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란 건 부자들한테 탕진된다니까. 그녀가 만일 자신을 초대한 남자와 같은 굉장한 부호였다면, 브라이튼 파빌리언(인도식으로 지은 궁전― 옮긴이) 같은 것을 집으로 만들고 싶어했을 것이다. 지나가는 행인들을 웃게 하고 부자가 부자가 되게 만든 이들에게 보내는 빈부 상호간의 선물 말이다.
반대로 그녀는 대공의 궁전을 비웃으며 혼잣말을 했다. 가난은 가난한 자들에게 탕진되지. 최고로 멋진 것을 벌 줄 모르는 가난한 사람들은 돈 없는 부자일 뿐이야. 그런 최고로 멋진 것을 돌보는 데에는 부자와 똑같이 쓸모가 없고, 또 부자들만큼이나 현찰 다루는 능력도 없는데다, 정말 부자랑 똑같이 항상 그 돈을 환하고, 아름답고, 쓸모없는 것에다 탕진한다니까. - P364

창밖에는 밤이 오고 있으며, 공개 처형대 위에 스며든 무시무시한 핏자국 무늬처럼 해가 기울고 있는 곳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거대하고 황량한 공간이 스쳐지나간다. 이 대륙의 절반에는 곰과 별똥별과 하늘을 모두 담아 꽝꽝 얼어붙은 얼음을 핥아 목을 축이는 늑대만 살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은 온통 먼지 덮개를 쓴 듯 하얗다. 그 먼지 덮개는 마치 가게에서 들여오자마자 멀리 치워놓아 절대로 사용하거나 만지지도 않을 것 같다. 무섭다! 그리고 이 원형 파노라마 같은 끝없는 풍경 속에 이 부자연스러운 장관은 레이스 커튼이 달린 말끔한 창틀 속에서 시속 30킬로미터로 펼쳐지고 있었다. - P385

우린 여기 있을 이유가 없다. 한번도 벗어난 적 없는 쭉 뻗은 선로에 굼뜬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즐기는 이 모든 따스한 안락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마치 오성급 호텔의 안락함 속에서 알 수 없는 심연을 가로지르는 외줄타기의 꿈을 꾸는 줄타기 곡예사 같다. 지독한 겨울의 한가운데와 이 적대적인 지역을 통과해가는. - P3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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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가 만들어내는 기쁨은 자신이 견뎌야 하는 모욕과 비례해 커지게 되어 있어요." 부포가 보뜨까로 술잔을 다시 채우면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광대는 예수의 이미지 자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어쩌면 그럴 수 없기도 하네요." 냄새나는 주방 한구석에서 부드럽게 빛나던 성상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고, 그 구석에서 밤이 바퀴벌레처럼 스멀스멀 기어왔다. "멸시받고 거절당한 속죄양들의 굽은 어깨에는 군중의 격분이 쌓여 있고, 소재가 쌓여 있지만, 그 자신이 웃음의 주제인 거죠. 우리 자신의 모습 때문에 우린 그런 주제가 되도록 선택받은 거요." - P235

우리를 고용한 사람들은 우릴 영원히 즐겁게 노는 존재라고 생각하죠. 우리의 일은 그들의 기쁨이 되어주니까, 그들은 우리의 일이 우리에게도 즐겁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니 우리의 일을 놀이라고 여기는 그들의 생각과, 우리의 놀이를 일로 여기는 우리의 생각에는 언제나 깊은 간극이 있죠. - P236

우리는 속세의 모욕이라는 끝없는 십자가에 못 박힌 채,
저 아래에 계속 머물러야 할 운명이니까.
‘인간의 아들임을, 우리 광대들도 인간의 아들이라는 것을 잊지 말지어다." - P237

"우리에게 한가지 특권은 있지. 내쫓기고 무시당하는 우리의 신분을 뭔가 근사하고 귀중하게 만들어줄 아주 중요한 특권말이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얼굴을 창조해낼 수 있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만든다니까." - P240

