땅콩기름이 한데 섞인 새하얗고 새빨간 냄새였음을 알았다. 그 맛을 음미하면서 학자 침대 앞에 잠시 멍하니 있었다. 만터우를 먹고 나자 진귀한 물건을 잃어 버린 것처럼 아쉬웠다. - P415
아이의 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 그리고 음악이, 연기자가 무대 뒤편에서 무대 위로 걸어 올라오는 것처럼 그 문에서 나왔다. 나보다 한발 먼저 돌아온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방금 거친 벌판에서 돌아갈 때만 해도 그녀는 평소처럼 짙은 남색의, 소맷부리가 해져서 녹색으로 덧댄 낡은 웃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잠깐 동안 그녀는 짙은 남색의 낡은 웃옷을 벗고 용광로에 갈 때마다 입던 담홍색의 깃이 짧고 허리가 잘록한 제복에 능직으로 짠 바지를 입고 입구가 네모나고 끈으로 장식된 무명 벨벳의 검정 헝겊신을 신었다. 음악이 지나간 자리에 콜드크림 냄새가 8월 계수나무 꽃이 눈앞에 피어난 것처럼 남았다. - P420
나는 고개를 돌려 얼른 아이의 문을 바라보았다. 음악이 문을 닫는 순간, 꽃 때문에 불타는 듯 붉은 아이의 침대 위에 또 종이를 잘라 만든 커다란 붉은 꽃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아이의 여원 그림자가 침대에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내 경쾌하게 문이 닫혔다. 내 시선이 칼로 싹둑 잘린 것처럼 문밖에서 끊어졌다. 나는 다시 햇살 아래에서 꼿꼿하게 거니는 수면 위의 불그스름한 수양버들 같은 음악의 날씬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P420
음악에 대한 미움인지, 아니면 젊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질투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만터우나 식량이 있다는 것 때문에 앞쪽 담벼락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내 감정은 한여름 발효가 끝난 똥통에서 나는 냄새처럼 시큼하고 구린 데다 강렬하기까지 했다. - P421
너무 추워서 사람들은 풀씨를 찾아 황무지로 나가지 못했다. 벌판에서 바람이 불면 바람에 날려 황량한 들판에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쓰러지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만 같았다. 황허 강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낮에는 남자가 천지를 원망하며 우는 것처럼 웅웅 하는 회백색 소리를 냈고, 밤에는 여자가 무덤 앞에서 곡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를 냈다. - P430
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릴 수 있을 만큼 바람이 거셌지만 땅에는 나무가 없었다. 풀뿌리를 전부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이었지만 주변 몇 리 내의 풀뿌리는 전부 사람들 뱃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바람은 땅 위의 모래만 말아 올릴 수 있어서 거대한 이불이 세상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태양이 사라지고 달도 사라졌다. - P431
"남자들, 누구든 와서 시체 드는 것 좀 도와주세요. 도저히 못 들겠어요!" 나와 학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고함이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실에 매달려 하늘 위를 나풀거리는 연 같았다. - P438
음악이 지면의 냉기에 닿지 않도록, 또 사체가 꽁꽁 얼어붙지 않도록 일단 무덤에 뉘어 온기를 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음악을 구덩이로 옮기려 하자 어찌나 무거운지 들 수가 없었다. […] 푸르스름하게 얼은 음악의 얼굴을 살피다 아주 힘껏 이를 악 문 것처럼 음악의 치아가 꼭 맞붙은 것을 발견했다. 이 사이로 이를 가는 듯한 서늘한 소리마저 새어 나왔다. 또 그녀의 타원형이던 얼굴이 오이처럼 길어져 꼭 파란 오이에 얼음이 맺힌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수많은 원망과 근심이 보였다. 풀지 못한 일이 너무도 많은데 살아 있을 때는 말하지 못하다가 죽은 다음에 얼굴에 전부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 얼굴의 의문들이 모두 내게로 향하는 것 같아 가슴이 서늘해지고 몸도 공연히 위축되었다. 그 비틀리고 달라진 얼굴을 마주한 채 반쯤 감긴 눈에서 모호하고 매혹적인 빛을 보면서, 마음이 얼어붙고 위축된 탓에 다리가 조금 떨려왔다. - P457
