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계속 그려내는 게 프로라면···
제게 그럴 힘은 없어요···
예전에 한번 큰맘 먹고 창작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치워봤거든요.
그랬더니 만화 바깥의 모든 세계가 선명하게 보였어요.
무척 아름다운 곳이구나,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어서···
스스로 납득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쪽 세계를 바라다보고 싶어졌어요.

8년간의 연재가 끝이 나도···
다음주면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다음 호가 진열되고···
그런 당연한 사실에 약간 상처받는 내 모습에···
진절머리가 나. - P150

–초사쿠 씨가 먼저 말씀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이가 군에게 부탁해서 연재를 끝내셨다고···
–요즘 좀 궁지에 몰렸거든···
내 신세에 그러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뭐 침울한 마음도 있지만···
동시에 엄청난 해방감도 느껴··· - P151

–날이 갈수록··· 두려워집니다.
존경하는 작가님들께 돌이킬 수 없는 결례를 범하는 건 아닐까··· 불안해집니다.
수지타산을 고려하지 않고 제멋대로 밀어붙인 것,
지금은 마음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설령 그 책이 나오지 못해도, 시오찡을 탓하는 사람은 없을걸.
다들 그럴 각오로 의뢰를 수락한 거야.
적어도 나는 시오찡이 나한테 제안해준 게 내심 기뻤어. - P153

–네코야마 쿠모타로···
그 사람 별일 없죠?
–네!
네코야마 선생님께서는 정정하십니다.
신작도 집필하고 계세요.
–그가 방금 이야기한··· 만화를 그리던 친구예요. - P164

–그 녀석, 평소에는 로맨틱하고 느긋하지만 만화를 그릴 땐 사람이 바뀌잖아요?!
–네! 정말 딴사람이 된 것처럼···
이번 작품도 대단히 집중해서 몰두하고 계십니다.
벌써 콘티도 네 번이나 다시 그리셨죠···
–그래요···
하나도 안 변했네··· - P166

나도 여기서 50년 동안 아내와 둘이 서점을 운영하면서···
아들이 대를 이어주길 바랐지만 집을 나가는 바람에··· 후후···
나름대로 좋은 일, 나쁜 일 참 많았죠
그리고 그동안
쿠모타로는 분명 본인이 가진 마법 전부를 만화에 쏟아온 거겠죠··· - P167

아까 작가 라인업을 보니 떠오르더군요.
시오자와 씨, 일전에 당신이 만들었던
『코믹 밤』···
전 굉장히 좋아했습니다.
다음 책도 기대할게요.
힘내요. 시오자와 씨. - P1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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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오는 밤에는 토오루랑 둘이서 새벽 내내 만화를 그렸어···
눈이 온갖 소리를 빨아들여 적막하기 그지없는 밤에는···
마치 지구에 우리 둘 뿐인 듯한 기분이 들었지···
여름은 완전히 딴판이었어.
모든 게 눈부시게 빛을 발하니···
이곳의 여름은 마치 토오루처럼 빛났지. - P21

있잖아, 토오루···
이 세상에 우리 둘만 있던 건 아니었나봐··· - P29

하지만 그 녀석이 다시 잡지를 만든다는 소문을 들으니···
마음이 왠지 모르게 술렁거린단 말이죠.
응원하고 싶을 만큼 기쁘다가도···
잘될쏘냐 분한 마음이 일어서··· - P49

작년에 우연히 들른 헌책방에서 선생님의 『폰타의 일상』을 발견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으니, 예전과는 전혀 다른 울림이 있더군요···
진실된 작품은 읽는 이의 심경이나 성장에 따라
완전히 다른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는 걸 새삼···
곱씹게 됐습니다.
정보가 넘쳐흐르는 요즘 같은 시대라서 더욱, 선생님의 작품이 꼭 필요합니다. - P54

