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내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제는 헤어질 때라는 것. 문득 우리 네 사람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보였다. 마치 우리가 공통점이 아주 많은 것처럼, 그리고 한 가족인 것처럼. 나는 우리가 세상 사람들이 쓸모없다고 여기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임을 깨달았다. 본질적이고 생산적인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중요한 아이디어도 내놓지 않으며, 필요한 물건이나 식량을만들어 내지도 않고, 땅을 경작하지도 않고, 경제 활성화에 보탬이 되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자손을 번성시킨 것도 아니다. 검정코트를 아들로 둔 괴짜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지금껏 우리는 세상에 유용한 뭔가를 제공한 적이 없다. 그 어떤 발명품도 고안해 내지 못했다. 우리에게는 권력도 없고 보잘것없는 재산 말고는 다른 자원도 없다.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하고 있지만 남들은 그것을 조금도 대단하게 여기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라진대도 변하는 것은 없을 것이다. 아마 아무도 그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 P339

하지만 왜 우리는 꼭 유용한 존재여야만 하는가, 대체 누군가에게, 또 무엇에 유용해야 하는가? 세상을 쓸모 있는 것과 쓸모없는 것으로 나누는 것은 과연 누구의 생각이며, 대체 무슨 권리로그렇게 하는가? 엉겅퀴에게는 생명권이 없는가? 창고의 곡식을훔쳐 먹는 쥐는 또 어떤가? 꿀벌과 말벌, 잡초와 장미는? 무엇이 더 낫고 무엇이 더 못한지 과연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까? 구멍이 많고 휘어진 거목은 사람에게 베이지 않고 수세기 동안 살아남는다. 왜냐하면 그 나무로는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본보기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에게 용기를 준다. 유용한 것으로부터 얻어 낼 수 있는 이익은 누구나 알지만, 쓸모없는 것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P340

솔직히 말해 나는 ‘밀렵‘과 ‘사냥‘의 차이를 모르겠다. 두 단어 모두 살상을 의미하니까. 전자는 은밀하고 불법적인 방식이고, 후자는 법의 권위를 등에 업은 채 공공연히 저질러진다는 차이만 있을 뿐. - P348

로베스피에르처럼 차가운 분노로 무장한 ‘외과 의사‘를 연상시키는 검찰이 경찰로 하여금 점성가의 재물과 재산을 압수하고, 그를 감옥에 가두게 했다. 별의 신호를 읽을 줄 아는 사람은 종종 그 별들의 영향력에 압도당한다. 별을 읽지 않거나 읽을 수 없는 뉴턴과 같은 사람은 또한 자신의 추론과 실험에 압도당한다. 그러니 결국 우리는 모두 실수와 오류의 대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가 범죄의 주체가 아니라고 누가 과연 말할 수 있겠는가? - P363

공감과 유대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문학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문학은 사람과 사람을 소통하게 만드는 가장 정제되고 정교한 형식입니다. 타인에게서 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잠시나마 자아를 벗어던진 채, 또 다른 ‘나‘의 모습인 타자의 세계로 위대한 여행을 떠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문학입니다. (……)인간은 실은 서로가 서로를 놀랍도록 닮은 존재라는 사실을 문학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일깨워 줍니다. 우리가 쓰고 또 읽는 한 우리는 함께입니다. - P3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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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관심을 이끌어내고 그들이 스스로의 내적 편견을 인식하게끔 하는(나아가 편견을 버리도록 하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누군가의 고통을 선정적으로 이야기하는 것 뿐일까? 나의 인간성은 어째서 내가 어떻게 희생되고 침해당했는지를 고백할 때만 가시화되고 관심을 받는 걸까? - P77

"너는 남자애가 참 착하구나. 어머니께서 뿌듯하시겠어."
이런 칭찬은 ‘좋은 남자’라는 개념에 관한 또 한 가지 문제를 드러낸다. 남자들에게는 그 문턱이 너무나 낮다는 것이다. 설거지처럼 가장 기본적인 가사노동을 거드는 것만으로도 남자들은 매일같이 화제가 된다.
내가 앞서 털어놓은 경험들이 예삿일이 되고, 종국에는 너무나 자주 인지조차 할 수 없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낮은 문턱 때문이다. 성차별적인 말들, 위협, 성추행, 사생활 침해, 공격성 등은 남자들의 ‘일반적’ 특성으로 여겨지곤 한다. 하지만 ‘일반적’이라는 말은 위험스럽게도 ‘허용 가능하다‘라는 말과 호환될 수 있다. "남자애들이 다 그렇지" 결국에는 그런 말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남성성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기를 바란다면, 우리는 예외를 갈망할 게 아니라 지금의 기준선 자체에 맞서야 한다. 아무리 어머니를 사랑하고 여자를 위해 출입문을 잡아좋고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페미니스트라 하더라도 예외는 없다. 인종주의, 동성애혐오, 트랜스혐오를 비롯한 온갖 억압을 경험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아무리 ‘전형적인 남자‘의 비난받아 마땅한 행동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해도 ‘좋은 남자’라는 신화를 영속화하고 예찬하는 한, 결과적으로 지금의 기준 선을 눈감아주는 데 공모하게 될 뿐이다. - P86