사실 나, 작가는 죽음도 두렵지 않고 시체 따위도 두렵지 않았다. 99구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굶는 것만 두려워할 뿐 더 이상 시체나 죽음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이 무덤가에서 굳어가면서 내가 옮기는 것을 거부한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이 파란 오이처럼 변하던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몸을 떨었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음악 앞에서 멍하게 굳어 있다가 위로의 말을 몇 마디 했다. 땅거미가 지기 전의 서늘함이 느껴지고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갈 때 정말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 또다시 떠올랐다. - P458
내 몸에서 살점을 떼어내야겠다는 생각이 일단 생겨나자 점점 강하게 나를 옥죄었다. 나는 목석처럼 멍하니 서서 내 살점을 베어내는 극심한 고통과, 뒤이어 따라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홀가분함이 내 몸에 급속히 퍼져 몸을 잠식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갑작스럽게 내 머릿 속으로 뛰어 들어온 그 생각을 꼭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생각에 얽매이면서 두 다리가 터질 듯 덜덜 떨림에도 불구하고 그 떨림 뒤에 올 쾌감과 홀가분함에 한겨울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듯 마음이 녹아내렸다. 내 마음과 몸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과 상념에 휩싸였다. - P462
나는 꼭대기의 밀알이 핏물 속에서 젖 달라고 우는 아이처럼 앵앵거리는 것을 보았고 밀 잎이 붉은 비 속에서 거문고를 뜯듯 핏물을 주르륵 쓸어냈다가 쓸어 올리는 소리를 들었다. 짙은 피비린내는 달콤하고 촉촉한 빗속에서 옅어진 뒤 가느다란 밀 내음에 섞여 산뜻한 향기가 되어서는 내 주위를 휘감으며 퍼져나갔다. 마침내 나 스스로에게 독수를 뻗쳤다. - P467
학자는 그렇게 고기를 씹고 국물을 마시면서 그릇에 콩을 한 줌 넣어 불리기까지 했다. 먹는 모습 따위는 신경도 쓰는 않는 게 전혀 학자답지 않았다. 그의 입에 시선을 맞추고 내 살이 그의 이 사이에서 찢기는 걸 보고 있을 때 은홍색 소리가 그와 나 사이에 울려 퍼졌다. 그의 쉬지 않고 움직이는 입술 때문에 눈이 아파왔다. 눈가부터 시작해, 막 옅어졌던 통증이 다시 그의 이 사이에서 내 온 몸으로 퍼지고 두 다리로 떨어졌다. 내 두 다리가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척추에서 또다시 근육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 P473
방 안의 햇살이 누군가 침대보를 벗기는 것처럼 움직이고 흔들렸다. 창틀 아래의 불도 완전히 꺼져서 두꺼운 재 속에 붉은 기운만 남았다. 학자가 거의 먹고 마셨을 때 온몸의 떨림과 수축이 안정되면서 등뼈의 냉기와 비틀림도 따라서 옅어졌다. 목욕한 것처럼 몸이 상쾌해졌다. 그때 내 머릿속의 그 가시가 완전히 뽑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한 것은 학자와 음악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빌려 내 머릿속의 가시를 뽑기 위해서 였음을 알았다. 감격스럽고 따스해지면서 그들이 나를 구한 것같이 느껴졌다. - P474
햇살이 좋았다. 하늘에 하얀빛이 가득했다. 천사가 춤추는 것처럼 구름이 나풀거렸다. 그날은 날씨가 봄날처럼 따스하고 아득히 천만 리까지 보였다. 멀리 황허 강변으로는 호수의 침묵처럼, 대지에 깔린 비단처럼 적막이 떠다니고 가까이로는 먼지와 모래가 풀썩거리며 대지를 덮었다. 그렇게 땅의 일부가 되었다. 바깥으로 통하는 길이 살포시 빛나는 끈 같았다. - P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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