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소속감, 그러니까 자기가 타자와 맺는 또 다른 관계, 세계에 대한 또 다른 시선, 세상사에 대한 또 다른 담론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 P159

어머니의 인종주의와 어머니(이민자의 딸!)가 이주 노동자들 일반과 특히 ‘아랍인들‘에 대해 공공연히 드러내는 지독한 경멸은 혹시, 열등하다는 낙인이 찍힌 사회적 범주에 속하는 어머니가 자기보다 더 심하게 박탈당한 사람들에 대해 우월감을 느끼는 하나의 방편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그것은 타자의 가치에 대한 평가절하를 우회 수단으로 삼아, 스스로에 대해 가치 있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방식, 그러니까 자기만의 시선으로 존재하는 한 가지 방식이었는지도 모른다. - P167

학교식 교양이 부과하는 자기에 대한 관계 형식은 집에서의 내 모습과 양립할 수 없었다. 성공적인 학교 교육은 그것을 가능하게 만든 조건들 중 하나로서 내 안에 단절, 더 나아가 유배의 계기를 심어놓았고, 그 단절선은 점점 더 두드러지면서 나를 나의 출신 세계이자 내가 여전히 살아가고 있는 세계로부터 떼어놓았다. 그리고 모든 유배가 그렇듯, 어떤 형태의 폭력을 포함했다. 그 폭력은 내 동의에 따라 행사된 것이기에, 나는 그것을 폭력으로 인지하지 못했다. 나 자신을 교육 체계로부터 축출하지 않으려면—혹은 축출당하지 않으려면—내 가족과 내 세계로부터 나 자신을 축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두 영역을 동시에 유지하는 것, 충돌 없이 이 두 세계에 속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몇 해 동안이나 나는 하나의 대역에서 다른 대역으로, 하나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 다녀야 했다. 내 두 가지 인격, 내가 맡아야 했던 두 가지 역할, 내 두 가지 사회적 정체성은 시간이 갈수록 연관성과 양립 가능성이 줄어들었고, 둘 사이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는 내 안에서 견디기 힘든 긴장을 자아내 나를 매우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 P188

아마도 음악 수업은 가장 기만적이면서도 적나라한 테스트였을 것이다. ‘문화‘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에 과연 우리가 숙달해 있는지, 그것과 자명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 아니면 이방인의 관계를 맺고 있는지 확인하는 계기 말이다. […] 사실상 내게는 두 갈래의 길이 펼쳐졌다. 하나의 길은, 딱히 고의는 아니었지만, 어쨌든 고집스럽게 말을 듣지 않는 태도, 부적응, 오만불손, 반감과 냉소, 완강한 거부 등으로 표현되는 자발적인 저항을 계속하는 것이었다. 결국 나이전의 수많은 아이들이 그랬듯, 나 역시 이 체계에서 소리 소문 없이 추방당하면서 마무리될 터였다. 어쩔 수 없는 구조적 힘 때문이지만, 마치 내 개인적 행동의 단순한 결과라는 모양새를 띠고서 말이다. 다른 하나의 길은 학교의 요구에 맞춰 점차 나를 굽히는 것, 학교에 날 적응시키는 것, 학교의 주문을 수용하는 것, 그리하여 학교의 벽 안쪽에 끝까지 남아 있는 것이었다. 저항은 나를 잃는 길이었고, 복종은 나를 구하는 길이었다. - P189