–뭐라고 해야 하나··· 당했다고나 할까···
–당했다고요?
–나, 딴사람 만화는 잘 안 읽는데···
오는 길에 그 녀석 만화를 읽어 봤더니···
기세가 만만치 않더군.
한 꺼풀 벗은 느낌이라···
뭐랄까. 지금 나보고 이런 걸 그릴 수 있는지 묻는다면··· - P76

–팔리는 작가는 그런 생각을 하는군요···
대단 하세요···
–대단 하단 건 또 뭐야? 너도 그런 적 있을 거 아냐?
–글쎄요··· 저는 누가 봐도 사회 부적응자 라서···
좋아하는 만화를 하루종일 그릴 수 있고···
그걸 좋아해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하고
그것만으로도 제겐 기적이에요···
고마운 마음뿐이라···
그외의 것들은 딱히 생각해본 적 없는 것 같아요··· - P77

루나는 아빠 만화에 나오는 사람 중에 토고 씨가 제일 좋아.
덩치는 크면서 홈런은 한 번도 못 치구··· 수비도 구멍이잖아?
그래서 늘 벤치 신세인데도 항상 싱글벙글 웃고 있는 게···
되게 멋있어. - P84

–꿈을 꾸는 듯 매일이 즐거웠어. 정말로..
평생 선생님의 어시로 일하고 싶다고 진심으로 생각했거든.
–할 만큼 하신 거 아닐까요?
그 시절 미키 선생님의 만화는 완벽하고 멋졌잖아요.
–고럼.
–두 분은 그때 이미 궁극의 만화를 만들어내신 거예요. 부럽습니다.
–핫··· 과연 그럴까?
어쨌든 난 엄청 좋아했어··· - P105

–···스스로 납득한 결정이야?
더이상 만화는 안 그린다는 거···
–마음이 식었다···
···라고 하면 좀 다른 의미일 수도 있는데요···
자는 시간도 아껴가며 그려왔던 제 세계가
왠지 모르게 멀게만 느껴지더라고요.
제3자의 눈으로 멀리서 지켜보는 느낌···
그렇게 된 지는 꽤 됐어요.
작품 속 인물들은 더이상 아무것도 이야기해주지 않아요.
그들은 그저 꼭두각시일 뿐···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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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가지 물건들이 환자 주변에 있었다. 약, 숟가락, 촛불, 그리고 벽지였다. 나머지 물건들은 떠나버렸다. 자신이 중병이 들었고 죽어간다는 것을 이해했을 때, 그는 사물의 세계가 얼마나 거대하고 다양한지 이해했고 자신의 권역 안에 남은 것이 얼마나 적은지도 이해했다. 하루가 다르게 물건들의 수는 줄어들었다. 철도 승차권처럼 흔한 물건도 그에게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머나먼 것이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그로부터 멀리 있는, 주변부에 있는 물건들의 수가 줄어들었는데 다음에는 줄어드는 수가 중심 쪽으로, 그를 향해, 심장을 향해, 마당으로, 집으로, 복도로, 방으로 갈수록 빨리 다가왔다. - P9

그는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 위에서 죽음이 물건들을 무지막지하게 박살내고 있음을 알았다. 쓸데없이 엄청나게 많은 사물들의 총수량에서 죽음이 그에게 남겨놓은 것이라고는 겨우 몇 가지 정도 였는데, 그마저도 그가 그렇게 할 힘이 있었더라면 절대로 자기 집에 들여놓도록 놔두지 않을 물건들이었다. 그가 받은 건 은근한 찔러봄이었다. 그는 친지들로부터 무서운 방문과 시선을 받았다. 그는 평소 부탁해본 적도 없고, 필요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는 이 물건들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힘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런데 지금은 이 은근한 찔러봄이야말로 유일하고도 어찌해볼 수 없이 확고한 것이었다. 그는 사물을 선택할 권리를 잃었다. - P10

