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아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몸을 숙여 땅에 떨어진 자개 빗핀을 주운 뒤 흥얼거리며 머리칼에 찔러 넣었다. 그녀는 흐뭇한 표정으로 거울 앞에서 흥얼거림을 이어갔다. 너무도 능숙하게 자신을 다스린 것에, 한순간 복받친 이별의 격한 감정을 숨긴 것에, 절대 해선 안 될 말, 그러니까 ‘말해···. 애원하고, 우기고, 매달려···. 이리 와서 날 행복하게 해달라고···‘를 자제한 것에 자랑스러워하면서. - P74

레아는 물을 마시고 일어나 퉁퉁 부운 두 눈을 물로 축인 뒤, 분칠을 하고 벽난로의 장작을 쑤석거리고는 다시 잠자리에 들었다. 보다 신중해진 기분이었다. 자신도 모르는 적, 요컨대 고통에 대한 경계심으로 가득했다. 편하고 안락하고 종종 사랑에 빠지고 이따금 탐욕스러웠던 30년간의 삶이 쉰 살이 다 된 그녀에게서 떨어져나가며 그녀를 젊게, 거의 벌거숭이 상태로 내버려두었다. 스스로가 우스웠다. 더는 고통이 감지되지 않았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었다.
‘좀 전엔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던 거야. 이제 더는 아무렇지 않아.‘ - P87

허세를 부린 것은 아니었다. […] 그녀가 떠올린 익숙한 동작들, 일 분간 기절해있는 셰리의 얼굴, 힘없이 내려앉은 그의 눈꺼풀 사이로 새나오는 한 줄기 하얀 섬광, 그 모든 것에 그녀는 궁금증도 질투도 느끼지 않았다. 반면에 연회색 목제 가구에 남은 작은 반달 모양의 흠집, 그러니까 셰리의 갑작스런 광포함의 흔적 앞에서는 본능적 발작에 사로잡혀 몸이 휘었다.
‘그의 아름다운 손이 남긴 흔적이 이제는 영원히 나를 공격하는구나···. 말이 술술 잘도 나오네! 슬픔이 나를 얼마나 더 시적으로 만드는 걸까!‘ - P88

정원을 뒤덮은 하얀 눈의 반사광이 푸르고 고른 빛으로 그녀를 밝혔다. 풀어 헤친 곱슬곱슬한 회갈색 머리칼이 둥글고 우아한 어깨를 완전히 가리지 못했다. 잠옷 색과 같은 장밋빛으로 물든 하얀 두 뺨과 피로로 핏기가 가신 분홍색 입술. 그 모든 것이 그녀를 아득하게 느껴지는 미완성의 그림 같아 보이게 했다. - P96

그녀는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통해 인내와 희망과 침묵을 배웠고, 죄수들의 무기와 힘을 능숙하게 다루는 법을 익혔다. 마리로는 절대 딸을 꾸짖는 법이 없었다. 다만 벌주는 것으로 그쳤다. 모친의 입에선 모진 말도, 다정한 말도 절대 나오지 않았다. 고독, 이어서 기숙사, 이어서 방학 때마다 다시 고독, 잘 꾸민 방에서 당하는 빈번한 유배. 그리고 마침내 결혼의 위협. 아무 결혼이나 할 위협. 지나치게 아름다운 모친이 딸한테서 다른 아름다움의 시초, 보다 심금을 울리는 억압당하는 이들의 그것 같은 조심스런 아름다움의 시초를 식별해 낸 순간부터였다···. - P101

그는 보일 듯 말 듯 몸을 떨었다. 그녀가 기대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굳어버린 그의 아름다운 얼굴에 절반의 미소가 감돌았다. 옆으 로 살짝 기울인 고개, 주의 깊은 시선, 느슨해진 입술의 감미로운 아치, 아마도 방금 나온 이름의 여운에 귀 기울이고 있는 듯했다···. 사랑에 빠진 청춘의 통제되지 않은 모든 힘이 비명과, 눈물과, 비틀린 손 혹은 할퀴기 위해 벌린 손의 형태로 터져 나왔다. - P107