내가 청년기에 심취했던 이런저런 철학들은 심층에서 내 출신 계급과 지역적 상황에 연결되어 있었을 것이다. 나는 어떤 유형의 철학적 사유를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었지만, 사실 그것은 내 사회적 위치에 의해 추동된 결과였다. 내가 파리의 대학생이었더라면, 혹은 이론과 사유의 새로운 노선들이 정교화되는—또 높이 평가받는—중심 가까이에 있었더라면, 내 선택은 사르트르가 아닌 알튀세르, 푸코 또는 데리다에게로 향했을 것이다. 어쩌면 사르트르를 경멸적으로 바라보았을지도 모른다. 내가 나중에 알게 된 파리 지식사회의 규칙대로 말이다. - P21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런 꼴을 당해 마땅해. 내 나이에 남자를 육 년이나 사귀다니. 육 년이나! 그 애가 그나마 내게 남아있는 걸 망쳤어. 그 육 년이면 이렇게 후회막심인 대신, 두세 번은 더 소소하게 행복하고 안락할 수 있었다고···. 육 년간 이어온 관계라니, 남편 따라 식민지에 가는 거랑 뭐가 다르냐고. 그러고 돌아오면 알아봐주는 사람 하나 없이 몸치장도 어떻게 하는지 모르게 되는 거야.‘ - P164

밤이 되어 한가함의 위험에서 해방된 그녀는 과연 얼마나 자게 될지, 또 얼마나 깨어있을지 헤아렸다. 불안정한 이는 한밤중에 큰소리로 하품을 하는가 하면 한숨을 내쉬고, 우유배달부와 도로청소부와 참새들을 저주하기 마련이니까. - P165

자제하지 못한 억눌린 웃음소리가, 하마터면 생의 가장 두려운 기쁨에 빠져들 뻔했다고 그녀에게 경고했다. 포옹, 추락, 이불이 젖혀진 침대, 몸이 잘린 짐승의 살아있는 두 토막처럼 접합된 두 육체··· - P174

임박한 쾌락과 그녀를 안고 싶은 욕망에 몰두한 그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순순히 따르며 젊은 연인에게 사려 깊고 진지하고 바람직한 애인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패배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에 일종의 공포를 느끼며 셰리를 형벌처럼 견뎠다. 그녀는 두 팔로 그를 힘없이 밀어내다가 이내 무릎 사이로 그를 힘차게 붙들었다. 끝끝내 그녀는 그를 부둥켜안으며 가냘프게 울부짖다가 사랑이 고통스런 회한으로 가득 차서 창백하고 숙연하게 떠오르는, 심연 속으로 빠져들었다. - P178

‘그가 여기 있어‘, 레아는 생각했다. 그녀는 무조건적인 안도감에 휩싸였다. ‘그가 영원히 여기 있어‘, 그녀는 속으로 외쳤다. 빈틈없는 조심성, 그녀의 삶을 이끌어온 미소를 잃지 않는 상식, 원숙한 그녀 나이의 겸허한 망설임, 그리고 포기, 그 모든 것들이 돌연한 사랑의 오만함 앞에서 물러나며 사라졌다. ‘그가 여기 있어!‘ - P179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자칫 몸을 움직여 이 화사한 방안에서, 번쩍 거리는 청동 침대의 꼬불거리는 철제 기둥과 불타오르는 듯한 연분홍색 커튼에서 감각하는 시각적 즐거움이 산산이 깨어질까 두려웠다. 전날의 커다란 행복이 마치 물이 가득 찬 크리스털 속에서 춤추는 무지개 속으로, 그 눈부신 반사광 속으로 빨려 들어가 형체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 P183

방안에 밀려든 눈부신 햇살이 어둠에 묻혀있던 벽지의 꽃무늬와, 벽에서 웃고 있는 샤플랭의 작품 속 금발 소녀의 부드러운 표정을 되살려놓았다. 셰리는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눈을 감았다. 기억이 그에게 수박 속처럼 신비롭고 원색적인 전날의 침실을, 동화 같은 전등의 둥근 갓을, 무엇보다 그를 비틀거리게 했던 고조된 환희를 되돌려놓게 하고 싶었다. - P185

그녀는 그를 화나게 할 수 없다는 걸 똑똑히 깨달았다. 그녀의 온 신경이 팽팽해졌다. 그녀는 속으로 되풀이하는 똑같은 두세 마디 말로 자신의 생각을 옭아 맸다. ‘그가 여기 있어, 내 앞에··· 봐봐, 여전히 여기 있잖아···. 그는 내 손이 닿는 곳에 있어···. 그런데 그가 여전히 여기 있는 건가, 내 앞에, 정말로?···‘ - P190