떠나가는 물건들은 죽어가는 사람에게 이름만을 남겼다.
세상에는 사과가 있었다. 사과는 잎사귀에 싸여 반짝거렸고 살짝 빙글 돌기도 했다. 낮의 한 조각과 정원의 하늘빛, 창틀을 움켜쥐고 자신과 더불어 회전시키기도 했다. 만유인력의 법칙이 나무 아래서, 검은 땅 위에서, 울퉁불퉁한 흙 위에서 사과를 기다렸다. 깨알같이 작은 개미들이 울퉁불퉁한 흙 사이로 기어 다녔다. 정원에는 뉴턴이 앉아 있었다. 사과 안에는 많은 원인들이 숨어 있었는데 더욱더 많은 결과들을 야기할 힘을 가진 원인들이었다. 그러나 그 원인들 중에 포노마레프를 위해 예정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에게 사과는 추상이 되었다. 그리고 사물의 물질적 구현이 자신에게 사라지고 추상만 남았다는 사실이 그로서는 고통스러웠다. - P12

‘나는 외부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어. 내 눈과 청력이 사물을 다루는 거라고 생각했고, 내가 존재하길 멈출 때 세상도 존재하길 멈춘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아직 살아 있는 내게서 모든 것들이 등을 돌리는 걸 똑똑히 보고 있어. 내가 아직 존재하고 있는데도 말이야! 어째서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 거지? 나는 내 뇌가 사물에 형태와 무게, 색깔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이제 그것들이 나를 떠나갔고 명칭들만 남았어. 주인을 잃은 쓸모없는 이름들만 내 머릿속을 헤집고 있어. 이 이름들이 내게 무슨 소용이야?‘ - P12

나는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둘러싸고 있던 모든 환경을 갑자기 아주 다른 방식으로 보게 되었고 그 광경이 나를 뒤흔들어놓았다. 모든 물건이 내게 혈연을 강요했다. 모든 물건이 내게 어떤 명령을 내렸다. 벽에 둥근 시계가 걸려 있었다. - P17

시계는 구전설화였고 전설이었다. 나한테 전설은 필요 없다. 나는 저 시계 소리를 들으며 죽고 싶지 않다. 나는 계속이고 싶지 않다. 나는 가구들의 가족협의회가 나를 에워싸고 있음을 돌연 분명히 깨달았다. 가구들이 내게 충고를 늘어놓고 어떻게 살 것인지 나를 가르친다. 찬장은 내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 한다.
"네 인생 여정에 내가 함께할게. 네 뒤에 내가 서 있을 거야. 나는 오래 버틸 수 있어. 난 튼튼해, 두 세대가 내 안에 음식을 보관했어. 난 할 수 있어, 날 소중히 다뤄줘, 그러면 나는 네 아들과 네 손자 때까지도 유용할 거야. 나는 전설이 되는 거지." - P18

슈발로프는 벽 아래 누워 있었다. 구석이 바싹 다가왔다. 그는 벽지의 무늬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는 벽지에 난 전체 무늬의 저 부분, 그가 밑에 누워서 잠드는 벽의 그 부분이 이중의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하나는 보통의, 낮의, 전혀 별다를 것 없는 평범한 화환들이고, 다른 하나는 밤의, 잠들기 오 분 전에 감지되는 것이었다. 갑자기 아주 바싹 밀착하자 무늬의 일부가 커졌고 세밀해졌으며 변화했다. 막 잠이 들려고 할 때의 어린아이 같은 느낌과 비슷한 상태에서 그는 익숙하고 규정된 형태들이 변화하는 것에 저항하지 않았다. 하물며 그 변화가 감동적이었음에야. 빙빙 돌아가는 나선형과 동그라미들 대신에 그는 염소와 요리사를 보았다···. - P26