나처럼, 우리처럼, 또 젊은 친구, 자네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모습을 만드는 일은 극소수에게만 허용되지. 어떤 크레용으로 칠할까를 놓고 즐겁게 망설이다가 바로 그 선택의 순간에 말이야. 내가 어떤 눈을 가질지, 어떤 입을 가질지는.…….완전히 자유라고. 그러나 일단 그 선택이 이루어지면 난 그에 따라 영원히 ‘부포‘라는 존재가 되는 형벌을 받는 거야. 영원한 부포, 부포 대왕 만세! 어디선가 어떤 아이가 나를 놀랍고 신기하고 괴물 같은 존재, 그리 창조되지 않았다 해도, 애들에게 더러운 세상의 더러운 삶의 방식에 대한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해서 필요한 무언가로 기억하는 한 영원하겠지! - P241

"그렇지만," 부포가 말을 이었다. "나는 과연 내가 창조해낸 부포인가? 아니면 내가 내 얼굴을 부포의 얼굴로 보이게 만들었을 때, 나는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나 아닌 다른 자아를 창조해낸 걸까? 그리고 이 부포의 얼굴이 없다면 나는 누구지? 자, 그건 아무것도 아닌 거야. 내 분장을 다 지워낸 그 아래는 그저 부포가 아닌 거야 텅 빈 부재. 텅 빈 공허라고." - P241

"때로는." 그록이 말했다. 이 얼굴이 어디선가 육체에서 분리된 채 자기 스스로 존재하는 것 같아요. 그 얼굴을 취할 광대를 기다리면서, 얼굴에 생명을 줄 광대를 기다리면서 말이에요. 알 길 없는 분장실 거울 안에서, 마치 더러운 연못에 있는 물고기처럼 거울의 심연 속에서 보이지 않게 된 얼굴 말이에요. 이 얼굴이 자신에게 없는 것을 찾아 자신이 반사된 모습을 초조하게 살피는 사람을 발견하면, 물고기는 말없는 깊은 심연에서 솟구쳐 올라올 거예요. 식인물고기가 당신의 존재를 통째 삼키고 대신 다른 것을 주고자 기다리고 있는 거죠......"
"하지만 오랜 동료인데다 백전노장인 우리라면." 그릭이 말했다. "분장하는 데 뭐 하러 거울이 필요하겠어요? 아니 필요없어요. 나한테 필요한 거라곤 내 오랜 옛 친구의 얼굴을 들여다보는 것뿐이죠. 우리가 우리 얼굴을 함께 만들 때,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서로의 샴쌍둥이를 간과 폐장을 나누어쓸 만큼 강력한 유대로 묶인 가장 가깝고도 친근한 사람을 만들어내는 거죠. 그릭이 없으면 그록은 불완전한 음절, 프로그램에 적힌 오타 아니면 광고판 위의 간판장이가 하는 딸꾹질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지요.
내가 없다면 그록도 마찬가지지요. 오, 젊은 친구, 5월 초하루 양반, 그릭과 그록이 만나서 두 개의 무익함을 공유하기전까지, 하나의 얼굴 즉 우리의 얼굴을 위해 각각의 텅 빈 얼굴을 내버리기 전까지 우리의 무능한 존재를 물어버리기 전까지, 무능함의 변증법에 따라 그것이 각부의 총합 이상으로 변하기 전까지는 과거 우리가 얼마나 무능했는지 어찌 말할수 있겠습니까. 무능함의 변증법이란 바로 이거죠. 무 더하기 무는 무한이다. 단・・・・・・더하기의 속성만 알고 있다면 말입니다."
이들은 스스로가 변증법의 방정식을 도출한 까닭에 속을 볼 수 없는 분장 아래서도 만족감으로 빛났다. 그러나 부포는 아무것도 도출해내지 못했다.
"허튼소리." 그는 걸쭉한 트림을 쏟아내며 말했다. "미안하오. 그러나 녀석들, 내 오랜 친구들, 무에서 나올 것은 무라오. 그것이 무의 영광이지." - P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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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써가 처음으로 분장을 했을 때 그는 거울을 들여다보면서도 누구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거울 속에서 호기심에 차 자신을 되응시하는 낯선 사람을 찬찬히 살펴보면서, 그는 아찔한 자유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기분은 그가 대령과 지내는 내내 결코 증발해 날아가버리는 일은 없었다. 단원들이 서로 헤어진 최후의 순간까지, 그리고 월씨가 지금껏 알아온 그자신의 자아가 스스로에게서 분리된 최후의 순간까지, 그는 가면 뒤에서 위장한 채 자유를 경험했다. 그는 존재와 유희를 벌일 자유를, 그리고 정말로 우리 존재에 필수적이면서 익살극 한가운데 있는, 언어와 유희를 벌일 자유를 경험한 것이다. - P205

