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잠에서 깨어나 말했다.
들개가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그러자 여자가 대답했다.
이젠 들개가 아니라, 첫 번째 친구라고 불러야지.
왜냐하면 이제부터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우리의 친구로 남을 테니까.
- 러디어드 키플링

당신 개의 눈을 바라보라. 영혼이 없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을 것이다.
- 빅토르 위고

개의 수명은 너무 짧다. 정말이지, 그것이 개들의 유일한 단점이다.
- 라이너 마리아 릴케 - P5

누가 알았겠니, 삶에선 가끔, 웃기 위해서 울어야 할 때도 있다는 걸.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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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일로 후회라는 걸 해보면 불행해질 만한 일을 한 적 없는 자신이 딱 한 걸음을 잘못 내디뎌서 그 모든 불행을 겪게 됐다는 믿음도 사실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 P14

미래를 향해 물어보고 싶다. 그만 포기해야 할지, 계속 노력하는 게 옳을지.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든다. 실패할 것이 확실한 상황에서 기울이는 노력이 성취만큼 근사하게 느껴질 수도 있잖아. 그럼 어쩌지? 실패가 성취보다 오히려 더 근사하면 어쩌지? 그래서 고민은 원점으로 돌아오고. - P15

공포는 당신의 내면에서 하룻밤을 묵힌 두려움이다. - P16

슬퍼하다 보면 때가 온다. 다른 사람들이 이제 당신은 충분히 슬퍼했다고 결론 내리고 그 슬픔을 빼앗아가려 하는 때가. - P16

당신의 어머니가 어떤 일을 겪으며 살아왔는지 당신은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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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에 모든 것이 끝일 수는 없다. 내 나이에 무미건조한 낮과 고독한 밤을 보낼 수는 없다. - P363

모든 세대별로 개인의 실패를 전가할 수 있는 전쟁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제 미켈레가 안락의자에 앉아서 하루를 보내는 내 아버지처럼 단조로운 삶을 살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다급해졌다. - P364

"리카르도는 아직 어려서 사랑에 상응하는 대가가 있다는 것을 몰라.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사랑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이야." - P380

종종 느끼는데 내가 부러워하고 감탄하기도 하는 남편의 힘은 함부로 다가갈 수 있게 허락하지 않는 결단력에서 나오는 것 같다. 돈을 벌기 위해 일하고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신문을 읽는다는 명분 아래 그는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방어할 수 있는 혜택을 누렸다. - P387

그에 비해 나의 임무는 나를 짓밟게 내버려두는 것이다. 실제로 일기를 쓸 때마다 엄중한 죄나 신성 모독을 저지르는 것만 같다. 일기를 쓰는 것이 악마와 대화를 나누는 것 같다. 일기장을 펼칠 때마다 두려워서 항상 손이 떨렸다. 미래의 내 일상을 담을 준비를 마친 평행선으로 가득한 빈 종이를 보면, 다가오지도 않은 미래가 벌써부터 부담스럽다. 모든 일에 대한 나의 반응을 세세히 기록하면서 매일 나의 깊은 내면을 알아간다. 자기 자신을 알면 알수록 발전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반대로 나를 알면 알수록 혼란스러웠다. 사실 이토록 꾸준하고 냉혹한 분석 앞에 어떤 감정이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 P387

자신의 모든 행동을 되돌아볼 때마다 항상 만족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일단 삶의 행동 지침을 정하고, 자기 자신과 타인을 통해 이에 대한 확신을 얻으면, 그러한 지침에 모순됐던 행동이나 선택은 잊어야 한다.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버려야 한다. 어머니는 기억력 나쁜 사람이 행운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 P388

"거기서는 그 누구와도 마주칠 일이 없을 거야. 당신, 비첸차에 가본 적 있어? 정말 아름다운 곳이야."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비첸차에서도 우리는 죄수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금지된 도시의 빛을 보지 못하듯 그곳에서도 대운하가 보이는 창문이 없을 테니까. - P391

평생 집안일을 하고 자식들을 돌보느라 쉬지도 못하고 은퇴하지도 못하는 여성이 오히려 특권을 누리는 것 같다. 덕분에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일과의 끈을 끊지 못하니 말이다. 때로는 부모님이 하찮은 일로 언쟁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자기들이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잊을 수 있는지 의아했다. 어쩌면 두 분은 아직 살아있다는 이유만으로 매일 승리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면 죽음은 미지의 영역이라 상상하지도 두려워하지도 못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인생을 알려고 시도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인생을 이해하고 잘 살려고 노력하려다 오히려 제대로 삶을 즐기지 못하게 될 수도 있으니까. - P403