그는 아침 일찍 잠에서 깼다. 아주 이른 아침이었다. 잠에서 깨자 그는 양옆을 돌아보고는 비명을 질렀다. 지극한 행복의 소리가 그의 목구멍에서 터져 나왔다. 그들이 만난 첫날에 이 세상에서 시작된 변화가 지난밤 사이 완성된 것이다. 그는 새로운 땅에서 잠에서 깨어났다. 아침의 눈부신 빛남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그가 창턱을 보았을 때 거기에 알록달록한 꽃들이 꽂힌 작은 꽃병들이 서 있었다. 렐랴는 그에게 등을 돌린 채 자고 있었다. 그녀는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었는데 등이 동그랗게 구부러져 있었고 피부 밑으로 척추뼈가 도드라져 보였다. 가는 갈대 줄기 같았다. ‘낚싯대, 대나무‘ 슈발로프가 생각했다. 이 새로운 땅에서는 모든 게 감동적이고 우스웠다. 열려 있는 창밖으로 목소리들이 날아다녔다. - P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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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스스로를 못 박았다.
일이 그렇게 이루어졌다.
아이가 예수처럼, 스스로를 붉은 꽃이 가득 깔린 십자가에 못 박았다.
손과 발목의 피가 십자가 나무를 따라 아래로, 봄꽃이 하얀 나무에 농염하게 피어난 것처럼 방울방울 떨어졌다. 물이 바다로 떨어지듯 피가 꽃 위로 똑똑 떨어졌다. 누런 흙이 대지에 섞이듯 흙에 똑똑 떨어졌다. 아이의 얼굴은 고통이나 비틀림 없이 편안하고 만족스럽게 옅은 미소를 담고 있어 커다랗게 만개한 붉은 꽃이 하늘에, 십자가 꼭대기에 피어난 것 같았다. - P518

모두들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십자가 아래에 서서 붉은 꽃과 볶은 콩, 오각별을 내려다보았다. 고개를 들어 십자가의 아이를 바라보자 십자가를 따라 피가 방울방울 흘러내렸다. 햇빛이 투명하고 금빛이 사방으로 퍼졌다. 피가 하늘에서 알알이 떨어지는 붉은 구슬 같았다. 참새와 까치 떼가 날아왔다. 자주색 구름이 황무지의 가없는 하늘에서 피어올랐다. 자주색과 청백색의 천사같이 생긴 구름이 멀리에서 십자가 상공으로 불어오자 까치들이 담장과 창문, 건물과 마당에서 일제히 고개를 들고 사람들이 알듯 모를 듯한 노래를 불렀다. - P518

모두들 제자리에 섰다. 확실히 방금 지나간 사람은 실험이었다. 그래서 얼른 손을 입가에 나팔 모양으로 모으고 큰 소리로 실험의 이름을 부르면서 왜 안으로 들어가는지 물었다. 하지만 그는 일가족과 짐을 끌며 석양 쪽으로 멀어졌다. 마른풀이 가을 들판을 날아 사라지는 것처럼 모든 것들이, 일가가 석양에 녹아들었다. 그러다 뒤따라온 무리들이 말해 주었다.
"저기는 땅은 넓은데 사람은 적고, 봄이 되면 만물이 꽃을 피워 먹을 것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그들 무리는 안으로 갔고 작가는 모두를 이끈 채 밖으로 나갔다. - P524

신이 시시포스에게 내린 벌은 하늘이 대지에게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준 것과 같다. 시간은 하루하루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인류의 몇몇은 시간이 앞으로 가는 게 아니라 매일매일 뒤로 물러난다고 생각한다. 그들 논리에 따르면 내일, 모레의 도래란 그림책을 맨 뒷장부터 한 장씩 앞으로 젖히는 것처럼 예정된 법칙을 뒤에서 앞으로 하나하나 펼쳐내는 것이다. 그래서 과거는 기억으로 간직되지만 미래는 무지와 예측으로 점철될 뿐이다. - P528

시시포스는 시간 속에서 우리가 형벌이라고 보는, 처음에는 그도 똑같이 불안과 재앙이라고 여긴 일에 이미 적응했다. 시간이 그 모든 것에 적응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적응은 시간의 적이자 무기가 되어 시간에 대항해 전투를 벌였다. 아침에 바위를 산 꼭대기로 밀어 올리기 시작해 저녁이 되면 바위가 꼭대기에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고 다음 날 다시 새롭게 밀어 올리지만 또 떨어지는, 고리처럼 계속해서 반복되는 과정을 시시포스는 이미 의무이자 소임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는 끊임없이 순환하는 시간의 범주를 내려놓고 오히려 생명의 유실과 소모의 의미를 깨달았다. - P529