건물 꼭대기 층에서 떨어지는 사람들이 추락 중에 느낄 수 있는 어리석은 희망이 그들 사이에 반짝였다가 사라졌다. - P19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아는 부글거리는 속을 달래며 안뜰을 가로지르는 플루 부인을 시선으로 좇았다. ‘어서 심술 떨 계획을 세우러 가야지! 누가 널 막겠니. 발을 삐끗했어? 그래도 넘어지진 않을 거잖아. 조심스런 네 운전기사는 선로를 이탈하지도 않을 거고, 나무를 들이받지도 않을 거야. 넌 눼이의 집으로 잘만 들어가겠지. 그러고는 네가 절대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늘어놓을 적기 - 오늘이든, 내일이든, 다음 주든 - 를 고를 거야. 그렇게 아마도 휴식하고 있을 이들을 휘저으려 하겠지. 그래봤자 네가 할 수 있는 건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고작 그들을 조금, 그것도 일시적으로 흔들어 놓는 것뿐이겠지만···‘ - P159

"우린 마치 습관처럼 물어뜯는 실내화를 되찾은 두 마리 개처럼 서로를 되찾은 거야. 참 희한하지! 그 여자는 내 적인데, 내게 위안이 되는 것도 그 여자니 말이야. 정말이지 우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구나···." - P160

그녀는 오랫동안 사색에 잠겼고 점차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가 끝내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였다. 신경이 느슨해지자 깜빡 잠이 들었다. 의자에 앉은 채로 쿠션에 한쪽 볼을 대고서 임박한 노령의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날이 그날인 매일이 그려졌고, 샤를로트 플루와 마주한 삶이 보였다. 세월을 단축시키는 뿌리 깊은 경쟁심과, 성숙한 여인에게 먼저 코르셋을, 이어서 염색을, 마지막으로 섬세한 레이스 속옷을 포기하게 만드는 품위 없는 무기력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삶이. 그녀는 노인의 사악한 쾌락을 미리 맛보았는데 그것은 비밀스러운 투쟁, 누군가를 죽이고 싶은 욕구, 그리고 오직 한 존재, 세상의 오직 한 지점만을 남기는 재앙에 대해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강렬한 희망에 불과했다. 그녀는 새벽녘과 같이 불그스름한 해거름의 빛 속에서 놀라며 깨어나 한숨을 내쉬었다. - P160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지난 어느 해의 거칠고 갈망하는 부름이 아니었고, 눈물도 아니었으며, 정신의 고통이 육체를 파괴하려할 때 온몸으로 고통스러워하고 들썩거리는 저항도 아니었다. - P160

‘나의 가엾은 셰리··· 생각하면 재미있어, 너는 쇠락한 늙은 연인을 잃음으로서, 나는 스캔들 급의 젊은 연인을 잃음으로서, 우리는 우리가 소유했던 세상에서 가장 명예로운 것을 잃었으니 말이야···.‘ - P16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아는 이 여행 기념품을 폐기하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끔찍하군. 이전에 알던 인간들 못지않은 인간들이야. 이 인간들과 헤어지고 나면, 못지않은 또 다른 인간들이 등장하겠지. 별 수 없어. 어쩌겠느냐고. 내가 가는 어느 곳이나 또 다른 샤를로트 플루며 라베르슈며 알돈자며 한때는 잘생긴 청년이었을 역겨운 늙은 이들이 줄줄이 등장할 테니 말이야. 견디기 힘들고, 힘들고, 또 힘든 인간들···‘ - P140

‘아니, 저 커튼도 손 두 개가 들어갈 만큼 찢어졌잖아···. 이건 빙산의 일각일 거야···. 대체 난 무슨 생각으로 그리 오랫동안 집을 비운 걸까? 대체 누구의 영광을 위해서?··· 마치 이곳에선 조용히 슬픔을 삭일 수 없다는 듯이 말이야.‘ - P141