톱밥이 깔린 써커스장, 이 작고 동그란 터는 얼마나 값싸고 편리한 표현설비인가! 눈알처럼 둥글고 가운데에는 계속 소용돌이가 인다. 그러나 마치 알라딘의 마술램프처럼 살짝 문질러주기만 하면, 그 즉시 써커스장은 그 오래된 은유적 의미에서의, 제 꼬리를 문 둥근 뱀, 완전한 원으로 돌아가는 바퀴로 변한다. 끝이 시작이기도 한 바퀴, 운명의 바퀴, 우리의 진흙 형상이 빚어지는 도예가의 바퀴, 우리 모두가 부서지는 삶의 바퀴로 변하는 것이다. 오, 경이롭도다! 오, 슬프도다! - P212

광대골목이란 모든 광대들의 숙소를 일컫는 포괄적 명칭으로, 쌍뜨뻬쩨르부르그에서 임시 거처는 마치 이슬처럼 벽에서 뚝뚝 습기가 떨어지는 썩은 목조가옥이었는데, 마치 감옥이나 정신병원 같은 우울한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그중 광대들은 폐쇄된 기관의 수감자 중에서도 수족이 잘린 환자들 같은 침묵을, 즉 자기 스스로 결정한 끔찍한 존재자의 인내심을 끌어냈다. 저녁시간이면 흰 얼굴들이 식탁 위로 둥글게 모였고, 그들은 할머니의 생선수프에서 피어오르는 시큼한 김에 흠뻑 젖었고, 데스마스크처럼 겉보기에는 생명이 없는 존재들만 같았다. 마치 본질적 의미에서 광대들 자신은 식사에 참여하지 않았고 광대의 복제품 뒤엔 그 어떤 사람도 들어 있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 P229

"광대짓의 묘미란, 변하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점에 있지." -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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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위에 있는 거대한 시계의 분침이 표면 위로 조금 움직였다. 이제 도심을 향해 물결을 이룬 덜걱거리는 마차 행렬의 흐름과는 반대편으로, 웨스트민스터 다리 너머 안개 자욱한 남쪽을 향해 여자들이 출발했다. 키 차이 때문에 그들은 팔짱을 끼고 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손을 잡고 걸었는데 멀리서 보니 금발의 당당한 어머니가 서쪽에서 불운한 탐험을 마치고 돌아온 어린 딸을 집으로 데리고 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나이도 불분명해 보였고, 관계도 역전되어 보였다. 가난이 힘겹게 지나가듯 그들의 발이 질질 끌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 또한 환각이었다. 다이아몬드가 쏟아지고 진주가 들이부어져도 그녀는 돈에 인색한 나머지 마차조차 타지 않았다. - P182

어떤 사람은 바보로 태어나고 또 어떤 사람은 바보로 만들어지고, 또 어떤 사람은 스스로 바보짓을 해 놀림거리가 되지. - P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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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에겐 아직도 뭔가 약간 미완성인 구석이 있었다. 집으로 치면 가구 딸린 멋진 셋집 같았다. 인성에는 조금도 개인적인 것이라 불릴 만한 요소가 거의 없었다. 마치 좀처럼 믿지 않으려는 습관이 자신의 존재에까지 확산된 것처럼 말이다. 단언컨대, 그는 ‘적기 적소에 출현하는‘ 경향은 있지만, 그 자신이 흡사 발견된 대상과 같았다. 그가 찾고자 한 것이 자기 자신은 아닌 까닭에, 주체적으로 자기 자신은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 P14

이 시계는 마 넬슨의 자그마한 개인적 영역을 나타내는 뭐랄까, 기호랄까 신호랄까 그런 거였어요. 문자반 위 한쪽 바늘엔 낫이, 다른 바늘에는 해골이 달린 아버지상의 괘종시계였는데, 두 바늘이 언제나 자정이나 정오를 가리키고 있어서, 분침과 시침은 마치 기도하는 두 손처럼 영원히 포개져 있었죠. 접견실에 있는 이 시계는 낮이나 밤의 부동의 중심을,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시각을, 선견과 계시의 순간을, 시간의 폭풍 한가운데 있는 정적의 순간을 보여줘야 한다고 마 넬슨이 말했기 때문이에요.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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