아이를 사랑하게 된 것은 아이가 시시포스의 무의미한 반복에 새로운 존재와 의미를 불어넣었기 때문이었다. 또 바위의 반복이 없다면 그는 아이를 볼 수 없었다. 아이를 보기 위해 시시포스는 매일 바위를 올렸다 내리는 일을 기다리고 열정적으로 행했다. 원망이나 거부감, 불평 없이 열심히 움직이고 심지어 즐기기까지 했다. 매일 굴러떨어지는 바위를 따라 황혼 속에서 아이에게 말을 걸고 대화하면서 시시포스의 얼굴에 따스한 미소와 찬란한 빛이 생겨났다. - P531

징벌이 주는 고통이나 변화, 무료함, 황당함, 죽음 등에 일단 협력하거나 적응하게 되면 징벌은 의미를 잃게 마련이다. 징벌은 태형으로서의 힘을 잃게 되고, 적응은 무기력 함과 부득이함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도출해내게 된다. 이것이 인류가 진화하면서 발전시킨 체념과 타성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타성의 체념 역시 의미 있는 저항과 능력을 갖는다. 타성은 순응을 낳고 적응은 힘을 갖는다. - P533

시시포스는 신이 내린 역방향 형벌에서 자신에 대한 신의 분노와 증오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오랫동안 뒤집힌 처벌과 징계에 적응할 수 없었다. 원래 바위가 굴러 내려갈 때는 그래도 뒤에서 수월하게 산을 내려갈 수 있었지만, 이제는 바위를 내려 보낼 때 힘껏 밀어야 하는 데다 바위가 저절로 올라간 다음에 뒤에서 따라갈 때, 이미 힘을 쓴 다음에 또 힘겹게 산을 올라야 했기 때문에 두 배의 체력과 정력을 쏟아야 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원래 바위를 밀어 올릴 때는 다리와 허리를 구부린 채 고개를 들면 하늘의 환한 빛을 볼 수 있어서 아래에서 위로 올릴 때마다 하늘, 신과 가까워지고 교류한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제 밀어 내릴 때는 하늘의 빛이나 별을 볼 수 없어 신과 천당, 정신과 멀어지는 기분이 드는 것이었다. 산의 다른 쪽에서 밀어 내리고 올라가기를 반복하면서 그는 다시 징벌과 금기가 육체와 영혼에 미치는 고통과 메마름을 느낄 수 있었다. - P534

생각하다 지쳐버린 그는 더 이상 신이 내준 문제를 고민 하지 않았다. 또한 그 괴상한 문제를 풀고 싶다는 소망과 갈망도 사라졌다. 새로운 순응이 새로운 이유와 힘을 주었고, 생각을 멈추자 안정되고 편안해졌으며 받아들이게 되었다. - P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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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명이 넘는 사람들의 퉁퉁 부어 반질거리는 얼굴이 햇빛 아래에 이르자 허공에 걸린 물주머니 같았다. 한낮의 마당에서는, 겨울이었지만 바람이 없어서 지면 위로 나른하게 따뜻함이 흘렀다. 99구 바깥의 광야에서 아직 녹지 않은 눈이 햇살을 받아 눈부신 빛을 반사해냈다. 사람들은 허기 때문에 현기증이 나서 멀리까지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저 발밑의 반쯤 마르고 반쯤 젖은 회색 모래땅을 보고 위에서 내려온 가장 높은 상부의 헝겊신을 볼 뿐이었다. 입구가 뾰족하게 파이고 검은색인 신발은 손바느질로 꿰맨 밑창이 눈처럼 하얬고, 밑창 옆에 사람들이 눌러 죽인 이의 피처럼 붉은 모래알이 묻어 있었다. 그는 자를 세워놓은 듯 똑바로 날이 선 회색 모직 바지를 입고 있었다. - P388