그녀는 목을 붙들린 짐승처럼 고개를 뒤흔들었다. 그녀가 숨 막혀 하며 호흡하기 위해 목을 뒤로 젖히자 작고 균일한 진주 목걸이 알들의 우윳빛 광채가 도드라졌다. 셰리는 물결치는 매력적인 목과 그 주변에서 뒤엉키는 손들의 어지러운 동작을 혼란스레 응시했다. 무엇보다 그 눈물, 그 눈물을··· 이제껏 그토록 많은 눈물을 본 적 없었다. 누가 그로 인해 그의 눈앞에서 저토록 울었던가? 아무도 없어···. 플루 부인? 그는 생각했다. ‘플루 부인의 눈물은 해당사항 없지···‘ 레아?··· 천만에. 그는 가장 깊숙한 곳에 숨겨진 기억을 헤집었다. 그 푸르고 진실한 눈은 오직 기쁨, 장난, 다소 놀리는 듯한 부드러움에 의해서만 반짝거렸다. 그의 눈앞에서 몸부림치는 이 젊은 여인의 눈물은 그칠 줄 몰랐다! 저 많은 눈물을 어찌할까? 그는 알지 못했다. - P10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아는 평정심의 미덕에 잠겨 행복했고 모성애를 느꼈다. ‘내가 딴 사람으로 만들어줄 거야‘ 그녀는 오후의 보리수나무 그늘 아래서 벗고 있는 셰리, 아침에 하얀 담비 모포 위에서 벗고 있는 셰리, 아니면 밤에 물이 미지근해진 수영장 가에서 벗고 있는 셰리를 앞에 두고 생각하곤 했다. ‘그래, 얼마나 잘생겼어, 도덕성이 부족한 것쯤은 내가 바꿔놓으면 될 일이지.‘ - P51

파트롱이 긴 속눈썹을 내리깔며 인정했다. 그는 레아의 숨김없는 관능에 대한 암시와 웃음을, 그녀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 던지는 그 집요한 눈웃음을 거북해하면서 견뎠다. - P51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래, 날 증오하겠지. 차라리 이리 와서 키스해 줘. 이 아름다운 괴물, 저주받은 천사, 애송이 머저리야···."
셰리는 목소리에 압도당하고 내용에 모욕감을 느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파트롱은 커플을 앞에 두고서 순수한 입술로 새로운 진실을 꽃피웠다.
"육체적으로만 놓고 보면 당신은 두말 할 것 없이 탁월해요. 그런데요, 셰리, 당신을 볼 때면 어쩔 수 없이 이런 생각이 든단 말이죠. ‘이 친구는 내가 여자라면 한 십 년 후에나 다시 찾을 것 같아.‘"
셰리는 정인에게 기울였던 고개를 거두며 암시적으로 물었다.
"들었어? 누누, 코치님이 십 년 후라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
레아는 듣는 둥 마는 둥 그의 질문은 귓전으로 흘리고서 자신에게 원기를 되살려주는 젊은 육체의 뺨, 다리, 엉덩이 등을 한 손으로 되는 대로 토닥이며 유모의 불경스런 즐거움을 누렸다.
파트롱은 셰리에게 질문했다.
"고약을 떨면서 어떤 만족감을 느끼는 거죠?" - P55

그녀는 이제껏 전혀 아쉽지 않았던 것들을 난생 처음으로 헛되이 기다렸다. 그것은 젊은 연인의 신뢰와, 무방비 상태의 느긋함과, 고백과, 진심과, 조심성 없는 감정의 토로였다. 젊은 연인이 거의 부모에 대한 청소년의 감사와 흡사한 감정으로 성숙하고 든든한 여자 친구의 따뜻한 품안에서 밤새도록 눈물과 고백과 원망을 주저없이 쏟아내는 시간들 말이다. - P56

만일 다정함이 의도치 않은 고함과 굳게 낀 팔짱에서도 간파되는 것이라면. 하지만 ‘악의‘는 언행과 숨기는 경계심에 의해 늘 드러났다. 얼마나 많은 새벽녘에 레아는 만족하고 차분해져서 눈을 게슴츠레 뜬 그를, 그러면서도 매일 아침과 매순간의 포옹으로 전날보다 더 아름답게 재창조되기라도 한 듯 입술엔 생기를 되찾은 그를 품에 안고 있었던가. 얼마나 많은 순간에 그녀는 정복당했고, 그때마다 정복욕과 고백하고 싶은 쾌락에 휩싸여 그의 이마를 자신의 이마로 누르며 속삭였던가.
"말해. 말해. 말하라고···." - P57

