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당장에 먹구름 속으로 사라지고, 수많은 번개가 창백한 백합처럼 흐드러지게 피어나, 다섯 사람의 얼굴에 각각 다른 표정으로 떠오른 느낌을 비웃고 있었다. - P97

죽음이라는 건 가까이 다가가 냄새를 맡아보면 정말 놀랍고 두려운 일이지. 하지만 잘못 생각하면 제값 이상으로 과대평가하게 돼. 마치 나그네의 불안한 눈에는, 나무 그늘에 돋아난 잡초도 밤의 어둠속에서는 거인처럼 보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지. - P204

저는 치릴로로 변장했을 때,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지만, 나중에는 점점 더 치릴로를 닮아가는 제 자신에게 기쁨을 느꼈을 정도입니다. 감정만이 아니라 말투까지도 치릴로를 그대로 닮아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그런 제 자신을 보고 놀라고, 놈들과 가진 대화에 놀라면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우리 인간들은 무엇인가? 우리는 실체인가 가짜인가? 종이로 만든 허구, 하느님의 형상을 모방한 피조물, 죽음의 팬터마임 무대에 등장했을뿐 실재하지 않는 존재, 적의를 가진 마술사가 빨대로 불어대는 비눗방울? - P229

저는 그동안 줄곧 무슨 꿈을 꾸었던 것일까요. 그리고 지금은 또 무슨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요. 마치 무대의 막을 내리는 끈을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고,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행복감이 넘쳐흐르는 느낌입니다. 초인간적인 알파벳의 신비로운 작용 속에서, 제가 굴러 떨어진 어둠의 ‘오메가‘가 영원한 빛의 ‘알파‘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 P23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희를 처벌하는 것은 그러므로 불필요한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잘못된 과오를 시정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쾌감인 동시에 시련이기도 하다. 신자가 영성체를 원하듯 너희가 순교를 원한다면, 나는 집행자로서 너희의 순교를 도와줄 작정이다. 나는 심판이요, 형벌이요, 칼집에서 빼낸 칼이요, 하느님의 뜻을 집행하는 망나니이기도 하다. - P43

"나에게는 너희를 설득할 만한 사상이 없다. 물에 젖어 축 늘어진 작은 나뭇가지 따위는 도저히 너희의 열기를 당해낼 수 없으니까." - P43

어둠은 맹목의 세계다. 그래도 어둠 속에서는 눈먼 손과 손이 서로 마주잡고, 기억을 더듬으며 빛의 자취 속에서 함께 걸어갈 수 있다. 그러나 죽음은 어둠도 아니고 빛도 아닌, 그저 폐기된 기억일 뿐이며, 전면적인 파괴와 부재이고, 재조차 남지 않는 화장이다. 죽음 속에서는 과거에 존재했던 것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과거에 존재했던 흔적조차 사라지고 마는 것 같다. - P4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지만 나는 감히 믿고 있다. 너희들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은 현명하게도 살아남겠다는 결심을 굳혀 주리라고. 저울의 양쪽 접시는 구태여 무게를 비교해볼 필요도 없다. 한쪽 접시에는 빛, 빛나는 청춘이 있다. 자신은 존재했고,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존재할 거라고 말하는 힘이 있다. 존재의 바다에서 제 몫의 한 방울이 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여인의 육체를 껴안고, 꽃내음을 맡고, 웃고 울 수 있는 힘이 있다. 기회만 있으면 ‘나는, 나는, 나는・・・・・.‘ 하고 말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이 모든 것이 한쪽 접시 위에 놓여 있다. 그 무게는 산만큼이나, 하늘만큼이나 무겁다. 반면에 다른 한쪽 접시에 놓여 있는 것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숨결, 어둠의 조국뿐이다. 지금 너희는 자유니 평등이니 박애니 하는 말을 숙명으로 여기겠지만, 그 어둠의 조국에는 그런 것을 생각할 머리도 없고, 그 말을 끼적일 손도 없으며, 그 말을 지껄일 입도 없을 것이다." - P4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언제나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우리 자신의 무력함이나 나약함 따위를 체면이나 자존심으로 가장시키는 버릇이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마음속에 숨겨진 부분, 말하자면 우리 마음속에 숨어 있는 관찰자를 만족시켜주는 것이다. - P35