어두워지기 직전의 마지막 붉은빛이 땅에 피처럼 스며들었다. 배고픈 나비가 피 바닥 위를 나풀나풀 날아가는 것처럼 학자가 붉은 피를 밟으며 걸어갔다. 뱃속에서 위장이 전부 물에 휩쓸려 내려갈 듯 꼬르륵 꾸르륵 하는 소리가 났다. 배가 고프다 못해 장이 뜯기듯 아팠다. 학자는 배를 움켜쥐고 힘껏 눌러 온몸의 힘을 다리와 발로 모으면서 앞으로 걸어갔다. 참새 한 마리가 아이의 숙사 입구에서 먹이를 찾고 있었다. 학자는 참새를 통째로 삼키고만 싶었다. 그래서 침을 꿀떡 삼킨 뒤 걸음을 멈추고 돌을 하나 집어 참새에게 던졌다. 하지만 호두만 한 돌은 참새 근처는커녕 멀찍한 곳에 떨어졌다. 돌 하나를 제대로 던질 힘마저 없었다. 참새가 학자를 보며 비웃듯 짹짹 하고는 날아갔다. - P397

종교가 아이의 얼굴을 힐끗거리며 오른손으로 성모의 반짝이는 눈동자를 후벼 팠다. 정말로 성모의 눈에 구멍이 뚫리고 눈동자가 종잇조각이 되어 바닥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종교가 성모의 다른 눈동자를 파내려 할 때 아이의 붉누른 낯빛이 검푸르게 변했다. 아이가 몸을 비틀어 사발의 콩을 움켜쥐고는 종교의 몸과 얼굴에 던졌다. 종교가 성모의 두번째 눈동자를 파내기 전에 볶은 콩이 그의 얼굴과 몸에 부딪혀 방 안 곳곳으로 튀었다.
아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매섭게 종교의 손을 노려 보았다.
종교가 깜짝 놀라 눈동자를 후비던 손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다시 아이의 얼굴을 힐끗거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황급히 꿇어앉아 콩을 줍기 시작했다. 줍는 동시에 입으로 집어 넣었다. 콩을 씹는 소리가 석판에 못을 박는 것처럼 울렸다. - P401

이미 6개월이나 밀가루를 맛보지 못한 터라 그게 어떤 맛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하얀 만터우 반 개를 자세히 살필 새도 없이 곧장 입으로 가져갔다. 마르고 딱딱한 만터우 덩어리에 목이 메었지만 이내 침이 딱딱한 만터우로 스며들자 회백색을 띠는 만터우의 볶은 참깨 같은 향기가 생생하게 살아나면서 입속을 휘감았다. 잇몸과 혀끝, 온몸의 위장이 부들부들 떨리는 통에 나는 향기를 제대로 음미할 틈도 없이 마른 만터우를 덥석덥석 베어내 뱃속으로 삼켜버렸다. 하얀 만터우 반 개를 다 먹은 뒤 이 사이에 남은 만터우 부스러기에서 비로소 만터우에서 났던 게 참깨 향이 아니라 밀가루 녹말과 땅콩기름이 한데 섞인 새하얗고 새빨간 냄새였음을 알았다. 그 맛을 음미하면서 학자 침대 앞에 잠시 멍하니 있었다. 만터우를 먹고 나자 진귀한 물건을 잃어 버린 것처럼 아쉬웠다. - P415

아이의 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 그리고 음악이, 연기자가 무대 뒤편에서 무대 위로 걸어 올라오는 것처럼 그 문에서 나왔다. 나보다 한발 먼저 돌아온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방금 거친 벌판에서 돌아갈 때만 해도 그녀는 평소처럼 짙은 남색의, 소맷부리가 해져서 녹색으로 덧댄 낡은 웃옷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잠깐 동안 그녀는 짙은 남색의 낡은 웃옷을 벗고 용광로에 갈 때마다 입던 담홍색의 깃이 짧고 허리가 잘록한 제복에 능직으로 짠 바지를 입고 입구가 네모나고 끈으로 장식된 무명 벨벳의 검정 헝겊신을 신었다. 음악이 지나간 자리에 콜드크림 냄새가 8월 계수나무 꽃이 눈앞에 피어난 것처럼 남았다. - P420