셰리는 잠든 척했다. 우울감과 숨죽인 분노에 사로잡혀 보다 편하게 이를 악물고 두 눈을 감기 위해서. 그에게 기대어 누운 그녀는 어쨌든 그의 소리를 들었다, 희열에 들떠서 들었다. 미세한 떨림을, 저 멀리에서 요동치는, 포로처럼 온몸으로 부인하는 공포와 감사와 사랑의 울림을. - P58

그는 태양빛을 환히 받으며 몸을 뒤로 누이고 목을 활처럼 젖히고는 두 눈을 한껏 크게 떴다. 두 눈동자는 일견 까맣게 보였지만 레아는 실은 짙은 적갈색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마치 무수한 아름다움 중에서 보다 진귀한 것을 적시하고 선별하기라도 하듯 검지로 그의 눈썹과 눈꺼풀과 입술 가장자리를 차례로 스쳤다. 그녀가 조금은 경멸하는 이 연인의 얼굴은 이따금 일종의 경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녀는 생각했다.
‘이 정도까지 아름다운 건 고결한 거야.‘ - P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녀는 일어나서 실내가운으로 몸을 감싸고는 커튼을 손수 열어 젖혔다. 치장이 과한 밝은 분위기의 분홍색 실내로 정오의 태양이 밀려들었다. 지나간 시대의 호사였다. 창문의 이중 레이스 커튼, 결이 살아있는 분홍색 비단 벽지, 황금빛 목재, 분홍색과 흰색 베일이 드리워진 전등, 최신 비단을 씌운 고가구들. 레아는 아늑한 방도, 상당한 걸작품인 황동 세공 침대도 포기하지 않았다. 미관상 생경하고 정강이에는 가혹하지만, 절대 파손되지 않는 침대였다.
셰리의 모친은 옹호했다. "아니, 아냐, 그렇게까지 흉하지 않아. 난 이 방 맘에 들어. 시대가 느껴지잖아. 그게 이 방의 매력이라고. 라 파이바 저택 분위기야. - P20

레아는 그녀를 유심히 살피며 생각했다. ‘영락없는 마리로의 딸이로군. 은근히 제 어미의 빛나는 요소를 죄다 빼 박았어. 분칠한 듯한 부드러운 잿빛 머리칼,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불안한 눈빛, 말하거나 웃는 걸 억누르는 입술··· 철저히 마리로에게 필수적이었던 덕목들··· 그래서 마리로가 딸을 증오하기도 하겠는걸.‘ - P30

그들은 서로에게 잘 보이려 하지도 굳이 대화를 시도하려 하지도 않은 채 평온하게, 어떤 의미로는 행복하게 나란히 앉아 있었다. 서로를 침묵 속에 내버려두는 그 오랜 습관이 셰리에게는 무기력을, 레아에게는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 P33

하얀 뺨으로 내려앉은 속눈썹, 꼭 다문 입술, 아래쪽에서 빛을 받은 윗입술의 감미로운 아치가 양 옆의 움푹 팬 두 지점을 위로 끌어올렸다. 레아는 그가 와인 판매업자보다는 신(神)에 훨씬 가깝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로 채 꺼지지 않은 담배를 셰리의 손가락 사이에서 조심스럽게 빼내어 재떨이에 던졌다. 잠든 이의 손이 흐늘거리더니, 잔인한 손톱으로 무장한 가느다란 손가락들이 시든 꽃잎처럼 축 늘어졌다. 결코 여성적이지 않지만 통념보다 좀 더 아름다운 손, 레아가 비굴함 없이 쾌락을 위해서, 향이 좋아서 수백 번도 더 키스한 손이었다. - P34