사랑은 일종의 마술과 같은 것이어서 오랜 추억을 대신한다. 사랑은 마치 요술이라도 부리는 것처럼 하나의 과거를 만들어내어, 그것으로 우리를 감싼다. 사랑은 말하자면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거의 알지 못했던 사람과 오랫동안 함께 지내온 듯한 느낌을 안겨주는 것이다. 사랑이란 한순간에 타오르는 하나의 불빛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오랫동안 지속되어온 것처럼 여겨진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랑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얼마 안 가서 그것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 존재하고 있는 동안은 지나온 시간을 밝혀줄 뿐만 아니라 장차 다가올 시간 위에도 밝은 빛을 뿌려주는 것이다. - P5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질 게 뻔한 싸움을 하는 이십대의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목숨을 살려주었던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걸려 했던 이십대의 그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영정 속의 아버지가 꿈틀꿈틀 삼차원의 입체감을 갖는 듯했다. 살아서의 아버지는 뜨문뜨문, 클럽의 명멸하는 조명 속에 순간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지는 사람 같았다. 그런데 죽은 아버지가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살아서의 모든 순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신의 부고를 듣고는 헤쳐 모여를 하듯 모여들어 거대하고도 뚜렷한 존재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아빠. 그 뚜렷한 존재를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불렀다. 아버지의 영정을 응시하던 그가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흰자위가 붉었다. 나의 눈도 그러할 터였다. 작은 상욱이, 김상욱씨가 가만히 눈물을 훔쳤다. - P181

사진 속의 아버지는 딴 사람인 듯 낯설었다. 아버지는 어릴 때의 얼굴도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낮선 건 본 적 없는 싱싱한 젊음과 정면을 제대로 응시한 사팔뜨기 아닌 눈이었다. 사진 속 문척 모래사장은 지금과 달리 곱고 넓었고, 빛바랜 흑백사진임에도 불구하고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그 열기마저 식힐 듯 아버지의 청춘은 싱그러웠다. 아직 사회주의를모를 때의 아버지, 열댓의 아버지는 자기 앞에 놓여 있는 질곡의 인생을 알지 못한 채 해맑게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소년 둘은 입산해 빨치산이 되었고, 그 중 한 사람은 산에서 목숨을 잃었다. 형들을 쫓아다니던 동생은 형을 잃고 남의 나라에서 제 다리도 잃었다. 사진과 오늘 사이에 놓인 시간이 무겁게 압축되어 가슴을 짓눌렀다. - P195

내 부모는 평등한 세상이 곧 다가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산에서 기꺼이 죽은 사람들을 늘 부러워했다. 쭉정이들만 남아서 겨우겨우 살고 있노라, 한탄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런 삶이 부러워 미웁기도 했던 것이다. 어느 쪽이 나은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의 마음을 짐작은 할 것 같았다. - P196

그 여름날 작은아버지가 웅얼거리던 말이, 까맣게 잊고 있던 말이 불현듯 기억의 표면으로 솟구쳤다. 한 등에 두 짐 못 지는 법인디……… 섬진강이 보이는 내리막길에서 자전거에 올라타며 작은아버지는 분명 그렇게 혼잣말을 했었다. 그러니까 그날 작은아버지는 나를 뒤따라오며 내 등에 얹힌 두 짐을 보았던 것이다. 자기 등에도 평생 얹혀 있었을 두 짐을. 그 짐이 버거워 작은아버지는 떠나지도 못하고 살지도 못하고 술에 취해 한평생을 흘려보낸 것일까? 아버지의 살아남은 유일한 형제를 위해 나는소주병을 꺼내들었다. 기왕 취해 보낸 일평생, 하루쯤 더 보탠들 무슨 상관이겠는가. 그것도 그 원흉이 간 자리인데. - P210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P231

유골은 낱낱이 흩어졌지만 내 기억은 선명해졌다. - P25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