어깨와 가슴을 물 밖으로 드러내어 그 어느 때보다 분수의 조각상 같아 보였던 그녀는 손가락 끝에 매달린 젖은 우편엽서를 흔들었다.
"로즈, 로즈! 셰리가··· 플루 씨가 도망쳤대! 젊은 아내를 버려두고서!"
로즈는 대답했다.
"저는 놀랍지도 않네요. 이혼이 결혼보다 더 즐거울 걸요. 결혼은 모두가 악마를 짊어지고 사는 거잖아요···."
그날, 거북한 키들거림이 종일토록 레아를 따라다녔다.
"아! 이런 악마 같은 녀석! 아! 이런 못된 놈이 있나! 안 그래요?···"
그녀는 낮게 쿡쿡대며 고개를 설설거렸다. 마치 아들이 처음으로 외박한 것을 알게 된 엄마처럼. - P146

그녀는 어깨를 풀썩 추어올리며 생각했다. ‘셰리를 한 번은 구해줘도 두 번은 아니지! 그녀는 손톱에 윤을 내며 광이 죽은 반지에 ‘후‘ 입김을 내뿜는가 하면, 붉은 염색이 제대로 되지 않아 뿌리 쪽이 희끗희끗한 머리칼을 거울에 바짝 대고 들여다보다가 공책에 몇 줄 끼적거리기도 했다. 그녀의 동작은 재빨랐고 평소보다 덜 차분했다. 그녀가 아주 잘 아는 은근한 불안의 침투, 그녀가 - 슬픈 기억까지 부인하면서 - 정신적 멀미라 부르는 것과 싸우기 위해서였다. - P147

‘이런 여자가 늙은이의 품에서 생을 마감할 수는 없지. 이런 여자는 시들시들한 인간한테 손이나 입을 더럽힐 일이 절대 없는 거라고!··· 그래, 젊은 피만 원하는 ‘여자 흡혈귀‘, 그게 바로 나이고 여기 있어···.‘
[…]
‘그러니까 그 젊은 피들이 외려 나한테 감사해야지! 대체 얼마나 많은 그들이 내 덕에 건강하고 아름다워지고, 슬플 땐 건전하게 이 겨내고, 감기에 걸리면 레드풀로 회복하고, 무성의하지 않고 단조롭지 않게 사랑을 나누는 습관까지 배게 된 거냐고?··· 그런데 난 이제 침대에서 허전하지 않기 위해 만날 수 있는 남자가 나이 든···‘ - P1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돌연 에드메는 무너져 내렸다. 그녀는 의자로 풀썩 떨어지며 온몸을 웅크리고는 열성적으로 울기 시작했다. 전신을 들썩이는 키들거림이나 단속적인 웃음과 흡사하리만치 맹렬하게. 그녀의 우아한 몸이 휘더니 슬픔과 사랑의 질투와 분노와 자각하지 못한 굴종으로, 그러면서도 한창 투쟁 중인 투사처럼, 파도 한가운데에서 헤엄치는 사람처럼 위로 솟아오르는가 하면 들썩거렸다. 그녀는 새롭고 자연적이고 씁쓸한 물질 속에 푹 잠긴 기분이었다. - P108