여성과 여성성을 향한 경멸은 암암리에 행해지며 여성을 사랑하는 것과 무관 하게 많은 이에게 영향을 끼친다. 경멸은 (여성학 과정에 쏟아지는 조롱을 비롯해 갖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내 아빠가 그랬듯 ‘예민하다‘는 말을 경멸조로, 통제의 기제로 사용하는 건 여성혐오의 일종이다. 엄마의 재킷 을 입었다는 이유로 내게 침을 뱉은 행동은 여성혐오였다. 호모 주제에 감히 눈을 마주쳤다며 나를 공격하려 했던 것도 여성혐오였다. 내 걸음걸이를 교정하려는 바람 또한 여성혐오였다. 마른 몸 때문에 느낀 수치심과 근육을 키우라는 게이 문화의 압력도 여성혐오였다. 동의 없이도 타인의 신체를 만질 수 있다고 전제하는 남자들의 가정도, 내가 설정하는 경계를 묵살하는 행위도 모두 여성혐오였다. 젊은 여성 승객에 대한 택시기사의 과잉 성애화도 여성혐오였다. 버스 정류장과 프라이드 축제에서 내가 받은 부당한 공격도 여성혐오였다. - P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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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적인 화려함 따위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밤이 주변의 모든 색채를 지워 버리는 것은 기묘한 일이다. - P243

나는 ‘사실‘이라는 말을 남발하는 사람이야말로 거짓말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 P260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요. 오랜 세월 함께 살아온 사람인데도전혀 알 수가 없다는 생각이요." - P281

"예전에 개를 두 마리 키웠어요. 개들은 모든 게 자기들에게 공평하게 배분되는지 항상 주시했어요. 먹이를 주거나 쓰다듬어주거나 권한을 허락해 줄 때 말예요. 동물들은 정의감이 매우 강하거든요. 내가 잘못을 저지를 때마다, 아니면 부당하게 꾸짖거나 약속을 어길 때마다 나를 바라보던 그 애들의 눈빛이 기억나요.
내가 도대체 왜 신성한 법칙을 어기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그렇게 지독히 슬픈 얼굴로 나를 바라보곤 했죠. 그 애들은 내게 아주 단순하고 기본적인 정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나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덧붙였다. "우리에겐 ‘세상을 보는 관점‘이 있지만, 동물들에게는 ‘세상을 느끼는 감각‘이 있답니다. 아시겠어요?" - P281

"모든 면에서 인간보다 더 인간적이었어요. 더 다정하고 현명하고 쾌활했죠…… 사람들은 동물들에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생명체가 아닌 물건인 양 취급하죠." - P282

나는 별들도 우리를 볼 수 있는지 궁금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들은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별들은 정말로 우리의 미래를 알까? 그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길까? 움직임의 자율성이 배제된 채 이렇게 현재에 갇혀 있는 것에 대해서? 하지만 우리의 연약함과 무지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우리가 별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작동하는 건 바로 우리 때문이니까. 이 고통스러운 세상을 행복하고 평화로운 것으로 바꿀 기회역시 우리에게 있다. 별들은 자력으로 스스로를 가두었기에 우리를 도울 수 없다. 그들은 그저 그물을 디자인할 뿐이다. 그들이 우주의 베틀로 날실을 짜면 우리는 거기에다 우리의 씨실을 엮어야한다. 문득 흥미로운 가설이 떠올랐다. 어쩌면 별들은 우리가 개를 보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를 바라볼지 모른다. 예를 들어, 우리는 때로 개에게 좋은 게 무엇인지 개보다 더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가죽끈으로 묶어 놓기도 하고, 쓸데없이 번식하지 않도록 불임 수술을 시키기도 하며, 아플 때는 치료받게하려고 수의사에게 데려가기도 한다. 하지만 개는 무엇 때문에, 어떤 목적으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우리의 결정을 따를 뿐이다. 어쩌면 우리 또한 그런 방식으로 별의 영향력에 굴복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럴 때도 인간의 감수성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 P293