나는 고개를 돌려 얼른 아이의 문을 바라보았다. 음악이 문을 닫는 순간, 꽃 때문에 불타는 듯 붉은 아이의 침대 위에 또 종이를 잘라 만든 커다란 붉은 꽃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아이의 여원 그림자가 침대에서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내 경쾌하게 문이 닫혔다. 내 시선이 칼로 싹둑 잘린 것처럼 문밖에서 끊어졌다. 나는 다시 햇살 아래에서 꼿꼿하게 거니는 수면 위의 불그스름한 수양버들 같은 음악의 날씬한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 P420

음악에 대한 미움인지, 아니면 젊고 아름다운 것에 대한 질투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만터우나 식량이 있다는 것 때문에 앞쪽 담벼락으로 사라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내 감정은 한여름 발효가 끝난 똥통에서 나는 냄새처럼 시큼하고 구린 데다 강렬하기까지 했다. - P421

너무 추워서 사람들은 풀씨를 찾아 황무지로 나가지 못했다. 벌판에서 바람이 불면 바람에 날려 황량한 들판에 고꾸라질 것만 같았다. 쓰러지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할 것만 같았다. 황허 강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낮에는 남자가 천지를 원망하며 우는 것처럼 웅웅 하는 회백색 소리를 냈고, 밤에는 여자가 무덤 앞에서 곡하는 것처럼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를 냈다. - P430

나무를 뿌리째 뽑아버릴 수 있을 만큼 바람이 거셌지만 땅에는 나무가 없었다. 풀뿌리를 전부 날려버릴 수 있을 만큼이었지만 주변 몇 리 내의 풀뿌리는 전부 사람들 뱃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바람은 땅 위의 모래만 말아 올릴 수 있어서 거대한 이불이 세상을 떠다니는 것 같았다. 태양이 사라지고 달도 사라졌다. - P431

"남자들, 누구든 와서 시체 드는 것 좀 도와주세요. 도저히 못 들겠어요!"
나와 학자가 서로를 바라보며 고함이 나는 쪽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의 발걸음이 실에 매달려 하늘 위를 나풀거리는 연 같았다. - P438

음악이 지면의 냉기에 닿지 않도록, 또 사체가 꽁꽁 얼어붙지 않도록 일단 무덤에 뉘어 온기를 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음악을 구덩이로 옮기려 하자 어찌나 무거운지 들 수가 없었다. […] 푸르스름하게 얼은 음악의 얼굴을 살피다 아주 힘껏 이를 악 문 것처럼 음악의 치아가 꼭 맞붙은 것을 발견했다. 이 사이로 이를 가는 듯한 서늘한 소리마저 새어 나왔다. 또 그녀의 타원형이던 얼굴이 오이처럼 길어져 꼭 파란 오이에 얼음이 맺힌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에서 수많은 원망과 근심이 보였다. 풀지 못한 일이 너무도 많은데 살아 있을 때는 말하지 못하다가 죽은 다음에 얼굴에 전부 드러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 얼굴의 의문들이 모두 내게로 향하는 것 같아 가슴이 서늘해지고 몸도 공연히 위축되었다. 그 비틀리고 달라진 얼굴을 마주한 채 반쯤 감긴 눈에서 모호하고 매혹적인 빛을 보면서, 마음이 얼어붙고 위축된 탓에 다리가 조금 떨려왔다. - P457

