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간순이‘로서 새롭게 깨달은 바가 있다면, 음식의 맛에는 화학적 작용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마법적 작용이 숨어 있다는 것이다. 첫맛이 주는 놀라움 속에는 어린 나를 동료처럼 존중해준 어머니의 ‘신뢰‘라든가, 내게 맛있는 감자탕을 먹이고 싶어한 남자친구의 ‘애정‘ 같은 마법의 조미료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목구멍에서 국자가 튀어나오는 고통을 느끼며, 잊지 못할 첫 국물의 맛을 그리워하는 것이다. - P184

음식은 위기와 갈등을 만들기도 하고 화해와 위안을 주기도 한다. 한 식구란 음식을 같이 먹는 입들이니, 함께 살기 위해서는 사랑이나 열정도 중요하지만, 국의 간이나 김치의 맛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식구만 그런 게 아니다. 친구, 선후배, 동료, 친척 등 모든 인간관계가 그렇다. 나는 사람들을 가장 소박한 기쁨으로 결합시키는 요소가 음식이라고 생각한다. 맛있는 음식을 놓고 둘러앉았을 때의 잔잔한 흥분과 쾌감, 서로 먹기를 권하는 몸짓을 할 때의 활기찬 연대감, 음식을 맛 보고 서로 눈이 마주쳤을 때의 무한한 희열. 나는 그보다 아름다운 광경과 그보다 따뜻한 공감은 상상할 수 없다. - P189

모든 음식의 맛 속에는 사람과 기억이 숨어 있다. 맛 속에 숨은 첫 사람은 어머니이고, 기억의 첫 단추는 유년이다. - P19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봄이 천천히 오고 있나 봐. 겨울이 섭섭하지 않게."

불현듯이
따스한 봄날의 오후.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한 줄기 햇살을 맞고 있으면 가끔 무언가가 바람을 타고 와 책상에 툭 떨어진다.
연분홍색 꽃잎이다.
보리랑 놀러 나가야겠다.
이 두근거림을 마음에 담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고 푸른 땡초가 뜬 검은 초간장은, 후배의 어머니가 만든 땡초전의 꽃 핀 초원에 어둠이 내린 풍경과도 같다. 그렇게 나도 어두워지고, 꽃 같던 후배와 친구의 기억도 점점 어둠 속에 묻혀간다. - P64

우리가 먹는 얘기를 그토록 끈질기게 계속하는 이유는, 먹는 얘기를 도저히 멈출 수 없는 까닭은, 그것이 혀의 아우성을 혀로 달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혀의 미뢰들이 혀의 언어를 알아듣고 엄청난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 P15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만 내가 아직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있다면, 혼자 순댓국에 소주 한 병을 시켜 먹는 나이 든 여자를 향해 쏟아지는 다종 다기한 시선들이다. 내가 혼자 와인 바에서 샐러드에 와인을 마신다면 받지 않아도 좋을 그 시선 들은 주로 순댓국집 단골인 늙은 남자들의 것이다. 때로는 호기심에서, 때로는 괘씸함에서 그들은 나를 흘끔거린다. 자기들은 해도 되지만 여자들이 하면 뭔가 수상쩍다는 그 불평등의 시선은 어쩌면 ‘여자들이 이 맛과 이 재미를 알면 큰일인데‘ 하는 귀여운 두려움에서 나온 것 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한결 마음이 편해진다. 두려움에 떠는 그들에게 메롱이라도 한 기분이다. 누가 뭐래도 나는 요절도 하지 않고 불굴의 의지로 반세기 가깝게 입맛을 키우고 넓혀온 타고난 미각의 소유자니까. - P26

왕짱구 분식의 만두는 갈쭉하니 한 입에 먹기 딱 좋은 크기로, 얇고 쫄깃한 피 속에 고기와 야채가 들어 있고 씹으면 뜨거운 육즙이 살짝 배어 나오는, 맛이 아주 기가 막힌 만두였다. 그날 선배들은 만두를 인원수에 맞게 3의 배수로 주문했고, 우리는 도합 12인분의 만두를 먹 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두 가지의 깨달음을 얻었다. 선배들의 대붕 같은 뜻을 참새같이 방정맞은 내 생각으로 섣불리 재단해선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만두는 더할 나 위 없이 술과 잘 어울린다는 것. - P34

왕짱구 분식은 없어진 지 오래이다. 지금은 칠십 대가 되었을 그들 부부는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그리고 오래전 내게 큰 깨달음을 주었던 그 선배들은 또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을까. 고작 나보다 두 살밖에 많지 않았는데도 그 당시 내 눈에는 모르는 게 없어 보였던, 잘 빚은 만두처럼 적당히 미끈하고 적당히 쫀득했던 그들은...... - P3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넌 모르지? 뭘? 내가 얼마나 널 좋아하는지. 그때 그의 눈빛은 모든 것을 주고 싶은 자의 눈빛이었다. 햇살이 꺾일 때까지, 뼛속으로 스미는 봄바람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숲속에 누워 있었다. - P60

그때의 블러디는 서로의 손목을 날카로운 면도칼로 긋고 너의 동맥 속에 내 피를 흘려 넣고 싶었던, 혀를 깨물어 흘러나오는 너의 피를 삼키고 싶던 블러디였어. 델 만큼 뜨거웠던 39도의 블러디였고 너는 나의, 나는 너의 심장 자체를 원했던 블러디였지. - P61

유선은 누군가에게 이 속을 꼭 한 번은 열어 보이고 싶다. 사람 없는 갈대숲을 맨발로 달려가 갈라진 벌판의 갈대 뿌리 틈으로, 나는요, 하고 소리 지르고 싶다는 생각을, 그러나 지워 버린다. 개인적인 고통을 증언하는 건 스스로 모자란 사람임을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 P64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빛을 내는구나. 들리지 않는 탄성이 숨어 있었구나.
난 몰랐어. - P65

뜨거운 커피에 얼음을 넣어서 마시고 싶어. 차가움과 뜨거움이 동시에 혀에 감기는 그런 커피.
유선은 제 속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그런 뜨거움과 차가움이 제각각의 온도를 유지한 채 엉겨 있음을 바라본다. - P66

딸에겐 완벽했던 아빠. 7년 동안 연인이 되어 주었던 아빠. 한 점의 실체도 없는 환영이란 결점이 없어서 위험한 것이다. 누추하고 비굴하고 무능한 인간의 모습을 목격할 기회를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아이에게 아빠는 언제까지나 완벽한 남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한 공간에서 숨 쉬고 밥을 먹고 타인에게 야비해질 수 있으며 사소한 일에 분노를 참지 못하는 치사한 모습을 보면서 아빠도 제 속에 있 는 것들과 같은 문제와 결함을 가진 인간임을 알아가게 될 기회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대답이 되지 못할 것들이 유선의 가슴속에 깨진 유리 조각이 든 자루처럼 담겨 있다. 딸에게 영원히 완벽한 아빠로 존재하려면 그의 파일들은 유선의 가슴속에만 묻혀 진 채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 P69

너무도 익숙한 그의 얼굴 대신, 그 모든 것들이 검은 인화지 위에 판독할 수 없는 암호처럼 엉기어 있었다. 눈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보그처럼 유선은 의아한 표정으로 사진 속의 어둠을 오래 응시했다. - P7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