두 여자는 이십오 년째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한 남자가 부유하게 만들어준 뒤 떠나고 나면 다른 남자가 파산시키는 가벼운 여자들의 적대적 친교, 첫 주름과 첫 흰 머리의 위협에 직면한 경쟁자들의 심술궂은 친교. 긍정적인 여자들의 우정. 둘 다 이재에 밝으나 한 명은 인색하고 다른 한 명은 향락적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중요한 관계였다. 이후에는 보다 강력한 또 다른 관계가 두 여자 사이를 이었다. 바로 셰리였다. - P35

해가 떨어지자 정원의 내음이 시골의 내음으로 변했다. 뚜렷하고 생생한 아카시아 향을 머금은 바람 한 줄기가 들어왔다. 두 사람은 바람이 걷는 것을 보기라도 하려는 듯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레아는 나지막하게 말했다.
"장미색 아카시아야."
셰리는 대답했다.
"응, 그런데 오늘 밤은 오렌지 꽃을 마신 것 같아."
레아는 그의 표현에 희미하게 감탄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행복한 희생자가 되어 향을 들이마셨다. 그녀는 등을 돌렸다. 순간 그가 자신을 부르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어쨌든 그는 그녀를 불렀고, 그녀는 그에게 다가갔다. - P46

‘잠깐, 그래··· 네 입술이 감미로운 건 부 인할 수 없는 사실이야. 이번엔 내 만족을 위해 키스할 거야, 내가 그러고 싶으니까. 그런 다음 놔줄게, 미련 없이, 아무 상관없어, 그래···.‘ - P4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외국에서 우리 가족은 유리처럼 부서졌다. - P142

이제 호텔에서 나와 밤비는 우리만의 독방을 받는다.
낯선 도시에서 홀로 남겨지는 것이 나는 두려웠다. 그러면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나는 혼자 거리로 나가면 안 된다. 그러면 길을 잃어버리고 만다. 나는 집들의 위치, 거리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 한다. 나는 집들과 거리가 항상 철거되고 새로 세워진다는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P147

나는 거꾸로 자란다.
어머니는 매년 나를 더 어리게 만들려 애쓴다.

나는 여전히 보호받아야 하는 어린아이라고 어머니는 말한다.
아이라고! 아이가 이런 모습이야? - P161

더 이상 자고 싶지 않다.
나는 서두르고만 싶다.
항상 서두르고만 싶다.
어머니는 내게 매우 다정하다 나는 그게 싫다. 나는 자꾸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어머니는 내 안에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한다.
나는 사진 속 어머니를 닮았다.
나는 나 없는 나와 같다. - P1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히츠 선생님 안으로 들어간다.

히츠 선생님 내부에는 선반장이 가득 들어찼고 선반장에는 작은 메모장과 연필을 든 조그마한 경찰관들이 웅크리고 있다.
그들의 직업은 연필깎이다.
연필을 가장 빨리 닳게 만드는 자가 선반의 위 칸으로 올라갈 수 있다.
가장 근면한 자는 연필깎이 왕이 되어 자신이 만든 쓰레기를 다른 자들 머리 위로 버릴 수 있다. - P121

겁이 나면, 심장을 입안에 넣고 미소를 짓는 거야. 어머니는 말한다. - P136

입 밖으로 나온 말은 현실이 될 거라고, 예전에 언니는 말했다. 언니는 내가 어머니 때문에 불안하더라도 그 감정을 말로 꺼내지 못하게 했다.
사고가 날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자주 생각하지 않았다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까? - P139

민주주의국가에서 우리가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나는 결코 고향을 떠나지 않았을 거야! 엄마가 말한다. 네 아버지는 우리가 낙원으로 가는 거라고 했어.
뭐, 낙원이라고!
여기는 개가 사람보다 더 소중한 나라야! 상점 선반에 개 사료가 가득하다고 가족에게 편지를 쓰면, 다들 내가 드디어 미쳐 버렸다고 생각하겠지!
이 나라 욕실에서는 어디든 따뜻한 물이 나오고, 사람들 가슴에는 냉장고가 들어 있어!
하지만 신이 잠든 건 아니라서, 가난한 사람들의 눈물로 바다를 만드실 거야. 우리가 천국에 가면 거기서 목욕할 테지. 물에서 나오면 피부가 24캐럿 순금이 되어 있을걸! - P14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