불꽃은 빛의 근원에서 흘러나오고 가장 순수한 밝기에서 만들어진다고, 가장 오래된 전설은 이야기한다. 인간이 태어나려고 하면 먼저 불꽃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우주 공간의 암흑을 뚫고, 그 뒤에는 은하수를 통과하여 날아가다 마지막으로 여기, 지구로 떨어지기 직전에 그 가여운 불꽃은 행성의 궤도에 부딪힌다. 각각의 부딪힘으로 인해 불꽃은 특정한 속성에 물들고, 그렇게 점차 어두워지고 희미해진다. - P301

나는 꽤 오랫동안 ‘잿빛 작가‘가 한 말을 곰곰이 되새겨 보았
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내 이론 중 하나에 부합된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정신은 우리가 진실을 보는 것을 막기 위해 발달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로 하여금 그 메커니즘을 직시하지 못하게하기 위해서 말이다. 정신은 우리 주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있는지 우리가 절대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어 주는 방어 체계다.
우리 뇌의 용량이 어마어마하다지만, 정신의 주된 임무는 정보를 걸러 내는 것이다. 지식의 무게를 모조리 짊어지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모든 입자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 P309

호랑이가 동물원에서 탈출하지 않는 한 신문도, 티브이도 동물 따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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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말을 하면 많은 남자가, 심지어는 여자들도 겁을 먹고 화를 낸다. 이 야만적인 사회에서 여자들이 진실을 말하려면 전복적으로 말하는 수밖에 없으니까. 짓눌리고 억눌린 당신은 탈주하고 전복한다. 우리는 화산 같은 존재다. 우리 여자들이 우리의 경험을 우리의 진실로서, 인간의 진실로서 말하는 순간, 모든 지형도가 뒤바뀔 것이다. 전에 없던 새로운 산맥들이 생겨날 것이다.
-어슐러 K. 르 귄 - P11

나는 트랜지션tansition을 시작한 뒤에야 내가 일생 동안 영위해온 독립독행이 대체로 남성 특권에 따른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젊은 여성으로서의 삶은 나 자신을 재교육하도록 명령한다. 타인에게 의존하거나 도움을 청하는 행위를 나약하거나 한심한 일이 아니라 필연처럼 여기도록 길들여지는 것이다. - P19

공연이 있을 때는 반드시 클렌징 티슈를 챙긴다. 비교적 안전한 장소인 공연장을 떠나기 전에 서둘러 ‘얼굴을 지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마에 붙은 빈디bindi 를 떼어내 바람에 날려 보내는 밤이면 어느 때보다 커다란 슬픔을 느낀다. 마치 내게서 떨어져 나온 조각 하 나와 상징적 이별을 하는 것 같다. - P21

내가 남자들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은 일종의 연료다. 이 연료는 생존 본능으로서 내 몸을 보호하지만, 남용으로 이어져 내 몸을 좀먹기도 한다. 트랜스젠더로 커밍아웃한 뒤 나는 무수한 급성 통증과 반복사용 긴장성 손상 증후군repetitive strain injuries에 시달렸다. 하지만 어떤 의사도 이 증상을 설명하거나 치료하지 못했다. 그들은 의심 어린 눈길로 물을 뿐이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어디서 넘어진 것도 아니고? 그럴 때면 이렇게 답하고만 싶어진다. "제겐 사는 게 공포인걸요." - P22

심지어 오늘날 에도 (아무리 친구나 동료일지라도) 다른 남자들과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한다.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이 신뢰할 만한 단서를 제공한다는 말도 더 이상 믿지 않는다 (시각적 커뮤니케이션이 허용되는지조차 의문이다). 크루징cuising처럼 보이는 행동이 사실은 경멸일 수도 있다. - P37

프라이드 축제가 한창인 곳에서 나는 퀴어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이들은 네가 자행한 언어폭력을 목격하고 나를 비호한다. 그러나 프라이드 축제가 아니었더라면, 그래서 그 자리에 다른 퀴어들이 없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불과 일 분이 채 되지 않는 다툼이었지만, 너는 순식간에 나를 학습된 공포에 빠뜨린다. 이런 두려움의 감정이야말로 내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처럼 느껴진다. 트랜스들에게는 경계심을 풀고 숨을 돌리는 호사가 허락되지 않는다. 트랜스들은 ‘세계 최대 규모의 트랜스 행진‘으로부터 불과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조차 횡단 보도에서 마주친 생면부지의 타인을 함부로 만지는 변태로 취급당한다. - P56