가족들은 이 시간에 모두 잠을 잔다. 수면은 전날의 무게를 느끼지 않고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도록 지난 하루 동안 겪은 모든 일을 지워버린다. 하지만 나는 탕감받지 못한 빚을 기록하는 장부처럼 어제의 일을 일기장에 보관하고 있다. - P406

나는 두 개의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이다. 그중 하나는 전쟁과 함께 사라졌고, 다른 하나는 전쟁과 함께 나타났다. 그리고 지금은 그 두 세계가 내 안에서 충돌하며 신음하고 있다. 종종 내 자신이 실체가 없는 것처럼 느끼는 것도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이 충돌의 통로일 뿐일지도 모른다. - P410

미렐라는 그런 내 감정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어쩌면 미렐라는 그런 내 감정을 경멸하는지도 모른다. 자신만의 삶의 방식으로 나에게 반항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렐라는 자신을 자유롭게 만든 것이 나라는 사실을 모른다. 내가 낡은 전통과 새로운 요구 사이에서 불안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 P410

오늘 저녁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처음 일기를 쓰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나는 내가 삶의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시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일기를 쓰며 오랜 사유를 통해 얻은 경험을 포함한) 내 모든 경험은 삶이란 결국 결론을 내리려는 절박한 노력과 실패의 반복일 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적어도 내 삶은 그랬다. - P411

모든 것에는 선과 악, 정의와 불의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다. 심지어는 유한함과 무한함까지도. 젊은이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그렇기에 모두 리카르도 같거나, 아니면 미렐라 같은 거다. - P411

미렐라는 자기도 상처를 받고, 엄마에게도 상처를 줄 수밖에 없는 이야기를 최대한 빨리 해치우려는 듯 간결하게 대답했다. 미렐라가 자신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 취하는 냉정한 태도가 내 삶이 휩쓸려 가도록 내버려두는 나의 나약함보다 차라리 더 선량한 것이 아닌가 싶었다. - P416

아이들에게 생명을 준 순간은 내가 살면서 미렐라처럼 자신이 하는 일에 뚜렷한 자의식을 가진 유일한 순간이다. 미렐라가 여성 특유의 죄책감에서 자유로운 것은 자의식 덕분이다. 그에 비해 나는 언제나 죄책감에 억눌려 산다. 미렐라는 자의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리카르도는 자신의 나약함을 바탕으로 연민을 자아낸다. - P417

지금도 마찬가지다. 벌써 새벽 네 시가 다 되어간다. 이런 식으로 살 수는 없다. 피로는 나를 나약하게 만든다. 나쁜 생각을 하게 만든다. 평생 내 모든 것을 가족에게 다 주었는데도 아직도 뭔가를 주어야만 할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을 간절히 기다린다. 글을 쓰기 위해서. 젖이 너무 많아서 아픈 가슴처럼 넘칠 것 같은 내면의 강물을 마음껏 흐르게 하려고, 그러기 위해 이 공책을 산 것이다. - P419

일기장을 산 날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늦가을이었는데 하늘은 푸르렀고, 봄날처럼 햇살이 따스했다. 그날 나는 혼자였는데 그토록 화창한 날에 혼자이면 안 될 것 같아 일기장을 팔에 끼고 집에 돌아왔다. 귀도가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아마 일기장을 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일기장을 사지 않았다면 아예 귀도에게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는 나 자신에게도 신경 쓰지 않았으니까. - P419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기억력이 좋지 않았다. 어쩌면 본능적인 방어기제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삶이란 결국 길고 힘겨운 산책일 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사는 편이 낫다. 때때로 희망이 가는 길을 동반해주지만, 결국 누구도 그 희망을 실현시키지는 못 한다. - P420

온기가 필요하다. 몸이 꽁꽁 얼어붙었다. 이제 곧 동이 틀 것이다. 창문으로 새벽빛이 비친다. 다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혐오감을 느낀다. 하지만 이 시간의 잿빛 고독은 나를 급하게 만든다. 한 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수많은 날로 구성된다. 더 늦기 전에 행복해지고 싶다. 이 일기장의 두께만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을 살았다. 종이의 무게와 빽빽한 나의 글씨는 그러한 나의 삶을 물리적으로 보여준다. - P420