사실 나, 작가는 죽음도 두렵지 않고 시체 따위도 두렵지 않았다. 99구에 살아 있는 사람들은 굶는 것만 두려워할 뿐 더 이상 시체나 죽음은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하지만 음악이 무덤가에서 굳어가면서 내가 옮기는 것을 거부한 그 순간, 그녀의 얼굴이 파란 오이처럼 변하던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놀라움에 몸을 떨었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음악 앞에서 멍하게 굳어 있다가 위로의 말을 몇 마디 했다. 땅거미가 지기 전의 서늘함이 느껴지고 태양이 서쪽으로 기울어갈 때 정말 생각조차 하기 싫은 일이 또다시 떠올랐다. - P458

내 몸에서 살점을 떼어내야겠다는 생각이 일단 생겨나자 점점 강하게 나를 옥죄었다. 나는 목석처럼 멍하니 서서 내 살점을 베어내는 극심한 고통과, 뒤이어 따라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홀가분함이 내 몸에 급속히 퍼져 몸을 잠식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갑작스럽게 내 머릿 속으로 뛰어 들어온 그 생각을 꼭 따를 필요가 없다는 것도 잘 알았다. 하지만 생각에 얽매이면서 두 다리가 터질 듯 덜덜 떨림에도 불구하고 그 떨림 뒤에 올 쾌감과 홀가분함에 한겨울의 따사로운 햇살을 받듯 마음이 녹아내렸다. 내 마음과 몸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간절함과 상념에 휩싸였다. - P462

나는 꼭대기의 밀알이 핏물 속에서 젖 달라고 우는 아이처럼 앵앵거리는 것을 보았고 밀 잎이 붉은 비 속에서 거문고를 뜯듯 핏물을 주르륵 쓸어냈다가 쓸어 올리는 소리를 들었다. 짙은 피비린내는 달콤하고 촉촉한 빗속에서 옅어진 뒤 가느다란 밀 내음에 섞여 산뜻한 향기가 되어서는 내 주위를 휘감으며 퍼져나갔다.
마침내 나 스스로에게 독수를 뻗쳤다. - P467

학자는 그렇게 고기를 씹고 국물을 마시면서 그릇에 콩을 한 줌 넣어 불리기까지 했다. 먹는 모습 따위는 신경도 쓰는 않는 게 전혀 학자답지 않았다. 그의 입에 시선을 맞추고 내 살이 그의 이 사이에서 찢기는 걸 보고 있을 때 은홍색 소리가 그와 나 사이에 울려 퍼졌다. 그의 쉬지 않고 움직이는 입술 때문에 눈이 아파왔다. 눈가부터 시작해, 막 옅어졌던 통증이 다시 그의 이 사이에서 내 온 몸으로 퍼지고 두 다리로 떨어졌다. 내 두 다리가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척추에서 또다시 근육이 찢기고 뼈가 부러지는 고통이 느껴졌다. - P473

방 안의 햇살이 누군가 침대보를 벗기는 것처럼 움직이고 흔들렸다. 창틀 아래의 불도 완전히 꺼져서 두꺼운 재 속에 붉은 기운만 남았다. 학자가 거의 먹고 마셨을 때 온몸의 떨림과 수축이 안정되면서 등뼈의 냉기와 비틀림도 따라서 옅어졌다. 목욕한 것처럼 몸이 상쾌해졌다. 그때 내 머릿속의 그 가시가 완전히 뽑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한 것은 학자와 음악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빌려 내 머릿속의 가시를 뽑기 위해서 였음을 알았다. 감격스럽고 따스해지면서 그들이 나를 구한 것같이 느껴졌다. - P474

햇살이 좋았다.
하늘에 하얀빛이 가득했다.
천사가 춤추는 것처럼 구름이 나풀거렸다. 그날은 날씨가 봄날처럼 따스하고 아득히 천만 리까지 보였다. 멀리 황허 강변으로는 호수의 침묵처럼, 대지에 깔린 비단처럼 적막이 떠다니고 가까이로는 먼지와 모래가 풀썩거리며 대지를 덮었다. 그렇게 땅의 일부가 되었다. 바깥으로 통하는 길이 살포시 빛나는 끈 같았다. - P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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