너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짝사랑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너는 친구로 지내자는 내 제안에도 마침 새로운 친구를 찾고 있었다며 선뜻 태도를 바꿔주었다. 우리의 친밀감이 커져가도 너는 결코 선을 넘는 법이 없다. 너는 내게 은근히 어필하지도, 너에 대한 나의 감정이 달라지기를 기약 없이 기다리지도 않 는다. 너와의 우정은 어른이 된 내 삶에 최초라는 의미로 새겨진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의견을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환대받을 수도 있다고 느끼게 해준 남자는 네가 처음이니까. - P60

타인과 사랑에 빠지는 일은 공포를 유발한다. ‘사랑에 빠지다fall이‘라는 표현에서 엿볼 수 있듯 낭만적 사랑에는 언제나 일종의 낙하fall가 우선한다. 다른 사람과 연결되는 과정은 필연적으로 자기 자신을 고통이나 통제 불능에 빠뜨릴 가능성을 수반한다. 지금껏 나는 상처받을지 모른다는 위험에도 늘 기꺼이 사랑에 뛰어들었다. 내가 기존에 알고 있거나 느껴왔던 모습과 다를 때에도 마찬 가지였다. 친구들이 내 선택을 못마땅하게 여길 때조차 나는 마음 가는 대로 사랑을 향해 달려들었다. - P67

내가 남자들을 두려워하는 건 한 남자와의 이례적인 만남 때문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듯 나는 일상에서 매일같이 손상을 경험한다. 미처 말하지 못한 경험들도 존재하고, 앞으로 직면할 경험들도 엄연히 남아 있다.
내가 남자들을 두려워하는 건 이 같은 경험들로 인해 누적된 손상 때문이다.
내가 겪은 일들은 전혀 예외적이지 않다. 나는 내 이야기가 얼마나 흔해빠진 것일지 두렵다. 수많은 사람이 이보다 더 잔인한 남자들의 폭력을 견뎌왔다. 나는 또한 이 이야기들이 유발할 가장 보편적인 반응이 연민 일까 두렵다. 그러나 그보다 더 두려운 건 사람들의 관심을 자아내고 변화를 일으키려면 연민을 유도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 P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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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박쥐가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했다. 한 번만이라도 고원 위로 날아올라 박쥐의 몸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다.
박쥐의 감각을 통해 내려다보는 우리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그림자처럼 보일까? 전율하는 덩어리처럼 보일까? 아니면 소음의 근원처럼 느껴질까?


사실 박쥐들과 나는 공통점이 많았다.
나 역시 세상을 다른 구역에서 거꾸로 보고 있었다. 땅거미를 좋아하고, 밝은 햇빛 아래에서의 생활에 적합지 않다는 점도 박쥐와 비슷했다. - P201

학교에서 귀가하던 나는 그날따라 멀리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사실 내가 왜 우회로를 택했는지 잘 모르겠다. 선뜻 내키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가 묘하게 우리를 끌어당기는 그런 장소들이 있다. 그 ‘무언가‘ 중 하나가 아마 ‘두려움‘이 아닐까? - P203

자연 친화적인 드라이브보다는 전쟁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저 높고 튼튼한 유형의 SUV 자동차들을 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것들의 커다란 바퀴는 흙길에 깊은 자국을 남기고 오솔길을 손상시킨다. 또한 강력한 엔진은 강한 소음을 유발하고 다량의 배기가스를 배출한다. 나는 그 차주들이 분명 멍청한 인간들이며, 큰 차를 소유하는 것으로 자신의 모자람을 보완하고 싶어한다고 확신했다. - P204

훗날 빠르게 움직이는 행성이 불현듯 보이지 않는 어떤 지점을 통과하면서 여기, 아래쪽에 사는 우리가 미처 감지하지 못한 변화가 일어났다. 어쩌면 아주 사소한 징후들이 이런 우주적 사건들을 암시해 주었는데도 우리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오솔길 위에 놓인 나뭇가지를 밟기도 하고, 냉동실에 맥주를 넣어 놓고는 제때 꺼내는 걸 잊어버린 누군가로 인해 맥주병에 금이 가기도 하며, 야생장미 덤불에서 붉은 열매 두 개가 땅바닥에 떨어지기도 한다. 이 모든 것의 의미를 우리가 어떻게 전부 이해한단 말인가?
가장 작은 것 속에 가장 큰 것이 담겨 있음이 분명하다.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로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탁자 위에 행성의 배열, 나아가 우주 전체가 깃들어 있다. 온도계, 동전, 알루미늄 숟가락, 그리고 도자기 컵, 열쇠, 휴대폰, 종이 한 장과 펜, 내 회색빛 머리카락 중 하나의 원자에는 생명의 기원이, 그리고 세상에 그 시작을 부여한 우주적 재앙에 대한 기억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다. - P208