나 자신을 방어해야 한다. 사랑을 포기하고 고약한 구두쇠 노인이 되고 싶지 않다. 이제 날이 완전히 밝았다. 참새가 지저귀며 아침과 인사하고, 태양은 건너편 집 창문에 밝은 불꽃을 비춘다. 사무실에 가서 기쁜 표정으로 문을 활짝 열 것이다 - P420

"여기서와 마찬가지로요. 당신 차에서나 카페에서 주변을 살필 때처럼요. 우리는 영원히 철창을 무너뜨리지 못할 거예요. 그 철창은 외부가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거니까요. 난 끊임없이 거짓말을 하고 핑곗거리를 둘러대겠죠. 이중생활이 부담스러워서 이러는 게 아니에요. 난 전형적인 소시민이고, 용기와 자유보다는 죄책감에 더 익숙한 사람이죠. 문제는 우리가 죄책감 이외에는 공유할 것이 없다는 거예요. 당신에겐 당신의 삶이 있고, 내겐 내 삶이 있어요. 당신 입으로 말했잖아요. 적응하기에 우리는 너무 늙었다고, 적응은 일시적인 것이고 우리 나이에는 가질 수 없는 희망을 전제로 하죠." - P423

"나도 잘 모르겠어요. 뭐라 설명할 수는 없지만, 죄책감 없이 누릴 수 있는 권리만 누려야 할 것 같아요. 내겐 가족이 없는 사랑은 명분이 없어요. 죄일 뿐이에요. 당신 말이 옳아요. 하지만 나는 이런 사람이고, 당신은 그런 사람이에요. 당신은 당신 주변 사람들이 저지른 죄를 명분으로 당신의 죄를 가볍게 하죠. 하지만 미렐라는 정당화할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했어요. 열정과 본능은 사랑이 아니라고요···" - P424

솔직히 나는 돈이 우리를 갈라놓는다고 생각한다. 돈은 내 안에 저급하고 불온한 새로운 욕망을 부추겼다. 그것은 귀도가 가진 것을 소유하고픈 욕망이었다. 불안하고 무방비 상태인 나와는 달리 그를 자신감 있게 만드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 P425

어제저녁에는 일기를 쓸 수 없었다. 귀도와 힘들게 이야기를 하고 나니 명치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혼란스러웠다. 집에 오자마자 침실에 가니 미켈레는 이미 침대에 누워 무언가를 읽고 있었다. 나는 그의 옆에 몸을 꼭 붙였고, 그는 여전히 책을 읽었다. 나는 여느 저녁처럼 잠든 척했다. 가끔 미켈레도 나처럼 잠든 척했으리라. 각자의 고뇌 속에서 잠들지 못하면서도 동반자가 눈치채지 못하게 잠든 척하는 것이야말로 모범적인 결혼 생활의 정석이다. 나는 서서히 정말로 잠이 들었다. - P427

일기장에 쓴 글을 보면 나는 겁이 난다. 적나라하게 표현된 나의 모든 감정이 썩어 문드러져 독이 될 것만 같다. 판사가 되고 싶었는데 죄인이 된 것 같다. 일기장을 없애야 한다. 삶의 매시간 같은 일기장의 매 페이지에 숨어 있는 악마를 없애야 한다. 저녁에 다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있을 때면 모두 솔직하고 충실하고 계략 따위는 꾸미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는 아무도 자신의 본모습을 드러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수치심 때문이든 악의적인 감정 때문이든 우리는 본모습을 숨기고 변장한다. - P428

일기 속 내 모습이 더 진실했는지, 아니면 나를 초상화처럼 아름답게 남길 수 있도록 굴던 행동에서 더 진실했는지 자문해본다. 잘 모르겠다. 정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 P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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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 클라라는 사랑이란 매일 새로 만드는 거라고 했다. 실제 삶에서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내가 단 한 번도 사랑을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사실은 안다. - P336

집 안 어디에도 아이들이 없는 곳이 없었다. 밤에 어둠이 내려오면 침묵 속에서 말 한마디, 신음 한마디 새지 않게 조심하고, 다음 날 아침이면 아이들이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우리의 시선에서 읽어낼까봐 아무런 기억이 없는 척해야 했다. 집에 아이들이 있으면 서른 살밖에 안 됐어도 이미 청춘이 아니다. 아이들이 있으면 아이들과 놀아주고 함께 웃을 때 빼고는 엄마 아빠 역할만 연기해야 한다. 아이들이 우리가 내는 소리를 듣거나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상상하지 못하게 집에서 나가기를 기다리다 보니 어느새 정말로 젊음을 잃어버렸다. 벽 너머로 아이들 목소리가 들려오면, 잠을 자겠다면서 열쇠로 문을 걸어 잠그고 들어간 방에서 남편과 아내로서 몸을 섞는 것이 불편하고 불결한 행위가 되어버린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나 심지어는 불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몰래 임대한 방이나 호텔이나 독신남의 아파트에서 만나 저지르는 죄악보다 더 큰 죄악처럼 느껴진다. - P341

