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모르지? 뭘? 내가 얼마나 널 좋아하는지. 그때 그의 눈빛은 모든 것을 주고 싶은 자의 눈빛이었다. 햇살이 꺾일 때까지, 뼛속으로 스미는 봄바람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까지 숲속에 누워 있었다. - P60
그때의 블러디는 서로의 손목을 날카로운 면도칼로 긋고 너의 동맥 속에 내 피를 흘려 넣고 싶었던, 혀를 깨물어 흘러나오는 너의 피를 삼키고 싶던 블러디였어. 델 만큼 뜨거웠던 39도의 블러디였고 너는 나의, 나는 너의 심장 자체를 원했던 블러디였지. - P61
유선은 누군가에게 이 속을 꼭 한 번은 열어 보이고 싶다. 사람 없는 갈대숲을 맨발로 달려가 갈라진 벌판의 갈대 뿌리 틈으로, 나는요, 하고 소리 지르고 싶다는 생각을, 그러나 지워 버린다. 개인적인 고통을 증언하는 건 스스로 모자란 사람임을 광고하는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 P64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빛을 내는구나. 들리지 않는 탄성이 숨어 있었구나. 난 몰랐어. - P65
뜨거운 커피에 얼음을 넣어서 마시고 싶어. 차가움과 뜨거움이 동시에 혀에 감기는 그런 커피. 유선은 제 속에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그런 뜨거움과 차가움이 제각각의 온도를 유지한 채 엉겨 있음을 바라본다. - P66
딸에겐 완벽했던 아빠. 7년 동안 연인이 되어 주었던 아빠. 한 점의 실체도 없는 환영이란 결점이 없어서 위험한 것이다. 누추하고 비굴하고 무능한 인간의 모습을 목격할 기회를 더 이상 가질 수 없는 아이에게 아빠는 언제까지나 완벽한 남자로 남아 있을 것이다. 한 공간에서 숨 쉬고 밥을 먹고 타인에게 야비해질 수 있으며 사소한 일에 분노를 참지 못하는 치사한 모습을 보면서 아빠도 제 속에 있 는 것들과 같은 문제와 결함을 가진 인간임을 알아가게 될 기회를 상실해 버린 것이다. 대답이 되지 못할 것들이 유선의 가슴속에 깨진 유리 조각이 든 자루처럼 담겨 있다. 딸에게 영원히 완벽한 아빠로 존재하려면 그의 파일들은 유선의 가슴속에만 묻혀 진 채로, 남아 있어야 할 것이다. - P69
너무도 익숙한 그의 얼굴 대신, 그 모든 것들이 검은 인화지 위에 판독할 수 없는 암호처럼 엉기어 있었다. 눈물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이보그처럼 유선은 의아한 표정으로 사진 속의 어둠을 오래 응시했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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