숲은 사람이 숨을 수 있는 가장 넓고 깊고 따뜻한 은신처였다. 나는 위로를 받았다. 거기서는 나의 가장 골치 아픈 증세, 그러니까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 마음껏 흘러내린 눈물이 내 눈을 씻어 시력을 밝게 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건조한 눈을 가진 사람보다 많은 걸 볼 수 있었다. - P214

알고 보니 평범한 그루터기 하나도 피조물들의 왕국이었다.
그 안에 복도와 방, 통로가 만들어지고, 곤충들의 귀한 알들이 보관되었다. 유충은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나는 그들이 나무에게 보내는 무한한 신뢰에 감동받았다. 그들은 나무라는 거대한 미동(微動)의 생물체가 본질적으로 매우 연약하고, 사람들의 의지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 한 채 자신들의 삶을 온전히 나무에게 맡겼다. - P222

"자연의 관점에서 볼 때는 그 어떤 생물도 유용하거나 무용하지 않아요. 그것은 그저 사람들이 적용하는 어리석은 구별일 뿐입니다." - P223

"이 물질을 나무토막에 문지르면 암컷 딱정벌레들이 알을 낳기 위해 달려듭니다. 주변의 모든 지역에서 바로 이 통나무를 향해 모여드는 거죠. 몇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서도 냄새를 맡을 수 있거든요. 몇 방울만 뿌리면 돼요."
"사람들은 왜 그런 냄새를 풍기지 않을까요?"
내가 물었다.
"사람들이 냄새를 안 풍긴다고 누가 그랬죠?"
"난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는데요."
"분명히 느끼고 있으면서도 당신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수도 있어요. 이봐요, 당신은 결국 인간의 자존심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자유의지를 계속 믿고 있나 보군요." - P225

대체 사람들은 비좁은 공간에서 어떻게 함께 생활하며 수십 년을 함께 보내는 것일까? 나는 궁금했다. 잠결에 자기도 모르게 서로를 밀치기도 하고 상대의 얼굴에 숨결을 내뱉기도 하면서 어떻게 한 침대에서 자는 걸까? 물론 내가 그런 경험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한동안 나는 천주교 신자와 한 침대를 썼다. 하지만 좋은 건 하나도 없었다. - P225

하지만 일을 마친 뒤, 작약이 조금씩 피어나고 있는 그의 집 마당에서 따뜻한 햇볕을 쬐며 앉아 있으려니 온 세상에 고운 금빛 층이 덮여 있는 것 같았다.
"살아오면서 어떤 일을 했나요?"
보로스가 느닷없이 물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한순간에 과거의 추억에 사로잡혔다. 내 눈앞에서 지난날의 기억이 넘실거리듯 펼쳐졌다. 기억 속의 모든 것은 실제보다 훨씬 좋고 아름답고 행복해 보였다. 이상하게도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 나이대 사람에게는, 자신이 정말로 사랑했고 진심으로 귀속되어 있던 장소의 대부분이 더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낸 장소들, 휴가차 들렀던 시골, 첫사랑을 꽃피웠던 불편한 벤치가 있는 공원, 오래된 도시와 카페, 집 들이 이제는 자취를 감춰 버린 것이다. 설사 외형이 보존되었더라도 알멩이 없는 빈 껍데기처럼 느껴져서 더욱 고통스럽다. 나는 돌아갈 곳이 없다. 마치 투옥 상태와도 같다. 내가 보고 있는 지평선이 바로 감방의 벽이다. 그 너머에는 낯설고, 내 것이 아닌, 딴 세상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그저 지금, 여기밖에는 없다. 모든 앞날이 미지수이고, 도래하지 않은 모든 미래는 공기의 미세한 떨림만으로도 쉽사리 파괴될 수 있는 신기루처럼 불투명하다. - P229

그에게도 증세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건강하다는 것은 불확실한 상태이기에 좋은 징조가 아니다. 조용히 병을 앓는 편이 낫다. 그러면 적어도 우리가 무엇 때문에 죽을지는 알 수 있으니까. - P235

"당신은 종교적인 사람인가요?"
나는 그에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네." 그가 자랑스럽게 대답했다. "저는 무신론자예요."
흥미로운 대답이었다. - P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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