가끔은 일기를 쓰는 대신 남편 곁에 앉는다. 서로를 더욱 잘 이해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이제야말로 정말로 함께 잘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감정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고백할 수만 있다면 말이다. 장기적으로 부부 사이를 멀어지게 하는 신중함이 단순히 안 좋은 것인지 아니면 일종의 방어기제인지 잘 모르겠다. - P356

그가 처음으로 사무실 밖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백했던 날이 생각난다. 그때부터 그는 내게서 돈이 줄 수 없는 확신을 기대하는 것 같다. 우리 둘의 관계에서도 무언가가 변한 것 같다. 어쩌면 그가 자기와 함께 나가자고 했을 때 거절했어야 했다. 몰래 길모퉁이에서 만나 이제는 우리의 만남의 장소가 되어버린 카페에 누군가 들어올 때마다 흠칫 놀라는 짓을 하지 않았어야 했다. 모든 것이 일 이야기만 하고, 매주 토요일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주고 오랜 세월 함께 일해온 사무실만을 공유하던 때보다 덜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둘 다 사무실에 있을 때와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된 것 같기도 하다. 우리는 현재 각자의 삶과는 다른 삶에서 만나기를 원했다. - P358

나는 잠들기 전, 젊고 아름답고 우아하고 이 호텔 저 호텔에 묵으며 여행하면서 스파에 다니는 여자가 되는 상상을 하곤 했다. 사람들이 모험가라고 부르는 그런 여자 말이다. 단 하루, 하룻밤이라도 그런 여자가 되는 상상을 했다. 내 이름도, 출신도 모르는 남자와 만나는 상상을 했다. 그런 상상을 하다보니 서서히 전에는 미처 몰랐던 수많은 욕망이 내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무엇보다 미켈레와는 아주 다른 남자에게서, 미켈레와는 다른 방식으로, 내가 알아온 방식과는 다르게 사랑받는 상상을 하는 것이 좋았다. 나는 그렇게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집으로 돌아가는 상상을 했다. 내가 일탈한 사실을 아무도 모르는 집으로 말이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면 안심이 됐다. - P359

나는 일기를 쓰고 싶은 마음에 혼자 있고 싶었다. 가족 안에서도 자신만의 고독 속에 고립되고자 하는 이는 이미 죄악의 싹을 품고 있는 거다. 실제로 일기장을 읽어보면 모든 것이 사실과는 다르게 느껴진다. 귀도를 향한 내 감정까지도. 일기에서는 극복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나의 나약함이 그의 돈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감히 그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지 못하고 불가항력의 외적인 힘으로 인해 나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거라고 나 자신을 속이려 든다. 나를 이끄는 가장 강한 감정은 비겁함이다.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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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타인과 비교할 때 생기는 문제는 너무 많은 타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타인 전체를 대조군으로 삼으면 당신이 가장 끔찍하게 두려워하는 것과 가장 낙관적으로 바라는 것이 동시에 현실로 다가온다. 자신이 좋은 사람인 동시에 나쁜 사람인 것처럼, 비정상인 동시에 다른 모두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인 것처럼 느껴진다. - P7

우리 집 근처에 사는 물새들은 마치 중학생 같다. 검둥오리들은 목소리가 갈라졌고, 갈매기들은 오리들을 못 살게 굴고, 방금 치아 교정기를 낀 듯한 백로는 자존심 상한 얼굴로 혼자 서 있다. - P8

꽃병처럼, 마음도 깨지는 건 처음 한 번이다. 그다음에는 이미 가 있는 금들을 이겨낼 수 없을 뿐이고. - P9

facility라는 단어는 병원이라는 뜻이지만 그 밖에도 건물에서는 감옥을, 예술에서는 생명력 없음을, 운동선수에게서는 우아함을 의미할 수 있다. 겉으로는 완벽해 보이는 몸짓이라도 그 안에는 틀림없이 인간의 심장이 뛰고 있을 것이다. - P11

학교에 다닐 때 술에 취해 필름이 끊겼다가 깨어나서 주위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걸로 유명했던 한 여학생이 기억난다. 저를 심판하러 오셨나요?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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