생기 없는 눈빛의 이 젊은 남자는 식객이라는 자신의 어렵고 궂은 직업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바, 호기심을 물리치고서 자신의 경솔함을 자책했다. 하지만 얼근히 취기가 돈 셰리는 매우 조심스러워하면서도 레아에 대한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는 주입된 올바른 부부관에 사로잡혀 상식적인 소리들을 늘어놓았다. 결혼에 대해 허세를 떨면서 레아의 미덕을 인정했고, 젊은 아내의 순종적인 나긋나긋함을 찬양하면서 그 틈을 타서 레아의 단호한 성격을 비판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 지독한 여자야, 단언컨대 자기 생각이 너무 확고하다니까!" 그의 속내 이야기는 더 깊이 들어갔고 급기야 레아는 냉혹하고 고집스런 여자가 되었다. 그는 계속해서 떠들면서 박해받은 연인의 고충을 암시하는 너절한 말들 뒤에 숨어, 위험 없이 레아에 대해 이야기하는 은밀한 행복을 누렸다. 그는 조금 더 레아의 평판을 해치면서 속으로는 고이 간직한 그녀와의 추억을 기렸다. 여섯 달 동안 불러보지 못했던 그 다정하고 쉬운 이름을 마음껏 발음하면서 레아의 모든 자애로운 모습을 떠올렸다. 그에게 몸을 기울이는 모습, 복구할 수 없는 아름답고 선명하고 굵은 두세 줄의 주름, 그녀는 그를 위해 물러났으나 - 맙소사! - 지독히도 존재했다···. - P121

부리기 좋으면서도 거만한 장신의 젊은이는 호주머니에 슬그머니 지폐를 구겨 넣으며 출발했다. 그가 돌아왔을 때 셰리는 건드리지도 않은 오렌지주스를 멀거니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기에 자신의 운명이라도 쓰인 듯이. - P123

잠들었던 이가 일어나 앉았다. 그의 흐린 하늘색 눈동자가 친구에게서 멎었다. 그는 셰리를 더 오래 관찰하기 위해 잠이 덜 깨 어리바리한 척했다. 파란색으로 차려입은 셰리는 비장하고 근사했으며 안색은 능숙하게 칠한 벨벳 같은 파우더 아래에서 창백했다. 데스몬드는 자신의 멋부린 추함과 비교되는 셰리의 아름다움에 고통스러웠다. 그는 일부러 길게 하품을 하면서 생각했다. ‘또 무슨 일일까? 이 머저리는 어제보다 더 잘생겨졌군. 특히 저 속눈썹, 저 속눈썹은 진짜···‘ 그는 셰리의 힘차고 반드러운 속눈썹을, 푸르도록 하얀 흰 자위와 짙은 색 눈동자에 드리우는 그 속눈썹의 음영을 바라보았다. 그는 또한 거만하게 올라간 아치형 입술이 오늘 아침에는 쾌락에 갈급한 듯 촉촉하고, 또렷하고, 달떠서 미세하게 헐떡거리는 것을 알아차렸다. - P134

그는 레아 방에 있는 것과 같이 두 창문 사이에 서있고 정확히 그의 신장 높이인 세로로 긴 거울에서 자신의 모습을 숨기며 휘파람을 불었다. 조금 전엔 환한 분홍색 벽을 배경으로 묵직한 금색 테에 끼워져 있던 또 다른 거울 속에서 나신이거나, 헐렁한 비단 잠옷으로 몸을 감싼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더랬다. 사랑받고 행복하고 애지중지되던 잘생긴 젊은이가 연인의 목걸이며 반지를 만지작거리는 호사스런 모습을··· ‘혹시 아까 레아의 거울에 젊은 남자가 비쳤었던가?···‘ 언뜻 생각이 미치자 극도의 흥분이 몸속을 훑고 지나갔다. - P135

그는 분노 없이 놀라워하며 힘겹게 상상해낸 말과 이미지들로 자신의 고통을 후버팠다. 그는 레아의 집에서 함께 보냈던 시간들을 떠올리려 애썼다. 아침나절의 노닥거림, 쾌락이 길어졌던 완전무결한 침묵 속에서의 오후, 차가운 방의 따뜻한 침대 속에서 빠져들던 달콤한 겨울 잠··· 그의 눈엔 여전히 레아의 팔에서, 레아의 방 커튼 뒤에서 타오르는 오후의 체리 빛 태양 속에서, 단 한 명의 연인 만이 보였다. 바로 셰리 자신. - P13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